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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2

희망장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3.5점

희망장 - 8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의 시리즈 탐정 중 하나인 스기무라 사부로가 등장하는 단편집.

미야베 미유키는 유명세에 비하면 제가 많이 읽은 작가는 아닙니다. <<화차>>는 제 올타임 베스트 10에 언제나 꼽을 수 있는 걸작이고, 다른 작품들도 대체로 평균 이상이었지만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는 않더라고요. 가장 큰 이유는 대체로 500페이지는 훌쩍 넘는 대장편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두께만 봐도 먼저 질리는 느낌이거든요. 에도 시대물은 재미있긴 했지만 별로 취향이 아니었고요.
이 책 역시 거의 500페이지에 이르는 두께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외부 활동이 극히 적어진 요즈음, 이런 책이 집에서 진득하게 읽기에는 오히려 좋겠다 싶어서 읽기 시작했지요.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고 괜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재미의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는 탐정과 일반인의 경계에 묘하게 걸쳐있으며, 추리력과 더불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관찰력을 선보이는 주인공 스기무라 사부로입니다. 스기무라 사부로는 <<탐정 사전>>을 통해 존재를 알게된 뒤,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만 해 왔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더욱 감개무량하네요. 평상시 흠모하던 스타와 우연히 동석하여 식사를 했는데, 스타가 밥값까지 내 준 격이랄까요. 두 번째는 평균 이상되는 추리물로서의 완성도고요.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평균 이상의 좋은 작품들이었습니다. 전부 평균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전작을 꼭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성역>>
이혼한 독신남으로 사립 탐정과 조사로 먹고 사는 38살의 스기무라 사부로에게 기념할 만한 첫 손님이 찾아온다. 손님은 바로 이웃 맨션 파스텔 다케나카에 사는 독신 여성 모리타. 그녀의 의뢰 내용은 유령의 정체를 밝혀달라는 것으로, 그녀의 아래층에 살다가 사망한 할머니 미쿠모 가쓰에를 꼭 닮은 사람을 보았다는 것. 그런데 가난에 허덕이던 미쿠모 할머니와는 다르게 그녀는 유복해 보였다고 한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조사의 의뢰비는 착수금 5천엔과, 2년 동안의 쓰레기장 청소 당번 대행이었다.

조사 시작과 거의 동시에, 스기무라는 곧 죽을거라는 전화만을 남기고 사라진 미쿠모 할머니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남겨진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이루어진 그녀는 죽지 않았고, 지금 유복해보이는건 뭔가 인생 역전의 계기가 있었다는 추리도 합리적입니다. 옛 주소지에서 연을 끊다시피한 딸 역시 행방불명이라는 건 둘 사이에 뭔가 연결 고리가 있다는걸 암시하고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복권 당첨에 당첨된 할머니가, 딸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둘이 새로운 삶을 찾아 과거를 모두 버리고 떠났다는 결말까지 차분히 이어집니다. 이를 위한 중간중간의 디테일들도 꼼꼼하고요.
38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런데 작중 배경인 2010년에 38살이면, 저와 동갑이네요. 호감도가 더욱 증가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배려를 소중히 여기는 스기무라 사부로도 무척이나 호감가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조금 특이했던건, 불쌍한 할머니를 염려하는 동네 주민의 의뢰와 조사 중 자상한 동네 주민들의 도움을 받는 따뜻한 분위기와 딸인 지독한 이기주의자 미쿠모 사나에의 표독스러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보였던 스타차일드 멤버들마저도 알고보니 착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라는게 밝혀집니다. 이들에 비하면 사나에는 그야말로 자기만 아는 압도적인 악역이에요. 문제는 사나에같은 인물이 우리 주위에서 더욱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겠죠. 할머니의 무사는 축하할 일이지만 이런 딸과 함께 산다면, 결말은 안 봐도 뻔할 거라는게 무섭게 다가옵니다.

스타차일드 멤버인 벨과 사나에의 악연, 그로부터 비롯된 가노쿠라 풍아당과의 관계는 사족이었다 생각되지만, 이 정도면 아주 좋은 작품이죠.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희망장>>
세상을 떠난 무토 간지는 죽기 전, 양로원 관계자와 아들에게 과거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아들 아이자와는 스기무라에게 이 사실의 진위여부를 밝혀줄 것을 부탁한다. 주변인들을 통해 밝혀진건, 간지 씨가 쇼와 50년 8월, 젊은 여성이 습격당해 살해된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었다.

