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04/01/30

롱 바케이션~!

이 드라마는 일본 전통 신부복을 입은 여자가 거리를 달려가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 여자는 30살의 모델 미나미(야마구치 토모코)입니다. 시간이 다 되어도 신랑이 오지 않자 본인이 직접 신랑이 살고있는 맨션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 하지만 약혼자는 룸메이트인 음악 교실 선생 세나(키무라 타쿠야 분)만 남겨두고 이미 짐을 싸서 나가버린 상태. 어이없는 약혼자의 배신으로 결혼도 못하고 맨션과 저금한 돈을 모두 포함한 결혼 자금까지 털린 미나미는 참으로 넉살 좋게 세나(키무라 타쿠야 분)의 집에 얹혀 살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세나도 미나미의 뻔뻔하지만 밉지 않은 태도와 딱한 사정에 동거를 허락하게 되고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둘은 동거 생활을 시작하는데 그 생활 속에서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허풍을 떤 사실도 들키고 서로의 성격 차이로 여러 소소한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둘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서로를 위로해주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면서 우정을 쌓아가게 됩니다. 그 와중에 세나가 짝사랑하는 료코와 미나미의 남동생 신지, 미나미의 모델시절 팬이었다는 프로 카메라맨 스기사키상이 등장하고 서로의 사랑이 교차하게 됩니다.

하루에 한두편씩 띄엄띄엄 보다가 드디어 다 보게 된 드라마입니다. 일본 트렌디 드라마의 전설과도 같은 작품이죠^^ (트렌디 드라마가 뭔가 하고 찾아보니 “감성적이고 유행에 민감하고 도시인들의 삶과 사랑을 가볍게 풀어낸 드라마” 라고 하더군요.)

내용은 위의 줄거리처럼 7살이나 연상이며 조금은 대책없고 주책없는 연상녀 미나미의 밉지않은 매력과 조금 얼빠지며 순진한, 연애에 쑥맥인 세나라는 연상녀 : 연하남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사랑 이야기입니다. 데뷰 초기의 히로스에 료코와 마츠 다카코도 조연으로 출연하고(재미있는건 히로스에 료코의 극중 이름이 “다카코”이고 마츠 다카코 극중 이름이 “료코”죠) 다케노우치 유타카도 비중있는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뻔한 내용이지만 상당히 발랄하고 유쾌한 대사들과 상황 설정 (특히 휴대폰이 없던 시대의 아날로그 연애의 맛이란!) 등으로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주제가 “LaLaLa Lovesong”의 매력도 역시 빼 놓을 수 없겠죠.
미나미가 홀로 서기를 하는 것 처럼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세나와 결혼하는 것으로 안정을 찾는다는 어거지같은 해피 엔딩은 조금 불만이지만 뭐 드라마니까....^^

하지만 무려 8년전의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그 격차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방영할 지도 모르겠지만 한번쯤 볼만한 드라마였다고 생각됩니다.

PS : 그나저나…. 미나미에게 청혼하고 자기 아들까지 소개시켜줬다가 딱지맞은 스기사키상이 저는 제일 불쌍합니다. 끝까지 매너를 지키며 행복을 빌어주는 아름다운 중년의 퇴장 모습까지 보여주네요….ㅠ.ㅠ

2004/01/29

Happy SF 03 : 신들의 사회 - 로저 젤라즈니

신들의 사회 - 8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먼 미래의 어느 행성인 이곳에 우주선 “인도의 별”을 타고온 1세대 이주민 중 한명으로 과학 기술로 다들 신으로 군림하던 1세대인들에게 “촉진주의”의 기치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나 패배한 뒤 추방당했던 "샘"을 죽음의 신 “야마-다르마”가 기계장치의 도움으로 부활시킨다. 샘은 몇번에 걸친 전투와 환생 끝에 마지막으로 제 1세대 중 한명이었지만 전 세계를 기독교화 하려는 야심가 “니리티”와 신들의 전쟁에 참전하는데…

뉴 웨이브 SF의 걸작으로 인도신화를 배경으로 한 장대한 서사 SF입니다. 힌두 신화의 신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방대한 세계관과 역사관 속에서 서양인이 잘 이해할 수 없을 불교 사상과 윤회, 전생, “업” 등등의 종교적 요소와 신들의 무기인 “열추적 미사일 = 루드라의 화살”, “우레의 전차 = 공격형 비행선”, 등 같은 SF적인 요소를 잘 결합시킨 작품이죠.

사실 힌두의 신들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싸운다.. 라는 설정은 이제 21세기가 된 지금에는 그다지 특이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공작왕", “3X3 eyes”도 있고, “수라왕 슈라토”도 있고 clamp의 “리그-베다 (성전)” 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의 세계관과 역사관, 설정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냥 단순한 신들의 설정만 빌려와 전투 능력만을 강조한 후대 일본의 여타 작품들과는 달리, 온갖 동양철학과 사상을 집어넣어 방대하면서도 심오하게 묘사하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딱딱하지만은 않고 소설적으로도 굉장히 재미있는 것이, 흡사 무협지를 읽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양한 능력과 기술로 전투를 묘사할 뿐더러 전투 와중에 설법을 교환하는 특이한 장면들이 그러합니다. 목을 조르면서 “아무도 공기를 찬미하는 자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없을 경우를 생각해 보라!” 라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샘이 “불타”의 모습으로 설법을 하는 중간부분까지는 조금 지루하지만 뒷 부분의 전투장면등은 확실히! 재미있습니다.

사람 취향을 좀 타는 책일 수도 있지만 책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너무나도 가볍고 얄팍한 설정의 기존 환타지에 비하면 확실히 무게감이 느껴지는 수작입니다. 물론 저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SF와 환타지를 좋아하시는 장르문학 팬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PS : 번역이 조금 딱딱해서 읽기가 좀 어렵더라고요. 더 부드럽게… 표현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2004/01/25

바리바 / 에메랄드 반지 - 모리스 르블랑 / 성귀수 : 별점 4점

바리바 / 에메랄드 반지 - 8점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까치글방

이 책은 뤼뺑 시리즈 16번째 작품으로 중편길이의 “바리바”와 초단편 “에메랄드 반지”가 수록된 책입니다.
뤼뺑이라는 이름보다는 라울 다브낙 자작으로 활동하는 본편에서는 전작 “바르네트 탐정 사무소”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베슈경감과 다시 컴비를 이룹니다. 덕분에 컴비의 팬으로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어요.

미인 자매 카트린과 베르트낭드는 할아버지로부터 “바리바”라는 지방의 영지를 상속받게 됩니다. 카트린은 어렸을 때 놀던 동산의 버드나무의 위치가 남몰래 바뀌어진 것을 알게 되고 그러한 혼란속에 카트린의 언니인 베르트낭드의 남편 무슈 게르생이 살해됩니다… 라울 다브낙 (뤼뺑)은 조사끝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몽테시외씨가 무언가 “보물”을 만드는 비법을 그 영지에 숨겨놓았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뤼뺑의 사악하면서도 유쾌한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을 뿐더러 나름대로 살인사건과 암호트릭 등 추리적인 재미도 가득하고, 자연현상과 트릭을 이용해서 거대한 고대의 유적을 파헤치는 모험소설적인 재미까지 갖춘 작품입니다.

여러모로 “루팡 3세”라는 일본산 만화의 캐릭터와 굉장히 유사한 느낌인데, (특히나 "카리오스트로의 성") 일종의 암호문에서 뽑아낸 보물찾기라는 소재라던가 주인공의 성격묘사가 상당히 비슷합니다. 물론 후발주자인 “루팡 3세”가 많은 부분을 인용한(혹은 베낀) 것이겠지만 그동안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아서 이러한 뤼뺑의 매력을 모르던 차에 이번 완역으로 뤼뺑이라는 캐릭터의 진면목을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동안은 "괴도신사" 정도로만 알려졌었잖아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결코! 특히 남자나 적에 대해서는! 절대로! 신사가 아닙니다.

뒤에 수록된 초단편 “에메랄드 반지”는 심리적인 트릭을 다룬 단편으로 그다지 설정이나 트릭이 매력적이진 못했지만 서비스 단편으로는 꽤 그럴 듯 했어요.

