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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1

잃어버린 얼굴 - 사쿠라다 도모야 / 최고은 : 별점 3.5점

얼굴이 훼손되고 손목마저 절단된 상태의 신원 불명 사체가 발견되었다. 다행히 피해자의 정체는 전직 탐정이었던 야기 다쓰오라는게 곧바로 드러났다. 고마네에서 벌어진 다른 살인 사건과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건 수사에 나선 수사계장 히노 유키히코는 이 사건이 10년 전 실종된 오누마 겐, 그리고 지역 신문에 실린 경찰의 부실 대응을 고발하는 투서와 연결되어 있다는걸 알아냈고 탁월한 추리력을 발휘하여 진상을 밝혀낸다...

"매미 돌아오다"로 좋은 인상을 심어준 사쿠라다 도모야의 장편 추리 수사물입니다. 

굉장히 정통적인 경찰 수사 추리물인데, 복선 회수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앞부분에 툭툭 던져놓은 것처럼 보였던 지역 신문 투고, 부부 싸움 끝에 벌어진 살인 사건, 표백제를 구입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 같은 요소들이 나중에는 모두 본 사건과 직접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읽다 보면 정말 하나도 허투루 사용된 설정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이런 복선들과 이어지는 추리, 진상의 몇 가지 예는 아래와 같습니다.

  • 경찰의 부실 수사에 대한 투서 + 수상한 남자가 다이야라는 소년에게 접근했던 사건 + 투서 전 지방지에 실렸던 하야토의 시 + 다이야는 하야토의 친구였다 + 그날, 다이야는 하야토의 집에서 놀다가 나왔다 → 수상한 사람은 하야토의 존재를 시를 통해 알았고, 다이야를 하야토로 착각했다.
  • 시라카와 현장을 발견한 고다 미쓰코가 들고있던 다루마 위스키 병 + 죽은 야기가 구속 전 단골 바 바텐더에게 술을 보관해달라고 부탁 + 야기가 협박에 사용했던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 야기는 USB를 다루마 병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 오누마 겐이 횡령을 저질렀다 + 오누마 겐은 사채도 쓰고 있었다 + 야기에게 불륜 조사를 의뢰한 사람 중 하나가 쓰지였다 + 쓰지의 아내 가나는 오누마 겐의 직장 동료였다 → 오누마 겐은 가나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야기에게 협박당했고, 쓰지를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사소해 보이는 흩어져 있는 정보들이 진상으로 정리되는 과정은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수사계장 히노가 펼치는 추리의 짜임새도 좋습니다. 사소한 지점에서 이상함을 포착한 뒤, 그걸 기발한 방향으로 연결해 나가는 방식인데 신선하고 재미있어요. 대표적인게 시라카와가 살해되었을 당시 문고리가 걸려 있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하는 추리입니다. 살인까지 저지른 사람이 그렇게 허술했을 리 없으니 이는 임시 상황이었고 누군가 곧 돌아올 예정이었다고 추리를 전개하는데 설득력이 높습니다. 이는 앞서 나온, 수상한 여자가 표백제를 구입했다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범인이 '부부' 였다는걸 드러내게 되지요.
그 외에도 고다 미쓰코가 빼돌리려고 했던 USB가 숨겨진 장소를 밝혀내는 추리 등 히노의 명추리는 볼만한게 많습니다. 

오누마가 10년 전 쓰지를 살해한 뒤 그의 신분으로 바꿔치기해서 살아왔다는 반전도 괜찮습니다. 오누마로 의심되지만 혈액형이 달랐던 신원불명의 사체 등 관련된 정보도 충실히 제공됩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극적인 장치보다는 탐문과 방문 조사, 그리고 차곡차곡 쌓이는 증언을 통해 진상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묘사도 꼼꼼하여 수사물로서의 재미도 잘 살아 있고요.

다만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운과 우연이 과하게 작용하는 편입니다. 사건의 발단부터가 그러합니다. 오누마를 야기가 '우연히' 발견하고 뒤를 쫓았던게 시작이었으니까요. 오누마가 '아들일지도 모르는' 초등학생의 시를 지방지에서 읽은 것, 우에무라 교코가 오누마의 접근에 대해 투서를 보낸 것, 시라카와가 걸쇠가 걸리지 않은 야기의 집에 들어가 살해당한 것도 모두 우연입니다. 이런 부분은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요.

그리고 경찰도 예전 사진을 통해서는 바로 알 수 없을 정도로 외모가 많이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야기가 십여 년 전에 조사했던 상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뭐 이건 전직 탐정의 실력이라고 쳐도, 오누마가 쓰지를 살해한 뒤에도 사건 현장 근처에서 계속 살았다는건 정말이지 말도 안됩니다. 작품 안에서 나름대로 설명하려고 애쓰지만 솔직히 잘 와 닿지는 않습니다. 무리한 설정이었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주인공 히노의 성격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오누마 구미에 대한 취조 과정 등에서 엿보이는데 너무 인간적인 탓입니다. 오지랖도 너무 넓어요. 쓰레기를 쌓아두는 폭력적인 사타케의 부친 이야기는 본 줄거리와 큰 관련이 없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인간미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는데, 하드보일드스러운 사건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서 별로였어요. 차라리 좀 더 냉정하게 사건을 바라보는 형사 쪽이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잘 짜여진 작품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추리 애호가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6/01/03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5) - 드니 빌뇌브 : 별점 3.5점

FBI 요원 케이트는 CIA 작전 참여를 명령받고 책임자 맷과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를 만났다. 그녀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맷과 알레한드로의 수사에 위협을 느꼈지만, 사명감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선을 넘은 소노라 카르텔을 응징하는게 아니라, 그 세력을 메데인 카르텔에게 귀속시키는게 목적이었다는걸 알게 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한 2015년작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명성만 익히 듣고 그동안 보지 않았었는데, 와 정말 잘 만든 영화더군요. 특히 연출이 압도적입니다. 특수 효과나 과도한 액션 없이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솜씨가 대단한 덕분입니다. 절묘한 구도 및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미장센, 배우들의 의상, 절정부 터널 진입 씬에서의 야시경 등 모든 디테일이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며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고요. 그야말로 '삭막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건조한 멕시코 국경 지대 풍광 묘사도 좋습니다. 

맷과 알레한드로의 진짜 목적을 극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알레한드로의 복수심을 설득력있게 전개한 각본도 좋습니다. 정의롭지만 힘이 없고 방관자에 머무는 케이트, 강한 힘으로 불법이면서 강요된 정의를 행하는 맷, 힘을 이용하여 복수를 달성하는 알레한드로라는 등장인물별 설정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습니다. 케이트 역의 에밀리 블런트는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정의로운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로서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강한 마초 미국'을 상징하는 맷 역의 조시 브롤린도 냉소적인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요. 무엇보다도 정의를 넘어선, 치외법권의 '시카리오(암살자)'인 알레한드로 역의 베니시오 델 토로는 복수심과 고독함, 그리고 전략가로서의 냉철함과 충분한 무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을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알레한드로가 카르텔 보스 일가족을 모두 죽인 뒤, 케이트에게 나타나 모든게 정당했다는 서류의 서명을 강요하는 장면에서 두 명배우의 불꽃튀는 연기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액션 쪽은 다소 심심합니다. 총격전이나 대규모 액션보다는 심리적으로 긴장하게 만드는 전개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액션도 '상상력'에 의존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고요. 주인공 케이트가 관찰자이자 이용당하는 인물로 머무는 탓도 큽니다. 그녀의 능동적인 활약은 거의 찾아볼 수 없거든요. 때문에 액션에서 느껴지는 쾌감이나 재미는 전무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맷과 알레한드로가 케이트에게 작전 내용을 숨긴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작전이 불법이라서 숨겼다? 하지만 이 작전은 대통령급의 결정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현장 요원에게 정보를 주지 않는 설정은 말이 안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반 협박으로 불법이 아니었다는 서류에 서명하게 만들기까지 했다면 더더욱요. 말 잘 듣는 FBI 요원에게 작전에 협력하라고 설득하는게 훨씬 쉬운 방법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임에도 예술성을 갖춘 보기드문 수작입니다. 마약 카르텔 소탕 작전이라는 뻔한 소재를 통해서 국가의 폭력성과 목적의 정당성을 묻는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데 놀라게 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5/10/31

배트맨 이어원 - 프랭크 밀러 / 데이비드 마주켈리 : 별점 3.5점

프랭크 밀러 각본, 데이비드 마주켈리 작화의 한 권짜리 단일 이슈 배트맨 만화입니다. 그래픽 노블이라고 분류되어 있기는 한데, 제 기준으로는 만화입니다. 

배트맨의 탄생을 다루는 이야기를 고든의 시선으로 풀어낸 게 특징입니다. 브루스 웨인이 아닌 제임스 고든의 부임기와 고군분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거든요. 그래서 슈퍼 히어로물이라기보다는 부패한 경찰 조직과 맞서는 고든 중심의 느와르 장르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배트맨도 전지전능한 영웅이 아니라, 늘 어딘가 다치고 실수하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고요.

프랭크 밀러 각본답게 이야기 완성도도 높습니다. 고든은 부패한 경찰 조직 안에서 고립된 채 홀로 싸우고, 브루스 웨인은 자경단 활동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갑니다. 이런 각자 정의를 추구하는 두 사람의 노선이 여러 위기를 겪다가 최종 결전에서 하나로 합쳐지며, 부패한 경찰들이 무너지고 고든과 배트맨이 각자의 위치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전개가 깔끔한 덕분입니다.

거칠고 묵직한 작화도 매력적입니다. 마초적이고 러프한 선이 느와르 장르 및 무거운 고담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본편 외에도 콘티, 인터뷰, 캐릭터 설정 등 다양한 부록이 수록돼 있어 소장가치도 높고요.

다만 독특한 점은 있다 하더라도, 배트맨 탄생 이야기는 너무나 뻔한 이야기라는 문제는 큽니다. 이를 뒤집을 만큼 전개에서도 극적인 드라마가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성 캐릭터들이 대부분 주변 인물로 소비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고든의 아내나 불륜 대상인 동료 여성은 그렇다 쳐도, 캣 우먼 셀리나 카일은 왜 나오는지도 모르겠더군요. 하비 덴트도 비중에 비해 존재감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고요.

그래도 배트맨 단편 그래픽노블 중에서는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프랭크 밀러가 왜 이 바닥에서 명불허전인지 잘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배트맨 팬이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5/10/25

역대급 영지 설계사 - 문백경 원작/ 이현민 각색 / 김현수 작화 : 별점 3.5점

문백경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웹툰입니다. 각색은 "질풍기획"의 이현민, 작화는 김현수가 맡았습니다. 

소설 전생물과 영지물의 전형을 따르지만, 몇몇 차별화된 설정이 재미요소입니다. 우선 전생을 한 게 원작 소설 속 주인공인 하비엘이 아니라, 초반에 죽는 악역인 망나니 귀족 로이드 프론테라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비교적 흔해진 설정이지만, 이 설정을 잘 살려서 이야기 몰입감을 높입니다. 이를 위해서 등장하는게 바로 주인공이 토목공학도라는 설정이고요. 로이드는 토목 지식을 바탕으로 닥친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토목 공학에 최적화된 소환수와 능력들도 잘 어울립니다. 

주인공의 성장 방식도 차별화 요소입니다. 몬스터를 잡는 대신, 다양한 미션을 해결하며 레벨업이 진행되는데 과제들이 신선하고 재미있으며, 전략적인 요소도 함께 녹아 있거든요. 단순한 전투보다는 꽤 치밀한 계획과 인프라 구축 중심의 접근이 많다는게 특징이지요. 켄타우로스 폭주족과의 대결 결과로 경기장을 지어주고, 인어들에게 찜질방을 만들어 주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각색을 맡은 이현민의 빠른 전개와 과감한 개그도 잘 어울렸고, 김현수 작가의 작화 역시 인물 디자인과 액션, 컷 구성 모두 빼어납니다. 이 둘이 합쳐서 시너지를 불러 일으킨 명장면이 바로 아래의 '고기 사주는 짱친'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런 개그가 넘쳐납니다.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인 전개 구조는 익숙하며, 결말 역시 깔끔하긴 하지만 특별한 여운은 남기지 않습니다. 지옥왕 헬카로스의 최후도 심심한 편이고요.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마무리된 작품으로, 완성도는 높습니다. 제가 본 전생물 중에서는 손가락에 꼽을 만 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전생물이나 영지물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2025/08/09

매미 돌아오다 - 사쿠라다 도모야 / 구수영 : 별점 3.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격 단편의 고수라는 작가의 단편집, 제74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했으며, 제21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까지 수상하며 2관왕의 영예를 누린 책입니다. 

"매미 돌아오다"부터 "서브사하라의 파리"까지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곤충을 관찰하며 다니는 에리사와 센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단편별로 특정 곤충이 주요 소재가 되는 일상계 추리 연작물입니다. 곤충과 생물학, 생태학과 같은 과학 지식이 추리와 결합된게 특징으로, 사건의 단서 배치나 해결 방식도 정교합니다.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가 제시되고요. 

"반딧불이 계획"이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과학 지식과 결합된 추리의 완성도가 뛰어나며 결말의 반전도 좋기 때문입니다 . "염낭거미"는 현실적인 일상계 미스터리로 완성도가 높고, "매미 돌아오다"는 매미라는 소재와 함께 잔잔하게 풀어나가는 전개가 인상적이고요. "저 너머의 딱정벌레"와 "서브사하라의 파리"도 나쁘지는 않은데, 앞선 세 작품보다는 전개나 결말이 약간 아쉽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관왕을 괜히 탄건 아니네요. 곤충과 과학, 일상 추리를 결합한 독특한 작품을 찾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매미 돌아오다

헤치마는 16년 전 자원봉사 활동을 위해 방문했던 산골 마을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쓰루미야 교수와 에리사와 신에게 16년전 과거 자신이 목격했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16년 전 목격한 유령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풀어내는 전형적인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당시 헤치마가 보았던 유령은 사실 실종된 소녀 오에 미키의 친구였습니다. 미키는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신의 연못’에서 수영을 한 뒤 실종되었고, 이를 부추겼던 친구가 죄책감 때문에 여성 출입이 금지된 신사에 몰래 들어갔던 겁니다. 자기를 대신 벌해달라고 하기 위해서요. 헤치마가 본 건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사에서 노숙 중이던 자원봉사자 이와쿠라가 사정을 눈치채고 그녀를 숨겨주고, 도망치게 해 준 덕분에 일종의 유령처럼 기억에 남게 되었던 것이지요.
쓰루미야 교수의 글을 통해 그녀가 '유령' 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에리사와의 추리가 맞았음이 확인되며 인상 깊은 마무리로 이어집니다..

핵심 인물들이 16년이 지난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다시 모인다는 설정은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장소에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능력을 지닌 에리사와가 우연히 함께 있었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죽은 이를 기리는 ‘매미 공양’이라는 마을 풍습과 매미를 먹기 위해 숲을 찾은 쓰루미야 교수의 행위, 그리고 그날이 오에 미키의 17주기라는 상황이 잘 맞물려 있어서 설득력을 높여주는 덕분입니다.

일상계답게 트릭이나 수수께끼 풀이가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추리는 합리적이고 과거 사건과 현재의 연결이 매끄럽게 이어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매미라는 소재도 적절히 사용되고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잔잔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미스터리를 선호하신다면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염낭거미

중학생 다이라 마치코는 교통사고로 중태에 빠졌다. 사고는 어머니가 집에서 쓰러져 구급차가 출동한 직후에 일어났다. 그런데 마치코가 하교 후 곧장 집에 왔다면, 쓰러진 어머니를 보고도 20분 넘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사고가 난 방향도 이상했다. 마치코가 그쪽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다. 마치코가 어머니를 쓰러트리고 도주하다가 사고가 났던 것일까?

