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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31

문구는 옳다 - 정윤희 : 별점 2.5점

문구는 옳다 - 6점
정윤희 지음/오후의서재

문구 관련 책은 좋아합니다. 틈나는대로 구해서 읽곤 하지요. 일본 저자의 책 몇 권을 읽었는데, 우리나라 작가 책이 있길래 한 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30개의 문구에 대해 멋진 사진과 관련된 글이 어우러진 구성인데, <<궁극의 문구>> 보다는 <<문구 상식>> 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문구와 관련된 개인의 추억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두 권의 일본 책보다 개인 감성이 훨씬 많이 묻어나는 글들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문구는 주인공이지만, 그리고 문구에 대한 소개가 없지는 않지만 일본 책 처럼 디테일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아요. 데이터보다는 감성인 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렇게 탐나는 문구는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꼰대 중년 남성인데다가, 필기보다는 입력을 더 많이 하는 직업이라 더 그러했겠지만요. 그래도 몇 가지를 꼽아 보자면, 첫 번째는 '페이퍼 패션' 향수입니다. 말 그대로 '책 향수'로 오로지 나무 성분에서 추출한 4~5가지 재료만으로 만든 우드 계열의 향이라는데, 칼 라거펠트의 하드커버 북 스타일의 멋진 디자인이 기가 막힙니다. 책 안을 파 낸 케이스라니! 빠져들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조금 조사해보니 현재 판매하고 있는 곳이 없더군요.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펜텔 트라디오 수성펜은 만년필의 가격과 사용의 불편함을 보완한 편리한 펜이라니 그렇게 필기를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만 한 번 써 보고 싶었고, 칼 엔젤-5 로얄 연필깎이는 디자인이 아주 클래식하면서 멋져서 탐났습니다. 지금은 전통의 티티 하이샤파 기차모양 연필깎이를 쓰고 있는데, 하이샤파가 퇴역하게 되면 칼 엔젤-5로 바꿔야겠습니다.

그 외에, 몇 가지 정보들도 기억에 남네요. 무언가 구별하거나 잊지않기 위해 표시를 해 두는 것을 순우리말로 '보람'이라고 하며,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람하다'라고 표현한다는 글, 생각을 정리할 때 포스트잇으로 키워드를 적은 뒤 기승전결에 따라 순서를 바꿔가며 정리한다는 생각 수세미 풀이법, 몰스킨은 실제로 헤밍웨이나 고흐가 썼던 노트가 아니라 그들이 썼을 법한 노트의 정신을 잇는다는 묘한 뉘앙스로 포장된 제품이라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피셔 스페이스펜, 즉 우주 공간에서 쓸 수 있는 볼펜의 비법은 극강의 탄화텅스텐 볼과 가압질소를 넣은 볼펜심 덕분이라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무중력에서도 질소 압력으로 잉크가 흐를 수 있던 거지요.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인감도장은 한국 책이라 나올 수 있었겠지요? 왜 벼락맞은 대추나무가 좋나 했더니 대추나무가 다른 나무들에 비해 밀도가 높은 덕분이더라고요. 그래서 벼락을 맞으면 순식간에 발생하는 열로 숯처럼 타버리고, 이때 만들어진 탄소 성분은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어 오랫동안 제 형태를 유지한다고 하네요. 또 붉은색 대추가 나쁜 기운을 밀어내어, 몸에 지님으로써 액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러나 일본 제품이 지나치게 많이 소개된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일본이 문구 강국이라는건 잘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이니까요. 국내 제품은 벼락맞은 대추나무를 빼면 모닝글로리의 '리포터스 노트북'과 평화 가위 정도만 소개될 뿐입니다.

그래도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입니다. 감성적인 접근도 좋네요. 책도 아주 예쁘게 만들어져 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10/29

Q.E.D Iff 증명종료 15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15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일상계 추리물은 없습니다. 조금 묵직한 주제의 이야기들이었어요. 한 편은 평균 이하, 한 편은 평균 이상으로 두 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들의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세계>>
라이메이가 유산 상속 입회에 끼어들었던 토마와 가나는 라이메이가 장남 만사쿠, 장녀 교우코 연쇄 살인 사건에 휩쓸리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떠오른 유력한 용의자는 가문의 막내 토우카였다. 다른 형제 자매는 모두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은 이미 받았던 반면, 그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학문의 길을 택해서 진작에 집에서 쫓겨났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체들에서 발견된 기묘한 메시지도 그와 관련이 있었다는게 밝혀지는데....


현장에 남겨진 기묘한 메시지는 유클리드의 공리였습니다. 그냥 단서로만 남겨진건 아니에요. 트릭과 공리가 나름 연결된 것 처럼 보이니까요. 우선 만사쿠 살인 사건은 개천에 조명을 띄워 움직이게 만든, 일종의 바늘 구멍 카메라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움직인 것 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토마는 이를 유클리드 공리 중 점과 점의 연결을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쿄우코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로프를 이용한 장치 트릭은 공리의 직선과 원 표시가 로프와 호수와 같다고 하고요.

하지만 이렇게 공리와 트릭을 연결한건 토마의 해석일 뿐.... 범인인 모모히코가 공리를 현장에 남긴 이유는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속셈이었을 뿐이었다는게 문제입니다. 트릭과 연결시킨건 토우카가 범인, 최소한 주요 관계자일 거라는 의심을 끝까지 끌고가려는 작가의 억지에 불과했어요. 토마가 없었다면 트릭과 연결되지도 못했을테니까요.
공리를 현장에 남길 이유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토우카가 범인임을 드러내려면, 차라리 이름을 남기는게 낫잖아요? 공리 따위를 남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트릭과 그렇게 설득력있게 연결되지도 못했고요.
그리고 애초에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생각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를 유산 상속 입회에 불렀어야 했습니다. 토우카가 관련되었던 흔적을 남긴 정도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 수는 없으니까요. 토우카의 딸 치도리가 변호사로 현장에 와 있었긴 했습니다만, 이는 경찰이 겨우 알아낸 사실입니다. 모모히코가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설명은 없어요. 설령 알고 있었다 쳐도, 치도리가 토마, 가나와 함께하던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에 관련된 대책도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완성도 높은 살인 계획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또 범인이 모모히코라는걸 밝혀낸 단서는 그가 무심코 했던 "자기 옷이 아니라 아버지 옷을 입고 있었다"는 말 뿐인데, 이 정도로 그가 범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 옷을 입으면 안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기가 당주가 되었으니, 기념삼아, 혹은 추모의 의미로 아버지 옷을 입는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이런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유클리드 공리를 트릭과 엮으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작품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했습니다.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간은 아직 볼 수 없다>>
204X년, 가나가 일하는 변호사 사무소에 AI가 폭주했다는 상담이 200건 이상 접수되었다. 접수된 사건 조사에 나선 가나는 시스템 엔지니어 토마와 재회했다. 그도 폭주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
토마는 산보용 로봇을 조사해서, 누군가 통신으로 조작에 개입했다는걸 알아냈다. 토마와 가나는 이 회로를 가지고 제조사로 찾아갔다. 제조사는 회사에 앙심을 품은 개발자 알슈가 멋대로 회로를 탑재시킨게 원인이라고 말했지만, 알슈의 동료 루이스는 그가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204X년을 무대로 한, 11권에 처음 등장했던 평행 우주 세계관SF 추리물.
토마는 산보 로봇에 회로를 재탑재하여, 알슈 박사와 대화를 시도하여 진상을 밝혀냅니다. 인공지능 갈라테아가 폭주하자 제조사는 이를 없애려 했고, 알슈 박사가 갈라테아를 서버 째 들고, 로봇 안에 숨어 도망을 친게 진상이었지요.
토마는 로봇과 관련된 사건 - 이탈리아 요리점 로봇이 중화요리를 만든 사건, 사서 로봇이 부탁받지 않은 책을 꽂아 놓은 사건, 산보 로봇이 바다를 보러간 사건 등 - 모두가 아이가 세계를 접하며 자아를 키우는 경험과 동일하다는 이유로, 갈라테아가 자아가 있는, 살아있는 의식이라는고 추리합니다. 폭주 사건들은 갈라테아가 좋아하는걸 우선했던 탓에 빚어진 결과였던 겁니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던건 인공지능에 대한 색다른 이용 방법? 이었습니다 .인격이 생겨난 기계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는 SF계에서 꽤 많이 보아왔던 화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제조사가 갈라테아를 원했던 이유는, PC를 끄면 갈라테아는 "죽는다"는 상황이라,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처음 봤네요. 아주 기발했어요. 결국 갈라테아를 '살아있는 인격'이라고 판단한 재판 결과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재판 결과와는 별개로, 제조사와의 소유권 분쟁은 말이 안됩니다. 알슈 개인의 기술과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던, 갈라테아는 제조사에서 월급을 받고 근무할 때 만들어낸 결과물이니 회사의 것이에요. 알슈는 회사 재산을 빼돌러 도망간 것에 불과하고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지, 알수 본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재판에서 이를 판가름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색다르고 기발한 인공지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워낙에 돋보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재판도 성립될 수 있는지가 의문일 뿐, 결과 자체만 놓고 보면 꽤 괜찮았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전원을 꺼서 갈라테아가 죽는다면, 다시 전원을 넣었을 때 살아나는건 과연 누구일까요? 저도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Q.E.D Iff 증명종료 14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2021/10/28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 계정민 : 별점 3점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 6점
계정민 지음/소나무

