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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7

잠자는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 김윤정 : 별점 2.5점

잠자는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국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영국으로 온 그웬더는 남편 자일스가 오기 전, 보금자리로 힐사이드 저택을 구입한다. 그녀는 집에 대해 알아갈 수록, 자신이 그 집에 대해 이미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동안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남편의 사촌인 유명 소설가 레이먼드 웨스트 부부를 방문한다. 그 곳에서 미스 마플을 만난 그웬더는, 유령에 대한 연극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후 미스 마플에게 급작스럽게 떠오른 자신의 기억을 털어놓는다. 그것은 그녀가 오래전 힐사이드에서 헬렌의 시체를 보았던 기억이었다.


미스 마플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인터넷 도서관에서 e-book으로 대여해 읽었죠.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에서의 별점은 3.5점입니다. <<공략>>에서 이야기하듯, 미스 마플의 존재감이 상당히 희미하다는게 특징입니다. 실제로 사건에서 많은 역할을 하는건 그웬다와 자일스 부부거든요. 그웬다가 떠올린 과거의 기억에 대한 진상을 둘이 함께 파헤친다는 내용이니까요.

하지만 미스 마플의 비중과는 별개로, 이야기는 재미있고 쑥쑥 읽힙니다. 특히 초반부, 그웬다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 묘사가 왠만한 호러물 저리가라 할 정도라 쉽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겨자색 침실 벽을 '새빨갛고 작은 개양귀비꽃과 수레국화가 번갈아 피어 있는 무늬의 벽지'로 바꾸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뒤, 침실에 있는 오랫동안 열지 않은 붙박이 장을 열고 난 뒤의 묘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붙박이장 안 쪽만 겨자색으로 덧칠이 되지 않고 '새빨갛고 작은 개양귀비꽃과 수레국화가 번갈아 피어 있는 무늬의 벽지' 상태로 남아있었거든요. 아, 이건 정말 영상으로 봤다면 아주 기가 막혔을거 같아요.

미스 마플도 비중에 비하면 활약은 확실해서 팬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명탐정으로서의 역할부터 제대로에요.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추리는 물론, 세세한 추리들 모두 돋보입니다. 그웬더가 기억하는, 선장이 2명이었다는 말을 통해 두 번의 긴 항해가 있었다고 추리하고, 난간 위가 아니라 난간 사이로 홀을 내려다 보았다는 말을 통해 그녀가 어린아이였을 때의 기억이라고 추리하는 식인데 모두 합리적이에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웬더를 죽이려는 케네디 박사를 층계참으로 뛰어 올라와 비눗물을 뿌려서 퇴치한다는 액션까지 선보입니다. 할머니 특유의 친화력과 풍부한 휴먼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는 모습도 인상적이고요.

추리물로서도 꽤 볼만한 편입니다. 대단치는 않아도 설득력 넘치는 트릭들이 연이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헬렌의 메모가 진짜인지 필적 감정을 할 때, 케네디 박사가 제공한 편지와 필적 견본 모두 본인이 써서 제공한다는게 첫번째 트릭입니다. 덕분에 메모는 진짜인걸로 일단 판명나죠. 간단하면서도 실현 가능한 트릭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듭니다.
릴리가 왜 케네디 박사가 알려준 열차가 아니라 한 시간 전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서, 케네디 박사가 알려준 역 전의 역에서 내렸는지에 대한게 두번째 트릭도 괜찮습니다. 진상은 박사가 살해한 뒤 원래 주었던 편지를 없애고 수정된 시간과 장소가 적힌 편지를 남겨놓았을 뿐이죠. 덕분에 경찰은 이 상황을 릴리가 박사를 만나기 전, 누군가를 협박하러 갔다고 오판합니다. 그럴듯하죠?
헬렌이 옷을 가져갔지만, 드레스는 가져갔지만 드레스와 셋트인 벨트와 슬립은 두고 가는 등 조합이 안 맞는다는걸 드러내는, 여성 특유의 관찰력이 돋보이는 장면도 좋습니다. 미스 마플의 추리는 아니고 하녀 릴리가 알아낸 것이지만요.

