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17/01/30

럭키 (2016) - 이계벽 : 별점 2.5점



옥수수 설특선 무료 영화로 보게 된 작품. 유해진 주연의 작년말~올초 시즌, 무려 7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깜짝 히트작이죠.

'오해'로 점철된 상황을 다루는 코미디물인데 설정은 지극히 뻔합니다. 설정별로 몇가지 예를 들어보죠. 우선 기억을 잃은 킬러가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 잘 아시다시피 <<본 아이덴티티>>가 있습니다. <<롱키스 굿나잇>>도 같은 내용이고요.
얼치기 배우가 킬러를 연기한다. 미타니 코키의 <<매직 아워>>가 대표적입니다. 전혀 다른 일반인이 킬러, 혹은 정부 요원으로 오해받는다는 변주도 흔하디 흔하죠. 톰 행크스가 정부 요원으로 오해받는 <<사랑의 스파이>>,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쇄 살인범으로 오해받는 <<미스터 몬스터>>, 얼마전 소개해드린 <<폴리팩스 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분명히 원작이 있는 작품이고, 흔한 설정이라면 그것을 얼마나 잘 풀어냈느냐가 중요할테니 큰 단점은 아닙니다. 그리고 중반부까지의 이야기는 꽤 설득력이 높습니다. 재성 (이준)이 형욱 (유해진)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이 목욕탕에서 열쇠를 바꿔치기 한 탓이고, 그것은 이전에 유해진의 명품 시계를 보았다는 아주 작은 복선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등 이치에 맞게끔 잘 짜여져 있는 편이거든요.
이후 형욱이 재성이 사진을 다 태워버렸다던가, 아버지 이발소에서 손님과 하는 대화를 오해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오해를 계속하는 과정마다 삽입되는 에피소드들과 재성이 형욱의 타겟(?)과 사랑에 빠져 보호해주려 하는 전개, 형욱이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분식집 종업원으로, 배우로 성공해 나가는 이야기들도 꽤 그럴싸합니다. 식당에서, 그리고 배우로 성공하는 과정이 특히 그러해요. 킬러로 갈고 닦았던 소양 (칼 솜씨와 무술,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이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말이죠. 아울러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기억을 잃은 형욱의 좌충우돌 행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유해진씨의 연기도 좋았고요.

그러나 형욱이 킬러가 아니라 사실은 '이레이저' 였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는 솔직히 별로였어요. 형욱이 사실은 착한 사람이었다라는, 해피엔등으로 가기 위한 선택으로 보이는데 어설프고 말도 안되죠. 비슷한 이야기를 <<시티헌터>> 초반부 에피소드에서 접한 적이 있는데, 최소한 그때는 진짜로 총을 쏴서 총상을 입혔을 뿐더러 타겟의 탈출 작전도 정교하게 그려졌었죠. 그냥 킬러들끼리 칼질하다 죽는다는 결말은 여러모로 많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 외에도 당연히 숨어 살아야 할 두명이 배우로 계속 활동한다는 등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적지 않습니다.
또 유해진씨의 연기는 좋았다고 말씀드렸지만 적역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재성 역의 이준씨와 바뀐 느낌이랄까요? 냉정하고 잔인한 킬러는 보다 훤칠하고 잘생긴 배우가 맡고, 안 팔리는 단역 배우는 그보다 못한 인상의, 완전 찌질해보이는 배우가 맡는 것이 더 설득력이 높았을 것 같아요. 액션 연기가 좀 된다고 갑자기 뜨는 것 보다는 액션이 되는데 잘생기기까지 했다!가 더 그럴듯하잖아요. 개인적으로는 형욱 역할에는 정우성, 이정재 급 배우가, 재성 역할에 유병재씨가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설 연휴 때 보기에는 그런대로 적당한 이야기이긴 했습니다. 적당히 웃기기도 하고, 적당히 재미있기도 하니까요. 코미디 영화에서 치밀한 논리적 전개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일테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킬링타임용 영화로 추천드립니다.

2017/01/28

칼리의 노래 - 댄 시먼스 / 김미정 : 별점 3점

칼리의 노래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시인 보비는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진 시인 M.다스가 아직 살아있고, 캘커타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된 잡지사의 의뢰로 아내 암리타, 젖먹이 딸 빅토리아와 함께 캘커타로 향한다. 목적은 M.다스의 신작 확보와 그에 대한 기사 작성. 보비는 그를 찾아온 조력자 "크리슈나"를 통해 M.다스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신작에 얽힌 "칼리" 신을 모시는 신앙과 폭력에 대해 알게 된다.
손에 넣은 M.다스의 신작을 독파한 보비는 반은 협박에 가까운 어거지로 M.다스를 직접 만나게 되지만 이후 다스의 죽음, 카팔리카 교단의 납치와 폭력에 휩쓸리게 되고 크리슈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호텔에 돌아오지만 빅토리아가 유괴된 것을 알게 되는데....


장르 소설가 댄 시먼스의 데뷰작. 캘커타를 무대로 범죄 집단의 광기에 휩쓸린 시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세계환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스티븐 킹, 딘 쿤츠 등이 격찬한 공포 소설이라기에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명성이 허언은 아니더군요. 확실히 재미있었어요. 사실 보비의 임무(?)는 별게 없습니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시인의 복귀작을 구해오고, 관련된 기사를 쓰는게 전부니까요.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독자에게 흥미롭게 전달하는 솜씨가 정말 빼어나며, 그 바탕에는 발군의 묘사력이 자리합니다. 캘커타라는 곳에 절대로 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글 솜씨가 가장 돋보여요. 이 작품의 첫 문장부터가 그러합니다. "어떤 장소는 너무나 사악하여 그 존재를 허락할 수 없다. 어떤 도시는 지독히 악랄해서 용납할 수 없다. 캘커타는 그런 곳이다." 작품 내내 이 첫 문장을 그대로 증명하듯 캘커타의 치부와 오점만을 강하게 드러내어 상세하게 그려냅니다. 이러한 캘커타 묘사 덕에 "폐쇄공포증"이라고 불러도 좋을 공포감이 모락모락 생겨나고요. 특정 장소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데 그 장소나 너무나 혐오스럽게 묘사되니 당연한 결과겠죠. 이렇듯 특정 장소에 대한 혐오감과 폐쇄 공포증을 불러 일으키는 위력은 스티븐 킹의 <<아주 비좁은 것>>과 좋은 비교가 될 정도에요. 이러한 곳에서 하나 뿐인 아이가 사라졌다니... 그 공포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이러한 공포에 감정이입이 가능하도록 묘사가 빼어나서 그 위력이 더욱 배가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외의 묘사들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크타난다지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카팔리카의 예배 의식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아주 좋은 예입니다. 엄청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되어 있어 보이는 디테일에다가, 신상이 밟고 있는 시체와 들고 있는 참수된 목을 이용한 아이디어도 아주 공포스러워서 좋았어요. 무엇보다도 익사한 시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장면은 정말이지 압권이었고요. 이국적이면서도 충분히 무섭기에 시각화하더라도 아주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영상화되지는 않은 듯 해서 좀 의외였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한 <<칼리의 노래>>에 대한 아이디어도 아주 좋아요. 일종의 서사시와 현대 문명을 결합하여 설명하는데 번역된 결과물로는 정말 천재 시인의 작품인지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저는 아이디어만으로도 놀라운 결과물로 느껴졌어요. 현대 문명이 진정한 폭력의 시대라는 것을 광고나 뉴스 기사와의 결합을 통해 (의도한 것이던 아니던) 잘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시 속 표현 그대로 "칼리의 시대가 열렸도다"! 인 것이죠.
그리고 적절하게 등장하는 소소한 액션, 빅토리아를 잃었지만 보비와 암리타 부부는 결국 어둠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 발을 내딛는다는 나름대로의 해피 엔딩도 괜찮았습니다. 제가 해피 엔딩을 좋아하기도 할 뿐더러, 이 정도 고초를 겪었으면 좀 행복해져도 될 것 같거든요.

