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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6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1) - 아토다 다카시


A 사이즈 살인사건 - 아토다 다카시 : 별점 3점

이 책은 대략 13년 쯤 전에 원서로 읽었었습니다. <<나폴레옹 광>>으로 유명한 쇼트쇼트의 대가 아토다 다카시 유일의 본격 추리 소설 단편집입니다. 1978 ~ 79년에 '월간소설'에 연재되었던 이야기들로 모두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사이즈 살인사건'은 단편집 표제작이자, 각종 설정과 이야기 구조를 확립하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추리적인 완성도도 개중 높은 편이고요. 코로나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번역도 손을 대게 되었네요.

의역으로 가득찬 졸역이지만, 심심하신 분들께 위안거리가 될까 싶어 창피함을 무릅쓰고 올리니, 부디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길이가 길어 세 편으로 나누어 올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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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외승경(世外勝境)'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낡은 문기둥에 쓰여져 있는 글자이다. 바로 옆에까지 빌딩이 세워진 절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수행자들의 관습이려나? 아니면 이 문을 세웠을 무렵은 일대가 훨씬 속세를 벗어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석문을 지나면 앞쪽에 본당이, 오른편 나무문 안쪽에 주지 스님 가족이 머무는 안채가 있다.
"실례합니다."
"예"
까까머리에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수행승이 나타나 큰절을 올렸다.
"이쪽, 2층으로 올라오세요."
미리 전화로 연락해 놓았던 덕분인지, 2층의 손님 방은 이미 패널 히터로 따뜻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벌써 바둑판까지 놓여 있었다.
사무라 에이스케는 크고 푹신한 방석에 앉아, 수행승이 가지고 온 차를 입에 머금었다.

묘법사의 주지 스님과 알게 된 건, 순직한 친구의 묘가 묘법사에 있기 때문이었다. 가끔 성묘를 오면서 스님과 얼굴을 익혔고, 어느 날부터 함께 바둑을 두는 사이가 되었다. 사무라는 서른, 스님은 쉰을 서너 살 넘은 나이로 나이 차는 크지만 묘하게 마음도 잘 맞았다. 바둑 솜씨는... 사무라는 자신이 조금 더 낫다고 믿지만, 스님은 동의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주지 스님의 경력까지는 사무라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묘법사는 스님의 생가는 아니며, 스님은 데릴사위이다. 이만한 사찰의 주지인 만큼 불교 대학에서 전문 수업을 배우고 어느 정도 수행도 쌓았겠지만, 처음부터 승직에 도전한 사람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하고 싶은 대로 대충 살아왔지만, 도중부터 무언가의 사정으로 스님이 되었고, 지금은 어느새 주지 스님의 위치라 사뭇 신묘한 척 불도를 설파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어, 오래 기다렸지?"
주지 스님도 검은 터틀넥 스웨터 차림으로 나타나 말했다. 스님이라기보다는 변두리 가게의 장인 같은 모습이었다.
"춥지는 않나? 저녁 식사는? 이미 했다고? 그럼 술이나 한잔할까?"
이 스님은 동네 카바레 소문까지 통달하고 있을 정도이니, 술이나 회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이거 참, 그동안 소식이 뜸했네요."
"바빴나 봐?"
"조금..."
"자네가 한가한 게 세상에는 좋은 일이긴 한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스님은 바둑판을 잡고 끌어당겼다.
살인 담당 형사와 주지 스님의 조합,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의외로 가까운 조합이다. 형사도 스님도 시체가 없으면 장사가 시작되지 않으니까.
"선을 가려볼까."
스님이 백돌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사무라는 흑돌 두 개를 판에 올렸다. 스님이 집은 돌을 세어보니 열세 개였다. 사무라가 규칙에 따라 백을 잡았다. 수행승이 술과 안주를 쟁반 위에 얹고 와서 둘 곁에 내려놓았다.

