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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9

끝내주는 책 - 김지현 외 : 별점 3점

끝내주는 책 - 6점 알라딘 도서팀 엮음/알라딘

알라딘 창사 16주년 기념 무료 e-book으로 읽은 책. 국내 장르문학계에서 유명한 편집자, 작가, 번역자 분들이 각자 고른, 제목 그대로 "끝내주는" 장르문학 한권씩에 대해 소개하는 에세이집입니다.

모두 19분이 19권의 책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장르문학 애호가이긴하나, 이 책에 실린 저자분들을 모두 알진 못합니다. 아는 분은 도진기, 이영도, 이우혁, 듀나, 좌백, 진산 작가님과 출판사 대표님인 김홍민 (북스피어), 안태민 (불새) 8명 뿐이니 절반도 안되네요. 엘릭시르, 황금가지 편집장님과 <미스테리아> 편집장님, 피니스아프리카에 대표님도 워낙 잘 아는 출판사와 잡지라 친숙하게 느껴지긴 합니다만... 그래도 12명이니 많이 부족해요.
여튼, 이러한 도서 관계자분들은 과연 어떻게 책을 소개할까? 라는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장르소설 전문 리뷰어를 자청하기에 다른 분들은 과연 장르문학 소개를 어떻게 접근할지가 아주 궁금했거든요. 물론 무료라는 이유도 컸고요.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참 대단한 글들이었습니다! 소개된 책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들게끔 하는 측면에서 말이죠.
제가 읽고 리뷰를 남기기도 한 <고스>, <LA 컨피덴셜>,<살의의 쐐기>와 비교해보면 제 리뷰에 무엇이 부족한지 확실히 드러나요. 저는 표피적으로만 접근하고, 좋은 점도 제 취향 중심으로 짤막하게 쓸 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제 리뷰만 읽고 딱히 읽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기는 힘들죠.
허나 이 책에 소개된 글들은 단지 책에 대한 간단한 정보 나열 뿐만이 아니라, 왜 좋았는지에 대한 감상, 기타 정보와 글을 쓴 저자의 독서 당시 일상이 결합되어 자세하게 쓰여져 있는 등 하나의 완성된 에세이로 봐도 무방할 정도라는 점에서 참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스포일러는 전혀 없으면서도 딱 궁금한 부분까지만 이야기해주면서 읽는 사람을 감질나게, 안달나게 만드는 솜씨들도 제법이었고 말이죠.

일종의 에세이라 각 글들을 요약하기는 힘들기에 딱히 소개하진 않겠습니다만, 가장 와 닿았던 것은 <영웅문>을 소개한 임지호의 글이었습니다. 중, 고등학교때 무협소설에 몰두했던 제 자신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무엇보다 <영웅문>을 소개하며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인용하는 것이 참 맛깔나더군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 중 「바쇼 한 명의 문제」라는 단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정형시 하이쿠의 전신인 하이카이는 원래 서민들의 심심풀이 정도였는데 마쓰오 바쇼라는 천재가 등장하면서 예술로 승화되었다. "탐정 소설에서도 이러한 천재성이 두드러진 작가가 나타나면 탐정 소설 또한 예술로 평가받는 날이 올 것이다”라는 이야기다. 란포는 탐정 소설계를 통틀어 바쇼 같은 작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만,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라는 부분인데 <영웅문>이 바로 바쇼같은 책이라는 거죠. 참 그럴듯하지 않나요? <영웅문>은 충분히 이러한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걸작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도 하고요.
김준혁이 <어스시의 마법사>를 소개하며 인용하는 명대사 역시 책에 대한 호감을 높이는데 일조합니다. 대마법사 오지언의 말인 듯 합니다. “주문을 시험해 보고 싶은 게로구나. 너는 우물에서 너무 많은 물을 퍼 올렸다. 기다리렴. 어른이 된다는 건 참는 것이지, 힘을 다스리는 이가 된다는 건 아홉 배나 더 인내한다는 것이고.”
안태민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도 기억에 남네요. 마지막 글이기도 할 뿐더러 국내에서 어렵고도 어려운 SF 전문 출판사의 대표로서 왜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자신의 추억과 작품과 엮어 잘 소개하고 있거든요.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중 명대사인 ‘탄스타플’, 즉 ‘공짜 점심은 없다(There ain’t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라는 말에 빗대어 자신의 처지를 말해주는 부분이 특히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소개된 책들 중 8권은 이런저런 경로로 읽었으니 11권을 읽지 않았는데, 지금 가장 읽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은 듀나의 단편집들과 나카타 에이이치의 <기치조지의 아사히나 군>,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였습니다. 물론 다른 책들 모두 구해봐야겠지만 우선 이 책들부터 구해봐야겠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이렇게 장르문학에 대한 소개가 맛깔나게 된 에세이집은 따로 찾아보기 힘든데, 알라딘에서 멋진 기획을 선보여 준 것 같습니다. 무료이니 만큼 장르문학을 좋아하신다면 한번씩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5/08/25

