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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9

마시는 즐거움 - 마시즘 : 별점 2.5점

마시는 즐거움 - 6점
마시즘 지음/인물과사상사

마시즘이라는 필명으로 각종 매체에서 연재되던 글들을 엮은 음료 관련 잡학 문화사 서적. 각 항목별로 해당 주제에 관련된 음료의 역사와 문화, 기타 잡학 상식을 재미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다루고 있는 음료의 폭도 넓습니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커피, 차, 와인, 맥주는 물론 콜라와 환타, 소주, 커피믹스와 갈아만든 배, 심지어 사약에 대한 내용까지 다루고 있으니까요.

특징이라면 깊이있는 역사 전반이라기 보다는, 주로 재미있는 일화나 에피소드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방식도 SNS의 형식을 빌린다던가, 유행어를 사용하는 식으로 젊은 감각에 맞추어져 있고요. 덕분에 쉽게 읽을 수는 있습니다. 이런게 요새 트렌드구나!라는걸 느낄 수 있던 것도 좋았고요.
짤막하지만 꽤 괜찮은 정보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심포지엄 Symposium'이 원래 그리스에서는 '함께 마시다' 라는 뜻이라는거 처음 알았네요.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 '회식'이었던 셈이지요. '많이 마시되 취하지 말라'가 모토였다니 정말 회식 문화와 다를게 없어 보입니다. 그 외에도 럼 Rum의 어원이 '과격한 소동'을 뜻하는 Rumbulion에서 유래되었다던가 (독해서 마시면 과격한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 유명한 커피하우스 블루 보틀의 이름은 콜시츠키가 17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에 차렸던 커피 하우스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 오란씨의 이름은 오렌지와 비타민 C의 결합이라는 등 명칭 관련된 정보들은 재미있는게 많습니다.
음료 자체에 대한 정보도 건질만 합니다. 코카콜라의 맛이 국가별로 다르고, 특히 멕시코 코카콜라는 콘시럽대신 사탕수수를 사용해서 더욱 달콤하고 향긋하다는 것처럼요. 무엇보다도 정식품의 베지밀과 같은, 순수 한국산 음료에 대한 정보들은 독보적인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이야기는 다른 해외 도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당연하게도, 깊이있는 정보는 그닥입니다. 환타 이야기처럼 다른 책들을 통해 이미 접했거나,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았고요. 또 저처럼 기존에 인터넷으로 이미 접했던 독자에게 새롭게 제공되는 부분이 없다는 점 역시 아쉬웠습니다. 추가로 비용을 지불해가면서 구입해서 읽을 필요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 없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마시즘의 컨텐츠를 읽으실 수 있다면, 책을 별도로 구입해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2020/03/28

마츠모토 세이쵸 드라마 스페셜 : 지방지를 사는 여자 - 작가 스기모토 류지의 추리 : 별점 1.5점

 

松本清張ドラマスペシャル 地方紙を買う女~作家・杉本隆治の推理!!

마츠모토 세이쵸의 단편을 TV 특집극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1, 2부 구성으로 합쳐서 약 100분 분량 정도 됩니다. 마츠모토 세이쵸도 좋아하고, 원작도 좋아했지만 존재를 몰랐다가 인터넷을 통해 우연히 알게되어 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주연이 <<후루하타 닌자부로>> 타무라 마사카즈인데다가, 범인, 악역, 비운의 히로인, 팜므 파탈 등으로 100분 내내 팔색조 매력을 뽐내는 상대역은 오랫만에 본 히로스에 료코라 더욱 반가왔습니다.

원작과 동일한 도입부는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도쿄에 사는 여성이 추리 소설가 스기모토 류지의 지방지 연재 소설을 마음에 들어해서 구독을 신청하자 이 사실을 작가는 기뻐하지만, 한창 재미있을 무렵 구독을 끊는 행동에 모순을 느낀 작가가 그 이유를 찾아 나선다는 부분인데, 지금 보아도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였어요.

하지만 이후 드라마만의 독자적인 설정과 전개는 모두 지루합니다. 정확하게는 류지와 조수 후지코의 간단한 탐문으로 요시코가 범인이라는걸 눈치챈 다음부터요. 위기를 느낀 요시코가 귀여운 척, 교태를 부리며 류지를 유혹하는 둘의 밀땅이 지나치게 길며, 이 과정에서 아무런 긴장감도 느낄 수 없는 탓이 큽니다. 요시코가 류지를 죽여서 입을 막는건, 그녀와 류지의 관계를 온갖 주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서 불가능하니까요. 심지어 류지는 수사 내용 공유를 위해 찾아온 경찰 2명 앞에서, 요시코가 함께 여행가자며 보낸 편지를 읽고 '나를 죽일 생각이야'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요시코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정황 증거 뿐으로, 경찰도 진작에 포기하고 자살로 처리한 사건일 정도인데 왜 요시코가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 범인인을 밝히고 자수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청산가리를 들켜서라는 이유는, 들키는 상황이 작위적이라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그리고 작품이 쓰여진 시기에는 분명 '지방지'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었을테고, 이를 손에 넣기 위해 직접 지방지 구독을 신청한다는 설정은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시대에 지방 뉴스를 보기 위해 핑계를 대 가며 지방지를 도쿄로 정기 구독 한다는 발상은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잖아요? 정기 구독 신청도 온라인으로 하면 될 테고요. 저만 해도 이 드라마에 나오는 '신문' 을 실제로 손에 잡아 본게 최근 몇 년 동안 드뭅니다. 1950년 대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건 너무 안일한 발상이었습니다.
안일하고 편의적인 발상은 그 밖에도 차고 넘칩니다. 류지의 조수 후지코는, 원작에서는 정사를 가장하기 위한 역할 정도에 불과하나 드라마에서는 비중을 엄청 키웠죠. 그러나 안 좋은 클리셰는 몽땅 모아놓은 - 덤벙대고, 시끄럽고, 참견쟁이에다가 오버도 지나친 등 - 짜증나는 캐릭터이며, 등장하는 이유 자체를 잘 모를 정도로 하는 일도 없습니다. 요시코의 남편인 장관 비서 하야오 등 다른 캐릭터들도 마찬가지. 특히 하야오가 압력을 넣어 류지가 사건 수사에서 손을 떼게 만드려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이게 경찰인지 야쿠자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나마 타무라 마사카즈의 추리소설 작가 연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히로스에 료코도 류지를 유혹하는 장면까지는 그럴싸했고요. 위 사진처럼 두 배우의 합은 잘 맞는 편입니다. 배우들 이름값에 걸맞게 연출과 촬영도 괜찮고 음악도 효과적으로 사용된 편입니다.
하지만 좋은 점은 이게 전부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타무라 마사카즈에 대한 개인적 호감, 히로스에 요소를 다시 만난 반가움 외에는 시간 낭비에 불과했습니다. 불필요한 요소를 싹 들어내고 원작이 발표되었던, 지방지가 나름의 가치가 있었던 시기를 무대로 한 시간 남짓한 분량으로 줄였더라면 훨씬 나았을 겁니다. <<1년 반만 기다려>>도 그렇고, 왜 좋은 원작을 멋대로 손대고 늘려서 영상화하는지,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네요.

2020/03/27

잠자는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 김윤정 : 별점 2.5점

잠자는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국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영국으로 온 그웬더는 남편 자일스가 오기 전, 보금자리로 힐사이드 저택을 구입한다. 그녀는 집에 대해 알아갈 수록, 자신이 그 집에 대해 이미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동안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남편의 사촌인 유명 소설가 레이먼드 웨스트 부부를 방문한다. 그 곳에서 미스 마플을 만난 그웬더는, 유령에 대한 연극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후 미스 마플에게 급작스럽게 떠오른 자신의 기억을 털어놓는다. 그것은 그녀가 오래전 힐사이드에서 헬렌의 시체를 보았던 기억이었다.


미스 마플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인터넷 도서관에서 e-book으로 대여해 읽었죠.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에서의 별점은 3.5점입니다. <<공략>>에서 이야기하듯, 미스 마플의 존재감이 상당히 희미하다는게 특징입니다. 실제로 사건에서 많은 역할을 하는건 그웬다와 자일스 부부거든요. 그웬다가 떠올린 과거의 기억에 대한 진상을 둘이 함께 파헤친다는 내용이니까요.

하지만 미스 마플의 비중과는 별개로, 이야기는 재미있고 쑥쑥 읽힙니다. 특히 초반부, 그웬다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 묘사가 왠만한 호러물 저리가라 할 정도라 쉽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겨자색 침실 벽을 '새빨갛고 작은 개양귀비꽃과 수레국화가 번갈아 피어 있는 무늬의 벽지'로 바꾸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뒤, 침실에 있는 오랫동안 열지 않은 붙박이 장을 열고 난 뒤의 묘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붙박이장 안 쪽만 겨자색으로 덧칠이 되지 않고 '새빨갛고 작은 개양귀비꽃과 수레국화가 번갈아 피어 있는 무늬의 벽지' 상태로 남아있었거든요. 아, 이건 정말 영상으로 봤다면 아주 기가 막혔을거 같아요.

미스 마플도 비중에 비하면 활약은 확실해서 팬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명탐정으로서의 역할부터 제대로에요.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추리는 물론, 세세한 추리들 모두 돋보입니다. 그웬더가 기억하는, 선장이 2명이었다는 말을 통해 두 번의 긴 항해가 있었다고 추리하고, 난간 위가 아니라 난간 사이로 홀을 내려다 보았다는 말을 통해 그녀가 어린아이였을 때의 기억이라고 추리하는 식인데 모두 합리적이에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웬더를 죽이려는 케네디 박사를 층계참으로 뛰어 올라와 비눗물을 뿌려서 퇴치한다는 액션까지 선보입니다. 할머니 특유의 친화력과 풍부한 휴먼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는 모습도 인상적이고요.

추리물로서도 꽤 볼만한 편입니다. 대단치는 않아도 설득력 넘치는 트릭들이 연이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헬렌의 메모가 진짜인지 필적 감정을 할 때, 케네디 박사가 제공한 편지와 필적 견본 모두 본인이 써서 제공한다는게 첫번째 트릭입니다. 덕분에 메모는 진짜인걸로 일단 판명나죠. 간단하면서도 실현 가능한 트릭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듭니다.
릴리가 왜 케네디 박사가 알려준 열차가 아니라 한 시간 전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서, 케네디 박사가 알려준 역 전의 역에서 내렸는지에 대한게 두번째 트릭도 괜찮습니다. 진상은 박사가 살해한 뒤 원래 주었던 편지를 없애고 수정된 시간과 장소가 적힌 편지를 남겨놓았을 뿐이죠. 덕분에 경찰은 이 상황을 릴리가 박사를 만나기 전, 누군가를 협박하러 갔다고 오판합니다. 그럴듯하죠?
헬렌이 옷을 가져갔지만, 드레스는 가져갔지만 드레스와 셋트인 벨트와 슬립은 두고 가는 등 조합이 안 맞는다는걸 드러내는, 여성 특유의 관찰력이 돋보이는 장면도 좋습니다. 미스 마플의 추리는 아니고 하녀 릴리가 알아낸 것이지만요.

