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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1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1. 베이지 않는 말
에그가 하치오지(八王子)에서 사가미호(相模湖)를 왼쪽으로 보고 오쓰키(大月), 사사코(笹子) 터널을 지나 코후(甲府)에서 주오자동차도로 나올 때까지 마이코는 뒷좌석에서 잠을 잤다.
"나는 잠을 잘 자는 사람이야."
그 말대로, 그녀는 조금만 틈이나면 정말로 기분 좋게 잠들곤 했다.
스와코 호수에서 밤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짙은 구름 사이로 하얀 호숫가에 방사형 빛이 비쳤다. 시오지리에서 북쪽으로 마츠모토로 향했다. 마츠모토에서 국도 158호선을 타고 서쪽으로 나아가면 아즈미(安曇)의 댐군을 통하며, 왼쪽으로 노리쿠라(乗鞍)산, 오른쪽으로 야리가다(槍ヶ岳), 호다카(穂高)의 산맥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사카마키, 히라유 온천을 지나면 히다이였다.
구름이 흐려지고 안개처럼 차가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에그는 깊은 산속을 지나 에치츄 도카이도에서 신토우 강변을 따라 히다 가도로 향했다. 도야마에 도착한 후 호쿠리쿠 자동차 도로를 달리니 어느새 비는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에그는 쇼와강을 건너 후카야 온천을 거쳐 가나자와에 들어섰다.
처음 보는 마을이었다. 아사노 강과 사이 강 사이에 펼쳐진 시가지에는 오래된 민가와 상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용수와 흙담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가가 백만석 성곽 마을의 풍격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점심은 고린보(香林坊)의 우동집에서 먹었다. 식사를 마친 마이코는 지도를 꺼내들었다.
"오노에 갈 거야."
마이코가 말했다.
"오노 벤키치, 본명은 나카무라 벤키치. 오노에 살면서 오노 벤키치라고 불렸어. 오노초 덴센지(伝泉寺)에 벤키치의 무덤이 남아 있지."
토시오는 지도를 보았다. 가나자와 성터, 겐로쿠엔(兼六園), 혼간지(本願寺), 노마치(野町), 데라마치다이(寺町台) ......
오노는 가나자와 시가지에서 벗어나 동해에 면한 가나자와 항구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가와호쿠가타에서 흐르는 오노가와 사이카와 강 하구에 끼여 있는 오노의 바로 옆은 카네이시(金石)로, 제니야고헤에(銭屋五兵衛)의 유품관이 있었다.

일본해는 거칠게 파도가 일고 있었다. 묵직한 구름의 움직임, 하얀 거친 파도, 검은 항구도시의 지붕.
"호쿠리쿠의 바다는 이제부터가 진짜야."
마이코가 말했다.
덴센지에 있는 벤키치의 무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무덤은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하나는 작고 낡은 비석으로, 벤키치의 이름은 알 수 있었지만 뒷면의 비문은 거의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새로 지은 것으로 보였는데, 묘비명은 같았지만 비석에 일월오봉도 문장이 새겨져 있는 훌륭한 비석이었다.
덴센지 주지스님은 최근 가나자와에 사는 한 독지가가 벤키치 기념관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만 기념관이라고 해도 건물 한 칸이 전부지만, 흩어져 있던 벤키치의 유품이 꽤 많이 모였으며, 열렬한 벤키치 팬이라서 멀리서 온 손님이라면 틀림없이 반가워할 것이라고 했다.

사설 오노 벤키치 기념관 관장 다카라다 고로(宝田五郎)는 일흔이 넘은,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그는 의사였지만 지금 병원 일은 대부분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좋아하는 연구를 마음껏 하고 있다고 했다.
"벤키치의 역립 인형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당장 달려가서 보고 싶었어요."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접실을 개조한 기념관 관장실의 방 전면에는 커다란 패널 세 장이 걸려 있었다. 모두 오래된 사진을 복제한 것으로, 표면에 얼룩과 벗겨짐이 눈에 띄었다. 그 양옆에는 유리 케이스가, 방 중앙에는 응접 세트가 놓여 있었다. 간혹 소문을 들은 애호가들이 관람하러 오면 다카라다 씨가 반갑게 맞이하며 차를 대접하기 위한 용도였다.