로망스 - 윤태호 : 별점 2.5점

로망스 - 6점
윤태호 지음/애니북스

윤태호 작가의 중기(?)작 . 2001년도 발표 당시 가장 핫한 매채였던 스포츠 신문 (굿데이)에 연재했던 작품입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메이저 웹툰이었달까요?

국내 최초의 "노인 개그만화"를 표방하고 있는데 솔직히 영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노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아이디어는 좋지만 개그로 풀어나가는 방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에요.
가장 큰 불만은 노인의 성, 본능을 소재로 써먹은 이야기들에 있습니다. 이게 희화화 대상인지도 잘 모르겠을뿐더러 솔직히 별로 웃기지도 않거든요. 이런 점에서는 스포츠 신문에 연재하지 않고 그냥 일반 매체에 연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스포츠 신문인 아무래도 성적인 소재가 주일 수 밖에 없었을 텐데, 앞부분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다룬 이야기라던가, 배나온 김노인이 만삭의 딸 발톱을 깎아주는 이야기처럼 평범한 노인들 일상을 풀어나가는게 훨씬 좋았을것 같아요 세밀한 관찰이 뒷받침된 디테일이 엿보이는데, 전체적으로 이런 이야기가 많지 않은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노인분들을 우리들 앞에 선보인 아이디어는 지금 보아도 충분히 신선합니다만, 풀어나가는 방식이 좀 제 취향이 아니기에 감점합니다

2015/08/22

인간은 왜 박수를 치는가? - 고바야시 도모미치 / 임정은 : 별점 3점

인간은 왜 박수를 치는가? - 6점 고바야시 도모미치 지음, 임정은 옮김/다반

동물의 본능이나 습성, 행동의 특성이나 의미, 진화 등을 비교·분석하여 연구하는 동물행동학의 관점에서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동작과 행동 심리를 풀어낸 과학 에세이.

당연한 습관과 같은 동작, 행동, 심리를 꽤나 그럴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우선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길을 걸을 때 여성은 안쪽, 남성은 바깥쪽에서 걷는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진화적 적응으로서의 성차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인간이 박수를 치는 이유는, 박수에는 우호적이고 친화적인 감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호의 감정과 박수의 높은 고음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인데, 부모들이 아기에게 말을 걸 때 의도적으로 목소리의 음정을 올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네요. 아기는 높은 목소리를 들었을 때 웃는 빈도가 높아진다고 하고 말이죠. 낮은 목소리는 적의, 높은 목소리는 친근하고 온화한 감정을 나타낸다는 것은 사람말고도 많은 동물에게서 확인된 것으로, 운동경기에서의 응원도 고성이며 콘써트장이나 운동경기장에서 부는 호각 역시 같은 이치랍니다. 반대로 선수에게 불만이나 적의를 나타낼 때에는 신발로 바닥을 울리거나 우우하고 야유하는 낮은 소리를 내고요. 옳거니! 정말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선글라스를 쓰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건방져 보이는 이유도 재미있어요. 상대방의 언동에 따라 표정과 자세가 바뀌는데 선글라스를 쓰면 눈과 눈 주위의 상태 변화가 보이지 않게되기 때문에 상대방을 무시하는 메시지가 은연 중 전달되는 것이라는군요. 즉, 당신은 내가 굳이 에너지를 쓸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뜻.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팔에서 힘을 뺀 자세로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것인데, 윗사람은 작은 에너지를 쓰고 아랫 사람은 큰 에너지를 쓴다는 보편적 동작의 규칙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건방져 보인다고 합니다.
그 외에 선글라스는 포커페이스 전략과 동일하게, 표정을 감춰 강한 상대로 보이게 만들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는 팔꿈치가 밖으로 휘어지면서 어깨가 부풀어 올라 상대방을 위협하는, 위압감을 주는 자세가 되는 것도 이유라네요.