결론내리자면 뤼뺑의 정수를 뽑은 작품이라 생각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두 작품 모두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는 의미도 크고요. “바르네트 탐정 사무소”도 무척 재미있고 즐겁게 읽었는데 이 책도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전 20권이나 되는 전집을 다 사 모으는 것은 힘들지만 꾸준히 진행해야 겠습니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에요.^^

음양사 - 타키타 요지로

 


우근위부중장(右近衛府中將)인 미나모토노 히로마사(源博雅, 이토 히데아키)는 원령에 씌인 상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음양사인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 노무라 만사이)를 찾아간다. 세이메이의 집에서 히로마사를 맞이한 것은 시키가미(式神)인 미츠무시(蜜蟲, 이마이 에리코). 미츠무시가 눈 앞에서 갑자기 나비로 변신하는 신비한 광경을 직접 목격한 히로마사는 당황하면서도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세이메이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이메이 역시 왕실의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청렴결백한 히로마사에게 끌리는데. 헤이안 시대에는 음양료라는 관청이 존재했다. 음양료는 천황을 보필하는 풍수와 점성술, 퇴마를 관장하는 기관. 이 무렵, 헤이안쿄의 다이리(內裏)에서는 음양두(陰陽頭 : 음양료의 우두머리)인 도손(道尊, 사나다 히로유키)이 주문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도손은 '수도의 수호자(都の守り人)'의 출현을 예언하는데 그것은 천자의 사랑을 받아 임신 중인 좌대신(좌의정에 해당) 후지와라노 모로스케(藤原師輔, 야지마 켄이치)의 딸 히데코(任子)의 뱃 속 아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얼마 후 히데코는 아들을 낳고, 그 아이는 돈페이 친황(敦平親王)으로 명명되는데 친황의 존재는 좌대신 후지와라노 모로스게의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려 놓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딸 스케히메(祐姬, 나츠카와 유이)를 이미 황제에게 바쳐 아들까지 얻게 한 우대신(우의정에 해당) 후지와라노 모토가타(藤原元方, 에모토 아키라)였다. 손자의 장래와 자신의 지위가 위태롭게 된 것이다. 한편 세이메이는 최근 들어 수도 여기저기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어느날 밤, 히로마사는 세이메이를 찾아 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돈페이 친황의 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알려 준다. 이야기를 듣자 세이메이는 곧 친황의 몸에 강력한 저주가 내려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이 저주와 비밀을 풀기 위해 불가사의한 여인 아오네(靑音, 코이즈미 쿄코)를 불러, 미츠무시, 히로마사와 함께 천왕이 있는 다이리로 향한다. 그러나 친황의 몸에 내려진 저주는 세이메이 일행이 앞으로 직면하게 될 사건의 시작에 불과했다…

위의 줄거리를 가진 “음양사”는 2001년도에 제작된 작품으로 TV에서 인기있었던 시리즈를 10억엔이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로 영화화한 것입니다. 이번 설 연휴에 케이블 TV에서 방영해 주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일단 저는 원작만화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세이메이와 히로마사라는 캐릭터의 매력과 더불어 뭔가 허전한 그림이나 이야기, 헤이안 시대의 뭔가 나른한 묘사 같은 것이 잘 어우러진 이색작이죠. 원작자인 “유메바쿠라 바쿠”와 함께 작업한 데즈카 오사무의 며느리로 알려진 “오카노 레이코”의 그림 역시 환상의 컴비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저같은 원작만화의 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러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캐스팅이 완벽한데요, 특히 “세이메이”역의 노무라 만사이(野村萬齊)와 “히로마사” 역의 이토 히데아키는 정말 대단합니다. 노무라 만사이는 일본의 전통예술 중 하나인 교겐(狂言)계의 스타이자 후계자라고 하는데 2차원세계의 세이메이를 정말 말투, 몸짓, 행동 하나하나로 완벽하게 재현해 내고 있습니다. 이토 히데아키 역시 조금 멍청하고 단순한 히로마사역을 잘 소화해 내고 있고요. 그리고 10억엔의 제작비를 들였다는 대작 답게 헤이안시대를 재현한 세트나 의상 등은 상당히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음악이나 미술효과 역시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원작에 비해 스케일을 키운 이야기 탓에 이야기가 갈수록 흔들려 막판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이메이의 눈물을 보여준다던가, 거대한 음모에 비해 너무나도 시시하게 끝나는 악당의 최후, 그리고 제작비에 비해 의아할 정도로 초라한 특수효과나 CG가 아쉽습니다. 스토리 측면에서는 뭐 재밌는 요소도 분명히 있고 억지스러운 것은 아니니 그냥 그렇다고 쳐도 제작비에 비해 초라한 “화면발”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냥 TV드라마로 착각했을 정도였거든요. 더군다나 이 영화의 여배우들은 하나같이 왜 이 모양들인지…..

저 같은 원작팬에게야 물론 좋은 선물이고 노무라 만사이씨의 연기는 만점짜리이지만 영화는 스토리와 비쥬얼 측면에서 사실 많이 부족했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긴 호흡의 장편보다는 차라리 원작의 에피소드를 살린 단편 옴니버스 형식의 TV 시리즈가 더 재미있을 것 같네요.

나름의 재미와 즐거움은 있었지만 이래저래 2% 정도 부족한 영화였습니다.

2004/01/24

찰리 챈, 커튼 뒤의 비밀 - 얼 데어 비거스 / 김문유 : 별점 2.5점

찰리 챈, 커튼 뒤의 비밀 - 6점 얼 데어 비거스 지음, 김문유 옮김/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이 책은 찰리 챈 시리즈의 3번째 장편입니다. 국내에서는 처음 번역되어 나온 것 같네요.

찰리 챈은 세계 명탐정 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명탐정입니다. 특징과 개성이 남다른 고전 황금기 명탐정답게 “중국계”라는 남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소설속에서도 중국 격언과 속담을 남발하며 추리를 펼치죠.

그러나 첫번째 장편 “열쇠없는 집”이나 두번째 장편 “중국 앵무새”는 사실 기대에 미치지는 못 했었습니다. 그래도 정통 황금시대 명탐정이 뭔가 보여주겠지.. 하는 마음에 구입했는데 다행히 전작들보다는 낫더군요.

어느날 저녁, 전 런던 경찰청 수사과장 프레더릭경이 젊은 부호 배리 커크의 파티 중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가 남긴 자료에서 드러나는 미해결 사건들의 실체! 15년 전 인도 페샤와르에서 실종된 18세 여인, 11년 전 니스 극장에서 사라진 여배우, 7년 전 발생한 뉴욕의 유명 여모델 실종사건까지, 이 잇따른 여성 실종사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우연히 사건에 뛰어들게 된 찰리 챈은 11번째로 태어난 아들을 보기 위한 귀가를 뒤로 하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일단 전 영국 런던 경찰청 수사과장 프레더릭경의 살인사건에 관련하여 과거의 여러 미해결 사건들과 수많은 등장인물이 얽히는 이야기 전개가 흥미로와요. 마지막에 밝혀지는 범인도 뜻밖이나 이유와 추론이 꽤 합리적인 편이고요. 덕분에 재미 하나만큼은 상당하여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임에도 한번에 읽어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허나 추리적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점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대강의 스토리만 보아도 15년전, 11년전, 7년전 행방불명 된 여자가 동일인물일 것이라는 필이 팍팍 오거든요….
그것을 풀어나가는 추리 역시도 별다른 논증이나 추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증언에 유지하는 원초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뿐이고요. 이런 점들만 놓고 봐도 동시대의 경쟁자들보다 추리적인 요소는 많이 부족해요.
아울러 정작 사건 해결에는 전~혀 불필요한 묘사가 상당히 많은 것도 거슬리는 점이었습니다. 커크와 모로우 양의 로맨스같은 찰리 챈 시리즈에 빠지지 않는 “로맨스” 부분이 그러하죠. 뭐 이런게 찰리 챈 시리즈의 특징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재미만으로 따지자면 상당히 값어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뒷 커버를 보니 찰리 챈 시리즈 중에서 최고 걸작이라고 하는데 최소한 제가 읽은 작품들 중에서는 제일 괜찮았어요. (그래봤자 3작품이지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곧 미국에서도 루시 리우를 찰리 챈의 손녀로 기용하여 새로운 영화작품이 발표된다는데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기대해 봅니다.

2004/01/23

의혹 - 도로시 L 세이어스 / 김순택 : 별점 2.5점

의혹 - 4점 도로시 L. 세이어스 지음, 김순택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엘러리 퀸도 극찬했다는 걸작 단편 "의혹"과 세이어스 여사의 명탐정 피터 윔지경 단편 7편이 실려있는 단편집. 