아울러 살인 사건에 관여하지 말라는 충고도 돋보였어요. 문제가 되었던 사건이라면, 지역 토박이인 정원사 등이 몰랐을리 없다. 즉, 모두에게 숨긴 완전범죄였기 때문에, 지금 그 사건을 파헤치는건 현명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크리스티 여사의 또다른 작품인 <<누명>>이 연상되는 충고죠. 모두가 잊기를 원하고 잊혀졌다면, 그대로 놔 두는게 맞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네요. 참고로 잠자는 살인이라는 멋드러진 제목은 이 충고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오래전 살인 사건인데, 아무도 모르고 있는 잠자는 살인으로, 자게 내버려 두는게 낫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 이야기와 별 상관은 없지만 딜머스에 가기 위해 주치의 닥터 헤이독에게 바닷가 휴양을 조언해 달라고 우길 때의 티격태격도 재미있었습니다. 미스 마플이 과거의 살인을 파헤치러 가기 위해 "딜머스에서 2, 3주일 지내는 것은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겠죠?"라고 물어보자 "당신의 임종이 가까워 올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식인데, 닥터 헤이독이 이렇게 기지가 넘치고 위트있는 인물인지는 몰랐네요.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읽기에는 쉽다는 문제가 좀 컸어요. 부부가 미스 마플의 충고를 무시하고,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새어머니 헬렌의 오빠 케네디 박사를 만나는 초반부에서 모든 진상이 드러나는 탓이죠. 케네디 박사는 새어머니 헬렌은 다른 남자와 도주했으며, 아버지 핼러데이는 급격히 건강이 좋지 않아져서 요양소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즘 독자들은, 이런 증언은 피해자는 새어머니이며, 켈빈 핼리데이 소령이 아내를 살해한 뒤 시체를 처리하고 도망갔다고 오해하기 만들기 위함이라는걸 금방 눈치챌 겁니다.
그래서 소령이 범인이 아니라면, 소령이 케네디 박사에게 찾아가 살인을 고백하고 함께 돌아왔을 때 시체는 어디갔을까요? 또 헬렌이 다른 남자와 떠났다고 믿게끔 짐을 챙기고 그에 대한 메모를 남긴건 누구일까요? 그리고 헬렌이 살아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 몇 개월 뒤 전해졌다는 편지는 누가 보냈을까요? 이 조작을 한 인물은 동일 인물일겁니다. 자일스의 말처럼 핼리데이가 범행을 저질렀지만 은폐할 속셈이었다면, 케네디 박사를 찾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핼리데이는 살인을 했을지언정, 은폐 시도와 관련된 조작을 하지는 않았다는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케네디 박사일 수 밖에 없죠. 현장에 있었고, 현장 조작 및 시체 은닉, 핼리데이의 증언 위조 등이 가능했던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동기는 이 단계에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여동생에 대한 집착 같은 이유였을테고요. 헬렌이 남자와 떠난다는 메모는 나중에라도 준비할 수 있으니, 시체를 어떻게 없앴는지만 고민하면 됩니다. 이건 아마 변경된 집의 구조와 관련이 있는게 뻔하며, 결국 기묘한 정원 계단을 파헤치면서 사실로 밝혀집니다.

이렇게 초반에 주어진 정보만으로 진상은 모두 추리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케네디 박사 등장 이후에는 부부가 헬렌과 관련되었던 3명의 남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혐의를 씌우는 쪽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초반에 던져준 정보가 너무 확실하며, 이 세 명 중에서도 살인을 실제로 저지를만한 인물은 월터 페인밖에 없어서 눈길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어스킨 소령이 헬렌과 사랑에 빠졌다 한들 그는 유부남이라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고, 재키 애플릭은 사랑을 훼방놓은 케네디 박사와 월터 페인을 살해하면 모를까, 헬렌을 살해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또 지역 내 명사인 의사와 변호사 월터 페인은 그렇다쳐도, 어스킨 소령과 재키 애플릭, 어스킨 소령 부인은 밤에 무덤을 파는게 레어니에게 발각되었다면 빠져나기가 쉽지 않았을거에요. 심지어 재키는 식사에 초대도 받지 못할 정도의 불청객이었죠.
이렇게 범인 후보를 늘리기 위해 월터 페인을 거미에 비유하고, 그가 어린 시절 장난감을 망가트린 형을 거의 죽일 뻔 했다는 등의 묘사를 덧붙인다던가, 어스킨 소령 부인의 극렬한 질투심을 표현하는 등으로 수상쩍게 만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억지스러운 묘사는 오히려 범인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더 강하게 들게 만들더군요. 제가 추리 소설을 너무 많이 읽긴 많이 읽었나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용의자를 늘리는 전개 탓에 일관성도 좀 없어요. 예를 들면, 미스 마플은 한 사람의 증언만 들으면 안되고, 여러 명의 증언을 모아야 한다는데 그 말에 따르면 헬렌은 문란한게 맞습니다. 동네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문란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지막에 그녀는 그냥 호기심 많은 처녀였을 뿐이라고 얼버무리는건 여러모로 힘들어 보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있게 읽었지만, 시대를 초월할만큼 좋은 작품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발표된지 80여년 정도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미스 마플의 팬이시라면 읽어보셔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사님의 다른 걸작들부터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여사님이 직접 뽑은 본인 작품 베스트 10이 더 좋은 선택일거에요.

2020/03/26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3) - 아토다 다카시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2) - 아토다 다카시

다음날 오후 1시 정각, 사무라 에이스케는 다시 묘법사를 찾았다.
대낮에는 어딘가 근처 건설 현장에서 콘크리트 기둥을 치는 공사를 하는 듯한 쿵쿵, 쿵쿵거리는 무거운 소리와 거리의 호객꾼 소리, 관광버스가 울리는 경적까지 들려왔다.
이 정도라면 역시 '세외승경'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고 사무라는 생각했지만, 스님은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공사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불가에는 '심두멸각(心頭滅却)', 즉 마음을 비우면 불조차도 시원하다는 고사도 있는 만큼 이 정도 소음은 예사로이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어, 한 판 두자고."
오늘도 2층 방에는 이미 바둑판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바둑을 두는 것이 차를 대신하는 셈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어놓은 차 역시 차대로 제대로 고급품이었다.
"어땠나?"
스님은 돌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전 중에 물어보신 모두는 완벽하게 조사했습니다."
"그렇군, 그렇군."
사건 수사 중에 고급스러운 차를 마시며 스님을 상대로 바둑을 둔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세외승경'의 경지일지도 모른다.
"우선, 브래지어 건입니다만...."
"응."
"A 사이즈였습니다. 정확하게는 A컵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만.... 시체를 본 형사 말로는 A컵도 필요 없을 절벽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게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자네, 이 빅 어쩌고저쩌고하는 악단은 남자는 덩치가 크고, 여자는 작다고 했었잖아."
"네"
"에토 준코도 작았지?"
"맞아요. 150 cm도 안 될 정도예요."
"거기에 A 사이즈의 절벽이라니, 굉장히 왜소했겠는걸. 비쩍 마르고 깡말라서 체중도 37, 38kg 정도밖에는 안 됐을 거야."
"뭐, 비슷할 겁니다.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지만요."
"그런 체형의 여자가 의외로 밝히는 사람이 많다고. 실제로 그녀는 남자관계도 꽤 화려한 듯하고."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건과 무슨 관계가..."
"그렇게 당황해하지 말라고. 자네 차례야."
사무라는 당황해하며 검은 돌을 반상에 내려놓았다. 사실 바둑을 둘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스님은 사무라와 바둑을 두는 게 중요한 즐거움 중 하나이니, 적당히, 가볍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야시로 외삼촌 집에 심어진 정원수에 대한 것인데요."
"그래, 그래"
"말씀대로 대문에서 현관까지는 등대꽃, 칠엽수, 동백, 철쭉들이 다 심겨 있었어요. 우라와의 파출소에 전화해서 조사해 본 결과에 따르면요. 정원에는 그 밖에도 나무가 많아서 울창했는데......"
"아니, 아니, 이제 나무는 됐어. 문에서 현관까지는 콘크리트가 깔려 있었나?"
"그게, 담벼락에 쓰는 돌을 두 줄로 사십 개 정도 연결해서......"
"제일 매력적인 아가씨는 누구였지?"
"와카이입니다."
"역시 그렇군. 그리고 또 하나, 마작 쪽은 어땠나?"
"마작이요?"
" 잊었는가? 마작은 바둑 같은 것에 비하면 훨씬 운이 작용하기 쉬운 게임이지만, 그래도 서른 시간이나 하면 어떻게 되었겠냐고......."
"아, 그것도 일단 알아봤어요. 두 학생에게 전화를 걸어......"
"그래서, 결과는?"
스님의 뇌는 여전히 이중구조다. 보고를 들으면서도 바둑에 대한 판단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오히려 뜻밖의 묘수가 많아졌다.
"오랜 시간 하면 보통 마작도 잘하는 사람이 이긴다고 해요"
"그런데 얼마 전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스님의 말에 사무라는 어안이 벙벙해서 스님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렇습니다. 이런, 스님. 스님도 학생한테 물어보신 건가요?"
"아니, 난 그런 거 안 해. 하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 자네에게 물어 봤던 거지. 그래서……. 멤버 중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였지?"
"야시로입니다"
팟! 스님이 기세 좋게 내려놓은 흰 돌로 반상의 바둑돌들이 튀어 올랐다.
"응......?"
몰리고 있던 흰 돌의 형세가 갑자기 좋아졌다. 교묘히 도망치면서 오히려 사무라의 흑돌을 거꾸로 노리게 되었다.
"그 남자가 범인이야."
스님은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런데 동기가 뭐죠? 게다가...... 야시로와 멤버들은 모두 호텔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마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죽일 수 있었던 거죠?
"우선 동기부터. 살해당한 에토 준코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지? 집이 계모 가정이라서. 그렇다면 겉으로 별로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더라도, 빨리 집을 나가고 싶었던건 당연해. 흔한 일이지. 그래서 여러 남자를 유혹한 거야. 즐기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하긴, 집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다죠."
"관계를 맺고 나서는 결혼을 은연중에 내비치기도 했을거야. 하지만 남자들 모두 아직 어린 학생이니 그런 거에는 진절머리가 났을테고. 결국 그녀는 남자들에게 차례로 버려진 거지. 야시로의 경우 역시...."
"그렇다면 야시로와 에토 준코가 깊은 관계였다는 말인가요?"
"틀림없어. 이미 악단 멤버 세 명과 관계를 맺었는데, 네 명째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리 없지. 게다가 자네는 분명 콘트라베이스 같은 악기는 그렇게 쉽게 교체할 수 없다고 했어. 결원이 생겼을 때는 굉장히 난감해서, 급히 충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야. 맞지? 악단 단원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최근 콘트라베이스가 충원되었다는 뜻이야. 즉 야시로는 비교적 새로운 멤버이고, 준코도 새로운 남자에게 달라붙은 거지. 남자는 그냥 불장난이었겠지만, 지금까지 계속 버려져 왔던 여자는 더 필사적이었을 테고. 남자는 여자가 방해돼서……. 뭐, 그런 게 동기가 아니었을까 싶네."
"그렇다 하더라도 야시로는 어떻게 죽인 거죠?"
"대낮에 호텔 주변에서 그렇게 쉽게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나의 추리도 거기서부터 시작했지."
"그렇다면..."
"에토 준코는 야시로의 집에 가 있던 거야."
"어떻게 아셨어요?"
"멤버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와카이가 마작 견학을 하러 가니까. 야시로는 그걸 준코에게 미리 이야기했을 거야. 전화 같은 거로....... 멤버 중 가장 매력적인 아이가 야시로의 집에 가고 있다고 하면, 쥰코가 과연 태연히, 잠자코 집에 있을 수 있었을까? 야시로가 '1시쯤 온다고'라고 했다면, 분명 그녀도 그 시간에 갈 수밖에 없었을거야. 무엇보다도, 그녀가 다른 누군가, 관계없는 사람과 만날 약속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그 상대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게 더 이상해."
"하지만 마작을 하던 사람들은 아무도 에토 준코가 왔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요..."
"그래. 문밖에 초인종 버튼이 있으면, 그걸 누르면 누구나 벨이 울릴 것으로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조금 손을 댄다면 램프만 깜빡이게 만들 수 있어. 준코는 1시 조금 지나면 오기로 했으니, 마작을 제일 잘하는 야시로는 그때 쯤 일부러 꼴등이 되어 빠진 거야. 그렇지 않았더라도 집주인이니 차를 대접한다고 하면서 자리를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테지."
"그렇군요"
"준코가 와서 문밖의 벨을 누른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램프가 켜지고, 야시로만 이를 알아채고 현관으로 나갔지. 이를 위해서는 야시로의 외삼촌 집은 문에서 현관까지 상당히 거리가 있는, 나름 훌륭한 저택이어야만 해. 정원수나 포석의 종류는 문제가 아니야.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문에서 현관까지가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거리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어."
"……"
"정원수 종류도 많고 울창했지. 현관까지는 두 줄의 포석이 40개 정도라니 20~30m 쯤 되는 셈이고. 야시로는 여기서 준코를 목 졸라 죽인 뒤, 울창하다는 정원수 덤불 숲 속에 시체를 숨긴 거야. 그녀는 가냘프고 약했으니 죽이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겠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그리고 모른 체하며, 그는 모두 마작을 하는 곳으로 돌아온 거지. 그 상황에서 마작을 잘 못한건 당연하고."
"하지만 스님. 씨, 모두가 야시로 외삼촌 집에서 출발할 때는 다 함께 승합차를 타고 출발했어요. 시체는 어떻게 된 거예요?
"소모산 (作麼生)!"
갑자기 스님이 바둑판 위에서 고개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소모산 (作麼生)은 말할 것도 없이 선가의 말로 "자, 어때?"라는 뜻이다.
"야시로의 짐은 무엇이었지?"
여기까지 말하면 사무라도 짐작할 수 있다.
"설파 (説破)!"
사무라도 소리쳤다.
이건 '소모산'에 대해 답하는 선문답의 상투어다. 몇 번인가 스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사무라도 외우고 말았다.
* 作麼生, 説破 : 자 어때, (이만하면) 알겠지. 라는 뜻
"그렇지, 설파. 콘트라베이스. 부처님은 그 안에 있었어. 덩치 큰 여자라면 어려웠겠지만 쥰코는 굉장히 왜소했으니까. 야시로의 콘트라베이스는 아마 사전에 호텔의 보관함이나 어딘가에 옮겨 놓았을 거야. 콘트라베이스의 케이스 안에 부처님을 넣고 호텔에 도착하면, 그는 차를 주차하고 와야 하니 일행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지. 그때 부처님을 저수조 안에 던져 넣은 거야. 돌덩어리를 매달은 건 그때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였다면 아마 그것도 미리 저수조 근처에 마련해 두었을걸세."
스님은 말하면서도 손은 바둑판 위를 꾸준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무라는 응수했지만, 스님의 공격이 확실히 이득을 얻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의 응수는 건성에 불과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바둑은 이미 완전히 끝나 버린 상태였다.
"졌네요. 던질게요."
"아쉽지만, 오늘은 한 판이면 끝이야. 자네도 바쁠 테고......"
사무라는 허겁지겁 돌을 치우고 자리를 떴다. 어차피 더 바둑을 둘 수는 없었다. 스님의 추리에 따라 하나하나 증거를 모아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사무라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실례하겠습니다."
"아이고, 사건이 또 진정되면 오라고."