아울러 살인 사건에 관여하지 말라는 충고도 돋보였어요. 문제가 되었던 사건이라면, 지역 토박이인 정원사 등이 몰랐을리 없다. 즉, 모두에게 숨긴 완전범죄였기 때문에, 지금 그 사건을 파헤치는건 현명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크리스티 여사의 또다른 작품인 <<누명>>이 연상되는 충고죠. 모두가 잊기를 원하고 잊혀졌다면, 그대로 놔 두는게 맞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네요. 참고로 잠자는 살인이라는 멋드러진 제목은 이 충고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오래전 살인 사건인데, 아무도 모르고 있는 잠자는 살인으로, 자게 내버려 두는게 낫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 이야기와 별 상관은 없지만 딜머스에 가기 위해 주치의 닥터 헤이독에게 바닷가 휴양을 조언해 달라고 우길 때의 티격태격도 재미있었습니다. 미스 마플이 과거의 살인을 파헤치러 가기 위해 "딜머스에서 2, 3주일 지내는 것은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겠죠?"라고 물어보자 "당신의 임종이 가까워 올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식인데, 닥터 헤이독이 이렇게 기지가 넘치고 위트있는 인물인지는 몰랐네요.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읽기에는 쉽다는 문제가 좀 컸어요. 부부가 미스 마플의 충고를 무시하고,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새어머니 헬렌의 오빠 케네디 박사를 만나는 초반부에서 모든 진상이 드러나는 탓이죠. 케네디 박사는 새어머니 헬렌은 다른 남자와 도주했으며, 아버지 핼러데이는 급격히 건강이 좋지 않아져서 요양소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즘 독자들은, 이런 증언은 피해자는 새어머니이며, 켈빈 핼리데이 소령이 아내를 살해한 뒤 시체를 처리하고 도망갔다고 오해하기 만들기 위함이라는걸 금방 눈치챌 겁니다.
그래서 소령이 범인이 아니라면, 소령이 케네디 박사에게 찾아가 살인을 고백하고 함께 돌아왔을 때 시체는 어디갔을까요? 또 헬렌이 다른 남자와 떠났다고 믿게끔 짐을 챙기고 그에 대한 메모를 남긴건 누구일까요? 그리고 헬렌이 살아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 몇 개월 뒤 전해졌다는 편지는 누가 보냈을까요? 이 조작을 한 인물은 동일 인물일겁니다. 자일스의 말처럼 핼리데이가 범행을 저질렀지만 은폐할 속셈이었다면, 케네디 박사를 찾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핼리데이는 살인을 했을지언정, 은폐 시도와 관련된 조작을 하지는 않았다는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케네디 박사일 수 밖에 없죠. 현장에 있었고, 현장 조작 및 시체 은닉, 핼리데이의 증언 위조 등이 가능했던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동기는 이 단계에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여동생에 대한 집착 같은 이유였을테고요. 헬렌이 남자와 떠난다는 메모는 나중에라도 준비할 수 있으니, 시체를 어떻게 없앴는지만 고민하면 됩니다. 이건 아마 변경된 집의 구조와 관련이 있는게 뻔하며, 결국 기묘한 정원 계단을 파헤치면서 사실로 밝혀집니다.

이렇게 초반에 주어진 정보만으로 진상은 모두 추리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케네디 박사 등장 이후에는 부부가 헬렌과 관련되었던 3명의 남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혐의를 씌우는 쪽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초반에 던져준 정보가 너무 확실하며, 이 세 명 중에서도 살인을 실제로 저지를만한 인물은 월터 페인밖에 없어서 눈길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어스킨 소령이 헬렌과 사랑에 빠졌다 한들 그는 유부남이라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고, 재키 애플릭은 사랑을 훼방놓은 케네디 박사와 월터 페인을 살해하면 모를까, 헬렌을 살해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또 지역 내 명사인 의사와 변호사 월터 페인은 그렇다쳐도, 어스킨 소령과 재키 애플릭, 어스킨 소령 부인은 밤에 무덤을 파는게 레어니에게 발각되었다면 빠져나기가 쉽지 않았을거에요. 심지어 재키는 식사에 초대도 받지 못할 정도의 불청객이었죠.
이렇게 범인 후보를 늘리기 위해 월터 페인을 거미에 비유하고, 그가 어린 시절 장난감을 망가트린 형을 거의 죽일 뻔 했다는 등의 묘사를 덧붙인다던가, 어스킨 소령 부인의 극렬한 질투심을 표현하는 등으로 수상쩍게 만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억지스러운 묘사는 오히려 범인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더 강하게 들게 만들더군요. 제가 추리 소설을 너무 많이 읽긴 많이 읽었나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용의자를 늘리는 전개 탓에 일관성도 좀 없어요. 예를 들면, 미스 마플은 한 사람의 증언만 들으면 안되고, 여러 명의 증언을 모아야 한다는데 그 말에 따르면 헬렌은 문란한게 맞습니다. 동네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문란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지막에 그녀는 그냥 호기심 많은 처녀였을 뿐이라고 얼버무리는건 여러모로 힘들어 보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있게 읽었지만, 시대를 초월할만큼 좋은 작품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발표된지 80여년 정도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미스 마플의 팬이시라면 읽어보셔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사님의 다른 걸작들부터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여사님이 직접 뽑은 본인 작품 베스트 10이 더 좋은 선택일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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