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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23

의혹 - 도로시 L 세이어스 / 김순택 : 별점 2.5점

의혹 - 4점 도로시 L. 세이어스 지음, 김순택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엘러리 퀸도 극찬했다는 걸작 단편 "의혹"과 세이어스 여사의 명탐정 피터 윔지경 단편 7편이 실려있는 단편집. 

"의혹"은 예전에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어서 별로 새롭진 않았습니다. 워낙 잘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비소독살"을 다룬 단편인데 로열드 달이나 스텐리 엘린이 생각날 정도로 서늘한 맛이 제법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귀족탐정 피터경 시리즈는 실망뿐입니다. 트릭도 별로지만 캐릭터가 정이 안 가더군요. 부유하고 돈많고 여자들한테 인기까지 많은 매너 좋은 귀족 탐정이라니.. 하이틴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 탐정같은 설정이라 감정이입이 안되더군요. 세이어스 여사 자신이 불행한 결혼생활때문에 환타지같은 설정을 도입해서 (심지어 피터경은 여류 추리소설 작가 헬리에트와 열애끝에 결혼한다는 설정까지 나옵니다...) 쓴 것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현실성이 부족하네요.

대강의 설정은 '피터 데스 브리든 윔지’라는 거창한 본명을 지녔지만 피터경(卿)이라는 호칭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1890년 15대 덴버 공작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튼학교를 거쳐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해 1차대전에 참전,정보장교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런던 피카딜리 110A플랫의 집에서 부관이었던 번터를 집사로 삼아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낸다.

6피트(약 180㎝)의 신장,소탈해 보이고 유머도 깃들인 인상이지만 별다른 특징이 없는 얼굴이며 식성은 까다로운 편이다. 게다가 식후에는 반드시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있다. 그의 집사 번터가 커피를 아주 잘 끓이는 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외눈 안경과 지팡이를 항상 가지고 다닌다. 단테를 좋아하고,바흐의 작품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즐기는 등 예술가적인 감각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고서 수집,크리켓 등 다양한 방면에 조예가 깊다.

범죄 연구에 취미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어 범죄학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외모와 행동으로 볼 때 전형적인 영국 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귀족답게 윔지 집안의 문장은 눈에 띄는데,검은 바탕의 방패에 쥐 3마리가 달리는 그림이 있고,그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도약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양 옆에는 갑옷을 입은 두 기사가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기사가 발을 디디고 있는 받침대에는 ‘나,윔지를 지키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흐.. 너무 거창하지 않습니까? 재벌 2세 정도라면 모를까.. 귀족탐정이라니...

첫번째 단편 "거울의 영상"은 내장의 위치가 좌우가 서로 뒤바뀐 남자의 이야기인데 트릭이나 설정이 너무 우연에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마법사 피터 윔지 경"은 스페인 시골 산속에 은둔중인 의사와 그 부인의 이야기인데, 피터 윔지경이 순전히 (거의) 돈의 힘으로 사건을 해결할 뿐이고요. 게다가 의사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변화를 (놀랐다는 설정은 있지만) 이야기만 듣고 미루어 짐작하는 묘사는 좀 해도 너무하는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구리손가락 사나이의 비참한 이야기"는 도대체가 말도 안되는 작품이었어요. 일종의 공포-모험소설 분위기인데 왜 피터경이 등장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뭐 설정은 제법 흥미진진했지만 나머지는 다 불만스러웠습니다.
마지막 수록 작품인 "불화의 씨, 작은 마을의 멜로드라마"는 가장 길어서 거의 중편 분량입니다. 유산을 둘러싼 두 아들의 갈등과 유령 마차의 트릭에 관한 이야기인데 꽤 재미있긴 하지만 이왕이면 더 짧게 묘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중간중간 지루한 부분이 제법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 형편없는 것은 아니라서 "도둑맞은 위"는 위트와 재기넘치는 단편으로 피터경을 싫어하게 된 저였지만 이 작품은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목 그대로의 단편인데 좀 직설적이고 쉽긴 하지만 꽤 유머러스한 맛이 좋았어요.
"완전한 알리바이"는 트릭면에서는 가장 뛰어난 수작으로 괜찮은 일종의 장소 이동 트릭이 등장하고요.
"유령에 흘린 경관"은 소품으로 제법 인상적인 트릭을 다루고 있습니다. 피터경의 참견 좋아하는 성격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별로였기에 별점은 2점. 제가 워낙 단편집을 좋아하기도 하고, 피터 윔지경이 추리사에 족적을 남긴 탐정이기도 해서 구입하기는 했는데 실망감이 더 큽니다. "의혹"은 과연 걸작이지만 나머지 피터경 시리즈는 그만한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쉽네요. 개인적으로는 피터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저처럼 좀 고전적인 퍼즐 추리를 기대하고 본다면 실망하실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영국에서는 크리스티 여사와 거의 동급의 인기라던데... 과연 사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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