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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30

중공(中空) - 도리카이 히우: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십 년에 한 번 피는 '대나무 꽃'을 촬영하기 위해 식물 사진가인 네코타 나츠미와 자연 관찰가 도비야마는 행상인 료안의 도움으로 오스미반도 남단에 위치한 '치쿠모 마을(竹茂村)'을 방문했다. 이곳은 단 7가구의 주민들이 '노장사상(장자의 사상)'을 생활 규범으로 삼아 숨어 살듯 지내는 매우 폐쇄적인 마을로, 20년 전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이 방문한 직후 마을에서 키우던 동물들이 화살에 맞아 죽더니, 결국 주민 중 한 명인 메구미 돈이 '목 없는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이후 미쓰루, 료안 등이 차례로 죽지만 마을 공동체가 경찰의 수사마저 거부하자, 도비야마와 네코타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도리카이 히우의 데뷔작으로, 제21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우수상 수상작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작품인 "죽음의 모래시계"가 영 별로였기에 기대가 크지 않았는데, 생각보다는 좋았습니다.

폐쇄적인 마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은 추리소설에서 흔하디흔한 설정입니다.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전형적인 패턴이니까요. 치쿠모 마을은 장자의 사상을 따르는, 일종의 가족 같은 공동체입니다. 완벽하게 닫힌 공간은 아니라는 차이는 있지만, 용의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범인을 밝혀내는 '후더닛물'이라는 점에서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전형을 충실히 따릅니다.

추리적으로는 볼 만한 점이 많습니다. 메구미 돈의 참수, 미쓰루의 의문사, 료안의 살인 등 사건이 풍성합니다. 메구미 돈의 목은 누가, 왜 잘랐는지, 모두가 같은 술잔을 돌려 마셨는데 왜 미쓰루만 독살되었는지 등의 수수께끼도 흥미롭습니다. 탐정 역할의 도비 선배가 밝혀내는 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메구미 돈은 미쓰루의 약혼자 아키라에게 최면을 걸어 제정신을 되찾게 하려 했습니다. 아키라가 어린 시절 참극을 일으킨 뒤 자살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로 동물들을 죽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최면술 도중 아키라에게 빙의한(?) 다케시의 망령이 돈에게 화살을 쏘고 맙니다. 돈은 고통을 끝내기 위해 미쓰루에게 자신의 목을 베어 달라고 부탁했고, 함께 최면에 걸렸던 미쓰루가 그 말에 따라 목을 베었지요.
미쓰루는 이 사건 이후 죄책감으로 스스로 독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술잔을 이용한 독살 사건은 애초에 없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돈의 친구 료안이 미쓰루를 구하려고 입에 손을 넣어 토하게 한 행동 때문에, 아키라는 료안이 미쓰루를 독살했다고 오해합니다. 결국 아키라는 료안을 살해합니다.

이러한 진상을 밝혀내는 근거도 작품 곳곳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미쓰루가 들고 다니던 기묘한 봉의 정체가 바람총이었다는 점, 메구미 돈이 소장한 최면술 관련 서적 등이 대표적입니다. 네코타가 말한 '해석'을 료안이 할복할 때의 '가이사쿠'로 오해했던 대목도 재미있는 단서이고요.

배경 설정도 인상적입니다. 특히 장자의 사상을 사건에 연결한 발상이 독특합니다. 지도자인 '소' 가문은 장자의 직계 후손으로 여겨져 마을에 군림해 왔고, 소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가 사건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죽림칠현에서 따온 주민들의 성씨 같은 세부 설정도 탄탄하고요. 또 이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 장자의 사상을 소개하는데,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어 마음에 듭니다. 대나무로 둘러싸인 치쿠모 마을의 폐쇄적인 분위기 묘사도 좋습니다. 대나무 꽃에 대해서도 몰랐던걸 많이 알게 되었고요.

그러나 핵심 반전은 화자인 네코타가 아키라를 남자로 착각한 데 크게 의존합니다. 미쓰루가 성인이 되는 날짜도 아닌데 성인 대접을 받는 이유는 결혼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 상대는 아키라뿐이라는 설명에는 무릎을 치게 됩니다. 그 외에도 네코타가 착각한 이유는 나름대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화자의 착각에 지나치게 의존한 반전이라 반칙처럼 느껴집니다. 아키라가 중요한 모임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작위적이에요.

사건의 진상에도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최면술로 아키라의 정신을 되찾게 한다는 설정부터 무리입니다. 메구미 돈이 고통을 멈추기 위해 목을 베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사람의 목을 단칼에 베는 일이 그렇게 간단할 리도 없습니다. 장자의 후손을 모신다는 이유로 마을 전체가 장자의 사상에 지배된다는 설정도 대담하지만 현실성은 떨어집니다. 마지막에 아키라가 네코타 일행을 살해하려 한 이유도 불분명해요. 둘만 죽이면 소 가문의 후계자로 어떻게든 마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여겼던걸까요?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연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기묘한 수수께끼와 독특한 배경을 좋아하는 추리소설 독자라면 읽어볼 만합니다.

2026/10/23

400년의 유언―죽음의 정원의 죽음 - 츠카토 하지메: 별점 3.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토의 사찰 류온지에서 정원사 이즈미 시게타케가 목에 공구가 박힌 채 소년을 끌어안고 발견되었다. 역사사물보전재단 직원 가와베 다쓰헤이 역시 옷이 앞뒤로 바뀌어 입혀지고 양쪽 손목이 절단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두 사건이 4년 전 류온지에서 벌어진 시게타케의 아들 신타로 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수사에 나섰다.

신사와 사찰을 순회하는 보안원 가게야마는 시게타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인연으로 사건에 뛰어들었다. 그가 남긴 말의 의미를 추적하던 가게야마는 일련의 사건을 풀 열쇠가 류온지의 창건과 역사에 얽힌 수수께끼에 있음을 알아내는데…….

정말 오랫만의 독서입니다.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아서 원서를 번역해서 읽었습니다. 

교토의 사찰 류온지를 주 무대로 하는 작품인데, 류온지의 구조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초반부는 다소 지루하지만 중반부터는 굉장히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가쿠레 키리시탄의 역사와 센노 리큐의 할복, 리큐의 기독교 신앙에 관한 가설을 류온지라는 가공의 절에 결합한 상상력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류온지가 실은 박해받는 기독교 신자들의 성당이었다는 발상도 신선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도 탄탄합니다. 앞서 장황하게 설명했던 류온지의 구조는 물론이고 정원석과 석등, 건물과 족자의 기묘한 특징들이 성당의 기능과 상징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는걸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덕분입니다.
족자 "네마겐게쓰"의 비밀이 대표적입니다. 이 그림은 도코노마 너머에도 공간이 이어지는 듯한 착시를 만드는데, 그 가상의 공간을 실제 건물에 더하면 오쿠쇼인 전체가 거대한 십자가가 된다는 것이지요.
단순한 학술적 토론에 그치지 않고, 석등에 불을 붙인 뒤 ‘용의 꼬리를 움직여라’라는 전승에 따라 잉어돌을 움직이자 석등이 회전하며 빛의 십자가가 나타나는 장관으로 이를 극대화하는 연출도 좋습니다. 우물 속 성모상이 드러나는 장면도 인상적이에요.

리큐의 할복과 뒤이은 류온지 초대 주지 료도의 할복을 기독교 신앙과 연결하는 설명도 지적 재미를 더합니다. 리큐에 관한 가설의 진위와 별개로, 작품 안에서는 설득력 있게 활용됩니다. 나름대로 팩션같은 느낌도 주고요.

현대를 무대로 한 본격 추리소설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 시케타케를 살해한 범인이 현장에서 도주할 수 없었다는 불가능 범죄, 범인 군지의 알리바이 트릭 등 수수께끼와 트릭이 풍성한 덕분입니다.

추리를 위한 단서 제공도 공정합니다. 예를 들어 시케타케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설치했던 장치로 일어났다는게 밝혀집니다. 피해자를 살해한 흉기였던 버어니어 캘리퍼스(밧줄 고정 용도), 가게야마가 발견한 나무에 걸려있던 밧줄, 쓰토무 소년이 목이 졸렸던 이유, 시케타케가 오래전 사냥 등으로 생활했다는 등이 단서로 제공됩니다.

이런 유형의 작품에서는 보기 드물게 경찰의 활약도 인상적입니다. 군지를 범인으로 지목한 사람은 다카시나 형사거든요. 그는 '조작된' 녹음테이프에 담긴 팩스 작동음의 시각이 군지가 팩스를 보냈다고 증언한 때와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또한 ‘온기쿠’의 배송 차량에 위치 추적기를 부착해 알리바이를 꾸몄다는 사실도 간파하지요. 피해자 가와베의 손목을 자른 이유도 추론을 통해 밝혀내고요. 간만에 보는 경찰의 활약이었어요.

하지만 대담한 상상력은 돋보이지만, 16세기에 창건된 류온지에 이처럼 정교한 장치들이 설치되었다는 것도 현실성이 높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류온지의 구조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장치들의 동작 원리는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것도 문제고요. 그리고 설령 당시에는 작동했더라도 수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대로 움직인다는 점은 비현실적입니다.
탐정 역인 가게야마가 시게타케의 친아들이었다는 반전과 친구 다카시나의 아내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설정도 굳이 필요하지 않았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은 작품인만큼, 국내에도 정식 소개되기를 바랍니다.

2026/10/11

눈의 아이 - 미야베 미유키/김욱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눈의 아이"는 표제작을 포함한 다섯 편이 수록된 중, 단편집입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오싹하게 펼쳐지고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로 가득하다'라고 소개되어 있길래 읽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에 부합하는 작품은 한 편도 없었습니다. 부분적으로 마음에 드는 묘사와 설정은 있었지만 책 소개가 약속한 재미를 어느 작품에서도 느끼지 못한 만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작품별 간단한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눈의 아이"

초등학교 시절 소꿉친구 유키코를 죽인 화자 '나'의 이야기입니다. 일상적인 회상 속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묵직함, 친구 스기지도 '나'의 범행을 눈치채고 있다는 마지막 장면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지나치게 소소합니다. 게다가 유키코의 유령을 '나'만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결정적인 단서처럼 다루는 것도 어색했습니다. 오히려 가해자에게 유령이 나타나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정상적인 '나'는 이십 년 전에 죽었다는 마무리도 이야기의 결론으로 보기에는 부족합니다.

"장난감"

소소한 유산 문제가 이상한 소문으로 번지고, 죽은 할아버지가 유령으로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추억 한 토막을 듣는 느낌인데, 유령 이야기치고 무섭지도 않고 기승전결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유령이 남을 해코지하지도 않고, 숨겨진 과거가 밝혀지지도 않는 탓입니다. 한마디로 드라마가 없어요.

"지요코"

인형 탈의 눈으로 보면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했던 무언가로 보인다는 일상 판타지입니다. 소중히 여긴 물건이 없는 사람은 지켜주는 존재 없이 이상한 것에 씌어 있다는 설정은 괜찮아요. 추억이 누군가를 지켜줄 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니까요. 

다만 설정이 아주 새롭지는 않고, 이를 넘어서는 드라마도 부족했습니다. 대프니 뒤 모리에의 "푸른 렌즈" 정도의 이야기는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돌베개"

기자 이시자키가 중학생 딸 아사코와 남자친구 가야노의 조사를 토대로 살인 사건의 진범을 밝혀내는 범죄물입니다. 피해자 아유미의 행실이 좋지만은 않았다는 진상, 그리고 이시자키의 추억을 현재에 겹치는 묘사는 인상적이에요. 

그러나 고전 이야기인 "돌베개"를 사건에 빗대는 부분은 억지스러우며, 정작 진상이 밝혀지는게 아유미 사건이 아니라 별개의 나카노 여자 단대생 살인 사건이라는건 당황스러웠던 부분입니다. 나카노 사건에 대해 짧은 설명이 스쳐 지나가기는 하지만 이보다는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사건 해결도 다쿠미의 자백에 의존해 추리의 재미도 없고요. 무엇보다도 다쿠미가 왜 유령 이야기를 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유령을 본 건지, 죄책감의 표현인건지... 

