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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2. 카라쿠리 미로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2. 카라쿠리 미로
다음 날, 토시오가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마이코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한 장의 종이를 놓고 몰두하고 있었다. 토시오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종이를 들고 일어섰다,
"차나 마시자"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카페 테이블에 가져온 종이를 펼쳤는데, 그것은 소우지의 노트에서 복사한 미로의 개략도였다.
"카츠 군, 이 미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이코는 미로가 그려진 그림을 토시오 앞에 내밀었다.
"커피, 커피로, 괜찮지?"
토시오는 우물쭈물 대답하며 미로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도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카츠 군은 카오리와 함께 미로에 들어갔지만, 미로의 중심부에는 도착하지 못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너의 말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형과 복연결형 두 종류가 있는데, 단연결형 미로에서는 한 손을 미로 벽에 대고 진행하면 돼. 손이 항상 벽에 닿아 있기만 하면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언젠가는 골인 지점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맞지?"
"맞습니다."
"이 미로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다지 어려운 미로는 아니야. 그게 문제였어.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 미로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었고.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나서 네가 시도한 방법으로 미로를 진행해보았어."
마이코는 성냥개비를 꺼내 토시오에게 건넸다.
"자, 이 그림으로 네가 실제로 미로에 들어갔을 때와 똑같이 미로를 통과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 끝을 미로의 왼쪽 벽에 대고 조용히 따라갔다. 성냥개비는 몇 개의 막다른 골목길을 돌았지만, 놀랍게도 마지막에는 정확하게 오각형의 중심에 도달했다.
"어때?"
마이코가 미로를 들여다보았다.
"중앙에 도착했어요."
"반대편 벽으로도 시도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를 오른쪽 벽에 대었다. 결과는 같았다. 성냥개비는 똑같이 마지막에 중앙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카츠 군은 그때 벽에서 손을 뗀 적은 정말 없었어? 아니면 앞만 보고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는걸 빼먹은건 아니었어?"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절대로 벽에서 손을 떼지 않았어요."
"이 그림이 잘못 그려진건 아니야. 실제로 그날 소우지가 미로를 안내할 때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굽이굽이마다 구석구석 확인해 두었어. 이 미로는 단지 단연결된 미로에 불과해."
"그럼 저는 왜 미로 중심부로 골인하지 못했을까요?"
커피가 나왔다. 마이코는 설탕을 컵에 듬뿍 담아 제대로 섞지도 않고 마셨다.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은 꽤나 머리를 쓴 것 같아."
"그렇습니까?"
"이렇게 그림으로 보면 별 것 아닌 미로로 보여. 하지만 실제로 미로에 서보면, 조금만 실수해도 골인할 수 없도록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 있어.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의 세심함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야."
"그런가요 ......"
"첫째, 이 모양에 주목해야 해. 오각형말이야. 이 모양이 인간의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첫 번째 원인이야."
"오각형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요?"
"그래. 이상하게도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기본 형태는 삼각형도 아니고, 오각형도 아니야. 언제나 사각형이야. 네모난 집, 네모난 테이블, 네모난 침대, 네모난 종이, 네모난 책 ...... 인간이 보통 접하는 대부분의 물건이 네모야. 잘 정비된 도시는 반드시 바둑판의 눈처럼 깔끔한 사각형으로 구분된 길이 붙어 있기도 하고. 길을 잃기 쉬운 길은 그것의 형태와 구분이 깔끔한 사각형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런데 오각형의 굴곡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면 사각형의 굴곡으로 인식될 것 같아."
"이 미로의 모든 면이 휘어져 있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군요."
"그것도 있지. 그리고 또 하나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의 시야를 없애는거야. 미로를 나아가다가 갑작스럽게 돌발적인 느낌으로 갈림길이 나타나도록. 실제로 그렇지 않았어?"
"그랬어요. 정말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햄튼 코트의 미로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봤는데, 일부에 이런 갈림길이 쓰여 있더라고. 하지만 부채꼴 모양으로 장식성은 있을지언정, 나사 저택의 미로처럼 현기증을 유발하는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아. 나사 저택처럼 모든 길에 현기증이 나는 갈림길이 준비되어 있는 예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또 이 미로를 자세히 보면........"
마이코는 빨간 연필을 꺼내 미로의 바른 길을 빨간색으로 칠했다.
"이 바른 길 말이야. 미로에 들어가는 사람은 중심부를 향하게 돼. 그래서 당연히 중심부 방향으로 길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른 길은 미로의 중심을 등지고 돌아가야만 하는 갈림길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어. ……. 뭐, 이것은 미로의 상식이기 때문에 당연하기는 하겠지. 그런데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건 이렇게 다양한 장치를 담은 미로가 결국 단연결 미로였다는 점이야."
"단연결 미로는 안 됩니까?"
"안 돼지. 카츠군이 시도한 방법, 즉 손을 벽에 대고 나아가는 방법은 미로를 소개하는 책에는 반드시 설명되어 있어. 그렇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쉽게 풀 수 있는 미로를 만들었다는 뜻이야. 오각형 등 여러가지 장치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열중하던 사람이 말이야.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지 않아?"
"하지만 실제로 저는 미로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없었죠......"
"그게 핵심이야. 이 미로를 굳이 단연결로 만든 것은, 때로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이 절대 미로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되어 있는 게 분명해."
"절대로 골인할 수 없는 장치?"
토시오는 무심코 미로 그림을 다시 보았다.
"실제로 토요일에 카츠 군이 미로 중심부에 골인하는데 실패했잖아? 그거야말로 단연결 미로 해결 방식으로는 중심부로 갈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지."
"그런가요?"
"다시 한 번 그 미로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군."
밖으로 나오니 이상하게 따뜻했다. 마이코는 비가 오는 것 같다고 말하며 오렌지색 코트를 에그의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

나사 저택 안에는 많은 차들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제복을 입은 경찰이 차를 세웠다.
마이코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나라키와 아는 사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나라키 대신 호시자와가 저택에서 나왔다.
"당신이 오면 항상 나쁜 일만 일어나."
호시자와는 잠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 혼잡한 것 같네."
마이코는 늘어선 차를 보며 말했다.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이 모였어. 사장님을 중심으로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야."
해바라기 공예의 핵심 간부를 두 명이나 잃었으니, 회사로서도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일 것이다.
"데츠바씨는 잘 지냈어?"
"건강해 보여. 강인하더군. 아들과 딸을 잃고도 우리 앞에서는 한 번도 약한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어. 대단한 분이야."
"마사오 씨를 만나고 싶은데..."
"안 돼."
"안 된다고? 설마, 용의자로 지목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안 돼. 바빠서 말이야."
"언제 만날 수 있어?"
"중요한 용건인가? 내가 대신 전해줄 수 있어."
"나라 공이 그렇게 시켰겠지. 변함없이 융통성 없는 남자로군."
"우리가 알면 안돼는 용건인가?"
"뭐, 됐어. 그 대신 정원을 산책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냄새를 맡으면서 돌아다닐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술에 취한것 같은 짓거리는 당연히 하지 않아. 잠깐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을 뿐이야."
"나쁜 말은 하지 않겠어.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거야."
"경찰이 민간인의 협조를 거부하게 된 건가?"
"그럴 생각은 없어"
"그럼 괜찮지 않아? 호위병이 있어도 상관없어."
호시자와는 마지못해 차를 통과시켰다.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 쉬고 나면 바로 돌아가. 오늘은 마사오 씨와 만날 수 없어."
라며 말렸다.
마이코는 어슬렁어슬렁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호시자와는 한 순경을 붙잡고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정말로 호위병과 함께 걷게 되었다.
정자의 흙에는 아직 피가 묻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흙에 흡수되어 신경써서 확인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의 흔적이었다.
마이코는 정자 앞의 다소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돌다리를 건너 미로 쪽으로 걸어갔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따라 천천히 미로를 돌았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마이코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라고 말하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토시오도 뒤따라 달렸다. 마이코는 그대로 미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이코는 미로의 길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아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확하게 길을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로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지도대로야."
마이코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지도는 틀리지 않았어. 그렇다면, 카츠 군은 왜 그날 실패했던 걸까?"
마이코는 돌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뭔가 있는 모양인데.... 뭔가 ......."
마이코는 돌로 된 테이블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탁자 밑으로 몸을 굽혀 떨어진 물건을 집어 들었다. 성냥개비의 타버린 조각이었다. 끝이 씹혀서 부서져 있었다. 마이코는 지겹다는 듯 성냥개비를 탁자 밑에 버렸다.
"미로 안에 돌 의자가 놓여 있었어요."
토시오는 처음 미로에 들어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이 그림에도 제대로 적혀 있어요."
마이코는 그림의 ○표를 가리켰다.
"올바른 길은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도록 되어 있군요."
"맞아. 올바른 길로 지나가면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아. …….잠깐만. 의자 앞을 지나쳤다고?"
마이코가 깜짝 놀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너, 그날 의자 앞을 지나쳤어?"
"네."
마이코는 지도를 두드렸다.
"이 지도에서는 의자가 막다른 골목 안쪽에 표시되어 있어."
마이코는 지도를 들고 일어섰다. 중앙을 벗어나 미로를 거꾸로 따라간다. 몇 번 모퉁이를 돌자 막다른 골목 안쪽에 타원형의 돌이 보였다.
"의자는 이걸 말하는거지?"
"맞습니다. 바로 이거였어요.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앞을 지나갔던 기억이 나는데요."
마이코는 몸을 굽혀 타원형 의자를 면밀히 살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마이코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미로의 속임수를 알아챈 것 같아."
마이코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와 다시 미로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심부 입구의 울타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 울타리의 바로 뒷편에 돌 의자가 놓여 있어."
마이코는 계속 울타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울타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레버 같은 것이 나와 있어. 잡아당겨 보지."
반응이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울타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해."
마이코는 몸을 움츠렸다. 울타리는 마치 문처럼 움직여 오각형의 중심부 광장을 꽉 막아 버렸다.
"즉, 의자 앞의 통로가 열려있으면 ……. 이쪽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야. 반대로 이 중심부는 닫힌 방으로 변해버리게 돼지. 여기가 닫히면 더 이상 아무도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는 거야."
마이코는 다시 한 번 닫혀 방처럼 변해버린 미로의 중심부를 둘러보았다.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하기에는 너무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군."
이 장난이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은 곧 알게 되었다.
토시오는 문득 귀를 쫑긋 세웠다. 땅속에서 물이라도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소리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그때 오각형 방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앙에 있는 오각형의 돌 테이블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탁자는 튕겨져 나오듯 일어섰고, 탁자 밑에 있던 오각형의 포석이 가라앉으면서 오각형 모양의 검은 구멍이 뻥 뚫렸다.
구멍에는 가파른 돌계단이 바닥으로 이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조심스럽게 구멍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구멍은 꽤 깊었고, 돌계단은 어둠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습한 공기가 희미하게 불어왔다.
"이게 뭐죠?"
토시오는 깜짝 놀라며 마이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굴이야."
마이코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몸을 날려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조경은 인공적인 도원향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었어. 정원에는 이국적인 정자, 분수, 미로, 실물 크기의 자동 인형이 놓여 있고, 동굴 안에는 다양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지."
"이 동굴은 만들어진 것입니까?"
"그건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상상으로는 반반인 것 같아. 오나와라는 땅에서는 고대인의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으니, 고대인이 살던 동굴을 조금 가공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오나와라는 지명은 다혈(多穴)이라는 뜻의 '오아나(おおあな)'가 사투리로 전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
"이 큰 돌 탁자를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전력인가요?"
"전력 따위가 아니야. 수력의 힘을 이용한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물소리가 들리네요."
"이 동굴은 꽤 넓은 것 같아. 연못의 물이 흘러서 동굴 안에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있는데, 저 레버를 당기면 그 물이 한꺼번에 흘러서 그 힘으로 테이블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되는군.”
"이 동굴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나사 저택은 마와리 호도가 만들었지만, 이 동굴은 호도의 아버지인 사쿠조가 만든 것 같아"
"그 시대 사람들처럼 사쿠조는 이상향으로 이 동굴을 만들었을까요?"
"그건 아닌것 같아. 이 미로부터가 매우 폐쇄적이니까. 단지 재미나 장식을 위해서라면 이런 장난은 불필요했을거야."
"그러니까 동굴이 열려 있을 때는 아무도 모르게 미로를 닫아놓는 거군요."
"내려가 보자."
마이코는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손전등과 양초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다이 씨는 미로 안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토시오가 놀랐다.
"마와리 가문의 철야 때 만났던 스님이 미로를 만드는 동기도 다양하다고 말했었지. 그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어."
마이코는 직접 촛불을 들고 손전등 쪽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지금도 이 미로가 정확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최근에 누군가가 이 미로를 손질한 적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아마 괜찮을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치명적일 수 있으니 양초가 필요해. 만약 양초의 불이 꺼지면 산소가 없다는 뜻이니까."
마이코는 촛불에 불을 붙이고 구멍 옆에 섰다. 동굴의 바람이 불어서 양초의 불이 꺼져버렸다. 마이코는 불을 다시 붙인 뒤 바람을 피하면서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토시오는 뒤따라가며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비춰주었다.
돌은 검고 축축하고 가팔랐다. 동굴 안은 따뜻하고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마이코는 돌계단 중간에 몸을 굽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아까의 성냥개비 조각이 떨어져있었다. 동굴의 문이 열렸을 때 안으로 들어온걸로 보였다. 마이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돌계단은 꽤 깊었다.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토시오는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조심스럽게 비췄다.
돌계단을 내려가자 여섯 장 정도의 넓이의 돌방이 나왔다. 바닥 곳곳에 물이 고여 있어 손전등 불빛을 비추자 하얀 거미 같은 벌레들이 도망쳐 나갔다. 석실 벽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구멍 두 개가 나란히 눈동자처럼 열려 있었다.
"보라고."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마이코는 방금 내려온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박쥐의 손아귀처럼 녹슨 쇠막대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이걸로 미로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겠지."
마이코는 막대기에 손을 대었다가 바로 물러섰다,
"지금 테이블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곤란하겠지. 호위 아저씨에게 들킬지도 몰라."
마이코는 두 개의 동굴 안쪽에 촛불을 비췄다. 하나는 완만한 오르막길이고, 다른 하나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물론 안쪽까지 빛이 닿지는 않았다.
"카츠 군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래?"
마이코는 촛불의 반짝임 속에서 섬뜩하게 웃었다.
토시오는 땅을 주의 깊게 살폈다. 최근에 누군가가 지나갔다면 발자국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이론적으로 풀려고 하네."
마이코는 토시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 말했다. 하지만 두 동굴 어느 쪽에도 발자국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또 한 쪽 손을 벽에 붙이고 가야할까? 이 구멍은 꽤 길 것 같은데?"
"그럼, 우다이 씨는 어느 길이 맞는지 알 수 있나요?"
불만을 품은 듯한 토시오의 목소리에 마이코는 다시 웃었다.
"물론, 왼쪽이야."
마이코는 망설임 없이 왼쪽의 가파른 경사면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꺾는 순서를 메모해 둘까요?"
"아니, 이미 가지고 있어."
"그럼 동굴의 길찾기 지도를 찾았나요?"
"그런 것,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지."
천장이 낮아 두 사람은 허리를 굽혀 걸어야 했다. 한참을 가다가 마이코가 걸음을 멈추고 땅을 바라보았다.
"왁스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네. 우리처럼 걸어온 사람이 있었구나. 내 생각이 옳았던 것 같군."
그러다 길이 다소 넓어지고 평탄해지자 두 갈래로 갈라진 길로 접어들었다.
"봐."
마이코는 동굴 벽을 가리켰다.
"두 개의 구멍은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를 거야. 한쪽은 벽을 깎은 흔적이 새롭지. 그러니까 이 두 구멍이 생긴, 혹은 만들어진 시대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새로운 구멍은 동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오래된 길을 선택하면 되겠군요."
"그렇다면 그 반대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새로운 구멍은 불완전했던 동굴을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길 순서는 새로운 구멍을 선택해야 한다."
"어느 쪽 해석이 옳은가요?"
"결국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마이코는 얼른 오래된 쪽의 구멍으로 들어갔다.
길의 폭이 넓어지고, 왼쪽에 좁은 도랑이 뚫려 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마이코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이상하네. ...... 누군가가 미로의 문을 닫은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계속 걸음을 옮길수록 물소리가 더 커졌다.
"...... 폭포가 있어."
"폭포가? 동굴에?"
토시오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코는 촛불을 들었다. 그 빛 끝에 실 같은 무언가가 보였다. 가느다란 폭포였다.
폭포가 있는 곳은 꽤 넓고 천장도 높았다. 석실 양 옆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고, 두 구멍 사이로 튀어나온 듯한 바위가 있고, 물은 바위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표면은 물보라로 빛나고, 떨어지는 물은 도랑을 따라 조용히 흘러내렸다.
폭포는 두 갈래로 꼬불꼬불하게 휘어져 각각 뾰족한 바위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사이에 접시처럼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그곳에 고인 물은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도 맑고 깨끗해 보였다.
"이번에는 이쪽이야"
폭포를 바라보던 마이코가 몸을 돌렸다. 촛불이 흔들리며 동굴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 거지요?"
토시오는 마이코가 선택한 동굴에 전등을 비췄다.
"아하, 동굴의 지도가 있었군요."
마이코가 돌아보았다.
"있었어. 엄청나게 큰 녀석이."
"어디에요?"
마이코는 천장을 가리켰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아. 땅 위에 있었어."
토시오는 무슨 말인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마이코는 양초를 토시오에게 건네주며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이 나사 저택의 주인인 마와리 호도는 장난감을 싫어했다고 하지. 장난감의 창작보다는 상술에 능숙했기 때문에 작은 회사였던 츠루슈도를 해바라기 공예라는 큰 회사로 키울 수 있었어. 그런 사람이 왜 장난감 나라에나 나올 법한 나사 저택 같은 집을 지었을까?"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나요?"
"아니야. 호도는 장사도 잘한걸 보면 굉장히 계산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일거야. 변덕스럽게 이런 이상한 건물을 만들지는 않았을테지."
"그럼 또 다른 동기가 있었나요?"
"그래. 나는 나사 저택 같은 기괴한 건물이라면, 정원에 이상한 미로가 만들어져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있을 거라는게 이유라고 생각해. 만약 일반 가정집에 미로가 있다고 해봐. 미로만 너무 눈에 띄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미로에 집중되었을거야."
"그럼 미로를 만들고 싶어서 호도는 나사 저택을 만든 건가요?"
마이코의 말은 상식을 뛰어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럼, 그 미로는 왜 만들었나요?"
토시오는 그때까지 미로를 만들어야만 했던 호도의 마음을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그래, 좋은 질문이야. 장난감을 싫어하는 호도가 왜 미로를 만들었을까?"
마이코는 가방을 열어 오각형의 미로 그림을 펼쳤다.
 