헤어질 무렵, 사무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스님, 그 추리, 정말 맞을까요?"
"모르겠어, 선방의 억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뭐, 사물의 이치로는 그렇지 않을까 싶네만."
스님의 추리는 옳았다.

* 재미있으셨어요? 평, 반응이 좋다면 이 단편집의 다른 작품인 '2LDK 살인사건' 번역에도 도전해 볼까 하는데... 잘 될까요?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2) - 아토다 다카시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1) - 아토다 다카시

"매니저 다무라라는 남자는 어떤가? 그...... 알리바이는......?"
사무라가 고심한 끝에 바둑판 위에 돌을 내려놓자, 스님은 응수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사건 당일 오후에는 아타미에 가 있습니다. 다음 공연을 위한 미팅이 있어서요. 도쿄를 오전 11시에 출발해서, 미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치가사키에 있는 누님 집에 들러 여러 명의 지인을 만난 게 확인되었습니다. 의심할 여지는 전혀 없어요."
"드러머는?"
사무라가 편의상 종이에 적어놓은 11명의 악단원 이름을 건네주었지만, 스님은 그쪽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우치노는 집이 코가네이인데요. 오후에는 동네 아이들과 캐치볼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조사해봤겠지?"
사무라가 이번에 놓은 수로 열 집 가까이 확보했지만, 스님의 쪽 세력도 만만치 않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사무라는 첫판에서 이겼기 때문에 이번 판은 마음이 편했다. 그것보다도 사건에 대해 스님으로부터 뭐든 좋은 의견을 듣는 게 더 중요했다.
"틀림없어요."
"다른 멤버들은......?"
"반년 정도 전까지 에토 준코와 관계가 있었던 오오이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는 문제의 오후엔 추가 시험을 2개나 봤기 때문에 아무리 의심해도 범행은 절대 무리에요."
"과연"
"그리고 기타의 오오스기. 이자가 제일 수상하다면 수상합니다, 알리바이 측면에서는 말이죠. 느긋하게 12시 넘어서 하숙집에서 일어나서 밤까지 영화를 보거나 빠칭고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사람이 없어요."
"하지만 인간은 누구라도, 그렇게 알리바이를 의식해 행동할 수는 없으니까. 진범 이외의 인간은 특히 더 그럴 테고......"
"예, 그건 뭐......"
"나도 독경 때문에 보살님들 댁을 돌 때면 몰라도, 그냥 훌쩍 밖에 나왔을 때 말이야,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맞습니다. 그래서 오오스기 카즈야가 단지 알리바이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저희도 어쩔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살해된
에토 준코와는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요." "두 아가씨 멤버는?"
"치노라는 아가씨는 집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데 1일은 마침 그 수업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와카이는 집이 오오미야인데, 마작 견학차 마작 그룹 방문을 위해 오후 1시 쯤 집에서 나왔습니다. 야시로의 집에 도착한 게 세 시를 조금 넘었을 때이니, 가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알리바이는 확실합니다."
"오오스기를 제외하면 모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다는 말이로군."
스님의 흑돌은 오른쪽 구석의 세력을 살려 중반 이후부터 조금씩 판세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묘수라도 찾지 못하면 이 세력을 가로막기는 어렵다. 사무라는 체념하듯 아무렇게나 돌을 내려놓았다.
"그래요. 그래서 수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죠. 에토 준코의 옛 친구라던가, 호텔 종업원 등을 차례대로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쪽에서도 그럴듯한 범인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이구먼."
"네에, 뭐......"
그때 승리를 의식한 스님이 약간의 실수를 범했다. 스님이 내려놓은 수로. 오른쪽 구석에 뜻밖의 패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이런! 이건 안 돼!"
스님은 큰 소리를 지르며 바둑판 위에 몸을 던졌다.
"2연승인가요."
"아니지, 아니야, 그렇게는 안 돼."
그리고 한동안, 바둑판 위에서 사투가 계속되어, 사건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렸다. 사무라는 조금 전 스님의 실수로 얼마간 이득을 보았지만, 그래도 그 이전에 스님이 얻은 세력이 너무 큰 탓에 결국 승부를 뒤집지는 못한 채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일승일패입니다."
"어때, 한 판 더."
"가시죠."
물론 사무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둑 자체도 즐겁기는 했지만, 아직 스님에게서 아무런 추리를 들은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소득 없이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번째 판은 서로 과묵하게 승부를 진행했다. 그러나 스님이 바둑 이외의 일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모습으로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바둑이 소홀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게 바로 스님의 이중구조식 두뇌의 신기한 점이었다. 추리는 추리, 바둑은 바둑이라기보다 오히려 추리가 잘 진행될 때가 바둑 쪽의 수도 느긋하면서도 뛰어났다.
스님과 사무라의 대전 성적은 지금까지, 아주 약간 사무라가 좋은 편이었다. 표를 만들어 정확하게 기록한 건 아니지만, 사무라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스님 쪽도 어렴풋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항상 말했다.
"자네는 언제나 기묘한 사건 이야기를 꺼내서 내 머리를 교란하니까 말이지. 그것만 아니라면 내가 자네보다 훨씬 셀 거야. 그렇지?"
이 말에 사무라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스님의 바둑은 어려운 문제를 추리하고, 추리가 핵심에 가까워질 때가 더 날카롭기 때문이었다. 이론보다 증거이니 가까운 시일 내에 아무 사건도 가져오지 말고, 그냥 훌쩍 놀러 와 볼까? 그렇다면 스님은 분명 말도 안 되는 수를 놓을텐데. 하지만......흉악범 담당 형사에게 그럴 여유가 생길 수 있을까? 오늘도 사건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며, 술을 마시며 바둑을 둘 수 있는 것이다.

"3월 1일 7시 30분에 그 어쩌고저쩌고 하는 악단 사람들이 모였다고 했지?"
대국은 중반, 한창 패싸움이 벌어지는 지점에 접어들었다. 스님의 수가 의표를 찔러왔다. 사무라는 허둥지둥하면서도 속으로 싱글벙글했다. 스님의 바둑이 쾌조라는 건, 스님의 두뇌가 순조롭게 회전하여 명추리가 진행되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뜻이니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이 판단에는 단연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맞아요"
"모인 순서는?"
"순서요? 잠깐만요. 공책에 적혀 있습니다."
사무라는 일어서서, 아까 수행승이 옷걸이에 걸어 준 양복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게 매니저 다무라, 이게 6시 50분입니다. 다음이 치노 카즈요. 그리고 오오이다, 다음에 마작 그룹 멤버 5명과 와카이 요코가 야시로가 운전하는 승합차로 도착. 그 뒤로 오오스기, 우치노 순서인데 모두 일곱 시 반까지 왔다고 합니다. 죽은 에토 준코를 제외하고 말이지요."
"연주자가 한 명 없는데, 곤란하지 않았나?"
"곤란하죠. 매니저는 상당히 초조하게 기다린 것 같더라고요. 결국 공연 시간이 임박하자 어쩔 수 없이 클라리넷을 하나 뺀 채로 공연했다고 합니다."
"그런 게 쉽게 가능한가?"
"저도 좀 의아해서 물어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멤버들이 아픈 적도 있고 해서, 여러모로 편성 교체는 익숙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연주가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단, 콘트라베이스 같은 특별한 악기는 그렇게 하는게 어려워서 결원이 생겼을 때 부랴부랴 보충했다고 하네요."
"그렇군."
스님은 다시 잠자코 바둑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섣불리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돌은 살아있나?"
스님이 고개를 흔들고, 사무라의 세력 한복판에 돌을 놓았다.
"엣......?"
사무라가 소리를 질렀다.
"그런 수가 있었나요?"
묘수였다. 아무리 쳐다보아도 대마가 빠져나가기 힘든, 멋진 수였다.
"살기 어렵겠는데요. 괴롭군요."
"그런 듯하네."
스님이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묘수가 나오다니......? 사무라는 그 뒤에도 돌을 계속 내려놓기는 했지만, 패배를 예감했다. 스님의 수는 묘수 이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끝났습니다."
"계가해 볼까."
계가해 보니, 사무라가 덤을 빼고도 일곱 집 부족했다. 완패였다.
"창피한 바둑을 두었네요."
"희한하게도 2승 1패구먼."
스님은 유쾌한 듯 웃었으나, 이내 근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자네도 마작을 하나?"
"아니요, 저는 안 합니다."
"호오, 그렇군. 그런데 마작도 바둑처럼 더 센 사람이 이기지 않나? 오늘의 나처럼."
자신이 2승 1패로 이겼다고 멋대로 말하고 있다.
"후후, 마작은 아무래도 운이 따라야 하니 약한 사람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 아니, 자네처럼 마작을 하지 않는 사람의 의견은 필요 없다고. 학생들은 밤을 새워가며 마작을 했다며? 그렇게 오래 하면, 반드시 강한 사람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해. 그랬는지 어땠는지 한 번 물어봐 달라고. 마작 그룹의 누군가에게."
"예...?"
"그리고, 야시로 씨라고 말했지? 그 사람 외삼촌 집 뜰에 어떤 나무가 심겨 있는지도. 정원에 심은 나무라면 진달래, 등대꽃, 칠엽수.... 동백나무도 있을지 몰라. 그리고 현관까지의 길은 콘크리트인지, 돌을 깔았는지도 알아봐 주지 않겠나?"
스님의 추리는 언제나 마지막에 진짜 질문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죽은 에토 준코 씨, 브래지어 사이즈는 어떻게 될까? 분명 A 사이즈는 작았을 테고, C 사이즈는 컸을 텐데..."
정말이지 이 스님은 모르는 게 없다. 하지만 브래지어 사이즈가 살인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것뿐인가요?"
"그리고 악단의 여성 멤버 중 누가 가장 매력적이었는지도."
"네"
"그럼 오늘은 그 정도면 된 것 같네."
"네에..."
"내일 오후에 나는 계속 집에 있을 거라네. 오늘 부탁한걸 전부 조사하고 나면, 우리 집에 바둑두러 오라고. 아마 내일은 세 판이나 둘 필요는 없을걸세. 자네도 여러모로 바쁘기도 할 테고..."
스님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추리는 거의 80% 정도 진행된 게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질문해봤자 대답해 줄 스님은 아니다. 좋게 말하면 완벽주의자, 나쁘게 말하면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고.... 아니, 스님이라고 해도 아직 추리가 제대로 되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고, 그것이 스님 생각대로라면 추리를 확신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의문은... 아무래도 브래지어의 사이즈와 정원의 정원수, 그리고 누가 제일 매력적인 여성 멤버인지와 같이 두서없는 질문의 답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늦게까지 실례했습니다."
"그럼 내일 보자고. 잘 가게."
사무라가 스님과 수행승의 배웅을 받으며 묘법사를 나선 건 거의 자정 무렵이었다.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1) - 아토다 다카시


