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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5

좀비 연대기 - 로버트 E. 하워드 외 / 정진영 : 별점 2.5점

좀비 연대기 - 6점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책세상

근대 시기 유명 장르 소설가의 좀비 관련 중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 작가들의 명성과 장르 문학치고는 고전급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 성격은 유사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낡은 느낌이 강했던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는 다르게, <<지옥에서 온 비둘기>>라던가 <<좀비 감염 지대>>같은 시대 초월 명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초로 '좀비'라는 말을 만들고, 아이티 부두교 좀비 설정을 확립했다는 <<마법의 섬>>과 같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도 눈여겨 볼 만 하고요. 크리쳐 호러물 외에도 저주받은 저택, 호러 모험 액션, 판타지에 SF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장르 스펙트럼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12편의 수록작 중 수준 이하 졸작도 제법 되는 편입니다. 발표된지 100여년이 다 되어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요.
그리고 제목에서 기대했던, 우리가 지금 '좀비'라고 하면 떠올릴 몬스터가 등장하는 작품도 없습니다. 아이티 등 열대 섬나라에서 부두교 주술 등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려 노예처럼 부렸다는 초기 좀비 전설에 기반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거든요. 물론 이게 단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설정을 그대로 반복한 판박이같은 작품이 많다는거지요.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클래식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그런 앤솔러지였습니다. 좀비라는 크리쳐의 창작 초기 설정과 이야기들이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온 비둘기>>
그리스웰과 존 브래너는 비둘기 떼가 날아가버린 폐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게 되었다. 밤중에 공포스러운 휘파람 소리에 잠을 깬 그리스웰은 2층으로 올라간 뒤, 도끼에 맞아죽은 브래너가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도망쳤다. 도망치던 그리스웰을 구해준 보안관 버크너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수수께끼와 브래너 살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자 늙은 부두교 주술사를 찾아갔지만, 주술사도 뱀에 물려 죽었다.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버크너와 그리스웰은 흉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지만, 그날 밤 그리스웰은 악령에게 홀려 2층으로 향하는데...


좀비물이라기 보다는, 저주받은 저택 장르물로 보는게 타당할 작품. 죽은 브래너의 습격, 마찬가지로 사람을 습격해 죽이는 실비아 블래슨빌 모두 시체가 되살아난 것이기는 해요. 허나 복수를 위해 부두교 주술로 저주한게 원인이고,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으니, 저주물에 더 가깝고요.

저주받은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가 악령에게 습격받는 초반부 묘사는 지금 읽기에는 다소 진부하고 심심했지만, 버크너 보안관 등장 이후부터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특히 버크너가 브래너의 시체를 발견한 뒤의 전개는 추리 소설을 떠올리게 해서 독특했습니다. 상황은 그리스웰이 범인일 수 밖에 없어요. 둘만 있던 흉가에서 한 명이 도끼에 머리를 맞아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버크너는 그리스웰의 옷에 피가 전혀 튀지 않았던 점, 그리고 그리스웰이 범인이라면 죽은 버크너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을 했을리 없다는 이유로 추가 조사를 벌입니다. 그리고 핏자욱을 따라 2층의 사건 발생 현장으로 이동한 뒤, 무언가 이상한 존재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지요. 단서를 통한 추리,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수사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밀 방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3명의 가족이 목을 메고 죽어 있었다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진상도 오싹했습니다. 사람들을 습격해 죽였던 괴물 '주벰비'가 실비아 블래슨빌을 원망했던 혼혈 하녀 조안이 아니라, 실비아 블래슨빌이었다는 반전도 충격적이었고요. 조안은 주벰비가 되는 검은 술을 자기가 먹지 않고 주인에게 몰래 먹였던 겁니다. 이거야말로 진짜 복수네요.

