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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1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8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8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시리즈 38권. 이번 권은 기존 C.M.B와는 구성이 좀 다르다는게 특징입니다. Q.E.D처럼 조금 긴, 이야기 두 편만 수록되어 있거든요.

하지만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두 편 모두 설득력이 부족한 편입니다. 본 편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고사, 역사 이야기 비중이 높은 반면, 본 편 쪽은 여러모로 설명도 부족하고 헛점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럴 바에야 언제나처럼 이야기의 양으로 승부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두 편 모두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목격증인>>
하루미는 여자친구 마미를 칼로 찌른 죄로 4년 징역을 살고 풀려난 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줄 증인 이시바나의 존재를 알게된다. 이 정보를 전해준 간다라는 남자는 마미의 아버지 스미다에 의해 회사가 망했다는 이유로 하루미를 돕는다. 하루미는 간다의 지원으로 원양어선을 탄다는 이시바나의 행적을 3년 동안 뒤쫓는데...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고사인 한단지몽, 그리고 소품으로 등장하는 환등기처럼 '환상'을 소재로 풀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환상'은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이라고 사전에서 풀이되는데, 이야기 속에서 하루미가 찾으려는 이시바나가 바로 환상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시바나 우게츠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인물이라는게 너무 뻔해서 좀 시시했어요. 이름부터 그렇잖아요. 돌에 핀 꽃, 빗 속의 달이라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하루미가 범행을 저지른 진범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범행을 저지른 사실을 잊어버린채 있지도 않은 증인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하루미가 누군가 (간다)의 꼬임에 넘어가서 자신이 무죄라는걸 '날조할 수 있을' 증인을 찾아나서는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처럼 하루미 스스로가 본인이 무죄라고 굳게 믿는다? 이건 말도 안됩니다. 기억상실이라도 걸리지 않는 한에는요. 환상이 그 비밀, 정체를 아는 사람에게도 환상으로 보여질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이시바나의 존재를 던져주어 하루미가 3년 동안 허송세월하게 만든 간다가 마미의 아버지 스미다가 변장한 것이라는 진상, 그리고 그 동기만큼은 괜찮았습니다. 하루미가 선고받은 7년 형이 판결에서 4년으로 감형되었기 때문에 모자라는 3년을 더 썩게 만들려는 의도였다는데 꽤 그럴듯했어요.
간다의 이름을 핵심 소재이기도한 고사 '한단지몽'에서 이름을 따 온 아이디어도 좋았고요. 물론 간다의 이름 트릭은 일본인이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겠지만요.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을 납득할 수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빛의 거인>>
1218년, 아이슬란드의 스노리는 빼어난 시인으로 강대국 노르웨이 왕 호곤 4세의 비호를 얻는다. 그리고 게르만 전승을 글로 기록하는 사명에 매진하여 서사시 <<에다>>를 남긴다. 그러나 이후 아이슬란드에서 실각한 스노리는 호곤 4세에 의해 처형될 위기에 놓있는데...

800년 뒤, 부모의 이혼으로 삼촌댁에 얹혀사는 중 2 료타는 집의 천덕꾸러기 신세이다. 특히나 힘든 하루를 보낸 어느날, 해외에 일로 나가 있는 아빠의 소포를 발견하는데 그 뒤 괴한의 추격, 납치를 당하지만 탈출한 뒤 신라를 만나고, 신라는 소포 속 물건인 '방해석'과 그것을 이용한 암호 '성배'를 풀어낸다. 그들은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아이슬란드로 향하는데....


성배와 나치라는, <<인디애나 존스>>로 친숙한 소재가 대거 등장하는 작품.

'아이슬란드'와 게르만 신화의 아버지 스노리라는 소재는 신선했지만, 이야기는 좀 어설픕니다. 게르만 신화의 원류가 <<에다>>의 고향 아이슬란드이기 때문에, 아이슬란드에 성배가 있다!는 추리부터 어설프지요. 설득력도 없고요. 아버지가 보내온 소포 속 물건인 방해석이 아이슬란드에 많이 난다는 단서는 나쁘지 않지만, 아이슬란드가 방해석의 유일한 산지는 아니라서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에요. 현무암이었다면 무대가 제주도가 되었을까요?
애초에 료타의 아버지가 보낸 소포 암호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누군가 찾아오기를 바랐다면 그냥 편지를 쓰면 되니까요. 어차피 미행당하고 있으니, 위치가 드러나는건 숨길 수 없었기에,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는 암호를 보내는건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인 "빛의 거인"의 형태는 그럴듯하지만 바로 직전 권 수록작인 <<고양이 꼬리>>의 자가 복제에 불과하다는 것도 아쉬웠고요.

마지막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성배가 있는 장소의 함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시랍화된 사체를 간헐천에 넣으면 폭발한다는걸 이용한 함정이라는 아이디어만큼은 괜찮아요. 그러나 이 함정은 1회성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번 폭발하면 현장은 난장판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800년 전에 설치한 함정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게다가 잘 동작했다? 토목 공사의 신이라도 불가능할 일일겁니다.

그래도 함정 정도는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넘어간다고 치면,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스노리가 올슨의 병을 낫게 했다는 성배는 버드나무로 만든 잔을 물에 끓인 것으로, 이는 천연 아스피린 성분이었다는 이야기는 마음에 들었어요. 이런 이야기야 말로 C.M.B의 진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본 편 이야기와 함께 나란히 진행되는 스노리의 파란만장하면서도 호쾌한 생애도 역시나 C.M.B다운 현학적 재미를 가득 안겨다 주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아주 나쁘지도 않지만 납득이 가는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 한단지몽이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일이다. 
도사 여옹은 한단(邯鄲)으로 가는 도중 주막에서 쉬다가 노생이라는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산동(山東)에 사는데, 아무리 애를 써봐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산다며 신세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으로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 속에서 점점 커지는 베개 구멍 속으로 들어가보니, 고래등 같은 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 명문가인 그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하여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려 잡혀가게 되었다. 노생은 포박당하며 "내 고향 산동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았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벼슬길에 나갔던가.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거닐던 때가 그립구나"라고 말하며 자결하려 했으나, 아내와 아들의 만류로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사형은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수년 후 모함이었음이 밝혀져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후 노생은 모두 고관이 된 아들 다섯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그런데 노생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노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메조밥을 짓고 있었는데, 아직 뜸이 들지 않았을 정도의 짧은 동안의 꿈이었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네"라고 웃으며 말했다. 

노생은 한바탕 꿈으로 온갖 영욕과 부귀와 죽음까지도 다 겪게 해서 부질없는 욕망을 막아준 여옹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하고 한단을 떠났다.

2020/07/25

흉가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4점

흉가 - 8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산 윗집에 살면 안 돼! 지금 당장 도망쳐! (토코의 일기)

초등학교 4학년 쇼타는 아버지의 전근으로 교토 근처 안라 시의 시골 신흥 주택으로 이사한다. 그러나 쇼타는 어린 시절부터 흉조가 있을 때 마다 느꼈던 불길함을 이사온 집에서 느끼고, 집 안에서 유령과 같은 형체들과 조우한다. 다음날 어린 여동생 모모미도 한 밤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히히코'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말하자, 쇼타는 혼자서 집에 관련된 조사를 나서고 그러다고 마을 소년인 코헤이와 친구가 되는데...

납량특집용으로 읽게 된 미쓰다 신조의 공포호러 소설. 이른바 '집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불길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집과 관련된 여러가지 묘사에서 시작해서, 이런저런 수수께끼들이 하나씩 던져지기 때문입니다.
대충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 쇼타가 집에서 본 기묘한 형체는 무엇인지?
  • 왜 마을의 대지주였던 타츠미가가 붕괴하고, 일족이 몰살당해 당주인 센 할머니만 정신 이상이 된 채 폐가인 집에 남아 있는지?
  • 산에서 내려온다는 뭔가 안 좋은 것은 무엇인지?
  • 마을 사람들은 왜 산 윗집, 아래 맨션 사람들을 배척하는지?
  • 모모미에게 찾아온 '히히노'와 '히미코'는 무엇이고, 그들은 왜 모두 여섯명인지? 이들은 토코의 일기 속 '도도츠키' 등과 어떻게 다른지?
등입니다.

