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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6

탑건: 매버릭 (2022) - 조셉 코신스키 : 별점 4점

 

아, 정말 이런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건 오랫만이네요. 누구나 다 아는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겠습니다.

전편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면서도, 그 당시 등장인물들의 현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록키 발보아>>를 떠오르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다 늙은 과거의 헤비급 챔피언보다야, 늙었지만 여전히 현역인 해군 조종사가 더 설득력이 높겠지요. 게다가 Anthem에서 시작해서 Danzer Zone으로 넘어가는, 80년대 전편 분위기를 그대로 떠오르게 만드는 오프닝 시퀀스를 비롯, 여전히 멋진 톰 형이 항공 잠바(?)와 라이방(?)을 걸치고 가와사키 바이크를 몰며 비행기와 경주하듯 활주로를 질주하는 씬 등 80년대 감성 물씬나는 장면들은 촌티나지 않고 멋집니다. 나이는 먹었지만 몸관리 하나만큼은 최고인 톰 형의 노력이 빛난달까요. 전편의 주요 등장인물들 몇몇이 다시 등장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이 과정에서 아이스맨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메버릭을 감싸주는 이유라던가, 루스터와 메버릭이 왜 갈등하는지 등은 전편을 보는게 도움이 되는 설정도 있지만 전편을 보지 않아도 감상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핵심인 액션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실전에 투입되어 펼치는 작전과 뒤이은 도그 파이트 씬은 당연히 최고였고,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훈련도 일종의 실전처럼 만들어 지루함을 없앤게 인상적이었어요. 훈련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서 얼마나 어려운 임무인지와 본격적인 실전에서 관객이 과정 전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요.
참고로 이 작전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4>>의 데스스타 공격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많던데, 저는 <<에어리어 88>>이 떠올랐습니다. 레이더를 피해 협곡을 저공으로 뚫고간다는 개념이 똑같았으니까요.

물론 조금 생각해보면 문제가 많기는 합니다. 어차피 토마호크로 적의 활주로를 타격할거였다면, 지대공 미사일 포대도 함께 타격하고 F35 랩터를 몰고 폭격하면 되잖아요? 또 폭격 성공 후 코핀 코너에서 본격적인 지대공 미사일 공격이 시작되는데, 이를 모두 플레어로 떨굴 수 있었으니 더더욱 저공으로 올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애초에 F-18을 선택했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적기 2대에 대한 설정도 오류로 보입니다. 이 두 대는 어디선가 다른 곳에서 날아온 것으로 설명됩니다. 즉, 진작에 작전 시간을 어느정도 써 먹었을 거에요. 게다가 메버릭과 루스터가 F-14를 훔쳐서 이륙하는 데에도 최소한 30분 이상은 걸렸을 테고요. 그런데 적기 두 대가 메버릭과 루스터와 도그 파이트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연료가 남아있다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마지막에 새롭게 나타는 1대는 어디서 나타났을까요? 활주로는 공격받은 상태였는데 말이지요.

그러나 이런걸 시시콜콜 따지고 들어갈 필요는 없는 영화입니다. 터미네이터에게 누가 감정 연기를 기대하겠습니까? 80년대 감성과 2020년대 기술을 잘 버무린 멋진 결과물이며, 재미 역시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최근 수 년간 보아온 영화 중 베스트로 꼽습니다.

2022/06/25

심야의 손님 - 오쿠라 데루코 / 이현욱 외 : 별점 1점

 

심야의 손님 - 2점
오쿠라 데루코 지음, 이현욱 외 옮김/위북

잘 모르는, 전전(戰前)세대 일본 추리 작가의 2차 대전 전~후를 아우르는 대표 단편 일곱 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인 나쓰메 소세키,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문하에 있던 작가로 탄탄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미스터리한 사건의 인과관계를 설득력 있게 파헤치는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 어쩌구 하는 홍보 문구에 낚여서 구입하게 되었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너무나 형편없고 졸렬했습니다. 최근 읽은 책, 아니 제가 읽어왔던 천 권이 넘는 책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졸작이었어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우선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심령 호러와 같은 작품도 있는데, 스릴이나 긴박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어서 섬찟한 느낌도 전혀 받을 수 없었고요. 홍보 문구에서 이야기하는 탄탄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설득력있는 인과 관계 역시 단 한 작품에서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지금 읽기에는 의외성없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전개로 진행된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읽어볼 가치는 전무합니다. 활동기에도 유명하지 않았으며 지금 시점에서 그 이름이 완전히 잊혀진 작가는 역시나 이유가 있는 법이에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혹시나 궁금하시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영혼의 천식>>은 명문가 후지와라 가문의 후계자 기미타카가 사라져 버린 사건이 등장합니다. 알고보니 후계자 기미타카는 살해되었었고, 범인은 친모였어요. 친모는 후지와라 가문과 어울리지 않는 평민 출신인 탓에 친척들에게 멸시를 당해왔었는데, 기미타카가 성장하면서 범죄자가 되어가자 자신이 질타를 받을 걸 우려하여 살해했다고 하네요.
아니, 아들이 범죄자가 되건 말건 친모가 아들을 살해한다는게 말이 됩니까? 살해한 뒤, 아들을 미이라로 만드려고 불상 속에 사체를 집어넣었다는 설정은 또 왜 들어간걸까요? 에도가와 란포를 따라한 유치한 발상에 불과합니다. 설득력이 없다는것도 마찬가지고요. 아울러 이러한 진상은 기미타카의 친모가 남긴 편지로 드러날 뿐이라 추리의 여지도 전무합니다. 별점을 주자면 0.5점.

<<공포의 스파이>>에서는 구 백작 마쓰오카 본가에서 장남 가즈오가 사라집니다. 진상은 동생 가오루가 형수에게 반해서, 형수와 가문을 손에 넣기 위해 형을 납치했다는 겁니다. 가즈오는 시베리아 파병 당시 소련 스파이로 일할 걸 서약했었다는 약점이 있었다는군요.
소련 스파이 설정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전후에 그런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사립탐정 사쿠라이 요코가 진범을 밝히는 과정도 제대로 설명되고 있지 못합니다. 조사나 추리 없이 그냥 마지막에 "얘가 범인이에요"라는 식이거든요. 이 작가가 추리 소설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글을 썼다는 확신이 듭니다. 역시나 별점은 0.5점.

<<요물의 그림자>>는 비밀 암호를 몸에 지니고 여객선을 타고 이동하던 화자가, 여객선에서 만난 중국인 부녀로부터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내용입니다. 아파보이던 딸은 원래 죽어서 장례까지 치뤘었는데, 하인이 손에 낀 반지를 훔치려 시체 손가락을 자를 때 깨어났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이 중국인 부녀가 약을 써서 화자로부터 암호를 빼앗는 전개로 이어지고요.
왜 딸이 죽었다가 살아났는지에 대한 설명도 전무하고, 어떻게 암호가 화자에게 있는줄 알고 접근해서 빼앗는지, 그리고 무엇에 대한 암호인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 등 이야기의 완성도 자체가 한없이 낮습니다. 그냥 중국인 부녀 이야기만 "공포 특급" 정도에 수록될 짤막한 1~2페이지짜리 괴담으로 풀어내는게 차라리 나았을 겁니다. 요 괴담만 그나마 읽을만해서 별점은 1점입니다.

<<마성의 여자>>는 특별한 능력으로 남편 혼조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알아내는 야스코의 이야기입니다. 혼조는 야스코의 감시와 집착에 질려 그녀를 살해하지만, 야스코의 영혼이 혼조와 하나가 되어 발광한다는 결말입니다. 자기가 증오해서 죽인 피해자가 '초능력자'여서, 그녀의 영혼이 나의 영혼과 합쳐진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어요. 그나마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랄까... 하지만 이를 제대로 풀어내지도, 마무리짓지도 못해서 완성도는 낮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심야의 손님>>에서는 사립탐정 사쿠라이 요코가 부호 아리마쓰 다케오 살해 사건에 엮이는걸로 시작됩니다. 알고보니 아리마쓰 다케오를 죽였던 건 탈옥수인 의적 오고시였고, 그는 다케오의 양녀 미와코를 돕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 거지요. 다케오가 과거 미와코의 친부 조지를 함정에 빠트렸었는데, 그 당시 상황이 담겼던 레코드가 남아있어서 오고시는 미와코를 도울 결심을 했다고 설명됩니다.
그런데 요코가 하는건 전혀 없습니다. 요코에게 '심야의 손님'인 의적 오고시가 찾아와 진상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왜 사립탐정이 등장해야 하는지, 그 이유 자체가 궁금해집니다. 게다가 아리마쓰가 이 레코드를 진작에 없애지 않은 이유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누군가를 함정에 빠트린 범인이 그 핵심 증거를 집에 잘 숨겨두고 보관해 둔다? 설득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지요. 이 쯤 되면 작가가 도대체 생각이라는걸 하고 글을 쓰는지 의심이 될 정도에요. 별점은 0.5점.