믿음직하고 용감한 보안관 버크너와 겁 많은 애송이 그리스웰의 조합도 반 헬싱 교수와 조나단 하커 관계와 좀 비슷한데, 전형적이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에 딱 맞는 조합이더군요. 무서움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겁쟁이와 사건을 해결하고 악령을 응징하는 용감한 보안관이 조합되니, 두려움과 공포, 액션과 정의의 응징을 다 얻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딱 한 가지, 너무 옛스럽게 쓰여졌다는 건 좀 아쉬웠습니다. 공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여러모로 부족한 묘사가 특히 거슬렸습니다. 오래된 폐가, 몰락한 가문, 뱀으로 상징되는 저주의 주술,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 도망쳤던 생존자가 남긴 일기 등 모든 면에서 미쓰다 신조의 <<흉가>>가 떠오르는데, 공포를 자아내는 묘사와 전개는 전혀 미치지 못했거든요. 미쓰다 신조가 같은 작품을 썼다면 훨씬 무섭게 쓸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차라리 지금 방식으로 영상화하면 훨씬 대단한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되네요.
하여튼, 좋은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검은 카난>>
커비 버크너는 고향 카난에서의 긴급 호출을 받고 귀향하다가 혼혈인 마녀의 유혹을 받았다. 최면에 걸렸던 버크너는 운 좋게 정신을 차리고 습격한 거구의 흑인 세 명을 물리쳤다.
마을에 도착한 버크너는 마을 흑인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통해 늪지대에 사는 괴인 솔 스타크가 배후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조사 중 버크너는 마녀의 최면에 걸려 솔 스타크의 본거지로 본의 아니게 끌려가게 되었고, 친구 브랙스턴이 그를 돕기 위해 따라가는데....


부두교 주술사가 카난이라는 마을을 장악하려 하지만, 마을 지도자 버크너가 이를 물리친다는 호러 액션 활극.
마녀의 최면, 주술로 만든 물고기 인간같은 공포스러운 요소가 등장하지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버크너 시점의 심리 묘사만 있는 탓이 큽니다. 버크너 캐릭터는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쾌남 영웅 스타일이라 공포를 크게 느끼지 않거든요. 공포에 사로잡힌 묘사도 잘 와 닿지 않더군요.
마녀와 괴물들이 총에 맞으면 죽는다는 것과, 최면술말고는 주인공을 크게 위협하지 못한다는 것도 작품이 무섭지 않은 이유이고요.

그래도 모험 활극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주인공 버크너는 전작의 버크너 보안관의 선조, 혹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버크너 유니버스도 한 번 제대로 소개되면 좋겠네요.

<<천 번의 죽음>>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건 아버지와 그 부하들이었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나도 물에 빠져 죽었었지만 아버지의 연구 덕분에 살아났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이고 되살리는 식으로 연구를 계속하는데....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는 SF 호러 범죄물. 잭 런던이 썼다는게 특이했지만, 내용은 평이합나다.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건 <<프랑켄슈타인>> 에서부터 내려온 고전적인 설정이니까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섬에 틀어박혀 생체 실험을 한다는건 <<닥터 모로의 섬>>과 똑같고요.
물론 생체 실험의 대상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로, 그가 반복적인 죽음과 소생을 거듭한다는 설정으로 확실히 차별화되기는 합니다. '폭력에 의하지 않고, 신체 장기에 아무런 훼손이 없는 죽음은 단지 생명의 보류 상태'라며 죽음과 소생을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점도 독특했어요.

하지만 차별화 요소를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독약, 질식 등으로 수차례 죽음을 맞는 고통이 잘 그려내지 못한 탓입입니다. 생체 실험의 고통을 극명하게 그려냈다면 호러물로 충분히 값했을텐데 말이지요. 과학적인 설명도 그럴듯해 보일 뿐, 실상 알맹이 없는 서술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갖은 노력 끝에 물질을 원소 상태로 되돌리는 장치를 개발했고, 이를 이용하여 아버지와 그 부하들을 없애고 탈출한다는 결말은 최악이네요. 아버지의 흑인 부하들이 자기 방으로 한 명씩 차례로 들어올 때 마다 없애고, 마지막에는 방에 들어선 아버지를 없앴다는데, 이럴 바에야 그냥 방에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칼로 찌르는게 빨랐을겁니다. 특별한 장치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고, 피해자들도 한 명씩 들어와 사라질 정도로 감시가 느슨했는데 왜 진작에 탈출하지 않은건지도 이유를 모르겠고요. SF스럽게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엄청난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보였던 아버지의 최후라기에는 너무 허무했고요.

유사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호러물로는 공포를 자극하는 요소가 부족했고, 결말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아이티 호텔에서 머물다가, 호텔에서 일하는 노파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지역 주민들과 호텔 직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과거 아이티 독립 전쟁 당시 '소금을 먹지 마라'는 금기를 어겼다가 시체가 된 연인 트레생에 대해 말해 주는데...


뒤에 수록된 <좀비와 함께 걷다>>를 읽어야 설정이 이해가 되는 작품. <<좀비와 함께 걷다>>에 따르면, 좀비는 소금을 먹으면 자신이 죽었다는걸 깨닫고, 무덤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트래생은 물론 마리도 진작에 죽었던 좀비였다는 뜻이고요. 트래생이 흑인 해방 등의 의식을 가질 정도로 똑똑했던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노예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다니, 다른 좀비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고 보면 되겠지요.