이에 대한 답도 산에 사는 '뱀신'을 중심으로 효과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쇼타가 집에서 본 기묘한 형체, 특정 장소를 내려다 보는 모습이라던가 매달린 끈은 가족들이 모두 목 매달아 자살하는 미래의 모습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타츠미가가 뱀신이 살고 있는 신성한 산을 난개발하려다 뱀신의 저주로 죽었는데, 그 와중에 유일하게 개발된 쇼타네 집이 뱀신을 불러들이는 형태가 되어 뱀신이 씌워진 탓이지요.
산에서 내려온다는 안 좋은 것은 당연히 뱀신이며, 마을 사람들은 산 윗집과 아래 맨션 사람들 모두 뱀신의 저주를 받는다는걸 알고 있어서 멀리 했을거에요. 누군가 윗 집에 살고 있는 동안은 괜찮다는 묘사 (센 할머니의 말) 가 살짝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일종의 '산제물'로 여겼을 여지도 충분하고요.

이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섬찟함, 오싹함을 불러 일으키는 묘사는 명불허전. 특히 가장 섬찟했던 건 '히히노' 등의 정체입니다. 뱀신에게 씌워진 아버지, 어머니, 누나 등 쇼타의 가족이거든요. 밤 중에 모모미에 의해 눈을 뜬 쇼타 앞에 아버지가 나타나 "처음 뵙겠습니다. 히히노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어요. 기묘한 이름은 원래 아버지, 어머니 등의 이름 한자를 분해하여 읽은 것이라는 일종의 암호 트릭도 아주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쇼타에게도 '뱀신'이 발현된다는 마지막 말에서 효과적으로 한 번 더 사용됩니다. 쇼타와 여동생 모모미만 남긴채 일가족이 죽어버려 둘은 후쿠오카의 외할머니 댁에서 살게 되는데, 모모미가 쇼타에게 쇼타의 이름을 분해한 ('하네타라는 이름의 양') 누군가가 나타났다고 하거든요. 뱀신의 저주는 산 윗집에서만 효과가 있는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 번 저주의 집, 흉가에 머물렀던 가족은 어디에 가서도 그 주박을 벗어버릴 수 없다, 즉 쇼타와 모모미도 곧 자살해버릴거라는 내용인 셈이지요. 놀러온다는 코헤이까지 같이. 씁쓸하면서도 뱀신의 집요함이 무섭습니다.
핵심 열쇠 중 하나로 등장하는 토코의 일기도 현재의 쇼타 상황과 맞물려 섬찟함을 배가시킵니다. 여러가지 말을 할 줄 알았던 앵무새 구리코가 이사를 마친 뒤, "온다"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특히나 소름돋았습니다.

<<화가>>에서 처럼 초등학생이 주인공인이라 일종의 모험물 속성도 있어서 관련 묘사도 많은데, 중반에 쇼타가 미친 할머니에게 쫓기는 장면 묘사는 개중 압권입니다. 이전 윗집에 살던 소녀 토코의 일기를 구하러 센 할머니 집에 갔다가 쫓기게 되는데, 박진감이 철철 흘러 넘치거든요. 히히노의 정체는 일종의 오컬트심령 호러라면 이 쪽은 일종의 크리처물이나 슬래셔 호러물을 방불케합니다. 쇼타와 코헤이가 맨션 이웃집 코즈미 키미로부터 탈출하는 장면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조금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눈에 뜨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전에 3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쇼타네가 살고 있는 윗 집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예' 기사화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쇼타의 가족이 동반자살한 사건도 온갖 매체에서 기자들이 달려왔다는 설명이 있을 정도인데, 왜 이전 사건은 기사화가 아예 되지 않았을까요? 토코의 일기는 마지막이 훼손되어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람이 죽은건 분명한데 말이지요. 바로 이사를 가서 괜찮았다 치더라도, 이전의 세 가구 모두 무사했을리가 없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아랫 맨션에 사는 코즈미 키미가 이상한 색녀가 되었다는 전개도 이상했습니다. 아랫 맨션까지 뱀신의 영향이 미친다는 묘사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그런 것 치고는 묘사는 과했고 설명은 부족했어요.

무엇보다도 코헤이가 나타나자 '히히노' 등이 자살한 이유는 알 수가 없네요. 코헤이가 오면 6명이 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숫자에 딱히 집착하는 모습은 없었고, 외부에서 온 할머니까지 뱀신에게 씌워진걸 보면 '한가족' 이라는 형태도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고작 초등학교 4학년 소년이 나타났다고 모든 상황이 종료된다는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코헤이가 자주 집을 비우는 등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는 암시가 일부 있기는 합니다. 다른 시리즈에서도 활약하는지 좀 두고 봐야 될 듯 합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호러, 공포 소설로서의 가치는 높습니다. 충분히 무섭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흥미진진함도 잘 살아있으며 재미도 충분하니까요. 제가 읽었던 미쓰다 신조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 하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더운 여름, 납량 특집용으로 아주 제격인 작품이라 생각되니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7/24

녹슨 도르래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3.5점

녹슨 도르래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터리 전문서점 ‘살인곰 서점’의 점장 도야마 야스유키를 만나, 서점 일을 도우며 탐정 일을 계속한 지 3년째. 하무라 아키라는 전에 없던 생활고로 고생 중이다. 살인곰 서점이 일주일에 사흘만 열게 되면서 수입이 대폭 줄어든 탓이다. 다른 대형 탐정사에서 하청을 받아 입에 풀칠을 해보지만, 이렇게 들어온 일들은 대개 위험 부담이 크고 돈도 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이번에야말로 편한 건수라며 일이 들어온다. 의뢰 내용은 일흔네 살 할머니의 뒷조사를 해달라는 것.

거절하려 했지만 일당을 올려준다는 말에 하무라는 덜컥 의뢰를 받아들인다. 그렇다. 그 의뢰는 분명 손쉬운 의뢰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행을 하던 중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위를 올려다본 순간, 그 할머니가 하무라 아키라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 하무라 아키라. 그녀의 불운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그 끝에 과연 구원은 있을까?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와카타케 나나미의 사립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장편. 여러가지 사건이 등장하지만, 하무라 아키라가 히로토의 의뢰를 받아들여 그가 '스카이랜드'에 간 이유를 밝혀내려는게 핵심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완벽한 하드보일드 물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인륜도 저버린 비정한 범죄가 연이어 벌어지며, 연관이 없어보였던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이 전부 관련되어 있으며, 관계자들은 모두 선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전개 모두 완벽합니다. 아버지는 죽고, 자신은 겨우 살아남은 교통 사고 때, 왜 아버지와 '스카이랜드'에 갔는지?에 대해 조사해달라는 히로토의 평범하고 별 볼일 없어 보였던 의뢰가 하무라 아키라의 조사를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도 하드보일드스럽기는 마찬가지고요.
제가 읽었던 이전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모두 단편이라 미쳐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장편으로 읽으니 확실히 하드보일드를 지향하는 작품이라는게 잘 느껴졌습니다.

사건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히로토가 아버지와 스카이랜드에 가게 되었던 이유는, 스카이랜드에서 대마를 흡입하고 난동을 피운걸 사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마 흡입은 친구 류지와 함께 했고, 이 일로 취직이 취소될까 겁낸 류지의 가족이 히로토 부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겁니다. 그리고 그 둘을 브레이크와 엑셀을 헛갈려 차로 치었다는 노인 호리우치는 류지의 외할아버지였고요. 그러나 류지는 죽지 않았고 살아나 치료를 받으며 탐정을 고용하자, 사고를 위장하여 불을 질러 살해한 겁니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까지 히로토의 죽음은 히로토의 아버지 미쓰타카가 각성제를 밀매했던 증거를 없애기 위함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실제로 이 각성제 밀매와 관련된 인물들의 범죄 행각도 하나 둘 씩 밝혀지고요. 그래서 독자는 하무라 아키라와 함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리고요. 일종의 미스디렉션인데 수법이 교묘해요. 읽으면서 히로토의 죽음이 흐릿해지고, 각성제가 진짜 범행 동기로 보이니까요.

복잡한 이야기 구조임에도 재미있게 써 내려간 작가의 필력역시 대단합니다. 하무라 아키라의 생생함 덕이 큽니다. 본의아니게 온갖 사건, 사고에 휘말리다가 마지막에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온 류지의 모친 때문에 자신의 소유물 중 유일한 고급품인 오리털 이불과 다이쇼 시대 책장이 망가져 버리는데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 이라는 이명에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어요.
불행하기만 한 건 아니고, 탐정으로서의 능력도 괜찮은 편입니다. 수사 방법으로 설득력있으며 등장하는 소소한 추리들도 볼거리입니다. 히로토의 대학교 버디인 '분페이'의 정체나 마키무라 하나에의 정체를 알아내는 추리가 대표적이에요. 여러가지 단서들은 공정하게 제공되는 편입니다.
히로토의 친구 이즈시가 아이돌 콘서트에 참석했던 영상이 그를 협박하는 도구가 되는 식으로 복선도 잘 짜여져 있고요.