주어진 상황만 놓고 본다면, 마치코가 어머니를 쓰러뜨리고 죄책감에 도망치다 사고를 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상은 그 반대입니다. 어머니가 남자를 집에 들이고 있어서, 마치코는 하교 후 집에 곧장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온 뒤 어머니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본 마치코는, 어머니와 함께 있던 남자가 범인인게 분명하기에 그 남자의 차를 막기 위해 도로로 뛰어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던 겁니다.

마치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날 법한 사건처럼 느껴지는 설득력 있는 구성이 돋보입니다. 일상 속 사건을 다룬 본격 추리물로서 손색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앞서 구급차가 도로 공사 때문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등 단서들은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기도 하고요. 

다만, 제목에 등장하는 ‘염낭거미’와 작품 중에 언급되는 ‘고추잠자리’는 이야기와 별 관계는 없습니다. 연작 설정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가져온 느낌이에요. 에리사와가 사건 해결자로 등장하는 설정도 다소 작위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연작 중 한 편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그래도 본격물 스타일의 구성은 좋은 만큼,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신다면 충분히 읽어볼 만합니다.


저 너머의 딱정벌레

에리사와는 지인 마루에가 운영하는 펜션에 초대받아 방문했다. 그곳에서 아랍인 투숙객 와그디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바로 다음 날 아침 와그디가 절벽 아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에리사와는 와그디의 신앙과 유품을 단서로 진상을 추리해낸다.

와그디는 태양신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기도하기 위해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스카라베 장식 속에 숨겨진 나침반을 지니고 있었고요. 그런데 발견된 유품의 나침반은 고장 나 있었습니다. 와그디가 나침반을 몸에서 뗀 건 단 두 번, 목욕을 할 때와 낮에 급류타기를 했을 때 뿐입니다. 그런데 나침반이 고장 난 시점은 기도 전이었습니다. 즉, 범인은 급류타기 담당 직원인 가키모토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지요. 가키모토는 와그디에 대한 인종적 편견으로 장난을 쳤는데, 이를 알고 분노한 와그디가 다툼 끝에 가키모토를 죽인 줄 알고 자살을 선택한게 사건의 진상입니다.

그리 특별한 트릭은 없지만 추리 전개는 잘 짜여져 있습니다. 가키모토의 편견을 아르바이트생 사에키의 입을 통해 드러내며, 독자가 사에키를 진범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흐름도 나쁘지 않고요.

그러나 여러모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가키모토가 스카라베 안에 나침반이 들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가 도저히 설명되지 않아요. 경찰조차 몰랐던 정보인데 말이지요. 또 나침반을 고장 내는 방법이 간단하다고는 하지만, 일반인 입장에서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인종적 편견으로 실행하기에는 손도 많이가고 어리석은 장난이라 생각되고요. 스카라베가 쇠똥구리라면서 이야기 속에 곤충을 끌어들이는 방식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 중 가장 처집니다.

반딧불이 계획

과학잡지 아피에의 편집장 사이토는 5년 전 연락이 끊긴 기고자 가이코에 대한 편지를 받고 홋카이도로 향했다. 가이코를 따르던 학생 밧타의 도움으로, 사이토는 가이코가 그곳에서 '반딧불이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실종되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반딧불이 계획'은 논에서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던 마을 풍경을 되살리는 계획이었다. 사이토는 가이코 집에서 숨겨진 네거티브 필름을 찾아 인화했고, 사진에서 최근 사망한 도토 이과대학 오사카베 교수를 확인했다.

에리사와 신 대신 사이토의 취재(?) 및 추리가 펼쳐집니다. 사이토는 남겨진 단서들을 통해 오사카베 교수가 유전자 조작으로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물고기를 만들었다는걸 알아냅니다. 이 사실이 가이코에게 발각되었고, 교수는 책임감과 압박 끝에 자살을 택했으며 가이코는 교수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결말에서 밝혀지는 진상은 달랐습니다. 교수는 자살 직전 가이코를 살해했고, 그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위령비 아래에 시신을 묻었고요. 죽기 전 유언처럼 “유령비에 묻어 달라”고 했던건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사이토도 이 진상을 추리해냈지만 앞서의 이야기를 꾸며낸건 가이코를 아버지처럼 따랐던 밧타를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밧타 역시 빼어난 추리력으로 진상을 깨닫고 이 사실을 사이토에게 알리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밧타가 어린 시절의 에리사와 센이였다는게 밝혀지며 또다른 놀라움을 독자에게 안겨주고요.

놀라운 진상과 반전이 이어지는 추리적인 구조도 좋지만, 과학적인 소재도 이야기에 잘 녹아들고 있다는게 아주 인상적입니다. 원래 교수가 만든 물고기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루시페린이라는 발광물질을 외부에서 받아들여야 빛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논으로 흘러든 물고기들은 빛을 냈지요. 이건 논에 루시페린을 지닌 생물이 살고 있었고, 물고기가 그것을 섭취해 빛을 내게 되었다는 뜻이며, 가이코가 추진한 ‘반딧불이 계획’이 성공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학 설정과 플롯이 정교하게 연결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작물로서의 설정과 생물학적, 과학적 소재에 추리가 잘 결합된 수작입니다.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영상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물고기가 빛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고 싶네요.

서브사하라의 파리

대학 동창인 의사 에구치와 오랜만에 만난 에리사와는, 에구치가 체체 파리 번데기를 일본으로 반입한 이유를 추리해내는데... 

체체 파리 수면병은 아프리카에서만 발생하는 풍토병입니다. 문제는 전염병이 아니라 감염된 파리를 통해서만 퍼집니다. 그래서 체체 파리가 서식하지 않는 선진국은 치료법 개발에 관심조차 갖지 않지요. 그런데 에구치가 사랑했던 아야나가 수면병에 걸려 죽자, 에구치는 이에 분노해서 체체 파리의 번데기를 일본으로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체체 파리의 번데기, 유충에는 수면병을 일으키는 기생충이 없습니다. 성충이 감염자의 피를 빨아야만 기생충을 얻어서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기발한 트릭은 에구치가 수면병에 걸린 상태로 귀국했다는 겁니다. 에구치는 번데기를 부화시킨 후, 자신의 피를 빨게하여 일본에 수면병을 퍼뜨리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지요. 

이렇게 생물학을 이용한 테러 계획은 설득력있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에리사와에 계획을 접는 결말은 다소 허무했습니다. 제 아무리 테러를 벌였다 한들, 겨울이 있는 일본에서 수면병이 고착화되는건 불가능했다는 점 등 계획도 상세하게 뜯어보면 어설픈 점이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강한 동기와 설정은 좋았지만, 마무리는 약했습니다.

2025/07/26

더 킬러 (2023) - 데이빗 핀처 : 별점 3.5점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넷플릭스 전용 장편 영화.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연출만큼은 매우 정교합니다. 특히 파리 호텔에서의 실패 이후 킬러가 탈출하는 장면은 색감, 구도, 리듬감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킬러가 스스로의 신분을 감추고 위장하며 타겟을 하나씩 처리하는 과정의 디테일도 빼어납니다. 중개인 호지스를 습격하려고 쓰레기 수거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차량은 물론 옷에 부착하는 패치의 로고를 수작업으로 그려서 신분을 속이며, 문이 자동으로 닫히는 시간을 측정해서 침입하는 타이밍을 잡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완벽한 현실감'을 가져다 주는게 굉장히 좋았어요. 정말 저렇게 하면 침입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데이빗 핀처 감독 작품답게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납니다. 킬러 역을 맡은 마이클 패스밴더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내면을 표현해내는데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허술합니다. 암살 실패로 연인이 폭행당하자 복수에 나선다는게 이야기의 전부로 크게 새로울게 없는 킬러 복수극에 불과한 탓입니다. '킬러의 생활'을 따라가는 일종의 킬러 일상계물이라서 행동의 디테일을 좇는 재미는 있지만, 정교한 퍼즐처럼 맞물리는 서사를 기대한 관객으로서는 아쉬웠습니다.
또 암살 중개인이 킬러를 제거하지 않고, 여자친구만 폭행하고 사라진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왜 기다렸다가 킬러를 죽이지 않았을까요? 협박이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한데 말이지요. 결국 이는 킬러의 복수극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인데, 수천km를 여행하며 4명이나 살해하는 복수를 하기에도 단순 폭행은 좀 부족해 보여서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중반부, 킬러가 플로리다로 가서 흑인 청부업자와 벌이는 격투 장면도 아쉽습니다. 상대는 거대한 체격과 잔혹함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격투는 힘의 압도감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고 길게 늘어지는 인상입니다. 어두운 탓에 액션을 제대로 감상할 수도 없고요. 이럴바에야 킬러의 압도적 강함을 짧게 선보이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초반부터 반복되는 킬러의 나레이션은 철학적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후반부엔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핀처 특유의 절제된 미장센과 현실감 있는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집중력 있는 연기로 몰입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화면 자체로 모든 걸 말하는 영화이지요. 별점은 3.5점입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스타일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2025/05/10

너의 퀴즈 - 오가와 사토시 / 문지원 : 별점 3.5점

너의 퀴즈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문지원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퀴즈 최강자를 가린다는 Q1 그랑프리 결승에서 미시마 레오는 도쿄대 출신의 천재인 유명 방송인 혼조 기즈나와 맞붙었다. 팽팽한 6:6 상황에서, 혼조 기즈나는 사회자가 문제를 말하기도 전에 정답을 맞추어 우승했다. 레오와 퀴즈 마니아 동료들은 방송국의 '짬짜미'를 의심했고, 레오는 스스로 조사에 나섰다. 조사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퀴즈 사랑에 대해 반추해 나가던 레오는 결국 이건 '짬짜미'가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그리고 혼조를 만나 진상에 대해 듣게 되는데...

2023년 제23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소설 부문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신예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작품입니다. 작가의 "거짓과 정전"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어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책 소개만 보았을 때는 퀴즈 마니아의 퀴즈 관련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퀴즈라는 세계를 깊이 있게 조명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퀴즈에 대한 진지한 접근입니다. 단순히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명확한 규칙과 전략이 존재하는 진지한 ‘시합’으로 설명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퀴즈에는 '확정 포인트'가 있다고 합니다. 문제 중에 퀴즈의 답을 확정할 수 있는 포인트이지요. 그리고 퀴즈 플레이어는 상대보다 빠르게 답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답을 알고 누르는게 아니라 답을 '알 것 같은' 단계에 눌러야 한다는 등입니다. 이런 정보들과 함께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퀴즈 대회 Q1은 실제 대회를 눈 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며, 미시마 레오가 퀴즈를 풀어내는 사고를 세밀하게 그려내어 정말 하나의 '스포츠'를 보는 듯한 박진감을 안겨줍니다. 작가가 설명하는 퀴즈 관련 정보들도 실제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에 등장한 서술만으로도 충분히 그럴듯해 보일 정도로 잘 설명되고요. 작가는 이런 세심한 설정을 통해 퀴즈가 단지 지식을 겨루는 게임이 아니라, 사고와 감각이 살아 있는 장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퀴즈와 인생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더욱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이 부분은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는 주인공이 겪었던 경험들이 정답과 우연히 연결되었었는데, 이 작품은 퀴즈의 정답, 아니 퀴즈 자체가  레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인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퀴즈의 정답을 맞힌다는 것은 그 정답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해 왔다는 증거다.'라는 레오의 말 처럼요. 그리고 작품에서는 Q1에서 레오가 맞춘 문제를 통해 레오의 인생을 어린 시절 - 퀴즈를 몰랐던 때 부터 퀴즈에 빠지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 부터 돌이켜보게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레오가 퀴즈를 정말 사랑한다는게 자연스럽게 드러나고요. 레오가 알고 있던 ‘일본에서 가장 낮은 산’의 정답이 ‘덴포잔’에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히요리야마’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레오는 퀴즈가 '살아있다'는걸 깨닫고, 퀴즈에 대해 더 충실감을 느끼게 되거든요. 이는 단순히 지식을 외울 뿐이었던 혼조와 비교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미시마 레오도 호감이 갑니다. 지극히 평범한 청년으로,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단지 퀴즈에 대한 애정만으로 잘 하게 되었다는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등장인물 뿐 아니라, 작가가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본 여러 묘사들도 인상적입니다. 하루의 시간대를 나타내는 단어는 모두 태양의 움직임이 기준인데 심야만 성격이 다른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 그리고 그게 퀴즈 정답을 말했을 때의 전율과 엮이는 묘사는 정말 빼어났어요. 

그리고 미스터리물로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 7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답네요. 핵심은 ‘혼조 키즈나가 어떻게 문제를 듣기도 전에 정답을 말했는가?’라는 수수께끼 풀이인데, 레오가 과거 영상과 시합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은 긴장감이 넘칠 뿐더러, 작은 단서에 의해 하나 둘 씩 수수께끼가 풀려나가는 미스터리 장르로서의 재미 또한 충실하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 비해 진상 자체는 다소 아쉬움을 남깁니다. 혼조가 퀴즈 프로그램의 본질을 꿰뚫고 문제 출제의 경향을 파악했다는 점까지는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Q1 그랑프리에서는 참가자들이 반드시 정답을 맞힐 수 있는 문제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설정은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혼조가 마지막 문제로 과거 악연이 있는 연출자 사카다와 관련된 문제가 나올 것이라 확신한건 도박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문제를 듣기도 전에 정답을 외친 이유가 화제를 유도해 이후 자신의 온라인 및 유튜브 사업 홍보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건 최악이었어요. 레오와 박빙의 승부를 펼칠 정도의 인물이기에, 보다 더 강렬한 철학이나 신념을 기대했는데 너무 세속적인 동기라 실망스러웠어요. 이보다는 혼조가 레오를 만났을 때 해 주었던 이야기 - 아픔을 주었던 '곰의 장소'였던 야마가타가 정답을 알려주어 퀴즈에 진정한 매력을 깨닫게 해 주었다 - 가 훨씬 나았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혼조가 도박을 벌인 이유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는 결정적 문제가 있긴 하지만요.

진상이 실망스러웠던건 혼조의 묘사가 별로였던 탓도 큽니다. 도쿄대 의대 출신의 천재로 사전을 머릿 속에 집어 넣고 있다는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인 설정도 별로고, 어린 시절 학폭같은 불필요한 서사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습니다. 앞서 말한 '곰의 장소' 이야기로 끌고갈게 아니었다면 말이지요.

그래도 퀴즈를 단순한 게임이 아닌 삶과 연결된 진지한 시합으로 그려내며, 미스터리적 긴장감과 감성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025/01/05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사이토 미나코 / 손지연 : 별점 3.5점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8점
사이토 미나코 지음, 손지연 옮김/소명출판

이 책은 2차대전 당시 '주부의 벗' 등 일본 여성지에 실린 요리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이 일본 가정의 식탁에 미친 영향을 알려주는 미시사, 식문화사 서적입니다. 잡지에 실린 요리 정보로 그 시대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며, 전쟁 시기 일본인의 먹거리 변화도 굉장히 생생하게 알 수 있어서 전쟁의 실상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시대 순으로 보자면 1940년부터 '절미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가뭄과 흉작 탓으로, 일본이 쌀을 절약하기 위해 대체 음식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흥아빵'이라는 레시피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빵은 밀가루에 콩가루, 해초 가루, 말린 생선 가루를 넣어 만들었는데, 맛이 있을리가 없지요=.