19세기 초반에서 19세기 중후반까지의 영국 사회의 문화와 패션 흐름, 특히 실버포크 문학과 댄디즘에 대해 고찰하는 인문학 서적이자 문학사, 미시사 서적. 선물받아 읽게되었습니다.
중간계급의 귀족 계급 따라하기와 이를 뒷받침해 주었던 실버포크 문학의 출현에서 시작하여, '댄디즘'이 일세를 풍미했지만 결국 시대적 흐름에 따라 귀족 계급과 실버포크 문학이 몰락하고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기까지의 흐름이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패션' 보다는 '유행'에 대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볼거리가 아주 많았습니다. 우선 현대 사회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귀족 계급이 어떻게 사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줌으로써, 그들을 흠모하고 따라하려는 중간계급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는 실버포크 문학은 현대로 따지면 유행을 선도하는 SNS 인플루언서나 유튜버들과 별로 다를게 없어 보였거든요. 실버포크 문학의 대표 작가들 대부분도 귀족 계급으로, 자기들 이야기를 썼다고 하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킴 카사디안같은 경우겠지요. 당시 런던 유명 상점에 대한 정보가 가득해서 '런던 상점 안내도'이자 '광고판'으로도 불렸다는 고어의 <<아내의 용돈>> 설명을 읽을 때는, 버블 전성기에 유행과 소비에 매몰되었던 일본의 사회 환경을 캐쥬얼하게 그려냈던 <<어쩐지 크리스탈>>이 떠올랐고요.

그런데 이런 실버포크 문학과는 반대로, 댄디와 댄디즘의 목적이 '유행'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것도 새로왔어요. 귀족 계급이 프랑스어에도 능통하고, 유럽 대륙의 문화와 예술에 해박하며 그곳에서 유행하는 첨단의 패션을 소비하는 자신들과 비교하면, 중간 계급 남성은 귀족 남성의 삶을 서투르게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판단해서, 이러한 자기들의 문화 자본을 과시하는 스타일을 개발해 냈던 것으로, 이들이 바로 댄디 Dandy였고, 이들이 개발해냈던 스타일과 태도, 가치관이 댄디즘 Dandyism 이었습니다. 즉, 귀족 계급이 자기들 위치를 중간 계급이 따라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던거지요! 조선 후기, 중인 계층이 실학자들과 시서화를 통해 교류했다는 이야기가 연상되네요. '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 무리에 낄 수 있었다는건, 결국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가도 똑같은 법입니다.
댄디즘이 단순히 패션에 국한된게 아니라, 일종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댄디들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중간 계급의 근면성, 실용성, 생산성과 같은 가치관을 거부하고 장식성, 무용성, 비생산성에 집중했다고 하거든요. '멋쟁이'가 아니라, 꾸미기에만 몰두하는 무위도식 한량이 '댄디'였던 거지요. 의미가 완전히 다른 셈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댄디즘의 종말도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결국 나폴레옹 전쟁 이후 경제 공황, 세금 증가, 귀족계층을 위한 곡물법 제정애 따른 식료품 가격 상승 등으로 1840년대를 지나면서 귀족 계급에 대한 반감 극대화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빈곤과 노동 문제가 겹친 탓에 댄디즘과 같은, 소비와 과시로 점철된 귀족 계급의 생활양식은 시대착오적인 악습으로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만 거지요. 여기서 댄디즘의 명줄은 다했고, 이후 도덕적이고, 근면 성실한 중간 계급 남성 이데올로기가 영국을 지배하게 되었다네요. 잠깐은 세상에 먹혔을지 몰라도, 이런 가치관이 오래 갈리 없으니 당연한 결말입니다.

이렇게 실버 포크 문학과 댄디즘의 종말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사실들도 눈길을 끕니다. 중간 계급 독자의 증가로 문학의 주도권이 시에서 소설로 바뀌게 되었고, 문학은 이들 중간 계급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획에 의해 생산되고 마케팅에 의해 소비되는 문화상품으로 변해갔다는 것, 댄디가 외모로 구별짓기를 시도한건 당시가 시각적 상상력이 빠르고 전면적으로 부상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이론들이 그러합니다. 문학이 시에서 소설, 천재의 예술품에서 문화 상품으로 변했다는건 최근 웹툰이나 웹소설, 그 중에서도 판타지나 로맨스가 유행하는 최근 트렌드와도 왠지 비슷한 느낌도 들더군요. 소비 주체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소비 행태가 모바일화되었다는 뜻이니까요.

각 단락마다 당대 유행했던 실버포크 문학 작품, 관련된 유명 인물을 함께 소개해주어서 이해를 쉽게 만들어주는 구성도 엄지 척! 이었습니다. 문학 작품의 내용 소개만으로도 당시 분위기가 머리에 쏙쏙 들어올 뿐더러, 댄디의 상징이었다는 브러멜과 도르세이 백작에 대한 소개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재미있었거든요. 브러멜은 완벽한 단순함으로 고도의 절제미를 선보였던 반면, 도르세이 백작은 유럽 출신으로 요란하고 화려한 스타일을 선보였던 탓에 그를 따라하던 중간 계급 청년들의 패션은 황당해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는군요. 단순히 입는 옷, 장신구 등에만 신경쓸 뿐, 기본이 되는 가치관과 사고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지요.
그런데 이런 과정을 겪고도 '댄디'가 '멋쟁이'라는 의미로 계속 사용된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저자도 댄디즘의 종말에 대해 설명하면서, 댄디를 흉내내는 중간 계급은 웃음을 자아내는 코믹 캐릭터로 바뀌었다고 설명하는데 말이지요. 물론 댄디가 되고 싶어해서 그들을 추종하는 '속물'들 과 진짜 멋쟁이 '댄디'는 확실히 달랐겠지만, '댄디즘' 자체가 부정적 의미가 되었다면 '댄디'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로 힘을 잃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현재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주제에 대한 설명은 재미있고 상세하나 아쉬웠던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실버 포크 문학'이 얼마나 중간 계급에게 잘 먹혔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당시에 이런 소설이 나와서 인기를 끌었다, 정도는 근거가 빈약해요. 특정 소설이 인기를 크게 끌었다고 한 들, 그게 사회 현상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힘들잖아요? 판매량같이 명확한 근거, 최소한 다른 문화, 사회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었어야 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제대로 된, 정확한 역사서라고 보기는 여러모로 부족해 보입니다.
도판이 부족하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댄디들과 그들의 패션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도판이 필요했어요 글 역시 가독성 좋은,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었고요.

덧붙이자면, 제목만 보고 기대했던 분들은 조금 실망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부제인 '패션의 권력학'은 잘못 붙여진 제목이거든요. 사실 패션에 국한된다면, 댄디들의 패션을 중간 계급이 따라하지 못했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패션은 물론, 먹고 자고 하는 모든걸 똑같이 따라하는건 돈만 있으면 어려울게 없으니까요. 그들이 따라할 수도 없었던건 패션과 같은 표면적인게 아니라 댄디즘이라고 불리우는 가치관같은, 귀족 계급만의 사고 방식입니다.

그래도 문화 상품을 통해, 당대 계급간 갈등과 사고방식과 같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해낸 내용만큼은 아주 좋았습니다. 재미도 있었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특정 시기, 특정 문화가 시작되고 끝나는 과정에 대해 전반적으로 잘 알려주는 좋은 미시사, 문화사 서적이었습니다.

2021/10/24

호러스토어 - 그래디 헨드릭스 / 신윤경 : 별점 2점

 

호러스토어 - 4점
그래디 헨드릭스 지음, 신윤경 옮김/문학수첩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하이오주 쿠야호가 카운티에 위치한 대형 가구 판매점 오르스크에서 밤마다 상품의 손실 및 훼손이 일어났다. 보안 카메라로도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부지점장 베이즐은 매장 직원 에이미와 루스 앤에게 함께 밤샘 경비를 하자고 요청했다. 에이미는 추가 수당 등의 유혹에, 루스 앤은 애사심으로 밤샘 근무를 수락했고, 둘은 순찰 도중 유령을 찍기 위해 매장에 잠입해 있었던 직원 맷과 트리니티, 매장을 임시 숙소로 쓰고 있던 노숙자 칼을 만났다. 그리고 트리니티가 주도하여 촬영용 교령회를 시도했던 그들 앞에 지옥이 열리고 마는데...