마지막에 <<조용한 무더위>>에서처럼 작 중 등장했던 여러 추리 소설들에 대해 소개해주는 '도야마 점장의 미스터리 소개'라는 부록이 곁들여진 것도 반가왔습니다. <<소년탐정 칼레>>는 어린 시절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구입해봐야겠더군요. 그 외 작품은 엘러리 퀸 등 극소수 유명 작가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번역이라 슬프네요.

그러나 너무 복잡한 구성, 지나친 하드보일드 분위기를 따라해서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마리카의 존재입니다. 그녀는 미쓰타카의 첫 사랑으로, 집안의 반대 때문에 부유한 의사 다쿠마와 결혼한 뒤에도 미쓰타카와 리미 사이를 방해하기 위해 골몰하다가 미쓰타카, 리미 부부가 공갈범 사토 가즈히코를 죽이게끔 유도하고, 이후 미쓰타카를 협박하여 마약 밀매의 길로 끌어들인 인물입니다. 그녀 때문에 여러 명이 죽고 파멸해버린, 한마디로 말해서 하드보일드 작품들에 흔하게 등장하는 절대악, 흑막, 팜므 파탈이지요.
하지만 이 작품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존재가 현재의 사건 - 히로토가 죽은 화재 사건 - 에 영향을 미치는건 없거든요. 미쓰타카가 죽은 이후 그녀가 직접 히로토를 괴롭히러 나타날 이유도 없고요.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었던, 히로토는 상관할바가 아니니까요. 또 하무라 아키라가 중요한 단서처럼 언급하는, 그녀의 병원에 전시된 사토 가즈히코의 해골도 과거 범죄의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미 죽어버린 미쓰타카에게 건네받은 일종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면 그뿐이잖아요.
도비시마 이치코가 하무라 아키라에게 약을 먹여 교도소에 집어넣는 행동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마약 밀매에 대한 조사가 윗 선까지 닿아 있었다면, 구태여 이런 수작을 부릴 이유는 없지요. 하무라 아키라의 말대로 대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도 있었을테고요. 이건 하드보일드에 흔하게 등장하는, 경찰 조직과 탐정의 알력, 다툼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나마 이치코를 응징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행동만 볼거리였어요.

물론 이 무서운 여자들의 행동은 이 작품만 놓고보면 말이 안되는건 아닙니다. 이 두 여자에 더해, 마지막에 하무라 아키라를 죽이려고 찾아온 류지의 모친 등 악당이라 할 수 있는 여성들 모두가 지나칠정도로 이기적이고, 극도의 자기 합리화가 가능한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자기 행동은 아무 문제가 없다, 잘못은 너 (하무라 아키라)와 피해자 (히로토 등) 가 저지른 것이다라고 주장하거든요.
그러나 이런게 별로 현실적인 설정은 아니지요. 게다가 마리카와 이치코 모두 딱히 등장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무리수였어요.

마지막으로, 큰 문제는 아니지만 사랑의 도피로 사라졌다는 히로토의 어머니 리미의 정체가 히로토의 먼 친척이라고 자칭한 하나에라는 것도 뜬금없었어요. 미쓰타카가 죽고 히로토는 겨우 살아남은 상황에서, 자신이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거짓말을 유지해가며 먼 발치에서 아들을 지켜본다는건 설득력이 낮지요. 사토 가즈히코의 죽음이 지금에 와서 다시 드러날 이유도 없고요. 하나에의 정체에 대해서 던져주는 이런저런 단서들도 좀 부족한 편입니다. 이 역시 불행한 운명에 빠진 가족이라는 하드보일드 서사를 그냥 따라한 느낌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를 현대 일본으로 끌고 온 작품들 중에서는 충분히 손에 꼽을만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가치는 재미에 있습니다. 단편인줄 알고 집어들었는데, 한 번에 몰입해서 읽을 정도였거든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조금 불필요한 곁가지들을 정리했더라면 별점 4점 이상도 충분했을겁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니,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7/19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8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고화질]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8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

전통의 시리즈 Q.E.D의 2번째 시즌도 8권째.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독특한 작품들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래서 두 편 평균한 제 별점은 3점, 앞으로도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발표되면 좋겠네요.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해변의 목격자>>
'나'는 연락선으로 본토를 오가는 섬에 거주하는 고등학생 무토우. 여름 방학 때 본토에 있는 고등학교로 아침 훈련을 가는 순간, 해변가 인적없는 창고에서 살인 현장을 목격한다.
처음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피해자가 사채업자인 기쿠치로 채무자인 낚시 배 가게 주인 가키모토 교우코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걸 알고 난 뒤
전학생 후지 린코의 소개로 토마와 가나에게 상담을 구한다. 가키모토 교우코는 섬 내 젊은 남학생들의 마돈나같은 존재였기 때문.

Q.E.D 시리즈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독특한 작품.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토우의 1인칭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모두 무토우가 바라보는 시점으로 그려지고 전개되고 있거든요. 무토우는 거울을 보는 장면 정도에서만 등장할 정도지요. 
이러한 1인칭 시점 덕분에 무토우의 목격 정보가 여러가지 조사를 거치면서 '누군가'로 덧칠되어 가는 전개도 빛을 발합니다. 기억이 조작되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당사자 기억에 덧칠하는 식으로 묘사했는데, 아주 잘 어울렸어요. 




섬 소년들의 마돈나인 교우코가 비참한 희생자에서 옛 연인에게 살인 누명을 씌워가며 현실을 탈출하려는 악녀로 변해가는 과정 역시 1인칭 전개보다 더 잘 그려낼 방법은 없었을 것 같네요.

트릭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앞서 여러가지 단서와 복선을 잘 활용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빚더미 때문에 궁지에 몰려 범행까지 저지른다는 동기도 설득력 높아서 만족스럽습니다. 이런 류의 범행에서 간과하기 쉬운, '범인역'으로 교우코의 옛 연인 구리바야시를 써먹는다는 점도 돋보였어요.

물론 교우코의 배가 수리 중이라 본토로 갈 수 없었다는 건, 수리하는 상황만 목격되었을 뿐이라 정말로 움직일 수 없었는지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사체를 숨긴 곳이 집 안에서 자리보전하고 있던 그녀 아버지의 병상 속이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짐작 가능하고요.즉, 무토우의 조사 이후 구리바야시 범인설이 불거지기는 하지만 결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 (무토우)의 왜곡되어 가는 목격 증언 말고는 누가 봐도 교우코가 범인인 상황인건 변함이 없어요.
1인칭 전개라는 독특한 방식을 트릭 등에 활용하지 못한 것도 조금은 아쉽네요. 잘만 이용한다면 서술 트릭의 또 다른 형태로 충분히 그려낼 수 있었을걸로 보이거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추리와 재미 양 쪽에서 성과를 거둔, 좋은 에피소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흰 까마귀>>
신문부에 기사 소재를 제공하는 자리에서, 토마가 '흰 까마귀를 봤다'고 이야기한 뒤 가나와 토마는 다투게 된다.
대학생 가츠타는 학비와 생활비가 없어 괴로워 하던 와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산 상속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걸 알게 된다. 변호사 센다이가 주관하는 유산 분배 회의에 이와누마 가문의 상속자들이 모이고,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 한다.


특별한 범죄가 등장하지는 않는 작품. 1, 2부 구성인데 1부는 전형적인 일본의 콩가루 집안 이야기로 보이게끔 그려져 있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와누마의 애인도 유산 상속을 받는 4명 중 한명이며, 10억엔에 가까왔던 유산도 투자 실패 탓에 700만엔 밖에 남지 않았다는게 밝혀지기 때문이지요. 변호사와 애인이 만나는 걸 본 나머지 일족은 둘이 한 패로 유산을 빼돌린다고 생각하고요. 1부 마지막까지 변호사와 애인은 악당처럼 보입니다. 나머지 일족은 자신들의 돈을 찾기 위한 절박한 노력에 나서고요.
하지만 2부에서 일족들은 모두 무능한 기생충들이었고, 변호사와 애인이라는 여자가 우리 편(?)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이 드러납니다. 이혼한 할아버지의 전처, 큰 딸, 그리고 가즈타 모두 자신들의 실수와 무능으로 재산을 탕진했다는게 설명되거든요. 이 과정에서 1부에 등장했던 여러가지 복선들도 잘 사용되고 있어서 만족도가 높아요.

그러나 결국 일족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통장 확인만으로 남은 재산이 700만엔 밖에 안된다고 납득한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10억엔이나 되는 돈을 누가 은행 통장 하나에 그냥 넣어 둘까요? 일본 노인들에게는 보편적인 재산 관리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와누마 할아버지는 페루의 광산에까지 투자할 정도로 많은 투자를 한 인물인데 통장 하나로 이 모든걸 관리한다는건 말도 안되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놀라운 반전으로 끌고나가는 전개 과정의 설득력은 높은데, 통장 만큼은 납득하기 어렵기에 감점합니다.