하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개연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주요 인물인 보비, 크리슈나의 급격한 심리 변화와 행동들의 이유, 목적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보비가 다스를 꼭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 - 보비가 원고를 손에 든 시점에서는 M.다스를 만날 이유는 없음 -, 만남 이후 크리슈나가 건네준 권총을 M.다스가 부탁한 시집 속에 숨겨 넣은 이유, 마지막에 보비가 발작적으로 캘커타로 돌아가 닥치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는 등 이야기의 핵심 변곡점 모두가 그러합니다. 크리슈나 즉 산자이의 목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카팔리카가 되고 싶었지만 되고 난 이후에는 왜 보비를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를 전혀 모르겠거든요. 칼리 신의 뜻도 아니고, 그 스스로 칼리 신을 거역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을 정도의 실력자로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죠. 만약 크리슈나의 행동이 카팔리카의 목적이라면 M.다스를 죽인 이유도 이해 불가입니다. 그냥 놔 두었어도 어차피 오래 갈 목숨은 아니고, 시의 출간을 막기 위해서라면 보비와의 만남과 죽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요. 이 모든 것이 칼리 신의 안배라고 한다면 최소한 그 안배, 계획이 무엇인지 정도는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 폭력의 시대가 돌아왔음을 선언한다... 정도로는 많이 부족했어요.
빅토리아를 납치한 것도 밀수품 운반을 위한 악당들의 음모였는지, 칼리 교도인 카팔리카들의 복수인지도 결국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악당들의 음모라면 사전의 안배 - 다스의 조카라는 카마키야 브하라티의 존재 - 라던가, 차터지가 M.다스와의 면담을 주선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카팔리카가 연류되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좀 애매해요. 이렇듯 좀 모호한 이야기가 '환상문학' 스타일이기는 합니다만 제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보비가 과거 성폭행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등의 짤막한 묘사는 완전히 사족에 불과했어요.

이렇듯 설명은 부족하나 재미도 있고 묵직한, 좋은 장르 문학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만큼 장황하면서도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죠. 별점은 3점입니다. 공포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데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아 조금 감점하지만 추천작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고보니 아주 무섭지는 않지만 환상 문학 쪽으로는 최고 수준이라는 점은 앰브로스 비어스 작품과도 비슷하군요. 여튼, 아직 이 작품을 읽어보지 못하신 장르문학 팬 분들 모두에게 추천드리는 바 입니다.

덧붙이자면, 그 동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번 독서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인도는 절대 가면 안된다는 것을. 댄 시먼스가 캘커타에 대체 왜 이렇게까지 앙심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생각에는 이 책을 읽은 독자의 대부분은 캘커타라는 곳을 방문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2017/01/27

만화의 길 (망가노미치) 1~4 - 후지코 후지오 A : 별점 3점



만화가 후지코 후지오 컴비 (그 중에서도 A인 마가 미치오)를 모델로 한 장편 만화. 전 4권짜리 애장판으로 전체 연재분에서 <<입지편>>, <<청운편>>, <<야스나로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권당 900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마가 미치오와 사이노 시게루가 만화가를 꿈꾸다가 데뷰하고, 성공 가도를 달리지만 스스로의 과욕과 실수로 쓰디쓴 좌절을 맛본 후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구하기는 오래 전에 구해 놓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다가 올해 들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독파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네요.

"만화가가 나오는 만화는 재미있다!"라는, 제가 만든 말이 있습니다. 대표격인 <<바쿠만>>, <<아오이 호노오>> 외에도 개그 만화인 <<호에로 펜>>, <<만화가의 사랑>>, <<만화가와 어시스턴트>>, <<월간 순정 노자키군>> 등등 만화가가 나오는 만화는 뭐 하나 빼 놓기 어려울 만큼 재미있었으니까요. 하라 히데노리의 <<언제나 꿈을>>은 조금 취향과 다르긴 했지만 뭐 나쁘진 않았고요.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다른 작품들 못지 않게 재미있었습니다! 어린 컴비가 만화가로 데뷰하고 연재작을 이어간다는 부분은 <<바쿠만>>에 가까운데 거장의 실제 경험이 뒷받침된 덕에 큰 설득력을 갖추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물론 오바타 다케시와. 컴비도 경험이야 있었겠죠. 허나 이 작품을 그린 후지코 후지오 A는 본인 스스로 만화의 거장일 뿐 아니라 초창기 시절을 데즈카 오사무이시노모리 쇼타로, 아카츠카 후지오 등 토키와 장을 중심으로 현대 일본 만화 거장들과 함께 한, 굉장히 특별하면서도 그야말로 역사적인 인물이니 비교가 안돼죠.

게다가 후지코 후지오 컴비 및 토키와장 멤버들의 당시 작품들이 함께 소개되는데 이 역시 아주 볼만합니다. 특히 후지코 후지오 컴비의 초기작은 집대성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충실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학생 때 습작인 <<작은 권총왕>>에서 시작하여 후지코 후지오 컴비의 단행본 데뷰작 <<유토피아 최후의 세계 대전>>, 최초의 잡지 개제 <<서부의 어딘가에>>, 최초의 의뢰이자 별책인 <<3인 형제와 인간 포탄>>, 최초의 연재 <<4만년 표류>>, 초기 창작 방법을 엿볼 수 있는 <<백마가 온다>>, 상경 전 마지막으로 그린 의뢰작 <<선풍도시>>, 세미 다큐멘터리 터치로 그린 <<해발 6천미터의 공포 (히말라야의 설인)>>과 <<남부전선 이상 없다>>, 상경 이후 최초로 각자 동시 진행한 소년클럽 의뢰작 <<콘크리트 정글>> (후지코 후지오 A)와 만화 동화 <<사자와 꼬마 사슴>>, 상경 후 첫 정식 연재작 <<해저인간 메바루>>, 처음으로 가혹한 프로의 일정에 도전하게 된 <<치비와카마루>>, <<장미와 반지>>, 이후 연재작 <<밤의 왕자님>>, <<세계와 싸운 소년>>, 땜빵으로 그린 첫 스포츠 만화 <<철권의 분노>> 등등등 정말 수많은 작품이 등장합니다. 장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편 감상이 가능한 수준으로 말이죠. 컴비의 작품 외에도.신만화당 합작물인 <<4개의 시계>>, <<도감 시리즈>> 등도 충실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또 작품 자체가 후지코 후지오 컴비의 활동을 다루기에 단순히 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들이 어떤 과정에서 탄생되고 완성되었는지도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마가 미치오의 개인 경험을 토대로 그려내었다는 <<꼬마 권총왕>>, 급작스러운 폭설로 놀랐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살아있는 눈 괴물(?)을 그려낸 <<백마가 온다>>, 영화 <<아스팔트 정글>>을 감명깊게 본 후 갱스터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하여 작업한 <<콘크리트 정글>> 등이 그러합니다.
이외 모든 작품 시작 전 관련 노트를 만들고 줄거리와 캐릭터 설정을 적어놓는데 꽤 그럴듯하더라고요. 앞으로 저도 따라해 봐야겠다 싶을 정도로요.

다른 등장 작가들의 작품도 풍성합니다. 유명 작가의 등장 시 짤막한 소개를 곁들이는 정도가 많지만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하는 작품도 제법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글 대제>>입니다. 두 컴비가 처음 데즈카 오사무를 만날 때 신연재물로 그리기 시작하고, 후일 마가가 급한 도움 요청으로 마지막화의 어시스턴트로 참여한다는 식으로 말이죠. 아마도 실화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드라마틱하다 생각되더군요.
또 <<만화 소년>>, <<모험왕>>, 등등 당대 유수의 잡지들과 출판사, 편집자 들도 다수 등장하여 극의 흐름예 동참하는데, 이러한 점은 <<바쿠만>>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물론 편집자는 마감 독촉 및 원고 수령 밖에는 딱히 하는게 없긴 하지만..

그리고 짧은 기간 (약 2년?)이지만 마가의 신문사 근무 중 진행한 각종 일러스트와 광고 도안, 만화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림 실력 및 디자인 감각이 정말 빼어나더라고요. 이게 정말 갓 고등학교 (작중 중학교)를 졸업한 신입의 솜씨라니! 확실히 거장, 천재의 편린이 엿보이는 작업물들이었어요. 만화가 아니라 이쪽, 산업 미술 쪽으로 매진하였어도 충분히 디자인 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아울러 당대 (1950~60년대)를 잘 그려낸 여려가지 디테일들도 좋습니다. 영화가 유일한 취미로 보이는 컴비가 감상하는 여러가지 영화들 (<<베라크루즈>>, <<아스팔트 정글>>, <<위대한 환영>>, <<제 3의 사나이>>, <<너의 이름은>> 등등등....), 증기 기관차를 이용한 출퇴근과 도쿄 상경, 전화가 드문 시절의 전보와 공중전화를 이용한 연락, 산보 등을 통해 보여지는 당시의 거리 풍경들 모두 굉장히 흥미로왔습니다.
당시 두 컴비의 여러가지 일상 생활 묘사도 재미있습니다. 상경 전 학창 생활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서 시작하여 첫 하숙집 좁은 방에 대한 묘사, 매일매일 프랑스 빵과 우유 등으로 때우는 식사, 가끔 나가는 산책 등 모든 부분이 디테일하면서도 푸근하고 따뜻하게 그려지거든요.