1941년에는 국민의 영양을 고려한 '국민식 운동'이 도입되었으나, 배급제가 본격화되면서 이상에 그치고 맙니다. 배급제에서는 단백질이 특히 부족했는데 오징어와 조개가 단백질 공급원으로 활용되었고, 콩비지도 다양하게 요리되었습니다.
과달카날 패전 이후인 1943년에는 생쌀을 볶아 양을 늘리거나, 겨를 사용하는 레시피까지 등장하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런데 레시피에 설탕, 버터, 달걀과 같은 재료가 포함된건 한심하게 느껴졌어요. 너무 비현실적이었거든요.

1944년, 공습이 심화되면서 죽과 집에서 키운 고구마, 호박이 주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길가의 잡초, 들풀, 곤충을 식용으로 권장하고, 심지어 차 찌꺼기를 채소로 먹으라는 권고까지 실리게 됩니다. 저자가 표현대로 '최후의 발악'이지요. 이런 쓰레기 레시피 중 하나가 '민들레 칼슘 무침'입니다. 

들풀 먹는 법 1 민들레 칼슘 무침

민들레 어린잎을 살짝 열탕한 후 물에 헹궈둡니다. 구운 생선 머리와 뼈, 달걀 껍데기 등을 갈아 으깨고, 다시마가 있으면 구운 후 갈아서 기호에 따라 맛을 내어 무쳐줍니다.

민들레의 쓴맛을 제거하려면 데친 후 얼마 동안 물에 담가 둡니다. 민들레의 쓴맛은 국화과 식물 특유의 영양소이므로 제거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전후에는 미국에서 제공된 밀가루 중심의 레시피가 많아졌고, 식량 사정이 안정되기 시작한 1949년 이후로는 점차 다양한 요리가 복원됩니다. 195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식탁은 정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쟁의 실상을 독특하면서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독서였는데,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당시 요리를 현재 구현한 컬러 사진이 몇 장 실려 있지만, 더 많은 요리를 재현하거나 당시 잡지 자체의 도판을 함께 수록했다면 책의 완성도가 한층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실생활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4/11/15

11장의 트럼프 - 아와사카 쓰마오 : 별점 3.5점

11枚のとらんぷ - 6점
아와사카 쓰마오/東京創元社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주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즈타 시마코가 살해당했다. 그녀가 소속된 마지키 클럽의 마술 공연 중이었다. 시신 주변에는 부서진 여러 가지 물건들이 널려 있었는데, 이는 클럽 회원인 카가와 슌페이가 쓴 "11장의 트럼프"라는 마술 트릭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품들이었다.

사건 직후 마지키 클럽의 회원들은 도쿄에서 열리는 세계 마술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프랑스 마술사 프랑수아 란슬롯의 카드 마술을 보게 된다. 이를 본 카가와 슌페이는 미즈타 시마코 살인 사건의 진상을 깨닫게 되고, 회원들 앞에서 범인이 클럽 회원 중 한 명인 마츠오 쇼이치로임을 밝힌다. 이후 마츠오는 사건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건 시마코의 조상인 마술사 호큐사이의 유품때문이었다.

"아아이이치로 시리즈""복잡한 기계장치" 등으로 유명한 아와사카 쓰마오의 또다른 대표작 장편입니다. 여러 리스트(이거라던가, 이거 등)에 높은 순위로 랭크되어 있는 작품이지요. 명성만 보면 왜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았는지 의아합니다. 항상 읽고 싶었었는데, 이번 기회에 도전하여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원서라 그런지 완독하는데 거의 1주일이 넘어 걸렸네요.

이 작품의 제일 큰 장점은 마술과 트릭의 절묘한 결합입니다.

특히 마츠오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해 활용한 트릭이 대표적이에요.
마츠오가 공민관 무대에서 펼쳤던 카드 마술은 관객이 고른 카드를 정확히 맞추는 마술이었는데, 마지키 클럽 회원들은 공연 당시 조명을 조작하던 시마코가 카드를 확인한 뒤 특정 위치에 조명을 비추어 맞추도록 한 트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마코가 그때까지 살아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지요. 사실은 이미 살해된 후였는데도요. 마츠오가 카드를 맞출 수 있었던건 시마코의 도움이 아니라, 관객의 핸드백 금속 장식을 사용했던겁니다("타짜"의 지포라이터같은거지요). 또 이건 카가와가 프랑수아 란슬롯의 카드 마술을 보고 깨닫게 되는 핵심 요소로,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란슬롯의 책을 열심히 읽었던 추종자 마츠오가 란슬롯의 말대로 관객이 카드를 정말 자기 의지로 선택하게끔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츠오의 공연 직후 이어진 오타니 난잔이 벌인 '주머니 속의 미녀' 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원래는 시마코가 미치코의 대역을 맡는 마술이었으나, 마츠오가 1인 2역을 소화하면서 시마코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착각을 관객들에게 심어줬던 거지요.

소설 속에 등장하는 "11장의 트럼프"라는 소설도 흥미롭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다양한 마술 트릭들이 소개되어 독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할 뿐 아니라, 중요한 단서로 활용되기도 하거든요. 특히, 카가와는 시마코가 살해된 현장에서 가스 밸브가 열린 것을 범인이 알아채지 못한 점에 착안하여 범인이 후각을 상실한 사람일 거라 추리합니다. 그리고 누가 후각이 없는지는 "11장의 트럼프"를 통해서 밝혀내게 됩니다.

사건의 동기도 독창적입니다. 시마코가 물려받은 일본 초기 마술사 호큐사이의 마술 비법이 동기라는 설정은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여줍니다. "복잡한 기계 장치"의 '가라쿠리'에 대한 설명과 비슷하게 일본 초기 마술의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낸 덕분입니다.

또한, 마지키 클럽의 마술 공연에서 벌어지는 소동도 유쾌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특히 '주머니 속의 미녀' 마술에서 미치코가 탈출해 공연장으로 들어가려다, 입장권이 없어서 접수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은 아주 기발했어요. "아아이이치로" 시리즈가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단점으로는 여러 가지 설정과 캐릭터들의 반응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살인이라는 중대한 범죄가 벌어졌음에도 주요 인물들이 사건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이질적이었어요. 피해자가 함께 활동하던 동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과 주변 인물들이 비교적 가볍게 대응하는 듯한 모습은 영 공감이 가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클럽 회원인 게이코와 다른 인물들이 범인인 마츠오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범행 동기였던 호큐사이의 마술 비법을 함께 이용하려는 속셈이 엿보이는 결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범인이 현장을 "11장의 트럼프" 속 물건들로 꾸미는 설정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호큐사이의 마술에 대해 누군가 알고 있다면 자신의 범행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세간의 이목을 끌고자 했다는 의도가 앞뒤가 맞지 않는 탓입니다. 호큐사이의 마술을 아는 사람이 사건을 접했다 하더라도, '시마코는 호큐사이의 마술 때문에 살해당했다!'고 주장할리가 없잖아요. 더군다나, "11장의 트럼프"라는 소설은 거의 판매되지 않아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고요. 사건을 일부러 극적으로 연출하려 했다면, 시체의 목을 자르는 등 보다 직설적인 방법이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사건 현장에서 ‘가스 밸브가 열린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단서 역시 비약이 심합니다. 이를 근거로 범인이 후각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추리였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마술과 본격 추리 소설을 잘 결합하고 있으며, 독자에게 모든 단서를 공정하게 제공하며 추리의 재미를 충실히 전달해 줍니다. 마술 트릭과 사건의 연결이 돋보이는 장면들이 많으며, 초반의 유쾌한 분위기도 좋고요. 살인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의 흥미를 끌며, 마술 트릭을 활용한 본격 추리 소설로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마술이 등장하는 본격 추리물 중(이 작품이나 이 작품, 이 시리즈...)에서는 가히 최고를 다툰다 할 수 있으니까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024/11/09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 아사쿠라 아키나리 / 남소현 : 별점 3.5점

여섯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 8점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남소현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서는 트릭과 진범이 누구인지가 모두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타노, 시마, 쿠가, 하카마다, 야시로, 모리쿠보의 명문대 졸업을 앞둔 취준생 6명은 가장 잘 나가는 신생기업 스피라링크스 최종 전형까지 살아남았다. 한 달 동안 6명은 마지막 관문인 그룹 토론을 준비하여 모두 함께 합격하자며 친해졌는데, 그룹 토론은 그들 중 딱 한 명만 투표로 선발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토론장에서 여섯 명은 각각이 수신인인 수상한 봉투를 발견했고, 그 안에 각자의 과거 치부가 증거와 함께 들어있다는게 밝혀졌다. 이를 통해 투표는 순식간에 요동쳐서 원래 앞서가던 쿠가 등이 봉투 속 내용물로 뒤쳐지고, 하타노가 1위로 부상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봉투를 가져다 놓은게 하타노라는게 드러나 결국 시마가 1위로 스피라링크스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8년 후, 하타노는 지병으로 사망했고 시마는 유품을 건네받았다. 유품은 시마가 진범이라는 일종의 고발이었다. 범인이 아니었던 시마는 충격을 받고, 과거 그룹 토론 멤버들과 다시 연락하여 사건에 대해 재조사에 나섰다. 이는 하타노가 끝까지 숨겼던 자신의 치부가 담겨있던 봉투 속 내용물이 무엇인지 두려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취업 준비생들의 극심한 경쟁을 사회파 범죄 스릴러로 풀어낸 작품. 신입사원 공채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으니 사회파 소설로 보아도 무리가 없겠지요. 얼마전 올렸던 추리 소설 추천 리스트에 있었는데 번역되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장점이라면 일단 독자를 흡입시키는 전개가 아주 탁월하다는 점입니다.

1부는 화자 하타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그가 범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인으로 몰려 추락하는 상황이 긴장감있게 그려집니다. 또 그룹 토론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매우 흥미로우며, 특히 입사가 어려워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긴장감은 눈부십니다. 단순한 그룹 토론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솜씨가 정말 놀랍습니다. 이와 함께, 치열한 입사 경쟁이라는 현실도 강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2부에서의 입사에 성공한 시마의 시점으로 그녀의 조사를 통해 하타노의 결백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도 무척 흥미롭고요. 이러한 시점의 변화는 캐릭터의 진실을 탐구하는 재미를 더합니다. 

작품 속 여섯 명의 취준생 캐릭터들도 처음에는 능력있고 선한 사람들로만 보였지만 이후 그룹 토론과 시마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약점(?)이 하나, 둘 씩 독자에게 제공되면서 마지막에 복합적인 인물들로 거듭난다는 점에서 좋았어요. 그동안 보아왔던 평면적인 인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생함을 보여주었으니까요. 작 중 언급된대로 '달은 지구에서는 표면밖에 보이지 않지만, '뒷면'이 엄연히 존재한다.'는걸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누가 비밀을 폭로하는 봉투를 준비했나?'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이 공정하면서도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본격 추리물처럼 단서를 제공하고 범인을 빵 터트리는건 아니지만, 결정적인 단서로 '하타노가 음주를 하던 사진에서 '스미노프 보드카'가 술이라는걸 알아채지 못한 사람이 범인이다'는걸 독자에게도 알려주고, 이를 통해 술을 못하는 쿠가가 범인이라는걸 드러내는건 본격 추리물 못지 않았습니다. 하타노가 유언처럼 남긴 파일의 '범인, 시마 이오리에게'라는 수신인이 '범인 시마 이오리에게'가 아니라 '범인과 시마 이오리에게'라는 뜻이었다는 착안도 괜찮았고요. 하타노가 파일에 걸어놓은 암호도 범인이 쿠가이므로 '페어'였었죠.

또 괜찮은 서술 트릭물이기도 합니다. 시마의 인터뷰와 하타노, 시마 1인칭 시점으로만 다른 인물들을 묘사하여 야시로가 선뜻 장애인 석에 앉았고, 쿠가가 장애인 주차장에 차를 세웠고, 하카마다가 야구를 하던 어린 아이들에게 폭언을 하며 혼을 냈다는걸 드러내며 그들을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하고 얄팍한 인물로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야시로와 쿠가는 장애가 있는 시마를 배려했던거고 하카마다도 할머니가 공에 맞을 뻔 해서 아이들을 혼냈고 나중에는 잘 타일렀다는게 드러납니다. 이렇게 독자를 착각하게 만들었다가 마지막에 반전으로 진상을 드러내는건 전형적인 서술 트릭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도 깜빡 속았네요.

취준생들이 겪는 압박과 고통, 힘든 취업 과정에 대한 묘사도 빼어납니다. 읽다가 얼마전 제가 근무하는 부서에 입사한 신입사원이 합격 소식을 듣고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기뻐서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만큼 절박한 취준생 들의 심정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불합리한 신입 공채에 대해서도 사회파 추리 소설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잘 밝히고 있습니다. 단지 사측 입장이 아니라 취준생들도 거짓말쟁이라는걸 밝히고 있어서 균형을 맞추는 것도 좋고요. 물론 사측 문제가 더 커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타노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유품으로 시마의 진상 추적이 시작되는 2부는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쿠가가 신입 공채 시험의 정당성에 의심을 품고 일부러 사건을 일으켰다는 동기가 불공정한 탓이 큽니다. 쿠가의 뛰어난 친구가 스피라링크스 2차에서 떨어졌는데 쿠가 본인은 최종 전형까지 합격한게 불만이라는 동기는 처음에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뛰어난 친구 이야기가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동기를 뒷받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동기 자체의 설득력도 없어요. 쿠가의 말 그대로 치기어린 행동에 불과합니다. 한마디로, 철없는 아이의 장난과 다를바 없는 사건이라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네요.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쿠가가 하타노를 범인으로 몰아붙인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겁니다. 쿠가가 신입 공채를 망치고 싶었다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최후의 1인이 되든 상관없이 그룹 토론이 엉망이었다는것만 스피라링크스 인사팀이 확인하면 되었으니까요. 각자의 치부를 담은 봉투 안에 작은 협박문을 넣어서 알리바이를 조작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모리쿠보가 범인으로 몰리게 된 상황에서, 사진이 이상하다는걸 들먹이면서 각자의 알리바이를 확인하여 하타노가 범인일 수 있다는 식으로 끌고간 까닭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전 술자리에서 술을 못하는 시마에게 술을 강권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쿠가가 시마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지 않는 한, 그렇게까지 큰 잘못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 자리에 하타노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또 시마가 확인한 그룹 토론 당시 동영상을 통해 모리쿠보와 야시로가 협박당했다는게 밝혀졌습니다. 이 당시에는 모두 취직이 급했으니 비밀을 공개하겠다는 협박은 통했을겁니다. 그러나 8년이 지나 모두 사회인이 된 현재 시점에서 이 시절 협박당했다는걸 드러내지 않은건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하타노의 알리바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협박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하타노가 범인으로 몰리는걸 방조한 잘못이 있기도 하고요. 모리쿠보는 시마를 의심했고, 쿠가는 진범이었으니 그렇다쳐도 최소한 야시로는 시마를 만났을 때 그 사실을 충분히 밝혔어야 했습니다. 이 점은 이들 모두 알고보면 착한 사람들이었다는 반전을 약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아울러 '공개되지 않은 시마의 비밀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는 좀 작위적이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시마의 장애가 1부에서 아예 설명되지 않은 것도 탐탁치 않고요. 약간은 노리고 속인 느낌이 드니까요.