A 사이즈 살인사건 - 아토다 다카시 : 별점 3점

이 책은 대략 13년 쯤 전에 원서로 읽었었습니다. <<나폴레옹 광>>으로 유명한 쇼트쇼트의 대가 아토다 다카시 유일의 본격 추리 소설 단편집입니다. 1978 ~ 79년에 '월간소설'에 연재되었던 이야기들로 모두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사이즈 살인사건'은 단편집 표제작이자, 각종 설정과 이야기 구조를 확립하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추리적인 완성도도 개중 높은 편이고요. 코로나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번역도 손을 대게 되었네요.

의역으로 가득찬 졸역이지만, 심심하신 분들께 위안거리가 될까 싶어 창피함을 무릅쓰고 올리니, 부디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길이가 길어 세 편으로 나누어 올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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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외승경(世外勝境)'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낡은 문기둥에 쓰여져 있는 글자이다. 바로 옆에까지 빌딩이 세워진 절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수행자들의 관습이려나? 아니면 이 문을 세웠을 무렵은 일대가 훨씬 속세를 벗어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석문을 지나면 앞쪽에 본당이, 오른편 나무문 안쪽에 주지 스님 가족이 머무는 안채가 있다.
"실례합니다."
"예"
까까머리에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수행승이 나타나 큰절을 올렸다.
"이쪽, 2층으로 올라오세요."
미리 전화로 연락해 놓았던 덕분인지, 2층의 손님 방은 이미 패널 히터로 따뜻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벌써 바둑판까지 놓여 있었다.
사무라 에이스케는 크고 푹신한 방석에 앉아, 수행승이 가지고 온 차를 입에 머금었다.

묘법사의 주지 스님과 알게 된 건, 순직한 친구의 묘가 묘법사에 있기 때문이었다. 가끔 성묘를 오면서 스님과 얼굴을 익혔고, 어느 날부터 함께 바둑을 두는 사이가 되었다. 사무라는 서른, 스님은 쉰을 서너 살 넘은 나이로 나이 차는 크지만 묘하게 마음도 잘 맞았다. 바둑 솜씨는... 사무라는 자신이 조금 더 낫다고 믿지만, 스님은 동의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주지 스님의 경력까지는 사무라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묘법사는 스님의 생가는 아니며, 스님은 데릴사위이다. 이만한 사찰의 주지인 만큼 불교 대학에서 전문 수업을 배우고 어느 정도 수행도 쌓았겠지만, 처음부터 승직에 도전한 사람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하고 싶은 대로 대충 살아왔지만, 도중부터 무언가의 사정으로 스님이 되었고, 지금은 어느새 주지 스님의 위치라 사뭇 신묘한 척 불도를 설파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어, 오래 기다렸지?"
주지 스님도 검은 터틀넥 스웨터 차림으로 나타나 말했다. 스님이라기보다는 변두리 가게의 장인 같은 모습이었다.
"춥지는 않나? 저녁 식사는? 이미 했다고? 그럼 술이나 한잔할까?"
이 스님은 동네 카바레 소문까지 통달하고 있을 정도이니, 술이나 회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이거 참, 그동안 소식이 뜸했네요."
"바빴나 봐?"
"조금..."
"자네가 한가한 게 세상에는 좋은 일이긴 한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스님은 바둑판을 잡고 끌어당겼다.
살인 담당 형사와 주지 스님의 조합,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의외로 가까운 조합이다. 형사도 스님도 시체가 없으면 장사가 시작되지 않으니까.
"선을 가려볼까."
스님이 백돌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사무라는 흑돌 두 개를 판에 올렸다. 스님이 집은 돌을 세어보니 열세 개였다. 사무라가 규칙에 따라 백을 잡았다. 수행승이 술과 안주를 쟁반 위에 얹고 와서 둘 곁에 내려놓았다.

사무라가 묘법사에 오는 건 바둑을 두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주지 스님을 상대로 조용한 방에서 바둑을 두며 맛있는 술을 대접받는 건, 방문 목적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니, 이왕이면 그 목적만으로 묘법사의 문을 넘고 싶었다. 그러나 수사 1과의 형사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호텔 저수조에서 젊은 여자의 시체가 나왔어요."
승부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 사무라는 본격적으로 오늘의 용건을 내비쳤다.
"매춘으로 잠깐 쉬었다 가는, 그런 곳인가?"
스님은 바둑판을 노려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도대체 스님의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죽으면 꼭 부검해 보고 싶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해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으니 말이다.
"아니요, 에메랄드 호텔입니다. 초일류라고는 할 수 없어도 어엿한 호텔이에요."
"알아, 알아, 그곳이라면. 이런! 실수를... 잘못 두고 말았네."
사무라는 스님만큼 재주가 있는 건 아니라서, 찬찬히 생각하고 돌을 놓은 뒤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호텔 뒤편에 직원용 출입구가 있고, 직원은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 층으로 갑니다. 그 출입구를 지나면 풀숲에 오래된 저수조가 있어요. 누군가 풀어둔 금붕어가 있고 초록색 이끼가 떠 있지요."
"깊은가?"
"2m 정도에요. 돌무더기를 묶어서 가라앉혔습니다."
"사인은?"
"교살입니다. 목을 졸랐어요."
"죽인 뒤에 시체를 저수조 속에 빠트렸다는 이야기인가?"
"맞습니다."
"시체를 발견한 건?"
"호텔 보이입니다. 좀처럼 사람이 가지 않는 곳입니다만, 3월 3일 아침에 저수조 표면이 얼어붙었다는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보이가 대나무 장대로 얼음을 깨려다가 수조 바닥에 이상한 게 있다는 걸 눈치챈 거죠."
"얼음은 그날 아침에 언 걸까?"
"아니요, 3일 아침은 그렇게 춥지 않았습니다. 추웠던 건 2일 아침으로, 결빙 상태를 보면 얼음이 언 건 2일 아침으로 보입니다. 그늘이라 쉽게 녹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여자가 죽은 건?"
"아마도 1일 오후입니다. 1일 정오 조금 전에 집에서 나갔다고 하거든요."
"그럼, 범인의 범위도 그렇게 넓을 것 같지는 않은데? 범행 시간, 시체를 수조에 감춘 시간 모두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이고, 그나저나 자네가 묘한 이야기를 꺼낸 탓에 바둑이 엉망이 되어 버렸네."
"던지시겠습니까?"
"응, 이번 판은 내가 졌네. 그럼 아까 그 이야기, 재미있어 보이는데 더 들려주지 않겠어?"