"성흔"

자신을 학대하고 끝내 죽이려 했던 친모와 계부를 살해한 소년 A 가즈미가 폭력 피해자들의 영웅으로 부상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드러나지 않는 폭력을 겪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센카와의 홍보 활동은 치밀하고 그럴듯했습니다. 

하지만 가즈미가 신의 계시를 받아 자살한 뒤 진짜 신이 되고, '철퇴의 유다'인 센카와가 예언자가 된다는 결말이 너무 황당해서 이게 뭔가 싶네요. 피해자들의 분노와 구원받고 싶은 마음이 홍보를 통해 일종의 신앙으로 변할 수는 있습니다. 가즈미가 죽으면서 만들어진 이미지는 굳어지고, 센카와는 그의 뜻을 해석하는 권위를 독점하게 된다는 것도 말은 되고요. 그래도 현실적이던 전개가 갑자기 신과 계시로 넘어가는 결말까지 납득할 수는 없습니다. 지나치게 멀리 나갔어요. 설정이 아깝습니다.

2026/10/04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 넬레 노이하우스 / 김진아: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비아스는 고향 마을에서 두 소녀, 로라와 스테파니를 살해한 혐의로 10년간 복역한 뒤 출소했다.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고 자신은 사건 당일 만취해 기억이 없었지만, 정황 증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출소한 그가 마을로 돌아온 뒤 주민들의 적대감이 커져 테러까지 당했다. 그 무렵 10년 전 실종된 로라의 시신이 발견되고, 스테파니를 닮은 소녀 아멜리까지 실종되자 보덴슈타인 형사반장과 피아 형사는 10년 전 사건을 재수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소녀가 다른 이유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로라는 토비아스의 친구들에게 성폭행당한 뒤 달아나다 죽었고, 스테파니는 불륜 관계였던 교사 그레고어와 다투다가 그에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가해자들과 관계자들은 토비아스가 범인으로 몰리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했다는 게 진상이었다...

독일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가 발표한, 보덴슈타인 반장과 피아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타우누스'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유명 시리즈이지만 그동안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오래전 읽었던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 심하게 별로였던 탓입니다. 그런데 지난 추석 연휴, 아내와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TV 드라마를 웨이브로 감상하다가 재미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두 소녀를 살해했다는 죄로 10년간 복역한 토비아스가 고향 마을로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도입부부터 흥미진진합니다. 토비아스를 향한 마을 사람들의 도가 지나친 증오, 그리고 토비아스 가족에게 닥친 여러 불행이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재미를 더하고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합니다. 핵심은 로라와 스테파니의 죽음이 전혀 다른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로라는 토비아스의 친구들에게 성폭행당한 뒤 살해됐고, 스테파니는 불륜 관계였던 교사 그레고어에게 살해됐습니다. 그중 로라 사건의 가해자였던 친구들의 부모가 현장을 조작하고 거짓 증언을 보태 토비아스에게 두 사건의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지요.

이때 과거 현장에 있었던 ‘남자’가 실은 유명 배우가 된 토비아스의 소꿉친구 나디아였다는 일종의 복선과 반전도 효과적으로 사용됩니다. 모든 사건을 목격했던 티스에게 그레고어의 아내인 다니엘라가 협박과 부적절한 약 처방을 통해 입을 막아 왔다는 사실도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 진상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하고요.

동기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아들들의 범죄를 숨기려던 부모들, 남편 그레고어를 지키려 했던 다니엘라의 행동 모두 당연합니다. 나디아가 당시 진상을 밝히지 않았던 것도 그녀가 토비아스에게 강하게 집착했다는 묘사를 통해 잘 설명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독자가 '추리'를 할 만한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건을 풀어가는 데에는 티스의 증언과 그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단서들도 모두 수사를 통해 차례대로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잘 짜인 수사물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정통 본격 추리물은 아닙니다.

그리고 몇몇 설정은 다소 편의적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토비아스를 집단으로 폭행했는데도 경찰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든가, 토비아스가 하필 사건 당일 술에 취해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10년 전 어린 시절, 스테파니의 불륜을 목격하고 그 충격에 만취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현시점에 친구들을 만났다고 만취해서 필름이 끊긴다는 건 잘 설명되지 않아요. 마침 그날 아멜리가 실종되었다는 것도 억지스럽고요.

가장 큰 문제는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보덴슈타인 아내의 불륜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게 다루어진다는 점입니다. 그 외에도 불륜이 넘쳐나는 건 볼썽사나웠습니다. 아멜리가 토비아스에게, 보덴슈타인이 클라우디스의 처제에게 첫눈에 끌리는 설정도 이야기에 꼭 필요한지 의문이고요.

그래도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의 정교함이나 군더더기 없는 구성 측면에서는 부족하지만, 두 죽음의 진상이 차례로 밝혀지고 마을 사람들의 비밀이 드러나는 과정만큼은 재미있었습니다. 드라마로 만들어질 만큼의 흡입력은 충분합니다.

2026/09/25

독약의 윤무(毒薬の輪舞)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2.5점

아래 리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시청 특수범죄수사과의 형사 우미카타 후사나리는 병원에 입원한 뒤, 구입한 미개봉 캔 음료에 다른 물질이 들어있다는걸 발견했다. 특범에 보고 후, 수사를 위해 부하 고미나토 신스케까지 정신병 환자로 위장시켜 병원에 잠입시킨 우미카타는 자신을 세계은행 총재라고 믿는 모모타, 이상 행동을 일삼는 모로하시, 노출증 환자 라쿠, 어린 거식증 환자 산고 등 개성 강한 환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사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고, 오히려 강한 쓴맛을 내는 약물 PTC가 아무도 손댈 수 없었던 물에 섞이는 불가사의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장난처럼 보였지만, 병원에 과거 원장이 전쟁 중 개발한 맹독 리자드톡신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산고가 의문의 죽음을 맞는데…….

아와사카 쓰마오의 괴짜 형사 우미카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작이 괜찮길래 연이어 읽었습니다. 원서입니다.

천재 명탐정이면서 한없이 게으르고, 주위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면서도 온갖 잡지식과 아첨에 능한 우미카타의 독특한 매력은 여전합니다. 기묘한 괴짜들이 넘쳐나는 정신병원이 무대인데, 그 사이에서도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줄 정도로요.

아와사카 쓰마오의 정통 본격 추리소설답게 불가능 범죄도 등장하며, 트릭도 깔끔합니다. 핵심 수수께끼는 PTC와 리자드톡신을 몰래 먹인 방법인데, PTC 사건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201호실: 마돈나와 아담이 먼저 물을 마셨을 때는 괜찮았지만, 뒤이어 우미카타가 마시자 심한 쓴맛이 났다. 
  • 국제회의 보고회: 식당에서 가져온 보온병 속 물을 모로하시가 먼저 마셨을 때에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뒤이어 같은 물을 마신 총재는 쓴맛을 느꼈다. 
  • 병원 식당: 모모코가 물병에서 직접 따라 가져온 세 컵 가운데 산고가 마신 물에서만 PTC가 발견되었는데, 물을 따른 뒤 산고가 마실 때까지 약을 넣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모두 산고의 장난이었는데, 우연이 겹쳐 불가능 상황이 되었다는게 진상입니다. 201호실에서는 산고가 미리 물에 PTC를 넣었지만, 마돈나는 미맹이었고 아담은 구강청량제 때문에 일시적으로 미각이 마비되어 쓴맛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국제회의에서도 산고가 물병에 미리 PTC를 넣었지만, 이를 먼저 마셨던 모로하시가 꾀병이 들킬까봐 일부러 쓴맛을 참았고요. 식당에서는 마지막에 물을 마신 산고가 평범한 물을 마신 뒤 손수건으로 입을 닦는 척하며 숨겨 둔 PTC를 자기 컵에 넣었던 겁니다.

산고가 독 리자드톡신이 든 우유를 마시고 죽은 사건에서, 우유에 손대지 않고 독을 넣은 트릭도 볼만합니다. 범인은 마찬가지로 산고였습니다. 산고는 새어머니 모모코를 살해하기 위해 소리 센서 인형 ‘이즈와 폰’을 이용해서 아래와 같이 원격 독살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 개 인형 ‘폰’의 입속에 리자드톡신 캡슐을 넣어 두고, 인형 앞 독서대에는 책을 펼쳐 비스듬한 경사로를 만들었다. 그 아래에 우유 컵을 놓았다. 큰 소리가 나면 인형이 작동하면서 폰이 입을 벌리고 뛰어오르고, 그 순간 캡슐이 입에서 튀어나와 펼쳐진 책 위를 굴러 내려가 우유 컵에 떨어진다.

산고는 방 밖에서 모델건을 쏴서 장치를 작동시킬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은 우유에 접근하지 않은 채 모모코를 독살할 생각으로요. 그러나 한밤중 모로하시가 가방을 떨어뜨린 소리에 장치가 예정보다 먼저 작동했고, 이를 몰랐던 산고가 범행을 단념했지만 이미 독이 들어간 우유를 마시고 죽었던게 진상입니다.

이러한 핵심 수수께끼 외에도, 병원에 출몰한 눈이 빛나는 유령의 정체에 대한 추리, 모지하라 병원 입원 환자들이 모두 꾀병이라는 추리, 라쿠가 남긴 수식을 풀어내는 추리 등 자잘한 추리들 모두 볼만합니다. 초반에 등장하는 '그 어떤 것도 넣을 수 없는 밀봉된 캔에 다른 내용물을 넣은 트릭' 역시 간단하지만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들고요.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우선 전개가 많이 어설픕니다. 아무리 정신병원 안에서 피해자가 꾸민 일이 잘못되어 스스로 죽게 된 사건이라 해도, 현직 경찰이 두 명이나 잠입해 있는데 이를 일반 변사 사건으로 무마한다는건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그리고 산고의 죽음이야 모두의 행복(?)을 위해 그렇다 쳐도, 사사키 의사가 하야사키 씨에게 리자드톡신을 먹인 건 엄연한 범죄 행위로 보입니다. 이것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덮고 넘어가는 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병원에서는 해고했어야 합니다.

우미카타의 여성과 음식에 대한 집착도 지나칩니다. 괴짜 탐정이라는 설정은 재미있지만 이 부분만큼은 정도가 심해서 볼썽사납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볼만했던 후속작입니다. 억지스러운 설정은 분명 있지만 재미있는 요소도 많고, 불가능 범죄의 트릭도 깔끔해서 추리적으로 볼 만하니까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일본에서의 인기와 유명세도 그리 높지 않아서 우리나라에 소개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혹시라도 소개된다면 한 번쯤은 읽어볼만 합니다.

2026/09/18

교토 살인 여행 - 야마무라 미사: 별점 2점

야마무라 미사의 교토 부경 검시관 에나쓰 후유코 시리즈 첫 번째 단편집입니다. 

이야기의 완성도는 대체로 별로고, 주인공 에나쓰 후유코도 이런 류의 작품 속 등장인물의 전형을 전혀 탈피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절반 정도의 작품은 추리적으로 괜찮습니다. 나름대로 사용된 트릭도 나쁘지 않고, 현장에서 특유의 관찰력으로 '무언가 이상함'을 현장에서 느낀 후유카가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잘 짜여져 있는 덕분이에요.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상화도 여러 번 되었을 정도의 당대 인기작 중 하나로 읽어볼만은 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괜찮았었던 작품에 대한 짤막한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녀는 밀실에서 죽었다"

여중생이 밀실에서 살해당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열쇠는 책상 서랍 안에 들어 있었고요. 에어콘 배관을 빼기 위한 작은 구멍은 뚫려 있었지만, 너무 작아서 열쇠를 던져 서랍에 넣는건 무리로 보였지요. 하지만 범인은 속이 빈 빨래 장대를 구멍으로 집어 넣어 끝을 서랍에 위치시킨 뒤, 장대 안으로 열쇠를 넣어 떨어트렸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명확하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면, 구멍이 트릭에 사용된게 분명해서 기발한 트릭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Nervous Breakdown" 중 입학 에피소드처럼요. 형상기억합금으로 만든 열쇠고리를 고정시킨 뒤, 고리에 연결한 끈으로 열쇠를 미끄러 떨어트린 뒤 고리가 열로 다시 원형 복구하면 끈을 회수하는 트릭이었습니다. 