"그 주지스님께서 사설 기념관이라고 하셨나요?"
다카라다는 반쯤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기념관이라고 하는건 사실 부끄럽습니다. 유품도 적고, 벤키치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유리 케이스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다테에보시(立烏帽子)에 산바소(三番叟) 의상을 입은 산바소 인형이었다. 이 인형은 태엽 장치로 큰 원을 그리며 춤을 추면서 움직인다고 했다.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있는 가라코 인배대는 고쇼차 위에 잔을 올려놓으면 두 명의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간다고 했다. 그리고 유명한 차 나르는 인형 ...... 노시메(熨斗目)의 옷에 금란(金襴)의 하카마(袴)를 입고, 눈이 동그란 동자(童子)로, 양손에 큰 잔을 들고 있었다. 의상은 곳곳이 낡았지만, 얼굴에 칠한 호분(胡粉)에서 백 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전에도 대학 교수님이 오셨어요. 내부를 꼼꼼히 조사하고 돌아갔는데, 정교함에 혀를 내둘렀지요."
다카라다 씨는 자기 일인 양 좋아하며 말했다.
다카라다의 말에 따르면, 유물이 적다고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한 번에 다 볼 수는 없을 정도라고 했다. 금속으로 만든 원경(遠鏡), 안경, 전기 텔레비전, 사진기, 자명종, 점화기, 라이터, 권총, 도자기 자동 분수대, 증기선 모형 ......
또한 벤키치는 유리 세공과 조각, 대나무 세공과 금속 가공 기술도 뛰어났다고 했다. 다양한 공예품들을 살펴보니, 카라쿠리는 엄청난 지식과 고도의 기술로 형성된 벤키치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인형 제작자가 아니야. 소우지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런 정교한 작품을 만들어낸 오노 벤키치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마이코는 수많은 벤키치의 작품 앞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렇죠. 이토록 뛰어난 천재인데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첫째, 벤키치에 대해선 너무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어요. 비범한 학예를 가졌으면서도 평생 어느 번에서도 벼슬을 하지 않고 호쿠리쿠에 은거하다 죽은 기인(奇人)이니......."
"교토의 깃털 공예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호오, 잘 아시는군요. 어렸을 때부터 시조류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더군요. 스무 살 무렵에는 나가사키에 건너가 서양화도 배웠다고 합니다. 벤키치에 대해서는 이시카와현 출신의 정치가 나가이 유타로(永井柳太郎)씨의 매우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연구를 통해 벤키치가 나가사키에 있었던 시기와 일본 서양학에 가장 큰 공헌을 남긴 시볼트 박사가 나가사키 데지마에 부임한 시기가 같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여기서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 증거는 찾을 수 없었지만요. 추측에 불과하지만 천문학에서 역법, 의학에서 항해술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은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시볼트는 간첩혐의로 고발당했었고, 그 결과 네덜란드로 떠나 나가사키에서 모습을 감췄지요. 벤키치는 그 후 대마도, 조선으로 건너갔고요. 이 역시, 시볼트 사건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귀국 후에는 기이(紀伊)에서 기마술, 포술, 산술 등을 가르쳤습니다."
"벤키치가 오노에 살게 된 계기는요?"
마이코가 물었다.
"덴포 2년, 벤키치가 서른 살이었을 때입니다. 성곽 마을의 외곽에 있는 오노 마을은 교토에서 결혼한 아내 우타의 생가가 있는 곳이었어요. 그 후 메이지 3년, 69세의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 벤키치는 이 땅을 떠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그 땅도, 바닷모래에 파묻혀서 집도 없어졌지만......"
그리고 다카라다 씨는 정면의 벽에 걸린 세 장의 패널을 가리켰다. 가운데 한 장이 오노 벤키치의 사진이었다.
큰 눈과 콧날, 뼈가 굵은 얼굴이었다. 개국론자로서의 강한 신념이 그 풍모에서 느껴졌다.
"오른쪽 사진은 벤키치의 아내 우타 씨입니다. 덴포 말기, 벤키치가 직접 만든 사진기로 촬영한 것이죠. 당시 사진은 기독교의 요술이라며 벤키치가 사진을 찍는 것을 다들 꺼려했죠. 부인도 많이 힘들었을거에요."