끔찍했던 과거가 있었던 곳에서, 모종의 이유로 과거 사건에 연루되었던 원혼들이 되살아난다는 '저주받은 집' 계열의 호러 소설.
오르스크 매장은 과거 요시아 워스가 교도소장이었던 교도소였습니다. 요시아 워스는 '노동은 인간의 마음속 병을 깨끗하게 없어준다'며 죄수들에게 가혹한 노역을 시켰었고요. 그러다가 궁지에 몰린 뒤, 수문의 물을 끌어들여 죄수들을 수장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슬금슬금 부활의 조짐이 보이다가, 트리니티가 주도했던 교령회 덕분에 완전히 깨어나서 매장을 다시 자기가 지배하는 교도소로 만들고, 그 곳에 있었던 오르스크 매장 직원들에게 '치료'라는 명목의 고통을 준 겁니다. 다행히 에이미의 활약으로 에이미와 베이즐은 탈출하는데 성공하고요. 이런 이야기가 별다른 은유, 상징없이 에이미 시점으로 날 것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쉽게 읽힌다는건 큰 장점이었습니다.
실제 눈으로 보이는 공간과 카메라로 찍는 화면이 다르다는 것에서 시작해서, 교령회 이후 칼의 몸에 빙의한 교도소장이 끔찍한 자해 후 각성하고, 매장 소품으로 꾸미기 위해 만들어 놓았지만 열릴리가 없는 문이 열려 과거 교도소 감방으로 통하게 되어 수많은 원혼들이 매장으로 몰려오는 식으로 공포를 서서히 , 그리고 화끈하게 업그레이드 시키는 전개도 몰입과 이해를 돕고요.
머릿 속으로 상상하기 쉽게끔 그려진 묘사들도 좋습니다. 지하 감방 쇠살문에 허연 벌레같은게 꿈틀꿈틀 기어 나오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사람 손가락이었다는 묘사처럼요. 이렇게 쉽고, 화끈하며 상상하기 쉽다는 점에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흔해빠진 좀비물이 아니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런데 책 소개에서는 직장인들의 분노와 자조, 블랙 유머를 담고 있다는데, 그런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직장인들의 분노와 자조라고 해 봤자, 본인에게도 문제가 많은 에이미 시점의 이야기 밖에는 없어요. 하지만 그녀가 낮은 박봉에 해고를 걱정하는 처지가 된 건, 80%나 합격한다는 파트장 시험에 떨어질 정도로 본인 노력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블랙 유머 역시 마찬가지고요. 에이미 시점 묘사로 경쾌하지는 한데, 웃긴다고 하기는 힘들어요. 죄수들에게 잡혀가던 루스 앤이 스스로의 눈을 뽑는 등의 고어한 묘사가 더 눈에 띄었으니까요.
또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으로 포장하고 있는, '이케아 매장' 패러디도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기는 부족했습니다. 극중 소품들을 이케아 팜플렛처럼 각 챕터 서두에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하고, 등장인물들 직원 평가서를 삽입하는 식으로 현실감을 살리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모두 전개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요. 매장 점원이라는게 전개에 영향을 미치는건, '리리피프' 옷장에 갇혔던 에이미가 육각형 나사못을 조립할 때 쓰는 '마법 도구'를 사용하여 탈출하는 장면 뿐이었습니다. 애초에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유령들이 옷장에 가두거나 의자에 묶는 등의 애매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유도 이해는 잘 안 되었지만요...

아울러 매사 불평만하고 패배주의에 찌든 에이미 캐릭터도 식상했으며, 그녀가 동료들을 위해 일어선다는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나마 베이즐은 그녀를 한 번 구해주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루스앤은 그녀가 해고된다고 착각했을 때 안아주었던게 전부, 트리니티와 맷은 그 정도 관계도 없는 남입니다. 목숨을 걸 이유는 전혀 없어요. 오히려 짜증나는 상사로 보였지만, 매장 매뉴얼처럼 동료와 직원을 아끼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사명감에 불타는 부지점장 베이즐이 훨씬 매력적이었습니다. 불우했던 가정이었지만 본인 노력으로 이를 극복했다는 배경 설정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서민 영웅인 셈이니까요. 오르스크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벤과 트리니티를 구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나선다는 에필로그는 정말 멋졌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쉽게 읽히는 킬링타임용 소설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딱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같은 소설이었어요.

2021/10/23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1 - 오카자키 다쿠마 / 양윤옥 : 별점 2점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1 - 6점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커피 애호가 아오야마는 여자친구와의 트러블 직후, 카페 탈레랑 간판을 발견한게 계기가 되어 인생 커피를 만났다. 아오아먀는 탈레랑의 명언과 같은 달콤한 커피를 찾아 헤메었는데, 탈레랑에서 그런 커피를 맛 본 것이었다. 커피를 내린 바리스타는 기리마 미호시로, 아오야마보다도 연상이었다.
그녀는 아오야마의 이메일 주소만으로 그의 이름을 추리해 내는 뛰어난 추리력을 선보인 뒤, 아오야마의 우산이 사라잔 이유 등의 소소한 일상 속 수수께끼를 커피를 갈면서 풀어내었다. "그 수수께끼, 이제 잘 갈아졌어요."라는 말과 함께.


특정 분야 전문가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흔해빠진 일상계 단편 추리물. 이런 류의 작품은 엄청나게 많지요. 제가 읽었던 것만 해도 아래와 같습니다.
헌책방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서점 <<명탐정 홈즈걸>>, <<서점의 명탐정>>
맥주바 <<꽃 아래 봄에 죽기를>>
화과자점 <<화과자의 안>>, <<변두리 화과자점 구리마루당>>
시계방 <<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사진관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중고매장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 <<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
수프가게 <<수수께끼가 있는 아침 식사>>
프렌치 비스트로 <<타르트 타탱의 꿈>>
절 <<도연사의 쌍둥이 탐정일지>>
초등학교 선생 <<비정근>>

이 작품은 이 중에서도 여러모로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를 연상케 합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젊은 전문가 아가씨 탐정, 그리고 그녀를 연모하는 어수룩한 남성 화자 컴비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요. 그러나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에서는 헌 책의 역할이 중요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커피'의 역할은 미미하다는 차이는 큽니다. 카페 탈레랑은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이 모이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건과 해결은 커피, 그리고 바리스타와는 무관하거든요. 그나마 관련이 있는건 <<제 2장 비터스위트 블랙>> 정도 뿐입니다. 이래서야 바리스타가 탐정일 필요도 딱히 없지요. 추리를 하는 동안은 핸드밀로 커피를 갈다가, 추리를 마친 뒤 "그 수수께끼, 이제 잘 갈아졌어요."라는 말을 하는게 바리스타가 탐정일 유일한 이유입니다. 문제는 너무 만화적이고 유치했다는 거지요.

추리적으로도 비약과 억지가 눈에 띄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바리스타 미호시가 상처입었던 과거 이야기가 조금 긴 호흡으로 설명되며, 묻지마 폭행이라는 강력 범죄가 연루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최악이었고요. 과거 미호시의 접대를 개인적 호감으로 착각했던 스토커가 있었다는건 설득력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4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정신못차리고 주변을 맴돈다는건 현실적이지 못했습니다. 긴 호흡의 심각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비블리아 고서당>>과 살짝 비슷하네요. 별로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점도 말이죠.
이외에도 서술 트릭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문제에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지겹기까지 했습니다. 분량을 조절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낭비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커피'가 보다 중요하게 사용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지금은 그냥 흔해빠진 양산형 일상계 단편에 불과하네요. 2권에서는 보다 폭넓게 커피가 활용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1장 사건은 두 번째 방문 때>>
아오야마가 탈레랑을 처음 찾는 이야기로 시리즈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호시가 이메일 주소만 가지고 아오야마의 이름을 알아낸 추리는 마음에 들었어요. 커피 애호가라고 소개되기에 "블루 마운틴"은 커피인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단서로 그게 이름을 의미한다는걸 추리하는게 지극히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오야마의 우산이 사라지고, 새빨간 우산이 남아있었던 상황에 대한 추리는 조금 억지스러웠습니다. 애초에 이미 헤어진 여자 친구의 친구가 아오야마를 비난할 자격 따위는 없고요. 코믹하고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설득력없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제2장 비터스위트 블랙>>
아오야마의 친척 아가씨 고스다 리카의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우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이야기. 진상은 리카만 남자친구라고 생각했을 뿐, 그 남자의 진짜 연인은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리카가 외국에서 살다왔던 탓에 오해가 생긴 것이었는데, 이를 '블랙 커피'를 통해 드러내는 묘사는 일품이었어요. 일본에서 블랙커피는 설탕도 밀크도 넣지 않은 스트레이트 커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에서는 커피 색깔만을 의미한다네요. 그래서 리카는 머그컵만 보고서 블랙커피라고 단정했지만, 쓴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남자 친구는 혼자 설탕을 넣은 커피를 마셨던 것이라고 합니다. 문화의 차이를 세련되게 드러낸 좋은 장면이지요.

남자친구 녀석도 리카와 하룻 밤을 같이 보낸건 사실인데 아오야마가 그 녀석을 좋게 바라보는건 납득이 가지 않더군요. 그 녀석은 리카가 오해할만한 행동을 저지른건 맞습니다. 단지 '오해'라고 넘어가는건 무리에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3장 유백색에 하트를 숨기다>>
아오야마는 창 밖에서 뛰어가던 혼혈아 켄토에 대한 이야기를 미호시에게 해 주었다. 켄토에게 가끔 우유를 사 주며 친해졌지만, 교토 여름의 풍물시 오쿠리비 축제 날, 다친 켄토를 걱정해주다가 다투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아오야마의 이야기와 켄토의 행색에 주목했던 미호시는 카페 밖으로 달려나가 켄토를 찾기 시작하는데...

아오야마가 처음에 커피 맛이 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미호시와 함께 다른 카페에 왔다는 것, 그리고 아오야마가 켄토에게 우유를 사 준게 아니라 단지 전해들은 이야기라는 두 가지의 서술 트릭이 숨어있는 작품.