오히려 트릭보다는 후유코의 관찰력을 선보이는 장면이 괜찮습니다. 빨래가 널린 방향이 사건 직후에는 반대라는걸 눈치채고 빨래 장대를 사용했다는걸 알아채는 장면입니다. 키가 큰 범인만이 빨래를 마당 쪽에서 널 수 있었으니까요.

"위장된 살인 현장"

전작처럼 후유코의 관찰력이 빚납니다. 식물의 성장 방향이 ‘최근까지 동쪽에서 빛이 들어왔다’는 흔적을 보존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범인이 사건 뒤 방의 구조를 바꿔 원래의 출입구나 사건 현장의 상태를 은폐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때문입니다. 식물이 일종의 ‘과거의 방 배치를 기록한 증거’ 역할을 한 셈이지요.

"사라진 배우자"

기차에 치인듯한 여성 사체가 발견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검시 결과 살해당했다는게 밝혀지고, 그 여성이 이웃집 남편과 불륜 도피 중이었다는게 밝혀지면서 그녀의 남편, 이웃집 부인, 불륜 대상인 남성 세 명이 용의자로 떠오릅니다. 

범인인 이웃집 부인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빠칭코를 했고, 딴 구슬로 경품을 바꿨다는 증언의 오류를 찾아내 알리바이를 깨트리는 과정도 좋지만, 범인을 밝혀내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후유코의 관찰력, 눈썰미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열차에 끌려간 사람의 가방이 열리면서 내용물이 선로를 따라 흘러나온 것처럼 화장품이 군데군데 떨어졌는데, 처음에는 화장수, 그다음에는 파운데이션, 볼연지, 콤팩트, 아이라이너, 립스틱…… 이런 식으로 화장할 때의 순서대로 놓여 있었거든요. 이를 통해 후유코는 범인이 여자라는걸 직감합니다.

"목 없는 시체"

토막나서 목이 없는 사체가 발견되었고, 신분증 등의 유류품으로 피해자가 특정되었지만 알고보니 병원에서 빼돌린 사체 부위로 죽은 척 위장했다는 진상이 기발합니다. 과학 수사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고, 아무리 심각한 사고가 있었다 하더라도 사체 수습과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당시 시대 상황에서나 가능했던 트릭이지만요.

2026/09/11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 - 아오사키 유고 외 : 별점 2.5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데뷰 35주년을 기념하여, 젊은 작가 일곱 명이 '아리스가와 세계관'으로 발표한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세계관이지만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가 가장 많습니다. 또 다른 대표 시리즈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명탐정 에가미 지로 등장 작품은 한 편 밖에 없고요. 행각승 지장 스님 시리즈도 한 편 있을 정도인데 말이지요.

하여튼, 꽤 신선한 기획인데 작품들 수준도 괜찮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젊은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덕분입니다. 대부분 아리스가와 월드를 충실히 구현한, 전통적인 신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끈, 밧줄, 로프" 아오사키 유고

야스미 노도카가 모아이 도자기 상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살해당한채 발견되었다. 동기는 희귀 게임 카드이며 범인은 새시를 통해 시체를 밖으로 운반한 뒤, 바다로 시체를 내던진 것으로 보였다. 여러 현장 상황을 통해 범인은 자동 잠금장치가 설치된 아파트 주민 29명 중 한 명이며, 그 중에서도 당일 오전, 로프같은걸 버린 세 명 중 한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자가 죽기 전 로프 같은 것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각자 버린 건 다용도 마끈, 안전용 수평 구명줄, 반사 소재 텐트 로프였다. 

히무라 히데오가 '필드 워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전형적인 신본격 단편입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답게 추리적인 부분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히무라는 피해자가 둔기에 맞았을 때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가 깨어있을 때 침입했고 흉기로 위협했다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뭔가에 묶인 피해자를 나르는 범인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 사체를 유기하기 직전에 묶은 끈을 회수했다고 추리하고요. 사체 유기가 실패했다는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에, 끈을 푸는 데에는 위협에 사용했던 칼을 사용했습니다. 다음날 범인은 토막난 끈을 버려야 했으며, 이는 쓰레기 버릴 때 종이 팩을 사용했다고 지적받았던 시나다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즉, 시나다가 범인입니다. 시나다는 매일 종이 팩 쥬스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그게 재활용이라는걸 모르지 않았다는 것도 증거이고요.

사건과 범인이 로프를 그날 버린 이유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핵심 단서인 '로프'를 가지고 기둥서방 시나다의 유력한 동기였던 '동아줄'로 이어지는 일종의 언어유희적인 전개도 괜찮습니다.

다만 설정 자체가 조금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현대 법의학, 법과학으로 범인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수수께끼 풀이용 단편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정통파 추리 소설에 대한 작가의 고민도 흥미롭습니다. 아래의 말을 빌어서, 추리 소설가의 필사적인 창작은 결국 AI도 만들 수 있는, 독창적인 요소가 없는 결과물일거라는게 요지인데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해 논리적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그 해법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 "수수께끼 풀이 자체는 누가 설명해도 마찬가지인, 개성없는 장면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애초에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면 본격 미스터리로 성립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있어. 결국 탐정 캐릭터들도 '모범 답안'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몰라."

물론 이 논리는 미스터리는 과학이 아니라 유사 과학이라는 히무라의 입을 빌어 작가 본인 스스로 타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탐정들은 미스터리의 신의 말을 전하는 선교사인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 놓는 과학자와 다른 집단이라면서요. 그래도 AI도 만들 수 있다는 결과물이라는게 변하지는 않지만요...

"클로즈드 클로즈" 이치오 미치

아리스와 히무라는 여고에서 일어났던 교복 도난 사건 해결을 부탁받았다. 교복을 도난당한 다즈하라 시게오는 같은 3학년 부원인 고미야 리오와 반목이 있었다. 그러나 고미야는 이미 수개월 전 전학을 간 상황이었다. 

다즈하라가 고미야에게 교복을 빌려줬는데, 다른 친구에게 빌린 거울이 들어 있어서 도난 소동으로 발전했다는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추리적으로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히무라가 이렇게 추리해 낸 과정이 제대로 선보이지 않는 탓입니다.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팬에게서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아리스와 히무라가 여고에서 가짜 신분(?)으로 활동하는 일상계 추리물이라는 설정은 독특하지만, 둘의 대화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모두 여성 작가가 쓴 듯한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 건조하게 묘사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수록작 중 최악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히무라 히데오에게 바치는 괴담" 오리가미 교야

도쿄에서 열린 이벤트에 참석했던 아리스와 히무라는 그날 밤 찾은 바에서 서점 직원 쓰지와 합석하게 되었다. 쓰지는 둘에게 자신이 겪었던 괴담을 들려주었고, 히무라는 자신만의 추리로 괴담의 진상을 풀어냈다.

쓰지가 네 편의 괴담을,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바 손님이 한 편의 괴담을 들려주어 총 다섯 편의 괴담이 선보입니다. 쓰지가 겪거나 들었던 괴담은 모두 추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 후배 하숙집에서 심야에 전자기기가 오작동하는 사건이 자꾸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날은 한밤중에 탄내까지 났다.
    진상: 개조한 불법 무선기로 통신하는 장거리 트럭이 원인이었다. 심야에 발생한건 장거리 트럭은 고속도로 통행 요금이 할인되는 심야에 운행하기 때문이며, 탄내는 오작동한 전열기구 때문이었다.
  • 쓰지는 대학 시절에 동창과 숲에서 고개를 돌리며 짐승 울음 소리를 내었던 인형 탈을 보았다.
    진상: 몸은 땅 속에 묻힌 사람에게 인형 탈을 씌워 숲속에 방치해 둔 것이었다. 짐승 울음 소리는 재갈이 물려있던 탓이며, 비성수기 휴양지 산속이라는 현장이 근거이다.
  • 등산을 좋아하는 쓰지의 친구는 안개로 뒤덮인 산길에서 똑같이 생긴 오두막을 등산로에서 연이어 발견했다.
    진상: 그냥 오두막이 두 채 있었다.
  • 쓰지는 방학 때 고향 친구 가가와, 가가와의 선배 유모토와 함께 폐업한 유원지에서 담력 시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모토가 미러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뒤 사라져버렸고, 그를 찾으러 들어간 쓰지는 미러 하우스 속 거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형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그 뒤 가가와와 유모토와는 연락이 끊겼다.
    진상: 고객을 놀라게 만드는데 사용했던 매직 미러를 이용하여 유모토가 쓰지를 놀라게 만든 장난이었다. 

첫 번째 괴담은 재미있고, 네 번째 괴담도 추리만큼은 그런대로 합리적이지만 다른건 별로입니다. 그리고 모두 진상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도 크고요. 

이보다는 바 손님인 이토가 이야기한 진짜 괴담이 더 괜찮았습니다. 이토는 교통사고 현장에 놓여있던 시들어진 조화를 버리고 새로 꽃을 사서 갖다 둔 뒤, 원망하는 표정의 여자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선의로 행한 일인데 왜 귀신은 원망을 가졌을까요? 아리스의 추리는 '꽃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즉, 원래 놓여있던 시든 꽃이 귀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놓아둔 꽃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지만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아리스가 추리를 펼친다는 의외성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 저는 잘 모르는 '심령 탐정'이라는 아리스가와 월드 속 다른 주인공이 언급되는 등, 헌정물로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미러" 시라이 도모유키

'나'는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때 친구였던 가가미 에이지로부터 오랫만에 연락을 받고 만났다. 그 뒤, 경찰을 만나 에이지와 그의 형 고이치가 연루된 살인사건에 대해 들었다. 상황은 에이지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진행한 것으로 보였지만, 알리바이 트릭은 완벽해서 깨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추리소설가를 꿈꾸던 '나'와, 경찰을 돕던 건방진 교수 히무라가 힘을 합쳐 알리바이를 깨는데 성공한다.

복잡한 시간표로 구성된, 전형적인 시간표 알리바이 트릭물입니다. 쌍둥이인 에이지와 고이치가 어느 시점에 교체하여 서로의 알리바이를 만든게 진상입니다. 핵심은 고이치가 엄지손가락을 절단한 뒤, 그걸 가지고 에이지가 고이치의 비밀금고를 열었던 것이고요. 이는 고이치가 범행을 저지른 뒤, 생수병 뚜껑을 따지 못해 머그컵으로 물을 마셨던 상황 등으로 추리됩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70년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CCTV가 여러 곳에 가득한데 자신의 노출을 이렇게까지 숨기면서 짜여진 시간표 동선대로 이동한다는건 말오 안되니까요. 히무라가 사건에 뛰어든 이유가 역에서 뛰어나가던 에이지와 부딪혔기 때문이었다는 우연도 작위적이고요.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메타적인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현재 가장 뜨거운 작가 중 하나인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치고는 영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의 수수께끼" 유키 하루오

추리 소설가인 '나'는 신작 구상을 위해 담당 편집자 미토베 씨와 함께 취재차 온천 휴양지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 식당에서 만난 점원 후쿠나가 아이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둘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후쿠나가의 사촌 아버지인 외삼촌 거처를 찾았고, 그곳에서 미토베 씨는 사촌의 행동을 추리해 내는데...

작품을 다 읽었지만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촌의 기묘한 언행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유명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무대와 설정은 아리스가와 월드가 아니라는게 특징입니다. 

추리는 사촌이 후쿠나가에게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서재에 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은 커버와 띠지만이며, 내용물은 다른 책으로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이고요. 사촌은 별채에 침입하여 아버지의 만년필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바람에 별채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별채는 난방이 안되어서 너무 추웠던 탓에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난로에 태웠던 겁니다. 후쿠나가의 외삼촌은 모든 장서를 서재와 별채, 두 곳에 비치하였기 때문에 다음날 외삼촌이 돌아오기 전 사촌은 서재의 책을 별채로 옮기고, 때우지 않았던 띠지와 표지를 서재에 있던 다른 책에 씌워 위장했고요. 책은 새로 주문했지만 도착까지는 시간이 걸려서 당장 후쿠나가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안티인 척을 했던 거지요.

위의 추리를 위한 모든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되는 좋은 추리물입니다.  유명 작품은 물론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의 TV 방영까지를 작품 설정에 녹였다는 점에서 '헌정'이라는 취지에도 딱 들어 맞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를 표방한 사촌의 주장은 헌정이라는 취지와 정 반대이기는 하지만, 이런게 또 기획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유키 하루오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설정이 문제였는데, 소규모 일상계로 설정을 좁혀 놓으니 훨씬 낫네요.  