덧붙이자면, '흰 까마귀'는 딱히 이야기하고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이와누마 할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토마와 나눈 말에서 따 온 것입니다. 일족이 재산이 700만엔 밖에 없다는걸 납득하게끔 증명해 달라는 할아버지의 부탁이 굉장히 어렵다는걸 빗댄 표현이지요. "흰 까마귀가 없다는걸 증명하는건, 다른 모든 까마귀가 희지 않다는걸 증명해야 한다"는 뜻이거든요. 가나가 흰 까마귀를 보고, 토마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나와 같은 세계에 있다! 고 생각하는 결말에서 써먹기는 하는데,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어요. 가나와 토마와의 관계가 한 걸음 더 나아간걸까? 싶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 권을 지켜봐야겠네요.

2020/07/18

장모님은 왜 씨암탉을 잡아주실까? - 윤덕노 : 별점 3점

장모님은 왜 씨암탉을 잡아주실까? - 6점
윤덕노 지음/청보리

다수의 음식 관련 서적을 발표한 윤덕노 작가의 2010년에 간행된 책입니다. 주로 우리나라의 음식 관련 속설이나 상식에 대해 풀어주고, 짚어주는 글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했을 이야기들이 가득하다는 점입니다. 제목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참고로, 장모님이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 준 이유는 닭은 양기가 넘치며, 씨암탉은 알을 낳으니 자손을 많이 낳으라는 뜻이라네요.
이외에도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몇 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우선 고사상에 돼지 머리를 놓는 이유는 고사 자체가 돼지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기 때문이랍니다. 돼지는 인간의 재물과 영화를 담당하는 신이며, 높은 신에게 사람의 소망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다고도 하고요.
냉면에 무가 들어가있고, 중국 면 요리는 단무지가 반찬인 등 국수와 무를 같이 먹는 이유는 옛 사람들은 밀이나 메밀에 몸에 좋지 않은 맥독이 있다고 믿어서 이를 중화시키기 위함이라네요. <<동의보감>>에도 무는 체한 것을 빨리 내려주고 메밀 국수의 독을 풀어준다고 적혀 있고요. 무에 소화 효소가 풍부해서 나온 이야기겠지요.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의 <<고려도경>>에 왕족, 귀족만 양과 돼지를 먹고 가난한 백성들은 미꾸라지, 전복, 조개, 왕새우 등을 잘 먹는다고 적혀 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지금과 반대니까요. 미국에서도 오래 전에는 랍스터가 가장 싸구려 음식 재료였다는 이야기와도 비슷하네요.

과거 복날에는 보신탕, 육개장, 팥죽, 연계백숙, 닭찜을 먹었다는데 그 이유도 흥미롭습니다. 음양오행의 조건에 맞춰 더위를 이길 수 있어야 하며, 음식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성질, 즉 귀신을 몰아내고 질병을 예방하는 재료와 조리법으로 만들어져야 했거든요. 개고기를 복날에 먹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초복, 중복, 말복은 모두 경일로 쇠에 해당하는 날이라 개는 불에 해당하기 때문에 보신탕을 먹으면 더위를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불은 쇠를 달구고 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닭은 흙의 성질을 지닌 탓에 더위를 물리칠 수 없어서 따뜻한 성질을 지닌 인삼을 더한게 복날에 먹는 삼계탕의 유래인 것이고요. 귀신을 몰아내거나 하는 속성이 없는 소고기로 만든 육개장에 고춧가루를 넣어 시뻘겋게 만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삼계탕은 현대에 들어 개발된 음식이며, 고춧가루의 전래도 그리 이른 시기는 아닌 만큼, 여름과 복날에 삼계탕, 육개장을 먹은 것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을테니 다 나중에 끼워 맞춘게 아닌가 싶군요.

숙주 나물의 숙주라는 이름 유래는 저도 신숙주로 알고 있었는데, 이는 속설이며 한나라 때 사전인 <<설문해자>>에 따르면 콩을 '숙두'라고 하였기 때문에, 콩에서 나오는 싹은 숙두나물이 되었답니다. 그럴듯하네요.
닭도리탕의 도리가 일본어에서 유래된게 아니라, 순수 우리말인 신체의 일부를 나타내는 '도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추론도 꽤 합리적이에요.

우리의 식문화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사실도 많습니다. '생선회'는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먼저 즐겼다는 주장처럼요. 현존하는 문헌 중 생선회에 관한 첫 기록은 고려 중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며, 동 시기 중국 송나라에서도 생선회가 유행하였는데 이는 일본 문헌에 '사시미'가 처음 등장한 1399년보다 최소 150년 이상 앞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증거라고 하기에는 좀 빈약하지만, 한 번 생각해볼만한 내용으로는 보입니다.
그 외에도 밥 짓는건 조선 사람이 최고라던가, 조선은 두부 왕국이었다는 등의 재미난 기록에 얽힌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재미있지만, 다양성과 재미 측면에서는 이 책이 가장 좋았습니다. 초기작인 덕분에 온갖 재미있을만한 아이디어를 가득 채워넣은게 아닌가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7/17

젤리피시는 얼어붙지 않는다 - 이치카와 유토 / 김은모 : 별점 1.5점

젤리피시는 얼어붙지 않는다 - 4점 이치카와 유토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U국에서 개발한 소형 신예 기낭식 비행정 젤리피시의 보급이 확대되는 와중의 어느날, 젤리 피시 개발 주역인 UFA사의 기술개발부 멤버 6명 전원이 탑승한 신규 시험용 기체가 추락하여 불타버린다. 기술 개발부 멤버도 모두 불에 탄 사체로 발견되는데, 그들 모두 불에 타기 전 살해당했다는 검시 결과가 드러난다. 독으로 죽은 두 명은 누군가 시체를 단정하게 놓았으며, 총에 맞은 사체는 남은 흔적이 근거리에서 맞은게 아니었다. 칼에 찔려 죽은 사체는 칼이 뽑혀 있었고 뒷통수를 둔기로 타격당해 죽은 사체는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마지막 사체는 머리 등이 토막나 있는 상태였다..
형사 마리아와 렌 컴비는 신규 젤리 피시 개발을 의뢰한 공군과 함께 범인을 쫓기 시작하는데....