"이건 땅에 그린 동굴의 지도인 것 같아."
"지도? ...... 에서도 이 동굴은 오각형이 아니잖아요."
"지도라는건 실물과 똑같은 축척으로 그려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야. 도쿄의 야마노테 선의 지도는 만두에 꼬챙이를 꽂아놓은 것처럼 그려지기도 하잖아. 즉, 실제 길과 그림이 상대적으로 동일하다면 그림은 아무리 변형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나사 저택의 미로와 이 동굴의 길은 위상적으로 동일하다는 거지."
"위상적?"
"오각형 미로의 입구와 골목을 잇는 길에 밧줄 하나를 놓았다고 하자. 그 밧줄에 갈림길, 즉 막다른 길에도 밧줄을 뻗어 본길과 연결해 주는 거지. 미로 안의 모든 길에 밧줄이 깔렸을 때, 밧줄을 빼내어 양 끝을 잡고 잡아당겨 보라고."
"내 팔은 그렇게 길지 않아요."
"융통성 없는 남자네. 로프를 훨씬 더 짧게 만들어서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이런 모양이 될 거야."
마이코는 미로 그림을 토시오에게 보여주었다. 마이코는 그림의 모서리에 나뭇가지 같은 그림을 그려 넣었다.
"미로나 동굴의 길을 생각할 때 길의 길고 짧음, 오르막과 내리막, 길의 굴곡 등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 길이 아무리 구불구불하고 각이 져 있어도 상관없다고. 다만 문제는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지."
"오각형의 미로와 동굴의 길이 같다는 의미는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갈림길에서는 미로와 같은 방식으로 꺾어 왔던 거군요."
"맞아.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지 않은 것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던 것 같네."
"동굴의 지도를 그리는 데 왜 이런 엉뚱한 방법을 택한 거죠?"
"호도는 일반인에게 동굴이 알려지는 것을 절대 원치 않았어. 그런데 지도를 세밀하게 그려놓을 경우, 다른 사람이 보면 이 저택 안에 동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도둑맞을 수도 있으니 문제가 많지. 그래서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미로로 바꾸어 놓는 방법을 생각해냈던거야."
"미로 자체가 지도였던 거군요"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지상에 크게 그린 거지. 설마 이것이 동굴의 길을 표현한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거야."
"그렇게까지 해서 숨기려고 한 동굴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요?”
크로커다일폴리스의 미궁에는 왕과 크로커다일이 묻혀 있었다고 했다.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호도는 그저 통로로 이용했을지도 모르고."
"그럼 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건가요?"
"확실하진 않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 나사 저택 안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마이코는 다시 한 번 지도를 훑어본 후 촛불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길의 굴곡은 점점 심해져 불규칙한 계단과 언덕이 이어졌고, 땅바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공간이 나타났다. 바위로 둘러싸인 복잡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길은 바위 틈새를 통과하듯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각형의 미로에 대응시키면 E의 지점에 해당되지."
마이코는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미로의 E 지점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마이코는 주변의 바위를 둘러보며 돌아다녔다,
"르네상스 이후에 만들어진 동굴 안에는 물속에서 움직이는 인형이 놓여 있었다고 해. 물론 다양한 장식도 가득 차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또 종교적 수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는 벽면에 많은 불상 등이 새겨져 있었어.”
"이 동굴 안에 그런 것이 있나요?"
"없군. 보이지 않아. 그냥 맨땅과 흙이 있을 뿐."
"이상한 말이지만, 이 동굴에서는 실용주의적인 냄새가 나네요."
마이코는 바위 틈새에 몸을 넣었다.
"오각형의 미로에는 본 길에 대해 여섯 개의 갈림길이 있어. 지금 막 여섯 번째를 지나고 있는 중이야. 내 생각대로라면 드디어 출구가 나오는 거지."
하지만 그 출구에 도달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길은 쉴 새 없이 굽이굽이 이어졌고, 좁은 곳은 몸을 옆으로 눕혀야만 빠져나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소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은 처음에 돌계단을 내려왔던 곳과 느낌이 많이 비슷했다. 넓이도 거의 비슷했고, 위로 올라가는 가파른 돌계단도 있었다. 토시오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닫는 레버가 없어."
마이코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마이코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으로 보였다. 마이코의 말대로 돌계단 옆에 있던 막대가 이 방에는 없었다. 막대기뿐 아니라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장치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올라가 보자"
마이코가 먼저 서서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돌계단 중간쯤에 뾰족뾰족한 흰 풀이 자라고 있었다.
돌계단을 다 올라간 곳에 두꺼운 판자로 된 문이 있었다. 녹슨 철제 틀이 끼워져 있고, 나무 껍질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기름을 바른 흔적이 있네."
문의 경첩을 보고 있던 마이코가 말했다.
마이코는 문에 살며시 체중을 실었다. 문이 작은 소리를 냈다. 마이코는 촛불을 껐다.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보였다.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해."
마이코가 작게 말했다. 토시오는 시키는 대로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문 반대편 상황을 살폈다.
마이코는 몇 숨을 쉬고 나서 문을 반대편으로 밀었다. 문은 무거운 소리를 내며 크게 움직였다. 문 반대편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희미하고 먼지가 자욱한 방이었다. 사방이 거친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빛은 천장 가까이 열린 작은 사각형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토시오는 어렸을 때 친구 집에 있던 낡은 창고를 떠올렸다. 바로 그 창고 안과 똑같았다. 낡은 인형, 제등, 검은 상자 더미, 큰 화로 등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토시오는 무심코 방금 들어온 문을 닫았다.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문이 스르륵 사라졌다. 문은 방에 면한 쪽이 사방의 벽과 같은 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당황하여 문을 찾으려고 벽을 쓰다듬고 돌렸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손바닥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문이 없어졌어요."
토시오는 마이코에게 말했다. 마이코는 벽의 위아래를 살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마이코는 문이 사라진 곳의 기둥을 세게 잡아당겼다. 기둥과 벽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 뒤에 기둥과 벽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마이코는 문을 다시 닫으면서 오른쪽 벽에 주목했다. 이 벽이 미닫이문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동굴의 출입구는 모두 동굴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눈을 속이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마이코가 벽에 손을 얹고 힘을 주자 벽이 옆으로 움직이면서 좁은 틈이 나타났다. 마이코는 틈새에 눈을 대고 반대쪽을 들여다보았다.
"내 생각대로군. 데츠바의 방이야."
마이코는 벽을 크게 당겼다. 벽의 구멍 맞은편에 갈색 종이가 걸려 있었다.
"아무도 없나요?"
토시오는 마이코의 대담함에 놀라며 말했다.
"여기 있는 종이는 족자야. 이곳은 데츠바의 다실 다다미방 안쪽이고. 이 족자는 산수화지. 그날 나는 이 방에서 산수화를 보며 데츠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
마이코는 족자를 치우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이코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뒷모습으로도 확연하게 느껴졌다.
"어?"
마이코는 신발을 걷어차고 구멍을 빠져나갔다. 토시오도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여섯 장의 다다미방. 검은색으로 칠해진 책상 위에 데츠바가 엎드려 있었다. 데츠바는 시커먼 피를 토해내고, 열린 눈은 완전히 생기를 잃은 듯 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3/05/27

당신의 과녁 - 고태호 : 별점 2점

당신의 과녁 5 - 4점
고태호 지음/3rdpost(써드포스트)

너무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스무살 청년 최엽은 연쇄 살인범 석규남의 함정에 빠져 누명을 뒤집어 썼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은 뒤 17년 후 풀려났다. 석규남이 노환으로 죽고, 남은 가족들이 발견한 증거를 제출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17년 만에 돌아온 세상은 지옥과 같았다. 연인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가족은 생업을 잃고 갖은 욕을 먹었으며, 어머니는 무죄를 탄원하는 거리 시위를 하다가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였다. 이에 최엽은 연쇄 살인마의 손녀를 납치해 자기와 똑같이 17년간 감금하기로 결심했다.
죄책감으로 최엽의 협력자가 된 경찰과 당시 기자, 그리고 여동생과 절친 3인방은 최엽의 계획을 알고나서, 17년 감금할 시설 공사를 한다는 핑계로 최엽과 주말마다 어울렸다. 사회의 따뜻함, 가족의 온정 등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엽은 석규남의 손자 - 납치 대상의 남동생 - 으로부터 자기가 무죄라는걸 알고도 그 가족들이 증거 제출을 10년이나 미루었다는걸 알고난 뒤, 납치를 결행했다. 그러나 납치 대상이 여성 연쇄 납치범 일당에 납치당하는걸 목격한 최엽과 일행들은 납치범들을 뒤쫓아 결국 그들을 체포하고 납치 대상을 구해냈다....


간략한 줄거리 소개만 보고 혹해서 보게 된 웹툰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최엽의 심리 묘사입니다. 뎃셍력이 별로라 인물 형태가 계속 깨지며, 모든 묘사에서의 디테일이 부족해서 작화는 등 좋은 편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미묘한 심리 묘사는 놀라울정도로 탁월했습니다. 최엽이 분노하는 장면은 묘사의 달인 윤태호의 <<야후>>를 보는 듯한 섬찟함마저 느껴졌으니까요.
만화의 컷 구성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도 돋보입니다. 엣 연인을 다시 만나 각자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게 마지막 컷에서 드러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기대했던 복수극으로는 뜨뜻미지근한 탓입니다. 최엽의 복수 외길 전개가 아니라, 최엽이 친구들을 만나 다시 흉금을 터 놓게 되는 과정처럼 주변 인물들과 관계 복원을 이루는 출소자의 사회 적응기, 주변 인물들과 여러가지 즐거운 추억을 쌓는 일종의 일상 시트콤, 거기에 연쇄 부녀자 납치범들과 대결하는 액션 추적극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런 곁가지 이야기들이 비중만 놓고 보면 복수 자체보다 더 커요.
게다가 복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납치하려던 여자를 도리어 구해주게 된 뒤, 최엽이 복수를 포기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더 큰 악을 만나서 그들을 물리치고나니 모든게 허탈해졌다는 건지, 아니면 주변 사람들을 더 이상 위험에 빠트릴 수 없었던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이 과정에서 석규남 가족의 진심어린 사죄도 없고요.
여기까지는 그렇다쳐도,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뒤 식물인간이 되었던 어머니가 깨어난다는 말도 안되는 해피엔딩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너무 뜬금없었어요. 최엽이 겪은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이 정도는 줘야지!라는 작가의 의도일까요? 이런 애매한 해피엔딩보다는 차라리 화끈한 복수가 더 맞는 방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최엽 캐릭터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90cn가 넘는 거구의 근육질로 묘사되는데, 딱히 대단한 전투력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두뇌가 비상한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모은 것도 아니라서 강력 범죄를 계획하는 인물로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맨몸 운동을 조금 한 정도로 세상과 맞서 싸우기는 어렵지요. 경찰과 기자라는 조력자, 그리고 죄책감을 느낀 검사의 유산 - 납치범을 가둘 일종의 별장 - 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어요. 흥미진진한 전개를 위해서는 최엽이라는 인물에게도 보다 설득력을 부여했어야 했습니다.
납치 계획도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납치에 성공했었더라도 체포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납치가 핵심인 범죄물이 아무리 아니더라도,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기대했던 복수극이나 범죄 스릴러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더 글로리>> 류의 화끈한 복수극을 기대하고 보신다면 실망하실겁니다.

2023/05/26

청동 램프의 저주 - 존 딕슨 카 / hansang(?) : 2.5점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고학자 길레이 교수가 전갈에 물려 죽은 뒤, '무덤의 저주'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고인이 세반 백작과 팀을 이루어 이집트에서 헬리홀 무덤 발굴을 진행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백작의 딸 헬렌 로린은 이집트에서 귀국하던 중, 점술사 림베이로부터 램프를 돌려주지 않으면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거라는 예언을 받았다. 청동 램프는 출토 유물 중 하나로 그녀가 이집트 정부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물건이었다.

귀국 후 헬렌은 연인 키트, 친구 오드리와 함께 저택에 도착한 뒤, 램프를 장식하겠다며 혼자서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헨리 메리벨 경은 마스터스 경감과 함께 수사에 착수했고, 그날 함께 사라졌던 전 백작부인 초상화 행방을 쫓다가 헬렌이 초상화를 가지고 골동품상 맨스필드 부인의 가게에 방문했다는걸 알아냈다.
H.M 등과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저택으로 돌아온다던 세반 백작마저도 저택 안에서 사라졌다. 백작의 외투 등이 남아있던 자리에는 저주의 청동 램프가 놓여 있었다.