문제는 이 설정 외의 특별한 내용은 없다는 겁니다. 마리도 좀비였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고요. 죽었다는걸 깨달은 좀비들이 무덤으로 폭주하는 장면 묘사 정도만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귀환자들의 마을>>
좀비 전설이 있는 열대 섬마을에 어느날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에게 유혹당한 파파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괴담 소설로 유명한 라프카디오 헌의 단편. 굉장히 실망했던 작품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좀비와 다른 열대 섬나라 좀비에 대한 설명과 파파가 관련된 이야기가 아예 별개로 진행되어 혼란스럽고, 별다른 내용도 없습니다.
섬마을의 여러 풍광에 대한 관능적이면서도 상세한 묘사를 걷어내고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한, 두페이지로도 충분했을 이야기입니다. 수록작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나트에서의 마법>>
조티크 대륙의 절반이 사막인 나라 지라의 왕자 아다르는 노예 상인 샤라그에게 납치된 약혼녀 달리리를 찾아 여러 왕국을 헤멨다. 그러다 그녀가 향했다는 요로스 왕국으로 가는 상선에 탑승했지만 항해 중 폭풍에 휘말렸고, 상선은 사악한 섬 나트로 표류하다가 침몰했다. 달릴리의 구조로 홀로 살아남은 아다르는 나트의 마법사 우두머리 바카른을 만나, 그녀는 바카른이 되살려낸 익사자라는 걸 알게 되는데....

<<코난 더 바바리안>>을 연상케 하는 작품. 존재하지 않는 고대 왕국을 무대로 마법사와 영웅이 등장해서 대결을 펼치는 고대 판타지라는 점에서요.
그런데 결말이 예상 외라 놀랐습니다. 영웅 포지션인 아다르가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바카른의 두 아들 음모에 가담하여 바카른을 죽이려다고 되려 찔려 죽고 말거든요. 그리고 바카른의 아들에 의해 되살아나 좀비가 된다는게 끝입니다. 달릴리와 뭔가 관계가 이루어진다던가, 정의가 이루어진다던가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중간에 등장하던 족제비 괴물은 어떻게 되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런 이유로 방대한 설정으로 이루어진 긴 서사물의 일부만 수록된 느낌입니다. 최소한 아다르와 달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아이티 공화국 헌법에 좀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아이티에 진짜 좀비가 있다는 다양한 증언들이 이어지는 작품.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식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같은, 페이크 논픽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고, 좀비가 소금 맛을 보면 죽었다는걸 깨닫고 열일 제쳐놓고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무덤으로 향한다는 설정에 기반한 경험담이 이어질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화이트 좀비>>
아프리카 엔스와지 지방의 행정관 제프리 에일럿은, 어느날부터 느껴지는 악취 탓에 겁에 질렸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결국 에일럿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돌봐준 신부는 과거 에일럿과 함께 했던 전우 싱클레어의 미망인이 수상하다고 말했고, 에일럿은 탐문과 잠복 끝에 그녀가 부두교 주술로 시체들을 조종하는 현장을 목격하는데...

서인도 제도가 아니라 아프리카를 부대로 부두교 주술이 등장하는 이색작. 서술은 장황하지만, 정작 내용은 에일럿이 잠복해서 부두교 좀비 축제? 현장을 목격하고, 거기서 싱클레어의 모습을 확인한 뒤 부두교 주술솨를 쏴 죽인다는게 전부입니다. 악취라던가 불길한 안개 등의 설정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신부의 존재도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좀비 사건의 원인, 결과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싱클레어 부인이 부두교 주술에 빠져 시체를 되살렸는지는 아프리카의 심장 운운하며 농장 관리 목적이었다고 소개되지만 명확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싱클레어를 되살릴 이유도 없었고요. 에일럿이 악취를 느낀 이유 역시 밝혀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딱히 아프리카일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묘사만으로 작 중 무대가 아프리카처럼 느껴지지도 못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할로 맨>>
한 남자가 아프리카로부터 15년만에 영국으로 찾아왔다. 그는 부두 거리를 헤메다 모모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모모는 자신이 15년 전에 죽여 매장했던 고팍이 자기 식당으로 들어오는걸 보고 경악했다. 고팍은 표범 인간이 자신을 깨웠다며, 자기를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모모가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라면서.
식당에 고팍이 머문 뒤, 식당은 서서히 망해갔고, 딸 버블스마저 고팍에게 홀려 생기를 빼앗기자 모모는 고팍을 또 다시 한 번 죽일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은 자가 돌아왔다가, 다시 죽음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는 내용의 작품.
그렇게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무서울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무서운 포인트를 제대로 묘사하고 있지 못하는 탓입니다. 일단 모모 시점의 심리 묘사가 부족해요. 과거에 저지른 죄로, 손을 씻고 가족과 열심히, 단란하게 살아가던 소시민에게 지옥문이 열린 상황인데, 고팍의 존재를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묘사에서는 절박함이나 어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거든요.
내용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왜 표범 인간이 고팍을 되살렸는지, 고팍이 영국에는 어떻게 왔는지 등이 모두 드러나지 않아요. 버블스의 생기를 빼았는다는 것도 대충대충 넘어가고요.
결말도 허무합니다. 결국 고팍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걸로 마무리되는데, 이럴 거였다면 왜 진작에 없애지 않았는지 의문이에요.