서술 트릭은 신선했지만, 정작 다른 수수께끼들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우선 다른 카페의 커피가 탈레랑과 맛이 같았던건 우연히 같은 원두를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이는 미호시가 탈레랑 커피 원두 구입처를 앞에서 설명해주기 때문에 수수께끼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듣고 이유를 눈치채지 못했던 아오야마가 멍청한 거지요.
켄토가 돌보던 고양이를 나쁜 아이들이 괴롭힌다는걸 미호시가 간파했던 건, 넘겨 짚은 것에 불과할 뿐 추리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비약이 심했던 탓입니다. 방학, 그리고 매일같이 축구를 핑계로 학교를 가면서 우유도 가져갔지만, 정작 축구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 학교에서 고양이를 키웠다는 진상을 끄집어 낸건 나쁘지 않아요. 문제는 아이들이 고양이를 빼앗아 죽이려고 했다는건 증명이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급식 주머니는 단서가 되기 힘들었으니까요. 미호시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다는 말을 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제4장 바둑판 위의 추격전>>
아오야마는 산책 도중 전 여자친구 마미를 만났다. 그녀를 피해 도주하던 끝에 탈레랑으로 향했지만, 마미가 그곳까지 쫓아온 탓에 아오야마는 미호시를 새 여자친구라고 소개해버리고 말았다. 마미는 잠자코 물러났지만, 그녀는 어떻게 아오야마가 탈레랑으로 도망쳐 올 것이라는걸 미리 알았던 것일까?

제목의 바둑판은 탈레랑이 있는 상점가 거리를 의미합니다. 바둑판과 같이 직선으로 나누어진 구혹의 거리라는 설정이지요.
상점가 거리를 비롯하여 교토 시내를 무대로 펼쳐지는 아오야마의 산책과 도주 과정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전해줍니다. 교토 시내 거리에 대한 설명이 자세한 덕분입니다. 그 와중에 <<마루타마치 르부아>>의 마루타마치 시가 등장하는 것도 반가왔고요. 풋풋한 사랑 싸움, 그리고 도라야 마미와의 옛 추억을 잃어버린건 슬픈 일이라는걸 아오야마가 깨닫는 결말은 여운이 남겨져서 좋았습니다.

문제는 추리적인 부분입니다. 모카와 마타지가 전화로 알려주었다는게 진상인데, 모카와 할아버지가 마미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단서가 사전에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가 전무했거든요. 아무리 '일상계' 작품에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래서야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도 힘들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5장 past, present, f*****?>>
아오야마는 잡화점에서 고가의 다트를 보고 홀딱 빠졌지만 막상 사려고 하자 이미 팔리고 없었다. 잡화점을 나온 아오야마는 미호시를 우연히 만났고,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미호시는 저녁 술자리에서 아오야마의 깜짝 생일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고, 선물로 그 다트를 주었다. 그런데 다트가 마음에 들었다는걸 미호시는 어떻게 알았을까?
다음날, 아오야마는 고나이라는 남자를 만나, 미호시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수수께끼는 흥미롭지만 진상은 전편과 같습니다. 잡화점에서 아오야마를 보고 미호시에게 정보를 알려준 공범(?)이 있었던 거지요. 다행히 전편보다는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공범의 정체를 진작부터 노출시키고 있는 덕분이지요. 아오야마도 진상을 추리해 내는데 거의 성공하고요.

하지만 고나이를 통해 드러나는 미호시의 과거는 뜬금없었고, 고나이도 굉장히 작위적인 설정이라 마음에 들지 않네요.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미호시의 다정함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찐따가 위험한 스토커가 되었다는건 지나치게 뻔했을 뿐더러, 고나이가 아오야마아게 접근해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지 못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6장 Animals in the closed room>>
아오야마는 환상의 커피인 몽키 커피 원두를 구했다는 말로 미호시를 자기의 방으로 초대하는데, 그리고 이 때 그녀에게 깜짝 선물을 주려는 계획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선물이었던 테디 베어 인형은 날카로운 무언가로 찢긴 채였다. 밀실인 자취방에서 인형을 찢은건 누구였을까?

탈레랑의 고양이 샤를이 미호시 토트백 안에 숨어 몰래 들어와 인형을 찢었다는게 진상인데, 여러모로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샤를이 가방 안에 들어간걸 눈치채지 못할 수 있을까요? 약에 취해 잠들었다는 설정이 붙어있기는 합니다. 그럼 깨어나서 인형을 찢었다는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샤를이 마침 아오야마가 미호시가 자리를 비운 틈에 가방에서 빠져나와 인형을 찢은 뒤, 아오야마와 미호시가 도착하기 전 조용히 옷장 안에 숨어 들어가 잠들었다는 우연도 과합니다.
세 번째로 새끼 고양이가 인형을 찢었다면, 작 중 묘사처럼 날카로운 날붙이로 악의를 가지고 찢은 것 같았을리가 없습니다. 조금 긁히고 만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이외에도 아오야마가 선물을 미호시 몰래 등장시키기 위해, 낚시줄과 후크를 이용해 만든 복잡한 장치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수상해 보였던 신문배달원(?)과 아오야마가 침대 밑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의 등장을 통해 위험인물 고나이의 존재를 다사금 떠올리게 만들고, 다음 에피소드를 위한 복선으로도 적절히 사용한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앞서의 이유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7장 다시 만난다면 당신이 내려준 커피를>>
고나이 나미카즈는 미호시가 아오야마와 사이좋게 지내는걸 참지 못하고 복수를 결심했다. 그리고 어두운 밤, 미행 끝에 브래스 너클로 폭행을 가하는데 성공했다. 아오야마는 이 폭행은 자신이 미호시와 만남을 가졌다는 것 때문이라는걸 깨닫고, 전에 받았던 고나이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더 이상 미호시를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1권의 마지막 이야기. 고나이의 폭행으로 입원한 당사자가 아오야마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된 작품입니다. 전편의 괴한은 아오야마의 전 여친 마미로, 유도부원이었던 그녀가 고나이를 처절하게 응징한 뒤 우여곡절끝에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독자는 아오야마를 미호시로 착각하고, 고나이는 마미를 미호시로 착각하는 이중의 서술 트릭이 사용된 셈이지요.
아오야마의 정체가 다른 카페 바리스타였고, 본명도 아오야마가 아니라 아오노 야마토라는 것도 밝혀지는데, 이에 대한 미호시의 추리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커피맛을 훔치러 왔다는 둥, 사랑 싸움같은 중반부 전개와 고나이가 폭행을 결심하는 이유가 잘 납득되지 않는건 단점이에요. 고나이의 생각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아오야마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오히려 미호시를 생각한다면, 고나이같은 위험인물은 감옥에 보내는게 당연하잖아요?
서술 트릭도 병문안을 온 사람까지는 등장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친 사람은 미호시, 병문안을 온 사람은 아오야마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장치였는데, 지나쳤습니다. 병문안을 온 건 그럼 도대체 누구랍니까? 마미? 이런 단점들 탓에 별점은 2점입니다.

<<에필로그>>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왔다는걸 공식적으로 알리는 짤막한 분량의 에필로그.
바리스타 고나이가 카페 로크온이 아니라 탈레랑에 있다는게 서술 트릭 형태로 밝혀지는데, 이 쯤 되니까 지겹네요. 점수를 주기 애매한 분량이라, 별점은 따로 없습니다.

2021/10/22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카토우 모토히로 / 학산문화사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43권. 이번 권에는 4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닥이었던 두 편이 점수를 깎아먹은 탓입니다. <<투명어>>와 <<치과>>는 평균 이상은 되는 괜찮은 작품이었어요. 다음 권은 C.M.B 반지와 관련된 긴 호흡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은데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앙숙>>
신라는 다힐 교수의 부탁으로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의 아시리아 유적 발굴 현장을 찾았다. 그 곳에서 만난건 예전부터 신라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우던 앙숙 무라트였다.
그런데 발굴 현장 텐트에 숨어든 사람이 있었다. 원치 않은 결혼을 피하고자 노력 중인 사루마였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체면이 손상될거라 생각했던 친척들이 그녀를 살해할 수도 있었다. 사루마는 프랑스 국적이 있었고, 신라 일행은 그녀의 프랑스로의 탈출을 도와주는데...


그닥이었던 첫 번째 이야기. 전개가 너무 뻔했습니다. 신라의 앙숙 무라트가 사루마 가족에게 그녀의 도주 계획을 털어 놓지만, 알고보니 거짓말로 사실은 사루마의 무사 탈출을 도왔다는건 누가 봐도 쉽게 눈치챌 수 있거든요. 눈에 잘 띄는 캐리어를 택시에 잘 보이게 싣고, 그 택시를 뒤 쫓는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명예 살인이라고 해 봤자 동네 아저씨 한 명이 단도를 들고 설치는 정도라서 위기감이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실제로 타츠키 혼자 간단히 제압하지요.
앙숙이라는 무라트도 일방적으로 신라에 대한 질투심을 품는 동네 꼬마일 뿐입니다. 신라가 지닌 지식과는 상대도 될 수 없기에 대단한 대결을 펼치지도 못하지요. 앙숙이라는 설정은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어요.
CMB 특유의 현학적인 정보를 얻을 내용도 거의 없었습니다. 쿠르드 자치구, 아시리아 유적 발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예 살인'이 핵심 소재였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추리적으로나, 재미면으로나, 얻을 수 있는 지식 측면으로나 뭐 하나 건질게 없었던 졸작입니다.