신입 공채에 대한 비판도 다소 과장되어 있습니다. 스피라링크스의 인사부장이 말한건 현실적이지도 않고요. 서류 전형과 면접, 여러가지 시험 등을 통해 나름 공정하게 사원을 선발하는게 당연합니다. 6명의 최종 입사 대상자들을 대상으로 그룹 토론해서 1명을 뽑아라? 이건 말도 안되요. 갑자기 성장한 회사라 제대로 체계를 갖추지 않았다는 변명이 실제로 통할리 만무합니다. 작가가 직장 생활은 해 보지 않은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건 분명합니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신입 사원 공채를 소재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는데 감탄할 수 밖에 없네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쿠가가 하타노를 범인으로 몰지만 않았어도 별점 4점 이상은 충분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보통 추리소설 추천 리스트는 믿지 않는 편인데, オモコロ(Omocoro)bros 편집부 추천은 믿음이 생기네요. 다른 작품도 번역이 되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당연하게도 영화화가 되었더군요. 곧 개봉이라는데, 서술 트릭 쪽을 어떻게 영상화했을지 궁금합니다. 



2024/06/05

Q.E.D. iff 증명종료 23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5점

Q.E.D Iff 증명종료 23 - 8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오랫만의 수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화"
가나는 캐스터네츠를 돌려주기 위해 플라멩코 댄서 지망생 타케다 사키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한달 쯤 전 사라졌다. 애인 유키토 때문에 엮인 뒤 친해진 부잣집 딸 마츠자와 리카의 별장 파티 직후였다. 리카는 사키에게 매료되어 절친이 되었지만, 강하고 폭력적인 성격 때문에 주변 인물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은폐를 한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던 리카는 가나에게, 자신에게 동화된 사키를 위해 거금을 주어 그녀가 스페인으로 유학가도록 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토마는 사키 방에 있던 수상한 인형, 사키가 리카를 협박했던 증거가 담겨있는 스마트폰을 회수하지 않은 것, 유키토에게 더 이상 사키와 리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협박한 것, 사키가 스페인으로 간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마지막으로 캐스터네츠를 누군가 훔쳐간 것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낸다.


리카가 아니라 사키가 범행을 저질렀고, 범행 이후 리카로 살아가게 되었다는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진상입니다. 앞서 둘이 닮았다는 묘사도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이를 위한 단서와 설명은 부족했습니다. 유키토만이 둘 모두를 사귀었어서 둘을 구분할 수 있을터라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것 부터가 비현실적이에요. 친한 사람이 그 외에 없었을까요? 리카에게는 부하는 물론 가족도 있었습니다. 모아서 파티를 열 정도로 친구도 많았고요. 이들 눈을 모두 속이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사키 자신이 스페인으로 떠난 것으로 소문내고 꾸몄다면 모든게 깔끔했습니다. 구태여 자신이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여지 - 침실에 있던 인형과 현장에 남겨진 스마트폰 - 를 남겨둘 필요는 없었어요. 수사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단순 실종과 살인 사건은 그 수준이 다르잖아요?
가나가 캐스터네츠를 보여주었을 때 리카(로 변장한 사키)가 플라멩코 방식으로 캐스터네츠를 사용한게 중요한 단서라는 것 역시 설득력이 약해요. 리카는 사키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았으니, 캐스터네츠 사용법은 당연히 알 수 있었을테니까요.

그래도 캐스터네츠에 지문이 남겨졌기 때문에 그걸 훔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착안은 좋았고, 마지막에 현장에서 발견한 사키의 핸드폰을 리카(로 변장한 사키)가 지문인식 해제하도록 만들어 리카가 사키라는걸 밝혀내는 장면은 아주 괜찮았습니다. 스마트폰 시대에 잘 어울리는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덕분에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의 전개만 좀 더 타당하게 만들어 주었더라면 별점 4점 이상도 충분했을텐데 아쉽네요.

"형식적 진실"
우마오이 토비나가의 사후, 유산이 네 형제와 집사에게 고르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막내는 불륜으로 입적한 탓에, 형과 누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유산 분배 현장에서까지 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현장을 목격한 토마와 가나는 막내 쇼료를 돕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장남, 차남은 피해자가 먼저 화장실에서 폭행을 저질러서 방어한 것이라 주장했다. 가나가 반격했지만, 형제가 다시 입을 맞추고, 증인이 될 수 있는 집사 코바도 사건 이후 행방불명 상태라 쇼료는 피해자임에도 합의금을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민사의 '형식적 진실주의'가 무엇인지를 이야기를 통해 잘 보여주는 작품. '형식적 진실주의'는 쌍방 서로 다툼이 없이 합의한 부분은 진실로 다루는 민사재판의 원칙입니다. 반면 형사 사건은 합의에 그치는게 아니라 다각적으로 사실을 분석, 검증하는 '실체적 진실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작 중 쇼료는 피해자임에도 형들의 위세에 눌려 합의하고 말았습니다. 아를 통해 형들이 먼저 화장실에 들어갔다는게 '형식적 진실주의"에 따라 법률적으로 입증되었고요. 하지만 이는 쇼료의 큰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형들과 집사 코바에 의해 살해당했다는걸 알아챈 뒤, 복수에 나섰던 겁니다. 먼저 화장실에서 코바를 살해하고, 형들에게 자연스럽게 폭행 당하도록 설계했지요. 이후 코바의 시체가 발견되고, 형사 사건 수사를 통해 화장실이 범행 현장이라는게 밝혀집니다. 그리고 앞서의 민사 소송 합의 내용을 통해, 쇼료는 알리바이가 생겨나고 형제가 범인이 되어 버립니다. 화장실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범인일 수 밖에 없거든요. 아무리 민사지만, 다른 증거가 없으니 경찰도 이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토마도 형제가 이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완벽한 계획입니다!
쇼료의 어머니를 살해한 트릭도 '폭포'라는 현장을 잘 이용하고 있고요.

형제가 화장실에서 쇼료에게 반드시 시비를 걸었으리라는 보장이 부족하다는건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만, 학습 만화로서도 우수한 Q.E.D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도 추리적으로도 빼어난 오랫만에 보는 수작이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22/03/19

기억의 의자 - 이지은 : 별점 3.5점

기억의 의자 - 8점
이지은 지음/모요사

이전에 "액자"를 읽고 꼭 구입하기로 했던 사물들의 미술사 두 번째 책입니다. 제목대로 의자를 다루고 있고요.

의자는 제품 디자인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재라서, 의자 디자인에 대해 다룬 책은 저도 그동안 많이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역사 속 의미있는 의자에 대해 다룬 미술사 책이라기보다는, 특정 의자를 주제로 하여 그 의자가 있었을 때의 사회상을 조망하는 문화사에 가까운 책입니다. 의자의 디자인은 상세하게 소개되지만, 의자가 주인공은 아니에요. 

책에서 의자와 함께 다루고 있는 시대는 다섯 개입니다. 첫 번째는 중세 시대입니다. 대성당의 의자 스탈의 안장을 접으면 나오는 미제리코드 조각으로 당시 사회 분위기를 설명해줍니다. 두 번째는 루이 14세의 옥좌에서 시작해서 '위대한 은공예품'과 당시 아유타와 왕국 사절단 이야기 등으로 루이 14세가 통치하던 17세기 후반 프랑스에 대해 알려주고요. 세 번째는 등받이가 없는 스툴 형식 의자 '타부레'에 앉을 수 있는 권한이 따로 있었다는, 이른바 '타부레' 권한을 통해 부르봉 왕조 시기 프랑스의 귀족 서열과 예법들을 상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줍니다. 네 번째는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의 주문으로 만드는 루이 들라누아의 의자 제작 과정으로 18세기 가구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고, 마지막은 전통적인 가구 제작 방식을 뛰어넘어 대량 생산으로 진입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18세기 후반의 토머스 치펀데일에 대한 소개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잘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도 많았고, 재미도 있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는데요. 우선 '미제리코드'가 무엇인지는 처음 알았네요. 엄격한 종교 기반의 사회였지만, 대성당 안 의자 속 미제리코드는 통제받지 않는 자유로운 조각이 가능했다는 것도요.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워갑니다. 도판도 풍부해서 자유분방했던 당시 목수의 솜씨도 충분히 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루이 14세 옥좌에서 시작되지만, 이는 '은'이라는 소재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게 특징입니다. 위대한 은제품과 왕의 권위 과시가 반드시 필요했던 시대를 다루기 위해서였지요. '위대한 은' 세공품들이 지금도 남아있더라면 아주 좋았을테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도판과 기록을 통해서라도 이렇게 알게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도 '타부레'는 당시 왕실 서열과 예법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할 뿐입니다. 그런데 왕의 친척인 친왕들조차 함부로 의자에 앉지도 못했던 태양왕 루이 14세 시절의 베르사이유 궁전 모습이 아주 재미있더군요. 이를 둘러싸고 왕의 정부와 왕의 제수씨의 기싸움 등 세세한 볼거리가 가득했던 덕분입니다. 당시를 다루었던 수많은 컨텐츠들에서 미처 접하지 못했던 디테일이기도 했고요. 저자도 당시 그림에서 이 예법을 지키지 않은 등장인물을 알려주고 있는데, 저도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찾아보면서 고증을 되짚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대 왕권의 대명사같은 루이 14세와는 사뭇 달랐던 루이 16세 시대에는 14세 때 만큼이나 엄격하지는 않았겠지만요. 

네 번째 이야기는 폴란드 왕이 루이 들라누와에게 의자를 주문하는 과정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디테일이 압권입니다. 의자 디자인을 어떻게 고르는지와 같은 고객 입장에서의 디테일은 물론, 장인이 되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여러가지 비용들, 장인간 협력 관계 등 장인 입장에서의 정보들도 살뜰히 챙겨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 모든게 실제 사료 기반이라는 것도 대단하고요. 

마지막 치펀데일 이야기는 그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설명의 핵심은 치펀데일의 카탈로그였고요. 고객들은 조립식 가구 처럼 카탈로그를 보며 다양한 조합을 고를 수 있었고, 치펀데일도 유행하는 스타일을 모두 갖춰 제공했다는데 정말 시대를 앞서갔던 마케팅이었다고 생각되네요. 책에서 말해준 대로 18세기의 이케아였던 거지요.

이렇게 새롭고, 재미난 내용이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미제리코드 부분은 관련 사진 설명 뿐이라 좀 지루했습니다. 종교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지만, 그걸 입증할 근거도 애매하고요. 그렇게까지 도발적인 풍자가 많다는 인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의자' 보다는 관련된 역사, 문화적 배경을 고찰한다는 책 컨셉도 마음에 들고 재미있게 읽었지만, 의자는 단지 소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도 약간 아쉬웠던 점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의자를 억지로 엮은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단점은 책의 판형입니다. 작은 판형은 저자의 의도였다고는 합니다. 들고 다니기 편하고 쉽게 볼 수 있도록요. 그러나 도판이 너무 작게 들어가서 식별이 어렵다는 문제가 생겨버렸어요. 그림 속에 있는 의자를 설명하는 도판들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해당 부분만 확대해 주거나, 접이식으로 크게 삽입했어야 했습니다. 나름 비싼 책이고, 도판 수준도 우수한데 이런 세세한 고려가 뒷받침 되지 않은건 너무 아쉽네요.

그래도 워낙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문화사, 미시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2/02/06

디오게네스 변주곡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5점

디오게네스 변주곡 - 8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중화권 추리 소설의 대표작가 찬호께이의 단편집입니다. 본격적인 작가 데뷰 초창기에서부터 최근작까지 1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했던 결과물을 모아 놓았는데 본격 추리는 물론 호러, SF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있어서 찬호께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책 뒤에 실려있는 작가의 작품별 후기도 굉장히 좋습니다.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생각으로 그 작품을 썼는지를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습작 1,2,3"가 쓰여진 방법이 아주 대박이었습니다. 임의로 키워드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에 가서 다섯 개의 단어를 얻은 뒤, 그 키워드를 순서대로 연결해서 아주 짤막한 엽편 소설을 쓴 결과물이라고 하거든요. 읽을 때는 이런걸 뭐하러 실어 놓았나? 싶었는데, 쓰여진 방법을 알고나니 달라 보이더라고요. 특히 "습작 1"이 놀라와요. 이런 키워드로 어떻게든 말이 되는, 그것도 반전까지 있음직한 엽편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과연 잘 나가는 작가는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이 방법은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어지네요.

전체적으로 작품들 수준이 고르지는 않지만, 장르문학 팬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범인, 진상 등을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랑을 엿보는 파랑"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란유웨이는 겉보기에는 유능하고, 사회성 좋은 청년이지만, '삼람소옥'이라는 블로그를 엿보며, 다크 웹에 접속하는 은밀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삼람소옥'의 운영자 샤오란의 가족 관계, 거주지, 체형, 취미 등 모든걸 알아낸 그는, 결국 샤오란의 집에 침입하여 여자를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데.... 

초기작으로 제 7회 타이완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작입니다. 고작 사흘 걸려서 썼다는데, 그렇게는 믿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란유웨이가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이 시작부터 상세하게 설명되는 도서 추리물로도 뛰어나지만, 란유웨이가 살해한게 샤오란이 아니라 이웃에 사는 린치칭이라는 반전의 서술 트릭물이라는 복잡한 구성을 잘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린치칭이 샤오란을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고를 위장해서 죽였다는 설정인데, 이러한 반전이 다크 웹에서의 회원들 사이 의견 교환, 삼람소옥의 글 들을 통해 교묘하게 등장해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삼람소옥 글만으로 사용자를 추리해내고, 감시하는 과정은 "망내인"을 연상케하는 점도 작가의 팬이라면 즐길 수 있는 재미 요소고요.

린치칭이 연쇄 살인마는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설명이 부족한 등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산타클로스 살인 사건" 

금융 위기로 전재산을 잃은 테일러는 가족을 떠나 노숙자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른 노숙자 샘을 만나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이브날, 산타의 집에 산타클로스를 살해하겠다는 살인 예고 편지가 날아온 뒤 산타가 머리 없는 시체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추리물로 제 역할을 다 합니다. 존의 짤막한 이야기의 몇몇 디테일을 통해 펼치는 테일러의 추리가 일품인 덕분입니다. 그는 썰매 위에 흰 수염이 흩어져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때 피아노줄로 목을 잘리게 만든 트릭이 아닐까 생각했지요. 그러나 죽은 뒤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타클로스가 대역이 살해당한 걸로 꾸미고 숨었다는 진상을 밝혀냅니다. 존이 산타클로스였고, 일련의 이야기는 테일러를 가족에게 돌려보내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길이를 조금 더 줄였더라면 좋았겠지만 지금 이 정도도 아주 좋았던,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소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참고로 왜 무대가 미국 뉴욕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가 후기를 보니 '존'이라는 이름을 '존 도'에서 따 왔다는 복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고 하네요.

"정수리" 

아홍은 어느날부터 사람들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그것'을 보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머리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모두가 똑같은걸 보지만 못 본채 해 왔던 것이었다! 지친 아홍이 결국 현실에 순응하기로 결정하자 아홍의 머리 위 천 뭉치가 열리고 도마뱀같은 괴물이 나타났다... 

2018년에 발표된 비교적 최신작입니다. 한 매체로부터 '귀신'이라는 주제로 단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썼다고 합니다. 쓰여진 이유답게 판타지 일상계 호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환상특급"에 나오면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획일화되고,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관련된 언급은 없네요.