<<일본 동백꽃 아가씨>>도 사쿠라이 요코 시리즈입니다. 과거 미모로 '일본 동백꽃 아가씨'라고 불리웠던 히가시야마 씨 부인이 실종됩니다. 부인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는 유명 가수가 제대로 간호받지 못하던 부인을 직접 돌보기 위해 납치했던 것이지요.
우선 추리의 여지는 전무합니다. 다른 사쿠라이 요코 시리즈와 마찬가지로요. 히가시야마 씨에게 그렇게 부인을 돌볼거라면 자기에게 맡기라고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범인이었거든요. 이래서야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부인에게서 과거 큰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절절했기에, 고풍스러운 로맨스물로서의 가치가 약간 있을 뿐입니다. 별점은 1점 정도?

<<사라진 영매>>는 가쓰다는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내가 죽은 뒤 아내의 영혼을 불러오는 영매 레이코에게 푹 빠졌고 그러다가 아내가 과거에 썼던 별거아닌 편지를 발견한 탓에 폭주하여 레이코를 살해했다는 내용입니다. 그야말로 이 막장 단편집의 화룡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매 레이코의 능력, 가쓰다가 폭주한 이유, 사체를 은행 대여금고에 맡겼다는 설정 등 뭐 하나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니까요. 당연히 무섭지도 않아서 심령 호러물로의 가치도 전무합니다. 가쓰다가 아내, 레이코와 화자인 S 부인 모두가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는 반전이라도 잘 살렸더라면 조금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당연히 잘 살리지도 못했어요. 별점은 1점입니다.

2022/06/24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 잇폰기 도루 / 김은모 : 별점 2점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 4점
잇폰기 도루 지음, 김은모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도권에서 발생한 세 건의 연쇄살인사건이 단서가 없어서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진범 '백신'이 다이요 신문의 기자 잇폰기 도루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인간은 바이러스이며 자신은 백신이라며 잇폰기 도루와 다이요 신문 지면을 빌린 토론을 제안했다. 잇폰기 도루는 범인의 체포와 추가 범행을 막기 위해 토론에 응했고, 적자로 치닫던 다이요 신문의 경영도 급속도로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신이 불특정 다수에게 '살인 예고장'을 보냈다는 기사가 발표된 뒤, 잇폰기에게 에바라 요이치로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자신의 집에 배달되었던 예고장을 들고....


신인작가 잇폰기 도루가 발표해서 제 27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에서 <<시인장의 살인>>에 뒤이은 우수상을 수상했던 작품. 드라마로까지 제작될 정도니 꽤 인기를 끈 듯 합니다. 정통 본격물 애호가로서 '아유카와 데쓰야 상'의 권위를 잘 알고 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신문사 내의 조직 체계와 구성, 신문이 제작되는 과정, 신문사의 경영 상황 등 신문에 관련된 디테일한 묘사는 굉장하더군요. 작가가 61년 생으로 오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데뷰했다는데, 분명 신문사에서 일했을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또 전성기 정통 사회파 추리물이 연상될 정도로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며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도 가득합니다. 조금 독특한건 '대조'를 통해 양 쪽 모두를 극대화시키는 수법을 쓴다는 점이에요. 신문이 수행해야만 하는 사회적인 역할과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과의 괴리를 대조시킨다던가, 백신의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는 주장과 그걸 뒷받침하는 여러가지 광기와 추악함 설명과 함께 에바라 요이치로 시점에서 에바라 가족의 끈끈한 사랑을 그려내는 식으로요.
아울러 연쇄살인범이 신문 기자와 신문 지면을 통해 토론을 벌인다는 아이디어도 흥미로왔으며, 살인범 에바라가 잇폰기 도루에게 집착한 이유가 아들 요이치로의 친부였기 때문이었다는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요소를 잘 살렸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개의 핵심인 '토론' 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비슷한 주장이 반복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인 내용까지 인용해가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척은 하지만, 길게 묘사될 내용은 아니었어요. 신문에 실렸을거라 생각되는 글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이보다는 백신의 성명을 기자와 각계 전문가들이 분석하는 식의 기사 형태가 더 설득력이 높았을 것 같습니다.
전개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습니다. 왜 토론을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부터 부족합니다. 에바라가 잇폰기에게 구태여 연락을 해서 요이치로의 친아버지가 범인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이 부분을 뺀다 하더라도 전개에 별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에바라가 과거 아동 학대의 피해자로 잘 성장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암에 걸린 아내의 사망으로 갑자기 분노가 폭발했다는 동기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여러 등장 인물들이 모두 가정 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불필요한 일종의 맥거핀일 뿐이었습니다.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이라는 이력에 어울리는, 정통 본격물적인 요소도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진범이 에바라였다는 반전 자체만큼은 나쁘지 않아요. 잇폰기에게 보낼 편지를 아들 요이치로가 봤다고 착각한 나머지, 살인 예고장을 보냈다는 식으로 둘러댔지만 자기가 받은 예고장과 실제 보낸 예고장의 시기가 일치하지 않은게 발목을 잡는다는 상황도 나름대로 설득력있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예고장을 언제 받았는지에 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는 알려주지 않는게 문제에요. 이 탓에 독자들은 공정하게 추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이래서야 정통 본격물로 보기는 힘들지요.
불특정 다수라 생각했던 피해자들의 연결고리가 '상수리 나무집'이라는 아동 보호 센터에 맡겨진 아이가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를 경찰과 취재한 기자들 모두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 신상부터 파악하는게 수사와 취재의 기본이 아닐까요? 물론 저 단서만 가지고 진범 에바라를 찾아내는건 힘들었겠지만, 최소한 동기만큼은 알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에바라가 게가사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행했던 여러가지 공작은 눈여겨볼만 했지만, 교수의 알리바이가 없었던건 어떻게보면 '운'의 영역이고, 신문사에서 협박 전화를 걸었던게 발각되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완벽하게 누명을 씌웠는데, 잇폰기 도루의 추리만 듣고 경찰도 에바라가 범인이라고 여긴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어요. 범행 현장에 남겨졌던 담배 꽁초의 DNA는 게가사와 교수의 것이었고, 게가사와 교수 연구실에서 백신이 편지를 보낼 때 썼던 봉랍과 스탬프가 발견되었으며 그 외 여러가지 증거들 모두가 게가사와 교수가 범인임을 가리키니까요. 백신의 편지보다 훨씬 명확한 증거잖아요?

또 사회파 추리물같았던 부분도 변죽만 올리고 끝나서 아쉽습니다. 특히 적자를 보던 다이요 신문이 살인범과의 토론으로 돈을 벌어서 기사회생한다는 딜레마를 잘 끝맺지 못한 탓이 커요. 괜히 다이요 신문 관계자가 범인이 아닐까하는 분위기만 살짝 풍기는게 전부거든요.
이런 사회파스러운 내용과 정통 본격물스러운 내용이 잘 결합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아니, 완벽하게 분리된 다른 이야기라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아예 사회파다운 이야기로 풀어내던가, 아니면 보다 본격적인 요소를 도입하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양 쪽 모두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이도저도 못한 결과물입니다.

2022/06/19

악스 - 이사카 고타로 / 김해용 : 별점 2.5점

 

악스 - 6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이야기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문구회사 영업사원이자 공처가면서 한 아이의 아빠인 미야케는 사실 '풍뎅이'라는 별명의 유명 킬러였다. 그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에 지친데다가,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마쓰다와 나노무라와도 거리가 멀어진 탓에 은퇴를 결심했다. 그러나 문제는 관리자인 '의사'였다. 의사가 가족에게 보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풍뎅이는 보복을 막으려고 여러가지 준비를 했지만, 결국 선수를 친 의사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10년 후, 풍뎅이의 아들 가쓰미는 우연히 아버지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걸 눈치채게 되었다. 몇 안 되는 단서를 더듬어 아버지 소유의 맨션을 찾아내지만 '의사'와 엮여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이사카 코타로 장편소설. 킬러들이 나오는 무언가 시리즈의 후속작이라는군요. 전작은 읽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특징이라면 킬러물과 일상계라는 두 장르를 오가고 있는데, 일상계 비중이 훨씬 높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그야말로 '일상' 이야기 쪽으로요. 킬러물과 일상성을 결합한 작품으로는 <<살인해드립니다>>가 있기는 한데, 이 작품은 아예 킬러 업무와 상관이 전혀 없는, 풍뎅이의 아내와 가족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킬러가 타겟을 죽이고 해치는 이야기보다요.
특히 '풍뎅이'가 어떻게 하면 아내와 트러블이 없을지 항상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킬러 업무보다 오히려 아내의 대화에서 훨씬 큰 긴장감이 느껴지게끔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풍뎅이'가 아내와의 대화를 계속 머릿 속으로 시뮬레이션하고, 여러 권의 노트에 대화를 기록하며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감동스러울 정도였고요. 
저 역시 따라하고 싶은 노하우도 가득해요. "결점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개선을 약속한다. 그것이 가장 원만하게 해결하는 지름길이었다." 처럼 말이지요. “저는 19 년의 결혼 생활을 통해 배웠습니다 . 아내의 말에는 어쨌거나 힘들겠다는 말이 최고라는 걸요 . 불평은 물론이고 의문형의 말에 대해서도 ‘힘들겠는걸’ 하고 말하는 게 아내를 가장 잘 위로하는 방법이죠."라는, 풍뎅이가 처음 만난 마찬가지로 공처가인 친구 마쓰다의 말도 심금을 울립니다. 밤에 아내를 깨우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야식은 어육 소시지라는 등의 디테일들도 빛납니다.