언어가 발전한 것은 다채로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남성이 여성의 인기를 끌기 쉬웠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새로왔습니다. 여성의 인기를 끌면 그 남성의 특성이 그만큼 많은 자식들에게 계승되어 호모 사피엔스 공통의 특성이 된다는데 참 신선한 이론이었어요.
이렇게 사람이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다음 세대에 남기기 위해 행동하는 동물이라는 전제로 설명되는 것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오래 전에는 수렵에 능한 남성이 인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먹이 획득 대신 돈, 즉 사냥을 잘하는 이성대신 재산을 많이 가진 이성이 그만큼 여성의 인기를 끄는데 유리하다는 것.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만 이것이 순위를 높이고 싶은 심리로 이어져 출세에 목을 매게 된다는 것이죠. 돈이나 좋은 이성 획득 용이하니까요.
데이트 중 한눈 팔기도 마찬가지. 남성만 그러는 이유는 짝을 찾는데 있어 여성은 남성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최우선이나, 남성은 여성의 용모와 젊음이 우선순위가 높기 때문이에요. 여성은 임신과 육아 기간에 자신을 원조해 줄 남성과 짝을 이루어야 하지만, 남성은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는 건강하고 임신하기 쉬우며 안전할 출산할 가능성높은 여성 다수와 성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기도 하고요. 아~ 이건 역시나 유전자가 남자에게 시키는 행동이었어!

그 외에도 상사와 부하와의 관계를 상사는 상사 자신의 이익 증대 방향으로 행동하는 부하를 우대하고, 부하도 상사의 이익 증대 의도를 어필하는 것으로 풀어낸 것도 인상적이에요. 구체적으로 상사의 에너지를 조금만 소비하고, 부하가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여 상사의 희망을 이루어 주려고 하는 상황,  예를 들어 상사가 차를 내릴 때 문을 열어주거나, 복도에서 길을 양보하거나, 농담에 박장대소하거나... 존댓말이 더 긴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합니다.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하고, 쉽게 설명해주는 글솜씨도 좋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단점이라면 아무래도 "에세이"에 가까운 책이라 그런지 그럴싸하지만 실제로 "증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내용들이 대다수라는 것이죠. 저자 스스로도 대부분의 내용을 "가설"이라고 하고 풀어나가고 있고요. 또 책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설명에 딱히 도움도 안되는 기묘한 일러스트들과 읽기 거북하게 편집된 책의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도 단점이 책의 가치를 폄하할 정도는 아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근거는 없지만 이러한 이론도 있다는 측면에서는 충분히 값어치를 하는 것 같아요. 알라딘을 찾아보니 절판되었던데, 책의 디자인을 일신하여 개정판으로 새로 출간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여튼, 구해보실 수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5/08/19

숀더쉽 (2015) - 마크 버튼, 리처드 스타잭 : 별점 2.5점


농부 아빠, 개 "비처"를 비롯한 여러 친구 동물들과 매일매일 변함없이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양떼들은 양 "숀"의 아이디어로 아빠를 재운 뒤 하룻동안의 일탈을 시도한다.
허나 실수로 아빠가 "대도시"로 사라진 뒤 비처와 숀, 그리고 양떼들은 아빠를 찾기 위해 대도시로 떠나는데....


아드만 스튜디오의 클레이 애니메이션 장편 신작. 딸아이와 함께 여름 휴가 기간에 감상한 영화입니다.
아드만 스튜디오 명성에 걸맞는, 장인 정신이 빛나는 장면장면은 확실히 대단해요.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는 정점을 찍었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죠. 특히나 "빅시티"를 다층적인 무대처럼 꾸며 연출한 장면들이 아주 놀라왔어요. 얼마나 큰 세트를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스케일로는 거의 정점을 찍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거든요. 여튼, 제작과정이 참으로 궁금해 질 정도로 압도적인 작품이었어요.
특유의 꼼꼼한 유머도 역시나 빛을 발합니다. 빵빵 터진다기 보다는 피식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해주는게 아주 좋았어요.