"행각승 지장 스님의 낭패" 아쓰카와 다쓰미

20년 전, 행각승 지장 스님의 이야기를 '에이프릴'에서 들은 멤버였던 '나'와 도코가와는 오랫 만에 한 잔 하기 위해 '풀스 메이트'라는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 전과 똑같이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각승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20년 전과는 다르게, 손님들의 공격과 의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풋내기였다.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을 헌정물로 새롭게 써 낸게 좀 신기하네요. 일종의 '도라에몽 세계관'인 히무리 히데오 시리즈와는 다르게, 지장 스님이 활약한 20년 후인 현재를 무대로 협박범 구로사와가 살해당했는데, 사체는 피해자가 수집했던 나비 표본 수십 개로 둘러 쌓여 있었던 사건에 대한 추리가 펼쳐집니다.

나비의 이름이 범인을 특정하는데, 나비 표본 하나만 꺼내어져 있으면 범인이라는게 바로 드러나서 어쩔 수 없이 표본을 전부 꺼냈다는게 진상입니다. 범인은 나비 표본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아사기 유즈루였고요.

이 뒤에 등장인물의 이름, 수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손님에게 진짜 지장 스님이 나타나 보강하는 추리를 펼치며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여러모로 추리 퀴즈에 가까우며,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원전과 비슷한 점이 많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시체의 실루엣은 말한다" 이마무라 마사히로

에이토 대학 추리 소설 연구회 멤버 5명은 고향 나고야로 취업 활동을 갔다 온 오다가 가져온 수수께끼 풀이에 나섰다. 오다가 만난 동향인 고바야시가 친구가 남긴 암호를 해독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나왔습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이 시리즈 단편은 읽은 적이 없는데, 젊은 작가가 일종의 일상계로 풀어낸게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형식만 신선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고바야시의 친구 바토 씨가 남긴 낙서와 다이잉 메시지를 풀어내는 과정이 추리 소설 연구회 5명의 대화를 통해 펼쳐지는데, 정말로 모든 있을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추리와 의견들을 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드러나는 진상은 꽤 합리적으로 느껴져요. 대화로 일종의 추리 대결을 펼쳐나간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전작 "시인장의 살인" 속 학생 식당 메뉴 맞추기 게임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시와 바토가 헤어졌고, 이 사건은 바토가 고바야시가 계속 어울려 줄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게임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있습니다. 결국 진상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탓이에요. 다이잉 메시지도 AOK로 읽히는데 이건 All-OK라는 추리 역시 근거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지요.

논리적으로 즐길거리는 많은데 다소 맥이 빠진다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에가미 선배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 등 팬이라면 소소히 즐길거리가 있지만, 그리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9/04

죽은 자의 윤무(死者の輪舞)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수 범죄 수사과 형사 신스케는 경마장에서 우연히 살해당한 사체와 접촉하면서 연쇄 살인극 수사에 빠져들었다. 신스케의 파트너인 고참 형사 우미카타는 연쇄 살인극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추리해 내었고, 모든 피해자들이 사망한 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이 자신이 주도하여 벌인 일이라는걸 고백한 유서가 발견되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우미카타가 신스케, 그리고 원장 조카인 야나기다와 함께 한 자리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 야나기다는 우미카타와 신스케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하는데...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최근 이 작가 작품만 읽고 있네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무려 여덟 명의 죽음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순환 구조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윤무가 들어간거 같네요.

탐정역 형사 우미카타도 신선합니다. 경력이 많아 형사부장조차 어려워하는 인물로, 게으르고 거만한 데다 도박까지 좋아하는 평소 행동만 보면 좋은 형사라고 하기 어렵지만 사건을 대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나다는 설정 덕분입니다. 빼어난 관찰력과 비상한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명품 브랜드와 미식에도 이상할 정도로 해박하여 수사에 큰 도움을 주거든요. 문제 많은 비호감 인물이지만 형사로서는 유능하다는 상반된 설정을 잘 결합했습니다. 호색한에 기묘한 취미(?)가 있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급 형사 명탐정이라는 점에서 모스 경감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비상한 추리력은 쓰쓰미 준의 사체가 발견된 집을 조사할 때부터 드러납니다. 집에서 광고지가 발견되었는데, 살림집이 아니라서 신문도 구독하지 않고 광고지에는 접힌 흔적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신문에 끼워져 배달되거나 우편함에 꽂혀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영업사원이 직접 집을 방문해 건넨 것이라고 추리하지요.

쓰쓰미 준의 방에서 인기 없는 만담가 다쓰다 이치엔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증언 처리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어떤 방송에서도 이치엔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우미카타는 곧바로 이치엔 본인이 방 안에 있었다고 판단하거든요.
피해자의 벨트가 채워진 모양을 보고 경찰의가 왼손잡이라고 판단한 것과 달리, 여러 정황을 통해 오른손잡이인 다른 사람이 피해자에게 옷을 입히고 벨트를 채웠다고 알아내는 장면도 좋고요.

추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은 유서를 통해 여덟 명의 죽음이 서로 이어진 연쇄 살인이자 자살극이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완벽한 해답처럼 보였지만 우미카타는 유서의 내용과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비교하면서 여러 모순을 찾아낸 뒤 유서에 적힌 진상이 조작되었다고 추리합니다. 모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우미카타와 신스케가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원장은 D호실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렸다. 하지만 유서에는 이들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서가 사실이라면 원장이 처음부터 그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는 이야기이므로 이는 모순이다.
  • 오쿠 후사의 집 문손잡이에 남아 있던 지문은 이상하다. 다섯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남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문을 열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야나기다는 앞선 탐문 수사에서는 만담가 이치엔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스케가 다쓰다 이치엔이라는 이름의 환자를 찾았을 때는 그런 환자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는 야나기다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미 등장했던 여러 단서들, 증언의 모순을 근거로 진범을 추리해내는건 굉장히 본격 추리물 스러워서 마음에 듭니다. 마지막에 야나기다 앞에서 펼치는 추리는 고전적인 추리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고요. D호실이라는 연결고리와 유서의 오류, 야나기다의 말실수까지 포함한 정보 모두 사전에 제공된다는 점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높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쓰다 이치엔의 죽음입니다. 그는 매가 물고 가다가 떨어뜨린 식칼에 찔려 죽는데,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작위적입니다. 이치엔이 죽지 않고 경찰에 체포되었다면 사건의 진상이 훨씬 일찍 밝혀졌을 테니 작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퇴장시킬 필요가 있었겠지만, 굳이 이렇게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여덟 명이 얽힌 연쇄 살인과 자살극도 아이디어에 비해 조금 길게 느껴집니다. 특히 동반 자살까지 시도했던 후나미즈와 고노 아유미 커플은 빠졌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신스케와 사오리의 관계도 불필요하게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우니카타와 신스케가 야나기다에게 죽을 뻔 하지만, 로쿠야마가 설치한 장치에 의해 야나기다가 죽고 만다는 결말도 뻔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여덟 명의 연쇄살인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뒤바뀌는 순환 구조로 만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이들을 가쓰하타 병원 외과 D호실이라는 하나의 접점으로 묶으면서 제공되는 단서들도 모두 공정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과 본격 추리물이 잘 결합되어 있는 추천작입니다.

2026/08/28

종이학(折鶴)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한 단편집입니다. 표제작 포함하여 모두 네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8년 이즈미교카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네요. 원서로 읽어보았습니다.

아와사카 쓰마오의 다른 작품에서 흔히 보였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달리, 담백하고 순수한 연애물로 대체로 나이 든 중년의 심리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렌조 미키히코의 작품처럼요.

기모노에 문장을 그려넣는 '문장사'로서의 경력을 한껏 담아낸 기모노와 자수 등 전통 장인들의 세계에 대한 설정과 묘사도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소재가 차분한 사랑 이야기와 어우러져 작품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요. 미싱과 같은 현대 기술 때문에 몰락해 가는 장인들의 모습은 참 실감납니다.

대단한 범죄는 등장하지 않지만, 본격 추리 작가다운 추리적인 요소도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시노비야마 사랑 노래"에서는 여관 고카쿠로에서 요지로가 살해당한 뒤, 원한이 있던 유키다유가 범인으로 의심되었습니다. 그러나 유키다유 일행은 샤미센을 연주하며 떠났다는 증언 덕분에 혐의를 벗었지요. 그러나 와키타는 증인들이 일행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멀어지는 듯한 샤미센 소리만 들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관을 떠난게 아니라 연주 소리를 조금씩 줄이다가 멈추어 떠난 것처럼 꾸며냈을 거라고 추리하지요.

"가쿠노다테에서"에서는 고급 프랑스 요리점의 성냥과 향수, 유코 가문의 정식 문장이 들어간 기모노를 단서로 도시유키가 유코의 마음을 알아챕니다. 범죄 해결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밝혀내는 데 추리적인 테크닉을 활용한게 인상적입니다.

표제작 "종이학"에서는 누군가 다고토의 이름을 사칭해 불륜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수수께끼가 등장합니다. 이는 쓰루코가 다고토를 이용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고요. 이 작품도 본격적인 범죄보다는 사람들의 관계와 감춰진 마음을 밝히는 장치로 추리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아무래도 추리 소설로서는 시시하다는 점입니다.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라 사건과 트릭이 소박하고, 기발한 범죄나 강렬한 반전을 기대한다면 아쉬울 수밖에 없어요. 강력 범죄와 트릭이 등장해서 그나마 가장 추리 소설다웠던 "시노비야마 사랑 노래"조차도, 와키타의 추리와는 다르게 진범은 그냥 강도였다는 진상이라서 허무합니다. 

그리고 여성 심리가 설득력있게 그려지지 못한 문제도 큽니다. "시노비야마 사랑 노래"에서 아야코가 와키타와 밤을 함께 보낸 이유, "사랑의 도피"에서 유리가 3일간의 도피 후 마음을 바꾼 이유, "가쿠노다테에서"의 유코가 전 남편과도 시간을 보냈으면서 구태여 도시유키에게 돌아왔던 이유 모두가 불분명합니다. 이런걸 순애, 혹은 여심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종이학"의 쓰루코는 정말 최악이에요. 원래 다고토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집안의 반대로 데릴사위 류지를 들여 결혼한 뒤, 나중에 가업을 살리기 위해 거래처 부장 요코쿠라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거든요.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기존 작품과 전혀 다른 아와사카 쓰마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담백한 순애와 중년의 마음, 일본 전통 장인의 세계에 소박한 추리를 곁들인 독특함에 더해 일본 전통 기모노 세계와 묘사도 아름답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인 재미는 약하지만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추천드립니다.

2026/08/21

희극비기극(喜劇悲奇劇)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대 화물선을 개조한 공연용 배 '우콘호'에 시치로는 마술사로 고용되어 조수 마코토와 탑승했다. 그러나 연예인 혹부리 곤타와 세가와 박사가 연달아 살해당하고 말았다. 시치로 일행은 피해자들 모두가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회문' 이름을 가졌다는걸 알아냈다. 시치로는 전처 우타코, 조수 마코토(모리 마리모라는 예명)가 다음 피해자가 될까 걱정하면서 점차 사건에 깊숙히 휘말리게 된다...

일본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본격 추리와 아와사카 쓰마오 특유의 소동극이 결합된게 특징입니다.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회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한다는 설정도 독특하고요. 목차의 모든 소제목도 회문으로 구성되어 있을만큼 회문을 전편에 걸쳐 적절히 써먹고 있기도 합니다.

첫 피해자였던 논 레논(None lenon)이 진범이었고, 그 정체는 그랜트였다는 전개도 좋습니다. 그랜트와 레논은 동일 인물이었으며,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역할을 번갈아 연기하고 있었다는건데, 이를 마술이라는 소재로 드러내는게 아주 기막힙니다. 

우선 레논의 특기 마술은 얼굴을 가린 채 선보이는 독심술인데, 이는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드러내지 않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리고 세 장의 거대한 트럼프를 이용한 마술 리허설도 진상과 연결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바꿔치기 마술이었지만, 곤타만은 그 공연을 유난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곤타는 무대를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트럼프 안에 사람이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범해 보였던 바꿔치기가 실제로는 불가능한 조건에서 이루어졌다는걸 알아챈 것이지요.