연이은 인간 소실로 당혹해하던 키트 앞에 헬렌이 나타나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지만, 뒤이어 들어딕친 경찰 앞에서 다시 사라졌다. 경찰은 건축가까지 불러와 은신처에 대해 치밀한 조사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다음 날, 헨리 메리벨 경은 모든 관계자들을 저택에 소집했다. 그리고 진상을 밝히는 추리쇼를 펼쳤다. 헬렌은 은신처에 숨어있던게 아니라, 집사 벤슨의 도움으로 하녀로 위장하고 있었다!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은 존 딕슨 카의 장편. 1945년 발표작입니다. 일본 아오조라 추리문고본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정말 오래 걸렸네요. 한 달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오컬트와 본격 추리가 결합된 작품입니다. 작가의 특기이기도 하지요. 그동안의 오컬트 소재는 중세 전설에 관련된게 많았었는데, 이번에는 이른바 '미이라의 저주', 그리고 저주로 사람이 사라져버린다는 인간 소실 트릭이 함께 엮여 전개됩니다. 폐쇄된 대저택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상황이니, '밀실의 대가'로서의 실력도 발휘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기대보다는 많이 지루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헬렌의 소실이, 흥미를 자아내지 못하고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못한 탓이 가장 큽니다. 헬렌은 차에서 내린 후, 저택 자기 방 벽난로 윗 선반에 램프를 장식해 놓겠다고 먼저 들어갔습니다. 키트와 오드리는 밖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고요. 그런데 집사 벤슨을 포함한 저택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헬렌을 보지 못했고, 저택 밖에서 일하던 수 많은 사람들도 헬렌이 나가는걸 보지 못했다고 했죠. 
그런데 아무도 문을 감시하거나 헬렌의 모습을 쫓고 있었던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라졌다"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아요. 특히 저택 밖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쁜 와중이었다면, 누군가 나가는건 충분히 놓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의 눈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세반 관에 살고 있는 헬렌이라면 어디로 몰래 나갈 수 있는지, 아니면 어디서 몸을 숨기고 있을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테고요. 그래서 여러모로 대단한 사건으로 생각되지 않았어요. 
뒤이어 벌어진 세반 백작 소실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작이 들어온걸 실제로 본 사람은 없고, 특별한 감시도 없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만들어진 상황일 가능성이 높지요. 실제로도 샌디 로버트슨이 백작의 차를 몰고 들어온 뒤, 옷가지를 서재에 던져두었을 뿐이었죠.

다행히 헬렌이 키트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던 두 번째 소실부터 재미있어지기 시작합니다. 마스터스 경감의 지시로 경찰이 모든 통로를 막은 상태에서, 철저하게 조사를 벌였지만 결국 헬렌을 찾아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 소실이 일어난 것이지요.
여기서 사용된 트릭은 헬렌이 하녀로 변장하고 있었다는겁니다. 현실적이라는 점은 좋아요. 
이 작품보다 10년은 앞서 발표되었던 여사님 작품에서도 비슷한 트릭이 활용된게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처럼 "인간 소실"용으로 사용된건 아니었으니, 나름 신선한 느낌을 전해 주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를 위한 단서들도 모두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헬렌이 저택으로 들어올 때 차에서 떨어트린 담배를 짚기 위해 허리를 숙였던 이유는? 이미 고용인들에게 하인으로 소개되었던 헬렌을 관리인이 알아볼까봐였습니다. 헬렌이 다시 나타났을 때 비옷을 입고 단추도 모두 채웠던 이유는? 속에 하녀복을 입고 있어서였습니다. 헬렌이 도착하는 날, 모두가 바쁜 와중에 휴가를 낸 하녀도 한 명 있었고요. 그 외에 이런저런 단서와 복선들로 트릭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초상화가 없어진 사건도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헬렌이 선대 백작 부인과 꼭 닮았기에, 그 초상화를 치워버릴 필요가 있었던겁니다.
공범(?) 벤슨이 이를 도왔다는걸 알려주는 단서들도 꼼꼼히 삽입되어 있습니다. 헬렌이 언제 도착하는줄 몰랐다는 벤슨이 마침 딱 맞춰서 꽃으로 화병을 장식했던 것 처럼 말이지요. 불가능 범죄 추리물의 대가다운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하지만 현실적이며 공정할 뿐, 높은 점수를 줄 트릭은 아닙니다.  H.M.의 말대로 모든 신문에서 저주에 대해 떠들며 헬렌의 사진을 실었는데, 하녀로 변장한 헬렌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단점이 치명적인 탓입니다. '헬렌은 사진과 실물이 굉장히 다르다!'는걸 이유로 내세우는데, 헬렌을 사진으로만 보았던 쥴리아 맨스필드가 헬렌을 알아보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키트나 오드리 등 실제로 헬렌을 보아왔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까지 숨어있기도 쉽지 않았테고요.
게다가 세반 백작 소실 사건은 앞서 말했듯 딱히 트릭은 없습니다. 경찰이 출입구를 감시하지 않아서 가능했을 뿐입니다.

헬렌이 사라졌던건 '저주'라는 뜬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한 연극이었다는 동기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인간 소실 사건을 언론에서 크게 다루게 한 뒤, 나타나서 '이건 모두 연극이고 저주 따위는 헛소리다!' 라고 말할 셈이었다는데, 이럴거라면 주변 인물들이나 저택 사람들에게 트릭을 써 가면서까지 몸을 숨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진상이 공개되어 봤자, 일반 대중들은 저택 사람들이 한통속이었다고 생각할게 뻔하잖아요? 게다가 잘못된 소문과 정보를 진실로 바꾸는건 굉장힌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애초에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는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그냥 연극따위 벌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게 훨씬 나은 방법이었습니다.
샌디 로버트슨이 백작을 죽이려 했다는 동기와 상황도 별로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샌디는 헬렌이 사라졌을 때 카이로에 있었으니, 백작이 사라져도 자기가 의심받지 않을 거라 여겼다는데 말도 안됩니다. 두 사건을 함께 엮어서 볼 이유는 없을 뿐더러, 당시 백작 옆에 있었던 사람은 샌디 뿐이라서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샌디가 빼돌린 유물 문제는 관련자들 수사만 해도 금방 알 수 있었을테고요. 분명 살인 미수범인 샌디를 백작이 그냥 놓아 보내준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국내 미발표 소개작을 완독했다는 기쁨은 크지만, 대표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처집니다. 번역을 시도해 볼 까 했는데, 그럴 수고를 들일 가치는 없네요.

2023/05/25

에도가와 란포상 베스트 10 :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부르는 미스터리로의 초대장 - 柳町正蔵

일본의 주간지 MONO에서 연재되는 柳町正蔵의 미스터리 관련 칼럼인 '미스터리 캐스킷 (ミステリー・キャスケット)' 지난 과월호를 읽다보니 재미있는 주제가 있어 번역해 보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엉망인 번역이지만, 모쪼록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매년 여름 더위가 조금 누그러지는 9월 중순, 「에도가와 란포상」수상작이 서점에 진열된다 (올해는 제반 사정으로 9월 말이었다). 내 생일 가까운 날짜인 탓에, 발표와 동시에 일찌감치 수상작을 사서 읽는건 매년 개인적인 행사로 삼고 있다. 만약 그 해 작품이 별로라면 그 해 전체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하다. 
올해로 제66회를 헤아리는 이 상은 1954년 에도가와 란포가 창설했으며, 3회부터 신작 장편소설을 모집해서 최종 후보 4, 5편 중 베테랑 작가 5명이 선정한 최고 작품에 상을 수여한다는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일반 모집 형태라 이미 작가로서 데뷔한 사람도 응모할 수 있으므로, 특정 해에는 고급스러운 작품이 많이 응모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신인 추리작가의 등용문적 성격이 강하다. 주요 수상작가로는 니시무라 쿄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 쿠리모토 카오루, 히가시노 게이고, 이케이도 준 등 당대의 빅네임이 줄을 잇는다. 야마무라 미사나츠키 시즈코는 몇 번이나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고, 나카이 히데오의 대표작 「허무에의 제물」도 수상을 놓쳤을 정도이다. 지금은 예전만큼 주목도가 높지는 않지만 수상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건 분명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미스터리계 최고의 어워드 중 하나이다.
그럼 여기서 2020년까지의 수상작 총 71편 중 (1957년~2020년. 수상작 없음이 4회. 2편 수상이 11회)  완전히 개인적인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을 선정해본다.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
  • 제10위 「고양이는 알고 있다니키 에츠코 (제3회/1957년). 쇼와 30년 당시, 추리 소설 팬을 10배로 불렸다는 일본의 크리스티의 라이트 미스터리.
  • 제9위 「천사의 나이프야쿠마루 가쿠 (제51회/2005년). 예선부터 최종 심사까지 거의 일사천리로 수상한, 소년법 본연의 자세를 묻는 사회파 문제작.
  • 제8위 「어둠 속에 풍기는 거짓말」시모무라 아츠시 (제60회 / 2014년). 시력을 잃은 남자가 친형 출생의 비밀을 쫓는 서스펜스. 10년에 한 번 있는 걸작이라는 평판.
  • 제7위「암갈색 파스텔」오카지마 후타리 (제28회/1982년). 2인조 작가의 경마 미스터리. 아마추어 여성 탐정 콤비의 활약이 신선!
  • 제6위 「샤라쿠 살인 사건」타카하시 카쓰히코 (제29회/1983년). 수수께끼에 싸인 전설의 우키요에 화가 샤라쿠의 정체를 밝히는 와중에, 학계에 소용돌이치는 권력과 욕망을 그리다.
  • 제5위 「거대한 환영」 도가와 마사코(제8회/1962년). 남자 엄금의 아파트에서 전개되는 인간군상. 란포상 사상 최고 걸작으로 불리는 스릴러.
  • 제4위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고미네 하지메 (19회/1973년).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작가를 지향하는 계기가 된, 어두우면서도 경쾌한 청춘 추리물의 금자탑.
  • 제3위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4회/1995년). 일본인 감성의 하드보일드. 주인공 바텐더가 만드는 핫도그가 맛있을 것 같다.
  • 제2위「13계단」타카노 카즈아키 (제44회 / 2001년).  가석방중인 청년과 고독한 교도관이 사형수의 누명 벗기기에 도전하다. 긴박한 타임 리미트가 존재.
  • 제1위「사루마루 환시행」이자와 모토히코 (제26회/1980년) 현대의 대학생이 젊은 날의 오리구치 노부오와 함께 펼쳐나가는 SF+역사+암호가 뒤섞인 전기 미스테리.
'사루마루 환시행'은 그 시마다 쇼지의 명작 '점성술 살인사건'을 이긴 수상이라는 훈장도 받았다.
일본 추리 작가 협회의 사이트에는 심사위원의 선정평이 실려 있어, 선택된 포인트를 잘 알 수 있다 (단 스포 주의). 선정평이 매서운 것은 매번 있는 일로, 특히 낙선작에는 "추리소설로 통하지 않는다.", "설명이 너무 서툴다." "응모자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것 같다." 등 재기불능이 될 것 같은 신랄한 코멘트가 많다. 수상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은 물론이고 심사위원과의 궁합도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2023/05/22

2023.05.16 ~ 05.21 두산 베어스 감상


주중 키움 원정 - 주말 KT 원정 3연전
성적 : 3승 3패

좋았던 점
  • 지난주 대비 살아난 타선
  • 최원준 선수 첫 승과 알칸타라 선수의 쾌투
  • 필승조 (특히 정철원 선수)의 적절한 휴식

나빴던 점
  • 무너진 4, 5 선발 및 대체 선발
  • 전경기 출장에 거의 전 이닝을 포수로 소화하고 있는 양의지 선수
  • 살아나지 못한 김재환, 강승호 선수

총평과 이번주 예상
이번 주에도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1, 2선발의 눈부신 호투에 더해 대체 선발 경기를 이긴 덕분입니다. 특히 2연패를 당하고 있을 때 8이닝 1안타 쾌투를 선보였던 알칸타라 선수가 큰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필승조에게 편안한 휴식까지 제공해 준, 정말로 에이스다운 피칭이었어요. 안정감있는 투구로 뒷문을 잘 막아준 홍건희 선수와 언제나 믿음직한 김명신 선수도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타선도 지난주보다는 확실히 좋아졌습니다. 양의지 선수를 중심으로 한 중심 타선은 득점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지요. 무엇보다도 쳤다하면 장타인 로하스 선수의 영양가있는 장타가 볼만했습니다. 좌투에게 약한 약점은 명확해서 중심타선에 배치가 되지는 못하지만, 하위타선에서 두산에게 부족했던 장타력을 잘 보완해주고 있어요. 송승환, 양찬열 선수 등의 활약도 좋았고요.

그러나 4, 5 선발인 김동주, 최승용 선수는 부진했고, 계투진에서도 박치국 선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젊은 선발 투수들은 어차피 상수가 아니었다 치더라도, 제구가 되지 않는 박치국 선수는 필승조로 쓸 수 없습니다. 감독이 빨리 결단을 내려주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중심 타자인 김재환 선수는 볼성사나울 정도입니다. 지명타자로만 출전하고 있는데 5월 한달동안 타율은 2할 초반에 홈런도 하나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도 4안타에 그쳤고요. 수비도 하지 않고 발도 느린데다가 받는 연봉을 생각하면 이 정도 생산력은 곤란합니다. 부상이 있다면 차라리 나오지 않는게 팀에는 더 도움이 될거에요. 강승호 선수도 마찬가지, 수비 때문에 이유찬 선수에게 완전히 주전 자리를 뺏긴 상황인데, 그나마 선발 출전했던 일요일 경기에서도 4타수 무안타에 그치는 등 5월 한달 동안 1할대 타율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장타도 없고요. 이래서야 백업으로도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도 지난 주는 제 예상보다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이번 주는 진짜 위기입니다. 이번 주 예정된 삼성 - SSG 홈 3연전 중 하위권 팀인 삼성전에 대체 선발과 4, 5 선발이, 1위팀 SSG와의 경기 때 1, 2 선발이 등판하게 됩니다. 즉, 하위권 팀과 경기에서 대체 선발과 두 명의 젊은 선발 최승용, 김동주 선수가 또 부진하면 긴 연패에 빠질 수도 있는 일정입니다. 그나마 곽빈 선수가 복귀한다지만, 부상 복귀이니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고요.
그래서 이번 주는 알칸타라, 최원준 선수 경기는 확실히 잡고, 다른 경기는 상대팀 선발과 경기 상황을 보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지는 경기에서는 양의지 선수도 빨리 빼 주고요. 언제나 이야기하지만, 질 때도 잘 져야 합니다.

이번 주 예상은 2승 4패입니다. 3승 3패를 기대하지만 여러모로 힘들겠지요. 오랫만에 선발 등판하는 장원준 선수가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만을 바랍니다.