허나 이러한 완성도에 어울리는 이야기 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지나치게 아동 취향이라는 느낌이 든 것은 아쉬운 점입니다. 쉽게쉽게, 별 생각없이, 그리고 우연에 많이 의지한채 작위적으로 진행되거든요. 아빠가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숀이 동물보호소에서 비처를 만나게 되는 등등... 이후의 모든 전개가 그러합니다.
그나마 좀 이치에 맞고 잘 짜여졌다 생각되는 장면은 기억을 잃은 아빠가 우연히 들린 미용실에서 바리깡을 보고 조건반사처럼 찾아온 손님의 머리를 양처럼 깎는 것, 그리고 주인공 숀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설정을 딱 한 장면이지만 아주 효과적으로 써먹는 것 정도에요.

하지만 제 딸아이는 아주 즐겁게 감상했기에 아동 취향이라고 폄하하기는 어렵겠죠. 제가 이런 작품을 보고 즐기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것일 뿐이니까요. 영원한 소년일줄 알았는데... 여튼, 제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어린 친구들 모두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입니다.

2015/08/16

연씨별곡 1,2 - 윤태호 : 별점 2점


오랫만입니다. 극심한 더위, 휴가, 그리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치열한 프로야구 순위싸움 덕분에 블로그 업데이트가 좀 힘들었네요. 그동안 잘들 지내셨죠? 이번에 소개드릴 작품은 휴가 기간 중 본가에서 발굴한 고전입니다. <미생>으로 대박을 친 윤태호 작가의 초기작이죠.
아주 오래전, <야후> 1권을 보고 꽤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전혀 모르던 "윤태호"라는 작가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 당시 구해보았던 작가의 작품 중 하나로 격주간 잡지 <미스터 블루>에 연재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제가 구한 작품은 이 작품과 <로망스>가 전부입니다. 이유는 당연히... 구해본 작품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특히나 이 작품 탓이 큽니다.

작품의 시작은 나쁘지 않습니다. 흥부전의 흥부와 놀부 캐릭터를 뒤집어, 실제로는 흥부가 나쁜 놈이었다는 설정인데 아이디어는 제법 괜찮거든요. 고전 해학 개그 만화라 칭해도 괜찮을 정도로 판소리, 사투리, 고전 특유의 말투를 유려하게 살려낸 대사들도 인상적이에요. "성님이 사정없이 문자를 써버린께 나도 한번 써볼라네. 당태종은 성주로되 천하를 다루어서 그 동생을 죽였으며 조비는 영웅이나 재조를 시기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성님같은 산골 똥초, 농부가 우애지정을 알겄소!" 뭐 이런 식입니다. 특유의 뎃셍력 역시 초기작임에도 발군이고요.
그러나 초반을 지나서면서부터 이야기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튀어나가 버립니다. 당시 인기있던 드라마의 패러디인 동네 건달 조직인 "모레 쉬게"의 등장까지는 그렇다 쳐도, 제비가 흥부의 아내를 유혹하다가 다리가 부러진 뒤 제비 대장이 "박씨" 제비를 보내 복수한다는 이야기로 접어들면서는 도저히 수습이 안될 정도에요. 아무런 개연성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즉흥적인 일회성 이야기로 일관할 따름입니다.
제비파를 모조리 제압하고 흥부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만, "금융 실명제" 때문에 놀부에게 모든 재산을 넘기고 자신은 왜곡된 "흥부전" 출판을 통해 여론몰이로 재산을 다시 찾으려 한다는 결말도 뜬금없는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원래 설정대로 끝을 냈다는 것에만 의미를 둘 수 있을 것 같네요.