거의 악역이 등장하지 않고 멘토인 데즈카 오사무와 도키와장의 큰 형님격인 테라오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컴비를 도와주지 못해 안달난 사람으로 보이는 등 이야기도 모두 푸근하고 따뜻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중학교 때의 담임 선생님을 들 수 있습니다.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옹호해주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라는 조언을 해 주는 선생님이라니!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첫번째 하숙집의 주인인 마가의 백부도 역시 만화는 잘 모르지만 컴비의 꿈을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토키와장의 보증금으로 거금 3만엔을 선뜻 빌려주겠다고 할 정도고요.

그러나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은 시대 착오적인 작화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원고 마감에 맞추지 못하는 사고를 치는 장면이 계속 되는 식으로 극적인 사건은 자주 반복되어 지루합니다. 주로 꿈이긴 하지만요. 또 청춘물이기도 해서 마가의 상대역 여성을 등장시키는데... 뭔가 관계가 이루어질 것 처럼 떡밥만 던져놓지 제대로 된 드라마를 그리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이렇게만 등장할거면 분량 낭비에 불과하죠.

그래도 읽는 재미는 충분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될 가능성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읽다보니 이 때가 축복받은 시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비록 먹고 살기는 좀 힘들고 척박한 시기지만 젊은 혈기와 열정은 보답받는, 잡지사에 원고를 보내거나 들고 가면 원고가 실리고, 급하게 땜빵이든 뭐든 어떻게든 작업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시대로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수요에 비하면 공급이 부족해 보였기에 열정만 있다면 어떻게든 데뷰 자체는 좀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리 재미있는 만화라 하더라도 데즈카 오사무 혼자 6~7개 잡지 모두에 연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니까요. 두 컴비는 20대 초반, 테라오는 20대 중반, 데즈카 오사무도 20대 후반에 불과한 청년들인데 당대 만화계를 짊어진다는 설정을 볼 때 정말로 만화가가 없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철야 등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꿈과 열정을 잃지 않는 두 컴비의 노력, 그리고 결과물의 완성도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런 정보도, 어시스턴트 한명 없이 한달에 100페이지가 넘는 원고를 스토리부터 전부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만 그려내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니까요. 초기작의 스토리가 영화나 서적에서 따온 것이 많은 이유도 아이디어 구상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없는 환경 탓이 커 보였습니다. 다른 신만화당 멤버들이 대체로 잊혀진 것에 반해 후지코 후지오, 이시노모리 쇼타로, 아카츠카 후지오 등이 지금도 거장으로 남은 이유는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고 꾸준히 히트작을 내 놓는 실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죠. 즉 한마디로 '노력하는 천재가 시기를 잘 만났다'는 것이 정답일 것 같습니다.

2017/01/23

야간열차 살인 사건 - 케리 그린우드 / 정미현 : 별점 1.5점

야간열차 살인 사건 - 4점
케리 그린우드 지음, 정미현 옮김/딜라일라북스


귀족 영애 프라이니는 하녀 도트와 함께 밸러랫 행 열차로 여행 중 일등실 객차에 클로로포름이 뿌려지는 상황에 직면한다. 프라이니의 기지로 승객들은 빠르게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승객 중 한명인 헨더슨 부인이 기차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헨더슨 부인의 딸 유니스는 명탐정으로 이름난 프라이니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프라이니는 기차 승객으로 기억을 잃은 제니까지 떠 맡고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데..

귀족영애 탐정 프라이니 시리즈. 어쩌다 보니 세번째 부터 읽게 되었네요.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무리 보아도 그 어떤 매력을 찾을 수 없는 졸작입니다.

일단 주인공 프라이니부터 한심합니다. 매력적인 외모와 두뇌, 행동력에 재산까지 갖춘 자유로운 신여성이라는 설정인데 도가 지나쳐서 짜증이 났습니다. 비현실적인 것도 정도가 있어야죠.
그나마 앞선 설정들이야 만화 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뻔하디 뻔한 설정이라 치더라도, 남자가 마음에 들면 두번째 만남만에 정사를 갖는 모습을 자유로운 신여성(?)이라고 포장하는건 무리였습니다. 여성 모두를 유혹하는 싸구려 펄프 픽션 속 마초를 빗대어 만든 캐릭터라 하더라도 일단 정통파 계보에 드는 탐정들 중에 그런 싸구려는 없으며, 혹여 그렇다 하더라도 대체로 그러한 유혹은 사건 해결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 사용됩니다. 아니면 상대 여성이 악당으로 여성의 매력을 이용한 음모의 하나이거나...
그러나 이 작품 속 정사는 사건 해결과는 무관한, 순전히 프라이니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한 용도이며 상대방 린지가 숫총각이라는 점에서 싸구려 성인물에 가깝습니다. '숫총각 사냥하는 선배 누나 혹은 유부녀' 캐릭터랄까요. 허나 싸구려 성인물은 성욕 자극이라는 대 명제에 충실한 반면 이 작품은 그렇지도 못하기에 더 별로였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대단한 분장도 하지 않았는데 앨러스테어가 기차에서 보았던 젊고 핸섬한 승무원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부터 문제죠. 아무리 클로르포름에 취했었다 하더라도 사건 직후 키라던가 얼굴 인상을 그대로 기억하고 하고 증언하는 것을 보면 솔직히 설득력이 낮습니다.
하지만 이건 실종된 헨더슨 부인 살인사건의 진상에 비하면 솔직히 약과입니다.

  1. 기차에서 헨더슨 부인의 목을 밧줄로 묶고
  2. 그 줄을 급수탑으로 던진 뒤
  3. 급수탑을 기어 올라가 밧줄을 잡아당겨 노인을 끌어낸 후
  4. 시체 위로 뛰어내렸다.


가 그것인데 비록 급수 때문에 3분간 정차했다 하더라도 2~3의 과정을 그 짧은 시간 어떻게 했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헨더슨 부인을 창문에 기대어 놓은 후, 객실 지붕에 올라가서 헨더슨 부인의 목에 밧줄을 걸고 그것을 선로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급수탑에 던진 뒤 10미터를 전력 질주하고 급수탑을 올라간 뒤 밧줄을 잡아당겼다? 이게 3분 안에 과연 가능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설령 가능했다 하더라도 앨러스테어가 클로르포름을 이용하여 객실 승객들을 마취시킨 다음이라면 이러한 복잡한 행동으로 노부인을 살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도주에 도움을 주거나 사건을 복잡하게 만드는게 하나도 없거든요. 마지막까지 이유가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 이럴 바에야 그냥 창 밖으로 내던지는게 훨씬 쉬웠을 겁니다.

또 승무원을 가장한 핸섬한 젊은이가 유력한 용의자이며, 동기와 외모 등을 종합해보면 앨러스테어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그의 유일한 알리바이가 친구 린지에 의해 뒤집혀 버린다는 전개도 시시하기 짝이 없습니다. 추리의 여지도 없기에 프라이니가 이 사건 해결을 위해서 하는 것은 전무하고요. 이 부분에서는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동거인의 조사조차 게을리한 경찰의 무능함도 돋보이고요.

중간에 등장하는, 기억을 잃은 소녀 제인 사건은 프라이니와 그의 친구들 (버트와 세스)의 활약으로 해결된다는 점에서 그나마 헨더슨 부인 살인사건보다야 낫긴 합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버튼이 최면술로 불쌍한 고아 소녀들이나 납치한 소녀들을 사창가에 팔아 넘긴다는 범행 자체가 문제에요. 최면술을 기억을 완벽하게 없앤다던가,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식으로 무슨 마법처럼 묘사하고 있거든요. 최면술이 설령 마법과 같은 효과를 발휘했더라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것 처럼 30여명 이상에게 모두 성공적으로 최면을 건다던가, 특정한 자극이나 신호 없이 눈빛과 대사만으로 순식간에 최면을 걸고 푸는 것은 무리죠. 마지막 순간에 고양이에게 눈을 공격당한 최면술사 헨리 버턴이 그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결말도 후련하기는 하나 이 역시 과학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여간 최면술이 등장한 작품치고 제대로 된 걸 못 봤단 말이죠.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만듬새도 괜찮고 여성 작가다운 꼼꼼한 묘사에 약간의 점수를 더하나 추리물로서는 그 어떤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망작입니다.
앨리스테어가 행하는 여자에 대한 막되먹은 행동과 "자고로 여자란 출산 이후엔 전부 쓸모없어지지" 등의 대사를 보면 작가의 의도는 대충 짐작이 가긴 합니다. 유능하고 강력한 여성이 멍청한 남자들을 가지고 놀고 사악한 마초를 응징하는 페미니즘 영웅물을 노골적으로 그리려 한 것이겠죠. 뭐 그 생각이 잘못된건 아니에요. 문제는 그게 뭐든간에 최소한의 완성도는 있어야 했습니다... 2017년 들어 처음 읽은 추리 소설이 이따위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네요.

