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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8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 계정민 : 별점 3점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 6점
계정민 지음/소나무

19세기 초반에서 19세기 중후반까지의 영국 사회의 문화와 패션 흐름, 특히 실버포크 문학과 댄디즘에 대해 고찰하는 인문학 서적이자 문학사, 미시사 서적. 선물받아 읽게되었습니다.
중간계급의 귀족 계급 따라하기와 이를 뒷받침해 주었던 실버포크 문학의 출현에서 시작하여, '댄디즘'이 일세를 풍미했지만 결국 시대적 흐름에 따라 귀족 계급과 실버포크 문학이 몰락하고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기까지의 흐름이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패션' 보다는 '유행'에 대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볼거리가 아주 많았습니다. 우선 현대 사회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귀족 계급이 어떻게 사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줌으로써, 그들을 흠모하고 따라하려는 중간계급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는 실버포크 문학은 현대로 따지면 유행을 선도하는 SNS 인플루언서나 유튜버들과 별로 다를게 없어 보였거든요. 실버포크 문학의 대표 작가들 대부분도 귀족 계급으로, 자기들 이야기를 썼다고 하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킴 카사디안같은 경우겠지요. 당시 런던 유명 상점에 대한 정보가 가득해서 '런던 상점 안내도'이자 '광고판'으로도 불렸다는 고어의 <<아내의 용돈>> 설명을 읽을 때는, 버블 전성기에 유행과 소비에 매몰되었던 일본의 사회 환경을 캐쥬얼하게 그려냈던 <<어쩐지 크리스탈>>이 떠올랐고요.

그런데 이런 실버포크 문학과는 반대로, 댄디와 댄디즘의 목적이 '유행'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것도 새로왔어요. 귀족 계급이 프랑스어에도 능통하고, 유럽 대륙의 문화와 예술에 해박하며 그곳에서 유행하는 첨단의 패션을 소비하는 자신들과 비교하면, 중간 계급 남성은 귀족 남성의 삶을 서투르게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판단해서, 이러한 자기들의 문화 자본을 과시하는 스타일을 개발해 냈던 것으로, 이들이 바로 댄디 Dandy였고, 이들이 개발해냈던 스타일과 태도, 가치관이 댄디즘 Dandyism 이었습니다. 즉, 귀족 계급이 자기들 위치를 중간 계급이 따라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던거지요! 조선 후기, 중인 계층이 실학자들과 시서화를 통해 교류했다는 이야기가 연상되네요. '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 무리에 낄 수 있었다는건, 결국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가도 똑같은 법입니다.
댄디즘이 단순히 패션에 국한된게 아니라, 일종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댄디들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중간 계급의 근면성, 실용성, 생산성과 같은 가치관을 거부하고 장식성, 무용성, 비생산성에 집중했다고 하거든요. '멋쟁이'가 아니라, 꾸미기에만 몰두하는 무위도식 한량이 '댄디'였던 거지요. 의미가 완전히 다른 셈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댄디즘의 종말도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결국 나폴레옹 전쟁 이후 경제 공황, 세금 증가, 귀족계층을 위한 곡물법 제정애 따른 식료품 가격 상승 등으로 1840년대를 지나면서 귀족 계급에 대한 반감 극대화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빈곤과 노동 문제가 겹친 탓에 댄디즘과 같은, 소비와 과시로 점철된 귀족 계급의 생활양식은 시대착오적인 악습으로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만 거지요. 여기서 댄디즘의 명줄은 다했고, 이후 도덕적이고, 근면 성실한 중간 계급 남성 이데올로기가 영국을 지배하게 되었다네요. 잠깐은 세상에 먹혔을지 몰라도, 이런 가치관이 오래 갈리 없으니 당연한 결말입니다.

이렇게 실버 포크 문학과 댄디즘의 종말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사실들도 눈길을 끕니다. 중간 계급 독자의 증가로 문학의 주도권이 시에서 소설로 바뀌게 되었고, 문학은 이들 중간 계급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획에 의해 생산되고 마케팅에 의해 소비되는 문화상품으로 변해갔다는 것, 댄디가 외모로 구별짓기를 시도한건 당시가 시각적 상상력이 빠르고 전면적으로 부상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이론들이 그러합니다. 문학이 시에서 소설, 천재의 예술품에서 문화 상품으로 변했다는건 최근 웹툰이나 웹소설, 그 중에서도 판타지나 로맨스가 유행하는 최근 트렌드와도 왠지 비슷한 느낌도 들더군요. 소비 주체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소비 행태가 모바일화되었다는 뜻이니까요.

각 단락마다 당대 유행했던 실버포크 문학 작품, 관련된 유명 인물을 함께 소개해주어서 이해를 쉽게 만들어주는 구성도 엄지 척! 이었습니다. 문학 작품의 내용 소개만으로도 당시 분위기가 머리에 쏙쏙 들어올 뿐더러, 댄디의 상징이었다는 브러멜과 도르세이 백작에 대한 소개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재미있었거든요. 브러멜은 완벽한 단순함으로 고도의 절제미를 선보였던 반면, 도르세이 백작은 유럽 출신으로 요란하고 화려한 스타일을 선보였던 탓에 그를 따라하던 중간 계급 청년들의 패션은 황당해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는군요. 단순히 입는 옷, 장신구 등에만 신경쓸 뿐, 기본이 되는 가치관과 사고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지요.
그런데 이런 과정을 겪고도 '댄디'가 '멋쟁이'라는 의미로 계속 사용된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저자도 댄디즘의 종말에 대해 설명하면서, 댄디를 흉내내는 중간 계급은 웃음을 자아내는 코믹 캐릭터로 바뀌었다고 설명하는데 말이지요. 물론 댄디가 되고 싶어해서 그들을 추종하는 '속물'들 과 진짜 멋쟁이 '댄디'는 확실히 달랐겠지만, '댄디즘' 자체가 부정적 의미가 되었다면 '댄디'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로 힘을 잃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현재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주제에 대한 설명은 재미있고 상세하나 아쉬웠던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실버 포크 문학'이 얼마나 중간 계급에게 잘 먹혔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당시에 이런 소설이 나와서 인기를 끌었다, 정도는 근거가 빈약해요. 특정 소설이 인기를 크게 끌었다고 한 들, 그게 사회 현상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힘들잖아요? 판매량같이 명확한 근거, 최소한 다른 문화, 사회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었어야 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제대로 된, 정확한 역사서라고 보기는 여러모로 부족해 보입니다.
도판이 부족하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댄디들과 그들의 패션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도판이 필요했어요 글 역시 가독성 좋은,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었고요.

덧붙이자면, 제목만 보고 기대했던 분들은 조금 실망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부제인 '패션의 권력학'은 잘못 붙여진 제목이거든요. 사실 패션에 국한된다면, 댄디들의 패션을 중간 계급이 따라하지 못했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패션은 물론, 먹고 자고 하는 모든걸 똑같이 따라하는건 돈만 있으면 어려울게 없으니까요. 그들이 따라할 수도 없었던건 패션과 같은 표면적인게 아니라 댄디즘이라고 불리우는 가치관같은, 귀족 계급만의 사고 방식입니다.

그래도 문화 상품을 통해, 당대 계급간 갈등과 사고방식과 같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해낸 내용만큼은 아주 좋았습니다. 재미도 있었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특정 시기, 특정 문화가 시작되고 끝나는 과정에 대해 전반적으로 잘 알려주는 좋은 미시사, 문화사 서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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