흥부 캐릭터의 좌충우돌 하나는 돋보이는 만큼, 흔히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캐릭터가 제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라는 변명이 잘 통할 이야기라고는 할 수는 있겠죠. 허나 재미나 완성도 모두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좀 더 잘 짜여진 이야기가 좋아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절판된지 오래되었는데 윤태호 작가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 탓에 중고가가 상당한 수준이더군요. 몇권 안남은 잔여 물량이 빨리 소진되어 가격이 더 올라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2015/08/13

연필 깎기의 정석 - 데이비드 리스 / 정은주 : 별점 2점

연필 깎기의 정석 - 4점 데이비드 리스 지음, 정은주 옮김/프로파간다

자칭 연필 깎기 장인이라는 저자가 쓴 연필 깎이의 모든 것.
연필 깎는데 필요한 준비물들, 주머니 칼에서 시작해서 외날 휴대용 연필깎이, 다구형.다단식 휴대용 연필깎이, 이중날 회전식 연필깎이 등의 도구를 이용한 연필 깎기 방법,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하거나 폭포에서와 같은 다양한 장소, 환경에서 연필 깎는 법과 뒤로 깎기와 같은 진기한 묘기 등 연필 깎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설명은 물론 도판도 충실하고, 내용도 신뢰할 수 있도록 잘 꾸며져 있기는 하지만... 연필 깎기 장인은 개뿔, 만화가 출신 저자가 실존하지 않는 세계를 진지하게 접근하여 웃음을 선사하는, 그런 류의 책입니다.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처럼 말이죠.

그러나 앞서 예를 든 책들은 독자도 모두 "허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설정이 널리 공유되어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는 반면에, 이 책은 실제 "연필깎기 장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독자에게 설득하기 위한 설정에 상당한 노력을 들이고 있습니다. 진지한 수준도 상상을 초월하고요.
손상된 연필심 제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필의 몸통을 칼로 베고 촉을 제거하는 행동을 아래의 시, 엘리너 와일리의 <나의 영혼에 부치는 시>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네요.

"꾸밈없는 담흑빛의
순순하고 완전한 형태가
숙명의 포물선을 그리며
폭풍우 속에서 균형을 잡네"

전체 내용이 모두 이런 식이에요. 크게 빵빵 터지지는 않지만 피식할만한 수준은 됩니다.

하지만 전동 연필깎이를 다룬 부분처럼 의도적으로 웃기려고 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단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 스스로 웃음기를 배제하고 더 진지하게 쓰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이 된 것 같아 아쉬워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별 것도 아닌 내용을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쓰면 그 자체가 하나의 컨텐츠가 된다는 것은 주목할만 할 것 같아요. 저 역시도 몇가지 아이디어가 있는데 진심을 담아 더욱 열심히 고민해 봐야 겠습니다.

2015/08/10

그래픽 디자인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 - 스티븐 헬러 외 / 이희수 : 별점 2점

그래픽 디자인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 - 4점 스티븐 헬러.베로니크 비엔느 지음, 이희수 옮김, 송성재 감수/시드포스트(SEEDPOST)

간만에 읽은 전공 도서.
제목 그대로 그래픽 디자인을 바꿔 놓은 다양한 아이디어 100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제목만 보면 어떤 스타일, 기법이 주로 수록되어 있을 것이라 여겨지죠. 회화로 따지면 "인상파", "입체파"같이 말이죠. 일단 그러한 내용이 많기는 합니다. 신체 각인, 판박이, 방사광선, 패스티시, 지목하는 손가락, 기념비적 이미지, 컬러 블록, 장식적 로고 타이프, 은유적 레터링, 대문자 스와시, 콜라지 등등등 처럼요.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디자인의 대상이 되는 소재와 매체, 즉 책이나 책가위, 다양한 잡지들이나 지속가능한 패키지 디자인, 브랜딩 캠페인이나 공익광고 캠페인과 같은 일련의 디자인 운동, 거기에 디자인 사고와 같은 방법론까지 포괄하여 실려있습니다.

허나 기대와는 달라서 실망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았어요. 풍성하기는 하지만 소소하거나 지엽적인 주제들이 많아서 정말 그래픽 디자인을 바꾸어 놓았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실무나 작업에 도움이 될만한 부분이 거의 없다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내용에 비해 부족한 도판 역시 감점 요소고요.

아울러 "그래픽 디자인"의 범위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도 좀 궁금해집니다. 일본에서는 "범죄"만 등장한다고 모두 추리소설로 지칭하는 경향이 있기도 한데, 작가의 창조적인 어떤 행위만 들어가면 그 모든게 "그래픽 디자인"이 되는 것처럼 쓰여져 있거든요.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래서야 넓고 얕은 부분만 건드리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죠. 한마디로 말하자면, 관심있는 항목을 환기시키는 정도랄까... 관심가는 주제에 대해서는 결국 더욱 자세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찾아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각 항목별로 설명도 한장밖에 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물론 전부 별로는 아닙니다. 정사각 판형, 모노 알파벳 등은 꽤 인상적이었으며, 그 외에도 재미있게 읽은 꼭지가 제법 됩니다.
그래도 제 기대와는 전혀 다르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실무에서 일하는 현업 디자이너보다는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더 어울리는 책이라 생각되네요.