덧붙이자면 TV 시리즈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역시나 그닥 기대가 안되는군요. 추리보다는 작중 묘사되는 온갖 화려한 의상들이나 세세한 디테일들, 그리고 사창가에서의 격투라던가 마지막 프라이니 집 앞에서 앨러스테어와 벌이는 격투 등 액션의 비중이 높은 추리 속성이 조금 들어간 시대극 액션물이 아닐까 싶거든요. <<각시탈>> 처럼 말이죠! 잠깐 찾아보았는데 프라이니 캐릭터도 딱히 매력적이지도 않고 말이죠. 여튼 이 작품에 대해서는 책이든 영상물이든 더 찾아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017/01/22

보석 천 개의 유혹 - 에이자 레이든 / 이가영 : 별점 4점

보석 천 개의 유혹 - 8점
에이자 레이든 지음, 이가영 옮김/다른


보석과 관련된 역사 속 일화를 소개하는 미시사 서적. 미시사를 워낙 좋아하긴 하지만 요새는 이쪽 책만 읽는 느낌입니다.

이 책은 크게 보석을 소재로 하여 가치가 가상적이며 주관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첫번째 장, 보석이라는 실체가 만들어 낸 감정의 좋거나 나쁜 결과를 다룬 두번째 장, 보석을 갖기 위한 노력이 모종의 성과를 거둔다는 세번째 장으로 나뉩니다.
이 중에서는 첫번째 장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세가지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첫번째 이야기는 레나페 인디언이 네덜란드인에게 맨해튼을 유리 구슬 몇개에 판 거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거래는 아직도 세계적인 비웃음거리인데 이를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물건의 가치는 가상적, 상대적, 주관적이며 당시 가치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당연한 생각을 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지경입니다. 인디언에 대한 저도 모를 편견과 차별이 제 마음 속에 있었기 때문이겠죠?
여튼 상세한 자료 조사를 통해 이 책의 저자는 당시 인디언 기준으로 보았을 때 동그란 유리 구슬은 인디언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금이라고 해도 무방한 가치가 있었던 보석이며, 맨해튼은 농사를 지을 수도 없는 슾지대로 그나마 굴을 채취하는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던 불모지였기에 이 거래는 충분히 타당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레나페 인디언은 섬의 소유권자도 아니고 그냥 섬을 드나들며 낚시를 하던 사람들이니 거래를 마다할 이유도 없었고요. 마지막에 네덜란드인들도 '육두구'를 위해 이 섬을 영국에 넘기니 결국 가치는 돌고 도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다이아몬드가 실상 그렇게까지 대단한 보석은 아니지만 독점기업인 드 비어스의 천재적인 책략으로 현재의 보석의 왕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특히나 '결혼'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 처럼 인식시키는 일련의 마케팅 작업이 대 성공을 거둔 것이라고 하네요. 드비어스가 만들어낸 것은 '욕망'이고 이것이 실제로 가치를 만들어 냈다는 것. 독점 기업이 채굴량을 조절하여 가치를 유지하는 전략이야 석유 산유국도 쓰는 전략이지만 이 정도로 해결되지 않는 위기를 마케팅으로 타개한다니, 정말로 시대를 앞서간 회사로 보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추후 보석을 사더라도 다이아몬든 왠만하면 사지 않는게 좋다는 팁도 전해 줍니다. 살 여유는 없지만요...

세번째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보석은 에메랄드입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하고는 정반대더군요. 에메랄드는 정말로 희귀한 성분들이 그야말로 '대격변'이라고 부를 만한 지구의 큰 움직임을 통해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보석'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어요.
에메랄드에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들이 쭉 소개되는데 핵심은 에스파냐의 이사벨라 여왕, 콜롬버스로 대표되는 신세계 탐험과 여기서 발견된 에메랄드 광산 이야기입니다. 결국 에스파냐 왕조는 예상치 못한 성공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지만 이를 '성전'이라는 곳에 낭비해 전성기가 짧게 끝났다는 것이죠. 이 와중에 에스파냐가 국채를 발행하는 등 현대 자본주의의 기초를 다지지만 너무 막대한 양의 에메랄드가 수입되어 가치가 폭락하는, 이른바 네덜란드 튤립 폭락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 무너져 버렸다는 등 여러모로 참고할만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두번째 장은 보석이라는 실체가 만들어 낸 감정의 좋거나 나쁜 결과를 다루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갖고 싶다는 욕망'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이 주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인 유명한 마리 앙트와네트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제외하면 다른 두 편은 보석과 그에 대한 욕망이 역사적인 사건을 일으켰다고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두번째 이야기인 엘리자베스 여왕과 진주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진주를 좋아했고 특히나 언니 메리에게 에스파니아 왕 펠리페가 선물한 진주에 반했다 하더라도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와 결전이 벌어진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니까요.
세번째 이야기인 로마노프 왕가와 파베르제 달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능한 차르와 곪아가던 러시아 상황이 맞물려 폭동이 반란이 되는 일련의 과정은 파베르제 달걀과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민중은 앙트와네트의 목걸이와는 다르게 이 달걀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요. 이후 해머라는 국제적인 장물아비가 러시아, 스탈린을 위해 러시아의 구 황실 소유 보석을 판매하며 드 비어스와 같은 천재적인 마케팅 책략을 구사한 것이 파베르제 부활절 달걀의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이라는 후일담 만큼은 재미있긴 했습니다. <<명탐정 코난>> 초기 극장판의 소재 중 하나로 쓰일 정도로 유명해진건 다 해머 덕분인 것이죠. 그러나 보석 판매로 얻은 수익이 스탈린, 소련으로 흘러들어가 냉전 시대의 한 축을 만들게 되었다는 주장은 지나친 과장으로 보였습니다.
마리 앙트와네트 이야기도 <<베르사이유의 장미>> 등에서 수없이 다루어 왔던 이야기라 새로운 맛은 없었고요. 물론 마리 앙트와네트가 꽤 괜찮은 왕비였다는 해석은 신선했지만요.

세번째 장은 보석을 갖기 위한 노력이 긍정적 결과를 낳은 사례를 소개하는데 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첫번째는 일본의 진주왕 미키모토 코이치 이야기, 두번째 이야기는 손목 시계가 널리 퍼지게 된 이유를 소개해 줍니다. 이 중 첫번째 이야기가 보다 흥미로왔어요. 진주왕 미키모토의 이런저런 일화들이 아주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양식'임을 감추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하여 오히려 자신의 진주들 가치를 높인 전략이 가장 기억에 남는군요.
손목 시계 이야기는 재미있기는 했지만 손목 시계가 널리 퍼지게 된 이유가 전쟁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 장황하게 풀어낸게 아닌가 싶었어요. 어차피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별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없습니다.

여튼, 이러한 큰 주제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글솜씨도 상당히 괜찮습니다. 뭔가 큰 흐름과는 관계없어 보이는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계속 덧붙이는데, 이게 이야기와 결국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큰 재미를 전해주거든요. 예를 들자면 마리 앙트와네트 이야기에 소개된 호프 다이아몬드 이야기였습니다. 오래전 이런 저런 책을 통해 저주의 다이아몬드 이야기는 많이 접해보았는데 이는 다이아몬드를 마지막에 소유했던 보석상 해리 윈스턴이 포장하여 소문낸 것이라고 하네요. 윈스턴이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호프 다이아몬드를 기부한 것도 역시나 선의만은 아니었습니다. 소문 탓에 호프 다이아몬드의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하여 미국 국세청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경이로운 세금 감면 혜택을 받았다는 것이 진상이더라고요. 역시나... 그 외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아요.

이렇듯 재미도 있으면서도 이런저런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책입니다. 저자가 보석 업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역사와 물리학을 공부했다는 경력이 허투른 것은 아니라 생각될 정도이며, 첫번째 장은 별점 5점이 아깝지 않습니다. 이후 이야기들은 그만큼의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가격에 비해 도판이 충실하지 못한 점 정도였달까요? 이런 류의 미시사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

2017/01/21

2차대전의 마이너리그 - 한종수 : 별점 3점

2차대전의 마이너리그 - 6점
한종수 지음, 굽시니스트 그림/이미지프레임


2차 대전 중심에 있지는 않았지만 전화에 휘말려 국가의 운명이 바뀐 3국에 대해 상세하게 정리한 전사 - 미시사 서적.