"의혹"은 예전에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어서 별로 새롭진 않았습니다. 워낙 잘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비소독살"을 다룬 단편인데 로열드 달이나 스텐리 엘린이 생각날 정도로 서늘한 맛이 제법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귀족탐정 피터경 시리즈는 실망뿐입니다. 트릭도 별로지만 캐릭터가 정이 안 가더군요. 부유하고 돈많고 여자들한테 인기까지 많은 매너 좋은 귀족 탐정이라니.. 하이틴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 탐정같은 설정이라 감정이입이 안되더군요. 세이어스 여사 자신이 불행한 결혼생활때문에 환타지같은 설정을 도입해서 (심지어 피터경은 여류 추리소설 작가 헬리에트와 열애끝에 결혼한다는 설정까지 나옵니다...) 쓴 것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현실성이 부족하네요.

대강의 설정은 '피터 데스 브리든 윔지’라는 거창한 본명을 지녔지만 피터경(卿)이라는 호칭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1890년 15대 덴버 공작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튼학교를 거쳐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해 1차대전에 참전,정보장교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런던 피카딜리 110A플랫의 집에서 부관이었던 번터를 집사로 삼아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낸다.

6피트(약 180㎝)의 신장,소탈해 보이고 유머도 깃들인 인상이지만 별다른 특징이 없는 얼굴이며 식성은 까다로운 편이다. 게다가 식후에는 반드시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있다. 그의 집사 번터가 커피를 아주 잘 끓이는 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외눈 안경과 지팡이를 항상 가지고 다닌다. 단테를 좋아하고,바흐의 작품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즐기는 등 예술가적인 감각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고서 수집,크리켓 등 다양한 방면에 조예가 깊다.

범죄 연구에 취미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어 범죄학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외모와 행동으로 볼 때 전형적인 영국 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귀족답게 윔지 집안의 문장은 눈에 띄는데,검은 바탕의 방패에 쥐 3마리가 달리는 그림이 있고,그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도약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양 옆에는 갑옷을 입은 두 기사가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기사가 발을 디디고 있는 받침대에는 ‘나,윔지를 지키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흐.. 너무 거창하지 않습니까? 재벌 2세 정도라면 모를까.. 귀족탐정이라니...

첫번째 단편 "거울의 영상"은 내장의 위치가 좌우가 서로 뒤바뀐 남자의 이야기인데 트릭이나 설정이 너무 우연에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마법사 피터 윔지 경"은 스페인 시골 산속에 은둔중인 의사와 그 부인의 이야기인데, 피터 윔지경이 순전히 (거의) 돈의 힘으로 사건을 해결할 뿐이고요. 게다가 의사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변화를 (놀랐다는 설정은 있지만) 이야기만 듣고 미루어 짐작하는 묘사는 좀 해도 너무하는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구리손가락 사나이의 비참한 이야기"는 도대체가 말도 안되는 작품이었어요. 일종의 공포-모험소설 분위기인데 왜 피터경이 등장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뭐 설정은 제법 흥미진진했지만 나머지는 다 불만스러웠습니다.
마지막 수록 작품인 "불화의 씨, 작은 마을의 멜로드라마"는 가장 길어서 거의 중편 분량입니다. 유산을 둘러싼 두 아들의 갈등과 유령 마차의 트릭에 관한 이야기인데 꽤 재미있긴 하지만 이왕이면 더 짧게 묘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중간중간 지루한 부분이 제법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 형편없는 것은 아니라서 "도둑맞은 위"는 위트와 재기넘치는 단편으로 피터경을 싫어하게 된 저였지만 이 작품은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목 그대로의 단편인데 좀 직설적이고 쉽긴 하지만 꽤 유머러스한 맛이 좋았어요.
"완전한 알리바이"는 트릭면에서는 가장 뛰어난 수작으로 괜찮은 일종의 장소 이동 트릭이 등장하고요.
"유령에 흘린 경관"은 소품으로 제법 인상적인 트릭을 다루고 있습니다. 피터경의 참견 좋아하는 성격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별로였기에 별점은 2점. 제가 워낙 단편집을 좋아하기도 하고, 피터 윔지경이 추리사에 족적을 남긴 탐정이기도 해서 구입하기는 했는데 실망감이 더 큽니다. "의혹"은 과연 걸작이지만 나머지 피터경 시리즈는 그만한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쉽네요. 개인적으로는 피터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저처럼 좀 고전적인 퍼즐 추리를 기대하고 본다면 실망하실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영국에서는 크리스티 여사와 거의 동급의 인기라던데... 과연 사실인가요?

2004/01/22

라스트 사무라이 - 에드워드 즈윅

 


조국과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터를 누볐던 네이든 알그렌 대위(탐 크루즈). 그러나 남북전쟁이 끝난 후, 세상은 변했다. 용기와 희생, 명예와 같은 군인의 덕목은 실용주의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대 흐름에 밀려 설 자리를 잃게 되고, 그가 참여했던 전쟁의 명분조차 퇴색해버리자 알그렌은 허탈감에 빠진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선 또 한명의 무사가 가치관의 혼란 속에 갈등을 겪고 있었다. 황제와 국가에 목숨 바쳐 충성해온 사무라이의 마지막 지도자 카츠모토(켄 와타나베)가 바로 그. 미국이 신문명의 조류 속에서 변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던 그 시기에 일본의 전통 문화 역시 서양 문물의 도입으로 개혁의 홍역을 앓고, 새롭게 도입된 철도와 우편제도는 사무라이가 수세기 동안 목숨 걸고 지켜온 가치관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츠모토에게 사무라이의 정신이 없는 삶은 곧 죽음이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 알그렌과 카츠모토, 이 두 군인은 서구 열강의 신 문물에 매료된 일본 제국의 젊은 황제가 신식 군대 조련을 위해 알그렌을 초빙하면서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서구화를 가속화 시키기 위해 황제의 측근들은 사무라이 집단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알그렌은 자신이 뜻밖에도 사무라이에 대해 연민과 동질의식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는다. 신념과 무사정신으로 무장한 사무라이의 모습이야말로 한때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두 시대와 두 세계가 거세게 충돌하는 이 낯선 세계에 던져진 알그렌. 그는 군인의 명예심 하나로 자기의 앞길을 헤쳐나가는데…


요약하자면, 인디언 살육에 앞장선 추억땜에 술에 절어살던 알그렌 대위가 폼나게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끼어든 사무라이, 부시계급의 기득권 확보를 위한 남의 나라 전쟁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이 남의 나라에 있던 사무라이라는 소재를 미화한 방식이 엄청납니다. 근면성실에 명예를 존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을때도 시를 읆어주고 두목 카츠모토는 어디서 배웠는지 알 수 없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고….특히나 전투에 패한 후에 할복하여 죽어가는 카츠모토를 향해 군대가 무릎을 꿇는 장면! 에 이르러서는 실소가 나오더라고요. 이게 무슨 만화도 아니고… 끝 부분에는 천황조차 사무라이 정신에 감화되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외국 사절을 꾸짖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영어를 잘 했던가? 마지막에 알그렌이 켄신처럼 마을에 돌아가 숨어살았다는 설정까지 살짝 보여주며 영화가 막을 내립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알그렌. 그 동네 남자들은 거의 다 죽었으니 여자들은 모두 너의 차지가 되겠구나.

일단 이 영화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톰 크루즈를 기용한 일본영화”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까지 미화시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더라고요. 우리도 비슷한 시기에 유학의 거두로 을사조약에 항의하여 제자와 친구 유생들을 데리고 70대 노령에 궐기한 의병대장 최익현 선생님 같은 훌륭한 분이 계신데 고작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고자 내란이나 일으킨 인물을 모델로 이렇게 남의 나라에서 막대한 돈을 들여 이런 영화를 만들어 주다니 일본이 부럽습니다.

영화에서 사무라이의 우두머리로 나오는 카츠모토는, 아마 “사이고 다카모리”를 모델로 한 것 같습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에게 힘을 실어 주었지만 구 귀족층을 대표하며 개혁 관료파와 대립하던 인물이었죠. (영화의 오무라 대신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지였던 개혁파 관료 오쿠보 도시미치를 모델로 한 듯 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한 것이 “정한론”, 즉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만큼 우리로서는 달가운 인물은 아니죠. 이 영화의 전쟁은 관료파의 독재를 타파하자고 일어난,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동한, 1877년의 “세이난 전쟁”, 마지막으로 사무라이(부시)계급이 최후의 저항을 했던 이 전쟁을 무대로 한 것 같습니다. 사무라이 계급의 권한 철폐, 단발령 등의 시기도 1871년이라니 얼추 시기가 비슷하네요. 하지만 모델과 시기를 빼고는 거의 전부가 왜곡된, 미화된 역사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도 돈은 많이 들인 영화답게 여러 세트나 배경묘사, 화려한 의상들, 그리고 “글로리”같은 전쟁영화를 찍었던 에드워드 즈윅 감독 답게 몇 번의 전투장면은 볼 만 합니다. 톰 크루즈나 다카쿠라 켄의 연기도 무척 좋고요. 무엇보다 다카쿠라 켄이라는 배우의 카리스마는 끝장입니다.