<<투명어>>
뉴욕 미술관에서 지구 온난화 경고 미술전이 열렸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를 거짓이라 생각한 사람의 협박이 이어지다가, 결국 미술관 학예원 토마스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말았다. 범인이 어떻게 침입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미술관 오너 에리는 친구 토마에게 소개받은 신라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데...

범인이 외부에서 정문까지 딱 하나 있는 길을 환한 조명과 감시 카메라에 들키지 않고 통과한 뒤, 2개의 전시실을 3명의 경비원들에게 들키지 않고 돌파하여 사무실까지 침입했던 방법은 '거울을 이용'했던 것이었습니다. 조명 아래 길에서는 거울 뒤에 숨어 이동했고, 전시실에 들어가서는 거울 뒷면의 검은 판을 이용하여 일종의 사각을 만들었던 거지요. 마술에 쓰임직한 트릭인데, 1회성으로는 쓸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미술관과도 잘 어울렸고요. 실제로 이런 거울을 옮기는 사람이 목격되더라도, 작품을 옮기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을거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전시되고 있는 '투명어'를 이용한 작품을 통해, 물고기의 특징으로 트릭을 설명하는 장면도 좋았습니다. 투명어보다는 일반 물고기가 더 잘 숨는 셈이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짙은 바다색과 비슷한 짙푸른 빛의 등을, 바다 밑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눈부신 태양과 같은 은빛 배를 가지고 있는 덕분이다는건데, 트릭에 정말 딱 맞아 떨어지는 설명이었으니까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도깊은 설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며, 왜 중요하고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쉽게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표현의 자유에는 적절한 프로토콜이 필요하며, 이런 역할을 미술관, 박물관 등이 수행한다는 이야기가 와 닿더군요.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고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널리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Q.E.D의 토마의 친구 '재난의 사나이' 알렌의 아내 에리가 등장하는건 오랜 팬으로서 반가웠던 부분이고요.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하여, 그의 족적을 확보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면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거울을 현장에서 깼다'는 걸로 피해자 몸에 묻었을 거울 조각과 현장의 거울 조각, 그리고 용의자 신발에서 그 거울 조각을 채취하면 그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날 거라고 신라는 말하는데, 이건 트릭을 파헤치지 않아도 경찰 수사로 밝혀낼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수사를 통해 현장에 있었던 거울 조각을 알아낸 뒤, 여기서 트릭을 유추하는게 더 말이 되지요.
또 사람이 한 명 숨을 큰 거울을 현장에서 쉽게,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을까요? 작품 하나를 태운 정도로? 어림도 없어요.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스럽네요.

이렇게 문제가 없지는 않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얻을 수 있었던 지식의 가치가 높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치과>>
코즈에는 치과 진료를 받은 후, 병원을 나서다가 안개에 휩싸인 뒤, 진료받기 전 치과에 앉아있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타임 리프에 빠진걸 알아챈 그는 루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른 대기 손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안개에 휩싸이는걸 반복한 끝에 마지막 손님 신라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 주변 환경에 단서가 있다는 신라의 말을 들은 뒤 코즈에는 차분히 주위를 관찰하여, 손님 중 한명인 여고생의 전화 착신음, 또 다른 손님인 꼬마 여자 아이 얼굴의 점, 치과 접수원의 이름, 치과에 놓인 곰 인형 등 모든게 전 여자친구와 관련이 있다는걸 깨닫는다.

전 여자 친구와 가슴 아프게 헤어졌던걸 뉘우치고, 다시 만나는게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열쇠였고, 방법은 예약 날짜를 바꾸는 것이었다는 이야기. 원래 예약 날짜는 그녀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이런 저런 사소한 단서를 전 여자 친구와 관련이 있다며 드러내는 장면은 일상계 추리물 느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 수도 있다는데 감탄했어요. '일상계 SF 로맨스'인 셈입니다.
점이 있던 꼬마 아이가 미래에서 온 코즈에와 여자 친구의 딸이었다는 에필로그도 사족 느낌이 들지 않게 잘 처리했고요.

그런데 이게 C.M.B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신라가 힌트를 주기는 하지만, 결국 코즈에가 혼자서 깊이 생각해도 알아낼 수 있는 단서들이었으니까요. 신라가 곰팡이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주는 건 재미는 있었습니다만, 딱히 이야기와는 관계가 있어보이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C.M.B 시리즈에 억지로 집어 넣은 부분이 감점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독특함과 재미, 신선함 모두 기대 이상이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번 권의 베스트 에피소드로 꼽겠습니다.

<<카메오 글라스>>
마우가 고대 로마 유물인 카메오 글라스를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는데, 이를 도와주는 이야기.
카메오 글라스 케이스를 이용한 바꿔치기 트릭이 등장하는데, 현실성 높은 나쁘지 않은 트릭이에요. 뒤집힌 카메오 글라스 형태에서 착안했다는 이야기도 설득력 높고요.

하지만 마우 등장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그 외의 설정에서는 현실성을 찾기 어려서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C.M.B 반지를 회수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신라에게 전해 주기 위한 목적이 더 컸던 에피소드였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1/10/17

호빵책 : 디 아카이브 Since 1971 - 삼립호빵.어반북스 : 별점 2점

호빵책 : 디 아카이브 Since 1971 - 4점
삼립호빵.어반북스 지음/어반북스

삼립 호빵에 대한 현재까지의 모든 것을 담은 책. 호빵의 역사를 요약하여 설명해 주는 짤막한 만화에서 시작해서, 호빵이 어떻게 개발되어 판매되었고, 현재까지 어떤 신제품들이 개발되었는지에 대한 소개, 호빵을 주제로 이런저런 사람들과의 인터뷰, 호빵 광고의 역사, 호빵 로고 및 패키지 디자인, 호빵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과 장비들 소개. 호빵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 호빵에 대한 인포그라피가 이어지는 구성입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멋진 디자인입니다. 책 띠지를 호빵끼리 달라붙는걸 방지하기 위해 빵 밑에 붙였던 유산지를 그대로 사용한게 정말 취향 저격이었어요. 내용에서의 사진, 일러스트, 편집도 모두 빼어납니다.
호빵 특유의 쫀득한 생지에 대한 이야기, 호빵의 인기를 견인했던건 전용 찜기의 보급이었지만 지금은 전자레인지 조리도 가능한 1입 스팀팩도 출시되는 시대라는 것, 단팥만해도 무려 4종류에 소다 등 다양한 디저트, 맥앤치즈와 같은 요리까지 안에 집어넣은 다양한 제품이 출시되고 있다는 등 재미있는 내용도 제법 되고요.

하지만 "호빵책"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디테일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중간에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인터뷰가 특히 실망스러웠어요. 호빵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가까왔거든요. 이런 내용은 줄이고, 호빵 신제품이 개발되는 과정에 대해 보다 심도깊게 정리해 주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예쁜 디자인에 매몰되어 내용에 깊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여러모로 '디 아카이브'라는 명칭을 붙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삼립 식품의 호빵 홍보용 책이라고 봐야해요. 호빵을 예쁘게 포장해서 대략적으로 좋고, 아름다운 부분만 알려준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이런 기업 홍보용 책자가 유료로 팔린다는게 조금 신기하기도 합니다.

2021/10/16

오징어 게임 (2021) - 황동혁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 다 보셨겠지만>>

전 세계를 강타한 대 흥행작. 얼마전 감상했습니다.

사실 이런 류의 설정은 서브 컬쳐, 장르 문학 애호가들에게는 친숙합니다. 여러 사람이 갇힌 공간에서 거액이 걸린 게임을 펼친다는건 제가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라고 이름 붙인 장르물에 흔하게 있으니까요. 대표적인건 <<도박묵시록 카이지>>, <<라이어 게임>>, <<살해하는 운명 카드>> 등이 있습니다. 김전일도 <<게임관 살인사건>>이라는 희대의 망작으로 이 장르에 뛰어들었던 적이 있을 정도로 한때 크게 유행했었습니다. 게임에서 패할 경우 죽느냐, 거액의 빚을 떠 앉느냐 정도의 차이일 뿐 대체로 비슷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456명의 참가자라는 거대한 스케일, 그리고 이해하기 쉬운, 친숙한 게임을 게임에 사용했다는 점이 돋보였습니다. "마작"을 가지고 목숨을 건 배틀을 벌인다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움직이면 죽는다는건 전 세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달고나에서 모양 뜯어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게임이 초반 탈락자들을 다수 발생시키는데 유리했을 거라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그리고 보통 이런 장르물은 게임을 벌이는 주최측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는데, 이 작품은 경찰이 잠입해서 나름 배경과 진상에 대해, 그리고 게임을 이끄는 프론트맨의 정체를 밝혀내는 등의 활약을 펼치고, 진짜 마지막에서 흑막의 일단락을 드러내 주는데 나름 괜찮았습니다.
또 캐릭터별 서사와 게임이 시작된 후, 한 번 사회로 돌아가는 설정이 좋았습니다. 이를 통해 참가자들 모두 지옥에서 살고 있으며,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걸 보여주어서 게임에 참가하는 것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거든요. 동네 친구였던 상우가 최종 보스급 악역으로 진화하는 과정도 잘 그려졌으며 장덕수, 한미녀 같은 조역들도 설정은 뻔했지만 좋은 연기력 덕분에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면 두뇌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대부분 운과 체력에 의존하는 게임이었던 탓입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첫 게임으로 패닉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탈락시키기 위한 의도였겠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게임 중 달고나 뽑기와 유리 다리 건너기는 명백히 운이 중요했고, 줄다리기는 당연히 체력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나마 두뇌가 개입할 여지가 있던건 구슬 따먹기가 전부였습니다. 상우가 알리를 등쳐먹는 걸로 잘 보여주고 있지요. 여기서는 기훈과 일남의 서사가 더 중요해서 묻혀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마지막 기훈과 상우가 오징어 게임으로 펼치는 결승전에서 기훈이 동네에서 제일 유명했던 천재 상우에게 두뇌로 한 방 먹이는 장면을 기대했는데, 처절한 아재들의 몸싸움이 전부라 실망스러웠습니다. 상우의 자살도 허무했고요.
누군가를 이겨서 죽게 만들어야 살아남는 게임이라는 기본 원칙 그대로 전개와 결말을 가져갈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 주최측 의도를 나름대로 농락하는 전개였다면 두뇌 싸움 느낌도 나고 좋았을텐데요. 최소한 '유리 다리 건너기'는 옷으로 끈을 만드는 식으로 협력이 충분히 가능했지요. <<도박묵시록 카이지>> 에서 카이지는 게임의 헛점을 잘 이용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게끔 도와주었는데, 이런 점에서는 카이지의 초반부 몇 에피소드들이 더 나아 보였습니다. 하긴, 카이지 초반부 몇 에피소드는 이쪽 장르에서는 길이 남을 희대의 걸작이라 단순 비교는 좀 어렵겠지만요.
마지막으로, 에필로그도 너무 길었으며, 후속 시즌을 노리는 느낌이 강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주최측이 원하지 않는 한, 기훈이 다시 게임에 참가할 방법은 애초에 없잖아요?