그러나 흥미로왔던 도입부를 지나 뒤로 갈 수록 재미를 찾기는 힘듭니다. '왜'라는 측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탓입니다. 결국 머리 위 이상한 물체들에 대한 묘사 외에는 건질게 없었어요. 작가 후기를 보니 의도적으로 논리나 추리 요소보다는 황당무계한 현실이 주는 스릴에 집중했다는데, 이래서야 고어 포르노와 크게 다를바 없는 셈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시간이 곧 금" 

리원은 시간 거래 센터를 방문하여 자기 시간을 팔게 되었다. 고통을 잊고, 돈과 성공을 빠르게 누리기 위해서였다... 

2010년에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으로 이 역시 "환상특급"이 떠오르는 단편입니다. 

제일 재미있던건 시간 거래에 대한 설정입니다. 시간을 팔면, 해당 시간이 곧바로 지나가고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남지만 현실감은 사라집니다. 시간을 사면 시간이 길어졌다고 느끼게 되고요. 돈 벌이, 그리고 힘든 기억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적극적으로 판 리원, 그리고 필요한 시간을 조금씩 사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 연적 아리의 대비가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아리가 시간을 샀다는걸 마지막에 반전처럼 등장시켜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전개가 일품입니다. 아리의 말대로 인생에 고통이 있어야 기쁨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양비론적인 접근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극단적으로 팔거나 살 필요는 없고, 적당히 사고 팔면서 인생을 사는게 합리적일테니까요. 예를 들어, 군대에 가게되면 이 시간은 당연히 파는게 낫잖아요? 좋은 설정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소설가의 등단 살인" 

유명 편집장이 작품을 가져온 신인 작가에게 사람을 죽여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신인 작가는 등단을 위해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을 죽일 결심을 했다. 그녀가 추리 소설, 특히 밀실 살인을 비난했기 때문에, 완벽한 밀실 트릭을 만들어 살해하는데... 

초반의 편집자의 주장은 아주 와 닿았습니다. 직접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고민해야 현실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을거라는 취지는 공감하거든요. 주인공 신인 작가의 범행도 그래서 설득력있었습니다. 신인 작가라면 혹할만한 주장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밀실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는 없지만 창이 있었는데, 이 창을 통해서 끈만 집어넣어 피해자를 교살했다는 트릭이 특히 좋아요. 피해자가 직접 목을 집어 넣어야 하기에 '이게 가능하겠어?'라고 생각이 들게 하지만, 피해자가 참가했던 연극 연습을 위해 스스로 밧줄 안에 목을 집어 넣었다는걸 꽤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과학 수사를 통해 경찰이 진상을 밝힌다는 결말도 좋았습니다. 이런 밀실 트릭이 21세기에 먹힌다는건 사실 말도 안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이 모든걸 뒤집는 반전이 놀랍습니다. 편집장은 가짜였고, 유명 작가가 신인 작가를 부추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후, 진상을 듣고 자기가 사건을 해결한 것 처럼 꾸며 경찰에 제보했다는건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반전이 너무 많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수작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필요한 침묵" 

지옥의 수용소에 처 넣어진지 10년만에, '나'는 친구 라오왕이 죽은 뒤 과거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킬러였다는 짤막한 꽁트. 특기할 만한 점은 없습니다. 설명도 너무 부족하고요. 작가 후기에서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작품 내용도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영화 "언디스퓨디드" 시리즈처럼 화끈하게 풀어내는게 더 재미있었을겁니다. 별점을 따로 줄 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가라 행성 제 9호 사건" 

가라 행성에서 아홉번째 (제 9호) 사고가 일어났다. 이전의 사고들을 일으켰던 316형 중력 붕괴 엔진의 문제를 해결한 신형 317형 엔진을 탑재한 카로카호는 정상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3명의 승무원은 상륙정으로 가라 행성에 상륙했다가, 끔찍하게 죽고 말았다. 사고 당시, 장거리 통신 시스템만 분해되어 상륙정에 실려 있었다. 

사건 조사 중 승무원이 최후를 맞는 동영상에서,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을 위해 통제와 소수 희생을 강요하는 발전파의 거두 모모코 사령관이 범인임을 암시하는 파우스타 함장의 발언이 녹화되어 있다는게 밝혀지자, 조사 위원회는 탐정 두핀핀을 불렀다. 맥켄넨 총독은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파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SF 추리물인데 추리적으로는 본격 추리물로 보아도 될 정도로 수준이 높습니다. 단순하지 않고, 반전과 함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우선 함장의 발언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승무원들을 매수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추리가 먼저 선보입니다. 모든 주민 행동을 녹화하는 시스템 '눈'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통신병을 만났다는게 증거고요.

그러나 사건은 맥켄넨 총독이 일으켰다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그는 선체 엔진이 316형 엔진인 것 처럼 조작했던 겁니다. 함장은 폭발할까봐 카로카호를 버리고 탈출했고요. 장거리 통신 시스템은 상륙 후 본성과의 통신을 위해 떼어 갔던 겁니다. 그러나 사고로 승무원들 모두가 사망했고, 총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 두핀핀 탐정을 불러 이 모든걸 밝히끔 유도했다고 설명됩니다. 개인을 통제하고, 오로지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만 경주하는 발전파도 '탐정'이라는 쓸데없는 직업의 도움을 받은 셈이라 보수파도 나름의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요. 추리와 전개 모두 합리적이며,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작가가 스스로 세운 설정 중심이라 추리가 쉽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만요.

무엇보다도 작가 후기를 통해 드러난 작가의 의도가 놀라왔습니다. '후기 문제'로 인한 본격 추리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본격 추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는데 그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하거든요. 후기 퀸 문제는, 소설 속 탐정은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전부이고 자기의 결론이 유일무이한 진실인지 여부를 작품 속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즉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정함은 탐정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러리 퀸도 후기작에서는 독자에의 도전을 없앴다지요. 찬호께이는 완벽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단서는 '눈' 시스템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합니다. 두핀핀 탐정은 아예 사건과 무관한 탐정으로 이 기록만 가지고 추리를 진행하며, 무엇보다도 탐정 스스로가 '사건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SF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어요. 특히 가라 성 거주 생명체 바보우에 대한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수명은 인간에 비하면 극도로 짧은데, 이렇게 모든건 서로 상대적이라는걸 지구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재해를 빗대는 부분이 특히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제대로 된 하드 SF를 써도 좋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지루한 설정만 참는다면, 그 이상의 보답을 얻을 수 있는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내 사랑 엘리" 

나는 처제 수와 그 남편 토니를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아내 엘리는 아프다고 했지만, 사실은 2층에서 시체로 누워 있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수와 토니 앞에서 만드는 '나'의 작전이 먼저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알리바이 트릭의 핵심은 시체를 끈을 당겨 움직이게 만드는 정도로 현실적이라서 괜찮았어요. 수를 죽인게 토니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엘리와 토니가 불륜 관계였다는걸 입증하는 증거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둘이 불륜 관계로 함께 도망갔다고 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말이지요. 단순 실종으로 수사가 시작되면 어떻게 뒤집힐 지도 모르니까요. 이런 점에서 좋은 추리,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습작 2" 

고독을 주제로 한 짤막한 꽁트. 전염병 숙주인 남자 혼자 세상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그다지 의외성도 없고 너무 짧아서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커피와 담배" 

시사 잡지 포커스의 기자인 나는 일요일 오전 10시 8분에 모르는 공원 벤치에서 정신을 차렸다. 지난 수요일 이후 기억은 잃은 상태였다. 몸은 간절히 커피를 원했고, 커피를 마시고자 편의점과 여러 가게를 돌아다닌 나는 지금 세상은 담배가 합법이고 커피가 불법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결국 몰래 커피를 판다는 약국에서 커피를 입수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나는 난동을 부리다가 기절해 버리고 마는데.... 

모든건 흡연자였단 '나'의 금연 치료를 위해 루 박사가 행했던 IC 금연 치료 실험 탓에 벌어진 착각이었다는게 진상인 이야기입니다. 측두엽, 후두엽, 전두엽 간 관계 문제로 '나'는 담배를 커피로 인지했고, 이를 언어로 구성할 때는 '마약'으로 말했던 겁니다. 루 박사의 시계를 붕대로 착각하고 있어서, '나'의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기묘한 상황을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이는 독특한 SF이자 판타지로, 이 작품도 "환상특급"에 사용되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자매" 

'나'는 여자친구 아쉐가 기생충인 언니 아신을 죽여서 시체를 숨길 계획을 세웠다. 우선 중고 냉장고를 구입하여 아쉐 집으로 옮긴 뒤, 원래 집에 있던 냉장고에 아신의 시체를 담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컨테이너 화물차 안에서 시체를 꺼냈고 냉장고는 버렸다. 아신으로 변장한 아쉐가 경비원에게 눈도장을 찍고 외출하도록 시켰고, 아신의 시체는 밤에 바다에 버렸다...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범행 과정만큼은 그럴싸하게 그려진 범죄물입니다. 그런데 '나'가 아쉐와 결혼할 경우. 600만 홍콩 달러에 달하는 집 명의자에 추가되고 아이가 생기면 아예 상속자가 되어버려 아신은 집 상속권을 잃게 되기 때문에 아신이 먼저 아쉐를 죽일 계획을 꾸몄었고, 이를 알아챈 '나'가 아신을 죽였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악마당 괴인 살해 사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던, 지구 정복을 꿈꾸는 악마당 본부에서 간부 감자 괴인이 머리가 으깬 감자가 되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우두머리 바다 대왕과 살아남은 간부인 양파, 사마귀, 해삼 괴인 앞에서 코작 참모는 사건이 감자 괴인의 자작극이라는 추리를 펼치는데... 

일본 전대물 설정을 본격 추리물에 끌어들였는데, 의외로 수준이 높아서 깜짝 놀랐던 작품입니다. 감자 괴인의 목을 자를 수 있었던건 사마귀 괴인과 가면전사 1호의 무기였다는 단서가 앞 부분에 제공되고, 코작 참모의 기묘한 행동을 통해 코작 참모가 가면전사 1호였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아주 일품인 덕분입니다. 코작 참모가 이를 가자 괴인 자작극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설득력 높은 추리였고요. 재미와 추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걸작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영혼을 보는 눈" 

나는 담배를 피우다가 한 노인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자신이 잘나갔던 영매였지만, 30년 전 사건으로 몰락했다며 그 사건 이야기를 해 주었다. 프로그래머 A씨 아내가 몸을 열 번 넘게 칼에 찔려 살해되었던 사건이었다. 아내의 영혼은 A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A씨 지문이 묻은 흉기를 찾는 것도 도왔기에 결국 A씨는 사형당했다. 그러나 다른 사건이 벌어졌고, 진범은 시체를 발견했던 가정부였다는게 밝혀졌다. A씨 아내 영혼은 A씨가 불륜녀와 행복하게 살 까봐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잡지 요청으로 귀신을 주제로 썼다는 점은 "정수리"와 비슷하네요. 하지만 공포 자체에 집중했던 "정수리"보다 못했습니다. 무섭지도 않고, 그리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영혼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처음 접했는데,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킬러였으며 노인은 방금 죽인 타겟의 영혼이 '나'의 뒤에 있는걸 보았다는 결말도 진부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숨어있는 X" '

나'는 강의 후 급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진 탓에 옆 강의실의 '추리소설의 감상, 창작, 그리고 분석'이라는 강의를 청강하게 되었다. 강의 시작 후, 학생들과 대화를 하던 교수 '수염남'은 학생들에게 추리 게임을 제안했다. 지금 강의실에 조교가 학생인 척 숨어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이유와 증거를 제시해 보라는 게임이었다. 정답을 맞춘 한 명에게 무조건 A학점을 주겠다는 말에, 강의실 학생들 모두가 참여하게 되는데.... 

찬호께이는 후더닛물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클리셰를 벗어날 수 없고(아마 가장 수상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그런걸 의미하는 말 같습니다), 독자가 직감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후더닛물의 변주를 고민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창작 의도에 걸맞게 클리셰는 먹히기 힘듭니다. 애초에 강의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나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각자의 별명. 그리고 생김새와 성격 묘사만 있을 뿐이니까요. 이 정도 단서로는 수수께끼를 풀어내기에 벅차지요. 범죄도 아니기에 동기나 범행 수법으로 당사자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지목받은 사람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야 하고, 지목에 실패한 사람은 탈락한다는 게임의 기본 룰과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수수께끼는 풀리며, 교수인 줄 알았던 수염남이 조교였고 학생인 줄 알았던 '코다 쿠미'가 교수였다는 진상도 깜짝 놀랄만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화자이자 주인공 '냉커피' 역시 학생이 아니라 교수여서 수수께끼를 풀어냈다는 반전섞인 결말도 아주 깔끔했고요. 눈으로 고립된 산장에 초대받아 방문한 서로를 모르는 투숙객들 중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을 찾아내는 정통 추리물을 현실감있게, 그리고 완성도높게 구현한 수작이에요.

물론 게임이 이렇게 강의 시간안에 딱 맞게 잘 끝났을지는 사실 의문이에요. 교수가 수수께끼를 마지막까지 숨기려는 의도가 더 많았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무조건 차례대로 한 명씩 지목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한 명 생기고 그 사람이 진상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결정적 약점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게임'이 작위적이라고 감점하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2/02/05

마가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5점

마가 - 8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사건 진상과 진범 등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마는 새아빠의 동생인 삼촌과 여름 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재혼한 엄마가 임신 후, 미국 이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탓이었다. 삼촌의 별장인 고무로 저택은 오래전에 부자 고무로 도쿠야로부터 받은 선물로, 실종되었던 도쿠야의 손자 히사시를 찾아 주었던 보답이었다. 그러나 별장은 왠지 모르게 섬뜩한 장소였다. 별장 뒤 숲에서는 아이들이 여러 명 실종되었었고, 근처 별장에서는 참극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유마는 별장에 머물면서 어린아이 형상의 누군가가 3층 다락방에 머물고 있다는걸 눈치챘다. 결국 '세이'라는 아이를 만난 뒤, 세이의 꼬드김으로 유마는 혼자 들어가면 안된다는 사사 숲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유마는 한 남자의 추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되는데....

저주받은? 귀신들린? 저택을 무대로 한 호러의 명수 미쓰다 신조의 작품. 제가 읽은 작가의 유사 소재 작품만 해도 "흉가", "백사당", "사관장", "기관" 등이 있습니다. 대부분 평균 이상의 수작이었던걸 보면 '명수'라는 호칭이 과한건 아니겠지요.

작품의 특징이라면 다른 작품들과는 목표하는 독자 연령대가 낮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영 어덜트 판타지를 연상케하는 표지에서부터, 초등학교 6학년이 '잘 모르는 넓은 저택'과 '넓은 숲, 동굴' 에서 펼치는 모험 활극에 가까운 내용, 그리고 피가 튀기는 고어물도 아니고, 아주 무섭지도 않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호러 작가로서의 솜씨가 사라진건 아닙니다. 유마가 저택 안을 배회하는 정체 불명의 무언가와 말없이 암투를 벌이는 광경, 이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사 숲과 나무 동굴 속에서 벌어지는 목숨을 건 추격전 등의 묘사는 공포심을 충분히 자극시켜 줍니다. 

