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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청동 램프의 저주 - 존 딕슨 카 / hansang(?) : 2.5점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고학자 길레이 교수가 전갈에 물려 죽은 뒤, '무덤의 저주'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고인이 세반 백작과 팀을 이루어 이집트에서 헬리홀 무덤 발굴을 진행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백작의 딸 헬렌 로린은 이집트에서 귀국하던 중, 점술사 림베이로부터 램프를 돌려주지 않으면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거라는 예언을 받았다. 청동 램프는 출토 유물 중 하나로 그녀가 이집트 정부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물건이었다.

귀국 후 헬렌은 연인 키트, 친구 오드리와 함께 저택에 도착한 뒤, 램프를 장식하겠다며 혼자서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헨리 메리벨 경은 마스터스 경감과 함께 수사에 착수했고, 그날 함께 사라졌던 전 백작부인 초상화 행방을 쫓다가 헬렌이 초상화를 가지고 골동품상 맨스필드 부인의 가게에 방문했다는걸 알아냈다.
H.M 등과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저택으로 돌아온다던 세반 백작마저도 저택 안에서 사라졌다. 백작의 외투 등이 남아있던 자리에는 저주의 청동 램프가 놓여 있었다.

연이은 인간 소실로 당혹해하던 키트 앞에 헬렌이 나타나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지만, 뒤이어 들어딕친 경찰 앞에서 다시 사라졌다. 경찰은 건축가까지 불러와 은신처에 대해 치밀한 조사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다음 날, 헨리 메리벨 경은 모든 관계자들을 저택에 소집했다. 그리고 진상을 밝히는 추리쇼를 펼쳤다. 헬렌은 은신처에 숨어있던게 아니라, 집사 벤슨의 도움으로 하녀로 위장하고 있었다!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은 존 딕슨 카의 장편. 1945년 발표작입니다. 일본 아오조라 추리문고본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정말 오래 걸렸네요. 한 달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오컬트와 본격 추리가 결합된 작품입니다. 작가의 특기이기도 하지요. 그동안의 오컬트 소재는 중세 전설에 관련된게 많았었는데, 이번에는 이른바 '미이라의 저주', 그리고 저주로 사람이 사라져버린다는 인간 소실 트릭이 함께 엮여 전개됩니다. 폐쇄된 대저택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상황이니, '밀실의 대가'로서의 실력도 발휘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기대보다는 많이 지루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헬렌의 소실이, 흥미를 자아내지 못하고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못한 탓이 가장 큽니다. 헬렌은 차에서 내린 후, 저택 자기 방 벽난로 윗 선반에 램프를 장식해 놓겠다고 먼저 들어갔습니다. 키트와 오드리는 밖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고요. 그런데 집사 벤슨을 포함한 저택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헬렌을 보지 못했고, 저택 밖에서 일하던 수 많은 사람들도 헬렌이 나가는걸 보지 못했다고 했죠. 
그런데 아무도 문을 감시하거나 헬렌의 모습을 쫓고 있었던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라졌다"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아요. 특히 저택 밖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쁜 와중이었다면, 누군가 나가는건 충분히 놓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의 눈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세반 관에 살고 있는 헬렌이라면 어디로 몰래 나갈 수 있는지, 아니면 어디서 몸을 숨기고 있을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테고요. 그래서 여러모로 대단한 사건으로 생각되지 않았어요. 
뒤이어 벌어진 세반 백작 소실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작이 들어온걸 실제로 본 사람은 없고, 특별한 감시도 없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만들어진 상황일 가능성이 높지요. 실제로도 샌디 로버트슨이 백작의 차를 몰고 들어온 뒤, 옷가지를 서재에 던져두었을 뿐이었죠.