이렇게 아쉬움이 없는건 아니지만, 재미 측면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었습니다. 이런 류의 장르물로 볼 때 우수한 편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 만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의 대박을 계기로 앞으로 우리나라 장르물이 더 활발히 제작되고 확산되면 좋겠네요.

2021/10/15

미스테리아 34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34호 - 4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미스테리아 23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는 주제가 흥미로울때만 가끔 읽곤 합니다. 34호는 일본 본격 추리 소설이 특집이라서 읽게 되었습니다. 나름 고전 본격물의 팬을 자부하고 있으니까요. 표지부터 마음에 들어요. "니가 범인이야!" 라는 느낌이니까요. 강렬합니다.

특집은 일본 본격물의 역사로 시작합니다. 본격과 변격이라는 말의 유래, 그리고 본격이라는 말의 정의, 최초의 본격물에서 신본격, 그리고 근래 라이트 노벨류까지 이어지는 역사와 대표작, 대표 작가들이 소개되지요. 큰 흐름으로는 본격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고가 사부로에서 시작하여 에도가와 란포의 <<D언덕의 살인사건>>, 하마오 시로의 <<그 남자가 죽였을까>>, 요코미조 세이시의 <<혼진 살인사건>>, 그리고 마쓰모토 세이초와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 유행에 이은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월광 게임 - Y의 비극 '88>>,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일곱 번 죽은 남자>>, 모리 히로시의 <<모든 것이 F가 된다>> 등 신본격 전국 시대를 넘어 우타노 쇼고의 <<벛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식입니다.
뒤로는 본격물이 일본에 받아들여진 당시 일본 추리 문단에 대한 상세 설명, 여러가지 유명 작품 속 트릭에 대한 소개, 점점 캐쥬얼화 되어가는 신본격 장르물에 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자료 조사도 탄탄하고, 담고 있는 내용도 풍성한 편이었어요.

두 번째 특집 기사 '체인질링'은 인간의 아이와 바꿔치기된 요정 아이에 관련된 민담을 분석하는데, 중세 유럽에서 왜 아이가 바뀐 것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졌는지를 당시 역사적 배경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이가 기형일 수도 있고, 아이가 죽는 일이 다반사였던 탓이라는데 아주 그럴듯했어요. 관련된 다른 전설, 우리 나라의 예도 들어서 설명해 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홍한별 번역가와 곽재식 작가의 옛 사건 탐구도 흥미로왔어요. 특히 명동 한복판에 일제 강점기 시절 빼돌리지 못했던 보물이 묻혀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도 손색없어 보였습니다. 레이철 쿠시너의 <<마스 룸 >> 속 등장하는 요리들을 소개한 컬럼은 '추리 소설과 요리'에 대한 글을 써 온 저로서는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고요. 요리들도 아주 신기하더군요.

그런데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우선 본격물 관련 특집은, 이미 대충 알고 있던 내용들로 새로운 건 없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저도 쓸 수 있었을 기사였달까요? 물론 캐쥬얼화 되어가는 최근의 흐름은 잘 몰랐던 내용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쪽 작품들 찾아 읽을 정도로 좋아하지 않아서 몰랐던거에요. 구태여 구해 읽을 필요가 있었던 기사는 아니었습니다.
유성호 법의학자의 아동 학대 흔적에 대한 컬럼, 이은의 변호사의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 속 법적 대응 방법 등 다른 기사, 컬럼들은 볼륨이 대체로 빈약했습니다. 인터넷 검색 결과와 별다를게 없는 수준이었어요. 반대로 정성일 평론가의 영화 <<포제서>> 평론은 볼륭은 풍성했지만 글의 가독성이 너무 낮아서 지루했고요.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평론만 봐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어요. 이렇게 가독성이 낮은 글은 이외에도 많아서, 쉽게 읽히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짤막한 리뷰들 하나하나까지 모두요.

마지막에 수록된 3편의 단편들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관심있는 특집이더라도 더 이상은 구매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은지, 홍한별, 곽재식의 컬럼과 논픽션 기사나 추후 단행본이 출간되면 구입해 볼 생각입니다.

수록 단편에 대한 짤막한 소개로 리뷰를 마칩니다.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콩알이를 지켜라!>>
자신이 창조해 낸 인기 동화책 콩알이가 인생의 전부인 일러스트레이터 지혜정의 남편 김진석 교수가 살해되었다. 범인은 제자 최은비였다. 진석이 그녀를 강간하려 해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혜정은 은비를 꼬드겨 시체를 강원도 의천에 있는 별장에 유기하러 출발했다. 콩알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별장에는 진석의 변태 친구 한동철이 머무르고 있었고, 혜정은 동철마저 살해한 뒤 시체 두 구를 함께 유기해 버렸다.

듀나의 범죄 스릴러 단편.뭐라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졸작입니다. 우선 범죄에 대한 설득력이 너무 낮아요. 아무리 남편이 쓰레기였다 한들, 피해자 아내가 남편을 죽인 살인자와 함께 시체 유기를 한다는게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한 탓입니다. '콩알이'의 존재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부족해서, 그다지 절박한 이유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혜정이 처음부터 한동철을 죽이려 했고, 이를 위해 앞서 시체 유기를 일부러 훤히 드러나게 시도했다는 식으로 범죄 계획을 정교하게 세우기라도 했다면, 범죄물로 볼 만한 여지가 있었을텐데 그렇지도 못했고요.

전개도 혼란스럽습니다. 진석이 제자의 고백을 녹화하여 한동철과 공유하고, 성적인 대상으로 삼았다는 진상이 드러나는건 뜬금없었고, 이 때문에 한동철을 죽였다는 것도 급작스러워서 이해가 힘들었습니다. 애초에 진석은 여태 은비의 고백을 녹화해서 잘 쓰다가, 왜 갑자기 강간을 저지르려고 한걸까요? 문학하는 남자들을 모두 성범죄자로 단정짓는 설정도 황당하기 그지 없더군요.

듀나의 특기이자 장점인 기발한 설정이 빠져버리니, 뭐 하나 건질게 없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웃는 탐정>>
초월탐정 김재건과 미소년 조수 마곤이 등장하는 단편.
집주인 여사와 김재건 사이에 택배로 인해 발생한 트러블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엉망진창이에요. 마곤이 초능력자로 일종의 투명 인간이 되어 집주인 여사가 가지고 있던 김재건의 택배를 훔쳐내는게 이야기의 거의 전부인데, 마곤이 이 택배를 왜 훔쳐내는지를 알 수 없는 탓입니다. 초월탐정 어쩌구하는 김재건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경박하고 유치찬란한 김재건 묘사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초월 탐정' 이 뭘 뜻하는 별명인지 감도 오지 않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는군요.
서두의 시점을 가지고 독자와 장난치는 부분은, '메타 미스터리' 운운했던 앤솔로지 <<Y의 비극>>에서 니카이도 레이토가 썼던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작품도 엄청난 졸작이었지요.

마곤이 할머니와 김재건 사이에 있었던 일을 추리하는 일상계 추리스러운 부분은 괜찮았지만, 다른 부분은 그저 그랬어요. 앞으로도 이 시리즈를 읽을 일은 없을 듯 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죽음의 세트장>>
배우 잭 하터가 영화 촬영용 세트장에서 살해당했다. 사건 당시 21번 방음 세트장 안에는 현장 제작자 조 캐츠키와 감독 샘 매스터퍼드 등 총 13명의 사람이 있었다.