작가 특유의 호러와 범죄, 추리 소설과의 결합도 성공적입니다. 특히 초, 중반까지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반전을 통해 '범죄 소설'로 전환되는 구성이 인상적이에요. 반전을 통해 삼촌이 유마를 돌보려고 했던게 아니라, 유괴를 했던 거라는게 드러나거든요. '삼촌이 삼촌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한 것 같았다'는 유마의 느낌, 밤중에 삼촌이 기묘한 목소리로 유마와 사람들의 이름을 표준어로 말하는 연습을 했던 것등은 모두 공포스러운 연출이라고 여겼었지만, 사실 전부 유괴라는 범죄에 대한 단서였던 겁니다! 별장으로 향할 때 삼촌이 해 주었던 말, 삼촌이 별장에 유마가 머물 줄 알고 미리 책을 사 두었던 이유, 어머니와의 통화 등도 알고보니 모두 단서와 복선이었고요.

고무로 히사시를 비롯한 과거 유괴 사건들도 사실은 삼촌이 일으켰었고, 이 때 사사 숲에 아이를 숨겨두면 아이들이 유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는걸 눈치채서 범행을 계획했다는 진상도 이야기와 잘 맞아 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10년 전, 고이즈미 마사토는 실수로 죽이고 말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깔끔했고요. 유마가 저택에서 만났던건 고이즈미 마사토의 유령이었던 거지요. 유령도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수행합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과거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유마에게 알려주는 식으로요. 

이렇게 등장하는 설정, 소재를 허투루 소비하지 않고 모두 이야기에 녹여내는 것도 돋보였던 장점으로, 유마가 이계 공간을 오갈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능력 덕분에 삼촌의 공범이었던 유괴범에게 쫓기다가 혼자서 사사 숲 이계 공간에서 무사 귀환할 수 있었으며, 삼촌도 유마를 아예 죽일 생각이었다는걸 명확하게 독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다소 뜬금없었던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적절히 활용한 셈이라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히 대가는 다른 법이네요. 무엇보다도 맨 마지막 한 줄의 반전, 유마가 옥상에 RC카를 두고 온건 실수가 아니었다는건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유마에 의해 삼촌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최후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여러가지 치밀함을 발휘하여 유마를 옭아매던 삼촌의 최후치고는 너무 허무했으니까요. 세이의 유령이 뭔가 도움을 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고요. 

추리적으로도 호러와 결합은 잘 하고 있지만, 정교함은 부족한 편입니다. 유괴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몸값을 받는 부분입니다. 이전 고이즈미 마사토 사건에서는 마사토의 새아버지로부터, 마사토가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으니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유마의 어머니는 그럴리가 없으니, 깜쪽같이 돈을 받아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몸값을 받는 계획이 조금이나마 등장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건 유괴물로는 큰 단점입니다. 

범행 후 삼촌이 유마를 죽이고 사체를 유기했더라도, 관리인이 유마를 목격한 이상 수사가 이루어지면 삼촌이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거라는 점도 문제입니다. 관리인도 살해할 생각이었을까요? 그렇다 해도 조카가 유괴당한 후 실종되었는데 그 삼촌은 갑자기 생긴 거액의 돈으로 사업상 위기를 해결했고, 삼촌 소유의 별장이 있는 별장지 관리인이 살해당했다면, 경찰 수사가 시작될 경우 용의선상에 올라 철저한 조사를 받는건 당연했을겁니다. 여러모로 허술한 범죄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드네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한 편이며, 읽다보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공포는 덜하지만, 범죄 소설로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분량도 적당하고요. 호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미쓰다 신조 월드 입문자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1/05/23

사이코패스 : 정상의 가면을 쓴 사람들 - 나카노 노부코 / 박진희 : 별점 3.5점

사이코패스: 정상의 가면을 쓴 사람들 - 8점
나카노 노부코 지음, 박진희 옮김/호메로스

제목 그대로, 사이코패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심리학, 과학, 인문학 교양서입니다. 사이코패스에 대해 그 존재 이유 및 특징, 문제점과 대처 방안, 치료 방법 등 거의 모든 관련 항목을 알게 도와주는데 분량도 부담이 없고, 설명도 쉬운 편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접했던 정보들이 아주 많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사이코패스의 신체적 특징으로 얼굴이 긴 남성보다는 얼굴 폭이 있고 완고한 인상의 남성이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의 농도가 높을수록 얼굴이 옆으로 넓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많으면 경쟁심과 공격성이 높아지니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설입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좋은 정보 같습니다. 단, 여성의 경우 얼굴 폭은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답니다.
그리고 심박수가 낮고 잘 높아지지 않는 사람일 수록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기 쉽다는건 당연합니다. 무언가 사건을 저지른 뒤 심박수가 높아지지 않으면 행동에 브레이크가 잘 걸리지 않을테니까요. 그런데 이게 남성이 여성보다 폭력성, 반사회성이 높은 근거가 될 수 있다는건 재미있었어요. 남성이 여성보다 심박이 1분간 약 6회 정도 늦은 탓일 수도 있다고 하거든요. 청중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이나 법정에서의 변론 등에서 긴장하지 않고, 냉정하게 행동하는 경영자나 변호사에게 사이코패스가 많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박수가 낮아야 냉정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이코패스는 보통 'IQ 높은 천재 범죄자'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이런 착각이 생긴건 사이코패스가 사회 통념상 할 수 없는 일을 거리낌없이 해 버려서, 특별해 보인 것 뿐입니다. 한마디로 '돌아이'와 '천재'를 착각한 것에 불과한 거지요. 이는 사이코패스가 불안에 강한 특징 덕분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면 불안을 느끼는 강도가 높아 위축되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 불안의 강도가 낮아 대범해지는 반면, 사이코패스는 불안의 강도가 높은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행동으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거든요. 덕분에 검거하기 쉬운 사이코패스가 생겨난건 다행입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지 않아 위험을 알아차리기 어렵고, 그래서 회피가 힘들어지게 된다고 하네요. 

그리고 사이코패스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스스로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심리를 읽어내는 재능이 뛰어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정성은 낮지만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과 권위의 존중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등이 소개됩니다. 허언증이 있을 경우도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고요. 거짓말에 죄의식이 없다, 타인의 아픔을 무시한 채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점은 사이코패스의 특징 그 자체지요. 사이코패스가 상대방의 신뢰를 잘 얻는건 이런 거짓말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할 테고요. 실제로 허언증이 있던 사이코패스 사례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특징을 본다면, 사이코패스는 프로 도박사가 가장 적합한 직업이 아닐까 싶어요. 불안을 느끼지 않고, 위험한 순간에도 주도권을 쥐려고 노력하며, 거짓말을 잘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읽으면서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니 말이지요. 이런 특징들에 더해 조직에 충성한다는 점에서는 킬러도 잘 어울릴 것 같네요.

그동안 궁금했었던,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차이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과학자들의 시각이냐, 사회학과 교육학자의 시각이냐의 차이더라고요. 이런 존재를 심리학, 생물학, 유전학적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사이코패스'라는 명칭을 선호하고, 이 존재가 사회의 영향력이나 유년기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니, 결국은 명칭의 차이일 뿐 큰 차이는 없는 셈입니다. 이 책을 통해 이 양쪽 모두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걸 알 수 있고요. 유전적인 이유에 어린 시절의 환경, 교육 등이 결합해야 사이코패스가 탄생한다는걸 여러가지 실험 결과를 통해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전에 읽었던 "n분의 1의 함정"에 등장했던 '최후 통첩 게임'을 사이코패스를 찾아내는데 사용하는 실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정해진 돈을 나눌 때, 분배자가 정한 비율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거부하는 사람 보다는,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 사이코패시 성향이 높다는군요. 복수하듯 거절하기 보다, 단 돈 1엔이라도 받는게 이득이라고 냉철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럴듯했습니다. 입사 면접에서 한 번 해볼만한 테스트가 아닐까 싶네요. 

사이코패스는 보통 사람과 뇌의 특정 부분의 문제와 차이점이 있다는 연구 결과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뇌의 전두전피질 가운데 안와전두피질과 내측전두전피질의 양쪽 기능이 저하되어 있으면 반사회적 행동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사이코패스는, 편도체와 안와전두피질 혹은 내측전두전피질과의 연결성이 약하다고 알려져 있다." 등인데, 앞으로는 이를 통해 사이코패스의 구분이 의학적으로 가능해 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을 판별하는데 중요한 척도로 쓰이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 책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유전의 영향이 어느정도 있다고 하니, 의학적인 결과와 혈통적인 계보가 결합하면 그 완성도는 더욱 높아질테니까요. 그런 세상이 좋은 세상일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또 각종 문헌을 통해, 사이코패스는 오래전부터 세계 각지에 있어왔다는 내용도 신기했습니다. 예를 들면 알래스카 북서부의 소수민족 유픽 (이른바 이누이트) 의 'kunlangeta'가 그러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것을 하지 않는다’= ‘반복해서 거짓말을 하며 속이거나 훔치는 남자’를 의미하는데, 500명에 한 명꼴로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무리들과 사냥에 나가지 않고 다른 남자들이 마을을 나서면 많은 여자들에게 섹스를 강요하며. 비난을 받아도 개의치 않으며, 장로의 앞에 끌려가 벌을 받아도 몸가짐을 고치지 못해서 결국 누군가 죽여버리고 만다는군요. '선천적이므로 고칠 수 없다'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지요. 아울러 승리자 그룹에 속하는 사이코패스도 많다며 오다 노부나가, 모택동, 표토르 대제 및 여러 미국 대통령들을 예로 들어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해주는데, 그럴 듯 했습니다. 이 중 가장 놀라왔던건 성녀 마더 테레사도 사이코패스일거라는 주장이었어요. 그녀가 보살폈던 아이들과 측근들에게 냉담했다는 여러 기록이 근거라네요. '박애주의자'는 특정 소수의 인간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지 못하므로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성립되는데, 좀 무서워지는군요.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인류 역사에서 사이코패스가 계속 나타나고 일정 비율로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이코패스가 생존에 유리했다면 그 수가 늘어났을 테고, 생존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면 자손을 남기지 못하여 도태되고 말았을텐데 말이지요. 이 책에서는 사이코패스와 같은 개체가 일정 수 존재하는게 거시적인 시점에서 집단 생존에 유리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와 개척자도 사이코패스였을테고, 전쟁에서 아군의 피해에 눈 하나 깜짝않고 적을 죽이는 전쟁 영웅도 사이코패스였을테니까요. 이렇게 사이코패스가 필요한 상황이 많아서, 사이코패스 유전자가 소실되지 않았다는 해석이지요. 필요에 더해, 사이코패스는 집단에서 배척당하고, 제거될 가능성이 높기도 하지만 반대로 집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하여 도리어 살아남기 용이했고, 복수의 이성을 홀려 유전자를 남겼을 가능성이 높았을 거라는 추론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이코패스 존재 이유를 설명하면서 소개된, "여성들이 나쁜 남자에게 빠지는 이유는?"에 대한 고찰도 재미있었습니다. 남성의 경우 인기있는 타입은 육아에 노력을 분배, 할애할 것 같은 남성과 사이코패스의 두 가지 타입이라고 합니다. 사이코패스는 거짓말을 잘 하고, 강함을 어필하여 번식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명화된 현대에서는 육아를 도와줄 남성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생리 주기에 의해 호르몬 밸런스가 원시적으로 변화할 경우 - 여성 호르몬과 세로토닌의 농도가 내려가는 배란기 전후 3일과 생리 전 일주일 - 사이코패스 성향이 높은 남성이 선택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사이코패스의 삶도 소개됩니다. 스티브 잡스가 사이코패스인 이유부터 상세히 설명된 이 장에서 가장 주목할만했던건, 면접을 중시한 채용 시험, 그리고 배심원 참여 재판의 문제입니다. 사이코패스는 거짓말을 잘하고, 항상 당당하며 불안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면접을 통과하거나, 배심원들을 설득해서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악덕 고용인, 악플러, 서클 크러셔 등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사이코패스 및 이들의 먹잇감이 되는 추종자들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왔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아나키"같은 여러 비합리적인 커뮤니티 멤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 책에 따르면 추종자들은 속았다는걸 알게 되더라도 '믿는 편이 기분이 좋기 때문에' 계속 추종자로 남게 된다는군요. 인지부하, 즉 스스로 판단하는건 부담스럽기에, 뇌의 부담을 덜기 위해 무언가를 믿는 쪽을 택하는 거지요. 종교와 별 다를게 없는 셈입니다. 

 마지막 장은 사이코패스 진단법과 분류, 그리고 치료 방법입니다. 치료를 위해서 사이코패스에게는 벌이 아닌 보상을 규칙으로 학습시킬 수 밖에 없다는 실험 결과가 기억에 남네요.

이렇게 사이코패스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던 좋은 독서였습니다. 목차가 다소 두서가 없다는 점, 그리고 반복되는 내용이 많다는 점 등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빼어난 책이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사이코패스에 대해 궁금하셨던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1/02/19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 곽명단, 임지원 : 별점 3.5점

빵의 역사 - 8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이전 올렸던 "빵의 지구사" 리뷰에 댓글로 홍차도둑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세계사, 식문화 서적입니다. 새로 복간된 버젼은 아니고 예전에 절판되었던 버젼입니다. 

그런데 '빵의 역사'라는 제목과는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사'와 '농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되고 숨겨진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쓰여진 2차대전 이후까지 주요 문명별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깊고 넓어서 간략한 리뷰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역작입니다만 저자 주장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일단 처음 '빵'(효모로 부풀리는)과 '오븐'이 태어난 이집트는 모든게 신성화된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어서 농업에 기반을 둔 농업 국가였음에도, 모든 영광은 관료들이 차지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왔지만 신성화된 왕에게 소유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문명은 잘 유지되었지요.

반면 그리스 문명은 토지 특징 상 농업이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어요. 저자는 '황금 양털 가죽'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이아손과 영웅들은 곡물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신 목축이 주였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에서 소유한 가축의 양과 질로 부유한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는걸로 알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하룻만에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청소한 신화도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걸 의미한다네요. 농부였다면 소중한 퇴비의 재료가 되는 마굿간 퇴적물을 물로 씻어 버렸을리가 없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유지 확장을 금하고, 정해진 이상의 개인 토지를 몰수한 이 법은 소농들 권한을 강화시켜 아테네를 농업 민주 국가로 변모시켰고, 농민 신분도 상승했습니다. 대지와 곡식, 그리고 '빵'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엘레우시스교가 아테네의 국교가 될 정도로요. 엘레우시스교는 뒤이은 로마에서도 나름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토지를 점차 장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 분배를 받지 못한 뒤 로마 토지는 이윤이 많이 남는 축산업에 활용되고,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정복지를 통해 수입되었죠. 그러나 반달족 습격으로 아프리카를 잃고, 유대 지방 곡물의 수탈이 시작되자, '농업인' 예수가 세력을 넓히지만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로마가 식량 부족으로 동과 서로 나뉜 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 영지를 차지합니다. 목축 중심이었던 그들의 경제 활동이 농사로 바뀐 건 필연이었어요. 6인 가족의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보통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축 300마리가 필요하다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농사를 싫어하는 민족 특성으로 로마식 노예 제도가 이 때부터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중세 초기에는 지주는 농노를 잘 보살폈습니다. 일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함으로, 자유민들도 군복무를 하지 않고 안전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고요. 

농민들이 그나마 살 만 했던건 이 시기까지였습니다. 곧바로 가진자들의 수탈이 시작됐거든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며 도시민, 상인, 그리고 길드 소속 장인들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농민들의 노동은 홀대받았습니다. 이는 '농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해야 했던 원죄'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으로 설명됩니다. 결국 13세기, 농민들에 의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건 당시 종교 개혁이 이 농민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토지 수탈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이 농민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 루터가 배신(?)한 탓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교회도 수탈로 토지를 확보했을 뿐더러, 루터가 책임 전가를 겁내어 자기를 추종했던 농민 전쟁 참가자들을 배신했던 걸로 보입니다. 봉기 실패 이후 농민들은 더 가혹한 삶을 강요받게 되었고요.