3개국은 폴란드핀란드이탈리아를 말합니다. 핀란드는 '겨울 전쟁'이라는 묵직한 한방이 있기에 실패만 반복한 폴란드, 이탈리아와 같이 엮이는 것은 조금 적절치 않아 보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겨울 전쟁' 외에는 잘 몰랐던 내용이 대부분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재미 뿐 아니라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 내용들이 많기도 하고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순간의 이익과 과거의 영광에 눈이 멀어 전쟁에 휩쓸린 뒤 열강들의 정치적 농간에 의해 국가가 거의 패망해 버린 폴란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국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성공한 핀란드, 그리고 무능한 지도자 때문에 그나마도 부족한 자원을 순차적으로 소모하고 비웃음거리가 된 이탈리아 모두에서요.

이 중에서도 폴란드 이야기는 여러모로 안쓰럽더군요. 독일과 소련에게 점령당한 것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후 2차 대전 동안 패망한 국가라는 서러움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을 위해 굉장히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불구하고 열강, 특히 영국에게 너무 뒷통수를 세게 맞거든요. 대접을 받기는 커녕 배신이나 당하다니... 이에 비하면 소련이 카틴 숲 학살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독일과의 전쟁을 위해 이를 외면하는 미국과 영국의 깨알같은 협잡질은 배신 축에도 못 낄 수준이에요.
또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도자였던 브와디스와프 시콜스키, 그리스의 메탁사스가 급작스럽게 사망한 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흐름은 유능한 지도자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해 주고요.

이러한 교훈 외에도 제목 그대로 마이너리그이기에 잘 알지 못했던 각종 전사를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우선 폴란드 기병대의 전설(?)을 꼽고 싶네요. 기병대가 전차에 돌격했다는 이야기는 비웃음거리로 이런저런 매체에서 접해보았었는데 이 책에서는 말 그대로 소문일 뿐 그들의 전과는 혁혁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기사 영국 경기병대의 돌격도 아니고, 자동화기가 보편화된 시기에 전차대를 향해 자살과 같은 공격을 했을 리가 없죠...
그리고 이탈리아 군대는 비웃음거리에 가깝지만 그래도 로마 군단의 후예임을 알려주는 용맹한 병사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UDT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수동 어뢰 특공대원 라펜느 대위 (백작)의 활약이라던가 어린 시절 TV 명화극장에서 보았던 영화 <<엘 알라메인>>에도 등장했던 이탈리아 폴고레 사단의 용맹한 전과가 그러합니다.

그 외에 등장하는 소소한 이야기거리들도 볼거리에요. 특히나 시콜스키 수상의 비행기 사고사는 처칠의 명령에 의한 영국 정보부의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음모론은 아주 그럴싸 했습니다.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굽시니스트의 만화도 적당히 볼만 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출처 등의 자료적 가치를 높이는 내용이 부족하고 책의 만듬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 조금 감점하지만 재미와 교훈을 함께 주는 좋은 전사 - 미시사 서적입니다. 2차대전에 관심이 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7/01/16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 이승원 : 별점 3.5점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 8점
이승원 지음/천년의상상


100년 전 주로 대한민보에 실렸던 시사 만평을 기초로 당시 시대상을 전해주는 미시사 서적...으로 알고 읽었는데 의외로 시사 만평의 비중은 크지 않았던 책.
하지만 굉장히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이유는 이 책을 통해 소개되는 100년전 대한제국의 모습이 현재 시점의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당과 점쟁이 이야기로 시작되는 제 1장부터가 그러합니다. 피난가던 명성황후의 환궁일을 맞춘 무당 진령군과 이를 이용하여 사기를 쳐 먹은 점쟁이 이유인, 그리고 명성황후가 빙의되었다고 굿을 하고 나중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여 추도회를 거행한 무녀 수련이 차례로 등장한다는 내용이거든요. 무당, 점쟁이가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린다, 이거 최근에 많이 들은 이야기잖아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렀다와 같은 고관대작 매국노들의 스캔들을 다룬 두번째 장 '스캔들' 역시나 별로 새롭지 않고요.

5장 '통변'에서는 그 유명한 고종의 커피에 독을 탄 사건이 소개됩니다.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통역관 김홍륙이 아관파천 이후 권세를 농락하다가 그 정도가 지나쳐 고종 눈밖에 나서 귀양을 가게 되자 고종을 독살하려 한 것이라 하네요.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기에 일개 통역이 감히 왕을 시해하려 했을지...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참고로, 그런데 아편 한 냥쭝이 과연 치사량이었을지 궁금합니다. 감히 황제의 독살을 시도한 것 치고는 '아편'은 너무 안전하게 간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김홍륙말고도 일본군의 조선인 통역의 악행 역시 화려하게 소개됩니다. 통역들의 행동거지는 개돼지의 활갯짓으로 비판받을 정도였다니 말 다했죠. 읽다보니 작금에 영어를 무기로 승승장구한 몇몇 인사가 떠오르더군요.

6장 '만민공동회'에 등장하는 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의 거리 투쟁은 지금의 촛불 집회와 판박이입니다. 당시 서울 인구 17만명 중 1만여명이 종로 네거리로 나와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정말로 똑같아요. 민심을 받아들인 고종 황제의 일부 개혁, 이후 1898년 10월~11월 관과 민이 모여 국정개혁을 논의한 관민공동회까지의 흐름도 거의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친러 보수파의 흑색 선전과 정치 깡패의 등장이라는 이후 전개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결국 여러가지 중상모략으로 처절하게 짓밟히고 끝나버렸는데 그나마 지금이 100년전 보다는 조금 낫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나름 정보 공유가 지속되고는 있으니까요. 부디 만민공동회의 전철을 뒤따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9장 '생계형 협력자'에서는 생계형 매국노 서창보의 일대기가 그려집니다. 한마디로 요새 언론에 오르내리는 '부역자'죠. 저자가 표현한대로 식민지 조선에서의 '마름'의 존재랄까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그렇다고 주인이 되지는 못하는. 오히려 주인이 되려는 과욕 때문에 명줄이 끊기는 그런 존재 말이죠. 작금 부역자들의 삶도 부디 비참하게 끝나면 좋겠네요.

이렇듯 100년의 시공을 초월해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가득 실려 있습니다. 이외에도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많아요. 몇가지 더 소개해드리자면,
7장 '도박'에 소개된 '삼십육계'라는 도박은 처음 알았네요. 가난한 서민층, 빈민층에게 유행했다는데 판주가 쓴 숫자를 맞추면 30배의 돈을 받고, 숫자를 맞추지 못하면 판돈을 모두 판주가 갖는다는 심플한 도박인데 그냥 봐도 판주의 확률이 엄청 높죠. 돈을 거는 사람은 36/1의 확률로 돈을 걸어서 이기면 30배를 받으니 그냥 봐도 공정하지 않잖아요? 이런 사기에 가까운 불공정한 도박이 성행한 것 부터가 참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10장 '사진'에서 대원군과 추종자들이 만들어 내었다는, 외국인들이 아이를 훔쳐 삶아먹는다는 소문도 재미있었습니다. 일종의 여론 조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쇄국정책을 주장한 대원군 답습니다. 또 소문의 발단이 '사진기'였다는 것도 흥미로와요. 렌즈를 어린아이의 눈알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니, 지금 보면 어처구니 없지만 또 그런 허황된 상상이 난무하던 당시 현실도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 재미는 물론 나름의 가치가 확실한 괜찮은 책입니다. 제가 근대 조선을 다룬 미시사 서적은 다수 접해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책이에요. 감점한 이유는 아주 약간이긴 합니다만 다른 근대를 다룬 서적들과 겹친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분량에 비하면 조금 비싼 가격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실 만 합니다.