여러모로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만 물씬 났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나는 농부 폴리니스로부터 아이티 지역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들었다. 다른건 유럽과 흡사했지만, 이 지역에만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바로 좀비였다. 나는 좀비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좀비"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작품으로 아이티에서 사람들이 단단한 대리석 무덤에 묻히고 싶어하고, 자기 집 마당에 묘를 만들고, 사람들 왕래가 많은 길가나 도로변에 무덤이 많은 이유로 좀비를 설명하는 등, 좀비를 실존하는 것 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장치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아이티 형법을 증거로 내미는 장면도 그런 장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폴리니스가 해 준 늙은 추장 조제프가 데려온 좀비 이야기는 이 책에 앞서 수록되어 있는 다른 아이티 좀비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좀비가 소금기를 접한 뒤 다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최후까지요. 좀비가 되었던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조제프에게 복수를 했다는 결말 정도만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원조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발표 당시에는 굉장히 새롭고, 무서운 이야기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이 작품을 다른 유사 작품들보다 앞서 수록하지 않은 이 책의 문제가 너무 커 보입니다. 지금 책의 구성은, 후대의 아류작으로 원조의 가치가 퇴색되는 셈이거든요.

하여튼, 원조라는 역사적 가치를 더해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투셀의 창백한 신부>>
흑인 부자 마티외 투셀은 스무살은 어린 혼혈 아가씨 카미유와 결혼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결혼 기념일에 투셀은 카미유를 시체와 함께 하는 파티에 초대했고, 카미유는 미쳐버리는데....

화자가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를 쓴 글 형태로, 화자의 말대로 '흐지부지되었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품입니다. 결말이 없거든요. 투셀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투셀이 파티가 연 의도가 무엇인지, 시체들은 누구였는지, 아내에게 1년간 비밀을 지키다가 갑자기 시체 파티에 초대한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딱히 무섭지도 않았고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문제가 많았던 소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점비>>
그랜빌리 씨는 1차 대전에서 폐를 다친 뒤, 서인도 제도 세인트크로이 섬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섬에서 친해진 제프리 다 실바와 럼주 칵테일을 함께 하던 어느날, 그랜빌리 씨는 '점비'에 대해 물었고 다 실바는 자기가 젊었을 때 목격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나온 집사 출신이라는 작가 이력이 특이했던 작품. 이런 이력이라면 좀비가 실제 있는 것 처럼 묘사되는 작품은 쓰면 안되는게 아니었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작품은 작가 이력만큼 특이하지는 않습니다. 다 실바가 친구 이베르센이 죽은 날, 이베르센의 유령을 만나고, 밤길에서 공중에 떠 있는 점비를 목격하고, 이베르센 집에서 개 인간을 만났다는 체험담이 이어질 뿐으로, "내가 했던 무서운 체험" 류의 기승전결없는 괴담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점비'나 개인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도 없고요.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줄 래야 줄 수가 없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 감염 지대>>
고든 파넘 박사는 아발론 섬에서 불사에 관련된 연구를 하다가, 죽은 시체를 되살리는 혈청을 개발했다. 마침 섬에 닥친 화산 폭발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박사는 혈청을 이용하여 그들을 되살릴 생각을 하는데...

부두교 주술로 되살아난 시체가 아닌, 과학의 힘으로 되살린 좀비가 등장하는SF 호러물입니다. 앞서 잭 런던의 단편과 비슷한 소재이지만, 되살리는 과정을 나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하는게 큰 볼거리였습니다. 특히 인체는 기계와 같다는 등의 고든 파넘 박사의 생명에 대한 이론이 아주 재미있고 풍성했습니다. 이 이론과 박사가 여러 동물로 진행하는 실험으로 이야기 여러 개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요. 예를 들어, 불멸성을 부여받은 실험체들이 번식을 통해 불멸성 유전을 증명했지만, 태어난 실험체들이 태어난 상태를 유지할 뿐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별도의 단편으로 꾸며도 재미있겠더라고요.