저자는 농민들의 미대륙 이주를 이러한 처절한 삶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즉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주와 농민 세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요.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농민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군은 사실상 농민군으로, 전쟁에서 질 경우 모든걸 잃고 다시 도망쳐 나왔던 대토지 소유 제도 하에서 고통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박에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이 해석이라면 13세기 농민 봉기가 실패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싸했습니다. 농민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미국은 광대한 땅에서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로 세계 최대의 농업 생산국이 되었고, 결국 빵이 풍부해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유럽 정국이 요동치고, 그들이 패권을 잃은 과정 역시 저자에 따르면 농민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이런저런 인쇄물과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일부 중농주의자들을 제외한 왕의 측근들이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탓에, 기근과 가뭄이 닥쳐 방앗간에서 밀가루 생산이 멈추자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공업을 신봉한 탓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백성과 군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현실 자체는 인지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곡물 수입이 막히자 패망한 거지요.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다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타협했습니다. 1921년 농민들은 농작물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스탈린이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영화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 소속 농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농민들보다 강했던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농민들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풀어내는게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었으니까요. 각 시기별로 주요한 에피소드, 인물, 콘텐츠를 인용하여 설득력도 높이고요. 

그러나 유럽 중심의 역사만 다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와 약점이 느껴집니다. "빵"이 아니라 농민 중심으로 흘러간 문명사를 쓰려는게 의도였다면 당연히 중국 역사도 포함시켰어야 했습니다. "고문진보"만 보아도 농부의 노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노래한 고시 - “봄에 곡식 한 알 뿌리면, 가을엔 만 알의 곡식 거두네. 천하에 놀리는 밭이 없는데, 농부들은 굶어 죽는다네 (春種一拉東, 秋收萬顆子, 四海無閑田, 農夫餓死)." - 가 등장하는데 말이지요.

또 농민들의 존재, 그들의 위치로 큰 세계사 흐름을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부가 곡물 생산량이 높아서 승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해석이에요.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유대인인 탓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엘레우시스교 축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같이 지루한 이야기나 주제이기는 동떨어진 이야기 비중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도 큽니다. 성찬 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몰랐던 내용이라 신기하긴 했으나, 이 책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되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발표 시기가 오래된 탓에 최신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추천해주신 홍차도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2020/09/26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 고영 : 별점 3.5점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 8점
고영 지음/포도밭출판사

'음식문헌 연구자 고영이 읽고 먹고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대로, 음식문헌 연구자인 저자가 본인이 경험했고, 맛보았던 식문화먹거리에 대해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풀어놓은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크게 "아, 침이 고인다"와 "떠나고 먹고 감각하다", 그리고 "온전한 밥 한 그릇"이라는 세 개의 대 분류로 구분됩니다.
이 중 "아, 침이 고인다"와 "떠나고 먹고 감각하다"에 식문화와 먹거리에 대한 정보 전달 측면에서 가치있는 글들이 많습니다. 마지막인 "온전한 밥 한 그릇"은 주로 저자의 '느낌'과 단상이 가득한,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이 많고요. 

개인적으로는 앞의 두 주제가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식문화, 먹거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탓이지요. 단순히 이미 널리 알려져있던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저자가 음식문헌 연구자인 덕분에 본인의 연구가 바탕이 된, 깊이 있으면서도 새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글들이 오래전 한시와 옛 문헌의 한 토막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제일 첫 글인 "융도, 두 자의 뭉클함"를 보자면, 김려가 남긴 서사시 "고시위장원경처심씨작"의 소개와 해설을 토대로 당시 먹거리에 대해 일람하다가 '융도'라는 두 글자에 주목합니다. 융도는 건국 초기 조선의 북쪽 끝, 여진과의 접경지대에서 나는 벼를 의미합니다. 이른바 조생종 벼인데, 보리를 먹어 치우고 벼를 수확하기 전 식량의 징검다리 역할과 냉해를 견디는 품종 확보를 목적으로 조선은 세종 때 도입 육종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고 소개합니다. 시 한 구절에서 이러한 전문적인 역사 관련 지식까지 풀어내는 그 식견이 사뭇 놀랍습니다.

이 책 덕분에 옛 문헌 속 이런저런 몰랐던 식문화와 먹거리에 대해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세종 때의 문헌 "산가요록"을 통해 우리에게는 일찍이 다양한 김치가 있었다는 소개처럼요. 복숭아 김치, 살구 김치, 수박 김치 등이 있었다는데, 그 맛이 사뭇 궁금해지네요.
일본 헤이안 시대 중기 수필집 "침초자"에 소개된 아마즈라와 13~14세기 원나라의 갈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빙수의 원형 이야기, 제빙 기술이 발달하여 1910년대 조선에서도 여름에 얼음 띄운 화채나 빙수 먹기가 어렵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소개되는 빙수 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광수 소설 "무정"에서도 빙수를 먹으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널리 퍼졌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와인에 대해 최초로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이기지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는 1720년 북경 천주당에서 와인을 맛보고 "소림과 대진현이 또 나를 어떤 방으로 이끌었다. 탁자에 수정병이 하나 있는데, 높이는 세 자(약 30.3cm)쯤이고 술이 떠 있는 듯 담겨 있었다. 술을 따라 내게 권하는데 술맛이 감미로우면서도 상쾌하고 이채로운 향이 코를 찔렀다. 마시고 난 다음에는 그저 조금 취기가 오를 뿐이고 취하지는 않았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호기심이 왕성했던 이기지가 이후 와인 제조법을 물어보아 남긴 기록을 보면, 이 와인은 '포트 와인' 이었습니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북경 천주당의 예수회 신부들이 먼 북경까지 포도주를 옮기기 위해 선택한 방법으로 설명됩니다. 도수가 높아야 쉽게 변질되지 않기 때문이라는데, 꽤 그럴듯하지요. 하지만 포트 와인은 높으면 도수가 20도를 넘어가는 제법 센 술이라 마시고 나면 취할텐데, 이기지는 술이 꽤 셌나 봅니다. 이 뒤 다른 자리에서 포도주 세 잔을 거푸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다고 하거든요.
저자의 글은 뒤에 조선 땅에 상륙한 여러가지 외국 술에 대한 글로 이어집니다. 각 글이 항목별로 분리가 되어 있기는 해도, 와인과 브랜디 등 각종 서양 술, 맥주, 사케와 정종, 청주 등의 일본 술, 희석식 소주와 증류식 소주 등이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항목만 따로 떼어 놓아도 충분히 가치있는 술에 대한 미시사 문헌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그만큼 자료적 가치도 충분합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풍성한 사료를 통해 깊이를 더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냉면 먹방"에서 소개되는 냉면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흔한 이야기이기는 한데 당대 여러 기사들을 통해 냉면 먹는 방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조망해 주기 때문입니다. 단지 '겨울에 평양 냉면'을 먹었다는게 전부가 아닌 것이지요. 1936년 "조선중앙일보" 기사를 통해 '냉면 미각의 절정은 삼복 (더위) 이전' 임이 이미 널리 알려졌습니다. "매일신보" 1936년 기사에서도 여름 관청, 회사 점심시간이면 냉면집 전화통에는 불이 날 지경이라고 소개되었다고 하고요. 그러나 지금과 다른 점은, '경성 냉면은 평양 냉면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으며', '냉면을 주문하면 20분은 기다릴 각오'를 했어야 한다는 부분입니다. 패스트 푸드가 아니었던 겁니다.

"소금 한 톨에 깃든 사연"을 통해 풀어놓는 우리나라 소금 산업의 역사도 흥미로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굽는 방식의 제법을 사용하였는데, 일본이 조선 강점 시기에 한국 해안에 대단위 천일 염전을 조성한게 대단위 소금 산업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소금을 만드는 염호가 옛부터 고단하고, 노비나 군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강해 중국 산동 출신 노동자를 대거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네요. 이후 중국 노동자들의 파업, 퇴사 이후 1930년대에는 조선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요. 고되고 힘든데다가 사회적 인식까지 부족한, 지금의 염전 노예 사건의 단초가 이렇게 일본에 의해 강제된 천일염 제조 산업 초창기부터 있었다는게 참 가슴 아픈 사실이네요.

그러나 이렇게 정보 전달 측면에서 우수하며,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는 글들에 비해 저자의 느낌,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은 좀 별로입니다. 저자의 생각 - 식문화와 먹거리는 빈부에 상관없이 평등해야 한다 - 도 옛 문헌을 통해 먹거리가 빈부에 따라 큰 격차를 보였다는걸 소개하면서, 이런 격차가 그나마 평등해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알려주는데 비슷한 주장의 반복이 많은 편입니다. 이러한 격차가 현대에도 이어지는걸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지나치게 과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정보 전달 측면의 글들은 별점 4점도 아깝지 않으나, 비슷비슷한 에세이 류의 글로 약간 감점합니다. 저자의 음식 관련 미시사, 문화사 전문 서적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네요.

2020/07/24

녹슨 도르래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3.5점

녹슨 도르래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터리 전문서점 ‘살인곰 서점’의 점장 도야마 야스유키를 만나, 서점 일을 도우며 탐정 일을 계속한 지 3년째. 하무라 아키라는 전에 없던 생활고로 고생 중이다. 살인곰 서점이 일주일에 사흘만 열게 되면서 수입이 대폭 줄어든 탓이다. 다른 대형 탐정사에서 하청을 받아 입에 풀칠을 해보지만, 이렇게 들어온 일들은 대개 위험 부담이 크고 돈도 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이번에야말로 편한 건수라며 일이 들어온다. 의뢰 내용은 일흔네 살 할머니의 뒷조사를 해달라는 것.

거절하려 했지만 일당을 올려준다는 말에 하무라는 덜컥 의뢰를 받아들인다. 그렇다. 그 의뢰는 분명 손쉬운 의뢰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행을 하던 중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위를 올려다본 순간, 그 할머니가 하무라 아키라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 하무라 아키라. 그녀의 불운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그 끝에 과연 구원은 있을까?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와카타케 나나미사립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장편입니다. 여러가지 사건이 등장하지만, 하무라 아키라가 히로토의 의뢰를 받아들여 그가 '스카이랜드'에 간 이유를 밝혀내려는게 핵심입니다. 

완벽한 하드보일드 물이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인륜도 저버린 비정한 범죄가 연이어 벌어지며, 연관이 없어보였던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이 전부 관련되어 있으며, 관계자들은 모두 선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전개 모두 완벽합니다. 아버지는 죽고, 자신은 겨우 살아남은 교통 사고 때, 왜 아버지와 '스카이랜드'에 갔는지?에 대해 조사해달라는 히로토의 평범하고 별 볼일 없어 보였던 의뢰가 하무라 아키라의 조사를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도 하드보일드스럽고요. 제가 읽었던 이전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모두 단편이라 미쳐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장편으로 읽으니 확실히 하드보일드를 지향한다는게 잘 느껴졌습니다.

사건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히로토가 아버지와 스카이랜드에 가게 되었던 이유는, 스카이랜드에서 대마를 흡입하고 난동을 피운걸 사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마 흡입은 친구 류지와 함께 했고, 이 일로 취직이 취소될까 겁낸 류지의 가족이 히로토 부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두 부자를 브레이크와 엑셀을 헛갈려 차로 치었다는 노인 호리우치는 류지의 외할아버지였지요. 그러나 류지는 죽지 않고 살아났고, 치료를 받으며 탐정을 고용하자 사고를 위장하여 불을 질러 살해했던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까지 히로토의 죽음은 히로토의 아버지 미쓰타카가 각성제를 밀매했던 증거를 없애기 위함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실제로 이 각성제 밀매와 관련된 인물들의 범죄 행각도 하나 둘 씩 밝혀지고요. 그래서 독자는 하무라 아키라와 함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립니다. 일종의 미스디렉션인데 수법이 교묘해요. 읽으면서 히로토의 죽음이 흐릿해지고, 각성제가 진짜 범행 동기로 보이니까요.

복잡한 이야기 구조임에도 재미있게 써 내려간 작가의 필력도 대단합니다. 하무라 아키라의 생생함 덕이 큽니다. 본의아니게 온갖 사건, 사고에 휘말리며 마지막에는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온 류지의 모친 때문에 자신의 소유물 중 유일한 고급품인 오리털 이불과 다이쇼 시대 책장까지 망가져 버리는데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 이라는 이명에 잘 어울립니다.
다만 불행하기만 한 건 아니고, 탐정으로서의 능력도 괜찮은 편입니다. 수사 방법도 설득력있고 등장하는 소소한 추리들도 좋아요. 히로토의 대학교 버디인 '분페이'의 정체나 마키무라 하나에의 정체를 알아내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여러가지 단서들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히로토의 친구 이즈시가 아이돌 콘서트에 참석했던 영상이 그를 협박하는 도구가 되는 식으로 복선도 잘 짜여져 있고요.

마지막에 수록된, "조용한 무더위"에서처럼 작 중 등장했던 여러 추리 소설들에 대해 소개해주는 '도야마 점장의 미스터리 소개'라는 부록도 반가왔습니다. "소년탐정 칼레"는 어린 시절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구입해봐야겠더군요. 그 외 작품은 엘러리 퀸 등 극소수 유명 작가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번역이라 슬프네요.

그러나 너무 복잡한 구성, 지나친 하드보일드 분위기를 따라해서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마리카의 존재입니다. 그녀는 미쓰타카의 첫 사랑으로, 집안의 반대 때문에 부유한 의사 다쿠마와 결혼한 뒤에도 미쓰타카와 리미 사이를 방해하기 위해 골몰하다가 미쓰타카, 리미 부부가 공갈범 사토 가즈히코를 죽이게끔 유도하고, 이후 미쓰타카를 협박하여 마약 밀매의 길로 끌어들인 인물입니다. 그녀 때문에 여러 명이 죽고 파멸해버린, 한마디로 말해서 하드보일드 작품들에 흔하게 등장하는 절대악, 흑막, 팜므 파탈이지요.
하지만 이 작품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존재가 현재의 사건 - 히로토가 죽은 화재 사건 - 에 영향을 미치는건 없거든요. 미쓰타카가 죽은 이후 그녀가 직접 히로토를 괴롭히러 나타날 이유도 없고요.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었던, 히로토는 상관할바가 아니니까요.

또 하무라 아키라가 중요한 단서처럼 언급하는, 그녀의 병원에 전시된 사토 가즈히코의 해골도 과거 범죄의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미 죽어버린 미쓰타카에게 건네받은 일종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면 그뿐이거든요.
도비시마 이치코가 하무라 아키라에게 약을 먹여 교도소에 집어넣는 행동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마약 밀매에 대한 조사가 윗 선까지 닿아 있었다면, 구태여 이런 수작을 부릴 이유는 없습니다. 하무라 아키라의 말대로 대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도 있었을테고요.
이런건 하드보일드에 흔하게 등장하는, 경찰 조직과 탐정의 알력, 다툼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나마 이치코를 응징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행동만 볼거리였어요.

