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반전까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년전 헤어졌던 옛 연인 사야카가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의 아버지 유품 속 약도와 열쇠의 수수께끼를 함께 풀자는 부탁 때문이었다. 사야카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에 거절하려 했지만, 그녀가 초등학교 입학 이전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며, 이 집에서는 무언가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사야카에게 자해의 흔적까지 봤기에 더더욱.
그녀와 함께 출발하여 찾아낸 약도 위치의 기묘한 건물은 아버지의 열쇠로 지하실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집은 '미쿠리아 유스케'라는 소년이 가족과 함께 살다가, 23년 전의 2월 11일 11시 10분에 멈춰진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사야카는 왜 초등학생 이전의 기억을 잃었는지? 23년 전,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 일이 사야카가 기억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 집은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는지? 나는 사야카와 함께 집 안에서 찾아낸 유스케의 일기장 등을 단서로 이 의문을 풀어나가기 시작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1994년 발표 장편으로, 존재를 몰랐던 작품인데 몰입감이 대단합니다. 초등학생 이전의 과거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야카, 그녀의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수수께끼의 열쇠와 약도, 그 곳에 위치한 기묘한 집, 지하실 입구로만 들어갈 수 있고 그 집은 모든게 이십여년 전 어느 날의 11시 10분에 멈춰진 상태였다는 등 도입부부터 아주 흥미로와요. 집 안의 시계가 모두, 심지어 서랍 속에 숨어있던 회중시계조차 11시 10분이라는 시간에 멈춰있는게 드러나는 묘사는 오싹할 정도였고요.
이어서 둘의 조사를 통해 발견한 집의 거주자였던 유스케의 일기, 미쿠리야 씨의 편지 등 여러가지 단서가 수집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수수께끼가 연달아 등장합니다. 이게 만약 연재물이었다면 다음 회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을거에요. 덕분에 한 번도 쉬지않고 읽어갈 수 있었습니다.
추리물로서도 나쁘지 않습니다. 일단 굉장히 공정하다는게 눈에 뜨입니다. 이 집과 미쿠리야가(家), 그리고 사야카의 과거에 대한 단서는 주인공과 사야카의 조사를 통해 독자에게도 동일하게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스케의 일기와 아버지 미쿠리야의 편지 등은 주인공들이 입수하여 접하는 시점부터가 독자들과 똑같아요. 주인공들만 더 알고 있는 정보도 거의 없습니다. 사야카는 어린 시절 기억이 없고, 둘 모두 이 집에 처음 온 셈이니까요.
트릭도 괜찮습니다. 일기와 편지를 통해 구성된 일종의 서술 트릭인데 깔끔하며, 설득력도 높거든요. 진상은 유스케의 아버지인 줄 알았던 미쿠리야 씨는 알고보니 할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조부모가 손자를 거두어 키우면서, 손자로부터 아버지처럼 여겨졌다는건 아주 드문일도 아니죠. 사야카의 정체가 유스케의 동생 히사미였다는 극적인 반전 역시 이 진상을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일기 속에서 히사미를 '차미'라는 애칭으로 부를 때, 이를 주인공들이 고양이로 착각했다는 전개도 자연스러웠고요.
또 거의 이야기 전체에 걸쳐 집 한채와 남녀 주인공 2명만이 등장하는데, 이 만큼의 몰입감을 전해주는 전개도 대단했습니다. 스토리텔러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단, 무대 장치가 간단하고 등장 인물이 적더라도 장면 장면의 임팩트가 있는 작품이라 연극에는 별로 적합하지는 않아 보였고, 저예산 영상물로 찍으면 아주 좋겠더군요. 왜 아직 영상물이 나오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에서 판권을 사서 조금 각색해도 괜찮을 이야기인데 말이죠.
그러나 책 뒤 해설에서 '어정쩡하다'고 하는 - 2012년 독자 일만명이 뽑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인기 랭킹에서 36위를 차지하는 등 - 이유도 대충은 이해가 됩니다. 서술 트릭 전성기에 야심차게 도전한 결과물로 보이는데, 억지가 지나쳤어요.
집의 정체가 가장 억지입니다. 크노소스 궁전과 같은, 죽은 당시를 재현해 놓은 일종의 무덤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현실적이지 않지요. 크노소스 시대도 아니고, 현대 시점에서 구현하기에는 지나친 낭비니까요. 별로 큰 돈은 들지 않았다고 설명은 되지만, 지하실에다가 방 여러 개를 갖춘 단독 건물을 세우고, 그 안의 인테리어도 모두 갖춘다고 하면 억 단위의 돈은 들었을겁니다. 만든 뒤의 관리 문제도 크고요. 또 이야기를 살펴보면, 할머니는 이 비극적인 범죄를 비밀로 하고 싶어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렇게 비싸고 거창한 무덤을 만든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사야카의 기억 상실과 자녀 학대가 과거의 끔찍한 성추행과 오빠의 죽음으로 빚어졌다는 진상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물론 유스케가 밤에 우연히 들었다는 그 '소리'가 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된 건 맞고, 굉장히 충격적인 진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 - 성추행, 그리고 오빠의 죽음 - 이 기억 상실을 불러왔다는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야카의 자녀 학대를 이 설정에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써 먹은 건 큰 잘못이에요. 어찌되었건 자녀 학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으니까요. 성추행과 자녀 학대 설정은 빼고 <<몽환화>>처럼 풋풋한 두 남녀의 모험물로 그려내는게 더 나았을 거에요. 결말도 해피엔딩으로 말이지요.
덧붙이자면, 사야카의 아버지가 비록 할머니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한 들, 자신들의 소중한 딸이 그 집 아들이 일으킨 사고로 죽은건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자기 딸 대신 원수의 집 딸을 대신 딸처럼 키웠다? 제대로 키울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서라도, 친 딸이 죽어서 제대로 슬퍼하거나 공양조차 하지 못한다는걸 받아들인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할머니까지 죽었다면 모를까, 엄연히 육친이 살아있잖아요. 비밀을 지키고 싶었다면 조손祖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서 새롭게 삶을 이어가도 되고요. 이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서술 트릭물이 대체로 억지스럽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재미 면에서는 나무랄데 없는 좋은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길이도 적당하고요. 코로나 사태로 외출이 어려운 요즈음, 집에서 가볍게 읽어보실 읽을거리로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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