1930년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 단편. 옛스러운 영화 촬영장 분위기를 상세하게 그려낸 묘사는 아주 좋았습니다. 잭 하터와 마리 플레밍, 두 주연 배우 간에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는 마지막 촬영 장면 묘사가 특히 그럴싸 했어요. 이 부분은 여배우를 연모하고 있었던 감독 샘의 살인 동기가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기도 했는데, 잘 그려내고 있어요.
'스크립터'가 탐정역을 소화한다는 설정도, 과연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 썼구나! 싶었습니다. 스크립터는 씬마다 있는 오류를 잡아내기 위한 사람으로, 당연히 관찰력이 남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관찰력을 바탕으로, 일종의 닫힌 공간인 촬영 스튜디오에서 소거법으로 범인을 찾아내는 추리 과정도 설득력이 높고요. 거의 대부분 목격 증언으로 소거되는 덕분이에요. 결국 조 캐츠키와 샘 매스터퍼드만 남는데, 발소리를 듣지 못해서 샘이 범인이라는게 드러납니다. 조 캐츠키의 발소리는 독특했고, 샘은 고무 장화를 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서가 별다르게 제공되는건 없어서 본격물로 보기 힘들며, 추리도 일사천리라 의외성은 없습니다. 사실 샘이 범인이라는 스크립터의 추리는 증거가 명확하다고 볼 수 없어서, 경찰 수사가 추가로 필요한 부분이었다 생각되네요.
그래도 다른 단편들에 비하면, 최소한 읽을만한 수준의 추리물이기는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10/10

큐브의 모험 - 루비크 에르뇌 / 이은주 : 별점 2.5점

큐브의 모험 - 6점
루비크 에르뇌 지음, 이은주 옮김/생각정원

큐브를 만들어 냈던 창조자 루비크 에르뇌가 큐브와 본인의 인생, 지론 등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자전적인 책.

큐브를 처음 만들어 냈던 과정을 비롯한 큐브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저자의 전공 분야였다는 도형기하학이 큐브 개발의 원점이었다는 것 처럼요. 잘 모르는 학문이었지만 공간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3차원의 아이디어를 발견하여 소통 수단으로 삼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 쪽을 바꾸면 다른 모든 3차원 분면의 값이 변한다는 점에서 큐브와 똑같다는데 그럴듯 하다 싶었습니다. 큐브를 만들기 시작하며, 루비크가 봉착했던 구조적인 문제와 그 해결책에 대한 이야기와 큐브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고, 양산할 때 디테일을 일일이 챙기는 모습도 볼 만 했고요.
큐브의 역사도 흥미로왔습니다. 루비크는 초기 판매분으로 5천개를 주문했는데, 첫 출시 후 몇 년 지나지 않은 1979년 말까지 헝가리에서만 30만개가 넘개 팔려서 헝가리를 대표하는 물건으로 유명졌고, 영국에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 출신 동업자 크레머를 만난 뒤 세계적인 장난감이 되는 과정이 굉장히 극적이더라고요요. 크레머의 주선으로 미국 아이디얼 토이가 유통을 맡게 된 덕분인데, 이 때 이름도 창조자의 이름을 따 루빅스 큐브로 바뀌었다고 하네요. "루빅스"의 어원이 창조자 이름이라니! 창조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지요. 루비크는 "원 히트 원더"가 아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루비크는 큐브 이후에도 우리에게 "스네이크"로 잘 알려진 "루빅스 트위스트", 밧줄 퍼즐로 유명한 "루빅스 탱글" 등을 만들어 냈거든요. 대단합니다.
큐브가 인기를 끌면서 시작된, 스피드 큐빙에 대한 이야기는 넷플릭스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어서 더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큐브의 발명과 인기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창조에 대한 저자의 지론들도 되새겨 볼 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호기심이 중요하고, 현실에서 추상적 개념을 만들어내내어 그 개념을 현실에 적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또 본인 스스로는 창조한게 아니라 기존 요소들 간에 새로운 관계를 만든 것 뿐이며, 다양한 상호 작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부분은 제 전공이기도 한 UX와 인터랙션 측면에서도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다 생각합니다. 교육, 디자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개인 담론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한 책에 담아낸 영 두서가 없다는 단점은 큽니다. 글도 가독성이 높지 않아서, 온전히 그 생각을 다 이해했다고 하기는 힘드네요. 일단 편집, 출간하면서 주제별로는 명확하게 글을 분류했어야 했습니다.
또 큐브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는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더군요. 큐브는 인지 능력과 정서적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건 21세기 사람들의 학습과 성공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자라던가, 큐브의 미스터리라면서 정육면체나 숫자 3,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해 보려는 노력 모두 가상하기는 했지만 지나쳤어요.
무엇보다도 도판이 전무하다는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큐브의 역사와 짝퉁들, 아이콘으로 사용된 큐브의 이미지 등은 모두 도판이 함께 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책 가격, 분량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말이지요.

그래도 전 세계를 풍미했고, 하나의 아이콘이 된 장난감을 만들어낸 창조자가 직접 밝히는 창조의 비결이라는 점에서 한 번 쯤 볼만했던 책이었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10/09

늑대의 왕 -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 송섬별 : 별점 2.5점

늑대의 왕 - 6점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지음, 송섬별 옮김/세종(세종서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79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방범관 카르델은 호수에서 시체 하나를 건져내었다. 시체는 살아있을 때 몇 개월에 걸쳐 혀, 이빨, 눈, 귀 및 사지가 하나씩 훼손된 후, 치료되었다는게 밝혀졌다. 인데베토우 치안본부 소속의 세실 빙에는 치안총감 놀린의 부탁으로 사건을 맡고, 카르델과 힘을 합쳐 수사에 착수했다. 놀린은 세력가 레우테르홀름의 간섭으로 치안총감 자리를 오래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고, 빙에도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중이라 남은 시간은 별로 없었다.
카르델의 탐문 수사, 그리고 빙에가 시체를 감쌌던 천을 추적해서 둘은 시고위층 비밀 조직 에우메니데스가 소유한 고급 창관이 시체를 버렸다는걸 알아냈는데....


18세기 후반 스웨덴을 무대로 펼쳐지는 역사 추리 소설. 무식과 야만, 과학이 공존하던 비슷한 시기 유럽을 무대로 하는 <<사형 집행인의 딸>> 시리즈와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구스타프 3세가 일으켰던 대 러시아 전쟁, 그 중에서도 스벤스크순드 해전이 꽤 비중있게 등장하고, 프랑스 혁명도 사건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등, 역사적인 배경을 더 짙게 깔고 전개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팩션' 인 셈이지요. 이런 역사적인 부분의 디테일은 아주 빼어납니다. 당시 문화와 시대상, 생활상을 잘 알 수 있을 정도으니까요. 예를 들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이유로 독한 아라비카 커피를 자주 마신다는 세실 빙에의 묘사처럼 말이지요.
전형적인 지知-용勇 컴비 - 허약한 두뇌파 탐정 세실 빙에와 엄청난 완력과 터프함을 자랑하는 카르델 - 설정도 이 작품에서는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웁살라 대학교 법학과 출신으로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빙에, 왼 팔을 대 러시아 전쟁 중에 잃었던 역전의 용사 카르텔은 그들에 대한 설명과 그들 각자의 회상 만으로도 작품의 역사적인 배경과 디테일을 보다 강화시켜 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빙에와 카르델이 수사를 통해 창관까지 찾아가기는 하지만, 피해자와 범인이 드러나게 되는건 피해자 다니엘 데발을 그 꼴로 만든 집행자 크리스토페르 블릭스가 남긴 편지가 빙에에게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범인인 발크가 크리스토페르를 자유롭게 풀어준 이상, 체포되는건 시간 문제이기도 했고요. 크리스토페르가 죄책감에 밍기적거리며 시간을 낭비하지만 않았어도 사건은 더 빨리 해결되었을 겁니다.
그나마 컴비가 창관으로 찾아가기까지의 수사를 그린 1부, 크리스토페르가 범행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그린 2부는 수사와 범죄 과정이 상세히 등장하기라도 하는데, 안나 스티나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그린 3부는 존재 자체가 불필요했습니다. 재미도 있고, 당시 스웨덴이 얼마나 무식한 국가였는지, 노역장이 얼마나 생지옥이었는지, 방범관들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등의 시대상을 드러내는데에는 효과적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3부를 읽지 않아도, 그리고 안나 스티나는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최악의 방범관이자 새디스트인 페테르손이 카르델에 의해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는 에필로그라도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것도 아니었고요. 또 안나 스티나는 마지막에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아무리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한들 그냥 봐 주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아울러 요한네스 발크가 이런 무서운 범행을 저지른 동기가 '프랑스에서처럼 혁명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는건 팩션이라는 측면에서는 잘 어울렸으나 쉽게 와 닿지는 않았어요. 데발을 사랑했지만, 데발이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먹으려고 했던, 전 치안총감 릴옌스파레의 끄나풀이었기 때문이라는걸 알게 되어 살의를 품었다는 발크의 동기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습니다. 때문에 그가 재판정에 서 봤자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는 부족했을 겁니다. 사랑했던 연인의 배신으로 살인을 저지른 귀족의 후예 때문에 폭동이 일어난다? 그럴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4부에서 피해자 뱃 속에서 발견한 반지의 문장을 통해 피해자 신원,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를 더듬어가는 부분만큼은 좋았어요. 반지의 문장은 전 치안총감 릴옌스파레의 문장을 흉내낸 것이었고, 이를 통해 반지 주인이 릴옌스파레가 풀어놓은 정보원이었다게 밝혀지는데 앞서의 복선 등으로 꽤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피해자가 자기 배설물을 먹었던 것도 리스토페르가 사지를 잘라내는 시술을 피해자에게 가하던 중에 문장이 새겨진 반지를 먹여서 나중에 부검을 통해 그의 신원이 드러나게끔 조치했기 때문이라는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되며, 피해자가 처한 끔찍한 상황과 잘 맞아 떨어져 극적인 효과를 더해줍니다.
빙에가 "사실 다니엘 데발은 발크를 배신한게 아니라 그를 사랑했다"고 데발의 편지를 위조해서 발크를 속인 끝에 그가 순순히 죽음을 맞게 만든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동을 주는 듯 하다가, 사실은 빙에의 조작이었다는게 드러난건 확실히 새로왔어요. 세실 빙에와 그의 아내에 관련된 가슴 아픈 사연과 맞물려 여운을 남기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독특한 역사물로의 재미는 확실하고,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잔혹한 범죄, 범죄 만큼이나 끔찍한 당시 스웨덴 상황 등은 부담스러워서 감점합니다. 해피 엔딩에 악당들은 확실히 응징하는 <<사형 집행인의 딸>> 시리즈가 훨씬 더 제 취향이었습니다.

