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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7

법정의 마녀 - 다카기 아키미쓰 / 박춘상 : 별점 1.5점

법정의 마녀 - 4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박춘상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에게 한 실업가가 찾아온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의 처리를 햐쿠타니에게 의뢰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의심하던 대로 살해당하고, 범인으로 세 번째 부인인 아야코가 지목된다. 햐쿠타니 센이치로는 그를 독살했다고 자백한 아야코의 변호를 위해 법정에 선다. 승산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 사건의 행방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다카기 아키미쓰의 장편 법정 추리물. <<파계재판>>의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로. 재판을 통해 유력한 용의자의 혐의를 벗기는 햐쿠타니 센이치로의 활약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다카기 아키미쓰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이 작품 포함 국내 출간된 전작을 읽었을 정도로요. 당연히 절판된 작품 포함으로, 절판작 입수에 정말 많은 공을 들였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전 절판된 작품들에 비하면, 새로 출간된 작품들은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별로네요. 이유는 추리적으로 너무나 엉망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본격물의 대명사같은 작가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에요. 특히 진범이 드러나는 과정은 아주 실망스러워요. 작위적일 뿐 아니라, 공정하지도 않거든요. 아야코의 자백 조서를 조작했다는 증거인 지장의 하얀 흔적은 그 전까지는 독자에게 전혀 제공되지 못한 정보이며, 이와시게 형사가 가와세 스미에와 밀회를 즐겼으며, 진범인 스미에를 돕기 위해 조서를 조작했다는 사실 역시도 법정에서의 깜짝쇼로 밝혀지기 이전에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일주일동안 사립탐정을 써서 이와시게를조사한 결과라는데, 독자에게 그 전까지는 일언반구도 없어요. 그 전에 스미에와 이와시게가 통화하는 등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수상함을 드러내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죠.
추리적으로 이렇게 엉망인 탓에, 법정에서의 한 판 승부도 부각되지 못합니다. 마지막 변론에서 햐쿠타니가 몰래 수집했던 깜짝 증거와 증인을 들이미는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앞 부분의 재판 과정은 아야코의 혐의를 짙게 만드는 정도의 역할만 수행할 뿐이지, 햐쿠타니의 변론에 도움을 주지는 별로 도움을 주지도 않고요.

또 이야기 전개도 억지스러워요. 초반에 가와세가 왜 햐쿠타니에게 찾아와서, 자기가 살해당할 것 같다며 죽은 뒤 후일을 부탁하는 설정부터가 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기분이 이상하다, 불길하다는 정도로 변호사에게 이런 고백을 털어놓지는 않으니까요. 만약 이런 고백을 털어놓은 직후 죽는다면 크리스티의 단편인 <<그린쇼의 아방궁>>에서처럼, 의뢰인이 진짜 가와세였는지부터 의심해야 할 겁니다.
아울러 진범 스미에가 가족 외 다른 손님들까지 방문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복수가 목적이고, 딱히 새어머니 아야코에게 불만이 없다면 사건이 은폐될 수 있도록 몰래 범행을 저지르는게 나았을테니까요. 실제로 범행 직후 아야코와 장남 고이치는 주치의 모리나가 박사를 설득해서 자연사로 위장하려고 했었죠. 햐쿠타니가 없었다면 성공했을테고요.

등장 캐릭터들도 별로입니다.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가와세 가문의 묘사 때문이에요. 물론 모든 집안 식구들이 비정상은 아닙니다. 장남인 고이치는 어엿한 직장인으로 비교적 상식인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다른 가족들도 겉으로는 꽤 괜찮은 모습들을 연기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런 점에서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그려낸 모든 가족들이 이상하고 심지어 광인인 콩가루 집안 설정보다는 조금은 나은 편입니다. 그러나 가장인 가와세의 비정상적인 성욕은 요코미조 세이시 못지 않습니다. 비록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의붓딸을 강제로 범했다는 사건 동기는 그 정도가 지나치죠. 결과적으로는 요코미조 세이시보다 나을게 하나도 없는 셈이에요.
제목인 '법정의 마녀'인 가와세 아야코에 대한 묘사는 한 술 더 뜹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웃으면 안되는 상황에서도 웃는' 모습 때문에 마녀라고 생각하는 여인이죠. 그러나 햐쿠타니에 의해 그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탓에 항상 웃는다는 사실을 밝혀지고, 작품은 그녀가 마녀가 아니라 무고한 성녀라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저는 종교적인 이유로 웃으면 안되는 상황에서도 웃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이러한 급작스러운 캐릭터 변화는 이야기에 도움을 주지도 않아요. 그녀가 범인이 아니면 결국 가와세 가족 중 한 명이 범인일 뿐인데 후보도 너무 부족하고요. 작가도 급작스럽게 스미에를 진범으로 내세우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건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울러 책의 완성도 면에서는 항상 높은 점수를 주어 왔던 엘릭시르의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치고는 이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법정의 마녀'를 곧이곧대로 그린 일러스트가 형편없는 탓이에요. 공들여 그리기는 했지만 작품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더군요. 차라리 <<구석의 노인 사건집>>에서처럼 등장하는 주요 소품을 정밀묘사한 일러스트를 수록해주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 읽기라는 목적이 없었더라면 1점을 주었어도 충분할 졸작입니다. 비교적 고전이지만 나름 현대적인 설정과 전개를 갖추어 좋아하는 작가인데, 그 역시도 요코미조 세이시 등이 지배하던 당대 분위기와 아주 분리된 작품을 쓰지는 못했다는걸 확인한 정도만이 수확입니다. 작가의 팬이시라도 이 작품만큼은 피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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