2015/08/08

불타고 찢기고 도둑맞은 - 릭 게코스키 / 박중서 : 별점 2.5점

불타고 찢기고 도둑맞은 - 6점 릭 게코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르네상스

도둑맞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파괴되고 소실된 여러 예술품들에 대해 쓴 책.

이런 책처럼 해당 예술품에 대한 범죄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한 논픽션이라 생각했는데 실제 내용은 에세이더군요. 희귀 초판본 거래를 업으로 하는 작가가 예술 작품들로 "상실", 그리고 "영원"에 대해 써내려간 것이 핵심이거든요. 예술 작품들이 사라진 과정도 상세하게 적혀있기는 하지만요.

예를 들면  <부재와 갈망이 주는 기쁨>편을 보죠. 여기서 제임스 조이스가 아홉살에 쓴, 최초의 인쇄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인쇄물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수집의 강박" 입니다. 물건 자체의 가치는 0이지만 물신화된 가치에 의해 가격이 100만 달러가 넘을 것이라는 이 인쇄물이야말로 수집의 강박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며, 수집은 물건 자체의 가치로 재단하면 안된다는 내용이에요. 참고로 저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마다라메도 말했죠. "가격만 비교해봐야 의미가 없어.소프트의 재미는 결코 가격과 비례하지 않으니까.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하자.'이건 좋은것 '이란 생각이 들면 돈을 내는거야. 난 그렇게 선택해 온 것들에 대한 긍지를 갖고있어.왜냐하면 그건 내것이니까! 그게 야겜이건 동인지건,옷이건 마찬가지야!!"

또 바이런의 자서전과 키츠의 일기를 상속인들이 파기한 일화를 소개하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예술 작품과 그 창조자의 개인적 사생활을 결부시키는 행위에 대한 의문을 표명하기 때문입니다. 작품 자체만 가지고 판단해야겠지만 쉬운건 아니죠. 얼마전 이병현 스캔들과 그 때문에 개봉이 연기된 <협녀> 사태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폰트 "길 산스"의 창조자인 조각가 에릭 길이 사후 일기를 통해 딸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알려졌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이 정도 비밀이라면 일기에도 적지 말았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뭐 이런 썅놈이 다 있나...

이라크 전쟁에서 바그다드 이라크 국립 박물관에서 일어난 약탈 행위를 다룬 편도 인상적입니다. 부시 정권, 그 중에서도 국무부 장관 럼스펠드가 얼마나 무식한 인간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지거든요. 유적에 있던 문화재를 각 나라가 떼어가 전시하는 행위에 대한 긍정과 부정 역시 읽을만한 내용이었고요. 파르테논에 있는 조상을 떼어간 영국의 "엘긴 컬렉션"을 다루며, 엘긴경이 아니었다면 파르테논에는 조상이 아예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인데 일부는 수긍할 만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남의 이야기는 아니고요.


그 외 다른 이야기들 모두 그동안 생각치도 못했던 색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모나리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나리자 앞에 모여든 인파는 그림을 보는게 목적이 아니라 유명 인사를 보는 것이 목적이다. 심미적 파파라치인 셈이다" 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단점이라면 단순 흥미로 읽기 어렵다는 점이겠죠. 특히나 저와 같이 범죄 관련 논픽션을 기대한 독자들은 많이 당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담고 있는 주제에 걸맞는 도판을 갖추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이야기마다 한개 정도 대충 실려있는 수준이거든요. 언급되는 작품들이 방대하고 가격도 17,000원이나 한다면 도판도 그에 걸맞는 볼륨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많이 부족하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로만 읽을 책은 아닙니다. 미술 역사, 아니면 예술품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2015/08/05