시체가 되살아나지만, 영혼과 두뇌가 없이 본능만 남은 상태라 야수로 돌변한다는 발상도 아주 좋았어요. 이들이 죽지 않는 상태로 군대, 경찰을 휩쓸어버리고, 잘려진 손발이 꿈틀대며 잘린 조각들이 엉망으로 붙어 괴물이 되어버리는 묘사도 일품이었고요. 절대 죽지 않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화산 폭발을 이용하여 우주 공간으로 날려버린다는 아이디어도 신선하더군요. 스케일이 정말 남다릅니다.

물론 화산 폭발을 사람이 제어한다는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들기에,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이 정도 허풍은 충분히 허용범위 안쪽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아니 시대를 초월한 끔찍한 아비규환을 그려낸 SF 좀비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영화로 나와도 아주 근사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21/09/24

추석 연휴, 오랫만에 가족 영화 감상!

이번 추석은 정말 오랫만에 가족끼리 모여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넷플릭스로요. 첫 번째로 본 영화는 <<엑시트>> (2019) 였습니다.




2019년, 거의 천만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깜짝 흥행에 성공했던 재난 코미디 액션 영화죠.

인상적이었던건 액션 장면 연출이었습니다. 독가스 테러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암벽 등반이라는 특기를 살려 고군분투하는 주인공들의 노력이 잘 그려지거든요. 이 액션 장면을 위한 각본도 섬세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복선이나 여러가지 장치들이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어서 보는 재미를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용남의 철봉 훈련 장면에서 시작해서, 그가 학교 때 산악 클라이밍 동아리 활동을 했다는걸 자연스럽게 알려준 덕분에, 뒤이은 건물 외벽 타기에 큰 설득력을 부여해 주는 식으로요. 고깃집 연기 빨아들이는 장치가 독가스를 빨아들여서 용남과 의주가 위기에 처하는 장면같이, 한국적인 요소를 잘 활용하는 것도 볼거리였고요.
각본은 간간히 섞여 있는 코믹한 장면들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널리 알려진, 노래방 기기용 스피커로 "따따따 따 따 따..."를 외치는 장면 등이 그러합니다. 참고로 제 딸아이의 베스트 픽은 대학생 때 용남이 의주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뒤, 버스 정류장에서 대성통곡하는 장면 이었습니다.

그러나 독가스 설정은 여러모로 무리수로 보이기는 했습니다. 고작 탱크로리 한대 분의 독가스가 드넓은 지역에서 고층 건물 위까지 독성을 유지한채 상승하면서 퍼진다는게 영 와 닿지 않았거든요. 아래에서 일어난 폭발로 인한 일시적인 가스 상승 장면은 설득력이 있었던 만큼, 아래 쪽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독가스가 상승했다고 하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또 용남과 의주를 두고 떠난 헬기가 분명 생존자가 남아있다는걸 알고 있을텐데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물론 머리로 생각하면서 보는 영화가 아니라, 머리를 비우고 보는 오락 영화인만큼 이런걸 큰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추락한 용남과 의주가 살아난 이유를 엔딩 크레딧에서 보여준건 조금 무책임했다고 생각되네요. 어차피 구조 뒤의 이야기까지 보여줄 거였다면, 살아난 과정도 제대로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제 딸도 저 언니, 오빠가 어떻게 살아난거냐고 어안이 벙벙해 하더라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가족 오락 영화로는 충분히 차고 넘쳤다고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흥행을 보니 2편이 안 나올 수가 없는데, 1편에서의 소원대로 높은 건물에 사무실이 있는 대기업에 취직한 용남의 분투가 이어지지 않을까 싶네요.

두 번째로 본 영화는 <<수퍼 소닉>>(2020)이었습니다.
 

2020년, 코로나 시국에 개봉하여 전 세계 3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두었었지요. 솔직히 다른 게임 원작 영화들처럼 처절하게 망할 줄 알았는데 놀랐습니다. 도대체 왜 성공했나 싶어서 보게 되었네요.

보고나니 왜 성공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소닉이 귀여워요! 소닉의 모든 행동,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귀엽습니다! 제 딸아이는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다가 물에 빠진 소닉이 몸을 흔들어 물을 말리는 장면만 보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몸말린 버젼 인형이 나오면 하나 사야겠다 싶었습니다.

소닉의 초 스피드도 잘 구현되어 있으며, 소닉과 인간 톰과의 관계와 줄거리, 액션간의 배분도 잘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가족 오락 영화로는 잘 만든 영화였어요. 게임을 잘 몰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점도 좋았고요.