사무라가 스님의 기묘한 재능을 깨달은 건 서로 바둑을 두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사무라가 맡았던 클럽 마담 살인 사건이 피해자의 문란한 남자관계 때문에 도무지 진도가 나아가지 못하던 중이었다. 사무라는 주지 스님과 바둑을 두던 중 무심코 사건 이야기를 잠깐 꺼냈었다. 며칠 뒤 사무라가 다시 방문하자, 스님은 사건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점을 사무라에게 물어보고 나서, 이내 훌륭한 추리를 들려주었다. 사무라는 약간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스님의 추리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에 그 선을 따라 수사를 진행했고, 결국 범인을 체포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스님의 추리대로였었다.
그 후 비슷한 경험을 한두 번 더 겪고 난 지금은, 사무라도 완전히 벽에 부닥친 사건의 경우는 묘법사를 찾아가 바둑을 두며 스님의 의견을 듣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 사건은 발생 당초에는 그다지 어려운 사건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N 대학의 4학년생인 에토 준코, 시체 발견 장소는 스님에게 이야기한 대로 에메랄드 호텔 직원용 출구 뒤쪽에 위치한 낡은 저수조 안, 발견된 것은 3월 3일 아침 11시경.
에토 준코는 N대학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악단 '빅&큐티'의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악단 이름의 유래는 멤버 중 남성은 모두 덩치가 크고, 여성은 작은 것에서 유래했다. '빅&큐티'는 아마추어 악단이기는 했지만, 매니저인 타무라의 수완이 좋았고 멤버 각자의 실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저런 클럽과 호텔에서 출연 제의가 많았다. 에메랄드 호텔에서도 3월 1일부터, 즉 에토 준코가 살해되었다고 추정되는 날 밤부터 7층 라운지에서 '빅&큐티'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나?"
스님은 두꺼운 술잔에 입을 대고 몸을 약간 비스듬히 눕히며 들이켰다.
"네, 10일까지요. 클라리넷이 하나 부족하긴 했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어쨌든 예정대로 끝내기는 했답니다."
"그럼 우선은, 그 죽은 아이 이야기부터 해 보시게."
"네, 뭐라고 해야 하지? 집은 특별히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아요. 보통의 중산층입니다. 어머니가 계모고요."
"집에서는 걸림돌 취급받고 있었나?"
"특별히 심한 취급을 받은건 아니지만... 어머니 쪽 이복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으니까요. 피해자에게는 그렇게 아늑한 집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친구들이나 남자 친구는?"
술이 텅 빈 것을 깨달은 스님은 벽에다 툭툭 손을 치면서 말했다. 절 주변이 조용하기 이를 데 없어서, 스님이 손을 치는 소리는 아래층까지 잘 울려 퍼졌다. 수행승이 술 한 병을 들고 와 문을 열었다. 이런 고요한 상황에는 '세외승경'이라는 말도 과장은 아니고 잘 어울린다.
"악단 동료들과의 교류가 대부분이었어요. '빅&큐티'에는 남자 멤버 몇 명인가가 있는데, 그들 중 두 세 명과는 꽤 깊은 관계까지 간 모양입니다."
"그건 육체관계를 의미하나?"
"그럼요. 요즘 여대생들은 금방 거기까지 가 버리니까요."
"같은 악단 내에서, 이 남자, 저 남자와 그런 관계를 맺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여러 남자와 몰래 사귀는데에는 엄청나게 능숙했던 모양이더라고요. 비밀리에 말이죠."
"밝혔나 보지?"
"음, 피해자가 그런 걸 좋아했을 수도 있지만, 계모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외로움을 많이 탔다더군요. 하여튼, 악단원 중에서도 적어도 세 명과는 깊은 관계가 있었어요."
"호오, 그 세 명은?"
"피아노의 이케다, 기타의 야마우치, 그리고 같은 클라리넷의 오오이다입니다. 셋 다 이미 끝난 관계라곤 하지만요."
"그 셋이 제일 수상한가?"
"하지만 이케다와 야마우치의 알리바이는 탄탄합니다. 오오이다도 마찬가지에요. 손쓸 방법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호텔 내부 사람이나 떠돌이의 범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건 좀 성급한 생각 같은데. 그 여자애 이름이 뭐였더라?"
"준코, 에토 준코입니다."
"그래, 그래, 준코가 살해된 건 1일의 몇 시쯤일까?"
"부검 결과로는 오후 한 시에서 세 시 사이에요."
"흠, 그날 밤 연주하기 위해 악단 멤버가 모두 모인 시간은? 준코가 그렇게 서둘러 호텔로 올 필요가 있었나?"
"네, 그게 문제에요. 매니저의 증언으로는 호텔 집합 시간은 오후 7시 30분까지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모두 그 시간 즈음에 모여 있었고요."
"왜 그녀만 그렇게 이른 시간에 호텔에 갔을까? 호텔이 아니라 저수조 옆이었을지도 모르지만... "
"네...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있었다는 등, 그 이유에 대해 아직 밝혀진 사실은 없습니다."
"그녀는 뭐라고 하고 집을 나왔다고 하던가?"
"언제나처럼 별말 없었다고 하네요. 그냥 저녁밥은 필요 없다 정도였답니다."
"호오, 어쨌건 악단 멤버들의 알리바이는 모두 확실한 것 같군. 자네의 우울한 얼굴을 보니."
"그 말 그대로입니다. 우울한 건 마작 그룹 때문이기도 하고요."
"마작 그룹?"
"학생은 편해서 좋아요. 4학년이라 이제 졸업식을 기다릴 뿐이라 그런지, 악단 멤버 중 이케다, 야마우치, 다니키, 노무라, 이 네 사람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야시로 집에 모여 철야 마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28일 밤부터.... 야시로는 외삼촌 댁에 하숙하고 있는데 외삼촌이 여행을 가서 안 계신 틈에 학생들을 불러 모은 거죠."
"이케다, 야마우치, 다니키, 노무라, 거기에 야시로라.... 마작은 넷이서 하는 것이지 않은가?"
"보통 이런 경우 한 판이 끝나면 꼴등이 빠집니다. 꼴등은 잠을 자거나, 옆에서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죠."
"그럼, 도중에 집을 몰래 빠져나간 사람은 없다, 그런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 집은 어디인가?"
"우라와에서도 제일 깊숙이 들어간 곳입니다. 에메랄드 호텔까지는 편도로도 두 시간 가까이 걸릴 겁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마작 그룹 멤버들이 서로 입을 맞추고 범행을 벌였을지도....."
"음,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닐 거에요. 지금 말한 멤버 중 한 명인 노무라가 제 조카거든요."
"이런, 이런"
"이상한 형태로 관계자가 되어버린 터라 조금 난감하고, 또 우울합니다만.... 조카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녀석입니다. 거짓말 따위 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에요. 하물며 살인 사건에 관계되었다면 말이죠. 그런 일을 숨겨둘 수 있을 리가 없어요. 그래서 이 멤버들이 28일부터 1일 오후 4시 넘어서까지 마작을 하고, 저녁에 모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야시로의 승합차를 타고 제시간에 에메랄드 호텔까지 온 건 일단 틀림없는 사실일 겁니다. 확신합니다."
"그렇군.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 조카가 한 말은 맞는 말이겠지. 공동 모의한 범행은 없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날 무엇을 했을까...."
스님은 취기 탓에 살짝 붉어진 이마를 두드리며 바둑돌을 다시 잡았다. 자연스럽게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시체가 발견됐을 때부터 범인의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에토 준코의 교우 관계 쪽, 특히 '빅&큐티'의 멤버. 다음은 호텔 직원 혹은 관계자, 그리고 마지막은 우연히 호텔 근처에 온 방랑자.
두 번째, 세 번째의 가능성이 완전히 부정된 것은 아니지만, 사무라는 애초부터 첫 번째 가능성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낮의 호텔은 - 특히 직원 출입구 근처는 - 결코 사람의 출입이 적지 않다. 젊은 여자를 우연히 살해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에토 준코는 왜 예정보다 5시간이나 빠른 시각에 호텔로 왔을까? 누군가 지인과 약속이 있었던 게 아닐까? '빅&큐티'의 멤버는 에토 준코를 제외하면 매니저 겸 사회자 타무라와 마작 그룹 멤버인 이케다, 야마우치, 타니키, 노무라, 야시로, 드럼의 우치노, 기타의 오오스기, 뭐든지 능숙하게 연주하는 오오이다, 그리고 여성 멤버인 클라리넷의 치노와 플루트 겸 보컬인 와카이의 11명이다. 에토 쥰코가 오쿠보의 집을 나온 건 3월 1일 정오 조금 전이고 그 이후의 행동은 알 수 없다. 클라리넷을 들고나왔으니 그대로 저녁 공연에 참여할 생각이었음은 틀림없다. 클라리넷은 핸드백과 함께 호텔에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중간의 하수도에서 발견되었다.
에토 준코의 사망 추정 시각이 오후 1시부터 3시 사이이니, 그녀는 집을 나간 후 수 시간 사이에 살해당한 셈이다.

2020/03/23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모험 - G.F 포레스트 (1905)


문을 연 나를 맞은 건 황홀한 선율이었다. 워록 본즈가 몽환적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우면서도 단정한 얼굴은 몹시 더러운 브라이어 파이프에서 피어오른 자욱한 연기로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를 알아챈 본즈는 숨 막힐 정도로 흐느끼는 선율을 마지막으로, 환영의 미소를 담뿍 지으며 일어섰다.

"안녕, 고즈웰"

본즈가 쾌활하게 말했다.

"그런데 왜 침대 밑에서 바지를 다림질하는 거지?"

사실이었다, 명확한 사실. 놀라운 관찰자이자, 온갖 가공할 범죄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 그리고 역사에 알려진 가장 위대한 두뇌의 소유자 본즈는 비정하게도 나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아,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놀랍고 멍한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본즈는 내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바지에 대해 특별히 연구한 적이 있지. 침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잘못 볼 리가 없어. 하지만 그런 지식은 잠시 젖혀 두도록 하라고. 우리가 석 달 전에 함께 살았던 걸 잊었나? 그때 본 거야."

본즈는 그 날카로운 추리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의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도 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놀라고 감탄할 뿐이었다. 이 은혜로운 추리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아 양팔로 본즈의 왼쪽 다리를 열렬한 존경심과 함께 껴안고, 그의 지적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본즈는 소매를 걷어 올려 그의 가늘고 섬세한 팔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한 컵 분량의 청산을 단숨에 주사했다. 주사를 끝낸 후 그는 벽시계에 눈을 돌렸다.

"23분이나 24분 안에"

본즈가 말했다.

"한 남자가 나를 만나러 올걸세. 아내와 두 아이가 있고 의치가 세 개, 그중 하나는 최근에 교체했지. 또 그는 약 마흔 일곱 살쯤 된 성공한 주식 거래인으로 순모로 된 옷을 입고 있으며 '잃어버린 세계 대전'의 열렬한 후원자야."

"그 모든 걸 어떻게 알았나?

나는 숨을 헐떡이며, 애타게 조르는 심정으로 그의 무릎을 두드렸다.
본즈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오는 이유는 말이지."

본즈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지난 목요일, 그가 사는 리치먼드의 집에서 보석이 도난당했기 때문에 내 의견을 듣기를 원하고 있어. 도난당한 보석 중에는 정말 놀랄 정도로 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있거든."

"설명해 줘"

나는 황홀함과 존경심에 사로잡힌채 벅차 울부짖었다.

"제발 좀 설명해 달라고!"

"친애하는 고즈웰군"

그는 웃었다.

"자네는 정말 어리석군. 자네는 내 방식을 잊어버렸니? 그 남자는 내 친구야. 어제 시티에서 만났을 때, 도난 사건에 대해 오늘 오전에 나에게 상담하러 오겠다고 말했지. 그게 전부라네. 추론이지, 고즈웰 군, 아주 단순한 추론이라고."

"하지만 보석은? 경찰은 수사에 나섰겠지?"

"완전히 속수무책이야. 우리 경찰은 세계 제일의 바보니까. 그들은 이미 아무런 죄도 없고 무해한 사람들을 27명 체포했어. 미망인인 공작부인을 포함해서 말이야. 그녀는 충격 탓에 아직도 몸져누워 있다더군. 게다가 내가 틀리지 않는다면, 경찰은 오늘 오후 내 친구의 아내를 체포할 생각이야. 친구 아내는 도난 사건 당시에는 모스크바에 있었지만, 그런 건 우리 사랑스러운 바보들에게는 하찮은 문제일 뿐이겠지."

"보석의 행방에 대해 뭔가 단서가 있나?"

"아주 유력한 게 하나 있어. 꽤 유력하지. 사실 목걸이를 지금 이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이건 정말 간단한 사건이야. 내가 여태까지 다루어 왔던 사건 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간단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렇다고는 해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점은 있어. 보통 관찰자에게는 어려운 점도 몇 개 보이기는 해. 우선 동기가 그렇지. 흔히 있는, 돈을 목적으로 한 범행은 아니거든. 자기 이름을 날리기 위한 목적이 아닐까 생각된다네."

"상상도 못 하겠는걸."

나는 놀라서 외쳤다. 도둑이, 도둑으로서 자신의 업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단 말인가.

"맞아 고즈웰. 자네는 상식이라는 게 있지. 하지만 상상력은 가지고 있지 못해. 상상력은 탐정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인데 말이야. 자네는 열정적이고 힘이 넘치지만, 우둔한 경찰과 다를 바 없어. 그들에게는 어떠한 사건도 쉽지 않겠지만, 나에게 이 사건은 그야말로 햇빛처럼 분명하다네."

"그건 이해할 수 있어."

나는 경건하게 본즈의 무릎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사실 이 도둑에게는 말이지."

본즈의 말은 계속되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동기가 있기는 해. 하지만 보석에 관해서는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바로 내 손에 쥐고 있다고 말해도 좋아. 바로 여기에!"

본즈는 그의 무릎을 감싸고 있던 내 팔을 풀고, 방구석에 있는 안전 금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금고에서 커다란 보석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눈부신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웅장한 목걸이 한가운데에서 겨울빛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 광경에 나는 숨을 삼켰다. 감탄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본즈 앞에 넙죽 엎드렸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나는 횡설수설하다가, 이윽고 나의 당황하는 모습을 본즈가 즐기고 있다는 걸 눈치챈 뒤 입을 다물었다.

"내가 훔쳤지"

워록 본즈는 말했다.