"벤키치는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취미도 있었군요."
"그래요. 깊은 지식과 정교한 기술, 그것만으로는 카라쿠리 인형을 만들 수 없죠.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꼭 필요하거든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번주가 벤키치에게 명령해 차를 나르는 인형을 만들게 했어요. 인형은 예의상 영주 앞에 차를 가져다 주었죠. 번주는 문득 부채로 인형의 머리를 두드려 보았어요. 그러자 인형은 두 눈을 번쩍 뜨고 갑자기 허리춤의 칼에 손을 얹어 자르려고 했습니다. 영주가 깜짝 놀라서 벤키치에게 물었더니, 벤키치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인형에 미리 장치를 해 두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번주는 분명 요술이라고 생각했겠죠."
"이런 이야기라면 또 있습니다. 벤키치는 술장수 인형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어느 술집 앞에서 톱니바퀴 소리가 들려서 보니 인형이 술병을 들고 걸어왔다고 합니다. 술장수는 인형이라며 술의 양을 줄였는데, 인형은 술장수의 마음을 알고 움직이지 않았어요. 술장수가 어쩔 수 없이 술의 양을 가득 채워 주자 인형은 돌아갔다고 하고요. 이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어요. 인형은 술병이 일정한 무게가 되지 않으면 마개가 빠지지 않고, 기어가 움직이지 않도록 만들어졌을 거에요."
"원리는 차를 나르는 인형과 같다는 거군요"
"차를 나르는 인형에 대해서는 벤키치도 자필 설계도를 남겼는데, 원본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본을 보여드릴까요?"
다카라다 씨는 유리 케이스에서 한 권의 제본된 책을 꺼냈다. 제본된 표지에 '동시궁록(東視窮錄)'이라고 적혀 있었고, 내용 중 한 장에 정밀한 차 나르는 인형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용은 자동 인형 뿐만이 아니었다. 시계, 사진기, 화학약품, 색유리 제조법부터 자동분수대 내부, 볼타식 파일 도해 등이 세세한 설명과 함께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이코는 그 한 장 한 장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키치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정이 묘한 힘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학력과 창의력이 뛰어났있으니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많았겠지요?"
마이코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계속해서 벼슬길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벤키치입니다. 그래서 제자도 아주 적었어요. 불과 대여섯 명도 안 되는 제자 뿐이었지요, 카라쿠리는 요네하라 린하쿠에게, 의술은 다카라다 이스케에게 가르쳤어요. 다카라다 이스케가 제 증조부이십니다."
"그래서 벤키치의 유품을 많이 가지고 계신 거군요."
다카라다는 수염을 잡아당겼다.
"벤키치는 매독을 치료하는 비법을 알고 있었어요. 수은을 이용한 요법입니다. 벤키치는 은광 채굴에 종사한 적도 있거든요. 하지만 다카라다 이스케가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구한 기간은 극히 짧았어요. 가가번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지요. 즉, 기존의 집정관인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가 죽고 반대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젠고(銭五)씨가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죠."
"잠깐만요."
마이코는 학생처럼 손을 들어 다카라다의 말을 가로막았다.
"젠고 씨라고 하면 그 비극의 호상이라 불리는 제니야 고헤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가가, 카네이시의 호상 제니야 고헤에. 카네이시는 이 오노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럼, 오노 벤키치와 제니야 고헤에는 친분이 있었나요?"
"그렇죠. 벤키치와 젠고 씨는 함께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을 정도였으니까요."
다카라다는 세 장의 사진 패널 중 왼쪽 사진을 가리켰다.
"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 중 왼쪽에 있는 사람이 벤키치, 오른쪽에 있는 큰 사람이 젠고 씨예요."