단순히 가정 문제 뿐 아니라 '공정함'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성품 등 풍뎅이라는 인간에 대한 세밀하면서도 깊이있는 묘사는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생길 정도로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대화의 내용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요 . 인사를 하고 뭔가 말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중요하죠 . 종교나 이데올로기는 사람마다 다르고, 스포츠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종교 같은 거니까 말이에요 . 아무래도 딱딱해질 가능성이 있잖아요 . 그런 점에서 날씨 이야기는 비교적 안전하죠.” 라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때문에 기절한 상대를 죽이지 않고, 상대방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작위적인 설정도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친구가 없지만, 친구 같은 주변 인물들이 서서히 생겨나고, 가족에 대해 새삼 곱씹게 되면서 은퇴를 결심하고, 그로 인해 닥칠 수 있는 위험을 없애고자 노력하는 모습도 일종의 성장기스러운 맛이 느껴져서 좋았어요.
10년 후, 아들 가쓰미가 아버지의 비밀(?)을 파헤쳐 가는 과정도 추리적으로 볼 만 했고요.

그러나 일상계스러운 모습의 강조로 인해 킬러로서의 전문성을 드러내는 부분이 너무 약해졌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의사'와의 대결부터 굉장히 시시했어요. 아무리 지인이라 하더라도 나노무라 앞에서 헛되이 자살을 택한다는 것도 그렇고, 확실치도 않은 의사의 단독 행동을 노리고 함정을 파는 계획도 그렇게 잘 짜여졌다고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간단한 석궁 발사 장치가 10년이나 아무 탈 없이 맨션에 잘 설치되어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문을 연 의사를 쏘아 죽인다는건 설득력이 낮았고요. 또 석궁 장치 설정에 대한 힌트를 주지 않아서, 아들 가쓰미가 문을 먼저 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을 주지 못한건 실수였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단점도 있지만 독특한 재미만큼은 확실했습니다. 다른 시리즈도 읽어보고 싶네요.

덧붙이자면 킬러의 지극히 평밤한 일상을 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너무 사람을 잘 죽이고, 인간다움이 없는 탓에 보스가 억지로 1년간 사람을 죽이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도록 시킨 <<더 페이블>>의 사토 아키라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가끔 일상 속에서 킬러의 기술을 드러내는 모습도 비슷했으니까요. 물론 풍뎅이는 일상 생활 자체를 아예 모르던 사토 아키라와는 다르게 평범한 영업사원이기도 해서 일상 생활에 능숙하다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에필로그(?) 같은 걸 보면 풍뎅이도 원래는 사토 아키라와 같이 사회 생활을 시작했나본데, 저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차별화되어서 훨씬 좋았습니다. 풍뎅이의 사회 생활 적응기는 분명 <<더 페이블>> 스러울터이니....

2022/06/18

은퇴 형사 동철수의 영광 - 최혁곤 : 별점 2점

은퇴 형사 동철수의 영광 - 4점
최혁곤 지음/시공사


서울 서촌에 자리한 서울 경찰청 내 '미수반'은 이미 일선에서는 물러난지 한참 된 동철수 반장이 이끌고 있는 조직으로, 미제 사건 수사반이 아니라 '미심쩍은 사건 조사반'이라는 뜻이었다.
동철수 반장은 현장에는 거의 나가보지 못했지만 타고난 운과 인맥으로 지방경찰청장까지 무사히 마친 사람이었다. 그는 현재 경찰청 넘버 2인 경찰청장의 요청으로 기자 출신으로 특채 경찰이 된 박희윤, 경찰이었던 남편이 총격으로 사망한 뒤 의욕을 잃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주바리 두 명의 부하만 이끌고 미수반 반장을 맡아 여러가지 사건 수사에 나서는데...


“문제없다네. 그래서 뭔가? 범인은 여럿인가? 명섭 군 알리바이를 깼는가? 그리고 나 말일세,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말이 있다네. 그 긴 세월을 경찰로 보내면서도 못 해봤던.”
"무슨?"
“범인은 이 안에 있다!"


국내 작가 중에서도 꾸준히 완성도높은 작품을 발표해 왔던 최혁곤의 신작. 제목의 동철수의 반장을 중심으로 '미수반'의 활약을 그려낸 연작 단편집입니다. 제가 접했던 작가의 전작은 심각한 범죄 스릴러 <<B컷>>이었는데, 이 작품은 유머가 가득하더군요. 이런 분위기로 시종일관 끝까지 달려주는 솜씨도 괜찮았고요.
무엇보다도 푼수 동철수 캐릭터가 최고였어요. 주위에서 흔히 봄직한 은퇴 직전 직장 상사를 정말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작가가 직장 생활을 오래 했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러나 무능력한 상관과 유능하지만 떠벌이 몸종(?) 구도를 가진, 수많은 다른 버디 형사물 들과 비교했을 때 차별화되는 부분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동철수가 능력은 없지만 착하고 의리 하나만큼은 확실하다는 한국적인 설정을 제외하고는요.
또 지나치게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아쉬웠습니다. 주인공들 이름도 동, 탁, 하, 사, 갈 등 희귀한 성을 써서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 목적이 불순하고 탁했던 '탁해서' 처럼 - 있어서 이런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듭니다. 미수반을 만든 경찰의 No.2 이름도 '최태평'인데다가 핵심 주인공 박희윤 이름은 fuck you에서 따온게 분명해서 여러모로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감점 요소로는 그 외에도 추리적으로는 눈여겨 볼 부분이 거의 없다는 문제도 있고요.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추리적으로 별 볼일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미수반' 이라는 조직명에서 <<미궁과 사건부>>나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같은 정통 본격 추리 단편 시리즈를 기대했는데, 실상은 헐리우드 버디 형사물에 가까운 결과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추리 소설 애호가가 보기에는 애매했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립싱크의 왕>>
가수왕 출신 가수 하필이 죽었다. 췌장암을 비관한 자살로 보였지만, 사망 당일 수상한 사람이 목격되었다는 제보 탓에 미수반이 투입되었다. 박희윤은 아무 짝에도 쓸데 없는 동철수의 좌충우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수사에 집중해서 결국 진상을 밝혀내는데...

하필의 돈을 노렸던 매니저, 부동산 문제가 있어서 거짓 제보를 한 동네 경찰 - 하필이 자택을 사후 박물관을 만들겠다고 해서 이를 막기 위해 - 등이 차례로 등장하여 사건을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범인은 초반부터 등장했던 예능 프로 <<복면전설>>과 관련된 인물이었습니다. 하필 모창자로 잘 나가던 짝퉁가수 하필 3호는, 하필이 죽으면 저작권이 회수되어 먹고 살 길이 막힐걸 걱정한 탓에 그를 찾아갔다가 갑작스럽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하필 3호가 범인이라는게 정교하게 짜여진 전개를 통해 드러나는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필이 하필 3호를 만날 때 직접 커피를 대접하는 식으로 정성을 다했으며, 칼에 찔린 뒤 하필 3호를 위해 어떻게든 자살로 현장을 만들었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첫 작품답게 설정과 캐릭터 소개가 많은데,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동네 영감같은 동철수와 진짜 실력자(?) 박희윤 컴비의 티격태격 좌충우돌이 재미나게 묘사되어 이어질 시리즈 후속작들에 대한 기대도 높여줍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 새로운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한 여름 밤의 해혼식>>
박희윤은 주말에 동철수 친구 탁해서가 유명 시인인 아내 사채원과 이혼한다는 '해혼식' 참석차 시골 마을을 방문했다. 탁해서는 170만이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 주인으로 원래 대지주의 아들로 부유하게 자랐지만 80년대 이후 가문이 몰락했던 상태여서 고향에서 유일하게 남은 거처 혜화당과 갈대밭을 관광 명소로 만들기 위해 해혼식을 이용하려 했다.
그런데 해혼식 피로연 다음날, 탁해서는 노천탕에서 중상을 입은채 발견되었다. 실수로 미끄러 진 것으로 여겨졌지만, 박희윤은 현장에 탁해서의 가운이 없었던 이유를 캐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해혼식 참석자들이 전날 밤 저수지 건너편에서 이상한 불빛을 보았다는게 밝혀지는데...