2023/05/21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1. 베이지 않는 말
에그가 하치오지(八王子)에서 사가미호(相模湖)를 왼쪽으로 보고 오쓰키(大月), 사사코(笹子) 터널을 지나 코후(甲府)에서 주오자동차도로 나올 때까지 마이코는 뒷좌석에서 잠을 잤다.
"나는 잠을 잘 자는 사람이야."
그 말대로, 그녀는 조금만 틈이나면 정말로 기분 좋게 잠들곤 했다.
스와코 호수에서 밤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짙은 구름 사이로 하얀 호숫가에 방사형 빛이 비쳤다. 시오지리에서 북쪽으로 마츠모토로 향했다. 마츠모토에서 국도 158호선을 타고 서쪽으로 나아가면 아즈미(安曇)의 댐군을 통하며, 왼쪽으로 노리쿠라(乗鞍)산, 오른쪽으로 야리가다(槍ヶ岳), 호다카(穂高)의 산맥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사카마키, 히라유 온천을 지나면 히다이였다.
구름이 흐려지고 안개처럼 차가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에그는 깊은 산속을 지나 에치츄 도카이도에서 신토우 강변을 따라 히다 가도로 향했다. 도야마에 도착한 후 호쿠리쿠 자동차 도로를 달리니 어느새 비는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에그는 쇼와강을 건너 후카야 온천을 거쳐 가나자와에 들어섰다.
처음 보는 마을이었다. 아사노 강과 사이 강 사이에 펼쳐진 시가지에는 오래된 민가와 상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용수와 흙담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가가 백만석 성곽 마을의 풍격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점심은 고린보(香林坊)의 우동집에서 먹었다. 식사를 마친 마이코는 지도를 꺼내들었다.
"오노에 갈 거야."
마이코가 말했다.
"오노 벤키치, 본명은 나카무라 벤키치. 오노에 살면서 오노 벤키치라고 불렸어. 오노초 덴센지(伝泉寺)에 벤키치의 무덤이 남아 있지."
토시오는 지도를 보았다. 가나자와 성터, 겐로쿠엔(兼六園), 혼간지(本願寺), 노마치(野町), 데라마치다이(寺町台) ......
오노는 가나자와 시가지에서 벗어나 동해에 면한 가나자와 항구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가와호쿠가타에서 흐르는 오노가와 사이카와 강 하구에 끼여 있는 오노의 바로 옆은 카네이시(金石)로, 제니야고헤에(銭屋五兵衛)의 유품관이 있었다.

일본해는 거칠게 파도가 일고 있었다. 묵직한 구름의 움직임, 하얀 거친 파도, 검은 항구도시의 지붕.
"호쿠리쿠의 바다는 이제부터가 진짜야."
마이코가 말했다.
덴센지에 있는 벤키치의 무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무덤은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하나는 작고 낡은 비석으로, 벤키치의 이름은 알 수 있었지만 뒷면의 비문은 거의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새로 지은 것으로 보였는데, 묘비명은 같았지만 비석에 일월오봉도 문장이 새겨져 있는 훌륭한 비석이었다.
덴센지 주지스님은 최근 가나자와에 사는 한 독지가가 벤키치 기념관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만 기념관이라고 해도 건물 한 칸이 전부지만, 흩어져 있던 벤키치의 유품이 꽤 많이 모였으며, 열렬한 벤키치 팬이라서 멀리서 온 손님이라면 틀림없이 반가워할 것이라고 했다.

사설 오노 벤키치 기념관 관장 다카라다 고로(宝田五郎)는 일흔이 넘은,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그는 의사였지만 지금 병원 일은 대부분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좋아하는 연구를 마음껏 하고 있다고 했다.
"벤키치의 역립 인형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당장 달려가서 보고 싶었어요."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접실을 개조한 기념관 관장실의 방 전면에는 커다란 패널 세 장이 걸려 있었다. 모두 오래된 사진을 복제한 것으로, 표면에 얼룩과 벗겨짐이 눈에 띄었다. 그 양옆에는 유리 케이스가, 방 중앙에는 응접 세트가 놓여 있었다. 간혹 소문을 들은 애호가들이 관람하러 오면 다카라다 씨가 반갑게 맞이하며 차를 대접하기 위한 용도였다.
"그 주지스님께서 사설 기념관이라고 하셨나요?"
다카라다는 반쯤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기념관이라고 하는건 사실 부끄럽습니다. 유품도 적고, 벤키치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유리 케이스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다테에보시(立烏帽子)에 산바소(三番叟) 의상을 입은 산바소 인형이었다. 이 인형은 태엽 장치로 큰 원을 그리며 춤을 추면서 움직인다고 했다.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있는 가라코 인배대는 고쇼차 위에 잔을 올려놓으면 두 명의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간다고 했다. 그리고 유명한 차 나르는 인형 ...... 노시메(熨斗目)의 옷에 금란(金襴)의 하카마(袴)를 입고, 눈이 동그란 동자(童子)로, 양손에 큰 잔을 들고 있었다. 의상은 곳곳이 낡았지만, 얼굴에 칠한 호분(胡粉)에서 백 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전에도 대학 교수님이 오셨어요. 내부를 꼼꼼히 조사하고 돌아갔는데, 정교함에 혀를 내둘렀지요."
다카라다 씨는 자기 일인 양 좋아하며 말했다.
다카라다의 말에 따르면, 유물이 적다고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한 번에 다 볼 수는 없을 정도라고 했다. 금속으로 만든 원경(遠鏡), 안경, 전기 텔레비전, 사진기, 자명종, 점화기, 라이터, 권총, 도자기 자동 분수대, 증기선 모형 ......
또한 벤키치는 유리 세공과 조각, 대나무 세공과 금속 가공 기술도 뛰어났다고 했다. 다양한 공예품들을 살펴보니, 카라쿠리는 엄청난 지식과 고도의 기술로 형성된 벤키치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인형 제작자가 아니야. 소우지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런 정교한 작품을 만들어낸 오노 벤키치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마이코는 수많은 벤키치의 작품 앞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렇죠. 이토록 뛰어난 천재인데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첫째, 벤키치에 대해선 너무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어요. 비범한 학예를 가졌으면서도 평생 어느 번에서도 벼슬을 하지 않고 호쿠리쿠에 은거하다 죽은 기인(奇人)이니......."
"교토의 깃털 공예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호오, 잘 아시는군요. 어렸을 때부터 시조류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더군요. 스무 살 무렵에는 나가사키에 건너가 서양화도 배웠다고 합니다. 벤키치에 대해서는 이시카와현 출신의 정치가 나가이 유타로(永井柳太郎)씨의 매우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연구를 통해 벤키치가 나가사키에 있었던 시기와 일본 서양학에 가장 큰 공헌을 남긴 시볼트 박사가 나가사키 데지마에 부임한 시기가 같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여기서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 증거는 찾을 수 없었지만요. 추측에 불과하지만 천문학에서 역법, 의학에서 항해술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은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시볼트는 간첩혐의로 고발당했었고, 그 결과 네덜란드로 떠나 나가사키에서 모습을 감췄지요. 벤키치는 그 후 대마도, 조선으로 건너갔고요. 이 역시, 시볼트 사건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귀국 후에는 기이(紀伊)에서 기마술, 포술, 산술 등을 가르쳤습니다."
"벤키치가 오노에 살게 된 계기는요?"
마이코가 물었다.
"덴포 2년, 벤키치가 서른 살이었을 때입니다. 성곽 마을의 외곽에 있는 오노 마을은 교토에서 결혼한 아내 우타의 생가가 있는 곳이었어요. 그 후 메이지 3년, 69세의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 벤키치는 이 땅을 떠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그 땅도, 바닷모래에 파묻혀서 집도 없어졌지만......"
그리고 다카라다 씨는 정면의 벽에 걸린 세 장의 패널을 가리켰다. 가운데 한 장이 오노 벤키치의 사진이었다.
큰 눈과 콧날, 뼈가 굵은 얼굴이었다. 개국론자로서의 강한 신념이 그 풍모에서 느껴졌다.
"오른쪽 사진은 벤키치의 아내 우타 씨입니다. 덴포 말기, 벤키치가 직접 만든 사진기로 촬영한 것이죠. 당시 사진은 기독교의 요술이라며 벤키치가 사진을 찍는 것을 다들 꺼려했죠. 부인도 많이 힘들었을거에요."
"벤키치는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취미도 있었군요."
"그래요. 깊은 지식과 정교한 기술, 그것만으로는 카라쿠리 인형을 만들 수 없죠.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꼭 필요하거든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번주가 벤키치에게 명령해 차를 나르는 인형을 만들게 했어요. 인형은 예의상 영주 앞에 차를 가져다 주었죠. 번주는 문득 부채로 인형의 머리를 두드려 보았어요. 그러자 인형은 두 눈을 번쩍 뜨고 갑자기 허리춤의 칼에 손을 얹어 자르려고 했습니다. 영주가 깜짝 놀라서 벤키치에게 물었더니, 벤키치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인형에 미리 장치를 해 두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번주는 분명 요술이라고 생각했겠죠."
"이런 이야기라면 또 있습니다. 벤키치는 술장수 인형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어느 술집 앞에서 톱니바퀴 소리가 들려서 보니 인형이 술병을 들고 걸어왔다고 합니다. 술장수는 인형이라며 술의 양을 줄였는데, 인형은 술장수의 마음을 알고 움직이지 않았어요. 술장수가 어쩔 수 없이 술의 양을 가득 채워 주자 인형은 돌아갔다고 하고요. 이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어요. 인형은 술병이 일정한 무게가 되지 않으면 마개가 빠지지 않고, 기어가 움직이지 않도록 만들어졌을 거에요."
"원리는 차를 나르는 인형과 같다는 거군요"
"차를 나르는 인형에 대해서는 벤키치도 자필 설계도를 남겼는데, 원본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본을 보여드릴까요?"
다카라다 씨는 유리 케이스에서 한 권의 제본된 책을 꺼냈다. 제본된 표지에 '동시궁록(東視窮錄)'이라고 적혀 있었고, 내용 중 한 장에 정밀한 차 나르는 인형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용은 자동 인형 뿐만이 아니었다. 시계, 사진기, 화학약품, 색유리 제조법부터 자동분수대 내부, 볼타식 파일 도해 등이 세세한 설명과 함께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이코는 그 한 장 한 장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키치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정이 묘한 힘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학력과 창의력이 뛰어났있으니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많았겠지요?"
마이코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계속해서 벼슬길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벤키치입니다. 그래서 제자도 아주 적었어요. 불과 대여섯 명도 안 되는 제자 뿐이었지요, 카라쿠리는 요네하라 린하쿠에게, 의술은 다카라다 이스케에게 가르쳤어요. 다카라다 이스케가 제 증조부이십니다."
"그래서 벤키치의 유품을 많이 가지고 계신 거군요."
다카라다는 수염을 잡아당겼다.
"벤키치는 매독을 치료하는 비법을 알고 있었어요. 수은을 이용한 요법입니다. 벤키치는 은광 채굴에 종사한 적도 있거든요. 하지만 다카라다 이스케가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구한 기간은 극히 짧았어요. 가가번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지요. 즉, 기존의 집정관인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가 죽고 반대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젠고(銭五)씨가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죠."
"잠깐만요."
마이코는 학생처럼 손을 들어 다카라다의 말을 가로막았다.
"젠고 씨라고 하면 그 비극의 호상이라 불리는 제니야 고헤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가가, 카네이시의 호상 제니야 고헤에. 카네이시는 이 오노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럼, 오노 벤키치와 제니야 고헤에는 친분이 있었나요?"
"그렇죠. 벤키치와 젠고 씨는 함께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을 정도였으니까요."
다카라다는 세 장의 사진 패널 중 왼쪽 사진을 가리켰다.
"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 중 왼쪽에 있는 사람이 벤키치, 오른쪽에 있는 큰 사람이 젠고 씨예요."
토시오는 벤키치보다 더 큰 제니야 고헤에의 사진을 보았다. 다소 무뚝뚝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벤키치는 젠고 씨의 틀니를 만들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를 알면 알수록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고요. 특히 자신이 미국에서 구한 권총과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벤키치는 자신이 비밀리에 만든 지구본을 젠고에게 보여주기도 했어요. 벤키치는 젠고 씨이기 때문에 이런 물건을 보여준 것이겠지요. 실수로 지동설 따위를 입에 올리면 신변의 위협까지 받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도 벤키치가 만들어 젠고 씨에게 선물했다는 원안경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의 지식에 의존할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니야 고헤에는 오노 벤키치의 후원자였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벤키치의 지식을 빌리면서 약간의 금품이 오갔겠지만, 벤키치는 젠고 씨의 비호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벤키치의 가난을 본 젠고 씨는 쌀을 기부하겠다고 했지만, 벤키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젠고 씨는 거액의 재산을 모은 뒤에도 장작과 등잔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등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보통 거상이 되면 어처구니없는 유흥비, 쓸데없는 사치가 뒤따르기 마련인데, 그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과단성 있는 결단을 상훈으로 삼고 있을 정도입니다. 한편 벤키치도 골방에 틀어박혀서 문제가 생기면 며칠 동안 물건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즐거움은 고양이와 원숭이를 키우는 것 정도였다고 하고요. 이런 두 사람의 성격에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죠?"
"제니야 고헤에는 밀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네, 확실히 밀무역으로 재산을 모은 것도 사실입니다. 원래 젠고 씨의 집은 가나자와 항구도시 미야노코시(宮腰), 지금의 카네이시(金石)에서 환전상과 간장업을 하고 있었어요. 안에이 2년, 젠고 씨는 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열일곱 살에 가독(家督)을 이었고요. 아버지 밑에서 평범하게 가업을 이어받아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크게 달라졌어요.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서른 아홉이라고 하면 당시로서는 이미 한창 때는 진작에 지난 나이였을텐데..."
"그게 바로 젠고 씨의 비범한 점이죠. 그는 전당포에 있는 오래된 배를 개조해서 큰돈을 벌었어요. 당시에는 배를 새로 한 척 만들면 두 번의 항해로 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고 해요. 이를 계기로 젠고 씨는 해운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해운업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해난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바다 위에는 해적선이 출몰했죠. 하지만 수익은 엄청났어요. 젠고 씨의 배는 홋카이도의 해산물과 비료를 도호쿠로 운반하고 도호쿠의 목재와 호쿠리쿠의 쌀을 간사이로 운반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간사이의 잡화를 싣는 등 운송 이익 외에도 많은 거래가 얽혀 있었죠. 상술에 능했던 젠고 씨는 순식간에 거액을 벌어들였습니다. 이 젠고 씨의 재산에 눈독을 들인 것이 가가번이었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을 움직일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 거군요"
"가가번에서는 젠고씨에게 자꾸만 돈을 바치라고 강요했어요. 평범한 상인이었다면 두말없이 거절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젠고 씨는 그렇지 않았어요. 기꺼이 돈을 바쳤어요.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이것도 젠고씨의 상훈 중 하나였습니다. 공납금에 대한 보답으로 번의 물자 수송용 배를 한 척 맡을 수 있었고, 젠고 씨의 배는 곧바로 가가번의 공식 수송선이 되어 백만 석의 문장, 가가 매화 그릇을 염색한 깃발을 내걸고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가가번의 집정관은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였는데, 그와 손을 잡은 젠고 재벌은 흔들림 없이 성장해 나갔죠."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은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네, 천석선이 열 척. 오백 석선이 열한 척. 오백석선이 십일척. 크고 작은 배를 합치면 이백 척의 선주였고, 전국에 서른네 개의 지점이 있었습니다. 추정 자산은 삼백만 양이라고 하는데요."
"삼백만 양--"
"그렇다고 해도 감이 잡히지 않겠지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을 훨씬 넘을 겁니다."
"수백억!"
마이코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불과 3억 엔의 강도 사건이 시효가 지나기 전까지 일본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억도 새롭다.
"젠고 씨는 오쿠무라 히데미와 함께 밀무역도 하고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다케시마를 중심으로 한 조선 근해 무역, 카라우타의 산탄(山丹) 무역, 사쓰난(薩南)열도에서는 대영국 무역, 북해에서는 대러시아 무역. 멀리 북아메리카에서 남쪽으로 태즈메이니아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다고 합니다. 그 이면에는 벤키치의 원양 항해술, 천문학, 어학에 대한 조력이 있었을테고요. 또한, 젠고 씨는 다양한 과학 기계를 밀수입해 벤키치에게 사용법을 배웠을 겁니다. 덕분에 벤키치도 몰랐던 희귀한 물건에 대한 지식이 더욱 풍부해졌을테고요."
"여러 가지 과학 기계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마이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패널 사진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성장해나가던 젠고 재벌은 정말 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봉건제 하의 재력은 정치적으로는 정말 무력했음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었죠 ......"
다카라다는 수염을 몇 번이고 빗어 넘기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덴포 14년, 젠고와 함께 번영했던 가가번의 중신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젠고 씨는 71세였어요. 지금의 저와 같은 나이였죠."
다카라다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제니야 고헤에와 자신의 나이를 비교했다.
"당시 가가번에는 반대파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라고 해서 검은색 옷을 입고 다니고 있었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싶어 하는 모양입니다. 하여튼, 오쿠무라 히데미 사망 후 검은 하오리당의 쿠데타가 성공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젠고씨의 번(藩) 공식 상인 지위를 박탈한 거였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 재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젠고 씨는 어디까지나 상인일 뿐이었으니,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젠고씨가 좌절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다음에 정말 원대한 계획을 세우거든요. 그 유명한 하북 매립공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둘레가 26km, 약 2천6백 헥타르나 되는 곳을 20년 계획으로 매립해서 논을 만들겠다는 거죠. 이 공사가 완료되면 가가 백만석에 수만 석이 더 추가될 것이었어요."
"일흔일곱 살에 20년 계획이라니…… 정말 이 사람의 깊이를 알 수 없군요."
"공사는 가에이 4년에 착공했는데, 이게 정말 어려운 공사였어요. 게다가 매립으로 인해 생계가 끊어질 것을 우려한 어민들의 격렬한 방해가 있었습니다. 젠고씨의 가훈 세 번째는 '세인의 믿음을 얻아야 한다’였는데, 이 때 세인의 믿음을 얻는데 실패했던 것이지요. 과거 천보 대기근 때에도 쌀 수탈과 타 지역 유출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던 적이 있었는데, 매립 공사 시기에는 현지 노동력보다 임금이 싼 이주 노동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반감이 더욱 심해져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북 투독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독극물 투척 사건이라니, 하북에 독극물을 투척한 건가요?"
"네, 하북의 물고기만 죽으면 어민들의 반대 운동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셋째 아들 요가 독극물을 투척했다는 것입니다. 요가 석회에 냄새나는 물인 쿠사미즈, 기생충인 고나무시의 기름 등을 섞은 것을 몰래 하북에 투입했다고 했지요. 그 결과, 붕어, 고니 등이 죽어 떠올랐고, 이를 먹은 가마우지, 비둘기, 까마귀, 고양이와 개가 죽었고, 결국 인명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물고기를 먹은 십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어요. 가에이 5년, 젠고씨 가문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헤에 일가와 공사 관계자를 합해 51명이 감옥에 갇혔죠."
"하북에 독극물을 던지는 그런 무모한 일이 정말 있었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하북은 원래 수질이 좋지 않은 곳입니다. 수초가 너무 많이 번식하면 물이 썩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런데 왜 고헤에가 체포된 거죠?"
"가가번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젠고 씨를 마음껏 이용해, 말하자면 번 전체가 밀무역을 하고 있었죠. 그 밀무역이 막부의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만약 그것이 표면화되어 막부의 추궁을 받게 되면 번 존폐와도 관련된 사건이 될 테니까요. 번은 밀무역의 죄를 젠고 씨 한 명에게만 뒤집어씌워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지요. 마침 그 때 하북의 집단 중독 사망 사건이 발생했고, 젠고 씨는 번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 희생양이 된 겁니다."
"매립 공사는 중단되었고요."
"물론 그렇죠. 대체로 간척이라는 공사는 어려운 사업입니다. 같은 시기에 막부는 인바누마(印旛沼)의 간척에 착수했지만 이것도 실패했어요. 세 번째 실패였습니다.…….. 한편 막부에서는 젠고 씨의 밀무역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있었죠. 막부 내부에서도 대외무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였으니까요. 대정봉환이 눈앞에 다가왔고요. 일일이 밀무역을 감시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겁니다. 역사의 흐름은 이미 거기까지 왔던 거죠."
"번에게 시대를 판단할 힘이 없었던 거군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도 당시 상업 자본은 정치적으로 무력했습니다. 오사카의 요도야 다쓰고로(淀屋辰五郎), 하마다번의 아이즈야하치(会津屋八) 우에몬(右衛門)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사건의 결말은?"
"제니야 고헤에는 체포된 지 석 달째 되는 날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젠고는 80세였어요. 요와 그 형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지금도 십자가의 소나무라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제니야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고요. 이것이 젠고 재벌의 마지막이 되었죠. 벤키치가 51세 때였습니다."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노 벤키치는 어떻게 되었나요?"
잠시 후 마이코가 물었다.
"좋은 지인을 잃은 외로움은 누구보다 컸을겁니다. 사람을 피하는 성격은 점점 더 강해져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일개 촌부로서 일생을 마감했어요. 한편, 카라쿠리 기우에몬의 다나카 히사시는 젠고 씨가 투옥된 해에 교토에 기공당(技巧堂)이라는 가게를 열었죠. 이후 차근차근 키워나가 마침내 긴자에 다나카 제조소를 개업했고요. 그게 오늘날 도시바의 기틀이 된 겁니다. 같은 천재였지만, 인간의 일생은 정말 명암이 엇갈리는 법이에요. 이것은 그저 운의 좋고 나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츠루슈일록(鶴寿日録)에 따르면........"
다카라다의 장탄식을 멍하니 듣고 있던 마이코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츠루슈..…"
"츠루슈 일록. 아까 말씀 안 드렸나요?...."
"처음 듣는 말이에요. 그 츠루슈일록이라는 건?
"벤키치의 일기의 일부가 남아 있어요. 그걸 츠루슈일록이라고 합니다."
"왜 츠루슈인가요?"
"벤기치 씨의 호가 츠루슈였거든요. 또 이치토(一東)라는 호도 사용한 적이 있어요 ......"
"츠루슈에, 이치토 ......"
오노 벤키치와 오나와에 이주한 마와리 사쿠조와의 인연은 이미 분명한 것 같다. 사쿠조는 자신의 가게 이름을 '鶴寿堂(쓰루슈도)'라고 짓고 자신의 아들을 '東吉(도키치)'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연도, 암시도 아니다.
"오노 벤키치의 제자 중에 마와리 사쿠조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마이코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벤키치의 제자는 극소수에 불과한데, 마와리 사쿠조 ...... 라는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 츠루슈일록은 벤키치의 일생을 기록한 일기인가요?"
"아뇨. 아까 말씀드렸던, 오쿠무라 히데미 씨가 병사했던 해인 덴포 14년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벤키치의 유언대로 사후에 소각되었는데, 이 기록만 우연히 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볼 수 있나요?"
"복사한 것이라면 거기에 있습니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東視窮錄)'이 들어있던 같은 유리 케이스 안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다카라다는 츠루슈일록의 사본을 꺼내 마이코 앞에 놓았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과 같은 정갈한 서체로 세밀하게 쓰여져 있었다. 일상 기록이라 길지 않았다.