토시오는 벤키치보다 더 큰 제니야 고헤에의 사진을 보았다. 다소 무뚝뚝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벤키치는 젠고 씨의 틀니를 만들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를 알면 알수록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고요. 특히 자신이 미국에서 구한 권총과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벤키치는 자신이 비밀리에 만든 지구본을 젠고에게 보여주기도 했어요. 벤키치는 젠고 씨이기 때문에 이런 물건을 보여준 것이겠지요. 실수로 지동설 따위를 입에 올리면 신변의 위협까지 받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도 벤키치가 만들어 젠고 씨에게 선물했다는 원안경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의 지식에 의존할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니야 고헤에는 오노 벤키치의 후원자였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벤키치의 지식을 빌리면서 약간의 금품이 오갔겠지만, 벤키치는 젠고 씨의 비호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벤키치의 가난을 본 젠고 씨는 쌀을 기부하겠다고 했지만, 벤키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젠고 씨는 거액의 재산을 모은 뒤에도 장작과 등잔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등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보통 거상이 되면 어처구니없는 유흥비, 쓸데없는 사치가 뒤따르기 마련인데, 그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과단성 있는 결단을 상훈으로 삼고 있을 정도입니다. 한편 벤키치도 골방에 틀어박혀서 문제가 생기면 며칠 동안 물건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즐거움은 고양이와 원숭이를 키우는 것 정도였다고 하고요. 이런 두 사람의 성격에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죠?"
"제니야 고헤에는 밀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네, 확실히 밀무역으로 재산을 모은 것도 사실입니다. 원래 젠고 씨의 집은 가나자와 항구도시 미야노코시(宮腰), 지금의 카네이시(金石)에서 환전상과 간장업을 하고 있었어요. 안에이 2년, 젠고 씨는 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열일곱 살에 가독(家督)을 이었고요. 아버지 밑에서 평범하게 가업을 이어받아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크게 달라졌어요.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서른 아홉이라고 하면 당시로서는 이미 한창 때는 진작에 지난 나이였을텐데..."
"그게 바로 젠고 씨의 비범한 점이죠. 그는 전당포에 있는 오래된 배를 개조해서 큰돈을 벌었어요. 당시에는 배를 새로 한 척 만들면 두 번의 항해로 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고 해요. 이를 계기로 젠고 씨는 해운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해운업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해난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바다 위에는 해적선이 출몰했죠. 하지만 수익은 엄청났어요. 젠고 씨의 배는 홋카이도의 해산물과 비료를 도호쿠로 운반하고 도호쿠의 목재와 호쿠리쿠의 쌀을 간사이로 운반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간사이의 잡화를 싣는 등 운송 이익 외에도 많은 거래가 얽혀 있었죠. 상술에 능했던 젠고 씨는 순식간에 거액을 벌어들였습니다. 이 젠고 씨의 재산에 눈독을 들인 것이 가가번이었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을 움직일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 거군요"
"가가번에서는 젠고씨에게 자꾸만 돈을 바치라고 강요했어요. 평범한 상인이었다면 두말없이 거절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젠고 씨는 그렇지 않았어요. 기꺼이 돈을 바쳤어요.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이것도 젠고씨의 상훈 중 하나였습니다. 공납금에 대한 보답으로 번의 물자 수송용 배를 한 척 맡을 수 있었고, 젠고 씨의 배는 곧바로 가가번의 공식 수송선이 되어 백만 석의 문장, 가가 매화 그릇을 염색한 깃발을 내걸고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가가번의 집정관은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였는데, 그와 손을 잡은 젠고 재벌은 흔들림 없이 성장해 나갔죠."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은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네, 천석선이 열 척. 오백 석선이 열한 척. 오백석선이 십일척. 크고 작은 배를 합치면 이백 척의 선주였고, 전국에 서른네 개의 지점이 있었습니다. 추정 자산은 삼백만 양이라고 하는데요."
"삼백만 양--"
"그렇다고 해도 감이 잡히지 않겠지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을 훨씬 넘을 겁니다."
"수백억!"
마이코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불과 3억 엔의 강도 사건이 시효가 지나기 전까지 일본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억도 새롭다.
"젠고 씨는 오쿠무라 히데미와 함께 밀무역도 하고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다케시마를 중심으로 한 조선 근해 무역, 카라우타의 산탄(山丹) 무역, 사쓰난(薩南)열도에서는 대영국 무역, 북해에서는 대러시아 무역. 멀리 북아메리카에서 남쪽으로 태즈메이니아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다고 합니다. 그 이면에는 벤키치의 원양 항해술, 천문학, 어학에 대한 조력이 있었을테고요. 또한, 젠고 씨는 다양한 과학 기계를 밀수입해 벤키치에게 사용법을 배웠을 겁니다. 덕분에 벤키치도 몰랐던 희귀한 물건에 대한 지식이 더욱 풍부해졌을테고요."