세상에는 참 많은 상이 있습니다. 추리 문학계도 예외는 아니죠.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상도 많습니다. 아유카와 데쓰야 상은 많은 신인상 중 하나입니다. 신인상 중에서는 최초로 본격 미스터리에 중점을 두었다고 합니다. 1989년 시작되어 2020년 30회 째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역대 수상작 중 제가 읽어본건 가노 도모코<<일곱가지 이야기>>, 곤도 후미에<<얼어붙은 섬>>, 아오사키 유고<<체육관의 살인>>,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입니다. 작품들 면면을 보면 추리적으로는 볼만한 작품들입니다. 본격 미스터리에 중점을 두었다는게 허언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26회 (2016년) 수상작인 이 작품 역시 본격 추리물 애호가로서 큰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기대대로 추리적으로는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악천후로 접근, 탈출이 어려운 등산로도 없는 설산 구석에 6명의 승무원이 탑승한 젤리피시가 추락하였는데, 6명 모두 타살 사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탈출했나?' 가 핵심 수수께끼인데, 이를 '젤리피시는 원래 2대였다!'라는 대담하고 스케일이 큰 아이디어로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멤버들은 공군의 요청 사항을 검증하기 위한 비교 대조 실험을 핑계로 3명씩 나누어 젤리 피시에 탑승했으며, 범인이 모두를 죽이고 한 척을 불태운 뒤, 남은 한 척을 타고 탈출한 것입니다.
사고가 일어나고, 한 명씩 살해되는 과정과 함께 사건 발생 이후 현재의 수사 과정이 병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사고 당시 승무원들 시점의 묘사가 이루어짐에도 이들이 함께 한 배에 타고 있는게 아니라 나누어 타고 있다는걸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 전개도 제법입니다. 서로 만나는 경우는 정박지에 한하고, 운항 중에는 같은 젤리 피시에 탑승한 사람들끼리만 마주치며, 통신은 무전기로 하고 있는 식으로 독자가 트릭을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서술하고 있거든요. 이러한 전개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여섯 명의 탑승자 중 마지막 인물이 줄곧 이야기에 등장하던 에드워드 멕도웰이 아니라 다른 기술개발부 멤버인 사이먼 애트우드라는게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도 역시 서술 트릭에 가깝습니다. 범인인 에드워드가 미리 토막낸 사이먼의 시체를 집에 넣어 몰래 숨긴 뒤, 자신은 탈출하고 시체를 남겨놓은 건데, 마지막까지 이를 잘 숨겨서 충격을 배가시키는 솜씨는 일품이에요. <<십각관의 살인>>에서 모리스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과 비슷한데, 그만큼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젤리피시 제조에 쓰이는 화학식을 이용한, 13년 전 리베카 자살 위장 사건 트릭도 괜찮습니다. 문을 틀어막은 플라스틱 조각은 밖에서 넣을 수 없었다는 상황을, 밖에서 부드러운 상태로 밀어넣은 뒤 화학 반응을 일으켜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건데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여러가지 트릭들이 등장하고, 잘 설명되고 있어서 추리적으로는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다른 수상작들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낮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만화적인 인물들로 만화적으로 가볍게 써내려간 탓입니다.
주인공이자 탐정역인 마리아와 렌 컴비가 대표적입니다. 거유의 몸매 좋고, 어딘가 칠칠맞은 마리아와 딱 부러지고 냉정침착한 렌의 조합부터 지극히 만화적이고 평면적이에요. 수사 과정에서 빚는 갈등, 티격태격도 모두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고요. 갓 대학에 입학한 리베카가 천재라서 젤리피시를 만드는 공식을 완성했다는 설정도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젤리 피시 내에서의 연쇄 살인 사건 묘사도 캐릭터들이 평면적이라 천편일률적이며 지루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이 작품 속 캐릭터 중 자신만의 매력을 갖춘 캐릭터는 전무합니다.
80년대, 비행선이 날아다는 가상의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는건 괜찮아요. 젤리 피시의 제조 방법과 그 존재가 트릭의 핵심이니만큼, 이런 기계가 떠다니는 무대가 필요했을테니까요. 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묘사도 모두 유치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비행정이 2대였다는 핵심 트릭은 좋지만 범행 자체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모두 악당이기는 하지만, 자살로 보이는 사체를 옮겨 완벽한 자살로 위장하고, 연구 성과를 독차지한게 과연 죽어 마땅한 범죄일까요? 연구 성과가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걸 리베카의 노트로 밝혀낼 수 있다면 더더욱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살아서 사회적인 매장을 지켜보는게 더 큰 복수일테니까요. 최소한 복수를 한다 해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그들의 영향력이 바닥에 떨어진 뒤 하는게 더 현실적일겁니다. 6명 중 유일하게 죽어 마땅한건 리베카를 능욕하고 살해한 윌리엄 뿐입니다만, 에드워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일단 멤버들을 죽이고 시작하니 이래서야 누가 악당인지도 모를 지경이에요.
목숨을 걸고 6명이나 살해한 이유가, 13년 전 몇 번 말을 나눈 뒤 사랑에 빠져서 그랬다는 동기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묘사가 유치해서 에드워드의 마음이 전혀 와 닿지도 않았고요.

트릭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헛점 투성이입니다. 사건에 사용된 젤리피시는 새로 만든 것과 첫 개발자 (로 알려진) 교수가 소유하고 있던 영호기를 개조한 것 두 대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젤리피시는 거의 백만 달러에 이르는 상당히 비싼 물건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경찰과 주변 인물들이 그 존재를 아예 모른다는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거의 집 한채 크기의 비행정이 2대가 비행하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석연치는 않고요. 시간차를 두고 비행했더라도, 분명 눈에 띄었을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증거도 빈약합니다. 마리아가 증거라고 이야기한, 젤리피시의 잔해가 눈보라를 조금이라도 더 견딜 수 있는 암벽 밑이 아닌 남쪽에 치우쳐져 발견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이건 증거가 될 수 없어요. 사고 후 눈사태가 일어났다는 설명도 있고, 크고 무거운 기체가 비상 착륙했다면 그게 어디건 착륙 위치에 머물러야지 암벽 밑에 옮기지 못하는건 당연하니까요.
사이먼의 시체와 5명이 비행한게 아니라, 비행정에는 6명이 탑승했다는 증거가 정박한 체크포인트 다섯군데에서 일용품을 산 행위라는 것도 어설픕니다. 물건을 산 사람이 전부 다른 사람이라는게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증명되지도 않았고 교수가 물건을 사러 내리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또 설령 술에 절어 있는 교수를 제외한 서로 다른 5명이 번갈아 물건을 샀다고 한 들, 그들 중 한 명이 사이먼 애트우드가 아니라 에드워드 맥도웰이라는게 증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죽은 여섯 명이 모두 살해당했다는걸 곧이 곧대로 믿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먼 거리에서 총이 발사되도록 한다던가, 뒷통수를 둔기로 맞게 만든다던가, 죽은 뒤 칼이 뽑히던가 하는 식의 트릭은 많잖아요? 현장이 불에 탔다면 이런 트릭을 위한 흔적을 지우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겁니다. 솔직히 말해 범인 에드워드가 누군가가 다 죽이고 자살한 것처럼 현장을 조작하지 않아서 사건을 미궁에 빠트린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5명이나 (정확하게는 4명) 죽인 살인범이 사건을 일부러 미궁에 빠트릴 이유는 없어요.

범행을 위한 전개도 엉망입니다. 비교대조 실험을 핑계로 2척이 비행에 나서지 않았다면, 그리고 사이먼이 비행에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네빌이 사이먼을 살해하지 않았다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에드워드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이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야 했는데 말이죠. 에드워드가 정말로 살인을 계획했다면 직접 사이먼을 살해하고 그가 도주한 것처럼 꾸민 뒤, 핵심 멤버로 비교대조 실험을 내걸어 2대의 운항을 끌어내는 게 타당했습니다. 사이먼을 죽인 뒤 진정한 복수귀로 거듭났다는 식으로 진행되는 식으로 말이지요.
살인 계획도 스케일은 크지만 운에 의지하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젤리 피시 2척의 자동 항행 프로그램등을 건드려 악천후 속에서 설산에 착륙하게 만든다는 계획부터 그러합니다. '천운'이 따른 덕분에 두 척 모두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다고 범인이 직접 이야기할 정도거든요. 네빌을 독살시킨, 컵에 독을 넣는 방법도 운에 의지한건 마찬가지고요.
크리스가 몰래 가지고 온 총의 존재를 몰라 위기를 맞는다는 돌발 상황이야 있을 수 있다 쳐도, 위기를 넘기는 것도 순전히 운이고.... 마지막 생존자인 윌리엄에게 칼과 총이라는 무기를 모두 넘겨주고 습격한다는 마지막 살인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최소한 총은 넘겨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장점보다 단점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한 명의 응징자에게 여러명이 차례로 살해된다는 이야기를 보시려먼 차라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십각관의 살인>>을 추천드립니다. 같은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이라도 <<얼어붙은 섬>>이나 <<시인장의 살인>>역시 폐쇄된 공간에서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는 클로즈드 서클 계열인데 이 작품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이 작품은 지나칠정도로 만화적이니만큼, 만화화되면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만화적이라는 점에서는 아유카와 데쓰야 상이 아니라, 메피스토 상 수상작이었다면 차라리 납득이 갔을듯요.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하는 만화적이고 가벼운 설정의 작품에 수여되곤 했으니까요.

2020/07/16

어른의 맛 - 히라마쓰 요코 / 조찬희 : 별점 3점

어른의 맛 - 6점
히라마쓰 요코 지음, 조찬희 옮김/바다출판사

푸드 저널리스트 히라마쓰 요코의 에세이집.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소다츠가 자신의 식도락 생활을 하이쿠가 아니라 일반 수필, 산문 형태로 써 내려간다면 이런 글이 되지 않을까 싶은 글들. 은근하면서도 섬세한 묘사가 아주 돋보입니다.
<<혼자의 맛>>은 작가가 리얼 소다츠라는걸 증명하는 글입니다. 자신만의 음식 조합이라던가, 서서 마시는 선술집에서 어른스럽게 술을 마시는 방법, 혼자서 이자카야를 즐기는 법이 실려있는데 각 방법들 모두가 <<술 한잔 인생 한 입>>의 에피소드와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술집에서의 일화나 음식과 관련된 책을 소개하는 글들도 소다츠가 바로 떠오르고요.