<<끝>>

G.F.Forrest 'The Adventure of the Diamond Necklace'(1905)
출처는 여기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이제 번역까지 도전해 보게 되었네요.
의역을 넘어선 졸역이지만, 재미있게 작업했습니다. 짧아서 다행이에요....
부디,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2020/03/22

희망장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3.5점

희망장 - 8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의 시리즈 탐정 중 하나인 스기무라 사부로가 등장하는 단편집.

미야베 미유키는 유명세에 비하면 제가 많이 읽은 작가는 아닙니다. <<화차>>는 제 올타임 베스트 10에 언제나 꼽을 수 있는 걸작이고, 다른 작품들도 대체로 평균 이상이었지만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는 않더라고요. 가장 큰 이유는 대체로 500페이지는 훌쩍 넘는 대장편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두께만 봐도 먼저 질리는 느낌이거든요. 에도 시대물은 재미있긴 했지만 별로 취향이 아니었고요.
이 책 역시 거의 500페이지에 이르는 두께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외부 활동이 극히 적어진 요즈음, 이런 책이 집에서 진득하게 읽기에는 오히려 좋겠다 싶어서 읽기 시작했지요.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고 괜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재미의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는 탐정과 일반인의 경계에 묘하게 걸쳐있으며, 추리력과 더불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관찰력을 선보이는 주인공 스기무라 사부로입니다. 스기무라 사부로는 <<탐정 사전>>을 통해 존재를 알게된 뒤,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만 해 왔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더욱 감개무량하네요. 평상시 흠모하던 스타와 우연히 동석하여 식사를 했는데, 스타가 밥값까지 내 준 격이랄까요. 두 번째는 평균 이상되는 추리물로서의 완성도고요.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평균 이상의 좋은 작품들이었습니다. 전부 평균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전작을 꼭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성역>>
이혼한 독신남으로 사립 탐정과 조사로 먹고 사는 38살의 스기무라 사부로에게 기념할 만한 첫 손님이 찾아온다. 손님은 바로 이웃 맨션 파스텔 다케나카에 사는 독신 여성 모리타. 그녀의 의뢰 내용은 유령의 정체를 밝혀달라는 것으로, 그녀의 아래층에 살다가 사망한 할머니 미쿠모 가쓰에를 꼭 닮은 사람을 보았다는 것. 그런데 가난에 허덕이던 미쿠모 할머니와는 다르게 그녀는 유복해 보였다고 한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조사의 의뢰비는 착수금 5천엔과, 2년 동안의 쓰레기장 청소 당번 대행이었다.

조사 시작과 거의 동시에, 스기무라는 곧 죽을거라는 전화만을 남기고 사라진 미쿠모 할머니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남겨진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이루어진 그녀는 죽지 않았고, 지금 유복해보이는건 뭔가 인생 역전의 계기가 있었다는 추리도 합리적입니다. 옛 주소지에서 연을 끊다시피한 딸 역시 행방불명이라는 건 둘 사이에 뭔가 연결 고리가 있다는걸 암시하고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복권 당첨에 당첨된 할머니가, 딸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둘이 새로운 삶을 찾아 과거를 모두 버리고 떠났다는 결말까지 차분히 이어집니다. 이를 위한 중간중간의 디테일들도 꼼꼼하고요.
38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런데 작중 배경인 2010년에 38살이면, 저와 동갑이네요. 호감도가 더욱 증가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배려를 소중히 여기는 스기무라 사부로도 무척이나 호감가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조금 특이했던건, 불쌍한 할머니를 염려하는 동네 주민의 의뢰와 조사 중 자상한 동네 주민들의 도움을 받는 따뜻한 분위기와 딸인 지독한 이기주의자 미쿠모 사나에의 표독스러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보였던 스타차일드 멤버들마저도 알고보니 착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라는게 밝혀집니다. 이들에 비하면 사나에는 그야말로 자기만 아는 압도적인 악역이에요. 문제는 사나에같은 인물이 우리 주위에서 더욱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겠죠. 할머니의 무사는 축하할 일이지만 이런 딸과 함께 산다면, 결말은 안 봐도 뻔할 거라는게 무섭게 다가옵니다.

스타차일드 멤버인 벨과 사나에의 악연, 그로부터 비롯된 가노쿠라 풍아당과의 관계는 사족이었다 생각되지만, 이 정도면 아주 좋은 작품이죠.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희망장>>
세상을 떠난 무토 간지는 죽기 전, 양로원 관계자와 아들에게 과거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아들 아이자와는 스기무라에게 이 사실의 진위여부를 밝혀줄 것을 부탁한다. 주변인들을 통해 밝혀진건, 간지 씨가 쇼와 50년 8월, 젊은 여성이 습격당해 살해된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었다.

아이자와의 말에 따르면, 무토 간지는 데릴사위로 들어간 아이자와 가문으로부터 절연당한 뒤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외도 탓으로, 그가 특정 여성에게 발끈하여 살해했을 수도 있다는건 충분히 가능했을거라고 설명되지요. 하지만 스기무라의 조사로, 그가 '사람을 죽였다'고 직접 표현한 적은 없다는게 곧바로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진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를 밝혀내기 위해 성실하게 발품을 팔아 단서를 찾는 스기무라 사부로의 조사 활동이 정겹더군요. 오래전, 35년 전 거주했던 흔적을 찾아 거리를 헤메는데, 나름의 노하우도 눈에 뜨였고요. 음식점, 이발소, 미용실, 세탁소나 술가게 등 배달도 하는 업종의 가게 등을 돌아다니지만, 바나 스낵에는 기대지 않는다는게 그것이죠. 바둑 모임이나 장기 살롱은 있으면 좋은 정보원이지만 마작이나 파친코는 그 반대이고, 편의점은 별로 도움이 안되지만 학원은 도움이 된다던가, 파출소에는 들르지 말아야 한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류의 조사를 한다면 참고할 만한 정보로 보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스기무라 사부로의 조사로 35년 전 강간 살해 사건의 범인과 무토 간지가 같은 아파트 '희망장'에 살았다는게 밝혀집니다. 처음 방문했던 술가게에서 정보를 얻었더라면 이후의 조사는 별로 필요가 없었지만, 이런 시행착오가 오히려 현실감을 더해준 것 같네요. 또 이 과정에서 탐정은 아무리 일상계라도 비정할 수 밖에 없다는걸 전해주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에게, 차가운 질문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이유인데, 굉장히 와 닿더라고요.

그리고 이어지는 스기무라의 추리에 따른 가설도 그럴듯합니다. 35년 전 사건의 진범이 무토 간지였거나, 진범 가야노 지로의 아주 친한 지인이었을거다라는 가설이죠. 당연히 35년전이라고 해도, 경찰을 우습게 보면 안되니 두 번째 가설이 정답이고요. 그렇다면 왜 무토 간지가 죽기 전 양로원에서 이상한 말을 했느냐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스기무라가 양로원 청소 스태프가 청소할 때 스포츠 타월을 접어 바닥에 까는 걸 보고 알아채게 됩니다. 무토 간지는 살인범을 본 적이 있어서, 그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알았던거죠. 그래서 양로원 청소 스태프 하자키가 살인을 저질렀다는걸 알고 그걸 은밀히 드러내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최근에 일어났던 성폭행 미수 살인사건과, 35년전인 쇼와 50년 8월 사건 두가지가 마지막에 맞물리는 전개가 정말 멋지네요. 일평생 고독하지만, 정직하고 한결같이 살아온 무토 간지의 매력도 빛을 발하고요.

하지만 욕심이 조금은 지나친 느낌입니다. 35년전 피해자 다나카 유미코의 동생을 이야기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그녀는 원래부터 재였다. 사람의 모습을 한 재다."와 같은 멋드러진 묘사에 비하면 등장해서 하는게 없거든요. 묘사도 담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멋이 넘치는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4.5점! 지금도 좋은 작품이지만 불필요한 요소를 들어내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아니면 다나카 유미코 사건도 더 깊숙히 파고들어 더 긴 호흡의 이야기로 전개하던가요. 그랬다면 별점 5점도 충분했을텐데, 약간 아쉽습니다.

<<모래 남자>>
2011년 2월 6일, 스기무라 사부로는 야마나시에서 신세를 졌던 나카무라 점장을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이혼 후 야마나시에서 점장과 일할 때 엮였던, 불륜으로 도주한 마키타 히로키 사건을 떠올린다.

스기무라의 이혼 후 야마나시에서의 삶, 가키가라 스바루를 만나 조사원으로 일하게 된 계기 등이 차분히 펼쳐지는 작품. 호토 가게 '이오리'의 주인 마키타 히로키가 이노우에 다카미와 불륜 끝에 사랑의 도피를 한 사건의 조사와 추리와 함께 진행됩니다.

남편 마키타 히로키는 과거 문제아로 아버지에게 절연당했다, 지금 그의 사진은 남아있는게 없다, 사진을 확인조차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당연히 과거 문제아 가가와 히로키는 지금의 마키타 히로키와는 다른 인물이라는게 쉽게 떠오릅니다. 다카미가 문제아 시절 과거를 노리코와의 친분 덕분에 알게 되었고, 돈이 궁해진 지금에 와서 그 정보를 협박의 도구로 썼으리라는 추리도 상상력의 범주 안에 있고요. 이를 마키타 집에서 풍겨온 염소 냄새, 집 근처에 묘지가 있다는 상황 등과 연결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는 오싹합니다.
협박을 '공포'의 문제로 풀어나가는 감각,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피해자들의 공포, 후회를 드러내는 솜씨도 발군입니다.

하지만 이노우에 다카미가 살아있었으며, 이 모든건 히로키의 부탁으로 벌인 연극이었다는 진상 이후부터는 시시해집니다. 히로키가 지나치게 착한 탓에 벌어진 일이라서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요. 한 번 희생양은 영원히 그 속박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로 느껴졌거든요. 같은 이유로 진짜 히로키로부터 위협받던 가짜가 진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건 의외이기는 했지만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모든걸 알게된 다카미가 어머니와 함께 사과했다는 후일담은, 결국 히로키의 연극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결말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카미의 철없는 악의가 결국 모든 걸 망쳐버렸다는 뜻이니까요. 게다가 본인은 잘못을 느끼지 못하며, 잘못을 깨닫고도 결국 민폐만 끼치고 말았다는 점에서 아예 사악함을 뿜어냈던 <<성역>>의 사나에보다도 더 질이 나빠요.

결론내리자면, 사건보다는 스기무라의 과거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던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도플갱어>>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난 뒤 얼마 되지 않은 2011년의 어느날, 스기무라 사부로에게 아스나라는 고등학생 소녀가 찾아와, 어머니와 교제하고 있던 앤티크 샵 사장 유타카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후쿠시마 사태를 일으킨 도호쿠 대지진을 소재로 한 작품.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태가 일본인에게 얼마나 공포였는지가 작품에서 은근하게 표현되는게 이채로왔습니다. 스기무라 사부로의 입을 통해 '일본은 키를 잃고 폭주할 것이다, 우리는 망망대해를 절망 속에서 떠돌 것이다'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대표적이죠. 소시민과 상대적인 약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미야베 미유키의 특성이 잘 드러난 말이기도 했고요.

핵심 사건인 유타카 실종 사건의 추리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지진으로 실종된 줄 알았지만 사실은 살해되었다는건 좀 뻔한 이야기죠. <<브라운 신부>>에서도 시체를 숨기려면 전쟁을 일으키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도 동기가 그의 결혼 결심이었다는건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결혼을 결심하면 프로포즈를 해야 하고, 프로포즈를 위해 고가의 반지를 구입했으며 이를 범인이 유타카를 살해하고 빼돌렸다는 진상은 충분히 합리적이니까요.