"여러 가지 과학 기계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마이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패널 사진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성장해나가던 젠고 재벌은 정말 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봉건제 하의 재력은 정치적으로는 정말 무력했음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었죠 ......"
다카라다는 수염을 몇 번이고 빗어 넘기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덴포 14년, 젠고와 함께 번영했던 가가번의 중신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젠고 씨는 71세였어요. 지금의 저와 같은 나이였죠."
다카라다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제니야 고헤에와 자신의 나이를 비교했다.
"당시 가가번에는 반대파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라고 해서 검은색 옷을 입고 다니고 있었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싶어 하는 모양입니다. 하여튼, 오쿠무라 히데미 사망 후 검은 하오리당의 쿠데타가 성공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젠고씨의 번(藩) 공식 상인 지위를 박탈한 거였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 재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젠고 씨는 어디까지나 상인일 뿐이었으니,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젠고씨가 좌절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다음에 정말 원대한 계획을 세우거든요. 그 유명한 하북 매립공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둘레가 26km, 약 2천6백 헥타르나 되는 곳을 20년 계획으로 매립해서 논을 만들겠다는 거죠. 이 공사가 완료되면 가가 백만석에 수만 석이 더 추가될 것이었어요."
"일흔일곱 살에 20년 계획이라니…… 정말 이 사람의 깊이를 알 수 없군요."
"공사는 가에이 4년에 착공했는데, 이게 정말 어려운 공사였어요. 게다가 매립으로 인해 생계가 끊어질 것을 우려한 어민들의 격렬한 방해가 있었습니다. 젠고씨의 가훈 세 번째는 '세인의 믿음을 얻아야 한다’였는데, 이 때 세인의 믿음을 얻는데 실패했던 것이지요. 과거 천보 대기근 때에도 쌀 수탈과 타 지역 유출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던 적이 있었는데, 매립 공사 시기에는 현지 노동력보다 임금이 싼 이주 노동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반감이 더욱 심해져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북 투독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독극물 투척 사건이라니, 하북에 독극물을 투척한 건가요?"
"네, 하북의 물고기만 죽으면 어민들의 반대 운동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셋째 아들 요가 독극물을 투척했다는 것입니다. 요가 석회에 냄새나는 물인 쿠사미즈, 기생충인 고나무시의 기름 등을 섞은 것을 몰래 하북에 투입했다고 했지요. 그 결과, 붕어, 고니 등이 죽어 떠올랐고, 이를 먹은 가마우지, 비둘기, 까마귀, 고양이와 개가 죽었고, 결국 인명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물고기를 먹은 십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어요. 가에이 5년, 젠고씨 가문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헤에 일가와 공사 관계자를 합해 51명이 감옥에 갇혔죠."
"하북에 독극물을 던지는 그런 무모한 일이 정말 있었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하북은 원래 수질이 좋지 않은 곳입니다. 수초가 너무 많이 번식하면 물이 썩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런데 왜 고헤에가 체포된 거죠?"
"가가번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젠고 씨를 마음껏 이용해, 말하자면 번 전체가 밀무역을 하고 있었죠. 그 밀무역이 막부의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만약 그것이 표면화되어 막부의 추궁을 받게 되면 번 존폐와도 관련된 사건이 될 테니까요. 번은 밀무역의 죄를 젠고 씨 한 명에게만 뒤집어씌워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지요. 마침 그 때 하북의 집단 중독 사망 사건이 발생했고, 젠고 씨는 번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 희생양이 된 겁니다."
"매립 공사는 중단되었고요."
"물론 그렇죠. 대체로 간척이라는 공사는 어려운 사업입니다. 같은 시기에 막부는 인바누마(印旛沼)의 간척에 착수했지만 이것도 실패했어요. 세 번째 실패였습니다.…….. 한편 막부에서는 젠고 씨의 밀무역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있었죠. 막부 내부에서도 대외무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였으니까요. 대정봉환이 눈앞에 다가왔고요. 일일이 밀무역을 감시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겁니다. 역사의 흐름은 이미 거기까지 왔던 거죠."