3일, 맑음 저녁에 복어국을 먹다
4일, 흐림. 베지 못하는 말 도면 그리기. 우타가 통풍을 일으켰다.
5일, 비, 도면 그리기를 계속.
6일, 비, 카네이시로 감. 회의 후 심사숙고 끝에 승인을 미룸.
7일, 맑음, 하루 종일 고민하다.
8일, 맑음, 도면은 진전이 없다.
9일, 맑음, 久右衛門(구우에몬)이 모리타치노치토세(森八の千歳, 일본 전통 과자)를 가져옴. 久右衛門(구우에몬)에게 일을 맡기고 계속 도면을 그리다.
10일, 맑음, 우타가 역립인형의 의상을 만듬.
11일, 맑음, 도면 그리기를 계속하다…..

마이코는 열심히 츠루슈일록을 읽어 내려갔다. 다카라다 노인은 다른 방에서 다도 도구를 가져왔다.
"이 일록의 앞부분에 '무자마(無斬馬)'라고 되어 있는데, 무자마(無斬馬)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마이코는 다카라다 노인이 가져온 차를 마시며 물었다.
"베이지 않은 말이란, 오래된 장난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카라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실물은 남아있지 않겠군요."
"네, 아쉽게도 실물은 남아있지 않아요. 하지만 어떤 장난감이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벤키치가 읽은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 서적에 그 장난감이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죠. 베이지 않는 말이란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만들었다는, 베어도 목이 다시 연결되는 목을 가진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되네요."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목?"
"이 말은 금속으로 만들어졌어요. 포도주 잔을 대면 안의 술을 다 마시죠. 장치는 놀라울 정도로 간단해요. 그냥 말의 중앙에 있는 관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말에게 술을 마시게 한 겁니다. 그 후 날카로운 칼로 말의 목을 베는데, 칼은 말의 목을 완전히 관통해 아래로 통과합니다. 그러나 베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목은 제대로 몸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잔을 대면, 말은 다시 포도주를 다 마시고요."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면 2천 년 전이겠군요."
마이코는 놀란 듯 말했다.
"헤론은 증기기관, 압착기, 압착 펌프, 사이펀의 원리를 발견한 사람으로 유명하죠. 동시에 많은 장치도 만들어 냈어요. 제단의 불로 춤추는 신상, 흐르는 물로 우는 새, 동전을 넣으면 일정한 성수가 흐르는 그릇, 이런 것들은 지금의 자판기의 원조겠지요."
"그럼,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말의 목의 장치는 뭐죠?"
"원래 말의 목에는 잘리는 절삭점이 있어요, 말의 목은 세 개의 고리로 연결됩니다. 칼이 첫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칼이 지나갈 길을 만들지만 목은 두 번째, 세 번째 고리가 지탱합니다. 칼이 두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원래대로 제자리에 연결되고요. 이렇게 해서 칼이 완전히 목을 통과해도 목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포도주가 지나가는 길의 개폐도 있어서 실제로 만들기는 아주 어려운 장치였습니다. 벤키치는 그 장치 제작에 도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기록에 따르면 벤키치는 구우에몬이라는 사람과 자주 만났는데, 어떤 사람인가요?"
"그건 예전에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다카라다는 잠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스즈키 구스에몬, 마에다 도사마모루(前田土佐守)의 직행(直行) 가신으로 30석 봉록 무사였습니다. 당시 30살을 갓 넘겼을 것입니다. 벤키치의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명입니다. 벤키치는 직행의 대우를 받았고, 그의 중재로 출입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즈키 구스에몬은 벤키치의 학문을 완전히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배우는 도중에, 봉록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죠."
"가가번의 개혁 때문이었나요?"
"아니요, 오쿠무라 히데미가 죽기 전입니다. 시녀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번에서 쫓겨났죠."
"그래서 구우에몬은 어디로 갔습니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다른 몰락 무사와 비슷한 길을 갔겠지요."
마이코는 아쉬운 듯 츠루슈일록을 덮었다.
"그런데 최근에 벤키치에 대해 조사하러 이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마이코는 가방에서 사진을 꺼냈다. 토모히로와 마사오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다.
"어?"
다카라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보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군요. 요즘은 옛날로 갈수록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데, 가까운 일이라면 어제의 일도 잘 떠올릴 수 없어요.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 사람들로부터 최근에 오노 벤키치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나 해서 여쭈어 보았을 뿐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네요. 물론 당신 같은 미인을 만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다카라다 노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노인의 틀니가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오노 벤키치 기념관을 나와서 젠고 유품관으로 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품관은 리모델링을 위해 휴관 중이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겠지."
마이코는 그리 아쉽지 않은 듯 말했다.
에그는 젠고 유품관을 나오자마자 고베의 보금자리인 혼류사 앞을 지나 그대로 해안으로 향했다.
마이코는 차를 세우고 쏟아지는 진눈깨비 길에 섰다. 검게 드리워진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제니야 고헤에의 동상이 거칠어지기 시작한 일본해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헤에는 손에 원안경을 들고 있다. 오노 벤키치가 최신의 지식과 뛰어난 기술로 만든 원안경일 것이다.
다카라다 노인은 두 사람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젠고 씨, 벤키치라고 불렀다.
고헤에가 팔십, 죽음을 앞두었을 때 그의 가슴 속에 떠오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토시오는 격렬한 파도소리를 들었다. 

간장병의 맛있는 책 - 스케락코 : 별점 2.5점

[고화질] 간장병의 맛있는 책 - 6점
스케락코 지음/대원씨아이

충동적으로 구입해 본 요리 + 일상계 만화. 제목처럼 간장병으로 그려진 주인공이 이런저런 요리를 해 먹는게 내용의 전부입니다.
특징이라면 레시피나 조리 방법이 상세하게 소개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간단하게, 대충 가정 요리 스타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브리또'를 만들어 먹는 에피소드는 '슈퍼에서 토르티야를 사서, 프라이팬에 구운 뒤 햄과 모짜렐라 치즈를 넣고 접어서 브리또를 만든다.'가 전부입니다. 이 정도라면 당연히 상세한 레시피가 필요할리 없지요. 밀가루를 반죽해서 직접 토르티야를 만드는 단계로 진화 하기는 하는데, 이건 일반 가정에서 따라할 이유는 없으니 역시나 상세한 레시피는 필요가 없고요.
이렇게 간단한 가정 요리들이 주로 소개되는 탓에, 쉽게 해 먹음직한 요리들이 많다는건 큰 장점입니다. 만두 속에 불린 찹쌀을 붙인 뒤 쪄서 만든다는 찹쌀 샤오마이는 저도 한 번 해 보고 싶더군요. 간단하게 만드는 야키메시 (볶음밥)이나 닭튀김으로 만드는 닭고기 덮밥 등 제법 자세한 레시피가 소개되는 요리들도 있는데 역시나 따라하기 쉬운 간단한 가정 요리 수준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몇몇 요리들은 맛이 상상이 잘 되지 않아서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먹지않는, 까나리 생물(生物)로 만드는 아히요처럼요. 큰 생물 멸치로 만들면 비슷할 것 같은데, 계절마다 멸치 축제를 여는 기장군에서 팔아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메밀 국수를 삶아 식힌 뒤, 토마토와 낫토, 튀김 부스러기와 김치에 김을 더한 뒤 국수장국으로 간을 한 토마토 메밀 국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맛일까요? 작가 왈 낫토와 김치와 토마토는 찰떡 궁합이라는데 과연 그럴지.... 그러나 김치와 물기를 뺀 요구르트를 더해 먹는 안주는 별로 시도해보고 싶지 않네요.

요리 만화답게 요리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는 부분도 일부 존재합니다. 콘 코르티야로 만든게 타코, 밀가루 토르티야로 만든게 브리또라는건 처음 알았거든요. 그 외에도 관서와 관동의 '타누키'는 전혀 다르다 - 관동은 튀김, 관서는 유부와 파 - 는 등의 정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건 단팥은 설탕이 단팥 양의 80% 정도라는 내용이었어요. 간장병이 직접 만든 단팥이 이 정도로 심지어 이것도 시판 단팥보다는 설탕을 적게 넣은거라니.... 팥빙수도 많이 먹으면 안되겠습니다.

요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가볍게 읽기 적당한 만화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5/20

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 - 나나카와 카난 / 박춘상 : 별점 2점

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 - 4점
나나카와 카난 지음, 박춘상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키타자와 하루나는 아동 복지법에 근거해 설립된 아동양호시설 나나미 학원에서 일하는 2년차 신참 보육사이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알게 된 학원생들의 이런저런 수수께끼나 비밀을 아동상담소 상담사 카이오, 친구 카논 등의 도움으로 풀어내고,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결책을 내 놓는 해결사이기도 하다.