그랜트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결정적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사건 당시 배 안의 전화는 계속 불통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킨 단장은 전화로 곤타의 방에 불려갔다가 살해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전화는 배 밖에서 걸려 왔어야 합니다. 당시 상황을 모두 파악하면서 외부에서 바킨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던 사람은 그랜트뿐이었고요.

연쇄살인의 배경이 된, 과거 사이비 종교 집단에 전염병이 퍼졌는데, 근처를 지나던 무일푼으로 궁지에 몰렸던 바킨 단장과 산엔자이 극단원들이 환자들을 돕는 대신 마약으로 독살하고 금품을 빼앗은 사건 이야기도 흥미진진합니다. 이를 통해 범인 그랜트는 사이비 종교 집단 교주로 현재의 살인들은 산엔자이 극단원들을 대상으로 했던 복수극이었던게 밝혀지는데, 동기에 대한 설득력도 높습니다. 아울러 앞서 결정적 조건으로 보였던 회문 이름은 단순히 회문을 좋아했던 바킨 단장이 단원들 예명을 지어서 생긴 우연의 일치였다는 상황도 합리적으로 설명되고요.

아와사카 쓰마오 특유의 좌충우돌하는 희극적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곤타의 시체가 들어 있는 호랑이 탈 인형이 엉뚱한 곳으로 배송되면서 벌어지는 대소동이 대표적입니다. 끔찍한 살인 사건과 황당한 상황이 한데 어우러져 제목처럼 희극과 비극이 뒤얽힌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주인공 시치로가 아주 별로입니다. 아내가 떠난 뒤 알코올 중독에 빠진 별 볼 일 없는 마술사라는 설정, 조수 마코토와 전처 우타코를 둘러싼 관계 모두 진부합니다.

범인을 밝혀내는 논리적인 추리 과정과 다르게 개별 살인에 사용된 트릭들도 모두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레논이 칼에 찔려 죽은 것처럼 꾸민 방법이 대표적입니다. 배의 근육과 지방을 등 쪽으로 이동시켜 칼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었다는데, 아무리 레논이 인도에서 특별한 수행을 했다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입니다. 세가와 박사를 사고사로 위장한 라이터 트릭 역시 가스 라이터에서 나온 불꽃이 사람을 태울 정도로 강하게 번진다는 전제에 의존하고 있어서 비현실적이에요. 인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사망할 정도의 사고가 될리는 없었을 겁니다.

곤타와 타마하의 시체가 뒤바뀐 과정도 별볼일 없어요. 당시 시체에 손을 댈 수 있었던 인물이 사실상 그랜트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랜트가 진범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일찍 짐작할 수 있어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과거 미국의 사이비 종교 집단과 관련된 외국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커지는데, 주요 인물 가운데 그 조건에 맞는 외국인은 사실상 그랜트뿐이니까요. 

그래도 '회문'과 마술이라는 소재의 사용과 추리적인 전개, 흥미로운 과거의 범죄 등 재미있는 요소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개별 트릭의 완성도에는 아쉬움이 있지만, 회문과 마술을 결합한 색다른 본격 추리소설을 찾는 독자라면 추천드립니다.

2026/08/14

카리브 해적 살인 사건 - 요시무라 다쓰야: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작가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는 신잡지 창간 기획으로 세계 타이틀 도전을 앞둔 프로복서 카를로스 산토와의 대담을 위해 바하마를 찾았다. '카리브의 해적'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는 카를로스 산토는 해적 복장과 오른쪽 눈의 안대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으며 연승을 이어 가던 유망한 선수였다. 

그러나 대담 직전에 산토는 호텔 객실에서 망치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불화가 쌓일대로 쌓인 산토의 아내 리카코, 산토와 불륜 관계였던 사진작가 하야카와 미즈키, 그리고 곧 계약이 해제될 예정이었던 프로모터 키사라기 하야토까지 세 명 뿐이었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술을 먹지도, 자고 있지도 않았던 세계 정상급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제압할 수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시신이 평소와 달리 왼쪽 눈에 안대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 뿐인데...

일본 작가 요시무라 다쓰야가 '하룻밤 동안 펼쳐지는 극한의 타임 리밋 스릴러'를 콘셉트로 기획한 시리즈인 '원 나이트 미스터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미나이가 추천하길래 원서로 읽어 보았습니다. 콘셉트에 걸맞게 짤막한 중편 분량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탐정 역할인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가 주고받는 유쾌한 티키타카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가볍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고요.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어떻게 이런 살인이 가능했는가'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하우더닛물인데 트릭도 단순하면서도 깔끔합니다. 키사라기는 안대를 어느 쪽 눈에 착용하는 것이 더 보기 좋은지 시험해 보자며 산토에게 양쪽 눈에 번갈아 안대를 착용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양쪽 눈을 모두 가린 뒤 정면에서 망치로 가격해 살해했고요. 이후 안대 하나를 회수했지만, 자주 쓰던 쪽인 오른쪽 눈 안대를 나중에 씌웠기 때문에 왼쪽 눈에 안대가 남겨졌던 겁니다. 아사히나는 이를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발상이라고 설명하며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살인이 지나치게 급작스럽습니다. 시합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프로모터가 직접 살인을 저지를 이유가 빈약하며, 범행 이후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결국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살해할 수 없다'는 추리 퀴즈를 성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사건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또한 사건 구조상 범행 시각에 아사히나와 함께 있던 리카코, 산토를 살해할 동기가 없던 미즈키는 사실상 용의선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후더닛물로는 낙제점이에요. 카를로스 산토와 아내의 불화, 미즈키와의 불륜 설정도 진부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빠른 전개와 신선한 트릭은 좋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수준 이하인 졸작입니다. 구태여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2026/08/07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 놓을 때 까지(till death do us part) - 존 딕슨 카: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작가 리처드(딕) 마컴은 식스 애시즈 마을에서 레슬리 그랜트와 약혼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마을 바자회에서 레슬리가 점쟁이의 천막을 찾은 뒤 이상할 정도로 동요했고, 심지어 사격장에서 레슬리가 우연히 쏜 총탄이 점쟁이를 맞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밤, 점쟁이는 자신이 저명한 병리학자 하비 길먼 경이며 레슬리는 세 번이나 남편들이 밀실에서 청산가리를 주사하여 자살한 것처럼 만든 독살범이라는 이야기를 딕에게 들려주며, 레슬리가 딕을 초대할 때 자신이 집에 숨어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하비 길먼 경도 밀실에서 청산가리 주사로 사망한 사체로 발견되었고, 현장에 나타난 기디언 펠 박사는 피해자는 하비 길먼 경이 아니라 유명한 사기꾼 샘 드 빌라라는걸 밝히는데...

존 딕슨 카의 장편으로 기디온 펠 박사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일본 번역본으로 읽었습니다.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초반 설정입니다. 주인공 딕 마컴의 약혼녀 레슬리는 한 점쟁이에게서 불쾌한 말을 듣고 분개하다가 우발적으로 그를 총으로 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점쟁이는 자신이 유명 병리학자 하비 길먼 경이며 레슬리가 과거 남편들을 청산가리로 살해한 독살범이라고 주장하고요.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하비 길먼 경마저 자신이 설명했던 사건과 똑같은 형태로 밀실 안에서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은 채 발견됩니다. 마컴은 레슬리를 믿고 싶지만, 피해자가 남긴 말과 똑같이 벌어진 죽음은 그녀를 의심하게 만들 수 밖에 없게 되지요. 아, 정말이지 두근두근합니다.

피해자가 하비 길먼 경이 아니라 변장한 사기꾼 샘 드 빌라였고, 레슬리가 독살범이라는 거짓말로 마컴을 속여 그녀의 집에 몰래 들어간 뒤 보석을 훔치려 했다는 계획도 좋아요. 점쟁이의 예언과 독살범이라는 폭로가 모두 절도 계획을 위한 연극이었다는건데 상당히 잘 짜여져 있는 사기극이라는 느낌을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원래 밀실 살인 트릭은 없이 이 사기극만 라디오 드라마로 발표되었다는데, 납득이 되는 완벽한 구성이라 생각되네요.

딕슨 카 작품답게 밀실 트릭도 괜찮습니다. 벽에 난 구멍으로 실을 빼낸 뒤, 그 실을 당겨 창문의 잠금 장치를 잠근다는, 아래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 지극히 단순한 트릭이지만 단순해서 현실성은 높습니다.

무엇보다도 새벽에 벌인 총격 소동으로 장치에 사용했던 구멍을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아이디어가 빼어나며, 이에 대한 단서 제공도 고전 본격 추리물답게 공정합니다. 총 구멍이 밤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애시 경의 증언처럼요.

하지만 진범인 미들스워스 박사가 직접 기디언 펠 박사를 데려와 사건 해결을 부탁했다는 전개는 이상합니다. 자신의 범행을 밝혀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을 스스로 현장에 부를 이유가 있을까요? 미들스워스 박사가 나서지 않았다면, 무능한 지방 경찰들에 의해 샘 드 빌라는 자살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심을 산 레슬리는 마을을 떠나게 되고, 딕과도 헤어지게 되겠지만 둘의 사랑을 미들스워스 박사가 지켜줄 이유는 없어요.

그리고 독자를 속이기 위한 설정도 과합니다. 새벽에 레슬리가 피해자의 집 앞까지 갔는데 몽유병 상태라 기억하지 못했다던가, 금고 속 내용물 때문에 신시아와 격투를 벌였다는 설정들이 대표적입니다. 마컴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상황 묘사와 신시아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행동들도 모두 혼란스럽고요. 쓸데없는 작전으로 마을 우편소장이 살해당한 것도 불필요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래도 단점이 크지는 않습니다. 혼란스러운 묘사는 제대로 된 번역으로 읽었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영역일 테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강한 도입부와 효과적인 밀실 트릭이라는 장점만으로도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힙니다.

#여태까지 내가 읽었던 존 딕슨 카 작품 순위

2026/07/31

명탐정의 유해성 - 사쿠라바 카즈키 / 권영주 : 별점 2점

20년 전 명탐정 가제의 조수였던 나루는 결혼 후 가업인 카페를 운영하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튜버 코롱이가 명탐정들의 폐해를 고발하는 영상을 공개한 탓에 가제가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가제는 나루와 함께 과거 사건의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당시의 진실을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잊고 있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고, 명탐정의 추리가 언제나 절대적인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도 마주했다. 

결국 여행은 끝났고, 나루는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나오키 상 수상 작가 사쿠라바 카즈키의 장편입니다. 제목만 보면 본격 추리소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명탐정이라는 캐릭터와 추리 소설의 관행을 풍자하는 성격이 훨씬 강합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같은 완전 풍자 유머 소설은 아닙니다. '명탐정'이라는 존재를 통해 헤이세이와 레이와라는 두 시대를 대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중년 성장기에 가까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헤이세이는 미디어가 만들어 낸 화려한 명탐정들의 시대입니다. 사건만 생기면 어디든 나타나 극적인 추리를 펼치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던 명탐정들은 현실적인 인물이라기보다 만화 속 히어로처럼 그려집니다. 반면 레이와는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시대입니다. 한때 명탐정의 조수로 이름을 알렸던 나루는 오십 대가 되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알아보지 않는 평범한 동네 중년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화려했던 헤이세이와 소박한 레이와를 '명탐정'이라는 의외의 소재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나루가 가제와 함께 화려했던 헤이세이의 영광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다시 돌아보면서 잊고 지냈던 즐거운 기억뿐 아니라 외면했던 상처까지 마주합니다. 그러면서 지나간 시절을 되찾는게 아니라 현재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요. 그래서 중년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성장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추리적인 재미도 아예 없는건 아닙니다. 초반 나루와 가제가 처음 만났을 때 나루가 사는 곳을 추리해 내는 가제의 추리나 AI 탐정이 사실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이 연기하고 있었다는 진상을 나루가 사소한 단서만으로 밝혀내는 장면 등은 꽤 그럴듯 합니다.

