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22/06/11

기만의 살의 - 미키 아키코 / 이연승 : 별점 1.5점

 

기만의 살의 - 4점
미키 아키코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레 가문의 당주 하루시게가 아내 사와코, 양자 요시오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의 자켓에서 독이 들어있던 초콜릿 포장지 조각이, 그리고 사와코의 서재에서 그가 불륜을 저지르는 사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루시게가 범행을 인정하여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40년 후, 가석방된 그는 사랑했던 니레 가문의 둘째 딸 도코에게 자신이 함정에 빠졌으며 사형 선고만을 피하려 거짓 자백을 했가며, 무고함을 알리고 40여년 간 고민해왔던 범인의 정체와 트릭을 알리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도코로부터 온 답장에는 그의 추리를 반박하는 도코의 추리가 담겨 있었다....


1947년 생이라는 노인 작가의 고전적인 정통파 본격 추리물. 콩가루 지역 유지 가문에서 발생한 의문의 독살 사건이라는 기본 설정에서부터 맨 앞 부분에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가 수록되어 있는 구성, 그 외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용 모두 본격물 황금기 시대를 연상케하는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전개가 하루시게와 도코 사이에 오간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건 색달랐지만, 손으로 써서 편지 봉투에 넣고 보냈다는 형태에서 고전적인 스타일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메신저 대화로 이루어지는 작품이 나오는 시대이니까요.

이런 설정과 구성, 내용 외에 추리적인 요소도 고전 본격물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트릭' 이라는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하루시게와 도코의 편지를 통해 같은 사건에 대해서 무려 4개의 추리가 펼쳐지는 풍성함도 좋았습니다. 특히 사와코의 자작극이었다는 추리와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가 공범이었다는 추리는 무릎을 칠 정도로 그럴듯했습니다. 사쿠라와 스미에의 관계에 대한 조사 결과를 근거로 써 먹는 것도 상당히 괜찮았고요. 마지막에 양복에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은 트릭도 괜찮았어요. 처음에 요헤이와 하루시게 자켓을 바꾸어 걸어 놓은 뒤, 라이터를 꺼내는 척 양복 주머니에 조각을 집어 넣었다는 건데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딱 한 가지, 맨 처음에 효도가 범인임을 주장했을 때, 흰 커피잔에 다량의 아비산을 넣고 그 위에 물엿 코팅을 했다는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다는건 조금 별로였어요. 하루시게는 효도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 장치를 만든건 요시오였을 거라고 추리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 아이에게 목숨을 맡기는 장치를 시킨다는건 그다지 현실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독특한 장치 트릭인건 사실이고, 이외에도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은 많아서 즐거웠습니다.
하루시게가 죄를 인정했던 이유가 어쩔 수 없는 사형 선고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정도, 변호사 출신 작가답게 잘 풀어내고 있고요.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낡았을 뿐더러, 작위적이이라는 본격물 특유의 단점을 극복하지는 못한 탓입니다.
우선 전개의 핵심인 둘 사이에 오간 편지와 결말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첫 번째 편지에서 하루시게는 양복 속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은 방법은 결국 알아낼 수 없었지만, 니레 가문을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효도 유타카가 범인이라고 추리했습니다.
그러나 도코는 하루시게의 아내 사와코가 벌인 자작극이라는 자신의 추리를 보내옵니다.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그리고 남편 상복을 준비했기에 포장지 조각을 쉽게 넣을 수 있었다는게 증거라면서요.
다음 편지에서 하루시게는 도코의 남편 요헤이와 사쿠라, 그리고 가정부 스미에가 공범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와코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와 함께요. 그리고 도코가 사실은 요헤이를 사랑했던거 아니냐고 비난합니다.
그러자 도코는 요헤이는 사고사한게 아니며, 자신이 살해한 것과 다름없다는 편지를 보내옵니다.
하루시게의 마지막 편지는 도코가 요헤이와 공모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하루시게가 감옥 생활을 하게 한 진범이라는걸 밝히는 내용이었고요.
둘의 자살 이후 이 편지들이 발견되었고, 하루시게의 변호사이지 친우 기시가미의 도움으로 경찰은 도코가 하루시게를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모든 건 42년 간의 수감 생활 중 도코가 진범임을 확신했던 하루시게의 복수였다는게 드러나고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허나 이 편지의 왕래 자체가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첫 번째 편지를 보낸 뒤, 도코가 "맞아요, 효도가 범인일거에요" 라는 답장을 보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가 사와코가 범인이며, 사실 하루시게는 사와코를 사랑했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낼 이유는 없었습니다. 설령 그런 답장을 보냈다 한들, 하루시게의 두 번째 편지 -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 공범설 - 에 응해 사실 자기가 요헤이를 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편지를 보낸다는건 더 말이 안되고요. 솔직히 도코가 이런 장문의 답장을 쓴 것 부터가 억지에요. 42년은 긴 세월입니다. 아무리 불같은 사랑을 했더라도 수십년간 연락도 뜸했던 남자가 저런 편지를 보내왔을 때, 도코가 기꺼이 반기며 열정적으로 답장을 보내면서 결국 다시 사랑에 불타오른다는 것 역시 별로, 아니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도코가 범인이라는걸 증명할 수 없다는, 본격 추리물로 보기에는 심각한 결함도 있습니다. 도코가 범인이라는 증거도, 자백도 없기에 이는 하루시게의 확신에 불과합니다. 즉, 하루시게의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 공범설이 진짜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루시게가 니레 가문의 당주가 된 시점에서, 도코가 사와코를 살해할 동기가 없는 탓입니다. 딸들도 아버지가 며느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걸 묵인했을 정도로 니레 가문 당주의 위치는 확고했습니다. 불륜 따위로는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요. 물론 불륜 상대방이 자기 동생이라걸 사와코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상황이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하루시게가 당주가 된 직후에 도코가 사와코를 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설령 도코가 요헤이와 공모했다 하더라도, 하루시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누가 봐도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 곧바로 야심을 드러낸 사쿠라나 효도의 양복 속에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는게 당연했을테니까요. 사건을 무마하고, 이후 니레 가문의 터전을 다지는데도 훨씬 쉬웠을테고요. 하루시게가 경찰에서 '사와코가 진범이다' 라고 주장했을 거라는게 도코의 바람이었다는데, 황당하기 짝이 없었어요. 한마디로 "내가 당신 아내를 죽이고 당신에게 누명을 씌웠지만, 당신은 똑똑하니까 당신 아내 자작극이라고 경찰에 말하면 될꺼야!" 라는 건데, 뭐라 말하기도 힘든 억지 주장일 뿐이지요.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지막 반전(?)도 딱히 인상적이라고 하기는 힘들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고전 본격 추리물 애호가로서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새롭게 출간된건 반가왔지만, 완벽한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힘들기에 감점합니다. 사실 도코의 두 번째 답장부터는 읽으면서도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었어요. 딱히 고전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