그러나 전반적으로 작위적인 전개가 눈에 거슬립니다. 애초에 아스나가 스기무라에게 실종 조사를 의뢰한 것 부터가 작위적이에요. 스기무라가 그 의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조사를 한 것도 석연치는 않고요. 작 중 묘사되듯 '자원 봉사'로 할 일은 아니잖아요. 이런 실종은 전문 단체에 의뢰하는게 맞는 상황이니까요.
마쓰나가가 유타카를 살해한 직후, 대형 재해가 때마침 벌어진 것 역시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재해가 일어난 후, 유타카가 프로포즈를 결심하고 (내가 그녀를 지켜주겠어! 같은 느낌으로), 그 탓에 마쓰나가와 트러블이 일어났다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또 사부로가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 된 계기인 아스나를 괴롭히는 나쁜 친구들이 사건에 엮인 과정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단서를 끄집어 내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한 억지스러운 느낌이 강했어요. 이 친구들이 등장하느니, 마쓰나가가 아스나에게 직접 연락하여 사귀자고 한 뒤, 그 징표로 비싼 반지를 선물한다는 식으로 풀어나갔더라면 더 어땠을까 싶네요.

명백한 살인 사건을 스기무라 사부로가 해결하는 정통 추리물로,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본격물에 가까운 작품이지만 그만큼 본격물이 현대 사회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경찰도 아니고, 정식 탐정도 아닌 스기무라 사부로 수준에서는 더욱 한계가 느껴질 수 밖에 없지요.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처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3/21

문학을 홀린 음식들 - 카라 니콜레티 / 정은지 : 별점 2.5점

문학을 홀린 음식들 - 6점
카라 니콜레티 지음, 매리언 볼로네시 그림, 정은지 옮김/뮤진트리

푸주한이자 전직 페이스트리 요리사이자, 뉴욕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자신의 유년시절, 청소년기, 성인 시절에 읽었던 문학 작품들 속에서 인상적인 요리들을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본 레시피와 함께 소개하는 책. 저자의 경력에 딱 맞는 책이네요.

그동안 소설이나 영화 속 요리들에 대해 소개하는 책은 제법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소개한 비슷한 책만 해도 <<죽이는 요리책>><<문학의 맛, 소설 속 요리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시피>>가 있죠. 그 외에도 무라카미 하루키, 헤밍웨이의 작품 속 요리에 대해 다루는 등의 많은 책이 출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책들이 그동안 불만스러웠었습니다. 그냥 등장한 요리의 나열일 뿐, 그 요리가 작품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차지하는지를 제대로 설명해주는 책은 한 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레시피 소개와 재현에 치중할 뿐 그 요리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는 책도 거의 없었고요.
그래서 저 스스로 이 시장에 뛰어들어 추리 소설 속 주요 등장 요리들을 주제로 레시피와 함께 소개하는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이라는 졸저를 출간한 바 있습니다. 제 원칙은 작품 속에서 인상적으로 등장한 요리라 하더라도, 중요하게 사용되지 않았다면 주제로 삼아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 그 요리들에 대한 단순 레시피 뿐 아니라 그 요리에 대해 제가 구할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정리하여 해당 요리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했고요.

이 책은 제가 추구한 방향과 어느정도 비슷합니다. 주제로 선정된 요리들이 작품이나 주인공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오만과 편견>>에서 "니콜스가 화이트 수프를 흡족하게 만드는 대로" 초대장을 발송하겠다고 한 뜻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저자 조사 결과에 따르면, 화이트 수프는 역사가 깊은 요리로 부유한 가정에서만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미스터 다아시나 미스터 허스트 등 프랑스 요리에 정통한 까다로운 손님들을 초대하려면, 화이트 소스를 만들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거죠.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오만과 편견>> 속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주 좋은 정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베카>>에서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를 음식이 서빙되는 순서로 드러내는 장면이라던가, <<안나 카레리나>>에서 오블론스키가 굴을 탐식하는 장면을 그의 끝없는 성욕과 연결시키는 부분 등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정말 핵심 소재라서 등장하는 요리들도 많습니다. 저도 딸 아이가 어렸을 때 읽어주었던 모리스 샌닥의 <<깊은 밤 부엌에서>>에 등장하는 핫 케이크 반죽이 그러하죠. <<위대한 유산>>의 유산을 받게 된 계기가 된 음식 중 하나인 '동그란 돼지고기 파이'도 비중만 놓고 보면 충분히 소개해 줄 만 할 겁니다.

아울러 해당 요리의 역사 등에 대한 자료는 부족하지만 요리사이기도 한 저자의 직업 덕분에, 저자 스스로 만들어 본 레시피들이 상세하게 수록된 건 제 책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저도 제가 주제로 삼은 요리를 실제로 재현해 봤어야 하지만, 전문 요리사도 아니고 재료와 장비의 수급이 어려워 이런 부분에 힘을 쏟지 못한게 너무나 아쉽거든요. 이 차이는 <<오만과 편견>> 속 화이트 수프 레시피를 당시 요리책에서 찾아보고 직접 만들어 본 결과를 소개해주는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18세기 레시피는 모두 끔찍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현대의 '화이트 갈릭 수프'를 제안하지요.
그 외에도 남부식 비스킷을 만드는데는 라프 라드가 꼭 필요하다는 팁 등의 유용한 정보도 많아요. 곁들여진 일러스트들도 최고 수준이고요.

그러나 소개되는 모든 요리들이 그러한건 아닙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처럼, 작품이 아니라 저자의 인생과 관련된 요리가 소개된기도 하고, 또 해당 작품을 읽었을 때의 저자의 경험에 관련된 요리가 소개되는 등 개인적인 경험이 담뿍 담긴, 개인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도 많습니다. 원래 개인 블로그에서 시작되어 책이 출간되었다니 어떻게보면 당연한 일이겠죠. 문제는 뒤로 가면 갈 수록 이런 개인적인 글들이 많아진다는 점입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2.5점. 나쁘지는 않은데 큰 틀과 가면 갈 수록 제 방향성과 좀 맞지 않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요리에 대한 전문성만큼은 아주 돋보였습니다. 이런 분과 손잡고 추리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요리에 대해 합작하면 참 좋겠다 싶네요.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별점 2.5점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반전까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년전 헤어졌던 옛 연인 사야카가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의 아버지 유품 속 약도와 열쇠의 수수께끼를 함께 풀자는 부탁 때문이었다. 사야카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에 거절하려 했지만, 그녀가 초등학교 입학 이전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며, 이 집에서는 무언가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사야카에게 자해의 흔적까지 봤기에 더더욱.
그녀와 함께 출발하여 찾아낸 약도 위치의 기묘한 건물은 아버지의 열쇠로 지하실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집은 '미쿠리아 유스케'라는 소년이 가족과 함께 살다가, 23년 전의 2월 11일 11시 10분에 멈춰진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사야카는 왜 초등학생 이전의 기억을 잃었는지? 23년 전,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 일이 사야카가 기억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 집은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는지? 나는 사야카와 함께 집 안에서 찾아낸 유스케의 일기장 등을 단서로 이 의문을 풀어나가기 시작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1994년 발표 장편으로, 존재를 몰랐던 작품인데 몰입감이 대단합니다. 초등학생 이전의 과거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야카, 그녀의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수수께끼의 열쇠와 약도, 그 곳에 위치한 기묘한 집, 지하실 입구로만 들어갈 수 있고 그 집은 모든게 이십여년 전 어느 날의 11시 10분에 멈춰진 상태였다는 등 도입부부터 아주 흥미로와요. 집 안의 시계가 모두, 심지어 서랍 속에 숨어있던 회중시계조차 11시 10분이라는 시간에 멈춰있는게 드러나는 묘사는 오싹할 정도였고요.
이어서 둘의 조사를 통해 발견한 집의 거주자였던 유스케의 일기, 미쿠리야 씨의 편지 등 여러가지 단서가 수집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수수께끼가 연달아 등장합니다. 이게 만약 연재물이었다면 다음 회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을거에요. 덕분에 한 번도 쉬지않고 읽어갈 수 있었습니다.

추리물로서도 나쁘지 않습니다. 일단 굉장히 공정하다는게 눈에 뜨입니다. 이 집과 미쿠리야가(家), 그리고 사야카의 과거에 대한 단서는 주인공과 사야카의 조사를 통해 독자에게도 동일하게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스케의 일기와 아버지 미쿠리야의 편지 등은 주인공들이 입수하여 접하는 시점부터가 독자들과 똑같아요. 주인공들만 더 알고 있는 정보도 거의 없습니다. 사야카는 어린 시절 기억이 없고, 둘 모두 이 집에 처음 온 셈이니까요.
트릭도 괜찮습니다. 일기와 편지를 통해 구성된 일종의 서술 트릭인데 깔끔하며, 설득력도 높거든요. 진상은 유스케의 아버지인 줄 알았던 미쿠리야 씨는 알고보니 할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조부모가 손자를 거두어 키우면서, 손자로부터 아버지처럼 여겨졌다는건 아주 드문일도 아니죠. 사야카의 정체가 유스케의 동생 히사미였다는 극적인 반전 역시 이 진상을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일기 속에서 히사미를 '차미'라는 애칭으로 부를 때, 이를 주인공들이 고양이로 착각했다는 전개도 자연스러웠고요.

또 거의 이야기 전체에 걸쳐 집 한채와 남녀 주인공 2명만이 등장하는데, 이 만큼의 몰입감을 전해주는 전개도 대단했습니다. 스토리텔러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단, 무대 장치가 간단하고 등장 인물이 적더라도 장면 장면의 임팩트가 있는 작품이라 연극에는 별로 적합하지는 않아 보였고, 저예산 영상물로 찍으면 아주 좋겠더군요. 왜 아직 영상물이 나오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에서 판권을 사서 조금 각색해도 괜찮을 이야기인데 말이죠.

그러나 책 뒤 해설에서 '어정쩡하다'고 하는 - 2012년 독자 일만명이 뽑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인기 랭킹에서 36위를 차지하는 등 - 이유도 대충은 이해가 됩니다. 서술 트릭 전성기에 야심차게 도전한 결과물로 보이는데, 억지가 지나쳤어요.
집의 정체가 가장 억지입니다. 크노소스 궁전과 같은, 죽은 당시를 재현해 놓은 일종의 무덤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현실적이지 않지요. 크노소스 시대도 아니고, 현대 시점에서 구현하기에는 지나친 낭비니까요. 별로 큰 돈은 들지 않았다고 설명은 되지만, 지하실에다가 방 여러 개를 갖춘 단독 건물을 세우고, 그 안의 인테리어도 모두 갖춘다고 하면 억 단위의 돈은 들었을겁니다. 만든 뒤의 관리 문제도 크고요. 또 이야기를 살펴보면, 할머니는 이 비극적인 범죄를 비밀로 하고 싶어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렇게 비싸고 거창한 무덤을 만든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사야카의 기억 상실과 자녀 학대가 과거의 끔찍한 성추행과 오빠의 죽음으로 빚어졌다는 진상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물론 유스케가 밤에 우연히 들었다는 그 '소리'가 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된 건 맞고, 굉장히 충격적인 진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 - 성추행, 그리고 오빠의 죽음 - 이 기억 상실을 불러왔다는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야카의 자녀 학대를 이 설정에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써 먹은 건 큰 잘못이에요. 어찌되었건 자녀 학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으니까요. 성추행과 자녀 학대 설정은 빼고 <<몽환화>>처럼 풋풋한 두 남녀의 모험물로 그려내는게 더 나았을 거에요. 결말도 해피엔딩으로 말이지요.
덧붙이자면, 사야카의 아버지가 비록 할머니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한 들, 자신들의 소중한 딸이 그 집 아들이 일으킨 사고로 죽은건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자기 딸 대신 원수의 집 딸을 대신 딸처럼 키웠다? 제대로 키울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서라도, 친 딸이 죽어서 제대로 슬퍼하거나 공양조차 하지 못한다는걸 받아들인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할머니까지 죽었다면 모를까, 엄연히 육친이 살아있잖아요. 비밀을 지키고 싶었다면 조손祖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서 새롭게 삶을 이어가도 되고요. 이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서술 트릭물이 대체로 억지스럽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재미 면에서는 나무랄데 없는 좋은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길이도 적당하고요. 코로나 사태로 외출이 어려운 요즈음, 집에서 가볍게 읽어보실 읽을거리로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0/03/18