짐 캐리의 과장된 연기를 비롯해서 '유치하다'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이 한, 두개는 아니지만 아이와 함께 보기에는 그럭저럭 적당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09/19

커피인문학 - 박영순 : 별점 2점

커피인문학 - 4점
박영순 지음, 유사랑 그림/인물과사상사

커피의, 그리고 커피가 관련된 역사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는 식문화 관련 인문학 서적.

책은 커피의 간략한 역사에서 시작하는데, 이 책에 따르면 커피는 에디오피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예멘을 거쳐 이슬람 세계에 널리 퍼졌고, 오스만 제국 시기에 베네치아를 통해 유럽에 상륙하여 대중화 되었습니다. 164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고, 이후 각국에 사람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는 곳에 관련된 시설들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당시에는 간판도 없어서 사람들이 '커피'라는 말로 그 장소를 특정한게 '커피'를 뜻하는 '카페'가 마시는 공간까지 아우르게 된 이유입니다.
커피 추출법은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 이스탄불 시대부터 기록이 전해진다는군요. 지금까지 전해지는 '터키시 커피' 방식으로 '체즈베'라는 도구에 볶아 빻은 커피콩을 끓여내는 방식이지요. 이후 유럽에서 가루를 걸러내기 위한 필터를 도입했고,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해 생크림을 얹거나 우유를 가미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1711년에 천주머니에 원두가루를 채워 '우려내기' 방식으로 마시기 시작했고요. 1908년에는 독일의 멜리타 벤츠가 드립법을 창시했고, 1906년 이탈리아에서는 최초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발표했습니다. 1933년에는 비알레티의 모카포트가 발명되었고요. 1938년, 아킬레 가치아가 드디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현대적인 에스프레소 머신을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와 함께 커피에 관련된 일화도 소개해줍니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라던가, 볼테르는 하루에 40~50잔의 커피를 마셨고, "커피가 독이라면, 그것은 느리게 퍼지는 독일 것이다"는 말을 남겼는데, 실제로 84세까지 장수했다고 하는 이야기들이요. 그 외 루소, 탈레랑, 나폴레옹,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등 여러 유명인들이 등장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커피가 대중화 된 이유는, 일본인들이 우유 먹기를 힘들어하자 메이지 정부에서 커피에 섞어 마시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소소한 역사도 재미있었고요.

그리고 미국의 독립, 조선의 커피 음용이나 우리나라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커피 역사도 알려준 뒤, 각 주요 커피 산지에서 커피가 재배된 역사와 현재를 다루는 이야기가 책 마지막까지 이어지는데, 크게는 브라질과 자메이카, 파나마, 르완다와 우간다, 하와이, 콜롬비아 순입니다. 이를 통해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된 건, 대공황 등 여러가지 이유로 추락한 자메이카 커피 산업에 1960년대 일본 자본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부터였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일본은 명확한 품질 관리와 최고 등급 커피의 세계 시장 유통을 인위적으로 조절했고, 커피 생두를 오크통에 담아 파는 고급화 전략으로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을 세계 최고급 커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맛도 맛이지만,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 외 파나마 게이샤 커피의 역사와 르완다 커피의 감자맛 결함, 하와이와 콜롬비아 커피의 역사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읽다보니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가 바로 떠올랐습니다. 특정 음료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적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유명 산지와 주요 결과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지요.
그러나 책의 완성도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커피에 대한 과대평가가 너무 심하다는 겁니다. 이런 시각은 <<커피견문록>>에서 이미 접했었지만 그 정도가 더욱 심해요. 커피가 프랑스에서 계몽 사상을 일깨운 각성제로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냈고, 미국에서 커피가 독립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한건 커피 때문이다라는 식으로요. 뒤로 가면 갈 수록 더 가관입니다. 조선에서 모던 보이들 중심으로 커피하우스 개업이 이어졌지만, 주권 회복을 위한 시대적 각성과 독립을 위한 저항심을 기르는 커피와 카페의 역할이 작동한 사례가 발굴되지 않았다면서 아쉬워하는 식이니까요. 대관절 커피가 독립 운동과 무슨 상관이랍니까?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는. 뭐라 언급하기도 어려운 억지스러운 발상이었습니다. 커피에 계몽의 힘 따위는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커피가 아니라 카페인의 힘이에요. 이런 각성이 중요하다면, 다른 각성제도 다 마찬가지겠지요.