"번에게 시대를 판단할 힘이 없었던 거군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도 당시 상업 자본은 정치적으로 무력했습니다. 오사카의 요도야 다쓰고로(淀屋辰五郎), 하마다번의 아이즈야하치(会津屋八) 우에몬(右衛門)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사건의 결말은?"
"제니야 고헤에는 체포된 지 석 달째 되는 날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젠고는 80세였어요. 요와 그 형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지금도 십자가의 소나무라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제니야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고요. 이것이 젠고 재벌의 마지막이 되었죠. 벤키치가 51세 때였습니다."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노 벤키치는 어떻게 되었나요?"
잠시 후 마이코가 물었다.
"좋은 지인을 잃은 외로움은 누구보다 컸을겁니다. 사람을 피하는 성격은 점점 더 강해져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일개 촌부로서 일생을 마감했어요. 한편, 카라쿠리 기우에몬의 다나카 히사시는 젠고 씨가 투옥된 해에 교토에 기공당(技巧堂)이라는 가게를 열었죠. 이후 차근차근 키워나가 마침내 긴자에 다나카 제조소를 개업했고요. 그게 오늘날 도시바의 기틀이 된 겁니다. 같은 천재였지만, 인간의 일생은 정말 명암이 엇갈리는 법이에요. 이것은 그저 운의 좋고 나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츠루슈일록(鶴寿日録)에 따르면........"
다카라다의 장탄식을 멍하니 듣고 있던 마이코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츠루슈..…"
"츠루슈 일록. 아까 말씀 안 드렸나요?...."
"처음 듣는 말이에요. 그 츠루슈일록이라는 건?
"벤키치의 일기의 일부가 남아 있어요. 그걸 츠루슈일록이라고 합니다."
"왜 츠루슈인가요?"
"벤기치 씨의 호가 츠루슈였거든요. 또 이치토(一東)라는 호도 사용한 적이 있어요 ......"
"츠루슈에, 이치토 ......"
오노 벤키치와 오나와에 이주한 마와리 사쿠조와의 인연은 이미 분명한 것 같다. 사쿠조는 자신의 가게 이름을 '鶴寿堂(쓰루슈도)'라고 짓고 자신의 아들을 '東吉(도키치)'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연도, 암시도 아니다.
"오노 벤키치의 제자 중에 마와리 사쿠조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마이코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벤키치의 제자는 극소수에 불과한데, 마와리 사쿠조 ...... 라는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 츠루슈일록은 벤키치의 일생을 기록한 일기인가요?"
"아뇨. 아까 말씀드렸던, 오쿠무라 히데미 씨가 병사했던 해인 덴포 14년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벤키치의 유언대로 사후에 소각되었는데, 이 기록만 우연히 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볼 수 있나요?"
"복사한 것이라면 거기에 있습니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東視窮錄)'이 들어있던 같은 유리 케이스 안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다카라다는 츠루슈일록의 사본을 꺼내 마이코 앞에 놓았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과 같은 정갈한 서체로 세밀하게 쓰여져 있었다. 일상 기록이라 길지 않았다.

3일, 맑음 저녁에 복어국을 먹다
4일, 흐림. 베지 못하는 말 도면 그리기. 우타가 통풍을 일으켰다.
5일, 비, 도면 그리기를 계속.
6일, 비, 카네이시로 감. 회의 후 심사숙고 끝에 승인을 미룸.
7일, 맑음, 하루 종일 고민하다.
8일, 맑음, 도면은 진전이 없다.
9일, 맑음, 久右衛門(구우에몬)이 모리타치노치토세(森八の千歳, 일본 전통 과자)를 가져옴. 久右衛門(구우에몬)에게 일을 맡기고 계속 도면을 그리다.
10일, 맑음, 우타가 역립인형의 의상을 만듬.
11일, 맑음, 도면 그리기를 계속하다…..

마이코는 열심히 츠루슈일록을 읽어 내려갔다. 다카라다 노인은 다른 방에서 다도 도구를 가져왔다.
"이 일록의 앞부분에 '무자마(無斬馬)'라고 되어 있는데, 무자마(無斬馬)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마이코는 다카라다 노인이 가져온 차를 마시며 물었다.