그러나 단순한 술꾼, 먹보 미식가의 글만도 아닙니다. 깊은 연륜과 경험이 묻어나는 글들도 인상적이에요. <<눈물나는 맛>>이라는 제목의 글 구성이 특히나 마음에 듭니다. 글은 와사비 초밥과 고추가 들어간 김치 등 매운 요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다츠가 먹음직한 아귀 간, 가라스미, 슈토 등 다양한 진미를 열거하며 어른이 되어 알고 먹게 된 맛에 대한 각별한 감정을 이어나가지요. 그 뒤는 어른이 되고 나서 알게된 여러가지 맛이 소개됩니다. 찜통에 찐 무화과에 참깨 소스를 얹은 일품 요리와 같은 대표적인 예가 등장하는건 물론이고요. 또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을 다시 맛볼 때 재회의 기쁨도 크다며 곶감, 톳 등의 맛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글의 마무리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어렸을 때 먹었던 엄마의 맛입니다. 어른이 조용히 흐느끼게 되는 맛은 바로 그 맛인거지요. 음식에 대한 맛있는 묘사에 살짝의 감동까지 곁들여진 좋은 글이라 생각됩니다.
<<깊은 산의 맛>>에서 료칸 우쓰오장의 음식을 소개하는 글도 대단합니다. 사진 한 장 없지만, 음식의 형태와 맛이 떠오를 정도로 잘 묘사한 글이기 때문이에요. 산촌의 맛을 표현하면서 '오독오독, 꾹, 섬벅, 바삭, 아삭아삭, 담백, 미끈미끈, 혹은 어떤 것은 쌉싸래하고 어떤 것은 은은히 달고 끈끈하고 아리다.'라고 설명하는 문장처럼요. 이 정도 글 솜씨면 오히려 사진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따라해보고 싶은 레시피도 실려 있습니다. 시금치를 데쳐서 서벅서벅 잘라 물기를 쫙 빼고 으깬 두부와 함께 무친 일종의 나물이 그러합니다. 간은 올리브오일과 소금, 간 후추가 전부라는데 쉽게 따라해 볼 만 하지요. 맛도 좋을 듯 싶고요.
해삼 손질법은 집에서 하기는 어렵겠지만 기억하면 좋겠더군요. 일본 전통 해삼 손질 방법인 '자부리'에 대한 소개인데, 뜨겁게 끓인 녹차에 채썬 해삼을 넣고 재빠르게 휘저어 살짝 데친 뒤 채반에 받치면 됩니다. 녹차 온도는 보통 80도 정도이고요. 이 뒤 유자 식초에 담가 손님에게 내면 됩니다. 이렇게 데치면 오독한 식감이 경쾌해지고 녹차가 해삼 특유의 알싸한 맛을 누그러뜨려 좋다는군요.
살짝살짝 언급되는 음식 관련 정보도 볼만합니다. '로산진의 낫토 먹는 법'은 처음 알았네요. 일단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상태에서 305번, 그 다음 간장 넣고 119번, 이렇게 총 424번을 섞으면 낫토가 가장 맛있다는 설인데 솔직히 말도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저자가 여러 낫토로 실험해 본 결과로는 횟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답니다. 어떤 낫토냐가 더 중요한 거지요.
물의 경도에 따라 다른 맛이 나는 이유를 고찰한 <<물의 맛>>도 흥미롭습니다. 연수는 수용성 성분을 잘 유출하고, 경수는 미네랄 성분이 많아서 가교 결합이 이루어져 소재를 딱딱하게 만들기 때문에 연수는 일본 요리에, 경수는 유럽 요리에 어울린다고 하네요. 유럽에 스튜나 스톡이 많은 이유입니다. 경수라서 미네랄 성분이 소재와 더욱 잘 결합해서 진한 감칠맛을 내기 때문이지요.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재미도 있으며, 음미할만한 글이 많은 좋은 수필집입니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크고요. 저도 이런 글을 쓰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어른의 맛 - 히라마쓰 요코 / 조찬희 : 별점 3점

어른의 맛 - 6점
히라마쓰 요코 지음, 조찬희 옮김/바다출판사

푸드 저널리스트 히라마쓰 요코의 에세이집.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소다츠가 자신의 식도락 생활을 하이쿠가 아니라 일반 수필, 산문 형태로 써 내려간다면 이런 글이 되지 않을까 싶은 글들. 은근하면서도 섬세한 묘사가 아주 돋보입니다.
<<혼자의 맛>>은 작가가 리얼 소다츠라는걸 증명하는 글입니다. 자신만의 음식 조합이라던가, 서서 마시는 선술집에서 어른스럽게 술을 마시는 방법, 혼자서 이자카야를 즐기는 법이 실려있는데 각 방법들 모두가 <<술 한잔 인생 한 입>>의 에피소드와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술집에서의 일화나 음식과 관련된 책을 소개하는 글들도 소다츠가 바로 떠오르고요.

그러나 단순한 술꾼, 먹보 미식가의 글만도 아닙니다. 깊은 연륜과 경험이 묻어나는 글들도 인상적이에요. <<눈물나는 맛>>이라는 제목의 글 구성이 특히나 마음에 듭니다. 글은 와사비 초밥과 고추가 들어간 김치 등 매운 요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다츠가 먹음직한 아귀 간, 가라스미, 슈토 등 다양한 진미를 열거하며 어른이 되어 알고 먹게 된 맛에 대한 각별한 감정을 이어나가지요. 그 뒤는 어른이 되고 나서 알게된 여러가지 맛이 소개됩니다. 찜통에 찐 무화과에 참깨 소스를 얹은 일품 요리와 같은 대표적인 예가 등장하는건 물론이고요. 또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을 다시 맛볼 때 재회의 기쁨도 크다며 곶감, 톳 등의 맛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글의 마무리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어렸을 때 먹었던 엄마의 맛입니다. 어른이 조용히 흐느끼게 되는 맛은 바로 그 맛인거지요. 음식에 대한 맛있는 묘사에 살짝의 감동까지 곁들여진 좋은 글이라 생각됩니다.
<<깊은 산의 맛>>에서 료칸 우쓰오장의 음식을 소개하는 글도 대단합니다. 사진 한 장 없지만, 음식의 형태와 맛이 떠오를 정도로 잘 묘사한 글이기 때문이에요. 산촌의 맛을 표현하면서 '오독오독, 꾹, 섬벅, 바삭, 아삭아삭, 담백, 미끈미끈, 혹은 어떤 것은 쌉싸래하고 어떤 것은 은은히 달고 끈끈하고 아리다.'라고 설명하는 문장처럼요. 이 정도 글 솜씨면 오히려 사진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따라해보고 싶은 레시피도 실려 있습니다. 시금치를 데쳐서 서벅서벅 잘라 물기를 쫙 빼고 으깬 두부와 함께 무친 일종의 나물이 그러합니다. 간은 올리브오일과 소금, 간 후추가 전부라는데 쉽게 따라해 볼 만 하지요. 맛도 좋을 듯 싶고요.
해삼 손질법은 집에서 하기는 어렵겠지만 기억하면 좋겠더군요. 일본 전통 해삼 손질 방법인 '자부리'에 대한 소개인데, 뜨겁게 끓인 녹차에 채썬 해삼을 넣고 재빠르게 휘저어 살짝 데친 뒤 채반에 받치면 됩니다. 녹차 온도는 보통 80도 정도이고요. 이 뒤 유자 식초에 담가 손님에게 내면 됩니다. 이렇게 데치면 오독한 식감이 경쾌해지고 녹차가 해삼 특유의 알싸한 맛을 누그러뜨려 좋다는군요.
살짝살짝 언급되는 음식 관련 정보도 볼만합니다. '로산진의 낫토 먹는 법'은 처음 알았네요. 일단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상태에서 305번, 그 다음 간장 넣고 119번, 이렇게 총 424번을 섞으면 낫토가 가장 맛있다는 설인데 솔직히 말도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저자가 여러 낫토로 실험해 본 결과로는 횟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답니다. 어떤 낫토냐가 더 중요한 거지요.
물의 경도에 따라 다른 맛이 나는 이유를 고찰한 <<물의 맛>>도 흥미롭습니다. 연수는 수용성 성분을 잘 유출하고, 경수는 미네랄 성분이 많아서 가교 결합이 이루어져 소재를 딱딱하게 만들기 때문에 연수는 일본 요리에, 경수는 유럽 요리에 어울린다고 하네요. 유럽에 스튜나 스톡이 많은 이유입니다. 경수라서 미네랄 성분이 소재와 더욱 잘 결합해서 진한 감칠맛을 내기 때문이지요.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재미도 있으며, 음미할만한 글이 많은 좋은 에세이였습니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크고요. 저도 이런 글을 쓰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7/12

붉은 눈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 별점 3점

붉은 눈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레드박스

8편의 단편, 그리고 작가가 수집한 4편의 짤막한 실제 괴담이 수록된 공포 단편집. 즐겨찾는 블로거이신 각시수련님이 올리신 미쓰다 신조 관련 글을 읽고 구해 읽었습니다. 여름에는 역시 공포 소설이 딱이지요.