아이자와의 말에 따르면, 무토 간지는 데릴사위로 들어간 아이자와 가문으로부터 절연당한 뒤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외도 탓으로, 그가 특정 여성에게 발끈하여 살해했을 수도 있다는건 충분히 가능했을거라고 설명되지요. 하지만 스기무라의 조사로, 그가 '사람을 죽였다'고 직접 표현한 적은 없다는게 곧바로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진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를 밝혀내기 위해 성실하게 발품을 팔아 단서를 찾는 스기무라 사부로의 조사 활동이 정겹더군요. 오래전, 35년 전 거주했던 흔적을 찾아 거리를 헤메는데, 나름의 노하우도 눈에 뜨였고요. 음식점, 이발소, 미용실, 세탁소나 술가게 등 배달도 하는 업종의 가게 등을 돌아다니지만, 바나 스낵에는 기대지 않는다는게 그것이죠. 바둑 모임이나 장기 살롱은 있으면 좋은 정보원이지만 마작이나 파친코는 그 반대이고, 편의점은 별로 도움이 안되지만 학원은 도움이 된다던가, 파출소에는 들르지 말아야 한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류의 조사를 한다면 참고할 만한 정보로 보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스기무라 사부로의 조사로 35년 전 강간 살해 사건의 범인과 무토 간지가 같은 아파트 '희망장'에 살았다는게 밝혀집니다. 처음 방문했던 술가게에서 정보를 얻었더라면 이후의 조사는 별로 필요가 없었지만, 이런 시행착오가 오히려 현실감을 더해준 것 같네요. 또 이 과정에서 탐정은 아무리 일상계라도 비정할 수 밖에 없다는걸 전해주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에게, 차가운 질문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이유인데, 굉장히 와 닿더라고요.

그리고 이어지는 스기무라의 추리에 따른 가설도 그럴듯합니다. 35년 전 사건의 진범이 무토 간지였거나, 진범 가야노 지로의 아주 친한 지인이었을거다라는 가설이죠. 당연히 35년전이라고 해도, 경찰을 우습게 보면 안되니 두 번째 가설이 정답이고요. 그렇다면 왜 무토 간지가 죽기 전 양로원에서 이상한 말을 했느냐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스기무라가 양로원 청소 스태프가 청소할 때 스포츠 타월을 접어 바닥에 까는 걸 보고 알아채게 됩니다. 무토 간지는 살인범을 본 적이 있어서, 그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알았던거죠. 그래서 양로원 청소 스태프 하자키가 살인을 저질렀다는걸 알고 그걸 은밀히 드러내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최근에 일어났던 성폭행 미수 살인사건과, 35년전인 쇼와 50년 8월 사건 두가지가 마지막에 맞물리는 전개가 정말 멋지네요. 일평생 고독하지만, 정직하고 한결같이 살아온 무토 간지의 매력도 빛을 발하고요.

하지만 욕심이 조금은 지나친 느낌입니다. 35년전 피해자 다나카 유미코의 동생을 이야기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그녀는 원래부터 재였다. 사람의 모습을 한 재다."와 같은 멋드러진 묘사에 비하면 등장해서 하는게 없거든요. 묘사도 담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멋이 넘치는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4.5점! 지금도 좋은 작품이지만 불필요한 요소를 들어내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아니면 다나카 유미코 사건도 더 깊숙히 파고들어 더 긴 호흡의 이야기로 전개하던가요. 그랬다면 별점 5점도 충분했을텐데, 약간 아쉽습니다.

<<모래 남자>>
2011년 2월 6일, 스기무라 사부로는 야마나시에서 신세를 졌던 나카무라 점장을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이혼 후 야마나시에서 점장과 일할 때 엮였던, 불륜으로 도주한 마키타 히로키 사건을 떠올린다.

스기무라의 이혼 후 야마나시에서의 삶, 가키가라 스바루를 만나 조사원으로 일하게 된 계기 등이 차분히 펼쳐지는 작품. 호토 가게 '이오리'의 주인 마키타 히로키가 이노우에 다카미와 불륜 끝에 사랑의 도피를 한 사건의 조사와 추리와 함께 진행됩니다.