2017/01/15

아틀라스 세계 항공전사 - 알렉산더 스완스턴, 맬컴 스완스턴 / 홍성표 외 : 별점 2.5점

아틀라스 세계 항공전사 - 6점
알렉산더 스완스턴.맬컴 스완스턴 지음, 홍성표 외 옮김/플래닛미디어


항공기가 무기로 사용된 이후 주요 공중전투를 상세한 지도, 사진과 함께 소개한 전쟁사 - 미시사 서적.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아틀라스 전차전>>과 흡사합니다. 장, 단점 모두 말이죠.
우선 장점이라면 화려하고 치밀한 도판입니다. 전쟁의 흐름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 주는 지도 외에도 다양한 시각 자료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갖가지 비행 기술에 관련된 도판들이 눈에 띕니다. 유리한 고도에서 태양을 등지고 목표물을 향해 속도를 높여 급강하해 치고 올라오며 기총 공격한 후, 다시 수직에 가깝게 급상승해 유리한 고도를 확보한다는 이벨만 기동과 같은 초기 비행 기술들을 도판과 함께 보여주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독일군의 '서커스' 집단 편대 비행이나 영국의 6기 편대 비행 항목 등도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특유의 소개는 후반부 아랍 - 이스라엘 전쟁 당시 선보인 각종 기동 방법 - 공격적 분리 기동, 하이스피드 요요, 가위 기동, 바렐 롤 공격 - 소개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눈이 즐거운' 책입니다!
또 잘 알지 못했던, 기구를 활용한 정찰전, 1차 대전 때의 그라프 제펠린으로 대표되는 비행선과 복엽기의 활약을 소개한 초반부도 확실히 이 책만의 강점이에요. 다른 곳에서 접하기 힘든 정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소개된 전투들 역시 풍성한 볼륨을 자랑하는 것은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약점도 분명합니다. <<아틀라스 전차전>>과 마찬가지로 또다른 재미 요소라 할 수 있는 전투기들과 에이스들의 소개가 거의 없다는 것이 일단 그러합니다. 소개되는 몇몇 에이스, 기체도 주로 1차 대전까지 내용에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후 비중있게 소개된 기체는 B-29 정도 밖에는 없어요.
또 2차 대전 이후 등장하는 전투들은 이런저런 매체에서 너무나 많이 다루어진 이야기들이라 흥미가 떨어진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몰타, 진주만, 산호해, 미드웨이, 스탈린그라드, 과달카날.... 잘 그려진 지도와 각종 도판은 훌륭하지만 식상한 이야기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과연 이 전투들 모두가 '항공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재미는 있지만 제목과 주제에 걸맞는 것인지 생각하게 만들거든요.
그나마 2차 대전까지가 '항공전'에 걸맞는 이야기였으며 이후에는 더욱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전, 중동전, 베트남, 포클랜드에 이라크 전쟁 등에서 전투기를 활용한 교전은 보조적, 혹은 전략적 목적이 강하니까요. 여러모로 제목과 걸맞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생각됩니다.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최소한 <<아틀라스 전차전>>보다는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4만원에 육박하는 가격을 생각한다면 적극적으로 추천드리기는 조금 어렵군요. 어차피 절판되었으니 구해보시기도 쉽지 않으시겠지만요.
여튼, 개인적으로는 보다 볼륨을 두껍게 하여 책을 나누더라도 또다른 흥미요소인 기체, 에이스 소개를 해 주는 것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럼 책의 성격이 좀 이상해졌을라나요?

2017/01/14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 윤덕노 : 별점 3점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 6점
윤덕노 지음/더난출판사

이런저런 음식관련 저서로 유명한 음식 컬럼니스트 윤덕노씨의 신작. 제목 그대로 전쟁사와 관련된 음식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음식이라면 제가 아는 것만해도 통조림, 타르타르 스테이크, 햄버거, 양고기 전골, 만두, 크로와상, 스팸, 환타, 고기감자 조림... 등 수도 없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다행히 6장 52항목에 달하는 방대한 양 덕분에 처음 접하는 이야기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정 주제를 잡아서 역사와 정보를 잘 요약해 주고, 하나의 주제에서 여러 이야기를 함께 진행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마무리하는 글솜씨 역시 윤덕노씨 저서다왔고요.

그러나 이전 유사한 책에서 느꼈던 문제점도 동일하긴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실제 '전쟁'과는 무관하거나, 너무 억지로 가져다 붙인 항목들이 제법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군대의 보급 작전, 전쟁터에서의 굶주림을 가지고 특정 요리를 대입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어디서 사료를 가지고 왔는지 모를 이야기들도 상당히 많아서 자료적으로 조금 애매한 부분도 없지 않았고요.

그래도 재미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식문화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이야기 몇개 소개해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독일군 각성제 초콜릿 쇼카콜라>>
독일 공군이 영국 본토 항공전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각성제용으로 지급한 커피, 초콜릿, 콜라를 합쳐놓은 식품. 카페인이 풍부한 식품 세개를 합쳐놓아 졸음을 날려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은 '쇼카콜라'로 초콜릿에 커피와 콜라의 성분이 들어간 것입니다. 카카오 함량 60%에 커피 2.6%, 콜라 열매 1.6%의 비율로 말이죠. 지금 기준으로는 그렇게 독해 보이지는 않는데,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특수 작전 투입 병사에만 지급되어 일반병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종전 무렵에는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이기 전 마지막으로 지급되어 되려 사기를 떨어트리기도 했다는군요.

<<전장에 날아든 요리책>>
"위대한 장군과 훌륭한 요리는 전쟁터에서 만들어진다." - <C-레이션 요리책> 첫 머리말.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에게 보내진 요리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C-레이션으로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한 것으로 같이 보내진 타바스코 핫 소스의 제조회사 사장의 아이디어였다고 하는군요. 식품회사 메킬레니의 회장 메킬레니 역시 2차대전 참전용사라서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타바스코 핫 소스에 대한 짤막한 역사도 함께 소개되는데 이 역시 인상적이에요. 남북전쟁의 부산물로 처음 출시되었다고 하며, 이후 다양한 전장에서 활약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지휘관의 호들갑과 미숫가루 파동>>

지금 생각해도 미숫가루는 정말 전쟁에 유용하다 싶을 양식입니다. 일단 불과 물 모두 필요가 없고 많은 양을 옮기기도 용이하니까요. 그런데 이 미숫가루의 역사가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지는 몰랐습니다. 근거는 조선시대 <<동문선>>입니다. 이 책에 화랑들이 미숫가루를 먹었다는 시가 실려있다고 하네요. 사료로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영웅에서 조롱의 대상으로>>
광해군에게 맛있는 요리를 바쳐 권력을 잡았다는 '사삼 각로' 좌의정 한효순과 '잡채 상서' 호조판서 이충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사삼 각로', 즉 더덕을 맛있게 요리한 한효순의 더덕 요리 레시피가 실려있는데 '밀병'이라고 하는군요. 즉, 더덕으로 만든 강정입니다. 이를 서산 어리굴젓의 유래 중 하나로 추정될 정도로 음식 솜씨가 각별히 뛰어났던 한효순 집안의 손맛이 결합되어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 한 것이겠죠. 제가 요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도 '한'씨 가문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허나 임진왜란 때 용장이기도 했던 한효순이 광해군 때의 처신으로 손가락질을 받다가 인조반정 이후 삭탈관직을 당하는 등 수난을 당했다니 이 또한 인생무상입니다.

<<케이준은 원래 요리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메뉴에서 흔히 보아왔던 '케이준 Cajun'이라는 음식의 유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지금의 조리 용어가 아니라 본래 북아메리카에 살았던 프랑스계 이민자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하네요. 프랑스와 인디언 연합군이 영국에게 패한 후 프랑스계 이민자 후손들이 대거 남부 루이지애나 지방으로 추방된 이후, 루이지애나 지방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늪지대 해산물의 갯냄새를 없애기 위해 강한 향신료를 듬뿍 넣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거북선과 과메기>>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식량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 대한 고찰입니다. 둔전제를 통한 농사, 소금을 만들어 곡식과 교환하여 식량을 마련한 것에 더해 어업, 그 중에서도 청어를 잡아 군량 및 곡식과 교환했다고 하는군요. <<난중일기>>를 보면 이틀에 걸쳐 40만 마리의 청어를 내다 팔았다고 하니 그 양이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접시 위의 초밥 두 개>>
초밥이 보통 한 접시에 대략 10개 나오는 이유, 회전초밥의 작은 접시 위에 같은 초밥 2개가 올려져 있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패전 후 배급제로 초밥을 팔 수 없게 된 초밥 요리사들이 손님이 가져온 쌀을 초밥으로 만들어주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1인당 쌀 한 홉으로 초밥 10개까지만 교환할 수 있는 제한 조건 탓에 이렇게 된 것이죠. 생선 역시 모자라 10개를 모두 다른 생선으로 만들 수 없어서 같은 종류의 초밥 2개를 내기 시작한 것도 이 때 부터라고 하고요.

2017/01/09

식탐 만세! - 다카기 나오코 / 채다인 : 별점 2.5점

식탐 만세! - 6점
다카기 나오코 지음, 채다인 옮김/살림


에세이 만화가 타카기 나오코의 신작. 예전에 읽었던 저자의 책은 <<배빵빵 일본식탐여행>>(이하 <<배빵빵 >>)과 <<나 홀로 여행>>의 두 권입니다. 이 중 음식을 다룬 <<배빵빵>> 쪽이 더 마음에 들었던 차에 제목을 보니 비슷한 내용일 것 같기에 구입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전 리뷰에서도 썼었지만 <<배빵빵>을 좋아하는 이유는 훈훈하고 소박한 분위기, 그것에 잘 어울리는 그림, 그리고 여행지와 음식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에 충실하다는, 나름대로 삼위일체를 갖춘 작품이었기 때문이죠.