아동 양호 시설을 무대로 이런저런 소소한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일상계 추리물. 이런 작품이 있는줄도 몰랐는데, 알고보니 아유카와 데츠야 상 수상작이라서 놀랐네요. 트릭의 기발함에 점수를 많이 주는 상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이 작품의 트릭은 그리 대단한건 없거든요. 그러고보면 2회 수상작인 가노 도모코의 <<일곱 가지 이야기>>도 이 작품과 유사한, 전형적인 소소한 일상계이기는 했지요. 고정관념이라는게 무섭네요. 반성해야겠습니다.
생각해왔던 아유카와 데츠야 상 수상작답다운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한 일상 속 사건들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이야기에서 앞서의 이야기 모두를 아우르는 진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진상을 위한 소소한 단서의 삽입도 적절하고요.

하지만 솔직히 재미는 없었어요. 사건이 너무 소소하고, 등장인물들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던 탓입니다. 읽으면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어요.
추리적으로도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별 것도 아닌 상황을 억지로 수수께끼처럼 만든게 많습니다. 이를 풀어내기 위한 단서도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고요. 특히 아동 복지법이라던가, 아동 양호 시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풀 수 없는 사건은 공정 여부를 떠나서 반칙처럼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구태여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에서 소개해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 1화 지금은 사라져버린 별빛도
중학생인 학원생 요코는 학원의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말썽꾸러기였다. 어느날 별을 보면서 요코는 하루나에게 한 가지 비밀을 털어놓는다. 예전 자신을 지켜줬던 거칠었던 학원생 레이야가 나쁜 원생들을 수감하는 교호원으로 옮기자마자 죽었는데, 죽은 뒤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자기를 찾아와서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상담사 카이오는 요코가 본 레이야는 유령이 아니었다는걸 밝혀냈다. 레이나는 원래 몸이 약해서 요양 시설로 옮겨진 뒤 사망했는데, 공식적으로 옮겨진 날짜보다 뒤에 옮겨갔고, 그래서 죽기 전 요코를 우연히 찾아왔던게 진상이었다.

레이야가 이동한 날짜가 서류상 날짜보다는 뒤였을거라는 추리는 괜찮았어요. 입소 아동에 대한 행정 절차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 이런 시설에 대한 꼼꼼한 자료 조사도 돋보였고요.
문제는 이런 정보를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는 추리하기 힘든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레이야가 원래 몸이 약했다는걸 추리하기는 힘들다는 점입니다. 몇몇 단서를 배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창백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과한 화장을 했다던가, 몸이 약한 탓에 '선수필승' 공격법을 익혔다는 등 억지와 비약이 대부분입니다. 곧 죽을 정도로 몸이 약한 아이가 선빵을 날린다고 여러 명을 대적한다는건 납득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이야기의 무대와 등장인물, 각종 설정에 대한 소개와 함께하는 연작 단편집의 도입부로는 나쁘지 않습니다만, 추리적으로는 딱히 언급할 부분이 없기에 감점합니다.

제 2화 절대 반지
어머니의 학대 탓에 호적도 없이 가출하여 홀로 지내던 아사다 유키는 경찰을 통해 나나미 학원에서 생활하게 된 소녀로 고등학교 졸업과 시설 퇴소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진로로 잡은 전문 학원은 입학에 거액이 필요했다. 학원 관계자들이 난처해하자 유키는 자신이 모았다는 거금이 들은 통장을 보여주었다.
하루나는 거액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카이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카이오는 유키와 과거 이야기를 조금 나눈 뒤 진상을 알려주었다. 유키의 정체는 '산소 미스즈', 유키가 신분을 사칭했다는 부잣집 아이였고 돈은 산소 가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아빠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가출했던 산소 미스즈와 우연히 폐가에서 만난 학대아동 유키가 의기투합하여 서로 신분을 바꾸어 살아 왔다는 내용입니다. 수록작 중 스케일 면에서는 가장 큰 편인데,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습니다. 유키의 과거에 대한 추억담 - 주말에도 학교에 나가려고 했다는 등 - 과 몇몇 사소한 단서들 - 에리히 캐스트너의 대표작으로 <<쌍둥이 로테>>를 언급하지 않은 등 - 을 통해 추리해가는 카이오의 추리도 상당히 볼 만 하고요.

하지만 산소 미스즈가 된 유키가 아빠와 연인?이 되었다는 듯한 결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돈이 목적인지, 복수가 목적인지도 모르겠고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 3화 피 맺힌 단자쿠
사라와 켄토에게는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다정한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아이 씨와 재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어느날 사라는 아빠가 '난 사라가 싫어'라고 말하는 전화 통화를 듣고 실의에 빠졌다.
하루나의 친구 카논은 이야기를 듣고, 사라와 켄토의 아빠는 외국인이며, 그가 전화로 말했던건 I hate가 아니라 Ai hates라는걸 추리해 내었다.

사라의 영어 실력이라던가, 그 외 디테일을 통해 그녀가 외국계이며 아빠가 외국인이라는걸 추리해 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서술 트릭물입니다. 
그러나 아빠와 사라 남매를 항상 보아왔던 하루나에게는 서술 트릭일 수 없고, 그 결과 하루나의 추리 실력이 상대적으로 별로라는 것만 두드러집니다. 애초에 하루나가 카논에게 사건 이야기를 해 줄 때 사라의 가장 큰 특징인 혼혈아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전형적인 일상계로서는 나쁘지 않습니다만, 딱히 눈에 뜨이는 점도 없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 4화 여름캠프
결혼을 앞둔 학원 졸업생 토시키와 미카가 하루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12년 전 토시키의 추억이 꺼내어졌다. 토시키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학원 여름캠프에서 만났던 환상의 소녀에 대한 이야기였다. 함께 여름캠프를 보낸 소녀 나오는 캠프에 찾아온 어른을 피해 비상계단을 올라간 뒤 사라져버리고 말았었다. 그리고 선생님들도 그런 소녀는 없었다고 토시키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하루나는 그 아이는 '소년' 이었고, 함께 여름캠프를 진행했던 지쓰세이 학원 생도였을 거라고 추리했다. 나오는 비상계단을 올라간 뒤 개천으로 뛰어들었고, 개천에서 놀고 있던 지쓰세이 학원 생도들 사이로 숨어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토시키가 찾던 '나나미 학원 생도인 여자아이'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으며, 나나미 학원 선생님들이 나오를 몰랐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었다.


초등학교 남자아이, 여자아이의 애틋하면서도 정감어린 추억담은 항상 기본 이상은 뽑아주는 소재지요. 마지막 추격전도 긴박감이 넘쳐서 여러모로 볼거리는 많았던 이야기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오가 남자아이였을거라는 추리는 일반 독자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고요. 단서가 많지 않고, 어떤건 다소 억지스럽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나나미 학원과 지쓰세이 학원의 관계라던가, 임시보호위탁 등의 권한은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아주 공정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 5화 뒤뜰
나나미 학원 뒤뜰에는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 문에는 2미터 정도 되는 높이에 자물쇠가 달려 있어서 보통 사람은 열 수 없는데, 이 문을 드나드는 '우키히메'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아키 등 몇몇 생도는 흰 손이 두둥실 떠올라 자물쇠를 여는걸 보았다고 말했다.
한편 나나미 학원 생도 아키라와 동급생 미즈에의 교제 문제로 예정되었던 운동회 등이 취소되자 원생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자치연합회 임원인 카나코가 나서서 상황이 정리되었지만 아키라와 미즈에는 헤어지게 되었다.
카이오는 이 모든게 아키라의 '배려' 때문에 벌어진 소동이었다고 추리했다. 실제로 교제를 했던건 카나코와 스기야마였고, 둘의 교제가 문제가 될거라 우려했던 아키라가 이성 교제를 하는 척 했었던 것이었다. 두둥실 떠오른 손은,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도록 시기야마가 카나코를 안아서 들어 올렸던게 진상이었다.


학원에서의 이성 교제가 핵심 소재인 일상계 청춘 학원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재답게 추리적으로 특기할만한 점은 별로 없어요. 흰 손이 두둥실 떠올랐다는건 대단한 추리가 필요한하지 않습니다. 발판이 없었다 해도, 두 명이상이면 어떻게든 가능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는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또한 카나코와 스기야마의 교제는 독자에게 아무런 단서를 주고 있지 못합니다. 추리의 여지가 전혀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제 6화 암흑의 천사
나나미 학원생들이 임시로 통학할 때 이용하는 터널은 여자아이 6명이 지나가면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15년전, 6명이서 지나가다가 유령 목소리를 들었던 원생도 있었다.
얼마 뒤 초등학생 마이가 터널에서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했고, 여러 아이들이 엮인 소동으로 번졌다. 실제로 천사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누구도 여자가 터널안에서 나오는걸 보지 못했던 채였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트렌스젠더 
터널 감시원이었다....

15년 전 유령의 목소리는 터널 안으로 연결된 배관을 통해 목소리를 보낸 장난이었고, 지금의 천사 목소리는 트랜스젠더 터널 경비원의 목소리였다는 이야기. 경비원은 외모는 남자여서 오해가 생겼던 것이지요. 동일한 사건에 두 가지 트릭을 사용하고 있으며, 트릭이 합리적이라는건 좋았습니다. 

그러나 15년전 사건에 비해 현재의 사건은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경비원이 평상시에 목소리를 위장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거든요. 진실을 그 자리에서 밝히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 7화 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
하루나는 과거 카논이 했던 여러가지 거짓말을 추궁했다. 그러자 카논은 고의는 아니었다며 자신이 사실은 <<여름캠프>> 때의 환상의 소녀 고마츠카와 나오였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알고보니 그녀는 앞서 모든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1화에서 유키가 보았던 또다른 레이야는 카논이었고, 2화에서 유키가 살던 폐가에서 그 전에 살던 소녀도 카논이었고, 3화에서 단자쿠에 살해될 것 같다는 메시지를 적었던 것도 카논이었고, 5화에서 학원 뒷문으로 들어왔던 소녀도 카논, 6화에서 15년 전 배관을 통해 장난을 쳤던 소녀도 카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도망쳤어야 했는지 아픈 과거를 하루나에게 털어 놓았다. 양아버지의 성폭행 등 학대 탓이었다.


연작 단편집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작품. 앞서 있었던 이야기들 속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를 마지막에 정리해 주는 구성입니다. 앞서 작품들 모두가 한 명의 인물 - 카논 - 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설득력있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았고요. 등장하는 회문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나오 - 카논 - 의 특기인 '회문' -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는 말 - 이라서 한국 독자는 풀어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나오의 본명은 '오아나 나오' 이고, 카논은 '노나카 카논', 둘 다 거꾸로 읽어도 똑같으며, 그래서 둘은 동일인물이다'는게 핵심인데, 번역에서는 '오아나'가 아니라 '코아나'로 소개하고 있어서 한국 독자로서는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어요.

별점은 2점. 이 작품 한 편만으로는 가치가 없고, 앞 부분 이야기들을 읽어야만 완성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로 보기는 힘들어 감점합니다.

2023/05/19

명탐정 코난: 비색의 탄환 (2021) - 나가오카 치카 : 별점 1점


티빙을 통해 딸아이와 함께 감상한 명탐정 코난 극장판. 오랫만이네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쓰레기였습니다. 사건을 저지른 동기와 전개 모두에 있어 설득력을 갖추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으로 보였던 아버지의 원수를 값기 위해 당시 FBI 국장이었던 피해자를 노린다!까지는 비현실적이지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그 뒤의 모든 전개는 어이를 상실케합니다.
우선, 오래전 있었던 범죄와 똑같이 관계자들을 납치했다가 고이 풀어준다? 이런걸 따라할 이유는 없습니다. 복수의 대상이 명확한데 다른 사람들을 납치하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오히려 FBI가 사건에 투입되어 꼬리를 밟힐 위험만 늘어났을 뿐입니다. 그 뒤에 병원에서 MRI를 폭주시켜 사람들을 기절하게 만든다는 것도, 세라 마스미가 우연찮게 사건을 목격하고 범인을 뒤쫓는다는 것도 모두 설득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범인이 마지막에 초전도 리니어 열차의 별명이 '실버 불렛'이니 이 안에서 총으로 원수를 값겠다! 고 주장하는건 실소를 자아냈습니다. 그냥 아무데서나 죽였으면 복수는 진작에 끝났을겁니다.
추리의 근거도 전화가 고장났다는 것 (MRI를 폭주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이름의 애너그램 뿐이라는건 부족했어요. 제가 범인이라면 상식적으로, 다른 폰을 이용하여 MRI를 폭주시켰을겁니다. 하긴, 이런 수준낮은 이야기에 상식을 논하는 것 자체가 웃기네요.

액션이라도 화려하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슈이치와 세라의 짧은 격투씬 정도? 최고 속도 1,000km라는 열차를 향해 저격을 성공시킨다는건 황당하기 그지없고, FBI 요원들이 엔지니어 한 명을 쫓는 자동차 추격을 장기와 결합시킨건 뭐하는 짓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1점. 열차가 폭주하는 등 스케일을 키우기위해 억지스러운 전개로 일관한 작품입니다. 아무리 아동용이라고 해도 이런 수준의 각본을 영화화한다는게 믿어지지가 않네요. 만화의 등장인물들인 세라 마스미와 아카이 슈이치 등을 핵심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팬서비스 이상의 가치는 전무합니다,

2023/05/15

2023.05.09 ~ 05.14 두산 베어스 감상



주중 롯데 - 주말 기아 3연전
성적 : 4승 2패

좋았던 점
알칸타라 선수를 필두로 선발진 쾌투
간만의 베어스다운 야구 (호수비, 재치와 발야구)
간만의 응집력있는 타격

나빴던 점
강승호 선수의 클러치 실책들
지나친 필승조 연투

총평과 이번주 예상
기대 이상의 성적을 기록했던 한 주였습니다.
딜런 선수를 제외한 선발진 모두의 호투에 더해, 간만에 타선이 제 역할을 해 주어서 시즌 첫 시리즈 스윕을 거둘 수 있었네요. 두산 전성기를 상징하는 호수비가 연이어 선보인 것도 팬으로서 기뻤고요. 선발 투수진이 강한 두산이라면 탄탄한 수비로 실점을 최소화하는 경기 운영을 해야 합니다. 클러치 에러를 연발했던 강승호 선수는 아무리 공격력이 좋더라도 주전 라인업에서 빼는게 당연해요. 이승엽 감독은 이런 피드백은 상당히 빠른 편인데 좋아 보입니다. 좌완 투수 양현종 선수가 선발일 때 로하스 선수를 아예 제외하고 타순을 구성한 것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쓸놈쓸이 지나친 중간 투수진 기용은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아직 한 여름도 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로 누적과 구위 저하고 염려될 정도에요. 특히 정철원 선수는 출전 경기와 이닝 모두 전구단 계투 중에서도 1, 2위를 다툽니다. 4점차 이상으로 이기는 상황에서의 등판은 막는 등으로 제발 아껴주었으면 합니다. 이왕 올렸으면 이형범, 박정수 선수를 좀 써 보면서요.

뭐, 그래도 지난 주는 4승이나 했으니 만족합니다. 그런데 이번 주는 이번 주는 주중 키움 원정, 주말 KT 원정 경기가 이어지는데 여러모로 힘들어보입니다. 두산이 내세울만한건 선발진인데, 이번 주는 좀 성적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거든요. 알칸타라 선수가 지난 주에 많이 던졌을 뿐더러, 딜런 선수마저도 부상 이탈을 해 버렸으니까요. 딜런 선수는 등판했던 두 경기 모두 그리 솔리드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나름 5이닝은 버텨 준다는 계산이 섰었는데, 신인 선발 투수 - 아마도 이원재 선수 - 에게는 그 정도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다른 경기에서 만회해야 하는데, 최승용 선수와 김동주 선수도 상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2승 4패만 해도 다행일 것 같습니다. 질 때 지더라도 추격조 선수들을 다양하게 테스트하면서 옥석을 가리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력 선수들 휴식도 좀 챙기고요. 잘 지는 것도 중요하다는걸 명심해주었으면 합니다.
키 플레이어는 당연히 땜빵 선발 이원재 선수를 꼽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딜런 선수와 로하스 선수는 더 이상 기대가 되지 않는데, 슬슬 교체를 알아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차라리 작년의 와델 선수가 던졌더라면 더 나았을거에요.