사무라가 묘법사에 오는 건 바둑을 두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주지 스님을 상대로 조용한 방에서 바둑을 두며 맛있는 술을 대접받는 건, 방문 목적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니, 이왕이면 그 목적만으로 묘법사의 문을 넘고 싶었다. 그러나 수사 1과의 형사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호텔 저수조에서 젊은 여자의 시체가 나왔어요."
승부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 사무라는 본격적으로 오늘의 용건을 내비쳤다.
"매춘으로 잠깐 쉬었다 가는, 그런 곳인가?"
스님은 바둑판을 노려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도대체 스님의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죽으면 꼭 부검해 보고 싶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해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으니 말이다.
"아니요, 에메랄드 호텔입니다. 초일류라고는 할 수 없어도 어엿한 호텔이에요."
"알아, 알아, 그곳이라면. 이런! 실수를... 잘못 두고 말았네."
사무라는 스님만큼 재주가 있는 건 아니라서, 찬찬히 생각하고 돌을 놓은 뒤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호텔 뒤편에 직원용 출입구가 있고, 직원은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 층으로 갑니다. 그 출입구를 지나면 풀숲에 오래된 저수조가 있어요. 누군가 풀어둔 금붕어가 있고 초록색 이끼가 떠 있지요."
"깊은가?"
"2m 정도에요. 돌무더기를 묶어서 가라앉혔습니다."
"사인은?"
"교살입니다. 목을 졸랐어요."
"죽인 뒤에 시체를 저수조 속에 빠트렸다는 이야기인가?"
"맞습니다."
"시체를 발견한 건?"
"호텔 보이입니다. 좀처럼 사람이 가지 않는 곳입니다만, 3월 3일 아침에 저수조 표면이 얼어붙었다는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보이가 대나무 장대로 얼음을 깨려다가 수조 바닥에 이상한 게 있다는 걸 눈치챈 거죠."
"얼음은 그날 아침에 언 걸까?"
"아니요, 3일 아침은 그렇게 춥지 않았습니다. 추웠던 건 2일 아침으로, 결빙 상태를 보면 얼음이 언 건 2일 아침으로 보입니다. 그늘이라 쉽게 녹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여자가 죽은 건?"
"아마도 1일 오후입니다. 1일 정오 조금 전에 집에서 나갔다고 하거든요."
"그럼, 범인의 범위도 그렇게 넓을 것 같지는 않은데? 범행 시간, 시체를 수조에 감춘 시간 모두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이고, 그나저나 자네가 묘한 이야기를 꺼낸 탓에 바둑이 엉망이 되어 버렸네."
"던지시겠습니까?"
"응, 이번 판은 내가 졌네. 그럼 아까 그 이야기, 재미있어 보이는데 더 들려주지 않겠어?"

사무라가 스님의 기묘한 재능을 깨달은 건 서로 바둑을 두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사무라가 맡았던 클럽 마담 살인 사건이 피해자의 문란한 남자관계 때문에 도무지 진도가 나아가지 못하던 중이었다. 사무라는 주지 스님과 바둑을 두던 중 무심코 사건 이야기를 잠깐 꺼냈었다. 며칠 뒤 사무라가 다시 방문하자, 스님은 사건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점을 사무라에게 물어보고 나서, 이내 훌륭한 추리를 들려주었다. 사무라는 약간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스님의 추리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에 그 선을 따라 수사를 진행했고, 결국 범인을 체포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스님의 추리대로였었다.
그 후 비슷한 경험을 한두 번 더 겪고 난 지금은, 사무라도 완전히 벽에 부닥친 사건의 경우는 묘법사를 찾아가 바둑을 두며 스님의 의견을 듣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 사건은 발생 당초에는 그다지 어려운 사건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N 대학의 4학년생인 에토 준코, 시체 발견 장소는 스님에게 이야기한 대로 에메랄드 호텔 직원용 출구 뒤쪽에 위치한 낡은 저수조 안, 발견된 것은 3월 3일 아침 11시경.