'해혼식' 이라는 소재가 돋보였던 작품. 대형 유튜버가 자신의 구독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땅을 이혼의 명소로 만들려고 했다는건 정말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추리적으로도 노천탕에 당연히 있어야 했을 '가운'이 없었던 점에 주목했다는건 괜찮은 발상이었으며. 수상쩍은 용의자들로 군수 등을 등장시킨 것도 좋았습니다. 탁해서와 군수의 검은 거래라던가, 군수의 새 여자 친구 등 복잡한 인간 관계는 읽는 재미는 물론이고 동기로서도 충분히 설득력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외의 추리할 여지는 거의 없다시피하며, 진범의 정체 역시 당황스러웠어요. 진범은 탁해서가 혜화당을 올 때 탔던 택시 기사였습니다. 그는 탁해서가 유명 유튜버라는걸 모르고 택시에 태웠다가, 자기 얼굴이 유튜브에 업로드 될까봐 카메라를 훔치려 했다가 사건이 일어났던 겁니다. 기사는 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범죄로 도주 중이었던 사기범이었거든요. 문제는 이런 내용을 독자는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다른 용의자들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동기가 있다손쳐도 곧 선거를 앞둔 군수가 직접, 그것도 여러 명이 머무는 숙소에서 범행을 저지를 리는 없습니다. 군수의 새 여자 친구인 약사가 얼굴 노출을 꺼렸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명 유튜버 해혼식에 참석한만큼 설득력없는 설정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실버타운, 하드보일드 파티>>
동철수가 휴대 전화까지 두고 휴가를 떠난 뒤 복귀하지 않아서 애를 태우던 박희윤은 경찰청장 의 부름을 받았다. 알고보니 동철수의 휴가는 청장의 지시에 의한 잠입 수사였었다. 유명 정치인 차진구가 백세그룹이 만든 고급 실버타운 힐링 힐에서 연달아 괴한의 습격을 받았던 사건 때문이었다...

반골 성향으로 정치계에 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스스로가 더러운 밀약과 검은 돈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차진구 캐릭터를 그려낸 묘사만큼은 좋았던 작품. 스스로만 옳다고 생각하는 나이 먹은 꼰대의 전형인데다가, 그 꼰대가 나름대로 힘까지 갖추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 주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외에 건질만한 요소는 없었습니다. 특히 추리적으로는 완전 꽝이에요. 진상은 첫 번째 습격은 차진구가 과거 받았던 불법 자금건을 뒤집어 쓰고 죽었던 보좌관의 아들의 복수였고, 두 번째 습격은 차진구의 자해였다는 건데, 이를 보좌관이 독특한 성이었다는 것으로 알아낸다는건 황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를 경찰, 그리고 보좌관 아들의 취업을 도운 백세그룹이 몰랐다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물론 CCTV에 찍혔던 '맨발 축제' 참석자들을 통해 CCTV가 바꿔치기 되었다는걸 알아냈다는건 나쁘지 않았어요. 그러나 문제는 이건 독자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정보였다는 겁니다. 때문에 급작스럽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억지로 추리물을 만들기 위해 삽입된 단서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어요. 두 번째 습격이 차진구의 자해였다는 것 역시 전개를 통해 너무 뻔하게 드러났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서촌 냉면집 살인사건>>
서촌의 유명 냉면집 <행복 면옥> 사장이 목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요리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거액을 투자했던 레스토랑을 말아먹어 가족 사업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었던 아들이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그는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아들은 오히려 미수반에 아버지가 가끔 밤마다 만나는 손님이 있었는데, 그 손님 정체를 알아내 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아마도 세계 최초일, 냉면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추리 단편. 하지만 이 작품의 가치는 그것 뿐입니다.
전개부터 억지스럽습니다. 경찰이 흥신소도 아니고, 아들의 부탁을 받아줄 까닭이 없잖아요? 냉면을 좋아하는 대통령이 밤에 몰래 가게를 찾아 왔을거라는 기대를 품고 경찰에 조사를 요청했다는 아들 생각 역시 설득력이 낮아요. 배달을 안하기 때문에 냉면집에 몰래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데, 이보다는 대통령을 위해 몰래 배달을 했다는게 더 말이 되니까요. 라이벌이었던 이웃 <효자 면옥> 사장이 도와준 자살이었다는 진상도 너무 허무했습니다.

맛집에 대해 비판하는 아들의 독설은 나름 와 닿는게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봤자 집안 돈을 날리고 아버지까지 죽게만든 기생충의 변명에 불과해서 별로 와닿지 않았어요. 식당 주인이 식당에서 가장 중요한게 손님과 소문 탓을 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차라리 경찰한테까지 반말이나 해 대던 아들놈의 비참한 말로가 잘 그려졌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나비 클럽, 미로 게임>>
미스테리아 5호에 수록되었던 단편을 이 작품 설정에 맞추어 개작한 작품.

그런데 아예 빼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분량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동철수 반장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작으로서의 가치는 한없이 낮은 탓입니다. 차라리 박희윤이 경찰이 되기 전 일화였다고 소개하며 수록했다면 개작하는 수고는 덜었을텐데 말이지요.
개작된 결과물도 좋다고는 보기 어려웠습니다. 박희윤은 경찰인데 왜 갈호태가 나서서 예전 인맥을 이용해야 했을까요? 괜한 억지만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만, 1.5점에 더 가깝습니다.

<<녹슨 총알이 지나간 자리>>
주바리 선배 남편 사건 수사를 부탁받은 박희윤은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고 경장에게 신분을 속이고 접촉했다. 고 경장은 유력한 증거라는 필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숨졌고, 필름을 가지고 도주하던 박희윤도 위기에 처하는데...

이십여년 전 사건에서 주바리 선배 남편이 총에 맞아 죽었던 사건 진상은 현재의 신아그룹 이사장이자 당시 여덟살이었던 아이가 떨어진 총을 들어 경찰을 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장 가족을 협박하던 운전사를 경찰이 사살했는데, 아이는 운전사 아저씨가 착한 사람인줄 알고 있어서 공격한 경찰을 총으로 쏴버렸던 거지요.

문제가 너무 많아서 뭐 부터 이야기해야 할 지 잘 모르겠지만, 우선 이야기 속 핵심 단서인 고 경장이 가지고 있던 필름 속 사진부터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이가 단지 총을 들고 있는게 찍혀있는 것에 불과한데, 이게 무슨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게 현장 사진인지, 당시 사진인지도 입증하기 쉽지 않아 보이는건 물론이고, 아이가 총을 쐈다는걸 밝히는건 불가능했을겁니다. 또 신아 그룹이 당시에도 경찰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도 마찬가지일거에요. 필름이 조작되었다고 얼마든지 우길 수 있어요.
앞서 해혼식에 등장했던 동철수의 친구 탁해서가 자신의 170만 유튜버 채널을 통해 진상을 공개했다고는 하는데, 이 역시 신아 그룹에서 충분히 무마할 수 있어 보였고요.
무엇보다도 여덟살짜리 아이가 친했던 운전 기사 아저씨가 총에 맞아 쓰러진 뒤, 총을 주워 복수했다는게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될까요? 고작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신아 그룹의 하수인들이 필름을 확보하기 위해 박희윤과 총격전, 그리고 차가 뒤집히기도 하는 자동차 추격전을 벌인다는게 더 말이 안되지요. 그것도 백주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은 <<다이하드>> 세계관이라면 모를까, 뉴욕에서도 있기 힘든 일일겁니다. 작가가 지나치게 영상화를 신경쓴 듯 한데, 과욕이었습니다.

박희윤이 경찰을 그만두고 사립 탐정이 되며, 동철수가 그 사무소에서 한 자리 차지하기를 꿈꾼다는 에필로그는 재미있었지만, 그 외에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이야기였어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22/06/16

룸 - 엠마 도노휴 / 유소영 : 별점 1.5점

 - 4점
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arte(아르테)

다섯 살 잭은 엄마와 함께 방 한 칸 짜리 별채 집에 감금된채 살아왔다. 엄마를 납치한 올드 닉은 매주 생필품을 가지고 모자를 찾아와 엄마를 농락하고 돌아가곤 했다. 그러던 중 올드 닉의 실직으로 위기 의식을 강하게 느낀 엄마는 잭이 죽은 것 처럼 올드 닉을 속여서 탈출시키고, 도움을 요청하게 만드는 '몽테크리스토 작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잭은 탈출에 성공하는데....

실화를 각색한 범죄 휴먼 드라마로 2015년 발표되어 주목받았었던 동명의 영화 원작 소설입니다. 영화 쪽이 훨씬 유명한 것 같네요. 직접적 피해자인 여성이 아니라 그 아들 잭이 화자이자 주인공인게 특징입니다.

전반부는 방 한 칸 집에 감금당한 상태로 나날을 보내는 엄마와 그 결과로 태어난 아이 잭의 생활을 그리고 있습니다. 모자가 가로세로 3.5미터에 불과한 공간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범인 올드 닉이 1주일마다 한 번씩 찾아와 엄마를 덮치고, 그 때마다 그가 가지고 오는 생필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비참한 생활 묘사는 정말로 굉장했습니다. 엄마는 극심한 치통에도 병원에 가지 못해 결국 이빨이 빠지고, 잭은 바깥 세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TV와 현실의 차이도 인지하지 못하는 등의 이야기가 설득력있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잭에게 운동과 교육을 시키며 최소한의 상식과 교양을 갖추게 하려는 엄마의 노력도 잘 보여주고 있고요.
또 이 와중에 모자 간의 애정, 어린 잭의 순진한 시선이 곳곳에 드러나는데, 비참한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같은 느낌을 전해주는게 독특했습니다. 자기가 피해자인줄 모르고, 자기가 감금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요정의 시선이랄까요?