물론 이 무서운 여자들의 행동은 이 작품만 놓고보면 말이 안되는건 아닙니다. 이 두 여자에 더해, 마지막에 하무라 아키라를 죽이려고 찾아온 류지의 모친 등 악당이라 할 수 있는 여성들 모두가 지나칠정도로 이기적이고, 극도의 자기 합리화가 가능한 인물들인 탓입니다. 모두들 자기 행동은 아무 문제가 없다, 잘못은 너 (하무라 아키라)와 피해자 (히로토 등) 가 저지른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게 별로 현실적인 설정은 아니지요. 게다가 마리카와 이치코 모두 딱히 등장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무리수였어요.

마지막으로, 큰 문제는 아니지만 사랑의 도피로 사라졌다는 히로토의 어머니 리미의 정체가 히로토의 먼 친척이라고 자칭한 하나에라는 것도 뜬금없었어요. 미쓰타카가 죽고 히로토는 겨우 살아남은 상황에서, 자신이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거짓말을 유지해가며 먼 발치에서 아들을 지켜본다는건 설득력이 낮지요. 사토 가즈히코의 죽음이 지금에 와서 다시 드러날 이유도 없고요. 하나에의 정체에 대해서 던져주는 이런저런 단서들도 좀 부족한 편입니다. 이 역시 불행한 운명에 빠진 가족이라는 하드보일드 서사를 그냥 따라한 느낌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를 현대 일본으로 끌고 온 작품들 중에서는 충분히 손에 꼽을만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가치는 재미에 있습니다. 단편인줄 알고 집어들었는데, 한 번에 몰입해서 읽을 정도였거든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조금 불필요한 곁가지들을 정리했더라면 별점 4점 이상도 충분했을겁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니,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5/05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36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3.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6 - 8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산의 의사" 

티벳 불교 색채가 진하게 남아있는 인도 라다크 지방에 방문한 신라는, 전통 의료인 '아무치' 얀단의 부탁으로 보물 찾기에 나섰다. 서양 의학도 배우고 싶어하는 얀단을 돕기 위해 스승 챤단이 귀한 약재를 팔아 학비를 대 주기로 했지만, 급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탓에 약재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C.M.B 스러운 현학적인 즐거움이 가득했던 작품입니다. 등장인물의 직업인 티벳 전통 의료인과 이야기의 무대인 히말라야 산, 보물을 노리는 마을 사람들을 현혹하는 속임수로 쓰이는 산 산호 등에 대해서도 특유의 만화적이면서도 친절한 설명으로 쉽게 전해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티벳 불교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가 많은데, 만다라와 전통 사원의 스투파, 챠크라와 같은 해당 정보가 보물을 감춘 장소와 연결된다는 점이 아주 돋보어요. 만다라와 사원 바닥의 챠크라라는 단서를 눈치챈 뒤, 챠크라는 '문을 밖으로 여는 것' 인데 사원의 문은 안으로 밀어 열기 때문에, 밖으로 밀면 숨겨진 장소가 나온다는 추리가 꽤 그럴듯했거든요. 사원의 문을 밖으로 미는 장면은 가슴이 두근거릴만큼 멋졌고요.

딱히 범죄라는게 등장하지도 않고, 보물이 숨겨진 장소에 대해 여러가지 알아낼 방법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 일단 벽이 비 정상적으로 두껍잖아요? - 추리보다 지식 전달 측면에서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완성도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루바이야트 이야기"

오마르 하이얌의 4행 시집인 '루바이야트'를 둘러싼 살인극을 다룬 작품입니다. C.M.B로는 이례적으로 2화 분량을 사용해가며 조금 긴 호흡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11세기 사마르칸트에서의 이스마일파 하산과 그의 친구 오마르의 이야기와, 현대에서 벌어진 살인과 루바이야트를 둘러싼 음모를 모두 다루기에는 어느 정도의 분량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핵심 소재인 '루바이야트'라는 시집의 존재에 대한 정보는 기대에 값합니다. 상세할 뿐 아니라, 그 유래와 현재까지도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으니까요. 이를 이스마일파의 하산, 아사신, '산의 노인'과 연결시키는 과감한 아이디어 역시 돋보였고요.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트릭이 꽤 괜찮은 덕분입니다. 첫 번째 밀실 트릭, 즉 완벽하게 잠겨진 공간에서 칼에 찔려 살해된 상황은 '창'을 이용한 것인데 꽤 현실적이라 설득력이 높습니다. 높은 탑에서 사람을 밀어서 추락사시킨 트릭은, 탑 아래에서 발판이 되는 판자를 들어 올린 것으로 이 역시 그럴듯했어요. 사람이 민 것처럼 꾸미기 위해 윗 옷에 손자욱을 남겨 따로 유기한 작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사소한 말 실수가 범인을 드러내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는 이야기는 다른 에피소드들에서도 많이 등장했었죠. 그러나 다른 에피소드의 경우, 억지스러운 말 실수도 많았는데 이 작품에서는 합리적입니다. 범인의 말 실수는 가짜 루바이야트를 담고 있던 물건을 가방도 아니고, 상자도 아닌 일본식 '보자기'로 표현했던 것인데, 이는 물건을 담아 온 피해자가 일본인이었던 덕분으로 서양인은 알기 어려운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 번째 사건 현장의 나이프가 흉기가 아니라는걸 경찰이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아무리 이국 경찰의 부실 수사로 치부하더라도 문제가 있는건 사실입니다. "미스터리 민속 탐정 야쿠모"에서 더 멋진 방법으로 같은 트릭이 사용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두 번째 트릭이 사용된 사건입니다. 트릭을 이용해 '사고 현장인 탑에 올라간 사람은 없다'는 상황을 만드는게 범인에게 딱히 도움이 되는게 없거든요. 추락사한 플럼과 범인 로즈의 대립이 살짝 있기는 했지만, 로즈의 목적인 루바이야트 발굴은 이미 시작된거나 다름 없으니 그녀가 이런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없어요. 차라리 트릭을 사용하지 않고 '자살'로 꾸몄다면 억지스러워도 말은 되는데, 가공의 범인을 꾸며낼 이유 역시 없습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밀실이 된 건 범인의 의도가 아니라 피해자가 들고있던 나이프가 흉기로 오해된 까닭으로, 여기에 맛들인 범인이 불필요한 단서를 추가했다는게 이유라고 설명되는데, 사고사나 자살을 구태여 살인으로 위장할 필요는? 당연히 없습니다.

즉, 트릭은 좋았지만 실제 범행에 사용될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실패한 셈입니다. 트릭이 아깝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카스미장 사건"

경시청 형사 타나바다는 부랑자로부터 '카스미장'이라는 아파트 관리인이 최근 보이지 않는다는 정보를 들었다. 조사를 나선 그녀와 동료는 관리인의 아들을 만났고, 들어간 카스미 장에서 혈흔 등의 범죄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들은 카스미 장의 위치가 좋다는 이유로 수상한 부동산 업자가 아파트를 팔 것을 강요했다고 말했고, 부동산 회사에서는 무언가를 파묻은 도구를 보게 되었다. 이를 사건화하기 위해 사체를 찾아내야 하는 타나바다는 부동산 회사에서 가져온 흙을 신라에게 전달하여 사체 은닉 장소를 알아내려 하는데...

이전 작품에서 등장했던 신참 형사 타나바다가 등장하는 사기극입니다. 카스미장 아파트 관리인은 자기 발로 사라진 것이며, 아들은 아들을 자칭한 사기꾼으로 사체 발견 뒤 경찰에 의해 아들임이 공인되어 당당하게 아파트를 매매하려 했다는 진상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리고 타나바다 등이 발견한 관리인의 사체 일부는 사기꾼의 아버지 손목이었습니다. 사기꾼이 진작에 자연사하여 매장되었던 자신의 아버지 사체의 손목만 관리인의 시체처럼 위장하여 암매장한거죠. DNA 검사를 통해 사기꾼 자신이 시신의 혈육으로 당당하게 인정받기 위함으로, 이를 위해 카스미 장과 꾸며낸 가짜 부동산 회사 등에 여러가지 조작한 단서를 남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타나바다 등은 이에 홀랑 속아 넘어갔고요.

또 조작에 말려들어 사기꾼의 계획대로 행동하던 타나바다가, 마지막에 '형사의 감'은 무엇이 진짜인지 의심해 봐야 한다는 선배 형사의 충고를 토대로 진상을 풀어낸다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형사의 감'이 대관절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해답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본인 스스로 정답이라고 생각할 때까지 생각해 본 결과로, 단순한 '감'은 아닌 것이죠.

그러나 이야기를 무리하게 C.M.B 스럽게 만들기 위한 억지는 조금 거슬렸습니다. 대표적인게 부동산에 약간의 흙더미를 남겨 놓은 걸로 경찰이 사체(로 위장한 손목) 를 찾게 한다는 조작입니다. 이 흙더미에서 신라가 특정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곤충을 발견하여 암매장한 장소를 알아낸다는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되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강원도 산간 일대에 서식하는 곤충이다" 정도의 정보로 달랑 형사 2 명이 암매장한 손목을 발견한다?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보다 많은, 다른 정보가 필요했어요. 예를 들면 부동산 회사 차량이 어느 국도를 이용했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본 편 이야기는 좋았는데, 무리한 시리즈화로 오히려 감점 요인이 생겼다는 점에서 무척 안타까왔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차라리 신라가 등장하지 않고 우직한 경찰의 수사로 암매장 장소를 발견했다고 하면 별점 4점 이상은 충분했을겁니다.

그래도 3편 모두 평균한 별점은 3.5점. 간만에 재미와 정보 제공, 추리 요소 모두 만족스러웠습니다. 다음 권에서도 이 분위기 쭉 이어가 주었으면 합니다.

2020/05/03

푸드 오디세이 - 빌 프라이스 / 이재황 : 별점 3.5점

푸드 오디세이 - 8점
빌 프라이스 지음, 이재황 옮김/페이퍼스토리

'음식은 어떻게 인류 역사를 바꾸었나'라는 부제처럼 음식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가 매우 가까우며, 음식이 사회와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걸 50개의 대표 음식, 요리, 재료를 통해 알려주는 책입니다.

약 35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각 항목별로 많아도 10페이지를 넘기 어렵지만, 해당 항목이 어떻게 역사, 사회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알 수 있도록 충실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구"라는 책에서, 대구 어장의 발견과 어업이 당시 해상 무역과 교역 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이 책에서 소개되는 '청어' 역시 그에 못지 않습니다. 청어가 많이 잡혔던 발트해 근처의 독일 도시 뤼베크가 절인 청어 교역으로 급성장한 뒤 서유럽, 동유럽을 잇는 교역망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 교역망 보호를 위해 다른 도시들과 상인 조합을 결성한게 그 유명한 '한자 동맹'의 기원이라고 하니까요. 16세기 중반, 발트해 청어가 크게 감소하여 결국 한자 교역은 쇠락하지만 도시는 아직 건재하고, 청어도 종수를 회복하여 아직 발트해 지역에서는 많이 먹는다고 하니 다행이에요.
 홍차의 경우, 아편 전쟁을 일으키는 등 세계사에 큰 격변을 일으켰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영국의 인도 지배가 끝난 뒤에도 인도 정부가 홍차 내수 시장을 키우려 안간힘을 썼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하기사, 이렇게 큰 기간 산업이자 농업의 핵심 소비층이 떠나갔다고 손 놓고 황폐화 시킬 수는 없었을테지요. 이 활동은 성공해서 인도산 홍차의 70퍼센트가 인도 내에서 소비된다니 다행입니다. 이를 통해 '마살라 차이'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도 다행이고요.
바나나의 유통을 위해 미국의 유통회사들이 이른바 과테말라 등에 '바나나 공화국'을 세운 뒤, 그 나라 내정을 간섭하고 반정부 투쟁까지 주사했다는 이야기는 가슴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한 토막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참 나쁜 역사지요. 유나이티드 푸르트 사의 바나나는 먹지 말아야 할텐데, 구분이 가능할지 걱정입니다. 현재의 바나나는 모두 캐번디시 동일종으로 질병에 취약해서 곧 '흑색 싱카토카' 곰팡이에 의해 절멸할지도 모른다는데, 그 때가 되면 제발 유나이티드 푸르트도 함께 망해버리면 좋을 듯 합니다. 이와 비슷한 역사로는 북미 자유 무역 협정이 있습니다. 이 덕분에 '가루 우유'로 대표되는, 정부 보조를 받는 미국산 농축산물이 멕시코로 무관세 수입된 뒤, 멕시코 낙농업이 괴멸하여 이게 결국 가난과 불법 이민 등으로 이어지고, 현재의 마약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니까요. 남아메리카 국가들에게는 미국이 악의 축인 셈입니다.
전쟁과 관련된 음식 소개도 많습니다. 육포 빌통은 남아프리카 부르 전쟁에서 부르인들의 유격전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 외에도 콘 비프와 같은 '불리 비프', 앤잭 비스킷 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앤잭 비스킷 소개에서 언급된 건파이어 조식은 인상적이에요. 럼주를 탄 커피 한 잔인데, 1차 세계대전 때 앤잭 병사들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병사들) 이 전투 시작 직전에 했던 방식 그대로라고 하네요.

그리고 그냥 흥미, 재미거리로 읽을만한 글들도 많아요. '카술레'는 그다지 익숙치 않은, 프랑스 스튜인데 굉장히 평범한 일상 요리입니다. 그러나 영국이 2차대전 후 경기를 회복하여 사람들이 프랑스로 휴가를 가게 된 뒤 유명해졌다는게 재미있습니다. 그들은 휴가 때 툴르즈에서 출발해 남프랑스로 내려가는 운하 여행을 즐기는데, 그 중간에 위치한 카스텔노다리에서 카술레를 먹던게 계기라는군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다른 지방에서는 잘 몰랐지만 방송 등으로 유명해져 전국구 지역 명물이 된 '만석 닭강정'과 비슷하겠지요?
항상 궁금했던, 애플 파이가 왜 미국을 대표하는지에 대해서도 한 꼭지를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오리지널 음식은 아니고, 애플 파이와 미국의 건국을 연결시키는건 무리이지만 이른바 '향수', 남겨진 '유산'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군요. 버팔로가 멸종하지 않았고, 지금은 개체수를 많이 회복했다는 이야기도 아주 반가왔고요.

그러나 워낙 많은 음식과 재료가 소개되는 탓에, 단순한 에피소드 정도에 그치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 소시지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건, 미국에 독일 이민자가 많았다는 정도입니다. 또 앞서의 애플 파이처럼 특별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왜 시애틀이 커피 중심지가 되었는지? 인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는게 전부라서 약간 실망스러웠어요. '로이 리히텐슈타인'을 '리크텐슈타인'이라고 표기하는 등의 오타인지, 제대로인지 알 수 없지만 친숙하지 않은 발음도 몇 가지가 거슬렸고요.

그러나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오히려 프랑크푸르트 소시지 이야기에서는 생뚱맞지만 재미있는 정보가 실려있어요, 값싼 핫도그로 유명했던 '네이선스 페이머스'의 싼 가격에 사람들이 의심을 품자, 창업자 네이선 핸드워커는 인근 병원 의사들이 흰 가운을 입고 오면 핫도그를 공짜로 주었다는 이야기죠. 의사들이 줄을 선 것을 본 사람들이 음식의 안전성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는 것으로, 이렇게 그 나름의 가치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가게도 코니 아일랜드 등에 여전히 건재하니 언젠가 꼭 한 번 가서 먹어 봐야 겠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글들이 함께 한 도판도 수준높고 적절해서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대구" 처럼 한 주제를 깊숙히 파고들어간 깊이는 부족하지만, 재미와 함께 지식을 얻기에는 부족함 없는 책이었어요. 음식과 문명에 대해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