2023/05/14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0. 밥을 먹는 쥐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0. 밥을 먹는 쥐
나라키 경감의 짜증은 누구의 눈에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초기 수사 도중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난 것이 나라키의 신경을 더욱 곤두세우게 만든 것 같았다.
"소우지 씨가 역립 인형을 꺼내기 전과 후,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습니까?"
토시오가 소우지의 방에서 일어난 일을 다 말하자, 나라키가 말했다. 눈썹 사이사이의 주름이 쭈뼛쭈뼛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소우지 씨는 유쾌했고, 자신의 수집품을 보여주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어요."
"유쾌하다고? 자기 여동생이 살해당한 직후에 즐거워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마사오 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우지 씨는 그녀를 어떻게든 기쁘게 만들기 위해 억지로라도 밝게 행동하려고 했습니다."
나라키는 입을 다물었다. 토시오의 말에 설득당한 모양이다. 나라키의 옆에 있는 인품 좋아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소우지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기억하십니까?"
"소우지 씨가 인형의 태엽을 다 감았을 때였어요. '아, 아프다'라고........'
"그 뒤는?"
"우리는 인형의 신기한 움직임에 정신이 팔려 있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소우지 씨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그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요?"
"네, 소우지 씨도 마지막까지 인형을 보고 있었어요. 인형은 소우지 씨 곁을 지나가려고 했어요. 그 때, ‘멈추지 않는다, 이상하다’고 중얼거렸습니다"
"’멈추지 않는다, 이상하다?’ 나라키 경감님, 인형은 거기서 멈춰야 하는 거 아니었을까요?"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인형의 기계가 이상하게 작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아니면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댄 건가?"
나라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옆의 남자는 다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소우지 씨가 한 말은 그게 마지막이었나요?"
"...... 소우지 씨는 인형을 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그대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우다이 씨가 일으켜 세웠을 때 ...... 소우지 씨는 '하지만 훌륭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마지막입니다."
"’하지만, 훌륭하지 않습니까?’ 이건 무슨 뜻일까요?"
나라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시오는 소우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우지는 죽기 직전까지 인형에 대해 진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헛수고에 가까웠다.
"소우지 씨는 그 역립 인형을 보여주겠다는 것은 예전부터 약속한 것이었습니까?"
나라키가 말했다. 질문의 주도권을 되찾는 듯한 분위기였다.
"약속은 없습니다. 다만 예전에 우다이 씨에게 주모우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이라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모우?"
"소우지 씨 방에 있었잖아요. 비누방울을 뿜어내는 자동 인형입니다."
"비누방울을요?"
"그게 계기가 되어 소우지 씨는 카라쿠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역립 인형도 꺼냈어요"
"소우지 씨가 역립 인형을 꺼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군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역립 인형 따위는 보여주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나라키는 오늘만 아니었으면, 끔찍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우지 씨가 역립 인형을 보여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희박해 보이는데요."
"뭐라고요?"
"역립 인형을 소우지 씨가 복원했다는 것은 최근이라고 합니다.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귀중한 인형이라는게 자랑거리 중 하나였어요. 인형은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소우지 씨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요. 카라쿠리 이야기가 나오면 당연히 역립 인형도 보여주고 싶어질 수밖에 없죠."
"카라쿠리 얘기가 나오지 않으면?"
"소우지 씨의 방은 장난감이 가득 차 있어요. 카라쿠리가 화제가 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나라키는 또다시 말꼬리를 잡혔다. 나라키는 험악한 말투로 토시오 일행이 왜 마와리 집에 오게 되었는지 집요하게 물었다. 토시오는 있는 그대로를 차분하게, 자세히 대답했다.
"..... 정말 악랄하고 극악무도한 범행입니다."
나라키가 높은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토시오와 마이코, 마사오는 카오리의 방에 머물게 되었다. 토시오가 방에 들어서자 마이코와 마사오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땠어?"
마이코가 토시오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정말, 긴장되더군요."
"그렇겠지."
그리고 마사오에게 말했다,
"말하기 싫은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라고 말했다.
수사관이 먼저 데리러 온 것은 마이코 쪽이었다. 마이코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마사오는 침착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이코가 나가자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미안해요."
마사오가 말했다. 토시오는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도 자신의 진심이 전달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친 다리는 괜찮으세요? 먼저 물어봐야 했는데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먼 옛날을 떠올리는 듯 대답했다.
"당신이 침착해서 안심이 되네요."
토시오는 토우이치가 죽던 날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다이 씨가 저를 위로해 주셨어요. 그 분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버틸 수 없었을 거예요."
"당신을 기쁘고 행복할 때 만날 기회가 없었던게 아쉽습니다."
"....그렇죠.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나는 항상 상상하고 있어요. 행복할 때의 당신은..."
"마찬가지에요."
마사오는 토시오의 말을 가로막았다. 거의 발작에 가까웠다.
"나는 항상 이랬어요. 늙어 보이잖아요. 하지만 그 사건 때문만은 아니에요."
"늙어 보이지 않습니다. 나이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고요."
"카츠 씨는 젊어요. 우다이 씨가 말했어요. 아주 순수한 청년이라고."
"순수하지 않아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요,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있답니다. 카츠 씨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알게 될 거예요. 멋진 여자와도........"
"다른 여자 따위는 필요 없어요. 나는........"
"우다이 씨는 경찰관이었군요."
마사오는 토시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우다이 씨가 경찰서를 그만둔 이유도, 토모히로를 쫓은 이유도 말해줬어요. 그 분은 어떤 액운을 만나도 그것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우다이 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왠지 모르게 힘이 솟아나더군요. 카츠 씨는 우다이 씨와 함께 일한 지 얼마나 됐나요?"
"오늘로 엿새째입니다."
"엿새째... 나는 더 오래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조사관이 된 것은 당신을 처음 본 그 날입니다."
"그럼 저와 함께한지도 엿새째군요. 나에 대해서 잘 알 수는 없겠네요."
"알고 있습니다."
토시오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알아요. 내가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우지와 관계를 끊지 못한 더러운 여자라는걸 알고 있죠."
"당신은 소우지에게 협박을 당한 것뿐입니다."
"나는 나쁜 여자야."
"나쁘지 않습니다, 더럽지도 않아요. 괜찮습니다. 단 이틀만 못 만났을 뿐인데 나는......."
"안 돼요. 그런 말을 하려면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나야해요"
"오랜 시간? 얼마나 오래요?"
"2년, 아니 3년정도라도"
"그땐 내 말을 들어줄 거죠?"
"들어줄게요. 어떤 일이든요."
"예를 들어 ...... 샹보르관에 초대한다고 해도?"
"어디든 상관없어요."
마사오는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위로의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토시오는 매우 기뻤다. 동시에 마사오와 정을 통하던 소우지가 살해당하자마자, 마사오에게 이런 대답을 하게 한 자신이 매우 어리석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저는 오늘 이런 말을 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당신을 보는 동안 마음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어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나라 공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봤지........"
차 안에서 마이코는 비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가을이라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강한 냉기가 에그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토우이치는 수면제 중독으로 죽었어. 외상도 없었고 충치 외에는 질병도 없었어. 체질도 정상, 혈액형도 B형.......내가 한 장의 카드를 주기는 했지. 나라공은 토우이치가 마신 약병의 뚜껑이 얼마나 단단한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시더군."
"경감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병의 뚜껑을 연 건 토모히로 자신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
"토모히로가? 그렇다면 토모히로는 집을 떠나기 직전에 수면제를 먹은 셈이네요."
"토모히로는 약을 먹지 않았어. 하지만 마사오의 말에 따르면, 토모히로는 마사오가 산 수면제를 건네주자마자 포장을 뜯어 버렸다고 했는데, 나라공은 그 때 뚜껑도 열지 않았나 싶다네."
"마사오 씨는 병뚜껑을 여는 것까지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군요."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그 기억이 없다는군."
"그렇다면 토우이치의 죽음은 순전히 누군가의 과실일까요?"
"글쎄, 아무튼 토모히로는 마시지도 않은 약병의 뚜껑을 열었잖아."
마이코가 토우이치의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토모히로의 사고에 이은 토우이치의 죽음. 그리고 카오리와 소우지까지 죽었다. 카오리와 소우지의 죽음은 완전한 살인 사건이었으니까 이 죽음의 연쇄 관계는 당연히 파헤쳐야만 했다.
"소우지는 어떻게 살해당한 겁니까?"
토시오가 물었다. 아직도 소우지가 왜 쓰러졌는지 잘 몰랐다.
"소우지는 그 역립 인형에 의해 살해당했어."
"설마 인형이?"
그 때, 소우지는 확실히 인형의 태엽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인형의 태엽을 감았을 때, 인형에 이상이 있었던 것 같다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인형이 사람을 죽인다고?
"역립 인형에 독침이 박혀 있었어. 태엽 감는 나사의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독을 넣은 가느다란 주사기가 꽂혀 있었지. 테엽이 어느 정도 단단하게 감겨지면 주사기가 튀어나와서 한꺼번에 독액을 주입하고 바로 다시 들어가는 구조야. 기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 가공이라고 해. 게다가 노리는 사람을 확실히 찌를 수 있다고 하더군. 나사를 감는 손가락은 반드시 주사바늘 바로 위에 오기 때문이지."
"독은 뭐예요?"
"현재로서는 시신의 상태로 미루어 볼 때 알칼로이드의 일종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알칼로이드가 뭐죠?"
"모르핀, 스트리키니네, 코카인, 니코틴 같은 것들이지."
"소우지는 역립 인형의 나사를 감을 때 마사오 씨에게 감아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었죠?"
토시오는 자신의 말에 겁이 났다. 만약 마사오가 나사를 감았다면, 살해당한 것은 마사오가 였을 터였다.
"그래. 마사오가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있어."
"범인이 죽인 것은 역립 인형을 움직이려고 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되겠지. 살해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인형을 다루었던 소우지지만, 그런데 소우지는 마사오에게 인형의 태엽을 감아보라고 권유했었지. 소우지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웠어. 카라쿠리에 독침을 심을 정도로 철저하게 계획적인 범인이 이 정도 변수를 예측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야. 나는 범인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만약 우리가 없는 곳에서 소우지가 카라쿠리을 움직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목격자가 없었다면 수사는 상당히 어려웠을거야. 첫째, 사인 규명에도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거야. 사인이 밝혀져도 설마 카라쿠리에 독침이 박혀있을 거라는 생각은 쉽게 들지 않았을테고, 역립 인형은 다른 장난감들 속에 섞여버렸을테니까. 만약 방 안쪽에서 열쇠를 걸어 놓았다면 수사는 오히려 더 좁혀질 수 있었겠지. 방 안의 인형을 철저히 조사하면 되니까. 하지만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다면, 상식적으로는 누군가 주사바늘을 들고 소우지의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지. 수사도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고. 때문에 수사는 난항을 겪게 되었을 거야. 그리고 소우지는 자신의 방에 지금까지 한 번도 자물쇠를 채운 적이 없었다고 하는군."
"범인은 왜 수사를 방해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예를 들어 그날만이라도 인형을 잠시 숨기는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카오리 씨가 살해당했다면 당연히 많은 경찰관이 출입하는 것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범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
"카오리 씨와 소우지를 죽인 사람이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뭐라 말할 수 없군."
"토우이치의 사인도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나도 나라공에게 말했어. 만약 이 모든걸 같은 범인이 저질렀다면, 그는 하늘에서 운석을 떨어뜨려 토모히로를 죽이는 것과 같은 엄청난 짓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역립 인형에 독침을 꽂은건 누구였을까요?"
"방금 말했듯이, 소우지는 방에 열쇠를 걸어둔 적이 없어.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기 때문에 소우지는 집에 없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인형에 독침을 꽂을 수 있어. 설령 여자라도 말이야."
토시오는 마이코의 말이 신경 쓰였다.
"마사오 씨에 대해 말하는 건가요?"
"네 사람이 죽은 결과, 당연히 결론은 하나야. 즉, 이번에 데츠바가 죽으면 마와리 가문의 유산은 모두 마사오의 것이 된다는 것."
"그런 바보 같은 소리!"
토시오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마와리 가문의 유산 따위는 있을 수 없어요. 스페이스 레이스의 실패 탓에 조만간 나사 저택도 처분될 거 아닙니까. 설령 처분하지 않더라도 해바라기 공예가 다시 살아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과연 팔릴만한 물건이 계속 나올 수 있을까요?"
"그렇지. 최소한 그것 때문에 사람을 네 명이나 죽인다는건 생각하기 어렵지."
"우다이 씨는 데츠바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농담이 아니야. 그렇게 놔둘 리가 있겠어? 그러면 내 뇌물죄를 풀어줄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되는 거잖아."
"나사 저택의 경호는 철저하겠죠?"
"그래, 두 사람이 동시에 살해당했으니까. 범인이 어떤 꾀를 부려도 데츠바를 건드리는 것은 불가능할 거야."
"마사오 씨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당분간은 나사 저택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내일은 토모히로의 초칠일이에요."
"벌써 그렇게 될까? ...... 마사오와 무슨 얘기 했어?"
"그다지 대단한건 ......"
"그래? 마사오는 정말 마음씨 좋은 여자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이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말이 이상하게 힘이 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그런데, 역립 인형을 만든 오노 벤키치. 소우지가 죽기 전에 했던 말에 따르면 가나자와 사람이라고 했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나자와라는 땅이 마와리 가문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우선, 해바라기 공예의 마와리 가문이 만든 장난감이 뭐였지?"
"후쿠나가 씨가 밥 먹는 쥐가 원형이라고 알려준 장난감이었죠"
"밥 먹는 쥐는 어느 지방에서 만든 장난감인지 알아?"
"아뇨.."
"얼마 전에 생각나서 찾아봤더니 가나자와의 장난감이었어. 덴포(天保) 때 마에다 번의 하급무사가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는, 작지만 유명한 장난감이야. 가나자와에는 그.외에도 유명한 장난감이 있어. ‘하치만 기아게리’라는 아름다운 기아게리 인형이야. 해바라기 공예의 전신인 츠루슈도(鶴寿堂)의 마와리 사쿠조(馬割作蔵)가 판매한 장난감에 이 기우게리가 들어있었지. ……. 그리고 마와리 가문의 문장을 알아?”
"...... 안은 명아주(藿藿). 하지만 원래는 나사 매화였다고 하네요."
"호오, 대단하군."
"카오리 씨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나사 매화는 매화그릇의 가치평가가 높아. 매화그릇으로 유명한 다이묘가 있지. 가가번의 마에다 가가 매병. 가가 백만석의 정문 '자요몬(慈陽門)'. 가나자와는 성곽 마을이야. 가신에게 공적이 있으면 매화 그릇의 대체 문양인 '가에몬'의 사용을 허락해 주었었지."
"그럼 마와리 사쿠조는 가나자와 출신인가요?"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일이 일요일이었지?"
"맞습니다."
"가나자와에 가볼까?"
"저도 갈게요."
"카츠군은 괜찮아. 이건 일이 아니야. 불필요한 경비를 들일 수 없어."
"에그를 운전해서 가면 됩니다. 물론 당일치기로요."
"가나자와까지 꽤 멀잖아. 24시간 내내 운전할 자신이 있나?"
"네,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거든요."
"그럼 나도 도움이 되긴 하지만."
마이코는 토시오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때 사랑에 빠진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 것뿐이야."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미스터리 아레나 - 후카미 레이이치로 / 김은모 : 별점 2점

미스터리 아레나 - 4점
후카미 레이이치로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년 연말 방송되는 인기 TV쇼 <<미스터리 아레나>>는 출제되는 문제를 맞추면 거액의 상금을 얻는 쇼였다. 대신 틀린 답을 제시한 참가자는 자신의 장기를 이식용으로 기부해야 했다. 
올해 문제는 '클로즈드 서클 추리물'로, 대학 미스터리 연구회 동창생들은 매년 모임을 갖는 동창 마리코의 별장에 모였지만, 마리코는 4층 자기 방에서 칼에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방송에서 이야기가 조금씩 진행될 때 마다, 자신의 추리에 확신을 가진 참가자는 벨을 눌러 범인이 누구인지와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추리 뒤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앞서의 추리는 부정되며 계속 변형되어 나가는데...