이어지는 짤막한 중반부는 일종의 모험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직했다는 올드 닉의 말을 듣고, 집이 은행에 넘어가면 자기들이 죽을거라 확신했던 엄마의 탈출 계획이 중심이거든요. 이른바 '몽테크리스토 작전' 으로 올드 닉이 아이가 죽었다고 믿게 만든 후, 트럭에 싣고 매장하러갈 때 탈출하는 계획이었지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잭이 탈출하는데 성공함으로서 결국 모자는 구조되게 됩니다. 잭의 시점에서 묘사하고 있는 덕분에 훨씬 긴장감있는 이야기가 된 것 같아요. 어른이라면 쉽게 성공했겠지만, 잭은 세상물정이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고 바깥 세상을 처음 접해 보았기에 실패할 뻔 하니까요. 치밀한 계획 끝에 성공하는 탈주극은 아니지만, 충분히 설득력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후반부는 제대로 된 교육과 돌봄을 받지 못하고, 태어나서부터 집 안에 갇혀 자란 잭의 사회 적응기로 일종의 성장기였고요.

그런데 실존했던 범죄를 다룬 픽션이라기에 범죄 스릴러물을 기대했었는데, 그런 요소를 찾아보기는 힘들었습니다. 범죄 자체보다는 범죄의 결과를 그린 이야기니 당연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후반부는 영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이런 특수한 환경에 놓였을 아이의 심리를 유추하여 글을 쓴 상상력은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너무 길었어요.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내용도 뻔해서 지루하기만 했고요.
이 기나긴 잭의 성장기는 범죄와 천진한 아이를 대비시키고, 극적인 요소를 강화하기 위함이었겠지만, 차라리 아이러니 그 자체인 잭의 존재를 강조하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잭은 엄마가 감금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선물이지만, 아빠는 엄마를 감금한 잔인무도한 범죄자 올드 닉이니까요. 굉장히 고민해 볼 만한 주제인데 이 작품에서는 너무 짧게 언급되어서 아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큰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대했던 쟝르물도 아니라서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군요. 별로 권해드릴 책은 아니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에버노트의 문제로 두 번 날려먹었던 리뷰입니다. 세 번째도 날려먹을 뻔 했네요. 더 길게 적기도 힘들기에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2022/06/12

시시리바의 집 - 사와무라 이치 / 이선희 : 별점 2.5점

시시리바의 집 - 6점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편 유다이의 전근으로 도쿄로 이사왔지만, 도시에 적응하지 못해 외로워하던 가호는 고향친구 도시아키를 우연히 만난 후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집에서 만난 도시아키의 아내 아즈사는 공포에 질려있였다. 집에 원령이 출몰하기 때문이었다. 도시아키 불륜 상대의 저주 탓이라는 걸 알고 난 후, 결국 문제는 해결되었다. 문제는 두 부부가 집 안 가득한 모래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가호는 도시아키 집이 이상하다고 확신했지만 잃어버린 결혼 반지를 찾으려 그 집에 방문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도시아키가 모시고 사는 할머니가 친할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놀라 달아나려 했지만, 도시아키 부부의 공격으로 남편 유다이는 살해당했다. 가호는 도주와 격투 끝에 아즈사를 죽이는데 성공하나, 집 안에 있는 '무언가'가 모래로 변해 가호를 덮쳐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과거 버려졌던 도시아키 집을 탐험하다가 머리에 이상이 생겨버린 데쓰야는, 같이 탐험했다가 퇴마사로 각성해버린 히가와 함께 도시아키 집에 있는 '무언가'인 '시시리바'를 제령하기 위해 찾아오는데....


<<보기왕이 온다>>로 데뷰했던 작가 사와무라 이치의 최신작 호러 장편 소설. 집에 깃든 지박령(?) 탓에 벌어지는 공포와 그에 맞서 싸우는 퇴마사의 활약을 그린 전형적인 일본식 퇴마물입니다. 퇴마사 히가 자매가 주인공인 일련의 시리즈 중 한 권으로 보이는데 다른 작품은 읽지 않아서 모르겠군요. 이 작품만 읽어도 내용 이해에 큰 지장은 없습니다.

작품에서 핵심은 평범한 가정주부 가호 시점에서 그려지는 도시아키 가(家)의 괴이 현상입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깜짝쇼를 통해 섬찟함을 가중시키는 솜씨가 돋보였는데, 맨 첫 번째 에피소드의 깜짝쇼는 바로 '모래'입니다. 에피소드 내내 괴현상은 도시아키의 불륜 상대가 저주한 탓에 벌어졌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가장 눈에 보이는 괴현상인 '모래'는 없어지지 않았고 도시아키와 그 아내 아즈사 모두 모래를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상당히 섬찟했어요. 그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도시아키가 모시고 살던 할머니가 알고보니 친할머니가 아니었다는 반전으로 놀라움을 안겨주고요. 여기서 등장하는 도시아키의 “필요 없어? 그럼 죽일 거야? 이제 마리는 필요 없다고? 그렇구나..."라는 대사는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또다른 화자인 '나', 이가라시 데쓰야 시점의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지금 도시아키가 살고 있기 전, 하시구치 가족이 살고 있을 때 놀라갔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프롤로그는 짧지만 꽤 놀라왔습니다. 마지막에 엉망인 글로 채워버리는 센스 덕분에요. 하시구치가 이사간 뒤 폐가 탐험을 하다가 '시시리바'라는 무언가를 만나 모두가 망가져버리고 만다는, 전형적인 '귀신들린 집' 탐험 에피소드도 뻔하지만 재미있었고요. 스멀스멀하게 불쾌한 느낌이 차오르게 만드는데 확실히 재주가 있는 작가에요.

원래는 영적(靈的)인 가정 보안시스템, 즉 수호신으로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안전한 집안, 원만한 가정, 번창하는 가족을 지키는 존재였는데, 2차 대전 때 폭탄을 맞고 이상이 생겨 폭주하고 말았다는 '시시리바'에 대한 설정도 그럴 듯 했습니다. 폭주한 나머지 죽은 할머니 대신 도시아키가 동네 다른 할머니를 모시며 살게 만들었고, 임신했던 아즈사가 죽자 가호를 임신시켜 도시아키 집에 살게 만드는 식으로 지킬 집을 설정대로 만드는데 집착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결국 제령에 성공해서 가호와 도시아키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가호가 아이를 죽게 만든다는 에필로그는 가장 섬찟했던 부분 중 하나였고요.
그동안 다른 괴담물에서 보지 못했던, '모래'를 주요 도구로 삼는 능력에 대해서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상화하면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누가 봐도 이상하고 괴기한 집에, 심지어 남편이 증거를 찾아서 알려주며 가지 말라고 하는데 구태여 방문해서 화를 자초하는 가호의 몰상식적인 행동은 답답함을 자아내기는 합니다. 결국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진 뒤, 도시아키 집에서 시시리바를 제령하는 데쓰야와 히가의 활약이 펼쳐지는 결말 부분도 진부했고요. 시시리바가 모래를 조종하여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집에 있는 사람들을 조종하여 공격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 앞 에피소드에서 써먹었기 때문입니다.
히가의 능력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고작 담배 연기를 내 뿜는 정도로 수백년 이어온 지박령을 이길 수 있을거라고는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시시리바가 '개'를 무서워 한다는걸 알아낸 뒤 데쓰야의 애견 긴의 활약으로 제령에 성공하는 마무리는 너무 쉽게 간 느낌입니다.

마지막으로, 히가와 데쓰야가 도시아키 집을 찾은 건 가호가 도시아키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 집에 살게된 몇 개월 후로 묘사됩니다. 가호의 배가 제법 나왔다고 설명되니까요. 그렇다면 왜 이전에 경찰이 이 집을 찾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깁니다. 살해당한 가호의 남편 유다이는 주말에도 출근할 정도로 바쁜 회사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런 유다이가 무단으로 출근하지 않았는데 회사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게 말이 될까요? 심지어 유다이는 도시아키 집에 대해 근처에 사는 동료에게 물어보기까지 했으니, 경찰에 신고했다면 분명 바로 조사가 들어왔어야 마땅합니다. 이런 류의 퇴마물이 경찰력을 지나치게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아예 등장시키지 않는건 좀 아니지 않나 싶네요.

그래도 전체적인 설정과 구성이 꽤 잘 갖추어진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섬찟함 만큼은 충분히 제공하고 있어서 호러, 공포물 본연의 가치에 충실하다는게 마음에 드네요. 킬링 타임용으로는 제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6/11

기만의 살의 - 미키 아키코 / 이연승 : 별점 1.5점

 

기만의 살의 - 4점
미키 아키코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레 가문의 당주 하루시게가 아내 사와코, 양자 요시오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의 자켓에서 독이 들어있던 초콜릿 포장지 조각이, 그리고 사와코의 서재에서 그가 불륜을 저지르는 사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루시게가 범행을 인정하여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40년 후, 가석방된 그는 사랑했던 니레 가문의 둘째 딸 도코에게 자신이 함정에 빠졌으며 사형 선고만을 피하려 거짓 자백을 했가며, 무고함을 알리고 40여년 간 고민해왔던 범인의 정체와 트릭을 알리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도코로부터 온 답장에는 그의 추리를 반박하는 도코의 추리가 담겨 있었다....