하지만 위에 이야기 한대로 이야기의 무대나 설정 같은 것이 서양애들한테는 모를까… 우리한테는 그다지 와 닿을 수 없는 소재였던 것 같습니다. 일본말로 하자면…^^ “후까시”가 잘 나타나 있는 영화랄까요… 보는 동안은 제법 즐거웠지만 보고 난 후에 가슴에 담아둘 만한 영화는 절대 아니군요. 저는 알그렌 보다는 차라리 “켄신” 녀석이 더 마음에 듭니다.

2004/01/20

사고뭉치! 피스 전기 만물상

타카가야라는 작은 마을을 무대로, 젊어서는 NASA 등에서 연구활동을 하다가 정착하여 전기 만물상을 운영하는 아버지 피스 칸타로, 그리고 아버지 못지 않은 천재 발명광 피스 켄타로 부자를 주인공으로 원래 스파이였던 엄마 사치코 여사와 컴퓨터 천재인 여동생 노리코, 막내 코스케로 구성된 피스 가족, 그리고 켄타로의 여자친구 리본소녀 모모코나 P국의 스파이로 피스전기를 감시하는 아이짱, 아즈컴의 후계자 레이코, 자전거포 아들 노부와 애완동물 가게의 이누마루 등과 같은 주변 인물들과의 이야기와 여러 발명품들을 다양하게 그리고 있는 명랑 과학 만화입니다.

“근미래의 발명품”들이 주 소재인 만큼 어떻게 보면 "도라에몽"과 조금 유사하긴 한데 도라에몽 보다는 더 현재 시점에 가까운 상태에서 만화가가 그릴 수 있는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다 세련되고 과학적인 아이디어들이라고나 할까요… 아이보 같은 로봇 애완견 “파트라슈”나 만능 가사 도우미 로봇 “잡일군”, 물이불 같은 것은 시판해도 좋을 것 같더라고요.

아동만화답게 특별한 악역은 등장하지 않지만 빌 게이츠를 패러디 한 듯한 범 지구적 대 기업 “아즈컴”과의 매상 경쟁이나 마을 사람들과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들, 그리고 매회마다 등장하는 기발한 이런 저런 새로운 발명품들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만화입니다.

저는 심각한 것, 우울한 것을 별로 즐기지 않습니다. 영화도 즐겁게 보고 나올 수 있는 것이 좋고 책도 그렇고 만화책도 그렇죠. 이 책이 비록 좀 유치하고 수준낮아 보일 수도 있지만 전 읽으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전 24권 완간되었는데 전반부는 이미 절판되었네요. 제가 못 구한 뒷부분 3권을 빨리 구해 봐야 겠습니다. 참고로, 작가 노다 타츠키가 그린 불쌍한 밑바닥 클럽 축구 만화 "Go!Go! FC 오렌지"도 재미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즐기실 수 있을겁니다.

2004/01/19

13의 비밀 - 조르주 시므농 / 이가형 : 별점 3점

13의 비밀 - 6점 조르주 심농 지음, 이가형 옮김/해문출판사

국내에 간만에 번역되어 나온 시므농의 작품집이네요. 앞 부분의 13의 비밀은 이른바 “조셉 르보르뉴의 13가지 사건파일”이라는 단편시리즈였고 뒷 부분에는 유명한 메그레 경감 시리즈 중편인 “제 1호 수문” 이라는 작품이 실려있는 중- 단편집입니다.

조셉 르보르뉴 (애꾸눈)라는 별명의 중년 남자가 신문 등에 실리는 사건들을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하는 13편의 단편 시리즈는 개인적으로 무척 신선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르블랑 같다고나 할까요.. 그동안 조금은 문학적이고 무거운 분위기라 생각해왔던 시므농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순수한 추리 퀴즈 같은 트릭이 넘쳐나는 시리즈였습니다.
13편의 단편 중에서 저는 기발한 사기극의 일종인 “3장의 렘브란트 그림” 과 범인 찾기 놀이인 “아스토리아 호텔의 폭탄”, 르보르뉴의 과거가 밝혀지며 상당히 반전의 묘미가 뛰어난 “황금 담뱃갑” 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뭐.. 트릭적으로 그다지 기발하거나 완벽한 형태는 아니지만 독특한 묘미들이 느껴져서 좋았고요.

그리고 중편 “제 1호 수문”은 뤼뺑과 쌍벽을 이루는 프랑스의 명탐정 “메그레 경감” 시리즈입니다.
어두운 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노선장이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진다. 살려달라는 울부짖음, 노선장을 구해낸 사람들은 또 하나의 우윳빛 몸뚱이를 물 속에서 발견하고 기절할 듯 놀란다. 그는 다름 아닌 마을의 유력자 '에밀 듀크로'였다! '에밀 듀크로'의 살해 미수를 파헤치기 위해 투입된 은퇴를 며칠 앞둔 '메그레 경감', 그리고 그로 인해 탐욕과 야욕의 범죄 심리가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어떤 범죄가 있고, 그 범죄에 대한 알리바이나 트릭을 파헤친다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이 아닌 인간 심리를 다룬 범죄소설 같습니다.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에밀 듀크로라던가 갓생 영감같은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특히 탁월하고, 주인공인 메그레 경감도 어떤 단서를 놓고 추리한다기 보다는 심증에 의한 압박으로 죄를 고백하게 만드는 그러한 인물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추리소설로서의 짜임새는 조금 떨어지고 메그레 경감도 왠지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벌어지는 사건들이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스토리의 짜임새라던가 탁월한 문학성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인간 드라마가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약간 하드보일드 소설 같은 분위기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모파상의 작품이 떠오르더군요. 무엇보다 시므농이라는 작가의 문체나 묘사가 너무나 탁월해서 다른 단점을 다 덮어버리기도 하고요.

결론내리자면 이 책의 모든 중, 단편은 걸작은 아니지만 가작은 되는 괜찮은 소품이었습니다. 더 쉽고 대중적인, 뤼뺑을 졸업하게 된다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작가가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04/01/16

르콕 탐정 - 에밀 가보리오 / 한진영 : 별점 2.5점

르콕 탐정 - 6점 에밀 가보리오 지음, 한진영 옮김/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파리의 한 술집에서 격투 끝에 살해된 세 남자의 용의자로 한 남자가 현장에서 체포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20대 중반의 르콕이 등장한다. 르콕은 상관인 제브롤 경감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현장검증과 수사를 통해 체포된 사나이 메이가 사실은 뭔가 배경이 있는 인물이라고 추리한 뒤 세그뮬러 예심판사와 동료형사 압생트, 그리고 일종의 범죄 자문위원(?)인 타바레 등의 도움으로 진상을 밝혀내게 된다.

에밀 가보리오의 전설적인 추리소설. 포우 직후에 발표된, 19세기에 쓰여진 초창기 추리소설로 이 작품을 비롯해서 여러편의 작품을 발표한 가보리오는 현대 추리소설의 형성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셜록 홈즈도 르콕 탐정을 “그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존재야” 라며 폄하하는 장면이 있지만 코난 도일 경 스스로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한마디로 추리 역사상, 거의 추리소설의 아버지쯤 되는 작품으로 그동안 역사적인 가치로나 호기심으로나 항상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이번에 국일미디어에서 발행되었네요. 물론 저는 당장 샀습니다. 책도 묵직하니 무려! 500페이지 가까운 장편으로 기대하게 만들더군요.

하지만 내용면에서는 아무래도 초기 작품 답게, 좀 지루하고 맥이 빠지는 편입니다. 초반부의 사건 현장만 분석해서 추리하는 르콕의 모습은 홈즈와 굉장히 유사하고, 나름대로 색다른 재미도 주지만 갈수록 사건 자체의 트릭 보다는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목적을 두고, 순전히 탐문수사에 의존하는 르콕의 수사 방식이 굉장히 지루하거든요. 르콕의 모든 행동들은 홈즈가 비판할 정도로 어설프기도 하고요.
마지막 부분에서 용의자를 도망치게 놓아주고 용의자의 뒤를 쫓는다는 방식도 순진하지만, 드러난 용의자의 정체를 몰라 고민하다가 탐정 타바레의 자문으로 쉽게 해결되는 결말부 같은 것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뭐 그 타바레의 추론 자체도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라서 더 맥이 빠지네요. 이렇다면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당시의 “경찰 수사” 소설이라고 하는게 더 적당할 것 같아요.