미쓰다 신조 작품은 많이 읽어보지 않았지만, 공포 소설 쪽은 주로 '집'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었는데 수록작들 모두 집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무섭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집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 이어, 이런 집에 대한 사는게 정상적인 무언가일리가 없다는 식으로 긴장감을 끌어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른 장편과의 차이점이라면, 수록작들 대부분인 작가이자 편집자인 미쓰다 신조가 직접 수집했거나 경험했던 '괴담'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현실감이 더해져 무섭고 오싹하기는 한데,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소설로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괴담으로서,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본연의 목적에는 충실합니다. 전체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눈>>
초등학교 1학년 시절 동급생이었던 마도 다카리가 사람에게 찾아와 죽음을 선사하는 붉은 눈을 지닌 무언가였다는 이야기.

마도 다카리가 이상하다는 묘사에서 시작하며, '나'와 함께 마도 다카리의 집을 찾아갔던 요네쿠라가 병으로 죽어버리고, '나'를 무당이었던 할머니가 지켜주었다는 결말까지 전개는 일직선입니다. 사악한 뭔가에 씌워져, 친구는 죽고 나는 할머니 덕분에 겨우 살아남는다가 이야기의 전부니까요. 마도 다카리의 정체라던가 퇴치 방법이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반전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덕분에 읽기 쉽고, 전개도 깔끔하지만 그렇게 무섭지는 않더군요. 고전적인 설정과 내용인 탓도 큽니다. 무언가에 씌워지면 죽는다는 설정부터 고전적이잖아요? 꿈을 통해 마도 다카리가 근처에 있다는걸 느끼게 되면, 그 사실을 빨리 다른 사람에게 알리라는 결말은 <<링>>과 흡사하고요. 마도 다카리가 이상한 아이라는게 초반부터 드러나서 별다른 의외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괴담 성격에는 충실하나 그렇게 무섭지 않고 새롭지도 않아서 감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어린 시절 경험했던 괴담'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괴담 사진 작가>>
월간지 부편집장인 '나'는 특집 기사 때문에 사이언 마스든이라는 괴기 사진 작가 사진집을 출간한 출판사 트레빌을 찾는다. 업무 후 귀가 중에 트레빌에서 일하는 미즈키 요리코라는 여성을 만나 모쿠노 요시미라는 사진 작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모쿠노 요시미의 자택을 찾는데, 그 곳은 화마가 휩쓸고 간 흉가였다....

괴기 사진 작가가 온갖 괴기스러운 사진을 찍고 현상하다가, 그 현장에 있던 '무언가'를 집으로 데려온 꼴이 되어 결국 본인은 죽고, 여동생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광인이 되었다는 이야기.
오래전, 사진이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사람들이 사진 찍기를 기피했었다고 합니다. 사진이 영혼을 빼 내어 간다는 소문때문이지요. 간단한 조작으로 사람을 그대로 종이로 옮겨버리니 그런 소문이 돈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만약 이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면, 피사체의 영혼과 사진이 찍히는 장소에 있는 '무언가'도 빼 내어 갈 수 있다는 뜻도 될 테고요. 이런 발상을 토대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그리 많이 보지는 못한 설정도 신선했고 모쿠노 요시미의 자택, 비서를 자칭하는 여동생, 자택 가득한 모쿠노 요시미의 사진들 모두 괴기스러운 묘사로 가득차 있어서 흥미진진합니다. 모쿠노 요시미와 그 여동생의 정체가 드러나는 클라이막스까지의 전개도 깔끔합니다.
편집자 미쓰다 신조 시점의 경험담으로 쓰여졌다는 것도 공포를 배가시킵니다. 엄청난 현실감을 가져다 주는 덕분이죠. 그 중에서도 '나'가 발견한 모쿠노 요시미는 등신대 사진을 잘라놓은 종이 인형에 불과했고, 여동생이 '나'를 이 곳으로 끌어들인 미즈키 요리코였다는게 드러나는 클라이막스 묘사는 백미입니다.
또 이 클라이막스 반전을 위해 앞 부분에 뿌려놓은 복선단서도 적절하고 공정합니다. 번역자가 공들여 이 단서를 설명하기 위해 이름 부분만 공들여 한자를 병기하여 표기한 탓에 이게 뭔가 의미가 있다는 티가 물씬 났던건 문제였지만요. 어차피 한국 독자가 해석하기는 무리였고요.

그런데 미즈키 요리코가 '나'를 이 집으로 끌어들여 뭘 어떻게 하려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미즈키 요리코는 그 저택에서 어떻게 되는건지, '나'가 저택에 남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등도 마찬가지고요. 속 시원하게 밝혀진게 전무한 탓에 완성된 이야기로는 약간 부족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공포만큼은 확실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영상화에 적합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미쓰다 신조 시점의 현재와, 괴기 심령 사진을 찍다가 데려온 무언가가 여동생에게 씌워져 파멸하는 모쿠노 요시미 시점을 오가며 모쿠노 요시미에게 씌워진 무언가가 현재, 과거에서 동시에 '개화'하는 장면을 클라이막스로 만들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내려다 보는 집>>
어린 시절, 교차로 벼랑 위쪽에 지어져 '나'를 내려다 보는 느낌을 가져다 주었던 집이 있었다. 흉가는 아니었지만, 지어진지 오래 되었지만 아무도 사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 집 때문에 기묘한 느낌을 받던 나와 친구 K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집을 조사해 볼 계획을 세운다. 마침 함께 있었던 K의 어린 동생과 함께 4~5명의 아이들은 집 수색에 나서는데...

작가 미쓰다 신조로 보이는 '나'의 어린 시절 있었던 추억 괴담. <<괴담 사진 작가>>와 마찬가지로 작가 본인이 경험했었던 정말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식의 묘사가 탁월하며, 작품과 잘 어울립니다. '내려다 보는 집'에서 K의 동생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자를 만나 사람 얼굴이 그려진 유리 구슬을 받고 놀았다는 상황도 상당히 공포스럽고요.

그러나 '공포'를 전해줄만한 실체는 친구 K의 동생의 이상한 행동과 증언 뿐이며, '내려다 보는 집'에 대해서는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빍혀지는게 없는 결말은 많이 답답합니다. 이야기의 현실감을 유지하면서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결말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듯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기묘한 이웃집을 무단 침입한 아이들 이야기 정도니까요. 덕분에 현실감넘친다는 장점도 있지만.... 별점은 2.5점입니다.

<<한밤중의 전화>>
공포 소설가인 '나'에게 새벽 2시에 전화가 걸려온다. 어린 시절 친구로 5년전 취한채로 찾아갔던 심령 스폿에 방문해 있다는 전화였다...

친구인줄 알고 긴 통화를 이어가는데, 알고보니 친구가 아니고 이형의 존재였다는 내용의 이야기.
한마디로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건 고전 괴담 '너는 내가 아직 니 엄마로 보이니?'와 다를게 없지요.

하지만 심령 스폿인 묘지에 있는 괴상한 집에 대한 묘사 - 코 앞에 늪이 있는, 연한 빨간색에 집 안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온갖 불쾌한 쓰레기가 가득한, 창무하나 없으며 대문의 위치도 기묘한, 기분 나쁜 그림이 붙어있고 안 쪽에서 회반죽이 칠해져 입구가 봉해진 - 는 아주 빼어납니다. 전작들인 <<화가>><<기관>>는 물론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 모두 마찬가지인데, 미쓰다 신조는 공포스러운 공간을 그려내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는게 분명합니다.
불현듯, 미쓰다 신조가 개포동 은마 아파트를 보고 그에 대한 글을 쓰면, 그 자체가 바로 괴담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단지 무서운 공간 묘사에 그치지 않고 '내가 그쪽으로 가면 되니까.' "다 왔다.."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도 섬찟합니다. 뻔하지만 이야기로서도 잘 완결되기는 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나방 남자의 공포>>
'나', 즉 미쓰다 신조는 S 지방의 어느 온천 마을에 머무르던 중, 온천 여관 뒷 쪽에 있는 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산책을 나선다. 그 길의 끝에서 이런저런 정체 불명의 폐가와 폐허를 목격하고 돌아온 뒤, 자정이 넘은 시간 노천탕을 찾았다가 낯선 남자를 만난다. 그는 여관 선선대 부인의 오빠라면서, 미쓰다 신조에게 과거 '재나방 남자'라는 살인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재나방 남자 사건은 가즈오라는 소년이 기묘하게 살해된 사건입니다. 낯선 남자는 당시 용의자로 몰렸지만 곧바로 풀려났다고 합니다. 곤도 순경의 증언 덕분에요. 그는 가즈오와 헤어진 5분 뒤, 곤도 순경과 스쳐 지나갔는데 곤도 순경은 시체가 발견된 연못 옆에서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연못을 지나 반대쪽 길로 향하던 순경은 두부 장수 오누키와 마주쳤고, 바로 뒤 오누키가 시체를 발견했고요. 그래서 낯선 남자는 범인이 될 수 없다는게 증명된 것입니다.