1947년 생이라는 노인 작가의 고전적인 정통파 본격 추리물. 콩가루 지역 유지 가문에서 발생한 의문의 독살 사건이라는 기본 설정에서부터 맨 앞 부분에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가 수록되어 있는 구성, 그 외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용 모두 본격물 황금기 시대를 연상케하는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전개가 하루시게와 도코 사이에 오간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건 색달랐지만, 손으로 써서 편지 봉투에 넣고 보냈다는 형태에서 고전적인 스타일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메신저 대화로 이루어지는 작품이 나오는 시대이니까요.

이런 설정과 구성, 내용 외에 추리적인 요소도 고전 본격물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트릭' 이라는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하루시게와 도코의 편지를 통해 같은 사건에 대해서 무려 4개의 추리가 펼쳐지는 풍성함도 좋았습니다. 특히 사와코의 자작극이었다는 추리와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가 공범이었다는 추리는 무릎을 칠 정도로 그럴듯했습니다. 사쿠라와 스미에의 관계에 대한 조사 결과를 근거로 써 먹는 것도 상당히 괜찮았고요. 마지막에 양복에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은 트릭도 괜찮았어요. 처음에 요헤이와 하루시게 자켓을 바꾸어 걸어 놓은 뒤, 라이터를 꺼내는 척 양복 주머니에 조각을 집어 넣었다는 건데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딱 한 가지, 맨 처음에 효도가 범인임을 주장했을 때, 흰 커피잔에 다량의 아비산을 넣고 그 위에 물엿 코팅을 했다는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다는건 조금 별로였어요. 하루시게는 효도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 장치를 만든건 요시오였을 거라고 추리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 아이에게 목숨을 맡기는 장치를 시킨다는건 그다지 현실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독특한 장치 트릭인건 사실이고, 이외에도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은 많아서 즐거웠습니다.
하루시게가 죄를 인정했던 이유가 어쩔 수 없는 사형 선고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정도, 변호사 출신 작가답게 잘 풀어내고 있고요.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낡았을 뿐더러, 작위적이이라는 본격물 특유의 단점을 극복하지는 못한 탓입니다.
우선 전개의 핵심인 둘 사이에 오간 편지와 결말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첫 번째 편지에서 하루시게는 양복 속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은 방법은 결국 알아낼 수 없었지만, 니레 가문을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효도 유타카가 범인이라고 추리했습니다.
그러나 도코는 하루시게의 아내 사와코가 벌인 자작극이라는 자신의 추리를 보내옵니다.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그리고 남편 상복을 준비했기에 포장지 조각을 쉽게 넣을 수 있었다는게 증거라면서요.
다음 편지에서 하루시게는 도코의 남편 요헤이와 사쿠라, 그리고 가정부 스미에가 공범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와코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와 함께요. 그리고 도코가 사실은 요헤이를 사랑했던거 아니냐고 비난합니다.
그러자 도코는 요헤이는 사고사한게 아니며, 자신이 살해한 것과 다름없다는 편지를 보내옵니다.
하루시게의 마지막 편지는 도코가 요헤이와 공모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하루시게가 감옥 생활을 하게 한 진범이라는걸 밝히는 내용이었고요.
둘의 자살 이후 이 편지들이 발견되었고, 하루시게의 변호사이지 친우 기시가미의 도움으로 경찰은 도코가 하루시게를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모든 건 42년 간의 수감 생활 중 도코가 진범임을 확신했던 하루시게의 복수였다는게 드러나고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허나 이 편지의 왕래 자체가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첫 번째 편지를 보낸 뒤, 도코가 "맞아요, 효도가 범인일거에요" 라는 답장을 보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가 사와코가 범인이며, 사실 하루시게는 사와코를 사랑했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낼 이유는 없었습니다. 설령 그런 답장을 보냈다 한들, 하루시게의 두 번째 편지 -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 공범설 - 에 응해 사실 자기가 요헤이를 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편지를 보낸다는건 더 말이 안되고요. 솔직히 도코가 이런 장문의 답장을 쓴 것 부터가 억지에요. 42년은 긴 세월입니다. 아무리 불같은 사랑을 했더라도 수십년간 연락도 뜸했던 남자가 저런 편지를 보내왔을 때, 도코가 기꺼이 반기며 열정적으로 답장을 보내면서 결국 다시 사랑에 불타오른다는 것 역시 별로, 아니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도코가 범인이라는걸 증명할 수 없다는, 본격 추리물로 보기에는 심각한 결함도 있습니다. 도코가 범인이라는 증거도, 자백도 없기에 이는 하루시게의 확신에 불과합니다. 즉, 하루시게의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 공범설이 진짜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루시게가 니레 가문의 당주가 된 시점에서, 도코가 사와코를 살해할 동기가 없는 탓입니다. 딸들도 아버지가 며느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걸 묵인했을 정도로 니레 가문 당주의 위치는 확고했습니다. 불륜 따위로는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요. 물론 불륜 상대방이 자기 동생이라걸 사와코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상황이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하루시게가 당주가 된 직후에 도코가 사와코를 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설령 도코가 요헤이와 공모했다 하더라도, 하루시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누가 봐도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 곧바로 야심을 드러낸 사쿠라나 효도의 양복 속에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는게 당연했을테니까요. 사건을 무마하고, 이후 니레 가문의 터전을 다지는데도 훨씬 쉬웠을테고요. 하루시게가 경찰에서 '사와코가 진범이다' 라고 주장했을 거라는게 도코의 바람이었다는데, 황당하기 짝이 없었어요. 한마디로 "내가 당신 아내를 죽이고 당신에게 누명을 씌웠지만, 당신은 똑똑하니까 당신 아내 자작극이라고 경찰에 말하면 될꺼야!" 라는 건데, 뭐라 말하기도 힘든 억지 주장일 뿐이지요.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지막 반전(?)도 딱히 인상적이라고 하기는 힘들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고전 본격 추리물 애호가로서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새롭게 출간된건 반가왔지만, 완벽한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힘들기에 감점합니다. 사실 도코의 두 번째 답장부터는 읽으면서도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었어요. 딱히 고전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2/06/10

버드 박스 - 조시 맬러먼 / 이경아 : 별점 2점

 

버드 박스 - 4점
조시 맬러먼 지음, 이경아 옮김/검은숲

4년 전, 갑자기 나타난 크리쳐를 목격한 사람들이 발광하여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자살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창문을 가리고 숨어 살던 임산부 멜로리는 언니 섀넌이 발광하여 자살해버린 뒤, 위험을 무릅쓰고 생존자들이 모여산다는 조지의 집으로 향했다. 조지는 죽었지만 리더격인 톰의 원만한 성품덕분에 멜로리, 그리고 그 집에 있던 펠릭스, 줄스, 셰릴, 올림피아는 몇 개월 간 짧은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멜로리의 출산일에 그녀와 갓난 아기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비관주의자 돈이 다른 생존자 게리를 만난 뒤 세뇌되어, 집 창문을 가렸던 것들을 모두 치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4년 후 멜로리는 4살된 두 아이와 함께 거주지를 떠났다. 4년 전, 톰의 전화로 연결된 생존자 '릭'의 거처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이 모험을 위해 그녀는 두 아이의 청각을 극도로 강화시키는 훈련을 해 왔다...


신예 작가의 SF 크리쳐물. 무언가를 본 뒤 발광한다는 소재를 가지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닥친 위험과 공포, 그리고 극복 방법을 실감나게 그려낸 묘사가 좋았습니다. 폐쇄 공간에서 빚어지는 여러 긴장감도 잘 살아있어요. 단순히 '물을 뜨러 가는 행위', '배설물을 버리러 가는 행위'에서 긴장감을 빚어내는 솜씨에는 감탄했습니다.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집은 수력 발전으로 전기가 공급되며, 마당에 우물이 있고 일단은 몇 개월 버틸만한 식량을 갖추었다는 식으로 생존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준 것, 그리고 "크리쳐를 보면 발광하기 때문에 집의 창문까지 모두 닫은 폐쇄 공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설정을 "다른 매체, 예를 들어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크리쳐를 보아도 발광한다.", "동물들도 크리쳐를 보면 발광한다." 는 식으로 디테일을 보강한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비디오 카메라는 정말 생각도 못했었네요.