원래 이 책은 2부작으로 2부째에서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과거사, 그리고 그것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는데 2부는 추리소설보다는 뒤마식의 모험 소설에 가까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구성은 셜록 홈즈 장편 “주홍색 연구”나 “4인의 서명” 등에서 전반부에 사건이 벌어지고 후반부에는 범인의 회상으로 이루어지는 구성과 유사한 것 같은데 이 당시 추세였을까요?

어쨌거나 기작으로의 미덕과 역사적인 가치는 분명하지만, 그만큼 조금 어수룩하고 순진한… 현대독자들이 보기에는 부족한 점 또한 많습니다. (무려 100년도 전에 쓰여진 책이니까요)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겠지요. 이 책도 조금만 더 짧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결론적으로 지 읽기에는 역사적 가치 이외의 다른 재미를 찾기 힘들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물론 저로서는 이런 책이 나와주니 고맙기만 하다! 쪽이었지만, 사실… 많이 팔릴 것 같진 않네요^^ 그래도 꾸준히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욕심일까나..) 아울러 뒷부분의 정태원씨의 해설은 언제나처럼 좋았습니다. 차후에 국일미디어 책들이 많이 나오면 뒷 부분의 해설만 따로 모아서 책으로 내 놓아도 될 것 같아요.

2004/01/15

엘러리 퀸의 모험 - 엘러리 퀸 / 장백일 : 별점 4점

엘러리 퀸의 모험 - 8점 엘러리 퀸 지음, 장백일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제가 좋아하는 단편집입니다. 시그마북스 버전으로 “새로운 모험”은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전반부에 해당하는 이 책은 절판된 후 구하지 못하던 차에 이번에 동서 추리 문고본으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1. 아프리카 출장 직원의 모험 / 2. 목매달린 곡예사의 모험 / 3. 1페니 검은 우표의 모험 / 4. 수염난 여자의 모험 / 5. 세 절름발이 사나이의 모험 / 6. 보이지 않는 연인의 모험 / 7. 티크 담배갑의 모험 / 8. 쌍두견의 모험 / 9. 유리돔 시계의 모험 / 10. 일곱 마리 검은 고양이의 모험 의 10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그마북스 판본에서 “미친 티 파티”가 빠진 모양인데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에드가상 수상 단편선으로 이미 가지고 있어서 별로 아쉽지는 않네요.

첫번째 단편 “아프리카 출장 직원의 모험”은 엘러리 퀸이 모교에 범죄관련 프로그램 강의를 맡아 3명의 학생들과 한 살인사건의 조사를 하는 이야기로, 아프리카에 출장 갔다 온 피해자의 소지품과 현장 검증을 토대로 각각의 추리를 펼치는 이야기로 구성이 독특하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리즈로 나왔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이 한편 밖에 없네요. 약간 “라쇼몽” 같기도 하고 색다릅니다. 뭐.. 추리적으로는 범작이네요.
“1페니 검은 우표의 모험”은 우표 수집상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과 색다른 책 도둑을 등장시켜 독자의 허를 찌릅니다.
“수염난 여자의 모험”은 “피해자가 그리던 그림속 여자에게 그려진 수염”이라는 단서만으로 추리하는 정말로! 기발한 작품이고요,
“유리돔 시계의 모험”은 작가 스스로가 “굉장히 쉬운 사건”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장 과학적(?)이고 공정한 단편입니다.
마지막 “일곱 마리 검은 고양이의 모험”은 “고양이를 싫어하는 노파가 사간 똑같이 생긴 일곱마리 고양이” 라는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서 펼쳐지는, 작품집을 마무리 하는 단편 답게 최고 수준의 재미와 흥미를 주는 작품입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상당한 수준들이고요.

하나 아쉬운 것은, 각 단편마다 단편집 제목 때문인지 전부 “모험”이라는 말이 붙어있는데 요건 좀 어색한 거 같습니다. 이왕이면 더 멋진 제목을 붙였으면 좋았을 것을… (미국 작가들은 이런 말장난을 즐기는 것 같더라고요)

결론내리자면 제가워낙 단편집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명불허전! 거장의 명성답게 엘러리 퀸과 함께하는, 전통적인 고전 추리 퍼즐 미스터리의 진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모험” 보다는 고풍스럽고 전통적인 미스터리라 더욱 좋았던 것 같네요. 시그마 북스 판본으로 사지 못한 것은 조금 애석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이쪽 번역도 괜찮은 편이었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정통 고전 본격 추리의 맛을 느끼시고 싶으시다면 강추하는 바입니다.

2004/01/14

Y의 비극 - 엘러리 퀸 / 강호걸 : 별점 4점

Y의 비극 - 8점 엘러리 퀸 지음, 강호걸 옮김/해문출판사
엘러리 퀸의 또 다른 탐정 드루리 레인 시리즈의 대표작이자 세계 3대 추리소설로 알려진 그 작품입니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어느날, 뉴욕만의 한적한 바다에서 처참한 시체가 발견됩니다. 조사결과 밝혀진 시체의 정체는 미치광이 해터 집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미치광이 모자”의 패러디)으로 알려진 부호 해터 가문의 가장인 요크 해터로 방수 지갑안에 “나는 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자살한다”라는 짤막한 유서도 있었죠. 그리고 몇 주 후, 해터 집안의 딸인 벙어리이자 장님이고 귀머거리인 루이자 해터의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경찰은 수사에 나섭니다. 내부의 인물 누구든 동기가 있고, 독을 넣을 수 있었던 상태.
어느날 밤, 실질적인 해터 가문의 주인인 에밀리 헤터 여사의 살인과 루이자 독살 미수가 다시 발생하고 드루리 레인은 친구 샘 경감의 요청으로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됩니다...

저는 사실 X,Y,Z 시리즈 중에서 Z부터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Z”에 굉장히 실망했던 터라 이 작품에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읽다보니, 과연 엘러리 퀸!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위의 줄거리 처럼 일단 콩가루 부잣집의 살인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악과 음모의 상징 같은 콩가루 저택에서 살인이 달랑 한번 (두번이긴 하지만 두번째는 응징..에 가까우니) 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 생각인데 일본풍 (특히 “아마기 세이마루” 풍) 이라면 거의 전가족이 몰살당하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긴 장편을 흥미진진하게 끌어나가고 있으며 특유의 “독자와의 대결”도 공정한, 정통 추리소설로서의 미덕을 잃지 않습니다. 복선이나 트릭 역시 큰 줄기에서 파생된, 완벽한 형태로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요.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일단 범인역이 너무 쉽게 드러난다는 것이겠죠. 발표당시에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범인이었겠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 충격이 많이 퇴색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단서 자체가 너무 상식 가능한 선인 것 같습니다. 중간 부분의 루이자의 증언으로 거의 밝혀지거든요… 사실 이 이후의 후반부는 레인이 범죄의 동기나 실제로 이미 죽어버린 “실체”를 찾기 위한 활동이지 범인을 드러나게 하는 트릭면에서는 별 비중 없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시각적으로 분명한 정보를 두루뭉실하게 표현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삽화나 사진 등으로 직접 눈으로 보게된다면 보다 쉽게 진범을 알아낼 수 있는,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은 현장 묘사에 의한 트릭이 많아서 공감하기 쉽지 않았어요. 번역본이라 더 심하게 느껴진것 같기는 한데 특히 “만돌린”을 흉기로 쓴 타당성에 관한 묘사는 영문학적인 지식 없이는, 그래서 국내 독자에게는 조금 이해 불가능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또 탐정인 드루리 레인 역시 불만스러웠어요. 원래 세익스피어극의 명배우 출신으로 부유하다는 설정까지는 이해해도 왜 귀머거리라는 설정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귀머거리라서 더 추리를 잘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당시, 추리소설 황금기의 명탐정들이 워낙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많았던 탓에 나름 색다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설정인 것은 알겠지만 단순한 설정에 불과하여 반세기 이상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제목 역시도 불만스럽습니다. 말장난 같은데 이 “Y”라는 제목의 의미가 전~혀! 거~의! 내용과 상관없는 부분이거든요. 차라리 단편 “미친 티 파티” 처럼 아예 앨리스를 가져다 쓴 제목을 붙이던가…. 일부러 X,Y,Z로 글자를 맞추고 싶어한 의도는 알겠지만 너무 억지로 갖다 붙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허나 이러한 단점들은 소소할 뿐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정통파 고전의 품격을 갖춘 명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른바 “세계 3대 추리소설” 중 하나라는 명성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번역도 괜찮은만큼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PS : 전 이렇게 순위 매기는 것, 싫어하지는 않지만 너무 객관적 근거 없는 "세계 3대 어쩌구..."하는 말에는 거부감이 있네요. 사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 “환상의 여인”은 정통파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거리가 있지 않나요?