목차가 명확히 정의되지 못하고 두서없이 섞여있는 구성도 아쉽습니다. 각 주요 산지의 커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커피가 선악과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식이에요. 재미있는 주제이고, 한 번 볼 만 했지만 이는 커피 역사 부분에 포함시켰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생각됩니다.
심지어 같은 주제 안에서도 두서가 없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우간다 커피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우간다 로부스타는 로부스타 중에서도 품질이 좋기로 소문나 인스턴트 커피용보다 에스프레서 블렌딩용으로 인기가 높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우간다 로부스타종은 인스턴트 커피의 주 원료로 이용되고 있다는 글로 마무리되지요. 뭐가 맞는걸까요?

도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커피로 그렸다는 일러스트도 구태여 필요했을지 의문입니다. 잘 알려진 사진이나 그림을 그대로 모사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들이 많고, 내용에 꼭 필요했는지도 의문이며, 그리 잘 그린 것 같지도 않거든요. 실제 그림에서는 커피 향이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인쇄된 책으로 보는데 커피로 그렸어야 할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커피에 대한 역사를 알 수 있고, 여러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인 건 맞지만, 단점도 명확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많은 커피 관련 책을 읽어봤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두드러진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9/18

재미있는 식물 산책 도감 - 하나후쿠 코자루 / 이태용 : 별점 1.5점

재미있는 식물 산책 도감 - 4점
하나후쿠 코자루 지음, 이태용 옮김/성안북스

'산책길에 만나는 풀꽃과 나무의 재미있고 비밀스런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계절마다 길에서 흔히 보는 꽃과 나무들 100종을 간단한 만화 한 페이지와 사진과 짤막한 소갯글 한 페이지로 알려주는 책.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만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구입했습니다. 도감류는 원래 좋아했고, 만화도 재미있어 보였으니까요.

일본의 들꽃이지만 민들래, 냉이, 강아지풀, 싸리, 억새, 칡 및 대부분의 나무들은 우리 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자가 남편과 꽃가게를 하는 프로 원예가인 덕분에 전해주는 괜찮은 정보도 제법 많고, '석산'은 교배로는 번식을 못 해서 모두 같은 유전자를 지녔다던가, 마타리 뿌리에서 장 썩은 냄새가 나고, 때죽나무의 덜 익은 열매에는 에고사포닌이라는 유독 성분이 있다는 등의 내용은 흥미로왔었고요.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지만, <<녹나무의 파수꾼>>으로 친숙해진 녹나무 소개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부분은 극소수일 뿐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실망스러웠어요. 우선 도감 측면에서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거든요. '도감' 이라면 모름지기 그림으로 해당 주제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어야 할 텐데, 만화로 그려낸 그림은 도감으로 보기에는 부실했고,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은 절반 정도는 설명하는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도감'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 자체가 거의 사기가 아닌가 싶네요.
깊이있는 정보를 알기도 불가능합니다. 사진을 빼면 반 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분량으로 깊이있는 설명을 하는건 애시당초 무리니까요. 그나마의 설명글도 인터넷 사전 등에 있는 정보를 반복하는 내용 외 특별한 저자만의 정보도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화도 영 별로에요. 꽃과 나무에 관련된 일상툰같은 이야기가 많았더라면 재미라도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도감과 만화 양 쪽 모두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2021/09/17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설혜심 : 별점 3점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6점
설혜심 지음/휴머니스트

지적인 흥분과 읽는 재미를 동시에 전해주는 여러 미시사 저작물을 발표했던 설혜심 교수의 신작. 책을 펴낸 이유를 설명하는 서두를 보니, 코로나로 인해 여러모로 쌓였던 스트레스 해소 차 썼다고 합니다. 본업과 별개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만한 책을 쓸 수 있다니, 그 내공이 정말 놀랍네요.

저자 스스로 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는데, 독자가 보기에는 'B급 문학을 역사 연구의 소재로 활용'해보는 모험적 시도의 결과물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립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을 통해 당시 '영국의 세계관'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니까요. 그만큼 여사님 작품이 당시의 실재를 잘 반영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사님 작품에 온갖 저택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여사님 본인이 집 보러 다는게 취미일 정도로 열성적인 부동산 투자자이기도 했습니다만, 당시 영국인들이 대체로 집에 대한 집착이 어머어마했다는걸 설명해 주고 있거든요. 이 집착이 '대영제국'을 만들었다는 해석이 특히 그럴 듯 했습니다.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인들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 거창하고 복잡한 소유권 선언 의식부터 했는데, 영국인들은 사는 집부터 짓고 자기 영역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랍니다. 점유를 통해 해당 땅을 지배한다는 현대적인 부동산 논리인 거지요. "아무리 낡아 빠진 집이라도 그것이 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다."고 푸아로가 말하는 작품도 있는데, 이제야 그 좀 납득이 되네요.