하지만 이외에는 볼 만한 부분이 많은건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일단 소재부터가 너무 진부합니다. 기묘한 상황 탓에 사람들에게 재난이 닥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특정 현상에 의한 급작스러운 실명도 <<걷는 식물 트리피드>>에 등장했던 설정이지요. 운 좋게 재난을 피한 생존자들이 최대한 조심하면서 살지만 위기가 닥친다는 전개 역시 크리쳐물 대부분에서 뻔하게 반복되어 왔습니다. 좀비물 거의 대부분이 이런 내용이잖아요?
물론 보기만 해도 사람, 동물을 발광시키는 크리쳐의 특수한 능력만큼은 독특한 요소였고, 이를 작품 안에서 잘 부각시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쳐에 대해 어떤 과학적인 근거나 설명은 없이 주인공 멜로리의 시점에서의 경험만 나열된다는건 문제입니다. 뒤로 가면 갈 수록 식상해지기만 할 뿐이었어요. 뭔가 살아남거나, 해결책은 없이 그냥 버티고 살아가는게 전부이니까요. 톰이 주도해서 활로를 모색하는 전개가 더 등장했더라면 좋았을텐데, 개 몇 마리를 데려오는게 전부라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또 전개의 클라이막스를 차지하는 돈의 폭주에서, 게리가 크리쳐를 보았음에도 어떻게 멀쩡했는지 설명되지 않는건 정말 답답했습니다. 설명이 부족해도 정도껏 했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멜로리와 올림피아가 임신했는데, 마침 그 둘이 출산할 때 돈이 폭주해서 모두가 죽는다는 작위적인 설정도 별로였고, 마지막에 멜로리가 안식을 찾게되는 피난처가 맹인 '릭'이 이끄는 맹인들 학교였다는 약간의 반전 역시 만족스럽지는 못했습니다. 읽으면서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사느니 차라리 스스로 맹인이 되는게 낫지 않나?" 라는 의문이 들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제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은 엔딩이었으니까요. 나름대로 해피 엔딩이라는 점 만큼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릭이 멜로리와 아이들 눈을 멀게 만드는 결말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앞서 아이들에게 이런저런걸 보게 해 주고 싶다는 바람과 대조되면서 더 큰 울림을 가져다 즐 수 있었겠지요. 솔직히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소소한 일상계 크리쳐물 분위기는 괜찮았지만 진부한 소재를 뻔한 전개로 풀어냈고, 결말도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감점합니다.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넷플릭스에서 영화화한 모양인데, 영화에 더 잘 어울리는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2022/06/04

웃어라, 샤일록 - 나카야마 시치리 / 민현주 : 별점 2점

 

웃어라, 샤일록 - 4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민현주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이토 제일 은행의 젊은 엘리트 은행원 유키 신고는 은행 섭외부로 발령받았다. 섭외부는 부실 채권을 회수하는 곳이었다. 은행의 주요 업무가 아니라는 점에서 낙담했지만, 곧바로 그곳의 에이스 야마가의 활약을 보고 채권 회수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야마가는 살해된채 발견되었고, 유키는 도자이 은행과 합병 시 부실 채권이 많으면 데이토 제일 은행이 불리해 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야마가가 맡았던 거액의 부실 채권 회수에 나서는데...

여러 편의 본격 추리물로 잘 알려져 있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 채권자가 채무자로부터 빚을 받아내는 이야기가 중심이라는 점에서는 <<우시지마>> 시리즈를 연상케 하기는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여기서 채권자 데이토 제일 은행은 불법은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빚을 받아내는 행위가 일종의 선행이자 일본의 경제를 살리는 초석처럼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채무자 쪽이 더 악질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우시지마>>와는 정 반대,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행에서 발생하는 대출에 대한 묘사는 상세했고, 특히 야마가의 입을 빈 자본 선순환, 그리고 은행의 잘못된 관행으로 부실 채권이 쌓여가는 이유 등 반쯤 전문적인 이론들을 이야기와 잘 결합하여 설명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마가는 채무자에게 원한을 사서 죽었다고 생각되었지만, 밝혀지는 실제 동기는 꽤 괜찮았습니다. 등장하는 대부분의 부실 채권이 섭외부 부장 가시야마가 결재를 올렸다는 설정이어서 의아했는데 이를 복선처럼 잘 활용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부실 채권은 결재자였던 가시야마의 상사 진나이의 음모였던 것이지요. 진나이는 데이토 제일 은행에 부실 채권을 잔뜩 만들어 몇 년 뒤로 예정된 합병 시 도자이 은행이 주도권을 쥐게 만드려는 작전을 실행했고, 그 댓가로 도자이 은행 섭외부 부장으로 이직할 수 있었습니다. 야마가는 이를 추궁하기 위해 진나이를 만났다가 살해당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빚을 받아내는 내용은 기대만큼 정교하게 그려지지는 못했습니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면,
첫 번째 채무자 가시와다의 경우, 그의 빚은 5백만엔밖에 안되고, 가시와다 명의의 땅이 있어서 미리 가압류만 걸어두면 즉시 회수가 가능했습니다. 이건 야마가가 딱히 뭘 했다고 보기 어려워요.
두 번째 채무자 인더스트리아 공업과 사장 쓰치야 고타로의 경우의 채무 1억 4천만엔도 회사 특허로 갚을 수 있었습니다. 파산 시키겠다고 협박하면서 쓰치야 사장을 정신적으로 넉다운시키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지만, 애초에 불필요한 협상이자 논쟁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렇게 모욕을 주지 않아도, 쓰치야 사장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었으니까요.
야마가가 죽은 뒤 유키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가관입니다. 우선 세 번째 채무자 가이에다 물산의 채무 20억엔은 '차환' 거래로 가이에다 물산을 분할한다는 해결책이 등장하는데, 이는 섭외부의 일개 은행원이 아니라 최소 부장급은 나서야 하는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애초에 설득의 문제가 아닙니다. 20억엔이라는 엄청난 돈에 대한 비지니스 문제잖아요? 게다가 가이에다 사장을 '설득'시키기 위해 록가수 스미라기 신이치와의 마약 커넥션을 들먹인 것도 억지스러웠어요.
네 번째 채무자인 종교단체 쇼도관의 채무 20억엔, 다섯 번째 채무자인 전 유력 정치인 시이나의 채무 20억엔, 여섯 번째 채무자인 야쿠자의 프런트 기업'아칼 에스테이트'의 채무 70억엔 해결은 그냥 만화같더군요. 쇼도관에는 신도 8만명에게 교주의 경이 담긴 CD를 팔아서 돈을 회수하라고 하고, 시이나의 경우는 담보물이었던 싸구려 그림의 가치를 억지로 높여 경매에서 빚을 벌어 들이고, 야쿠자에게는 빚 담보인 땅을 팔아서 돈을 갚은 뒤 그 곳에 새로운 개념의 맨션을 만들어 수익을 창출하라는 일종의 경영 컨설팅을 해주는 식인 탓입니다. 애초에 이런걸 왜 일개 은행원이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변제 계획을 세워 주는 것도 은행원의 할 일이라고 말하지만, 은행원의 변제 계획은 가진 자산에서 최대한을 뽑아내면 됩니다. 이렇게 이런저런 작전과 컨설팅으로 이익을 창출하는건 아닐거에요. 작전들도 너무 무난하고 쉽게 전개되어서 극적 긴장감을 느끼기도 힘들었고요.

열혈 청년인 유키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면서부터는 너무 뻔한 전개로 흘러가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냉혈한 야마가를 주인공으로 한 독특한 일상계 추리물 이야기로 풀어가는게 훨씬 매력적이었을 거에요. 야마가가 가시와다 집을 방문했을 때처럼 말이지요. 처음에는 단순히 독촉차 방문한 것으로 여겨졌었지만, 야마가는 더러워진 집안 상태와 그의 아내는 열심히 일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가시와다가 곧 이혼당해서 집을 팔게 될 거라는 걸 곧바로 추리해 내거든요. 하지만 유키에게는 이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앞서 동기 부분은 괜찮았다고 말했지만, '동기'만 괜찮았을 뿐 실제로 진나이가 야마가를 죽였을리는 없다는 문제도 큽니다. 진나이가 결재를 했던 채권들이 모두 부실화되었다 한 들 이미 퇴직한 사람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일부러 부실화되었다는걸 증명하기도 쉽지는 않을테고요. 예를 들어 야쿠자 '아칼 에스테이트' 채권의 경우, 이야기 중에도 리먼 사태 등으로 운이 없었을 뿐, 대출 당시에는 충분히 말이 되는 사업이었다고 소개되고 있을 정도지요. 즉, 진나이의 고의성을 입증할 증거가 제시되고 있지 못해서, 범행에 설득력을 느끼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눈여겨 볼 부분이 거의 없는, 흔해빠진 일본식 전문가 슈퍼맨의 만사해결 이야기입니다. 별로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디자인 너머 - 게슈탈텐 : 별점 2점

 