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게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에, 여관 뒤 오솔길에서 발견한 폐허와 박쥐 남자, 재나방 남자라는 기묘한 살인귀 이야기가 덧씌우져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본격 추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인 미쓰다 신조의 추리도 대담하며 그럴듯합니다. 범인은 곤도 순경이거나, 낯선 남자일 것이라는 추리인데, 낯선 남자가 범인일 경우 가즈오의 시체를 감춘 트릭을 파헤치는게 특히 인상적이에요. 낯선 남자는 사건 당시가 절분이라 가지고 있던 콩을 곤도 순경이 나타나기 직전 순간적으로 시체 위에 뿌린겁니다. 비둘기를 불러모아 시체를 숨기 위해서라는데, 주어진 정보 제공도 공정한 편이며, 실현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살짝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현실감있게 잘 포장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괴담으로서의 역할도 그리 빠지지는 않습니다. 결말에서 낯선 남자는 살인귀 재나방 남자로 오래전 죽었으며, 지금도 가끔 노천탕에 출몰한다는 마무리는 뻔하지만 확실해서 이야기 완성도 측면으로는 마음에 들고요.

한마디로 공포와 추리 양쪽 모두 기본 이상의 재미를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뒷골목의 상가>>
미쓰다 신조는 E씨에 대한 으스스한 이야기를 <<백사당>> 안에 녹여내려다가, 무서운 체험을 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오싹한 바람 소리와 함께 하는 누군가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미쓰다 신조는 원고 속 E씨 체험담을 모두 지워버린다. 그 뒤 취재원이었단 야카게 씨가 E씨가 죽었다며, 괴담에 대한 섬뜩한 원고를 보내오는데...

도입부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E씨 시점의, E씨가 겪었다는 괴담입니다. E씨가 어린 시절 야반도주하여 숨어 살게 된 교토 '뒷골목' 집에서 공포스러운 존재와 마주한다는 내용이죠.

어떤 거리, 공간이 특정 시간이나 특정 조건에서 이계와 연결되어 그 곳의 이형과 조우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많습니다. 러브크래프트 작품에서도 보아왔던 내용이니까요.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어떤 조건에서 이계와 연결되는지, 이형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형이 노리는게 무엇인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냥 공포스러운 존재로만 묘사될 뿐입니다. 공포의 핵심도 E씨가 '지이이이이잇.....' 소리를 내는 소름끼치는 여자에게 쫓기는 과정이고요.

하지만 이 여자가 E씨의 뒤를 쫓고, 집 안으로 숨어들어오는 과정의 묘사는 가히 일품이라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겨우 드나들 틈새를 지나 뒤로 나타나서 뒷쪽 창틀을 움켜쥐는 장면 묘사는 특히 압권이었습니다.
E씨는 아직 그 곳에 살고 있다는 말로 시작되는데, E씨 원고의 결말은 E씨가 그 곳에서 이사를 갔다는 모순 가득한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아예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할 바에야, 모든 걸 이렇게 모호하게 풀어내는 방법도 나쁘지는 않네요.
괴담으로서는 최고 수준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맞거울의 지옥>>
미쓰다 신조가 젊은 시절 교토에 있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할 때, 도쿄 출장 중 캡슐 호텔 화장실에서 맞거울을 보며 에도가와 란포의 <<거울 지옥>>을 떠올리다가 다른 손님을 만난다. 그도 괴담을 좋아해서 의기투합한 미쓰다 신조는 함께 호텔 로비에서 캔 맥주를 나누며 괴담으로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그 남자의 동생과 맞거울에 얽힌 괴담을 듣게된다.

거울과 거울 사이, 맞거울의 무한 공간에는 귀신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작품.
작품은 그다지 의외성이 없지만 겹쳐진 거울 속 어딘가에 있는 귀신이 거울을 건너뛰면서 나이를 먹고, 결국 나 자신의 모습으로 거울 앞에 나타난다는 클라이막스는 아주 근사합니다. 소설로도 멋지지만 영상화한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클라이막스만으로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죽음이 으뜸이다. 사상학 탐정>>
사람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상, 즉 사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슌이치로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사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죽음 그 자체로 보였기에 슌이치로는 쫓아내지 않는다. 이누마는 자기처럼 괴담을 좋아하는 친구 가이즈카, 요코가와, 이와세와 함께 한 밤중에 인터넷 상에 유명한 오드아이 소녀가 얽힌 괴담이 있는 폐가를 찾았다가, 친구들이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이 단편집 표제작이자 첫 번째 작품인 <<붉은 눈>>의 마도 다카리와 그녀의 집이 또 다시 등장하는 작품. 그리고 친구들과 무모한 심령 스폿 탐험을 나선다는 설정은 <<한밤중의 전화>>와 같습니다. 거기에 주인공이 사상학 탐정 슌이치로이고, 마도 다카리가 거주하는 흉가에 대한 오싹한 묘사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가히 미쓰다 신조 월드를 집대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집대성 작품답게 오싹한 묘사는 역시나 대단합니다. 무너져가는 집을 탐험하는 과정부터 오싹해요. 불당 안의 불상 눈이 파내어져 있었다는 묘사가 특히 기억에 남네요. 무엇보다도 차로 돌아가던 4명에게 닥친 공포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폐가 방문을 거절하고 차 안에 남아있던 이와세가 "그 여자애가 왔다. 계속 차에 들여보내달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들였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지요. 등골이 서늘해 집니다! 친구들이 절규하기 시작했다는 직후 묘사도 오싹합니다. 대체 무엇을 본 걸까요?

본인 경험 괴담이 아니라 소설적인 구성을 갖추어서 그런지 기승전결 구조도 좋습니다. 슌이치로를 찾아온 이누마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또는 그에 가까운 상태였다)는 결말이 특히 좋아요. 이누마에게 사상이 보이지 않은 이유, 슌이치로의 고양이 보쿠가 이누마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되니까요.

중반부의 오싹한 장소를 뒤지는 전개는 담력 시험 수준이라 특별한건 없고, 마도 다카리의 정체와 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죽게 만드는지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건 여전하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7/09

오래된 책들 (9) - JOKER

딱히 포스팅꺼리가 없을 때 업로드하려고 모아놓은 오래된 책들 이야기 아홉번째.
<<은하영웅전설>>의 만화판 작가로 유명한 미치하라 카츠미의 SF 추리물입니다. 소설가 마키 유우의 글을 만화화한 작품이지요.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아 보이지만, SF와 추리 양쪽 모두에서 나쁘지 않은 구성을 보여주었던 작품입니다. 특히나 "특무사법관"으로 초법적인 활동을 펼치는 은빛 눈동자의 자웅동체(?) 합성인간 Joker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범죄자를 처단할 때에는 그 어떤 연민도 보이지 않는 냉혹함과, 린 앞에서는 어린 소녀처럼 변하는 성격의 차이를 남성 - 여성을 자유롭게 오가는 변형과 함께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거든요. 이러한 차이에서 오는 잔재미도 잘 살아있고요. 다양한 특수능력 등의 설정도 잘 짜여져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그런데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조사하다가 몰랐던 사실 두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국내판은 전 7권인데 일본판은 전 8권으로 진작에 완결되었다는 겁니다. 8권이 7권 출간 후 무려 7년 후인 2004년에 출간되었는데, 국내 출간을 진행하던 세주 문화사가 이 때 폐업했기 때문에 완결되지 못한거지요. 어찌보면 세주 폐업의 피해작인데, 출판사를 옮겨 완결될만큼 인기를 얻지도 못하긴 했습니다. 저도 구하느라 고생 좀 했을 정도로 팔린 물량 자체가 적거든요. 국내에서 재출간될 가능성도 없으니, 일본어 e-book으로 8권만 구입해 봐야겠습니다.

두 번째는 애니메이션도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런 비인기 작품까지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다니 확실히 80~90년대 초반은 OVA 전성시대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문제는, OVA는 원작의 장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블레이드 러너>>의 설정을 차용한 망작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80년대 테이스트가 과하고, 완성도도 낮아서 도저히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니에요. 남, 녀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주인공 린을 농락하는 Joker의 매력 정도만이 눈에 뜨일 뿐이지요. 하지만 만화책은 절판된지 오래된 탓에 특수사법관 Joker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이 애니메이션밖에는 없는게 현실입니다. 특수사법관 Joker가 궁금하시다면,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유튜브 업로드 동영상은 저작권 문제로 언제 내려갈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