에토 준코는 N대학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악단 '빅&큐티'의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악단 이름의 유래는 멤버 중 남성은 모두 덩치가 크고, 여성은 작은 것에서 유래했다. '빅&큐티'는 아마추어 악단이기는 했지만, 매니저인 타무라의 수완이 좋았고 멤버 각자의 실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저런 클럽과 호텔에서 출연 제의가 많았다. 에메랄드 호텔에서도 3월 1일부터, 즉 에토 준코가 살해되었다고 추정되는 날 밤부터 7층 라운지에서 '빅&큐티'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나?"
스님은 두꺼운 술잔에 입을 대고 몸을 약간 비스듬히 눕히며 들이켰다.
"네, 10일까지요. 클라리넷이 하나 부족하긴 했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어쨌든 예정대로 끝내기는 했답니다."
"그럼 우선은, 그 죽은 아이 이야기부터 해 보시게."
"네, 뭐라고 해야 하지? 집은 특별히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아요. 보통의 중산층입니다. 어머니가 계모고요."
"집에서는 걸림돌 취급받고 있었나?"
"특별히 심한 취급을 받은건 아니지만... 어머니 쪽 이복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으니까요. 피해자에게는 그렇게 아늑한 집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친구들이나 남자 친구는?"
술이 텅 빈 것을 깨달은 스님은 벽에다 툭툭 손을 치면서 말했다. 절 주변이 조용하기 이를 데 없어서, 스님이 손을 치는 소리는 아래층까지 잘 울려 퍼졌다. 수행승이 술 한 병을 들고 와 문을 열었다. 이런 고요한 상황에는 '세외승경'이라는 말도 과장은 아니고 잘 어울린다.
"악단 동료들과의 교류가 대부분이었어요. '빅&큐티'에는 남자 멤버 몇 명인가가 있는데, 그들 중 두 세 명과는 꽤 깊은 관계까지 간 모양입니다."
"그건 육체관계를 의미하나?"
"그럼요. 요즘 여대생들은 금방 거기까지 가 버리니까요."
"같은 악단 내에서, 이 남자, 저 남자와 그런 관계를 맺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여러 남자와 몰래 사귀는데에는 엄청나게 능숙했던 모양이더라고요. 비밀리에 말이죠."
"밝혔나 보지?"
"음, 피해자가 그런 걸 좋아했을 수도 있지만, 계모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외로움을 많이 탔다더군요. 하여튼, 악단원 중에서도 적어도 세 명과는 깊은 관계가 있었어요."
"호오, 그 세 명은?"
"피아노의 이케다, 기타의 야마우치, 그리고 같은 클라리넷의 오오이다입니다. 셋 다 이미 끝난 관계라곤 하지만요."
"그 셋이 제일 수상한가?"
"하지만 이케다와 야마우치의 알리바이는 탄탄합니다. 오오이다도 마찬가지에요. 손쓸 방법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호텔 내부 사람이나 떠돌이의 범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건 좀 성급한 생각 같은데. 그 여자애 이름이 뭐였더라?"
"준코, 에토 준코입니다."
"그래, 그래, 준코가 살해된 건 1일의 몇 시쯤일까?"
"부검 결과로는 오후 한 시에서 세 시 사이에요."
"흠, 그날 밤 연주하기 위해 악단 멤버가 모두 모인 시간은? 준코가 그렇게 서둘러 호텔로 올 필요가 있었나?"
"네, 그게 문제에요. 매니저의 증언으로는 호텔 집합 시간은 오후 7시 30분까지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모두 그 시간 즈음에 모여 있었고요."
"왜 그녀만 그렇게 이른 시간에 호텔에 갔을까? 호텔이 아니라 저수조 옆이었을지도 모르지만... "
"네...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있었다는 등, 그 이유에 대해 아직 밝혀진 사실은 없습니다."
"그녀는 뭐라고 하고 집을 나왔다고 하던가?"
"언제나처럼 별말 없었다고 하네요. 그냥 저녁밥은 필요 없다 정도였답니다."