알라딘 특별기획 한국 공포 문학의 밤 : 별점 2점

[알라딘 특별기획] 한국 공포 문학의 밤 - 4점 김종일.이종호.신진오.우명희.장은호.유재중.최경빈.백상준.황태환.김민수 지음/알라딘 이벤트

알라딘의 여름맞이 이벤트를 통해 무료 e-book으로 읽게 된 한국 공포문학 단편 앤솔러지. 총 10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종호, 신진오, 김종일 등 최근 한국 공포문학에서는 가장 유명하다 할 작가들이 포진되어 있어 제법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여러모로 실망스럽기만하네요. 가장 큰 이유는 별로 무섭지 않다는 점 때문입니다. 또 어디선가 본 설정이 많다는 것도 문제고요. 몇몇 작품은 호러, 공포문학도 아닐 뿐더러 작품 자체의 완성도도 그닥 높아보이지 않았어요.

결론내리자면,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아직 한국 장르 문학의 갈 길이 참으로 멀구나...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드는군요.
얼마전 읽었던 하드론의 <기지 살인사건>은 아주 좋았는데, 작가의 유명세에 기대지 말고 이런 언더그라운드 작품을 발굴하여 소개하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아내의 남자> - 이종호
한 남자가 아내의 불륜을 확신하고 아내를 살해하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낸 작품.
한국 공포문학계에서는 슈퍼스타라 할 수 있는 이종호 작가의 작품. 그러나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 작품입니다.
일단 "다중인격", "해리성 인격 장애" 라는 설정이 너무 뻔합니다. 게다가 일종의 서술트릭 같은 효과를 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다중인격을 숨기기 위한 작위적인 이야기 전개도 거슬려요. 특히나 이런 정신병자와 같이 사는 아내는 도저히 이해불가였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정신병원에 보내는게 당연할텐데 말이죠.
이러한 이유로 좋은 점수는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압박> - 신진오
사지마비 환자는 어느날 밤부터 굉음소리와 함께 방이 점점 좁아진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내용.
신진오 작가는 얼마전 영화화된 <무녀굴>의 원작자죠.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었지만 나름 기대가 컸습니다.
그리고 시작 부분은 제법 괜찮았어요. 무엇보다도 설정이 좋은데, "사지마비 환자"인 주인공의 상황이 이야기에 딱 맞아 떨어져 공포를 선사해 주기 때문입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데 방이 좁아진다! 이거 참 두근두근한 설정이죠.
그러나 좋았던 것은 도입부 뿐이고... 작품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네요. 뜬금없이 끝나는 결말은 그 중에서도 최악이고요. 사지마비 환자에게 마약 성분의 약을 먹여 환각을 유발시키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실험을 한다는 것인데, 왜 그러한 실험을 하는지에 대한 목적, 이유는 하나도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방이 살아 있었다는 스티븐 킹의 <1408>같은 크리쳐 호러가 낫지 않았을까 싶군요.
도입부 설정 외에는 건질게 없는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담쟁이 집> - 우명희
귀신들린 마을 외곽 담쟁이 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과 공포를 여자아이 시점에서 그린 작품.
아이의 머리가 계단을 때리는 장면의 묘사, "넌 내가 아직 네 엄마로 보이니"와 같은 오래된 괴담의 변주 등 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닌데 딱히 특출난 점은 없는 평이한 작품. 딸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또래 꼬마아이들을 살해한 것이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 귀신의 행위인지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애매하게 끝난 것도 그닥 마음에 들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그냥저냥 읽을만 했다 정도입니다.