다행히 헬렌이 키트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던 두 번째 소실부터 재미있어지기 시작합니다. 마스터스 경감의 지시로 경찰이 모든 통로를 막은 상태에서, 철저하게 조사를 벌였지만 결국 헬렌을 찾아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 소실이 일어난 것이지요.
여기서 사용된 트릭은 헬렌이 하녀로 변장하고 있었다는겁니다. 현실적이라는 점은 좋아요. 
이 작품보다 10년은 앞서 발표되었던 여사님 작품에서도 비슷한 트릭이 활용된게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처럼 "인간 소실"용으로 사용된건 아니었으니, 나름 신선한 느낌을 전해 주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를 위한 단서들도 모두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헬렌이 저택으로 들어올 때 차에서 떨어트린 담배를 짚기 위해 허리를 숙였던 이유는? 이미 고용인들에게 하인으로 소개되었던 헬렌을 관리인이 알아볼까봐였습니다. 헬렌이 다시 나타났을 때 비옷을 입고 단추도 모두 채웠던 이유는? 속에 하녀복을 입고 있어서였습니다. 헬렌이 도착하는 날, 모두가 바쁜 와중에 휴가를 낸 하녀도 한 명 있었고요. 그 외에 이런저런 단서와 복선들로 트릭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초상화가 없어진 사건도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헬렌이 선대 백작 부인과 꼭 닮았기에, 그 초상화를 치워버릴 필요가 있었던겁니다.
공범(?) 벤슨이 이를 도왔다는걸 알려주는 단서들도 꼼꼼히 삽입되어 있습니다. 헬렌이 언제 도착하는줄 몰랐다는 벤슨이 마침 딱 맞춰서 꽃으로 화병을 장식했던 것 처럼 말이지요. 불가능 범죄 추리물의 대가다운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하지만 현실적이며 공정할 뿐, 높은 점수를 줄 트릭은 아닙니다.  H.M.의 말대로 모든 신문에서 저주에 대해 떠들며 헬렌의 사진을 실었는데, 하녀로 변장한 헬렌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단점이 치명적인 탓입니다. '헬렌은 사진과 실물이 굉장히 다르다!'는걸 이유로 내세우는데, 헬렌을 사진으로만 보았던 쥴리아 맨스필드가 헬렌을 알아보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키트나 오드리 등 실제로 헬렌을 보아왔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까지 숨어있기도 쉽지 않았테고요.
게다가 세반 백작 소실 사건은 앞서 말했듯 딱히 트릭은 없습니다. 경찰이 출입구를 감시하지 않아서 가능했을 뿐입니다.

헬렌이 사라졌던건 '저주'라는 뜬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한 연극이었다는 동기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인간 소실 사건을 언론에서 크게 다루게 한 뒤, 나타나서 '이건 모두 연극이고 저주 따위는 헛소리다!' 라고 말할 셈이었다는데, 이럴거라면 주변 인물들이나 저택 사람들에게 트릭을 써 가면서까지 몸을 숨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진상이 공개되어 봤자, 일반 대중들은 저택 사람들이 한통속이었다고 생각할게 뻔하잖아요? 게다가 잘못된 소문과 정보를 진실로 바꾸는건 굉장힌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애초에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는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그냥 연극따위 벌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게 훨씬 나은 방법이었습니다.
샌디 로버트슨이 백작을 죽이려 했다는 동기와 상황도 별로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샌디는 헬렌이 사라졌을 때 카이로에 있었으니, 백작이 사라져도 자기가 의심받지 않을 거라 여겼다는데 말도 안됩니다. 두 사건을 함께 엮어서 볼 이유는 없을 뿐더러, 당시 백작 옆에 있었던 사람은 샌디 뿐이라서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샌디가 빼돌린 유물 문제는 관련자들 수사만 해도 금방 알 수 있었을테고요. 분명 살인 미수범인 샌디를 백작이 그냥 놓아 보내준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국내 미발표 소개작을 완독했다는 기쁨은 크지만, 대표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처집니다. 번역을 시도해 볼 까 했는데, 그럴 수고를 들일 가치는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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