"호오, 어쨌건 악단 멤버들의 알리바이는 모두 확실한 것 같군. 자네의 우울한 얼굴을 보니."
"그 말 그대로입니다. 우울한 건 마작 그룹 때문이기도 하고요."
"마작 그룹?"
"학생은 편해서 좋아요. 4학년이라 이제 졸업식을 기다릴 뿐이라 그런지, 악단 멤버 중 이케다, 야마우치, 다니키, 노무라, 이 네 사람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야시로 집에 모여 철야 마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28일 밤부터.... 야시로는 외삼촌 댁에 하숙하고 있는데 외삼촌이 여행을 가서 안 계신 틈에 학생들을 불러 모은 거죠."
"이케다, 야마우치, 다니키, 노무라, 거기에 야시로라.... 마작은 넷이서 하는 것이지 않은가?"
"보통 이런 경우 한 판이 끝나면 꼴등이 빠집니다. 꼴등은 잠을 자거나, 옆에서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죠."
"그럼, 도중에 집을 몰래 빠져나간 사람은 없다, 그런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 집은 어디인가?"
"우라와에서도 제일 깊숙이 들어간 곳입니다. 에메랄드 호텔까지는 편도로도 두 시간 가까이 걸릴 겁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마작 그룹 멤버들이 서로 입을 맞추고 범행을 벌였을지도....."
"음,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닐 거에요. 지금 말한 멤버 중 한 명인 노무라가 제 조카거든요."
"이런, 이런"
"이상한 형태로 관계자가 되어버린 터라 조금 난감하고, 또 우울합니다만.... 조카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녀석입니다. 거짓말 따위 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에요. 하물며 살인 사건에 관계되었다면 말이죠. 그런 일을 숨겨둘 수 있을 리가 없어요. 그래서 이 멤버들이 28일부터 1일 오후 4시 넘어서까지 마작을 하고, 저녁에 모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야시로의 승합차를 타고 제시간에 에메랄드 호텔까지 온 건 일단 틀림없는 사실일 겁니다. 확신합니다."
"그렇군.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 조카가 한 말은 맞는 말이겠지. 공동 모의한 범행은 없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날 무엇을 했을까...."
스님은 취기 탓에 살짝 붉어진 이마를 두드리며 바둑돌을 다시 잡았다. 자연스럽게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시체가 발견됐을 때부터 범인의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에토 준코의 교우 관계 쪽, 특히 '빅&큐티'의 멤버. 다음은 호텔 직원 혹은 관계자, 그리고 마지막은 우연히 호텔 근처에 온 방랑자.
두 번째, 세 번째의 가능성이 완전히 부정된 것은 아니지만, 사무라는 애초부터 첫 번째 가능성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낮의 호텔은 - 특히 직원 출입구 근처는 - 결코 사람의 출입이 적지 않다. 젊은 여자를 우연히 살해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에토 준코는 왜 예정보다 5시간이나 빠른 시각에 호텔로 왔을까? 누군가 지인과 약속이 있었던 게 아닐까? '빅&큐티'의 멤버는 에토 준코를 제외하면 매니저 겸 사회자 타무라와 마작 그룹 멤버인 이케다, 야마우치, 타니키, 노무라, 야시로, 드럼의 우치노, 기타의 오오스기, 뭐든지 능숙하게 연주하는 오오이다, 그리고 여성 멤버인 클라리넷의 치노와 플루트 겸 보컬인 와카이의 11명이다. 에토 쥰코가 오쿠보의 집을 나온 건 3월 1일 정오 조금 전이고 그 이후의 행동은 알 수 없다. 클라리넷을 들고나왔으니 그대로 저녁 공연에 참여할 생각이었음은 틀림없다. 클라리넷은 핸드백과 함께 호텔에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중간의 하수도에서 발견되었다.
에토 준코의 사망 추정 시각이 오후 1시부터 3시 사이이니, 그녀는 집을 나간 후 수 시간 사이에 살해당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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