동토의 여행자 - 다니구치 지로 / 홍구희 : 별점 3점

동토의 여행자 - 6점
다니구치 지로 지음, 홍구희 옮김/샘터사

다니구치 지로의 단편집. <<송화루>>를 제외하고는, 대자연을 다룬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는게 특징. 그 중에서도 <<동토의 여행자>>와 <<하얀 황야>>, <<산으로>> 3편은 추운 설산을 배경으로 한 남자들의 생존기이자 모험물입니다. 이야기는 비교적 평범하지만 다니구치 지로의 압도적인 화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네요.
대체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동토의 여행자>>
북아메리카 사금 채취자인 잭 런던과 프레드 톰슨은 식량 마련을 위한 사냥 중에 눈 속에 고립된다.
그들을 구해준건 원주민 카르나트 족 노인 징 하. 그는 순록 사냥을 떠난 동족들 뒤에 남아 홀로 수호신 '북녘의 신령' (하얀 말코손바닥 사슴)을 찾는다.
그의 모습을 보고 감화받은 잭은 금 채취를 그만두고 홀로 캘리포니아에 돌아온다.

실제로 있었음직한, 잭 런던의 미발표 유고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그려진 작품.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숭배해야 한다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 잘 드러난 수작입니다.
딱 한가지, 극한의 추위에서 처절하게 생존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조금 약했다게 조금 아쉽네요.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으로 <<테러호의 악몽>> 느낌의 생존기를 그렸더라면 굉장했을텐데 말이죠. 그래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하얀 황야>>
헨리와 빌은 알프레드 경의 시체를 고향으로 운구하기 위해 여섯마리 개가 끄는 썰매로 동토를 가로지른다. 그러나 이리떼가 덮쳐 개가 한마리씩 사라져가고, 결국 빌 마저 잡아 먹히는데...
잭 런던의 <<하얀 이빨>>을 재구성했다는 단편. 혹한 속에서 습격해오는 이리떼와 인간의 처절한 승부를 그리고 있습니다. 도망친 암캐를 이용하여 썰매개를 꾀어내는 이리 때의 전략 등, 사람을 능가하는 모습은 흡사 크리쳐 물을 연상케 하더군요. 잠도 자지 못하고 끝까지 맞서 싸우는 헨리의 처절한 사투도 잘 표현되어 있고요.
비교적 단순한 이야기 구조, 그리고 마지막 헨리가 살아난건 순전히 구원군이 운 좋게 도착했을 뿐이라는 결말은 조금 시시하지만 전체적으로 박진감이 넘치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으로>>
마타기 (사냥꾼) 군파치는 아들 도키조오와 영양 사냥을 나섰다가 거대한 곰에게 아들을 잃고 사냥을 그만둔다. 그러나 그 곰이 다시 나타나고, 군파치는 복수를 위해 홀로 사냥을 다시 떠난다.<<골든 카무이>>의 초반부가 떠오르는, 일본인 사냥꾼의 곰 사냥 이야기. 진한 액션, 모험물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거친 자연과의 한판 승부라는 점은 이전 단편들과 같지만, 인간이 이긴다는 차이가 두드러지네요. 그래도 길들인 사냥개 시로의 도움으로 이긴다는 결말은, 자연과 먼저 친해져야 이길 수 있다는 뜻이라 생각됩니다. 뻔하긴 하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가이요세 섬>>
1958년 8월, 부모님의 이혼으로 큰 외삼촌이 사는 상잉 마을에 맡겨진 초등학교 3학년 다카시는 큰 외삼촌이 돌보는 아예 누나와 함께 자멱질에 나섰다가 조난당해 가이요세 섬으로 난파하는데...
어린 시절, 극적이면서도 두근거리는 여름 방학 체험담. 모험물인줄 알았는데 로맨스물이었고, 심지어 해피 엔딩이라는게 의외였던 소품.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어린 시절의 모험이라는게 지금 돌이켜보면 다 그런 셈이겠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송화루>>
송화루라는 오래전 유곽이었던 싸구려 아파트에 머무는 '나' 는 문득문득, 송화루가 얼마나 기묘한지 새삼 느끼게 되는데...
다니구치 지로 본인이 모델인듯한 자전적인 이야기. 기묘한 숙소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갑니다. 기묘하다는 것도 유령이 나온다던가 하는게 아니에요.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느껴진다던가, 천장에 난 창을 통해 누군가 쳐다보는 듯한 공포감이 든다던가 하는 정도라 일상계에 가깝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다 주인공의 상상일 뿐이라 딱히 특별한 이야기가 없다는건 단점입니다. 차라리 친동야 (거리에서 선전, 광고하는 사람), 호스티스 등 역시나 독특한 마을 주민들이 등장하는 부분이 더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클로로포름>>이라는 다니구치 지로의 미발표 단편은 정말로 궁금하네요. 과연 어떤 작품이었을지...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다로 돌아가다>>
고래학자인 '나'는 이누이트의 전설에 따라 늙은 흑고래 올드 딕의 최후를 추적한다. 고래의 무덤이 실존하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드러내는 또 다른 작품. 짤막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5점.

2020/03/15

눈보라 체이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눈보라 체이스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스노보드 마니아 다쓰미는 취업 전 마지막 겨울을 원없이 불태우려 니가타의 스키장으로 향한다. 출입 금지 구역에서의 짜릿한 스노보딩도 잠시, 도쿄로 돌아오니 갑자기 살인 용의자가 되어 경찰이 집을 에워싸고 있다. 다쓰미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지만, 법학도 친구 나미카와는 상황의 법리적 심각성을 알리며 당장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야 한다고 재촉한다. 다쓰미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유일한 사람은 살인사건 발생일 새벽, 스키장에서 우연히 만난 미인 스노보더 한 명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두 사람은 다른 동아리 부원의 차를 빌려, 그녀가 '홈그라운드'라고 언급한 전국 최대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으로 무작정 떠난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히가시노 게이고의 '설산 시리즈'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시리즈물답게 네즈와 치아키 등 전편의 주요 인물들, 그리고 주요 무대였던 산게쓰 고원 스키장과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이 다시 등장합니다. 다카노 세이야가 가이드로 등장하고, 세이야 부모님이 운영하는 전편의 주요 무대였던 카페 <뻐꾸기>와 세이야의 동생 유키의 재등장도 반가왔습니다. '뻐꾸기' 명물 프랑크푸르트 소세지도 빼 놓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전작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주인공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패트롤 네즈가 아니라 대학생 다쓰미가 친구 나미카와거든요. 이 둘이 함께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줄 증인인 '여신'을 찾아 경찰을 피해가며 스키장을 누비는게 핵심입니다. 덕분에 전작들과 같은 거대한 위협에 맞서는 모험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작과 다르기에 이 작품만이 가지는 장점도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쓰미와 나미카와를 추격하는 고스기 형사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부하의 요청과 반론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무리한 명령만 남발하는 무능력한 관리자의 표상인 난바라 계장과 와와다 형사과장의 등쌀에 치이는 전형적인 소심남으로 보이지만, 뒤로 가면 갈 수록 멋지고 중후한 인물로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계기는 오랫만에 스키를 타면서 열정이 되살아났기 때문으로 묘사되는데, 이 부분도 시리즈 핵심 소재와 일맥상통하는 맛이 있어서 좋았어요. 스키장의 실력자 유키코와의 장년의 로맨스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묵직하면서도 은근하고, 또 스키를 타면서 느껴지는 활기도 넘치고, 여러모로 마음에 드네요.
또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이라는 무대를 전작인 <<질풍론도>>보다 더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돋보입니다. 이는 드넓은 스키장에서 '여신'을 찾기 위한 다쓰미와 나미카와의 고민과 행동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냥은 도저히 찾을 수 없으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스키장 패트롤 대장 네즈, 백컨트리 투어 가이드 다카노 등의 도움으로 그녀가 나타날만한 이런저런 포인트를 짚어 조사하고 기다리는 과정이 나름 합리적이며, 정말로 스키장에 대해 엄청나게 많이 조사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상세하거든요.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는건 아니고, 추격 모험 활극에 가깝기는 하지만,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 있다는 점도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돋보입니다. 대표적인건 현장의 기묘한 상황을 눈치채고 진범이 누군지를 추리해 내는 과정입니다. 주인공 일행은 피해자 후쿠마루씨가 섹시 탤런트 DVD를 보는게 취미였는데, 그걸 볼 때마다 죽은 아내에게 미안해서 불단을 닫았지만 범행 현장 사진의 불단은 열려 있었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이를 통해 현장에서 DVD를 재생시킨건 후쿠마루 씨가 아니며, 범인은 DVD를 바꾸어 재생해야 했고 이유는 원래 DVD가 범인에게 불리한 것이었다고 추리하게 되지요. 추리를 통해 결국 범인을 체포하는데 성공하고요 원래 보던 DVD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을테고, 사전에 이런 정보를 독자에게 제대로 제공해 주지 않은건 공정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추리 자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름 정통 추리물 느낌도 전해줄 정도거든요. 비교적 초반에 다쓰미에게 증인을 찾아 나설것을 조언하는 법대생 나미카와의 조언, 그리고 다쓰미의 알리바이가 나름 밝혀진 뒤 나미카와마저도 공범으로 몰리는 전개 역시 추리물 느낌이 물씬 나고요. 다쓰미의 알리바이를 나미카와가 조작해 주었다는 논리인데 둘의 도주와 맞물러 설득력이 높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애써 찾은 증인인 '여신'이 임신 탓에 스노보드를 마음껏 탈 수 없다는 설정도 괜찮았어요. 둘이서 백방으로 노력해도 찾기 힘들었던 이유로 설득력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이 임신 설정을 마지막 결혼식 연출과 네즈와 치아키 커플이 연결되는 결말로 이어가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아주 좋은 작품이다라고 이야기하기는 아쉽게도 무리입니다. 일단 독자는 다쓰미가 범인이 아니라는걸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스키장을 배경으로 청춘들의 사랑과 고민이 함께 그려지는 탓에 서스펜스를 느끼기 어려운 탓이 큽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절박한 상황에서 증인을 찾아 나선다는 <<환상의 여인>> 만큼의 절박함이 보였어야 하는데, 두 대학생은 그런 마음이 별로 없어 보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추리물, 스릴러라기 보다는 청춘 로맨스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전개 면에서 편의적인 부분이 많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네즈도 그렇고, 스키장의 유력자 유키코도 그렇고, 심지어 고스기 형사마저도 다쓰미가 결백하다고 생각한다는건 특히나 터무니 없어요. 아무리 관상이 좋고, 말주변이 좋아도 그렇지 경찰이 유력 참고인의 말을 믿고 시간을 준다는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죠. 증인을 찾기 어렵게 꼬아놓은 캐릭터 설정도 오버스러웠고요. 네즈에다가 경찰까지 도움을 준다면, 차라리 방송이라도 하는게 낫잖아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취미 생활처럼 힘을 빼고 가볍게 쓴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킬링 타임용 읽을거리로는 나쁘지 않은 수준입니다. 읽으실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