이 책 역시 비슷합니다. <<배빵빵>>이나 <<나 홀로 여행>>과 비슷하게 작가의 담담한 일상을 다루는 전체적인 분위기에 더해 먹을거리, 음식들에 대한 소개가 괜찮습니다. 집밥, 좋아하는 음식, 최근 자주 먹는 음식에서 시작하여 여행가서 우연히 구입한 음식까지 다루고 있는 식으로 그 범위가 엄청 넓고 다양할 뿐 아니라, 일상 속 음식에 대한 이야기 부분에서 한 번 해 먹어봄직한 음식이 등장하는 것이 엄청 마음에 들었거든요. 특히나 표고 버섯과 레몬을 넣은 페페론치노 파스타는 저도 한번 꼭 도전해봐야겠더라고요.
또 제법 등장하는 여행 이야기들은 <<배빵빵>> 스타일 그대로입니다! 나름대로의 드라마들도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갑작스럽게 비를 만난다던가 (오사카), 기껏 찾아간 참치 축제에서 참치 해체 행사가 열리지 않는다던가, 벛쫓 구경을 갔는데 벛꽃이 아직 피지 않았다던가.... 그러고보면 재미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정말이이지 아주 약간의 잔재미, 디테일인 듯 싶네요.

하지만 <<배빵빵>>보다 낫냐 하면 또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선 구성 면에서 조금 아쉽습니다. 집밥이나 개인적인 식사 부분이 여행 이야기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조금 정리가 되어 보이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너무 잔잔하고 담담해서 취향이 아닐 수도 있을테고요.
그런대로 재미있었던 여행 쪽 이야기도 문제는 있습니다. 대부분 먹어보기 힘든 음식들이 등장한다는 점이죠. 오사카 정도만이 허용범위고... 다른 지방은 특별한 이유없이는 가기 힘들어 보이거든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작품이기는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다카키 나오코라는 작가를 좋아하신다면, 요리와 음식과 여행 관련 에세이 만화를 좋아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2017/01/07

작가의 수지 - 모리 히로시 / 이규원 : 별점 4점

작가의 수지 - 8점
모리 히로시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로 친숙한 작가 모리 히로시가 쓴, 제목 그대로 작가의 수지(收支)에 대한 책.

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수지에는 두가지 뜻이 있더군요. 첫번째는 수입(收入)과 지출(支出), 두번째는 거래(去來)에서 얻는 이익(利益)입니다. 이 책에서 사용된 의미는 후자입니다. 작가 데뷰 후 약 20여년에 걸쳐 278권의 책을 내 놓으며 155억원이라는 수익을 낸 과정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실로 상세합니다. 글이 얼마에 팔리는지에서 시작하여 인세율로 대표되는 출간물에서의 이익이야 상식 선이지만 추천사, 대담, 인터뷰, 강연에서 미디어 믹스, 교과서와 시험 문제에 사용되는 경우까지 정말 돈을 벌 수 있는 모든 항목을 다루고 있거든요. 게다가 이 모든 것을 본인의 경험과 자료를 통해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내용 중 몇몇 재미있는 디테일은 인용하고 싶지만 왠만하면 이 책만큼은 직접 사서 읽으시기를 권해드리고 싶기에 그렇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이라 생각되니까요. 아 정말 작가들은 복받았어요. 다른 전문 직종 중 이렇게 수익 관련 정보를 모두다 공개한 경우는 없잖아요?

또한 이러한 말 그대로의 '수지' 관련 내용 외에도 글 곳곳에 포함된 모리 히로시의 작가로서의 자세 역시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사실 보통 작가라면 1년에 장편 소설 한두권 내기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저 역시 단편 소설 한편을 거의 6년동안 잡고 있기도 했고요. 허나 모리 히로시는 20년 동안 장편만 90편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평균 내자면 1년에 4.5권이죠. 책 속에 인용된 '수지'에 따르면 보통 원고지 1매당 고료가 5,000엔이고 장편 소설은 대략 400~600매 가량이니 연재만 된다면 대략 200만~300만엔의 수익이 난다고 합니다. 즉, 1년에 한편 정도 연재만 해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후 책으로 출간되거나 미디어 믹스는 완전히 별개의 수익이기도 하고요. (일본 기준으로 연재가 전제이긴 합니다만)
허나 모리 히로시는 본인 스스로 다작을 통해 이 수익을 4.5배로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외의 책까지 합치면 매년 14권에 가까운 책을 내 놓았으니 거의 10배 이상의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죠. 원래 공대 교수라는 직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녁 시간을 쪼개어 이렇게 가외의 수익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모습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는 책 속에서 엿볼 수 있는 모리 히로시의 작가관과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요약하자면 '소설 집필을 좋아하지 않지만 밥벌이니까 마지못해 쓴다, 하지만 독자에게 돈을 내게 만드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그것이 창작자로서의 기본 중 기본이다' 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즈니스맨 같아 보일 정도로 수지에 철저한 모습이죠?
그러나 수익을 위해서만 다작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로서의 생명력을 위해서는 무조건 많이 쓰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야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된,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와 닿는 말은 바로 '첫 작품을 발표한 뒤 그 반응을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반응 같은 걸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즉시 다음 작품을 집필해야 한다. 그것이 발표작에 대한 최선의 지원 사격이기도 하다." 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안 팔리던 시절의 스티븐 킹과 얼 스탠리 가드너도 힘든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와 소설 창작에 몰두했다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입니다. 모리 히로시는 운 좋게도 첫 작품이 가장 대박이 난 작품이기에 나름 탄탄대로를 걸은 것일 뿐 결국 본질은 같아요. 돈을 벌려면, 성공하려면 계속해서 글을 써라! 155억원이라는 수익이 그다지 놀랍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노력한 것은 분명하니까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이쪽 바닥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필독서 같은 책입니다. 단순한 정보의 나열 뿐 아니라 재미도 있고 여러모로 허투루 듣기 어려운 프로 작가로서의 의견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감점 요소는, '일본' 의 현황이라는 것과 모리 히로시의 데뷰가 특출난 덕이 있었다는 것 뿐이에요. 진심으로 여러분들께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모리 히로시의 작품은 딱 4편 읽었는데 <<모든 것이 F가 된다>>를 빼면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었습니다만, 에세이 류의 작품은 꽤나 읽을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덧붙이자면, 이 좋은 책은 출판사 북스피어의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응모하여 운 좋게 받게 된 책이기도 합니다. 모리 히로시 표현대로 분석을 해 보자면 1시간 투자해서 12,800원짜리 책을 얻은 것입니다. 시급으로는 괜찮은 편이군요. 여튼, 편집자 마포 김사장님의 축하 포스트잇 처럼 '올 한해 수지맞는 일이 잔뜩 생겼으면' 좋겠네요.
참고로 아마 아시겠지만 저는 이벤트로 받은 책이라도 혹평하는 리뷰어입니다. 이 책의 별점이 높은 이유는 이벤트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습니다.

2017/01/06

고려전쟁 생중계 - 정명섭 외 / 김원철 그림 : 별점 2.5점

고려전쟁 생중계 - 6점
정명섭 외 지음, 김원철 그림/북하우스


고려의 역사를 뒤흔든 10번의 전투가 소개된 미시사 - 전쟁사 서적. 전작 <<조선 전쟁 생중계>>를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기에 주저없이 읽어보았습니다.

최대 장점이라면 조선사에 비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려사의 재조명일 것입니다. 특히 잘 알려져있지 않았던 여러가지 전쟁, 전투의 디테일이 아주 좋았어요. 수록된 내용 중 그나마 좀 아는 전투는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 정도 뿐, 나머지는 정말 새롭게 안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대표적인 예로 몽골의 1, 2차 일본 원정에 대한 상세하게 기술을 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일본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 하다가 '카미카제'의 덕으로 운 좋게 살아났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렇지만은 않더군요. 태풍 덕이 큰 것은 맞지만 1차 원정 때에는 하카다 만에서 일본 무사 집단 고케닌의 심한 저항에 부딛힌 이유도 크다고 설명되거든요 총사령관이 철군을 주장할 정도로 말이죠..
2차 일본 원정 역시 가마쿠라 바쿠후가 해안에 방어벽, 즉 방루를 세운 덕에 상륙을 저지할 수 있었으며 무사들의 분전으로 방어선을 유지한 것이 침략을 모면한 결정적 이유였다고 합니다. 이 때에도 여기나 이후에 불어온 태풍이 원정 실패의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은 부인하기는 어렵긴 합니다. 그래도 그 전에 바쿠후와 고케닌, 일본군의 분전이 뒷받침 되었다는 점은 분명 주목해야할 것입니다. 이 와중에 십중팔구 죽을게 뻔한 이키시마 지휘관으로 임명된 인물은 총 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진자이부교 쇼니 쓰네시게의 아들이었다는 인선은 또 다른 감탄을 불러일으킵니다. 일본군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함이 눈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본받을 만한 점도 분명 있죠.