명탐정 풍자도 재미있습니다. 사건만 생기면 어디에나 나타나고 화려한 언행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작품 속의 헤이세이 명탐정들은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과장된, 초법적인 히어로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졌던 겁니다. 그야말로 만화와 다를게 없었던 것이지요. 

명탐정의 추리를 비판적으로 비판하는 시각도 흥미롭습니다. 당시 주어진 단서만 놓고 보면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추리였더라도, 나중에 새로운 정보가 밝혀진다면 그 결론 역시 왜곡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즉, 명탐정이라는 존재는 현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DNA 검사 등으로 나중에 증거는 얼마든지 추가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부족한 정보로 산 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노는데 불과하다는 코롱이의 비난도 꽤 합리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추리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작품 속 추리들은 대부분 이미 해결된 사건을 되돌아보는 형식이고, 그나마 등장하는 사건과 트릭들도 만화적인 아이디어들이 많은 탓입니다. '크리스마스 연쇄 살인'에서 피해자들이 받았던 장식물의 순서대로 살해당했단게 대표적입니다. 순록 - 굴뚝 - 벽난로 순으로, 이건 산타의 이동 경로라는 추리거든요. 

코롱이를 중심으로 한 현재 시점의 전개도 다소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유튜브 폭로 영상 하나가 과거 사건을 다시 확인하는 긴 여정의 계기가 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후반부에 코롱이가 가제와 나루의 일행이 되는 전개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솔직히 등장하지 않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케이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루가 처한 현재 상황 - 모두가 무시하는 투명 인간 - 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라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성격과 행동이 지나치게 거슬려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명탐정을 주제로 그려낸 성장기라는 아이디어는 독특하고, 명탐정에 대한 재해석은 흥미습니다 그러나 추리 소설로는 별볼일 없어서 감점합니다.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2026/07/24

203호실 - 가몬 나나미 : 별점 2.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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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 오키무라 기요미는 한정된 예산 때문에 도쿄 변두리의 작은 원룸 203호실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방을 꾸미며 자취 생활을 즐겼지만, 어느 날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 뒤 방 안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계속되었고, 무너져 가던 기요미는 호감을 품었던 썸남 니이자토, 그리고 아르바이트 동료 유키코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도움은 미미했고, 결국 기요미는 203호실 안의 깊은 어둠에 삼켜지고 말았다... 

가몬 나나미의 "203호실"은 여대생이 기이한 원룸에 삼켜지는 과정을 그린 장편 호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흔히 대저택을 무대로 삼는 전형적인 ‘저주받은 집’ 이야기인데, 이를 가난한 대학 신입생의 원룸으로 축소한게 인상적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악취, 천장에서 누군가 뛰어다니는 소리, 사람이 앉았다 간 듯한 바닥의 온기, 기묘한 얼룩과 벌레, 갑자기 젖은 현관 매트처럼 일상적인 소재가 괴이현상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공포가 한층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천장 얼룩을 가리려고 붙인 외국 풍경 그림 속 창문을 누군가 긁는 듯한 장면처럼 섬뜩한 묘사도 제법 많고요.

기요미와 이전 세입자들이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결말 - '전에 살던 학생이 집세를 밀린 채 도망가 버렸을 뿐이다'. - 도 좋습니다. 극도의 외로움이 공포심으로 승화되어 스스로 파멸하고 말았다는 뜻도 되니까요. 단순한 호러가 아니라, 비정한 현대 사회를 고발하기도 하는 멋진 설정입니다. 

그러나 사건이 203호실이라는 좁은 공간과 기요미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이야기의 규모가 작은 탓에 뒤로 가면 지루해집니다. 기요미의 행동도 답답합니다. 왜 진작에 방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부동산에 제시할 명확한 사유가 없다는 설명은 한국 독자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행동도 납득하기 어렵고요.

가장 큰 아쉬움은 괴이현상의 원인이 끝내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03호실에 정체불명의 악의가 존재하고 거주자들을 삼킨다는 사실만 제시될 뿐, 그 기원이나 정체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처럼 괴이의 실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설명은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설명드렸듯, 극한 외로움으로 기요미가 미쳐버렸다는 식으로 풀어내는 식으로요.

그래도 독자를 섬찟하게 만드는 호러 소설로서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분량도 적당한 편이고요. 헌티드 하우스와 저주받은 집 이야기, J호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7/10

퍼즐 - 야마다 유스케 : 별점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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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사립 도쿠메이칸 고등학교가 테러범들에게 점거당했다. 최우수 학급인 3-A 반의 담임 야스다와 전학갔던 이전 동급생 미토메가 인질로 잡혔다. 테러범들은 인질들의 목숨을 댓가로 3-A 반 학생들에게 게임을 제안했다. 48시간 내에, 학교에 숨겨져 있는 2,000개의 퍼즐 조각을 찾아 맞추는 게임이었다.  

일본 작가 야마다 유스케의 장편 소설입니다. 만화, 드라마, 영화에 심지어 게임까지 제작되었던 인기작인데 국내에는 아직 정식 소개되지는 않았습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특징이라면 전형적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폐쇄된 곳은 학교, 게임은 학교 안에 숨겨진 2,000개의 퍼즐 조각을 48시간 안에 찾아서 맞추는 것. 게임의 보상은 인질의 목숨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와 비교해 보면, '게임'이 장점입니다. 학교 곳곳에 작은 퍼즐 조각이 숨겨져 있는데, 이를 찾아내서 맞춰야 한다는 현실성도 좋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퍼즐 조각을 발견하는 묘사도 흥미를 자아내는 덕분입니다. 그리고 퍼즐 조각을 찾아서 맞추기 위해 열 세 명의 학생들이 역할을 분담하는 과정, 이 때 서로 각자가 가진 심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묘사도 재미 요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조각을 끝내 발견하지 못해서 게임은 실패하는데, 여기서 테러범들의 정체로 이어지는 결말도 그럴싸 합니다. 마지막 한 조각이 미토메의 얼굴이었고, 퍼즐의 원본 그림이 3-A반 학생들의 입학식 사진이라는 단서도 충실하고요. 테러범들은 입학은 같이 했지만 성적 하락으로 낙오하여 전학갔던 동급생들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입시 학원처럼 변한 학교 비판도 담고 있어서, 약간 사회파스러운 느낌도 전해줍니다. 초반에 이탈했던 이케타의 어머니가 다른 애들이 갇혀 있을 때 공부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종용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게임 외 설정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테러범들이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경찰이 48시간 동안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학생 두 명이 초반에 돌아가는 등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고요. 또 학생들이 왜 계속 게임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불충분합니다.야스다 선생은 학생들을 성적과 입시 기준으로 대하던 교사입니다. 과거에 낙오한 학생 미토메가 누구인지도 대부분 몰랐고요. 그런데 학생들이 야스다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부자연스럽습니다. 

테러범들의 목적도 불분명합니다. 이들이 낙오한 가장 큰 이유가 야스다 선생 때문이라면, 복수의 대상은 야스다로 한정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학교를 점령하고 학생들에게 퍼즐 게임을 시킨 이유는?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퍼즐을 찾는 과정과 학생들의 심리 묘사를 통한 긴장감은 제법이지만, 설정과 동기 등의 측면에서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7/03

고블린 숲의 집 - 존 딕슨 카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브와 빌 커플은 헨리 경을 피크닉에 초대했다. 장소는 이브의 사촌 비키가 어린 시절 깜쪽같이 사라졌던 사건으로 유명한 고블린 숲에 있는 별장이었다. 그런데 이번 피크닉에서도 비키가 깜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브와 헨리 경이 별장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뒷문과 창문은 모두 잠겨있었으며 별장 안에는 다른 숨을 곳도 없었다...

존 딕슨 카의 명탐정 중 한 명인 헨리 메리베일 경이 등장하는 단편입니다. 이전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 "고블린 숲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언급된 작품이지요. 원서를 구해 읽었습니다.

"밀실 대도감"에서 언급할 만큼 밀실 트릭이 핵심인 작품입니다. 사건의 수수께끼는 별장 안에 있던 비키가 사라진 겁니다. 정문은 헨리 경과 이브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비키는 그쪽으로는 나갈 수 없었습니다. 뒷문과 창문은 모두 잠겨 있었고, 별장 안을 수색해도 비키는 발견되지 않았지요.

의사인 빌이 비키를 살해한 뒤, 욕실에서 시신을 해체하고 유포에 싸서 바느질한 다음 세 개의 큰 피크닉 바구니에 나누어 담았다는게 진상입니다. 이후 빌은 뒷문으로 빠져나갔고, 나중에 헨리 경 앞에서 둘을 찾는다며 정문으로 들어온 이브가 뒷문을 잠그면서 처음부터 잠겨 있었던 것처럼 꾸몄고요.

트릭도 괜찮지만, 핵심 단서인 유포 조각과 세 개의 피크닉 바구니도 미리 제시된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공정함 측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어요.

반면 작품 전체의 완성도는 다소 아쉽습니다. 가장 이상한 건 빌과 이브가 헨리 경을 목격자로 초대한다는 설정입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그걸 실종으로 위장하려는 범인이 굳이 유명한 명탐정을 현장에 불러들일 이유가 있을까요? 

범행의 현실성에서도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작중에서는 범행에 헨리 경이 시가 세 대를 피울 정도의 시간이 흐른걸로 묘사됩니다. 대략 두세 시간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그 시간 안에 성인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해체한 뒤 유포에 싸서 바느질하고, 바구니에 나누어 담은 후 현장 정리까지 끝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이브와 비키의 목소리가 같다는 정보가 후반에 공개되는 점도 공정성 측면에서는 아쉽습니다. 그리고 이게 필요했던 정보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구태여 비키가 신비로운 공간에서 살아있다는 척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실종 신고 후 유산을 받으려면 오히려 하면 안되는 행동이 아니었나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6/26

1888 잭 더 리퍼 (一八八八 切り裂きジャック) - 핫토리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88년, 국비 유학생 가시와기 가오루는 '엘리펀트 맨' 연구를 위해 찾은 런던에서, 먼저 와 있던 도쿄대 동창 다카하라 고레미쓰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다카하라가 스코틀랜드 야드 근무를 하던 탓에, 가오루는 그해 막 시작된 '잭 더 리퍼' 사건에 휩쓸렸다. 그러면서 앨버트 에드워드 전하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 - 황태자비, 황태손,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와 리처드 버튼, 버너드 쇼, 신지학 영매 마담 블라바츠키 등 - 과 어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찾아 나가게 된다.

일본 작가 핫토리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1888년 런던 묘사입니다. 화이트채플을 비롯한 여러 장소가 실제로 발로 뛰어 쓴 것처럼 생생하고 안개와 거리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다카하라와 가오루가 머무는 하숙집도 방의 구조와 가구, 집주인 보몬트 부인의 관리와 접대까지 생활감 있게 그려져 있고요. 일본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이방인인 일본인이 영국에 압도당하는 묘사도 좋습니다. 가오루는 당대 최대 선진국인 영국을 바라보며 감탄하면서도 위축되는데, 그 심정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일본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원래 백성이었던 자들이 영국을 흉내 내어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며 으스댄다는 식인데 꽤 통렬합니다.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하기까지의 가시와기 가오루의 심리 묘사도 설득력 넘치고요.

팩션답게 많은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 앨버트 에드워드 황태자, 앨버트 빅터 황태손, "동굴의 여왕"의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 신지학 마담 블라바츠키,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개자 리처드 버튼, 잭 더 리퍼 후보이기도 했던 변호사 몬터규 존 드루잇에 심지어 어린 시절의 버지니아 울프까지! - 이 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이 중 옆 집 6살 소녀인 버지니아와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자기 과시욕이 강한 가난한 아일랜드인으로 그려지는 버너드 쇼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잭 더 리퍼로 오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잘 어울렸어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엘리펀트 맨" 조지프 케리 메릭에 대한 묘사도 좋습니다. 과거의 ‘공연’은 그 자신도 감수했던 행동이었고, 현재의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가오루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심성이 아주 인상적이거든요.