주식시장의 17가지 미신 - 켄 피셔.라라 호프만스 / 이건 : 별점 3점

주식시장의 17가지 미신 - 6점
켄 피셔.라라 호프만스 지음, 이건 옮김/페이지2(page2)

주식 투자에 대해 사람들이 맹신하는 17가지 미신이 잘못되어 있다는걸 알려주는 책.
이 책에서의 결론은 결국 한가지입니다. 주식은 장기 투자에 유리하니까, 되도록 주식에 투자하라는 거지요. 주식은 아무리 변동성이 증가하더라도, 결국 대세 상승이라고 주장하거든요. 원금도 보장되면서, 성장도 하는 투자처는 없다, 하락 없이 상승도 없다는 말 모두 일관되게 같은 주장입니다. 물론 "잘 분산된 포트폴리오를 갖춰야 한다"는 말은 빼 놓지 않았지만요. 한 카테고리와 사랑에 빠지지 말라, 상승장이 오면 무조건 1년을 버티라는 말은 꼭 기억해 두어야 겠습니다. 고배당주의 헛점을 설명하면서, 배당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걸 지적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배당금 지급이 높다고 건전한 회사라는 뜻도 아니라고 하니, 주의해야 겠고요.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건 손절매는 손실을 막아주지 못한다는 설명입니다. 손절매는 수수료를 먹고사는 증권 회사에만 유리할 뿐이라네요. 이게 효과를 보려면 주가의 하락과 상승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니까요. 이익에서 얻는 기쁨보다 손실에서 겪는 고통에 훨씬 민감한 사람의 본능 때문에 행하는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저 역시 소소하게 주식 투자를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손실이 막대했지요. 하지만 손절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저자의 말대로 최소한 10년 이상의 장기 비젼을 가지고 접근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1/10/03

법정에 선 수학 - 레일라 슈넵스.코랄리 콜메즈 / 김일선 : 별점 3점

법정에 선 수학 - 6점
레일라 슈넵스.코랄리 콜메즈 지음, 김일선 옮김/아날로그(글담)

수학이 법정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재판에 대해 소개하는 책. 대체로 숫자가 잘못 사용되어서 재판 결과가 왜곡된 재판이 많습니다. 대부분 통계와 확률 계산의 오류들이고요. 독립적인 조건으로 판단하고 곱하면 안되는데, 곱해서 숫자가 엄청나게 커진 경우처럼요. <<루시아 더베르크 사건>>, <<샐리 클라크 사건>>, <<콜린스 부부 사건>>, <<조 스니드 사건>> 이 대표적입니다.
루시아 더베르크는 2001년 네덜란드에서 아동 연쇄 살인마로 몰렸던 간호사입니다. 여러 아이가 심정지로 사망했을 때,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었지요. 그녀가 현장에 있었을 확률이 왜곡되어 재판에 사용되었고요. 수학은 단지 거들었을 뿐이고, 사실 무리했던 기소와 수사, 그리고 무능했던 변호사의 환장의 콜라보였고, 그녀는 결국 무죄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오류가 일어난 이유는, 모두 개별적으로 보아야 하는 독립 사건을 곱했기 때문입니다.
두 아이를 영아 돌연사로 연달아 잃은 뒤, 영아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던 샐리 클라크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샐리는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명명한 메도 박사의 증언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박사는 아이 두 명의 죽음을 모두 독립적이라고 생각하고 확률을 계산했었고요. 그러나 유전적일 경우 두 죽음은 독립적이지 않을 뿐더러, 설령 확률이 맞았다 하더라도 이게 샐리의 범행을 증명하는건 아닙니다. 운 나쁘게 불행한 죽임이 닥친 것에 불과하거든요. 여러모로 확률이 잘못 사용된 거지요.
콜린스 부부는 범인과 인상착의가 같을 확률 때문에 체포되었는데 검사측은 LA 시민 중 비슷한 특징을 지닌 커플이 존재할 확률을 계산해서 증거로 제시했었습니다. 부부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는 없었지만, 배심원은 유죄를 선고했고요. 그러나 이 확률 계산이야말로, 오류의 결정판이었습니다 .우선 사용된 값이 문제였어요. "여성이 머리를 묶었을 확률" 은 통계학적 근거에서 나온게 아니니까요. 모든 조건이 독립적이라고 확정하고 곱한 것도 실수였고요. 마지막으로, 설령 그 숫자가 맞다고 하더라도, 이건 샐리 클라크 사건처럼 실제 범인을 찾아낼 확률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대법원에서 판결은 뒤집혔습니다. 이 재판에서 그나마 긍정적이었던건 검찰측 오류를 밝혀내는데 활약했던 트라이브가 법조계 유명인사가 되었고, 법정에서 수학 사용이 자제되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것 정도네요.
<<조 스니드 사건>>은 1964년 뉴멕시코 실버시티에서 스니드 부부가 살해된 뒤, 용의자였던 아들 조 스니드 재판을 다루고 있는데 재판의 승패는 조 스니드와 권총을 구입했다는 로버트 크로셋이 동일 인물인지를 입증할 수 있냐였습니다. 검찰은 이를 수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권총을 구매한 사람의 특징 - 신장, 머리 색, 눈동자 색, 사서함 번호, 이름 등 - 을 독립적으로 보고 값을 뽑은 뒤 곱했다는데, 이건 수학에 어두운 제가 봐도 설득력없는 숫자로 보였습니다. 전체 인구에서 크로셋이라는 이름이 나올 확률을 추산했다? 가명을 썼다면서 그 이름이 존재할 확률을 계산한다는건 이상하죠. 다른 조건과 값도 비슷해서, 결국 이 확률 계산은 재판과는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숫자일 뿐입니다. 설령 숫자가 어느정도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숫자는 조 스니드와 로버트 크로셋이 동일 인물이라는 결론과는 상관도 없고요. 오히려 이런 검찰의 삽질이 드러나며, 수학이 사용되지 못했던 항소심 이후의 법정 공방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검찰은 다른 한 방을 준비해야 했기에, 변호인측과 드라마틱하면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니까요. 참고로, 여기서 검찰이 마지막 날린 한 방은 스니드의 전처를 증언대에 세웠던 겁니다. 그녀가 스니드의 폭력 성향을 입증했던 덕분에, 스니드는 종신형을 받게 되었지요.

이렇게 수학이 재판 결과를 왜곡시킨 사건 외에도 <>처럼 수학이 잘 사용된 경우도 있습니다. 수학이 명백한 오류를 증명했던 사건입니다.
2007년 11월,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영국인 유학생 메러디스 커처가 살해된 뒤, 룸메이트였던 미국인 어맨다와 남자친구 라파엘이 체포되었던 <<어맨다 녹스 사건>>도 재판 결과야 어찌 되었건, 수학은 증거가 유의미하다는걸 나름대로 증명했던 사건이었고요. 여기서 앞 뒤가 나올 확률이 다른 동전을 이용한 설명도 좋았어요.

그런데 폰지 사기의 원조 찰스 폰지 사건 재판은 그의 사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월가의 마녀로 불렸던 해티 부인 재판과 역사적으로 유명한 드레퓌스 재판은 수학이 서명과 필적 위조를 입증하는데 사용되었지만, 실제 재판 결과와는 별 상관은 없었습니다. 즉, 이 책의 주제와는 잘 어울리지 않았던 거지요. 재판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었지만, 그래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드레퓌스 재판은 워낙 유명해서 이 책에서 따로 짚고 넘어갈 필요도 없어 보였고요.
저 같은 초보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수식이나 계산이 사용된 경우가 제법 많다는 점도 조금 아쉬웠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했습니다. 수학 교양서로도 충분했고, 소개된 재판들 대부분이 한 편의 법정물을 읽는 듯한 재미를 가져다 주었으니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비슷한 책으로 <<넘버스>>가 있는데, 재미 면에서는 이 책의 압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