남편 마키타 히로키는 과거 문제아로 아버지에게 절연당했다, 지금 그의 사진은 남아있는게 없다, 사진을 확인조차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당연히 과거 문제아 가가와 히로키는 지금의 마키타 히로키와는 다른 인물이라는게 쉽게 떠오릅니다. 다카미가 문제아 시절 과거를 노리코와의 친분 덕분에 알게 되었고, 돈이 궁해진 지금에 와서 그 정보를 협박의 도구로 썼으리라는 추리도 상상력의 범주 안에 있고요. 이를 마키타 집에서 풍겨온 염소 냄새, 집 근처에 묘지가 있다는 상황 등과 연결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는 오싹합니다.
협박을 '공포'의 문제로 풀어나가는 감각,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피해자들의 공포, 후회를 드러내는 솜씨도 발군입니다.

하지만 이노우에 다카미가 살아있었으며, 이 모든건 히로키의 부탁으로 벌인 연극이었다는 진상 이후부터는 시시해집니다. 히로키가 지나치게 착한 탓에 벌어진 일이라서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요. 한 번 희생양은 영원히 그 속박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로 느껴졌거든요. 같은 이유로 진짜 히로키로부터 위협받던 가짜가 진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건 의외이기는 했지만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모든걸 알게된 다카미가 어머니와 함께 사과했다는 후일담은, 결국 히로키의 연극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결말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카미의 철없는 악의가 결국 모든 걸 망쳐버렸다는 뜻이니까요. 게다가 본인은 잘못을 느끼지 못하며, 잘못을 깨닫고도 결국 민폐만 끼치고 말았다는 점에서 아예 사악함을 뿜어냈던 <<성역>>의 사나에보다도 더 질이 나빠요.

결론내리자면, 사건보다는 스기무라의 과거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던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도플갱어>>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난 뒤 얼마 되지 않은 2011년의 어느날, 스기무라 사부로에게 아스나라는 고등학생 소녀가 찾아와, 어머니와 교제하고 있던 앤티크 샵 사장 유타카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후쿠시마 사태를 일으킨 도호쿠 대지진을 소재로 한 작품.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태가 일본인에게 얼마나 공포였는지가 작품에서 은근하게 표현되는게 이채로왔습니다. 스기무라 사부로의 입을 통해 '일본은 키를 잃고 폭주할 것이다, 우리는 망망대해를 절망 속에서 떠돌 것이다'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대표적이죠. 소시민과 상대적인 약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미야베 미유키의 특성이 잘 드러난 말이기도 했고요.

핵심 사건인 유타카 실종 사건의 추리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지진으로 실종된 줄 알았지만 사실은 살해되었다는건 좀 뻔한 이야기죠. <<브라운 신부>>에서도 시체를 숨기려면 전쟁을 일으키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도 동기가 그의 결혼 결심이었다는건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결혼을 결심하면 프로포즈를 해야 하고, 프로포즈를 위해 고가의 반지를 구입했으며 이를 범인이 유타카를 살해하고 빼돌렸다는 진상은 충분히 합리적이니까요.

그러나 전반적으로 작위적인 전개가 눈에 거슬립니다. 애초에 아스나가 스기무라에게 실종 조사를 의뢰한 것 부터가 작위적이에요. 스기무라가 그 의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조사를 한 것도 석연치는 않고요. 작 중 묘사되듯 '자원 봉사'로 할 일은 아니잖아요. 이런 실종은 전문 단체에 의뢰하는게 맞는 상황이니까요.
마쓰나가가 유타카를 살해한 직후, 대형 재해가 때마침 벌어진 것 역시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재해가 일어난 후, 유타카가 프로포즈를 결심하고 (내가 그녀를 지켜주겠어! 같은 느낌으로), 그 탓에 마쓰나가와 트러블이 일어났다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또 사부로가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 된 계기인 아스나를 괴롭히는 나쁜 친구들이 사건에 엮인 과정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단서를 끄집어 내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한 억지스러운 느낌이 강했어요. 이 친구들이 등장하느니, 마쓰나가가 아스나에게 직접 연락하여 사귀자고 한 뒤, 그 징표로 비싼 반지를 선물한다는 식으로 풀어나갔더라면 더 어땠을까 싶네요.

명백한 살인 사건을 스기무라 사부로가 해결하는 정통 추리물로,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본격물에 가까운 작품이지만 그만큼 본격물이 현대 사회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경찰도 아니고, 정식 탐정도 아닌 스기무라 사부로 수준에서는 더욱 한계가 느껴질 수 밖에 없지요.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처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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