"베이지 않은 말이란, 오래된 장난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카라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실물은 남아있지 않겠군요."
"네, 아쉽게도 실물은 남아있지 않아요. 하지만 어떤 장난감이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벤키치가 읽은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 서적에 그 장난감이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죠. 베이지 않는 말이란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만들었다는, 베어도 목이 다시 연결되는 목을 가진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되네요."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목?"
"이 말은 금속으로 만들어졌어요. 포도주 잔을 대면 안의 술을 다 마시죠. 장치는 놀라울 정도로 간단해요. 그냥 말의 중앙에 있는 관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말에게 술을 마시게 한 겁니다. 그 후 날카로운 칼로 말의 목을 베는데, 칼은 말의 목을 완전히 관통해 아래로 통과합니다. 그러나 베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목은 제대로 몸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잔을 대면, 말은 다시 포도주를 다 마시고요."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면 2천 년 전이겠군요."
마이코는 놀란 듯 말했다.
"헤론은 증기기관, 압착기, 압착 펌프, 사이펀의 원리를 발견한 사람으로 유명하죠. 동시에 많은 장치도 만들어 냈어요. 제단의 불로 춤추는 신상, 흐르는 물로 우는 새, 동전을 넣으면 일정한 성수가 흐르는 그릇, 이런 것들은 지금의 자판기의 원조겠지요."
"그럼,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말의 목의 장치는 뭐죠?"
"원래 말의 목에는 잘리는 절삭점이 있어요, 말의 목은 세 개의 고리로 연결됩니다. 칼이 첫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칼이 지나갈 길을 만들지만 목은 두 번째, 세 번째 고리가 지탱합니다. 칼이 두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원래대로 제자리에 연결되고요. 이렇게 해서 칼이 완전히 목을 통과해도 목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포도주가 지나가는 길의 개폐도 있어서 실제로 만들기는 아주 어려운 장치였습니다. 벤키치는 그 장치 제작에 도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기록에 따르면 벤키치는 구우에몬이라는 사람과 자주 만났는데, 어떤 사람인가요?"
"그건 예전에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다카라다는 잠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스즈키 구스에몬, 마에다 도사마모루(前田土佐守)의 직행(直行) 가신으로 30석 봉록 무사였습니다. 당시 30살을 갓 넘겼을 것입니다. 벤키치의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명입니다. 벤키치는 직행의 대우를 받았고, 그의 중재로 출입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즈키 구스에몬은 벤키치의 학문을 완전히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배우는 도중에, 봉록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죠."
"가가번의 개혁 때문이었나요?"
"아니요, 오쿠무라 히데미가 죽기 전입니다. 시녀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번에서 쫓겨났죠."
"그래서 구우에몬은 어디로 갔습니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다른 몰락 무사와 비슷한 길을 갔겠지요."
마이코는 아쉬운 듯 츠루슈일록을 덮었다.
"그런데 최근에 벤키치에 대해 조사하러 이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마이코는 가방에서 사진을 꺼냈다. 토모히로와 마사오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다.
"어?"
다카라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보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군요. 요즘은 옛날로 갈수록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데, 가까운 일이라면 어제의 일도 잘 떠올릴 수 없어요.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 사람들로부터 최근에 오노 벤키치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나 해서 여쭈어 보았을 뿐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네요. 물론 당신 같은 미인을 만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다카라다 노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노인의 틀니가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오노 벤키치 기념관을 나와서 젠고 유품관으로 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품관은 리모델링을 위해 휴관 중이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겠지."
마이코는 그리 아쉽지 않은 듯 말했다.
에그는 젠고 유품관을 나오자마자 고베의 보금자리인 혼류사 앞을 지나 그대로 해안으로 향했다.
마이코는 차를 세우고 쏟아지는 진눈깨비 길에 섰다. 검게 드리워진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제니야 고헤에의 동상이 거칠어지기 시작한 일본해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헤에는 손에 원안경을 들고 있다. 오노 벤키치가 최신의 지식과 뛰어난 기술로 만든 원안경일 것이다.
다카라다 노인은 두 사람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젠고 씨, 벤키치라고 불렀다.
고헤에가 팔십, 죽음을 앞두었을 때 그의 가슴 속에 떠오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토시오는 격렬한 파도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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