잭 더 리퍼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묘사도 강렬합니다.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낙서를 지운 이유와 그 낙서의 의미를 풀어내는 부분처럼 익히 알려져 있는 설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고 있고요. 수사를 맡았던 경찰 조직과 지휘 체계, 수사 방식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마지막 피해자 메리 켈리와 가오루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는 설정도 좋습니다. 가오루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고 메리 켈리를 사랑한 존 드루잇과 가오루 사이의 접점도 더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최후가 더 끔찍하게 다가오니까요. 잭 더 리퍼 사건을 바라보는 런던 시민들의 태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내세운 범인은 트리브스 의사인데, 트리브스는 화이트채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므로 매춘부들이 경계하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물을 마음대로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인데 꽤 그럴듯 합니다. 트리브스가 보호하는 '엘리펀트 맨' 조지프 메릭이 얽혀있다는 추리도 괜찮습니다. 트리브스는 메릭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밤중에 병원으로 들어올 때 메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추리이지요. 단서는 메릭이 몸을 씻을 때 보였던 핏자국입니다. 메릭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그 피는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메릭이 입을 다문 이유도 앞서 가오루가 눈치챈, 지금의 안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고요. 

가오루가 첫 눈에 반했던 비토리아는 드루잇의 여장 모습이었고, 드루잇은 스티븐과 여장을 하는 동반자였는데 드루잇이 메리 켈리와 사랑에 빠져서 일어난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드루잇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티븐이 잭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비밀방에 감금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버지니아가 스티븐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유령 소리'도 여기서 복선처럼 사용됩니다. 스티븐이 여장할 때 사용하던 옷장 속 비밀 방에서 난 소리였던 겁니다.

범행 도구로 보이는 메스가 가오루에게 전해진 메릭이 만든 이별 선물 안에 있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나쁘지 않고, 그 외 시기와 잘 맞춰 사용된 사건과 소품들도 볼거리에요. 수시니의 비너스, 자전거, 베르티용 측정법과 지문, 맹장염 수술법, 빌헬름 1세의 죽음과 마지막의 관동 대지진까지 모두 적재적소에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 소설로 보기는 무리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진범이라는 추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탓입니다. 황태손이 범인이고 왕실 주치의가 은닉을 도왔다는 식의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추론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부족해서, 후더닛과 와이더닛 양쪽 모두에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황태자 연회에서 펼쳐지는 다카하라의 추리쇼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지문을 확보했다며 연회에 참석한 상류 계급 의사들을 대상으로 협막을 하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문이 일반적이지도 않은 시대인데도 말이지요. 트리브스가 범인이라는걸 황태자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면, 이런 추리쇼보다는 몰래 트리브스 의사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쪽이 더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분량도 문제입니다. 78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가시와기 가오루의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러운 심리 묘사, 연회와 만찬 장면, 주변 인물 묘사가 너무 많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미남으로 황태자를 비롯한 온갖 상류층과 깊은 교분을 쌓은 다카하라 캐릭터 설정도 영 별로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잭 더 리퍼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활용한 팩션으로는 볼 만 하지만 추리 소설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내 소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6/06/19

스와이프 엄금 - 치넨 미키토 / 김은모 : 별점 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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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밝은 미래를 위해 선배 야에가시가 부탁한 '도메키의 동네'라는 괴담 조사를 나섰다.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도메키의 피해자였던 아메치의 정보를 입수하여 도메키의 동네가 어디인지 알아냈지만, 현장 조사 후 나에게 '도메키'가 들러붙은걸 알게 되었다... 

한쪽에는 본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휴대폰 앱 화면이나 관련 그림이 실려 있는 그림책에 가까운 단편입니다. "유리탑의 살인" 등으로 유명한 치넨 미키토의 신작으로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형식만큼은 휴대폰 중심의 이야기와 잘 어울립니다. 메시지, 위치 정보, 앱 인터페이스처럼 보이는 화면이 동일한 내용의 본문과 함께 펼쳐져서 독자가 화자와 똑같은 화면을 보는 느낌을 주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이외의 장점은 없습니다. 우선 괴담치고 무섭지 않은 탓이 가장 큽니다. "도메키의 동네"는 눈이 그려진 이미지 외에는 긴장감이 거의 없고, 도메키의 습격도 뻔합니다. 피해자들을 추적하는 매개체가 휴대폰이었다는 진상 역시 책의 형태와 도메키의 행태를 보면 쉽게 짐작되고요.

내용도 별게 없어요. 화자가 하는거라고는 앱에 표시된 내용을 확인하거나 검색하는게 전부입니다. 피해자인 아메치의 집을 찾아가 계정 정보를 얻는 정도를 빼면요.

처음에는 야에가시의 후배 가즈마가 화자였던걸로 보였지만, 사실 화자는 가즈마의 연인 루리카였다는 반전도 애매합니다. 교묘하게 서술 트릭을 쓴건 맞지만, 이 반전은 이야기와 별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가즈마와 루리카는 모두 죽거든요. 이래서야 그냥 서술 트릭을 활용한 깜짝쇼에 불과합니다.

그림도 아쉽습니다. 휴대폰 앱 화면처럼 꾸민 페이지는 형식과 잘 어울리는데 그 외의 일러스트는 영 별로에요. 분위기를 살리기는커녕 유치하게 보여 그렇잖아도 무섭지 않는 괴담으로의 가치를 더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독특한 편집 형식 하나를 제외하면 추천할 만한 부분을 찾기 어려운,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일러스트로 포장했을 뿐인 망작입니다. 추천하지 않습니다.

2026/06/12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 - 화바이룽/ 김소희 : 별점 2.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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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사랑은 추억이나 순간,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아."

어느 날 남편 밍런이 갑작스럽게 이혼을 통보했다. 밍런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의심한 나는 친한 팡 언니에게 부탁해 밍런을 조사하기 시작했지만 성과는 없었고, 결국 이혼은 성립되었다. 

그 뒤 밍런이 사람을 죽여 체포된 뒤 구속되었고, 밍런의 동기를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나에게 독방에서 자살한 밍런의 이메일이 전달되며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

대만 작가 화바이룽의 장편소설입니다. 범죄물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심리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남편 밍런을 교도소에서 면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 뒤, 이야기는 사건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밍런의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 아내의 불륜 의심, 사설 조사, 살인, 구속, 자살, 마지막 진상까지 빠르게 이어지는데 이러한 전개가 만들어 내는 흡입력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밍런이 왜 이혼을 요구했는지, 왜 개명했는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왜 끝내 자살했는지 계속 궁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롯이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이어지는 묘사도 좋습니다. 갑자기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의 혼란과 분노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덕분이에요. 사건은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주인공의 감정은 설득력이 넘칩니다. 그만큼 생생하고 생활감 있는 묘사가 빼어납니다. 웃기기도 하고요.

범행의 세부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밍런의 작업실은 보안이 엄격한 곳입니다. 그래서 피해자 뤄지가 그곳에 쉽게 들어갔다는 설명은 의심스럽고, 밍런이 자백한 그대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만듭니다. 작업실에 있던 두 개의 옷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밍런은 옷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작업실에는 옷장이 두 개나 있었고, 그중 하나는 잠겨 있었는데 역시 뭔가 수상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는 밍런이 작업실에서 재스민이라고 부르는 러브돌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진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옷장은 밍런이 재스민과 관련 물품을 숨긴 공간이었고요. 이를 알아챈 뤄지는 밍런을 협박하다가 고압 전기에 감전되어 살해당합니다. 이 죽음 역시 앞에서 밍런이 형과 함께 감전 장치를 만들었다는 복선을 통해 연결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꽤 잘 짜여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뤄지가 밍런의 비밀을 알게 된 이유도 재미있는데, 아내가 의뢰한 불륜 조사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지 확인하려 했을 뿐인데, 그 조사 때문에 밍런의 은밀한 비밀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비밀은 협박으로 이어지고, 결국 살인까지 부르고요. 처음의 의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마지막 비극과 진상에 맞물린다는 점에서 일종의 윤회식 구조라 할 수 있는데, 작품과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하지만 밀리의 서재에서 홍보하는 대로 '추리소설'로 보면 아쉽습니다. 복선은 있지만 독자가 단서를 모아 진상을 맞히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갈 뿐이며, 중요한 진실은 밍런의 자백(이메일)로 밝혀지니까요. 

밍런의 동기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는 결혼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러브돌에 깊이 빠졌을까요? 주인공 '나'의 1인칭으로만 전개되기 때문에 밍런 시점의 고민은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가 어둠 속에 머물고 싶었다는 식인데,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더구나 이미 이혼도 했고, 러브돌과의 관계가 불법도 아닌데 왜 살인까지 해야 했는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허술한 부분도 보입니다. 작업실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점은 좋은 복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뤄지가 경비원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작업실에 들어갔다고 밝혀집니다. 이렇게 되면 보안이 엄격하다는 설정의 힘이 약해집니다. 치밀한 장치로 보기도 어렵고요. 또 이 경비원 친구의 존재도 문제입니다. 밍런은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뤄지를 죽이고 자살합니다. 하지만 뤄지가 작업실에 들어가는 것을 도운 경비원 친구가 입을 열면 밍런의 비밀은 다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밍런의 자살 이유도 애매해집니다. 비밀을 완전히 묻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흥미진진한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남편의 이혼 통보에서 시작해 불륜 조사, 살인, 자살, 진상 공개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빠릅니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도 좋고, 생활감 있는 문장도 인상적입니다. 추리물로는 아쉽지만 범죄 드라마로는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5/29

어려운 문제가 가득한 레스토랑 - 유키 신이치로 / 김은모 : 별점 2.5점

"#진상을 말씀드립니다"의 작가 유키 신이치로의 공유 주방을 배경으로 한 연작 단편집입니다. 다양한 음식점 수십 개를 등록해 우버 이츠로부터 배달 주문을 받는 공유 주방의 점장이, 외부 활동을 하는 배달원들이 모아온 정보를 바탕으로 추리를 펼치는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설정은 꽤 좋습니다. 점장은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미남이지만, 정의감 넘치는 명탐정이라기보다는 적절한 가격에 추리 결과를 제공하는 냉정한 장사꾼에 가깝습니다. 의뢰인만 알고 지불할 수 있는 거액의 요리를 시스템에 등록해 거래하는 방식도 합리적이고요. 배달 앱과 공유 주방이라는 현대적인 시스템을 추리소설의 장치로 활용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스템에 대한 깊은 연구도 돋보이고요.

사건 역시 일상계에 가까운 이야기부터 묵직한 살인까지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앞부분 수록작들은 설정도 좋고, 추리적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특히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은 이 시리즈가 가진 장점을 잘 보여줍니다. 배달원이 사건 현장에서 직접 뛰어다니고, 점장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는 구조도 안정적입니다.

다만 뒤로 갈수록 설정이 애매해지고, 추리적으로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특히 후반부에서 점장의 정체를 실체적으로 밝혀내려는 시도가 등장하는 점은 영 별로였습니다. 이런 인물은 판타지로 남아 있을 때 더 매력적입니다. 굳이 현실적인 설명을 붙이려는 순간, 앞에서 쌓아둔 쿨하고 냉정한 분위기가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최소한 앞의 수록작 두 편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작가의 전작이 영 아니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자기만의 무언가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로서 성장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전체 완성도가 아주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공유 주방과 배달 앱을 결합한 안락의자 탐정물이라는 설정, 그리고 앞부분 수록작들의 추리적 재미만으로도 읽어볼 가치는 있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넘어져도 빈손으로는 일어서지 않는 완두콩 싹 달걀 수프 사건

맨션에서 화재 사건이 벌어졌다. 화재가 일어난 방의 입주민이었던 대학생 가지와라 료마는 팬티 바람으로 입주민들을 깨워 도망치게 하여 대참사를 막았다. 그러나 전소한 료마의 방에서 료마의 전 여자친구 유즈키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경찰은 자살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유즈키가 헐렁한 옷을 입고 화재 현장에 나타나 ‘당해봐라’라는 복수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뒤, 불길이 치솟는 건물 안에 자기 발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연에 따른 극단적 선택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점장의 추리는 다릅니다. 료마는 유즈키를 미리 죽여 자기 방에 놓아둔 뒤, 불을 지르고 유즈키의 옷을 입고 나와 유즈키인 척했습니다. 그리고 밖에 있다가 다시 화재 현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유즈키가 스스로 불길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꾸몄던 겁니다.