2004/01/13

동서 미스터리 북스 48 - 진리는 시간의 딸 - 죠세핀 테이 : 별점 2.5점

진리는 시간의 딸 - 6점 조세핀 테이 지음, 문용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브렌트 경감은 범인 추적중에 맨홀에 빠져 다리와 허리에 상처를 입어 입원하게 된다. 무료한 그는 여배우 마타가 소일거리로 가져다준 초상화들을 들여다 보다가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간악한 왕 리처드 3세 (꼭 우리나라 세조 같죠)의 초상화를 보고 흥미를 느껴 역사속의 진실을 찾는 추리와 조사를 시작하는데...

고전 명작으로 잘 알려진 조세핀 테이의 영국의 "리처드 3세" 와 그의 주변에서 있었던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파헤치는 역사 추리물.

영국의 역사인 만큼 수많은 에드워드, 조지, 헨리들이 등장하여 머리가 아프지만 초반의 브렌트 경감도 "교과서"에서부터 사건을 접근하기 때문에 상당히 디테일하고 자세한 역사적 정보를 독자에게 전해주는 편입니다.

하지만 역시 우리에게 친숙한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명제이자 추론의 답인 "리처드 3세는 정당한 왕위 계승자였고, 조카를 죽이지도 않았으며, 뛰어난 왕이었다"라는 것이 그다지 와 닿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연산군은 사실 명군이었다" 정도의 명제일 텐데 말이죠.
더군다나 브렌트 경감의 추론은 위의 명제를 바탕으로 오히려 가져온 자료를 짜맞추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당대의 명사인 토마스 모어의 자료조차 "거짓투성이의 쓰레기"로 매도해 버리기 까지 하지요. 어떻게 보면 좀 억지로 끼워맞춘다..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역사적 진실을 가공의 인물로 추리해 나가는 추리소설로 완성한 작가의 솜씨는 대단하지만 기대만큼의 지적 흥분이나 완성된 추리물로서 읽혀지기 보다는 흥미진진한 역사물로의 가치가 더 높은 것 같네요. 그동안 못 읽었던 고전을 읽어서 뭔가 숙제를 하나 끝낸것 같기는 한데,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오히려 부록처럼 수록된 로버트 바아의 프랑스 경감 유진 발몽 시리즈 "건망증 있는 사람들" 이 더 흥미진진하고 재밌더군요. 유진 발몽 시리즈 단편집이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PS : 그나저나, 내용중에 등장하는 "토니판디"(잘못 알려진 역사적인 오류들) 들 처럼 우리 주위에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많을까요? 제목처럼 시간이 지나면 진리가 밝혀져야 할텐데 말이죠... (실미도..같은 것 들이겠죠)

2004/01/11

실미도 - 강우석

 


주말에 푹 쉬라는 하늘의 명을 받잡아(^^) 그간 수차례 보길 시도했으나 줄창 실패한 "실미도"를 보러 갔습니다.

내용은 익히 알려진 대로,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사회 어느 곳에서도 인간대접 받을 수 없었던 강인찬(설경구 분) 역시 어두운 과거와 함께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살인미수로 수감된다. 그런 그 앞에 한 군인이 접근, '나라를 위해 칼을 잡을 수 있겠냐'는 엉뚱한 제안을 던지곤 그저 살인미수일 뿐인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 누군가에게 이끌려 사형장으로 향하던 인찬,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인천 외딴 부둣가, 그곳엔 인찬 말고도 상필(정재영 분), 찬석(강성진 분), 원희(임원희 분), 근재(강신일 분) 등 시꺼먼 사내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그렇게 1968년 대한민국 서부 외딴 섬 '실미도'에 기관원에 의해 강제차출된 31명이 모인다.

영문 모르고 머리를 깎고 군인이 된 31명의 훈련병들, 그들에게 나타난 예의 그 묘령의 군인은 바로 김재현 준위(안성기 분),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 목을 따 오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는 한 마디를 시작으로 냉철한 조중사(허준호 분)의 인솔하에 31명 훈련병에 대한 혹독한 지옥훈련이 시작된다.

'684 주석궁폭파부대'라 불리는 계급도 소속도 없는 훈련병과 그들의 감시와 훈련을 맡은 기간병들... "낙오자는 죽인다, 체포되면 자폭하라!"는 구호하에 실미도엔 인간은 없고 '김일성 모가지 따기'라는 분명한 목적만이 존재해간다...


1971년, 대방동 앞에서 자폭한 실제 실미도 대원들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한국 영화계의 마이더스 손이라는 강우석 감독의 신작입니다.

영화는 초반에는 실미도 684 부대원들의 지옥훈련을 중심으로, 중반부터는 그 훈련 와중에 싹트는 동료애와 전우애를, 마지막에는 시대의 희생양으로 사라져 가는 부대원들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확실히 초,중반의 훈련장면과 동료, 기간병들과 싹트는 전우애 같은 부분의 묘사는 좋더군요.
각본도 꽤 탄탄히 틀이 잡혀 있어서, 어떤 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냉정한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며, 힘을 잃지 않는 구성을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무엇보다 설경구 등 배우들의 연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올드보이의 최민식씨와 비교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정도까지 광기를 보여주진 못하는것 같습니다만...)

저도 군대갔다온 예비역이라 더욱 재미있게 본 것 같기도 한데 제 군대있을 때 동기들 생각도 나고해서 (명식아! 정현아! 현곤아! 이거 보면 연락해라~!)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딱! 기대한 수준 정도의 영화였어요.

중간 중간 좀 지루한 부분이나, 별 필요없는 에피소드같은것은 조금 더 편집해도 좋았겠지만 (원희의 강간 에피소드같은....), 벌써 300만이 봤다고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히트칠만한 미덕은 분명히 있는 영화입니다. 특히, 군대갔다온 사람들이나 "김신조사건"을 알고 있는 세대라면 강추입니다. (김신조 아들이 저하고 초등학교 동기 동창이었다는.....)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도대체 80억 어디다 썼냐?"라고 하시던데, 확실히 티는 크게 안나더군요. 쩝.

PS: 향후 수출이나, 내용을 고려했을 때 제목을 "실미도" 보다는 "684" 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2004/01/10

KTX 부산 여행

본가가 부산인데 급한 일이 생겨서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KTX를 처음 타고 부산까지 왕복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가격에 비하면 글쎄~라는 생각입니다. 부산까지 약 2시간 40여분 정도 걸리는데 새마을호 보다는 빠르지만 좌석이 상당히 불편하더라고요. 너무 좁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특실 사자니 차라리 비행기 타는게 나을 것 같고. 그래도 김포 공항까지 가서 다시 김해 공항에서 집까지 가는 교통 시간까지 합치면 여행 시간은 비스무레 한 편이니 돈을 아낀 셈이 될까요? 또 승차감은 괜찮은 편이고 방음도 상당합니다. 보통 부산갈때는 책을 한무더기 들고가서 읽는데 시간이 빨라진 탓인지 몇권 못 읽은 걸로 봐서는 과연 빠르긴 빠른 모양이네요.

개인적으로 운전도 굉장히 싫어하고 비행기 공포증도 약간 있는 편이라 기차를 선호하는 저로서는 비싸고 불편해도 앞으로도 자주 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약에 따른 여러가지 할인 특전이 있는 모양인데 이번에는 워낙 급하게 내려가서 Pass. 다음에 할인 함 받아 봐야 겠네요.

아무리 빨라져도 전국 1일 생활권이라는 선전 문구는 좀 오바라는 생각이......^^;

2004/01/09

좋은소식과 나쁜소식이 있습니다.

좋은소식부터, 내일, 토요일 출근 안해도 됩니다~

나쁜소식, 그동안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엎어졌습니다. 넌지시 언질까지 받아 확정적으로 진행되던 프로젝트인데 갑자기 엎어졌네요.