후카미 레이이치로의 장편. 여러 명의 참가자들이 각자의 추리를 이야기한다는건 <<독 초콜릿 사건>> 등을 연상케도 하지만,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가지고 추리를 펼치는게 아니라 본편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추리를 펼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일종의 배틀이라서 같은 답을 내 놓으면 먼저 답한 사람이 이기는 규칙이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여러가지 변수가 발생하는게 재미있었습니다.
수많은 추리가 등장하는데 대체로 성별 오인이라던가, 이름이나 묘사 등으로 같은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거나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등의 서술 트릭이 많습니다. 꽤 그럴듯한 추리도 등장합니다. "마루모가 범인이고, 그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왜 마루모가 여자이며, 실제로 범행을 어떻게 저질렀는지에 대한 추리를 여러가지 단서로 뒷받침하여 주장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높거든요.
피해자 마리코가 남자였다는 추리도 상황 - 마리코는 드레스를 입고 죽어 있었음 - 을 보면 억지스러우나, 마리코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었다는 주장은 꽤 합리적이었어요. 앞서 본편 문제 이야기에 마리코의 본가가 안도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역참>에 그려져 있고, 마리코의 집은 마덮밥 체인점을 한다는 단서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도카이도 53역참> 스무 번째 역참이 마리코 역참으로 마죽 가게에서 마죽을 먹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걸 근거로 "마리코"는 성이라는 추리지요. 이를 통해 '피해자 마리코와 다른, 범인인 여성 "마리코"가 있다, 그건 '아키'였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과정도 깔끔합니다. 
이름을 활용한 서술 트릭은 관리인 히데가 사야카 시점일 때만 英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등 그 외에도 많습니다. 
다른 추리들도 볼만한게 몇 가지 있습니다. '범행 현장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인 나선계단이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서 실제로는 통로가 2개였다', '다이잉 메시지는 S가 아니라 적분 기호로 등장인물 중 세키 분타 (세키분 - 적분)를 가리킨다' 등이 그러했습니다. 앞서 히데 씨와의 대화에서 택시비에 대한 언급을 통해, 실제 별장에 온 사람이 몇 명인지 추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단서들도 곳곳에 잘 삽입되어 있고요.
이런 점들만 보면 장르에 깊은 이해를 가진 작가가 썼다는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겁니다.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에 오르고 '본격 미스터리 대상' 2위에 등극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엄밀하게 본격 추리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본격 추리물과 그 장르를 비틀고, 풍자하고 조롱하는 성격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작 중에서도 참가자의 입을 빌려 "성별 오인 트릭 자체는 이제 낡을 대로 낡았잖아. 한때 미스터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작품에 '마유미'라는 이름이 나오면 거의 백 퍼센트 성별 오인 트릭이 사용됐다고 의심하는게 상식이었을 정도야"라는 말이 나오는 등, 본격 추리물의 작위성을 대놓고 놀립니다. 추리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 보다는 이른바 "바카미스 (게임성, 오락성을 과도하게 추구하고 의외성을 주기 위한 목적이 큰 작품들)" 류의 추리가 더 많아요. 고양이 다마가 알고보니 사람으로 발레리나였다던가, 사부로가 바라보았던 창 밖의 "가로수"가 사실은 사람 - "나미키 (가로수)"라는 이름의 - 이었을거라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이야기의 정답을 조작했다", 즉 이야기의 분기를 다수 만들어서 누군가 그럴듯한 추리로 정답을 내 놓을 경우, 다른 분기로 이어지도록 조작했다는 게 '미스터리 아레나' 방송의 정체라서 애초에 공정한 추리가 이루어지는건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정답이라고 내 놓는건 앞서 알멩이를 다 뽑아먹어서 억지로 그렇게 만들 수 밖에 없는 황당한 결과일 수 밖에 없고요. 등장인물이자 피해자인 "다이라 사부로"와 다른, "다이라사부로"라는 이름의 인물이 별장에 있었다는 식인데 너무 억지스러워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였어요. 이래서야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지요.

설정도 만화적이고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알고보니 <<미스터리 아레나>> 참가자들은 모두 특수 요원으로 방송이 거짓이라는걸 폭로하기 위해 투입되어 관계자들을 일망타진한다는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전개도 마찬가지라 본편 문제 이야기는 괜찮았지만, 퀴즈쇼 진행 부분은 과장되고 만화적인 묘사가 넘쳐나 읽기 불편했습니다. 풍자와 조롱을 위해 일부러 더욱 과장되게 쓴 듯 하지만, 보다 진지한 분위기로 추리 애호가들의 문답이 이루어지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오답자는 장기 이식 운운하며 생명을 건 추리 배틀을 벌인다는 TV 쇼 설정보다는 말이죠. 아니면 아예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처럼 가볍게 접근하던가요. 지금의 결과물은 진지한건지, 말도 안되는 농담인건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신다면 즐길거리가 없지는 않으나, '소설'보다는 '장난'에 가깝습니다. 여러모로 과했어요.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비슷한 소재라도 히가시고 게이고의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 (<<명탐정의 규칙>>, <<명탐정의 저주>>)가 훨씬 괜찮습니다.

덧붙이자면, 작가 이력을 보니 게이오 대학교 문학부 졸업에 파리 부르고뉴 대학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사람이더군요. 1963년 생으로 이 작품을 발표한 2016년에는 50대 중반이었고요. 그런 사람이 이런 만화같은 작품을 발표했다는게 의외인데, 한 편으로는 일본식 문화의 저변이 정말 넓고 깊구나 싶은 생각이,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정도 나이와 위치니 이런 본격 추리물을 조롱하는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겠구나 싶네요.

2023/05/13

신의 기록 - 에드워드 돌닉 / 이재황 : 별점 4.5점

신의 기록 - 10점
에드워드 돌닉 지음, 이재황 옮김/책과함께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 과정을 시작부터 완결까지 꼼꼼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미시사, 인문학 서적.
시작이 된 나폴레옹 프랑스 원정대의 로제타석 발굴에서 시작하여, 샹폴리옹이 해독을 성공하고, 샹폴리옹 해독이 옳았다는게 검증된 카노포스석 발굴로 마무리되는데 핵심은 이집트 성체자 해독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에 대한 설명은 제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자세합니다.
우선, 성체자 해독이 어려웠던 이유는 사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글자가 어떤걸 나타내는지를 알려면 사례가 많아야 했거든요. 하지만 로제타석 조차도 성체자 부분은 깨져버린 탓에 14줄만 남아있어서 턱없이 부족했지요. 그래서 처음에 학자들은 두 번째 부분인 속체자에 주목했습니다. 속체자는 그림문자인 성체자에 비하면 비교적 정상적인 문자로 보였고, 정상적인 문자는 일반적으로 자모 기반이라서 속체자의 자모를 알아내려고 했거든요. 로제타석의 그리스어 부분에서 자주 반복되었던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을 속체자 부분에서 찾아내어 이 둘의 문자열을 짝짓고, 그래서 자모를 알아내려고 했던 시도가 초반에 이루어졌었지요. 이는 비교적 - 반쯤은 우연으로 -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문제는 이 탓에 속체자는 자모로 이루어져 있다는 오류가 강화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속체자는 성체자를 바탕으로 간략히 써서 빨리 쓸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간체자여기에, 결국 이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뒤 영국의 토머스 영, 프랑스의 샹폴리옹이라는 두 천재가 등장합니다. 먼저 나선건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던 토머스 영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다른 학자들처럼 속체자와 그리스어를 비교 분석하여 패턴을 찾아내려 했죠. 이는 앞서 말했듯 실패가 예정된 방법이었습니다. 실패 후 영은 '중국어'를 통해 해독으로 한 걸음 나아갑니다. 바로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중국어 - 한자 - 의 외래어 발음법에서 착안한 방법이었지요. 한자는 모든 단어를 가지고 있지만, 외국어를 발음하려면 그 발음에 맞는 문자를 붙여서 써야 합니다. 뜻과 상관없이요. 불란서, 이태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은 로제타석의 비이집트계 이름 - 프톨레마이오스 - 를 어떻게 성체자로 적었는지 찾아내면, 최소한 그걸 읽는 방법은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타원체 - 카르투슈 - 가 둘러싸고 있는 성체자를 주목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고, 음독하라는 지시를 담고 있을 것이라 여겼거든요.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카르투슈 안 성체자만 소리와 상응한다고 생각했고, 그 외의 성체자는 부호에 뭔가 의미가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탓입니다. 마야 문자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처럼요. 그 때도 마야 문자는 그림으로 관념을 나타내는 부호라는 주장이 널리 퍼졌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음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문자 체계였다는게 드러났지요.

영의 발견은 샹폴리옹이 이어받아서, 그는 여러 카르투슈 속 이름을 해독했고, 로제타석 성체자 숫자도 헤아려 봅니다. 그 결과 일반적인 개념대로 성체자 하나하나가 한 단어나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너무 적다는걸 알아냅니다. 그리고 역시 중국 한자식 발상으로, 평범한 이집트 단어에도 성체자를 소리 문자로 사용했다고 생각하지요.
아부심벨 신전에서 베껴낸 비문을 받은 샹폴리옹은 파라오 '람세스', '토트메스'의 이름을 해독했고, 여기서 '콥트어' 전문가라는 능력이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파라오들 이름이 '탄생'을 뜻하는 콥트어 단어 '미세'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깨달았거든요! "라가 탄생시킨 아들', "토트가 탄생시킨 아들"이라는 뜻으로요! 그래서 카르투슈 밖 성체자에서 이렇게 '탄생'을 의미하는 성체자가 있는지를 조사하고, 그게 그리스어 부분으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찾아보았니다. 그 결과 '탄생일' 이라는 단어를 알아내죠. 성체자가 하나하나가 의미를 가지게 아니라 자모를 가진 문자라는게 드러난겁니다. 이게 샹폴리옹이 그 유명한, 형에게 "내가 해냈어!"를 외치고 기절했다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읽는 방법을 알아낸 샹폴리옹은 콥트어 규칙을 적용해서 성체자 분석을 진행합니다. 성체자에 가장 많은 물결무늬는 콥트어에 가장 많이 나오는 "N"이라고 판단했지요. 


콥트어에서 N은 of의 의미였습니다. P는 정관사 the로 사용되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해독으로 p 발음은 무슨 그림인지 알아냈고요. 이를 통해 TheXXXXXofXXXXXX 같은 문장을 끌어낸 뒤, 단어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진전은 '결정자'의 발견이었습니다. 단어 끝에 붙어있어서, 없어도 되는 글자로 보였던 글자였는데 알고보니 명확하게 단어임을 알려주는 부호였던 겁니다. '고양이'라는 글자 뒤에 고양이 그림을 붙여놓는 식으로요. 결정자는 단어 뒤에 붙기 때문에, 해독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래가 성체자 '고양이'인데, 정말 고양이 그림이 붙어있네요.


또 샹폴리옹은 그리기 어려운 단어를 같은 발음인 그리기 쉬운 단어로 바꾸어 전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어요. 이집트어에서 '아들'과 발음이 같은 것은 '오리'였습는데, 이 역시 콥트어에서도 두 단어 모두 '사'라는 같은 발음이었던 것에서 떠올린 것이지요. '독수리'도 '어머니'와 발음이 같았고요.
참고로, 이렇게 동음이의어가 쓰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건 오래된 사실이라네요.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과'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원래 기독교 성경에서는 선악과가 어떤 종류의 과일인지 특정하지 않았는데, 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 성경을 만들면서 라틴어 단어 말룸 (malum)이 '사과'와 '악'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데 착안해 집어넣었다고 하니까요.
이렇게 성체자의 비밀을 푼 샹폴리옹이 이집트를 방문하여, 그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여왕 - 핫셉수트 -'에 대한 글을 읽어내는 것으로 성체자 해독에 대한 글은 완료됩니다.

정리하기도 힘들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지만, 쉽게 설명하고 있으며 관련된 자료도 굉장히 상세합니다. 도판은 물론, 여러 등장인물들의 일대기 소개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영국의 부자 윌리엄 뱅크스의 일대기가 대표적입니다. 직접 이집트로부터 오벨리스크를 운반해 자기 저택에 세울 정도로 부자였는데, 여기서 '클레오파트라'라는 카르투슈가 발견되어서 성체자 해독에 기여했지요. 동성애자로 밝혀져 몰락하고 말았다고 하고요.
관련된 역사 소개도 빠지지 않습니다. 시작이 된 나폴레옹 프랑스 원정대의 로제타석 발굴이 대표적입니다. 발굴 뿐 아니라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의 시작과 끝을 모두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집트 역사 서술도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집트가 그렇게 대단한 고대 문명 국가가 아니었다는 서술은 흥미롭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 기술을 바탕으로 건설된 문화로이며, 근본은 인간의 육체적 노력에 두고 있었다고요. 의학은 초보 수준이었고, 과학적 법칙이라는 관념이 없었으며 세계는 주술과 마법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글쓰기의 탄생에 대한 언급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왜 글쓰기는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동굴 벽화는 2만년 전의 것인데, 가장 이른 문자도 5천년 밖에 되지 않았지요. 저자는 도시가 발달되어 교역이 복잡해 진 탓에 기록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글쓰기의 초기 단계로 밝혀진게 이라크 고대도시에서 기원전 8000년 ~ 3500년 무렵 사용되었던 점토덩이들이었으며, 이를 통해 점토 덩어리가 점토에 누른 자국, 점토에 그린 그림, 점토판 위에 쓴 부호로 추상성이 증가하며 결국 쓰기로 이어지는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됩니다.
라파누이섬에서만 발견되었던 '롱고롱고' 문자, 선형문자 B의 해독, 마야 문자 등 다른 문자들 소개도 빠지지 않고요.

하지만 조금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카르투슈 안의 파라오 이름을 읽어내는 과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 뒤 단어 분석은 좀 대충 넘어가는 부분이 그러했어요. The, Of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들어오는 단어를 채워 넣기 위한 자료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로제타석의 성체자는 몇 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요. 성체자로 로제타석의 그리스어 부분 단어가 무엇인지 다 알아낸다 한 들, 어휘로 따지면 턱업이 부족했을겁니다. 이를 전체 성체자로 어떻게 확대해 나갔을까요?
또 콥트어 전문가였기 때문에 그리기 어려운 단어를 쉬운 단어로 교체했다는걸 알아냈다는 것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교체한건지, 원래 그 의미로 썼는지를 어떻게 알아냈는지에 대해서 알려줬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그래도 그동안 궁금했었던 이집트 상형문자 - 성체자 - 의 비밀에 대해 어느정도 알 수 있었던 좋은 독서였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입문용 서적과는 수준 자체가 다르네요. 다소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사소합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집트 문자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셨던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그나저나, 상형문자가 한자와 비슷한 원리였다면, 동양인 학자가 분석에 나섰다면 어땠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