근거는 배달원의 조사입니다. 료마가 여성스러운 외모와 체구의 소유자이며, 심한 근시라 잘 때는 렌즈를 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료마는 팬티 바람으로 밖에 나와 있을 때 현장에 있던 현재 여자친구를 알아봤습니다. 이 증언을 통해 점장은 료마가 렌즈를 끼고 있었고, 따라서 자다가 급히 나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합니다.

시리즈의 설정과 분위기를 알려주는 첫 작품으로는 꽤 좋습니다. 사건 자체도 나쁘지 않고, 여장 트릭과 시력 단서를 결합한 추리도 깔끔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결말입니다. 사건을 의뢰해던 료마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진상을 알고 싶어 한게 아닙니다. 그 진상을 가지고 아내를 협박하려 했지요. 점장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추리를 들려줍니다. 점장은 음식점의 셰프로서 고객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면 충분하다는 식이거든요. 정의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 추리가 진짜라고 보장하지도 않고요. 이 부분에서 의뢰와 돈에만 충실한 추리를 펼친다는, 이 시리즈만의 독특함이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첫 작품으로서 세계관 소개도 잘하고, 추리적으로도 준수합니다. 무엇보다 점장의 냉정한 캐릭터가 확실하게 각인된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잉꼬부부의 갈릭 버터 치킨 수프 사건

남편 다이시로가 교통사고로 죽은 뒤, 아내는 처음으로 남편의 왼손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이시로는 왜 손가락이 절단된 것을 숨겼을까? 그리고 아내는 왜 몇 개월 동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설정부터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손가락이 절단된 남편, 그 사실을 몇 개월 동안이나 모른 아내라는 출발점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이 사건은 배달을 맡은 배달원의 가정사와 연결되며 부부 사이의 애정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는데, 이 드라마가 특히 좋습니다. 배달원은 자기 손가락이 잘렸을 경우, 아내가 그걸 알아챌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 불안과 의심이 마지막 식사 장면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이고요. 사건의 수수께끼와 배달원의 개인사가 따로 놀지 않고, 부부라는 공통된 주제 안에서 자연스럽게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소통 부족이라는 사회파스러운 문제 제기까지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깔끔합니다. 남편의 아내가 엄청난 악처로, 결혼반지에 대해 히스테리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는 증언이 핵심 단서입니다. 점장은 결혼반지를 잃어버린 남편이 그것을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을 절단했다고 추리합니다. 극단적인 해결책이기는 하지만, 이는 앞서 쌓아온 부부 관계의 드라마와 맞물리면서 충분한 설득력을 얻습니다. 추리에 대한 근거 - 구급차 대신 택시를 탔고, 절단된 손가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도 합리적이고요.

반지를 누가 가져갔는지에 대한 추리도 좋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호스티스 리리카를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아내의 이름을 말했을 리 없지요. 그런데 리리카는 아내 요리코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혼반지 안쪽에 부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반지를 가져간 사람은 리리카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단순하지만 논리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는 추리였습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악처의 잔소리가 싫었다 하더라도 손가락을 절단한다는건 너무 극단적이지요. 베란다에 대한 조사 역시 조금 과하게 작위적입니다. 그러나 단점들은 사소합니다. 설정과 전개, 드라마, 추리가 모두 잘 맞물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입니다.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의 양파 토마토 수프 사건

나는 전직 패션모델 출신 싱글맘으로 아들 하루토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유일한 위안은 수시로 X에 올리는 글에 대한 반응이었다.

배달원의 일상이 사건과 연결된다는 전개 방식은 직전 작품과 같습니다. 이번에는 배달원이 SNS, 정확히는 X에 중독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폐해를 직접 알거나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건 역시 같은 상황에서 비롯되고요.

수수께끼는 빈집털이범의 기묘한 행동입니다. 범인은 빈집을 털러 들어왔는데, 그 안에서 무언가에 놀란 듯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붙잡혔습니다. 도대체 그는 왜 빈집 안에서 갑자기 핸드폰을 확인했을까요?

정답은 빈집털이범이 집을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빈집털이범은 배달원으로 일하며 배달품 안에 집집마다 다른 감사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감사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X에 글을 올리면, 범인은 어느 집인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이 X에 집을 비운다는 글을 남기면 그때 빈집을 터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범인은 그 집을 유명 인플루언서 마루미 짱의 집으로 착각했습니다. 이는 모두 마루미 짱의 계획이었습니다. 마루미 짱은 자기 고교 동창이자 친구인 고토미의 집을 털게 하려고 일부러 고토미의 집에 놀러 가서 배달을 시킨 뒤, X에 감사 메시지를 올렸지요. 이유는 자신에게 악플을 달던 악플러의 정체가 고토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요. 복수하려 한 것이지요.

동기는 좋고, 추리도 깔끔합니다. SNS를 활용하는 범죄 수법도 재미있습니다. X에 중독된 배달원이 X 때문에 개인 사생활이 드러나고, 대중의 관심을 얻으려 할수록 오히려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과정을 사건과 결합한 부분도 괜찮아요. 소재와 주제가 잘 맞물린 편입니다.

하지만 약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감사 메시지를 보낸 배달원이 반드시 빈집털이범이라는 전제가 없다는 점입니다. 마루미 짱은 빈집털이범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고토미 집에 놀러 가서 배달을 시킬 생각이었을까요? 이 부분은 뭔가 설득력 있는 설정이 추가로 필요했습니다. 마루미 짱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는 점장의 추리는 재미있지만, 지금의 내용만으로는 범행 계획이 지나치게 우연에 기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또 하나 불만이었던 건 점장의 태도입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점장은 사건의 진상이 몰고 올 파장과 무관하게 순수히 돈과 주문에만 추구했습니다. 그게 특징이자 멋있는 점이었고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배달원에게 훈계하는 듯한 말을 남겨서 점장만의 카리스마가 깨져버립니다. 때문에 캐릭터의 일관성이 이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SNS와 배달 시스템을 이용한 범죄라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사건의 설득력과 점장 캐릭터 운용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수치가 이상한 수준의 건더기 가득한 육개장 수프 사건

작가인 배달원이 점장에게 수수께끼를 가져왔다. 한 여성에게 열 번이나 똑같은 배달원이 음식을 배달했고, 마지막 배달 때에는 밀봉된 배달 음식 봉투 안에 머플러가 들어 있었다는 사건이었다. 마침 그녀가 머플러를 잃어버린 직후였기 때문에,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상황인데...

점장은 음식을 가져다준 사람이 배달원이 아니라, 잘못 배달된 음식을 받은 다른 건물 입주민이었다고 추리합니다. 오래된 맨션의 1호와 2호가 나란히 서 있어서 배달원이 착각했고, 그 잘못 배달된 음식을 받은 남자가 다시 여성에게 가져다주었다는 것이지요. 마침 그는 여성에게 호감이 있었고, 여성을 관찰하다가 머플러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된 뒤 선물로 머플러를 넣었습니다. 이는 가게 포장지가 기성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배달 온 포장을 뜯은 뒤, 기성 포장지로 머플러와 함께 다시 포장해서 배달품을 가져다준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더 좋았던 건 이 표면상의 추리가 아닙니다. 실제로는 작가가 점장의 정체를 캐내려고 이런 사건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추리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점장은 작가에게 실제 배달 경로로 배달을 시킨 뒤, 그 동선을 확인해서 오배송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밝혀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장의 정체를 캐내려는 작가 설정은 영 별로였습니다. 물론 이런 수수께끼의 가게와 점장에 대해 궁금해하고, 어떻게든 그 실체를 밝혀내려고 애쓰는 인물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너무 어설프다는 겁니다. 미행도 그렇고, 사건을 의뢰하는 방식도 와 닿지 않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한다고 해서 점장의 정체에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는지도 애매하고요.

게다가 작가가 점장의 손에 의해 죽고 만다는 결말은 완전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점장은 만화적이고 판타지 같은 인물이지만, 배달원이 현실을 붙잡고 있는 덕분에 그럭저럭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판타지 속 인물처럼 보였던 점장이 현실에 있는 배달원에게 직접 손을 대는 순간, 그 실감은 완전히 깨져버리고 맙니다.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아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사건과 추리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점장의 정체를 파고드는 방향과 결말시리즈의 매력을 깎아먹었기에 감점합니다.

악령 퇴치 닭봉 삼계탕풍 수프 사건

분명히 비어 있는 이웃집에 계속해서 물건 배달이 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달라는 의뢰가 접수되었다. 

진상은 빈집의 옆집 여자, 정확히는 의뢰인 집 기준으로 옆옆집에 사는 여자가 벌인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허술한 맨션 방범 체계를 개선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어 있는 집 앞으로 계속 물건이 배달되는 상황을 만들면, 관리인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CCTV를 설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사건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비어 있는 집으로 계속 배달이 온다는 수수께끼는 일상계 미스터리지만 나름대로 기묘함을 전해줍니다. 다른 수록작들보다 범죄의 무게가 덜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하지만 진상은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맨션의 방범을 강화하고 싶었다면 이런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직접 CCTV를 사서 맨션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만두 배달만 한가득 시켰는데, 최소한 몇십만 원은 들었을 테니까요. 그 돈과 수고를 생각하면 범행 동기가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맨션 관리인이 진상 주민을 내쫓기 위해 다른 층에서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는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다른 층에서는 장기 출장 간 집 앞으로 배달이 계속되어 그 이웃집 진상이 이사를 갔다고 하는데, 정작 기분 나쁜 건 배달이 온 집 주민이지 이웃집 주민은 아닐 겁니다. 유명한 진상 세입자가 이 정도 일로 꿈쩍이나 할까 싶기도 하고요.

시리즈의 매력인 배달원의 일상과 사건의 연계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번 배달원은 인기 없는 개그맨입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를 자기 개그 소재로 쓰는 것이 전부이고, 본인의 드라마와 사건이 깊게 엮이지는 않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배달원의 개인사가 사건의 주제와 맞물렸던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약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수께끼의 출발점은 괜찮았지만, 진상과 동기, 배달원 캐릭터 활용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인 완탕 고추장 수프 사건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나(가지와라)’는 죽기 전에 범인의 정체를 확신했다...

첫 번째 사건의 배달원이 점장에게 인간 소실 사건 해결을 의뢰했다. 첫 번째 사건의 의뢰인이었던 가지와라 씨가 실종되고, 그의 자택에서는 강한 루미놀 반응이 발견된 사건이었다.

마지막 수록작인데 연작 단편집의 마무리로는 괜찮은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앞선 단편들의 배달원들이 모두 등장하고, 첫 번째 사건 의뢰인과 관련된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작품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마지막 작품으로 돌아오는 방식은 일종의 수미쌍관으로, 확실히 연작 단편집이구나!라는 재미를 전해줍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가지와라가 배달을 시켰을 때, 범인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배달원보다 먼저 찾아가 살해했는지가 핵심입니다. 진상은 특정 상품을 주문하면 안건 상담 비용을 할인해준다는 쿠폰에 있었습니다. 범인은 가지와라에게 그 쿠폰을 전달해두었고, 가지와라가 특정 상품을 주문하자 상담 의뢰가 들어온 것을 알고 배달원보다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살해한 뒤, 큰 우버 이츠 가방에 시체를 넣어 옮겼던 겁니다. 이는 특정 상품이 상담과 관련되어 있다는 앞선 설정과도 잘 연결되고, 쿠폰 전달 같은 소소한 정보도 비교적 공정하게 제공되어 마음에 듭니다. 

배달 앱과 공유 주방 시스템을 이용한 시리즈 특유의 장치도 마지막까지 살아 있고, 모든 추리는 결국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점장의 철학도 잘 드러나서 시리즈 작품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장이 범인이었다는 결말은 뜬금없었습니다. 가지와라의 전처, 그러니까 가지와라 료마의 어머니로부터 암살 의뢰를 받았다고 해서 실제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전개는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쌓아온 세계관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로 직접적인 살인 실행까지 가는 것은 과했습니다.

배달원들이 합심해서 진상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는 설정도 생각만큼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연작의 마무리로 여러 인물을 다시 모으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인물들의 감정이나 관계가 충분히 쌓여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마지막에 점장의 추리 철학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긴 것도 단점입니다. ‘모든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생각 자체는 이 시리즈와 잘 맞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 철학을 길게 풀어 설명하다 보니, 사건의 긴장감보다 작가의 설명 의식이 더 강하게 느껴진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