아... 대략 좌절입니다. 기껏 밤세워서 준비한 프로젝트가 이렇게 엎어지니 머리가 하얗게 되는것 같네요.
우리 회사를 제끼고 당선(?)되신 업체에게는 축하를 하고 싶지만, 사실 불이라도 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잖아 있습니다.....
오늘은 소식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날이군요. 2004년 첫 프로젝트부터 이러면 어떻하나....

주말은 대략 좌절모드.

초 스피드 결혼~!


제가 다니는 회사는 과 동기들끼리 뭉쳐서 만든 작은 회사입니다. 사장으로 있는 형도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더 어색한 동기 형이죠.
저 말고는 다들 여자친구들이 없어서 회사생활이 좀 괴롭던 차에, 사장형이 소개팅해서 여자를 만난지 30일만에 결혼 발표를 해 버리네요.... 결혼을 두달 뒤에 한다고.
바로 어제 술을 같이 먹었는데 이렇게 암말도 안하다가 폭탄을 터트리다니.. 배신감도 좀 느껴지고 황당하기도 하고, 하여간 일이 손에 전혀 안 잡히네요^^

추진력있는 모습도 모습이지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빨리 결혼하는 경우도 있나요? 이혼율도 거의 50%라는데.. 조금더 사귀어 보고, 서로를 알고 난 후에 결혼을 하는 거 아닌가요? 설마 벌써 사고를 친건가?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행복하게 잘 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직 결혼한건 아니지만) 제가 먼저 할 줄 알고 여유 부렸는데 저도 슬슬 긴장해야 겠네요^^

2004년에 처음으로 들은 황당깜짝 뉴스였습니다.

2004/01/08

공포서클 - 아카가와 지로 : 별점 1점

공포서클 - 2점
아카가와 지로/서울문화사

가스폭발사고 현장에서 목졸린 여고생의 시체를 발견한 가타야마 형사는 피해자가 상지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수사에 들어간다. 여러 제보와 정황으로 괴기클럽의 멤버들에게 조사를 집중하는데, 클럽에 신비의 미소녀가 새로 가입하게 되고, 다른 여러 사건들과 맞물려 문화제의 연극부 공연이 겹치며 사건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데...

일본의 인기작가 아카가와 지로의 "얼룩고양이 홈즈의 추리" 시리즈. 제목처럼 홈즈라는 삼색털 얼룩 고양이가 나와서 단서를 찾아준다던가, 어떤 방향을 인도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주인공 가타야마 형사와 하루미 남매에게 도움을 주어 사건을 해결하게 하는 시리즈입니다.
서울문화사에서 출간된 시리즈 중 4번째 책입니다. 우연히 자주 가는 헌 책방에서 전권을 이번에 구했는데 전 6권 중 5권이 이미 가지고 있던 책과 겹치고 이 한권만 새로 읽게 되었네요.
이 "공포서클" 편은 상지고등학교라는 사립 고등학교의 "괴기클럽"이라는 동호회 (제목은 "공포서클"인데 등장하는 동호회는 "괴기클럽"입니다... 이거참...) 멤버 4명을 중심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 시리즈를 비롯해서 아카가와 지로의 작품은 여럿 ("레몬트리" 나 "1주일 시한의 추적" 등등...) 읽어 보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가볍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좋게 말하면 대중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좀 싸구려랄까요... 그래서인지 만화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들 (피만 보면 기절하는 숫기없는 형사 가타야마라던가, 오빠 사건에 무조건 뛰어드는 동생 하루미나 먹보이고 바보인 동료형사 이스즈 같은..)과 말도 안되는 상황설정이 난무할뿐, 실제로 내용면에서 독특하거나 치밀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고양이가 추리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아이디어에 너무 끌려다니는것 같아요.
추리적인 부분에서도, 독자에게 단서를 전해주는 부분이 빈약하고 트릭도 단편에도 못 써먹을것 같은 별 볼일 없는 트릭이었으며, 사건도 우연에 의해 해결되는, 막판에 단 한번에 사건이 밝혀지는 빵점에 가까운 작품이었습니다.

왜 이런책이 일본에서는 많이 팔린다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그만큼 추리쪽 저변이 넓다는 이야기겠죠?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재미 없습니다. 이 얼룩고양이 시리즈도 건질만한건 1편 "고양이의 추리"와 6편 "고양이 저택"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헌책이라 싸게 샀다는 것 정도입니다. 아울러, 이 작가 작품은 조심하라! 는 교훈도 받았으니 다행이랄까... 별점은 1점입니다.

2004/01/06

주작의 활

로쿠죠 신사에서 장난을 치다가 사당을 부순 뒤에 왼팔에 신기 "주작"이 깃들게 된 고등학생 스루가 요스케. 그는 별 생각없이 답한 한마디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담보 잡힌 채 "주작의 활"을 무기로 여러 동료, 친구와 함께 "권족"이라 불리우는 마물과 싸워 나가게 된다.

요스케가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권족"과 싸워나가는 퇴마만화. 동료로는 로쿠죠 신사에 새로 온 신주의 딸인 이나바 요모기 -여우귀신을 부리며 귀신을 볼 수 있는 "견귀"라는 능력자 - 와 "청룡의 창"을 쓰는 마찬가지로 신기를 받은 자인 국사선생 에조 류이치, 그리고 2권 막판에 등장하는 현무의 초등학생 미카와 이로리 등이 있습니다.

퇴마만화는 이제 하나의 장르를 이룰 만큼 많은 만화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것만 해도 "블리치"(꽤 재밌더군요)나 "소름", "귀도천외 카나메" 등등 다 보기도 힘들정도로 많지요.

하지만 이 만화 "주작의 활"은 이 수많은 퇴마 만화 중에서도 나름대로 자리매김할 미덕이 존재합니다.
일단 무대가 되는 마을은 "미야코노"라는 굉장히 좁은 마을이며 주인공들도 소박하기 그지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권족이라는 강력한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이에 대항하는 주인공들의 능력은 별로 대단하지 않아서 나름대로 한계가 있고, 서로의 협력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스케일이 다른 퇴마물보다 작으면서도 소박합니다. (요새는 왠지 이런 소박함에 마음이 끌립니다^^) 그래서인지 퇴마만화이지만 이상하게 다른 만화에 비해 괴물의 비중이나 묘사는 적고 주인공들과 동료, 친구들과의 다양한 관계를 중심으로 그려집니다.
원래 게임업계에서 10년 넘게 일했다는 작가의 독특한 그림체와 캐릭터들 역시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데 일조하고 있고요.

2권이 최근 출간되었는데, 1권보다는 보다 소박해지고 유머러스해진 2권때문에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네요. 특히 간만에 보는 "착하고 순진한" 여주인공 이나바 요모기 때문에 더욱 흐뭇합니다.
모쪼록 앞으로 마왕과 싸운다.. 같이 스케일을 키운다던가 하지 말고 미야코노시만 지키는 소박한 주인공들을 보게 해 주었으면 합니다.

PS : 요새 안나오던 만화들이 나오는 붐인가요? 이그젝션 6권에 할아버지와 나의 사건수첩 4권에... 볼게 너무 많군요. 천천히 읽어봐야죠^^

2004/01/05

Thunder Bird~!

썬더버드는 영국산 TV용 특촬 인형 애니메이션입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실까 모르겠네요. 재벌 트레이시 가문의 형제들이 지구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각각 1호부터 4호던가? 하여간 특수 메카닉들을 타고 싸우는 작품으로 제법 운치가 있었죠. 바다 건너 일본에는 팬도 상당히 많은 것 같고요, 특히나 여러 메카닉들의 디자인과 섬을 개조한 기지 같은 설정은 이후 많은 작품에서 차용한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오늘 웹서핑을 하다가 이 작품을 2004년 개봉 예정(!)으로 제작 중이라는걸 알게되어 포스팅합니다.

대충 스크린 샷을 보니 풀 3D 애니메이션 같던데... 사뭇 기대됩니다. 화면도 뽀사시하고, 복고적인 디자인도 좋습니다^^ 아직 크레딧이나 트레일러, 시놉이 오픈되어 있지는 않아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꼭 구해 보고 싶네요.