<첫 출근> - 장은호
영문도 모른채 전화로 걸려오는 지시만 전달하는 업무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일단, 이 작품은 절대로 호러, 공포문학은 아닙니다. 오히려 SF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거대 조직 사회의 톱니바퀴로 인간이 전락한다는 것과 이 조직 사회를 바꾸려 하거나 탈출하려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쎄고 쎘는데, 그러한 유사 작품들 대비 단 하나의 뛰어난 점이나 차이점을 찾기 어려웠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주인공이 속한 사회가 어디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 것도 불만이에요. 단지 자신이 하는 일에 의문을 가진 주인공에게 위기가 닥치는 내용이 전부일 뿐인데, 이래서야 남에게 보여줄 이야기라고 하기는 어렵죠. 독자에게 자신이 만든 세계관에 대해 설득시키고 공감하게 만드는 노력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놋쇠황소> - 김종일
오랫만에 만난 고교 동창에게 과거 그에게 당한 학대를 상기시키는 주인공의 이야기.
한국 공포문학계의 또다른 스타 김종일 작가의 작품. 왕따, 학대 피해자가 복수를 한다는 설정의 작품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을 거에요. 어떻게 차별화해서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지가 관건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닥 성공한 것 같지 않군요. 복수의 이유가 공감가지 않고 복수 역시 어설프기 때문이에요.
특히나 주인공 병구가 자신의 첫사랑 희정이를 박규완에게 빼았긴건 본인이 "좃밥"인 탓인데 박규완에게 복수심을 품는건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강제로 성폭행 한 것도 아니고 엄연히 둘이 사귀다가 헤어진 것인데 그걸 가지고 제 3자가 뭘 어쩐다는게 웃길 뿐이죠. 이러한 과거 이야기를 박규완의 가족에게 들려준다는 복수 역시 그다지 와 닿지 않네요.
읽는 맛은 충분하나 딱히 무섭지도 않은 평이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돼지가면 놀이> - 유재중
유산을 물려준다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 직후 한 산골마을에서 벌어진 공포의 사건 이야기.
시골의 커뮤니티에 살게 된 외지인이 사실은 사악한 존재였다는 것은 역시나 뻔한 설정이죠. 그런데 "돼지가면 놀이"와 돼지가면을 쓴 인물의 카리스마, 사라진 형제가 손, 발이 잘려 인간 돼지가 되어있다는 등 (<바이올런스 잭>?) 디테일한 묘사가 압도적이라 충분한 공포를 선사해 줍니다. 마지막 결말도 서늘하고요.
단연코 "공포 문학" 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앤솔러지 최고의 작품이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읽은 보람이 느껴지는데, 모든 분들께 강력 추천드립니다.

<10개월> - 최경빈
여자들이 급작스럽게 남자로 변하게 된 세상을 그린 작품.
공포문학도 아닐 뿐더러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의 변주에 불과한 설정에, 특별할 것도 없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아 지루했습니다. 인류가 멸망할 상황인데, 여자가 남자가 됨으로 벌어지는 성생활 문제에만 집중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섬> - 백상준
좀비물. 한국이 무대이긴 한데 다른 흔한 좀비물과 비교해도 딱히 특별한건 없었습니다. 게다가 주인공이 마지막에 폭주해서 아파트와 함께 자폭한다는 결말은 완전 뜬금없었고 말이죠. 몇몇 한국적 설정이 잔재미를 주기는 하지만 그냥저냥한 평작이랄까, 별점은 2점입니다.
그런데 항상 궁금했던게 좀비는 대체 어떻게 성립하는거죠?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습격한다면, 어느 정도 수가 된 좀비가 사람을 덮치면 남아나는게 별로 없을테네 좀비가 더 증가하지 않을테고, 그러면 결국 자연도태될텐데 말이죠. 참으로 궁금합니다.

<옥상으로 가는 길> - 황태환
좀비로 고립된 집단의 생명줄은 옥상으로 전달되는 보급품. 이것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왜소증 환자인 주인공뿐이라는 이야기.
왜소증 환자 주인공이 집단 내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게 작품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의 심리가 너무 변화무쌍해서 별로였어요. 어떨때는 착하고 순진한데, 어떨때는 굉장히 잔인해지는 식으로 캐릭터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느낌이 들더군요. 자신의 경쟁자가 된 초등학생을 처단한다는 결말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감정 변화가 너무 급작스럽다 싶었고 말이죠. 아울러 마지막 장면, 주인공이 좀비가 되어 버린다는 결말은 굉장히 안이하고 뻔했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엘리베이터 액션> - 김민수
식량을 찾기 위해 마트로 왔다가 좀비들에게 둘러싸인 주인공의 사투를 그린 작품.
설정과 내용은 뻔하지만 영화를 보는 듯한 묘사가 아주 생생한 작품. 불필요한 묘사는 전부 배제하고 화끈한 주인공의 생존을 위한 모험에 집중한 작가의 선택이 탁월했어요. 호러라기 보다는 모험 소설 같은 느낌으로 덕분에 읽는 내내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간간히 보이는 유머러스한 요소들도 볼거리였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