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22/06/24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 잇폰기 도루 / 김은모 : 별점 2점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 4점
잇폰기 도루 지음, 김은모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도권에서 발생한 세 건의 연쇄살인사건이 단서가 없어서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진범 '백신'이 다이요 신문의 기자 잇폰기 도루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인간은 바이러스이며 자신은 백신이라며 잇폰기 도루와 다이요 신문 지면을 빌린 토론을 제안했다. 잇폰기 도루는 범인의 체포와 추가 범행을 막기 위해 토론에 응했고, 적자로 치닫던 다이요 신문의 경영도 급속도로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신이 불특정 다수에게 '살인 예고장'을 보냈다는 기사가 발표된 뒤, 잇폰기에게 에바라 요이치로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자신의 집에 배달되었던 예고장을 들고....


신인작가 잇폰기 도루가 발표해서 제 27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에서 <<시인장의 살인>>에 뒤이은 우수상을 수상했던 작품. 드라마로까지 제작될 정도니 꽤 인기를 끈 듯 합니다. 정통 본격물 애호가로서 '아유카와 데쓰야 상'의 권위를 잘 알고 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신문사 내의 조직 체계와 구성, 신문이 제작되는 과정, 신문사의 경영 상황 등 신문에 관련된 디테일한 묘사는 굉장하더군요. 작가가 61년 생으로 오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데뷰했다는데, 분명 신문사에서 일했을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또 전성기 정통 사회파 추리물이 연상될 정도로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며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도 가득합니다. 조금 독특한건 '대조'를 통해 양 쪽 모두를 극대화시키는 수법을 쓴다는 점이에요. 신문이 수행해야만 하는 사회적인 역할과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과의 괴리를 대조시킨다던가, 백신의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는 주장과 그걸 뒷받침하는 여러가지 광기와 추악함 설명과 함께 에바라 요이치로 시점에서 에바라 가족의 끈끈한 사랑을 그려내는 식으로요.
아울러 연쇄살인범이 신문 기자와 신문 지면을 통해 토론을 벌인다는 아이디어도 흥미로왔으며, 살인범 에바라가 잇폰기 도루에게 집착한 이유가 아들 요이치로의 친부였기 때문이었다는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요소를 잘 살렸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개의 핵심인 '토론' 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비슷한 주장이 반복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인 내용까지 인용해가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척은 하지만, 길게 묘사될 내용은 아니었어요. 신문에 실렸을거라 생각되는 글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이보다는 백신의 성명을 기자와 각계 전문가들이 분석하는 식의 기사 형태가 더 설득력이 높았을 것 같습니다.
전개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습니다. 왜 토론을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부터 부족합니다. 에바라가 잇폰기에게 구태여 연락을 해서 요이치로의 친아버지가 범인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이 부분을 뺀다 하더라도 전개에 별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에바라가 과거 아동 학대의 피해자로 잘 성장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암에 걸린 아내의 사망으로 갑자기 분노가 폭발했다는 동기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여러 등장 인물들이 모두 가정 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불필요한 일종의 맥거핀일 뿐이었습니다.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이라는 이력에 어울리는, 정통 본격물적인 요소도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진범이 에바라였다는 반전 자체만큼은 나쁘지 않아요. 잇폰기에게 보낼 편지를 아들 요이치로가 봤다고 착각한 나머지, 살인 예고장을 보냈다는 식으로 둘러댔지만 자기가 받은 예고장과 실제 보낸 예고장의 시기가 일치하지 않은게 발목을 잡는다는 상황도 나름대로 설득력있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예고장을 언제 받았는지에 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는 알려주지 않는게 문제에요. 이 탓에 독자들은 공정하게 추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이래서야 정통 본격물로 보기는 힘들지요.
불특정 다수라 생각했던 피해자들의 연결고리가 '상수리 나무집'이라는 아동 보호 센터에 맡겨진 아이가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를 경찰과 취재한 기자들 모두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 신상부터 파악하는게 수사와 취재의 기본이 아닐까요? 물론 저 단서만 가지고 진범 에바라를 찾아내는건 힘들었겠지만, 최소한 동기만큼은 알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에바라가 게가사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행했던 여러가지 공작은 눈여겨볼만 했지만, 교수의 알리바이가 없었던건 어떻게보면 '운'의 영역이고, 신문사에서 협박 전화를 걸었던게 발각되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완벽하게 누명을 씌웠는데, 잇폰기 도루의 추리만 듣고 경찰도 에바라가 범인이라고 여긴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어요. 범행 현장에 남겨졌던 담배 꽁초의 DNA는 게가사와 교수의 것이었고, 게가사와 교수 연구실에서 백신이 편지를 보낼 때 썼던 봉랍과 스탬프가 발견되었으며 그 외 여러가지 증거들 모두가 게가사와 교수가 범인임을 가리키니까요. 백신의 편지보다 훨씬 명확한 증거잖아요?

또 사회파 추리물같았던 부분도 변죽만 올리고 끝나서 아쉽습니다. 특히 적자를 보던 다이요 신문이 살인범과의 토론으로 돈을 벌어서 기사회생한다는 딜레마를 잘 끝맺지 못한 탓이 커요. 괜히 다이요 신문 관계자가 범인이 아닐까하는 분위기만 살짝 풍기는게 전부거든요.
이런 사회파스러운 내용과 정통 본격물스러운 내용이 잘 결합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아니, 완벽하게 분리된 다른 이야기라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아예 사회파다운 이야기로 풀어내던가, 아니면 보다 본격적인 요소를 도입하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양 쪽 모두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이도저도 못한 결과물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