디자인 너머 - 4점
게슈탈텐 지음/윌북

얼마 전 까지 기아차의 디자인을 이끌었던 피터 슈라이어 전기. 출생 후 뮌헨과 런던에서 보낸 대학 시절, 아우디와 폭스바겐에서의 활약을 거쳐 기아에서의 경력이 화려한 도판과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의 디자인이 어디서 태동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던 기회였습니다. 비행기와 속도에 대한 관심, 유년 시절 환경 등을 보면 자동차 디자이너로 타고 난 사람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디자인 철학과 방법론도 상세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엿볼 수 있었고요. 특히 엔지니어들과 타협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UX 디자이너로서 많이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만한 볼륨으로 전기가 나올만한 디자이너인지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논조는 그렇지 않을 수 있어도, 결국 내용은 '피터 슈라이어는 대단한 아티스트이다!'라는게 전부인데, 책은 이를 독자들에게 설득시키고 공감하게 만드는데 성공한 결과물로 보이지 않거든요. 아무리 디자인이 호불호가 갈린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물론 그가 디자인했던 아우디 TT는 의심할 바 없는, 자동차 디자인의 한 획을 그은 디자인인건 분명합니다. 폭스바겐의 뉴비틀도 처음 나왔을 때는 놀라움을 안겨다 주었었고요. 기아의 자동차들에 이른바 '호랑이 코 그릴'이라는 디자인 언어를 도입하여 차량간 일체화를 준 것 역시 대단한 공로입니다. K5, 쏘울, 3세대 스포티지 등의 디자인도 성공적이었다 생각됩니다. 그러나 책에 수록된 작업들, 특히 기아에서의 결과물들을 모두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메기'라는 별명이 더 익숙했던 4세대 스포티지라던가, 레이는 개인적으로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10년대 이후 컨셉트 카들도 그리 디자인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고 보기는 힘드니까요. 팝 컨셉트, 네모, 이매진 바이 기아 등이 그러합니다. 특별히 실패했던 경험이라던가, 겸손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감점 요소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책의 만듬새는 나쁘지 않고, 인쇄의 퀄리티도 빼어나며 도판 역시 최고 수준입니다. 그러나 담고있는 내용이 책의 가격과 완성도에 어울리냐 하면 그렇다고 보기는 힘드네요. 자동차 디자인을 꿈꾸는 학생분이 아니시라면 딱히 권해드리지는 않습니다.

2022/06/02

샴 쌍둥이 미스터리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1점

샴 쌍둥이 미스터리 - 2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휴가 중 산불에 습격당한 퀸 부자는 탈주 끝에 산 정상에 있는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저택의 주인은 저명한 외과의사 사비에르 박사였다. 박사의 저택에는 머무르던 가족과 손님들은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다음 날, 사비에르 박사는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유일한 단서는 피해자 손에 남겨져 있던 찢겨진 카드 조각 뿐이었다. 이를 통해 퀸 경감은 사비에르 박사의 부인 새러가 범인이라고 추리했지만, 엘러리는 고심 끝에 카드는 조작된 증거이며, 조작한 건 사비에르 박사의 동생 마크였다는걸 밝혀내었다. 그러나 도주하다가 퀸 경감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은 마크마저도 살해되고 말았다. 현장에는 또다른 카드 조각이 남겨져 있었다....


엘러리 퀸국명 시리즈 일곱번째 작품. 2012년 시공사의 엘러리 퀸 컬렉션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던 작품입니다. 국명 시리즈는 더 이상 읽지 않기로 결심했었지만, 주말에 도무지 읽을 책이 없어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시나,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도 없던 기대 수준에도 전혀 미치지 못한 졸작이었습니다. 억지스러운 설정들, 도무지 설득력없는 범행, 어처구니없는 진상이 결합된 환장의 작품이었으니까요.
이 중 억지스러운 설정이 가장 거슬렸습니다. 휴가 중에 산불을 만나 산 정상 저택으로 도피했던 퀸 부자가 그곳에서 유명한 외과의사 사비에르 박사 가족과 손님을 만나게 되는 도입부부터 억지스러웠어요. 급작스러운 산불도 그렇지만, 유명한 외과의사가 은퇴 후에 첩첩산중 꼭대기에 기묘한 저택을 지어서 은신한다는건 대관절 무슨 설정일까요... 사비에르 박사가 샴 쌍둥이 동물들의 분리 실험을 했다는 설명과 작중 묘사를 통해 <<닥터 모로의 섬>>같은 매드 사이언티스트같은 느낌을 전해주려고 애쓰지만 유치하기만 했습니다.
물론 정통 본격물은 어느 정도, 아니 꽤 많이 허구와 상상이 결합되어 있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죠.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근거지를 찾은 퀸 부자가 악을 물리친다!는 아동용 모험물이었다면 모를까, 정통 본격물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이 정도 설정이라면 사비에르 박사가 괴물이라도 하나 만들어 놓았어야 하는데, 나오자마자 죽어버리니 그것도 허무했고요.
산을 덮친 산불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저택에 갖혀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과정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완벽한 '클로즈드 서클' 상황이기는 한데, 이 정도 되는 첩첩산중 저택이라면 구태여 이런 억지를 덧붙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형편없었습니다. 사비에르 박사 살인 사건은 저택 평면도까지 삽입해가며 뭔가 대단한 트릭이 있는 것 처럼 꾸며 놓았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현장 조작을 통한 아주 약간의 암호(?) 트릭 정도만 등장할 뿐이지요.
엘러리가 마크의 현장 조작을 알아챈건, 단지 마크 혼자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유치합니다. 요새는 아동용 추리 퀴즈에도 써먹기 힘든, 그런 추리에요. 설득력이 별로 높지 않습니다. 오른손잡이는 카드를 찢고 남은 조각을 왼손에 쥔다는 근거로 마크가 범인이라고 우기기는 힘드니까요. 총에 맞아 곧 죽을 피해자가 급한대로 반대 손에 카드 조각을 남겼을 수도 있는 등, 여러가지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의 샴 쌍둥이도 알고보니 "찢어진 다이아몬드 잭 카드" 라는 단서에 끼어 맞추기 위해서 등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쌍둥이의 성 "카로"는 영어의 다이아몬드고, 잭 카드에는 젊은 쌍둥이가 그려져있는데 이를 반 찢었다는건 그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 뜻이라면서요. 하지만 이렇게 갖다 붙인다면, 범인이 아닐 사람이 있을까요? 젊은 청년, 즉 엘러리가 범인일 수도 있잖아요? 이보다는 차라리 퀸 경감의 S.I.X 추리가 훨씬 설득력 높았습니다.
책 뒤에서 국명 시리즈 중 유일하게 '독자에의 도전'이 없는 이유를 스토리에 빠져들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설명하는데,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말입니다. 완벽한 트릭이나 추리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에 삽입하지 못한 것에 불과해요. 유일한 증거는 '범인은 반지를 훔치는 도벽이 있다' 밖에 없거든요. 엘러리도 하는 일이라곤 모든 사람들 앞에 반지를 꺼내어 놓고 그걸 훔치는걸 참지 못하는 사람이 나오는걸 기다렸을 뿐입니다. 이건 추리도 뭐도 아니지요.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지도 않았고요.

게다가 새러가 사비에르 박사를 살해한 범행도 어처구니 없어요. 아무리 질투에 눈이 멀었다 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손님들까지 방문했고 산불로 사람들이 오가는게 불가능한 바로 그날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그 상황에서 카드를 이용하여 다이잉 메시지를 조작했다는 것도 억지입니다. 엘러리 퀸의 말대로 퀸이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별다른 의미없이 넘어갔을 단서였으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 범행인 마크 사비에르 살해 역시 설득력이 전혀 없어요. 마크가 범인이 누구인지 고백하려 해서 그를 살해했다는데, 마크는 새러가 범인인 것 처럼 현장을 조작한게 들통나 도주하다가 총에 맞은 주요 피의자입니다. 그의 고백이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질리 없습니다. 당연히 증거가 될 수도 없고요.

엘러리 퀸의 대부분의 다른 국명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전개도 문제가 많습니다. 첫 번째로 일종의 깜짝 쇼를 벌여야 했던 샴 쌍둥이의 등장은 시시합니다. 카로 부인이 아들 샴 쌍둥이의 분리 수술을 부탁하고자 저택에 아들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사비에르 박사와 손님들이 품고있던 핵심 비밀이었지만, 퀸 경감이 거대한 '게'와 사교계의 유명인사 마리 카로 부인을 목격했던 것, 그리고 사비에르 박사의 직업과 제목을 통해 초반부에 이미 드러나 버리고 맙니다.
또 퀸 경감이 사비에르 박사가 손에 쥐고 있었던 카드인 스페이드 6로 새러 사비에르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새러 이제르 사비에르 : S.I.X), 뒤이어 엘러리 퀸이 유일한 왼손잡이였던 마크 사비에르가 범인이라고 밝히고, 도주하다 잡힌 마크 사비에르가 진범이 누구인지 밝히려다 살해당하고, 또다시 엘러리가 마크의 다이잉 메시지인 다이아몬드 잭 카드를 통해 쌍둥이가 범인이다!라고 주장하는걸 과정 역시 한심하기 그지 없습니다. 남은 사람들을 한 명씩 차례대로 범인이라고 우기는 꼴이잖아요. 이 친구가 과연 명탐정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화재로 갇힌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재난물로서의 가치가 더 높지 않나 싶네요. 엘러리 퀸의 절대적인 팬이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똑같이 샴 쌍둥이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에도가와 란포의 <<외딴섬 악마>>가 있는데, 이 작품과 비교하면 노벨 문학상 수상작 급이니 차라리 이 작품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살짝 등장하는 샴 쌍둥이 중 한 명이 범인일 때 어떻게 형벌을 내릴 수 있을까?에 대한 딜레마가 더 재미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로 끌고나가는게 더 나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