그리고 공민왕의 개혁 정책이 좌절된 계기인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준동도 인상적인 항목입니다. 홍건적과 왜구 모두 단순한 도적의 무리로 알았는데 홍건적은 당시 북송 수도인 개봉을 점령하여 대송국을 세운 당당한 혁명군이었다는 것, 왜구 역시 5백척에 달하는 배로 침략을 해 올 만큼 그 수가 엄청났고 일본 영주로 볼 수 있는 패가대만호, 아기발도와 같은 장수들이 있다는 점에서 일본 정규군과 다름이 없었다라는 시각이 아주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전쟁 영웅들을 경계하여 숙청한 공민왕의 정책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게 된 계기의 하나가 되었다던가, 이 때 이성계의 활약이 시작되었다던가 하는 소소한 뒷 이야기도 볼거리였고요.

그 외 조금 의외였던 것은 승리하거나, 또는 최소한 지지는 않은 그런 전투가 많다는 점입니다. 대승을 거둔 귀주 대첩 외에도 윤관, 척준경의 활약이 돋보이는 귀문관 전투, 여진족의 공격을 버텨낸 길주성 전투, 당대 최강 몽골군을 막아낸 충주산성 전투가 그러합니다. 대포로 왜구를 박멸한 진포, 황산 대첩도 대승에 속할테고요. 또 강제로 참전하게 된 몽골의 1,2차 일본 원정도 최소한 지지는 않았으니 수록된 10개의 전투 중 7개 항목이 그러합니다! 실제로 이 정도 승률이면 전투 국가라 불러도 좋을 정도죠. 하긴... 무신 척준경, 이성계가 활약한 나라에다가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던 나라이기도 하니 당연한 결과일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전작에 비하면 여러모로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책의 구성부터가 문제에요. 실제 전쟁을 생중계한다는 본편의 컨셉이 제대로 살아있지 못하거든요. 이러한 컨셉이 본문과 잘 맞아 떨어졌던 전작대비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또 전작에 비해 부족한 도판 (특히 지도)과 불친절한 설명도 문제에요. 고려의 전투가 주로 북방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지명이 별로 등장하지 않기도 한데 잘 모르는 단어나 지명은 보다 자세히 설명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지도 역시 실려있기는 하지만 내용과 묶어서 이해하기에는 지명, 구성의 복잡함으로 난이도가 제법 높은 편입니다. 여러차례에 걸친 원정과 전투가 반복된 경우는 순서대로 풀어내는 방식을 썼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 외 중간중간 오타도 제법 있는 등 완성도, 디테일 면에서 아쉬움을 많이 남깁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잘 알지 못했던 역사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 만큼은 좋았지만 완성도때문에 조금 감점합니다.

2017/01/02

문호의 식채 - 미부 아츠시 / 혼죠 케이 : 별점 2.5점

문호의 식채 - 6점
미부 아츠시 원작, 혼죠 케이 그림/대원씨아이(만화)


독신 기자 카와나카 케이조가 본사 정치부에서 후카가와 지국으로 좌천된 후, 메이지 시대 일본 문호가 즐겼던 음식을 소개하고 그에 얽힌 드라마를 탐구하는 기획 기사를 쓴다는 내용의 연작 단편만화. 총 6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등장하는 요리는 별로 대단치 않지만 해당 요리가 작가가 남긴 작품, 그리고 작가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시선이 생각보다 깊이가 있더군요. 솔직히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문제라면 등장하는 작품들이 별로 친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작가들도 반 정도 - 나츠메 소세키아쿠타가와 류노스케다자이 오사무 - 를 제외하면 애초에 모르는 작가들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여러모로 색다른 식도락 만화로써 한번 읽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단, 나름 공부가 좀 뒷받침 된다면 더 즐길 거리가 많을 것 같네요.

덧붙이자면, 후속권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만약 나온다면 좀 더 친숙한 작가가 등장해 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추리작가로 말이죠.

소개 작가와 작품, 요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나츠메 소세키 <<도련님>> 모미지 야키
마돈나로 대표되는 가짜 서양식, 가짜 근대의 대척점에 있는 유모 키요를 상징하는 것이 모미지 야키라는 것.
가짜 근대화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라는 해석인데 뭐 꽤 그럴듯합니다.

마사오카 시키 <<앙와만록>> 한 끼 식사.
<<앙와만록>>은 먹는 것, 심지어 싸는 것까지 디테일하게 기록한 시키 만년의 일기라고 합니다.
누워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작가가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는 것을 상기하며,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썼다는 식으로 풀어가는데 깊은 울림을 전해 주네요. 재료를 따지거나 화려함보다는 소박한 밥상을 추구한 삶은 하이쿠에서 기교를 거부한 시키의 작품과도 닮았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작품을 발표했는지도 궁금해집니다.
조금 찾아보니,
"고추잠자리, 추쿠바에 구름도, 한 점 없구나"
"어린 연어가, 둘로 나위어, 오르는구나"
등의 시가 검색됩니다. 형식에 집착한 하이쿠에서 현실을 본 그대로, 느낀 그대로 시로 표현해 나간 최초의 인물이라고 하는군요. 운율과 발음 모두 굉장히 일본적인 시라 한국어로 번역하면 여러모로 애매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새로운 시대를 열은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이네요.

히구치 이치요 <<탁류>> 카스텔라
이 시리즈의 또다른 주제인 "작가가 먹었던, 혹은 작품 속에 등장한 음식은 무엇인가?"에 가장 충실했던 에피소드. 약간 식탐정스러운 분위기와도 일맥상통합니다. '히구치 이치요가 다녔던 학교 선배가 쓴 소설 속에 등장한 카스텔라는 "후게츠도 (風月堂)"의 것으로 아마 히구치 이치요도 먹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탁류>>의 주인공인 창부 오리키가 산 카스텔라는 후게츠도의 것과 같은 고급이 아닌 빈민가에서 팔았을 "닌교야키" 였을 것이다'라는 일종의 추리가 등장하니까요.
그냥 허튼 소리가 아니라 가게 이름은 모르겠지만 이치요 사후 그녀의 집에 하숙한 소세키의 제자 모리타 이치요에 따르면 축제날 근처에 닌교야키 포장마차가 와 있었다는 글을 남겼다는 식으로 증거에도 충실하고요. 이 정도면 한편의 짤막한 추리 꽁트로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가이 카후 <<단장정일승>> 비프 스튜, 치킨 리버 크레올 (애리조나 키친), 카시와 남반 (오와리야), 야나가와 나베, 누타, 초시 1병 (이다야), 돈가스 덮밥, 오신코, 초시 1병 (다이코쿠야)
이른바 '단골'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신선합니다. 항상 똑같은 자리에 앉아 별다르게 주문하지 않아도 똑같은 음식이 나오는, 그게 단골이고 편하다는 논리는 꽤 새로왔어요. 나이든 카후가 기름진 음식을 고집한 이유, 즉 젊은 시절의 노스탤지어라는 것도 나쁘지 않은 해석이고요.

하지만 이러한 논리와 해석보다 이 에피소드가 중요한 것은 유일하게 등장하는 모든 음식을 아직 남아있는 가게에서 먹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재현' 측면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이죠. 언제 일본을 또 가게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기회가 된다면 '애리조나 키친'은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그러고보니 <<술 한잔 인생 한입>>에서도 소다츠가 카후의 식도락 순례를 똑같이 하던 에피소드도 떠오르네요. 거기서는 '나가이 가후'라고 소개되지만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혼죠 료코쿠>> 쿠즈모치 (후나바시야)
굉장히 짤막한 내용입니다. 수필 <<혼죠 료코쿠>>는 아쿠타가와가 자살 2개월 전 마지막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작품 치고는 묘하게 밝다고 하네요. 여기서의 해석은 어린 시절, 정든 고향을 떠올리며 쓴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것입니다.
등장하는 음식점이 아직도 실존하고 있어서 찾아가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은 나가이 카후 에피소드와 같지만 딱히 땡기는 음식이 아니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멧돼지 전골도 그렇고.... 그냥저냥한 평작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비잔>> 비잔 세트 (장어 덮밥 세트) (와카마츠야)
다자이 오사무는 그 속마음을 당쵀 알 수 없는 작가라는 결론이 전부였던 작품. 상당히 허무했습니다. 다른 에피소드에 비하면 내용과 깊이 모두 찾아보기 어렵기도 하고요. 다자이 오사무라는 유명 작가를 등장시키기 위한 목적 외의 가치를 찾아보기는 힘들었습니다. 이 책 수록작 중에서 워스트로 꼽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