그러고보니 우리나라에도 TV에서 해주다가 사라진 쟝르중에 "어린이 인형극"이라는 쟝르가 있었죠. 제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그러니까.. 80년대 중반정도까지) 상당히 인기 있었습니다. 뭐 이건 그야말로 실시간 "인형극"이니 애니메이션과는 거리가 있지만... 당시 인기 있던 "짱구박사"같은 인형극을 다시 3D로 제작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3년도에 대작 영화들이 거의 다 끝났지만(매트릭스와 반지..) 아직 스타워즈와 썬더버드가 남았으니, 즐겁게 기다릴렵니다...^^

2004/01/04

시미즈 레이코 걸작선 9 - Magic

매직 - 8점
시미즈 레이코 지음/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물속의 달 내 손안에는 있지만 영원히 잡을 수 없다. 영원히 너를 향한 내 마음을 전할 수 없겠지"

저~ 아래 썼었던 "비밀" 의 작가 시미즈 레이코의 예전 단편집입니다.
시미즈 레이코 걸작선으로 출간되었던 9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죠. 비밀을 읽다가 다시 생각 나기도 했고 오늘 집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다 다시 발견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표제작 "Magic"과 고등학생 범죄물 "Silent"두편이 실려있는데 "Magic"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까 합니다. (Silent도 좋은 작품이지만 평이한 수준이거든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참고를...

14년 전 변두리 행성인 샤샤에서 일어난 우주선 추락사고, 그 우주선에는 은하계 최고의 모델 KANA가 타고 있었는데 결국 KANA의 딸 카나만이 기적적으로 구조됩니다. KANA의 25살이나 연하였던 연인 토르의 딸로 키워진 카나는 14년이 지나, 모델 사진 촬영을 위해 다시 샤샤를 찾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자기폭풍으로 인한 우주선 사고가 일어나고 일행은 구조대를 기다리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딸인 샤샤의 토르에 대한 감정은 깊어만 가고 토르도 점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어 집니다. 자기폭풍이 걷히고 구조대가 도착할 때 드디어 파국이 찾아옵니다...

딸로 키우는 "카나"에 대한 2번, 아니 3번에 걸친, 평생에 걸친 토르의 사랑과 행성 "샤샤"의 특수한 조건 -오래 있으면 퇴화된다!- 가 시미즈 레이코의 미려한 그림과 맞물려진 보기 드물게 완성도 높은 SF 순정 러브스토리입니다. 제가 읽었던 SF단편들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을 정도에요.
특히 딸로 키워왔던 카나가 사실은 14년전에 조난당했었던 "KANA"가 퇴화되어 어려진 것이었다는 반전과, 10년뒤 다시 어려진 카나를 데려다 키우는 토르의 모습이 묘하게 마음을 울리네요.

이 만화는 듣자 하니 국내 한 영화감독(이현승씨였죠 아마..)이 영화화를 시도했다는 소문이 들렸었죠. 미려한 그림으로 구성된 이야기인 만큼 캐스팅이나 비쥬얼이 심히 걱정되었었는데, 다행히(!) 취소 되었나 보더군요.^^

현재 절판되었지만, 많이 팔린 만큼 구하기도 쉬우리라 생각됩니다. 추천작입니다.

유니스의 비밀 - 루스 렌들 : 별점 4점

유니스의 비밀 - 8점 루스 렌들 지음/고려원(고려원미디어)

간만에 추리소설 한권을 독파했습니다. 제목은 "유니스의 비밀", 한때 추리 매니아들의 희망이었지만 현재는 별 소식이 없는 고려원 미스터리 문고 시리즈 9번 입니다.
원제는 "A Judgement In Stone" 이라는 나름대로 멋들어진 울림을 주는 제목인데 한국판 제목은 좀 난데 없네요. 하지만 고려원 미스터리 문고 시리즈 답게 제목을 제외하곤 전체적인 번역이 나무랄 데 없습니다.

"유니스 파치먼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아무런 동기도 사전 계획도 없었다. 돈을 훔친 것도, 일신상의 안전을 꽤한것도 아니었다. 범죄 결과 오히려 자신의 무능력이 한 일가와 몇 안되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 일로 인해 자신에게 가해진 형벌 말고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자기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인 공범은 미치광이 였지만 유니스는 달랐다. 그녀는 20세기의 인간으로 변장하고 나타난, 격세유전한 원숭이의 무서우리만큼 현실적인 광기를 품고 있었다...." 라는 문장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유니스라는 뒤틀린 광기를 품고 있는 문맹 여자가 커버데일가의 가정부로 고용되어 스스로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생활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상황을 부풀려 가다가 결국 폭발하고 마는 상황을 적나라하고 냉정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나라 영화 "하녀"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특히 유니스와 그녀의 미치광이 친구 조안의 광기넘치는 심리 묘사와 첫 문장으로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독자들을 그 결말로 서서히 이끌면서 소설로 끌어들이는 재주는 역시 루스 렌들 여사! 라는 고수의 필력을 느끼게 해줍니다.
루스 렌들 여사 작품은 읽어 본것이 단편, 장편을 포함해도 몇개 되지는 않지만 뭔가 문제가 있고 뒤틀린 인물들의 이러한 심리 묘사는 정말 탁월 한 것 같습니다. (별로 재미 없었던 장편 "내 눈에 비친 악마" 도 그러한 부분의 묘사는 대단했었죠.)

사실 추리라기 보다는 독특한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라고 할까요? 하지만 미국식 공포물보다는 조금 격조높고 고급스러운, 영국스러운 분위기의 잘 만들어진 스릴러 물입니다. 특히 읽으면서 서늘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별점은 4점입니다.

2004/01/01

절대미각 식탐정 - 테라사와 다이스케

절대미각 식탐정 1 - 6점
다이스케 테라사와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미스터 초밥왕"의 작가 테라사와 다이스케의 신작.
미스터 초밥왕은 제가 요리만화를 무척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정이 가진 않았었습니다. 설정에서부터 캐릭터들, 스토리라인 전체가 초밥이라는 소재를 놓고 벌어지는 오버의 극치들이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었죠. 특히나 매번 감정에 북받치는 주인공들이나 "입안에서 터지는 어쩌구..."하는 맛에대한 묘사는 짜증날 정도였고요.

그래도 이 "절대미각 식탐정" 은 일단 그러한 감정 과잉이나 오버가 조금은 희석되어 있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그림은 뭐 여전히 독특하지만 꽤 탄탄한 편이고요.

주인공 다카노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유유자적 하면서 역사 소설가와 탐정이라는 두가지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으로 이 두가지 직업을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은 비서인 교코 뿐이죠. 더군다나 그는 앉은 자리에서 도시락 10인분은 바로 먹어치울 정도의 굉장히 식탐이 심한 미식가입니다. 만화는 이 다카노가 경찰청 엘리트인 오카다의 요청으로, 또는 의뢰로, 또는 우연히 사건을 받아 해결해 나가는 추리만화의 구성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이야기 전부가 "음식"과 연관되어 있는, 약간은 요리만화의 설정도 띄고 있습니다.

사건의 예를 들면 어떤 식당에서 벌어진 살인 현장에서 범인으로 심증은 가는 요리사가 있습니다. 살해당한 요리장은 머리를 강타당했는데 흉기를 찾지 못한 상태죠. 여기서 다카노는 주 메뉴였던 커틀릿을 먹어보고 커틀릿 빵가루가 일반적인 빵이 아닌 일종의 "단단한 빵"으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 요리사의 자백을 받아냅니다.... (1권 003 "남의 커틀릿을 먹다")

그러나 다카노라는 주인공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개인적으로는 "맛의 달인"의 지로같은 녀석이 이 만화 주인공으로 적당했을것 같습니다. 다카노의 너무 잘난척 하는 모습은 짜증날 정도였고, 비정상일 정도의 식탐이 현실성이 부족했거든요. 아울러 살인 현장에 음식이 중요한 증거로 남아있어 그 음식을 먹어보고 사건을 추리해 낸다던가(1-004 : 살인현장의 초밥을 먹다 편 등), 식당이 범행 장소라던가(2-012 : 라면집에 줄을 서서 라면을 시켜 먹는다 등), 음식의 특성으로 트릭이 이루어진다던가(1-005 : 독이 든 홍차까지 마신다 등) 하는 식으로 모든 사건이 음식과 관련되어 있는 만큼, 상당한 수준의 내용도 있지만 이야기의 소재와 설정이 아무래도 끼워맞추는데 문제가 좀 있는 편이라 전체적으로 그 추리의 깊이나 내용이 합리적이거나 치밀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즐겨 찾는 추리 동호회의 한 회원분은 거의 쓰레기급으로 분류하시더군요^^

하지만 요리만화를 좋아한다면 꽤 즐길 수 있는 만화입니다. 저도 추리만화와 요리만화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런 형태의 만화를 만나니 꽤 신선합니다.

"추리" 보다는 "요리"만화를 좋아한다면 추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