1차, 2차 세계 대전 중 '병역 면제'에 대한 사실과 사회적 인식도 여사님 작품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머랭 살인 사건>>의 주인공 보비 존스가 입대 직후 시력 문제로 제대했던 이유부터 볼까요? 1차 대전 때 입대 전 신체 검사를 민간 의사들이 시행했는데, 이들의 수당을 적합 판정을 내린 신병 수만큼 지급했던 탓이랍니다. 그래서 '적합' 판정이 남발되어서 군대에 가면 안되면 보비 존스조차 입대하게 된 것이었지요.
이는 1차 대전 이야기이고, 2차 대전 때는 징집 대상이 여성까지 확대되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직업군은 오히려 병역이 배제되었으며, 여기 농부가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 농과 대학 입학 경쟁이 치열했다는 등의 사실은 <<파도를 타고>>의 롤리와 린을 통해 알려줍니다. 전쟁 당시 롤리는 일하던 농장에 묶였지만, 약혼녀 린을 징집되어 참전했었다는 설정이거든요. 더불어 롤리가 지옥같다고 묘사한 이 상황으로 당시의 사회적 인식도 쉽게 알 수 있고요.
또 <<쥐덫>> 등 여사님 작품들은 대체로 군대에서 복무했던 여성들은 똑똑하고 유능했던 반면, 남성들에게는 군대가 지능이 별로 필요없는 집단이라는걸 드러내는 묘사가 많았다는 걸로 당시 군인에 대한 여사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실패했던 첫 결혼의 상대방이 장교 출신인 탓도 어느정도 있었겠지요? 당시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대접받고 경쟁했을만한 곳은 전시 군대가 유일했다는 점도 한 몫 했겠지요.

이른바 '영국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다양한 작품에서의 등장인물들 대사로 제국주의, 인종 및 타 국가에 대한 편견과 같은 당시 영국 국민들 의식을 쉽게 알 수 있었어요. 여사님 스스로가 이를 '섬나라 근성'이라며 비꼬는 묘사도 인상적이었고요. 이유보다 현상만 채집하여 선보이고 있다는 약점은 있지만, 이런게 실재하는 역사이자 진정한 사람들 관점의 미시사라는 생각도 듭니다.

"돈" 항목은 이런 관점의 미시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터펜스가 <<비밀 결사>>에서 이야기했던, 오직 세 가지 뿐인 돈 버는 방법에서 시작됩니다. "물려받거나, 결혼하거나, 직접 벌거나" 라고 하지요. 그리고 여사님 작품에 많이 나오는 몰락한 귀족과 미국 부자의 결혼이라는 상황과 실제로 20세기 초반 귀족들이 몰락하면서 미국 대부호 딸과 결혼했던 사례를 연이어 소개하는 식이거든요. 대표적인 "달러 프린세스"로 소개된건 처칠의 어머니 레이디 랜돌프 처칠이었고요. 실제로 돈을 벌어 자수성가한 사람들 이야기가 없는건 조금 아쉬웠지만, 여사님 작품 속 이야기를 실재 역사적 상황과 맞추어 설명한 아주 좋은 사례라 생각되네요.

하녀, 하인들 이야기가 주로 소개된 "계급"도 미시사적인 측면에서 볼 만 합니다. "돈"과 마찬가지로 하녀에 대한 당시 시각과 인식을 여사님 작품은 물론, 여러가지 실제 자료를 통해 잘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식과는 다르게 20세기 초만 해도, 어머니들이 딸들에게 하녀 일을 추천했었다는게 기억에 남네요. 도시의 악덕으로부터 젊은 처녀를 보호하고, 상층 계급의 사회적 규범을 익힐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나요? 운만 좋으면 좋은 혼처를 찾을 수도 있었고, 여사님 작품에서처럼 거액의 돈을 상속받을 수도 있었으니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상류층들도 하인에게 예의를 갖추는게 제 1원칙이었다니 지금보다도 고용살이하기는 더 나은 시대였을걸로 생각도 되고요. 물론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주머니 속의 호밀>> 등 하녀가 불쌍한 희생자가 되는 작품도 제법 많습니다만....

그 외에도 심령 현상, 강신술과 관상 등으로 대표되는 '미신'에 대한 당시 인식, 미스 마플 이야기와 미시사라는 학문의 핵심이 일치한다는 주장 등도 모두 미시사적으로 볼만 했었습니다. 미시사에 대한 이론은 특히 와 닿았습니다. 저는 그냥 쉽게 특정한 분야, 특정 시기만을 집중적으로 조망하는게 미시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미스 마플이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 처럼, 일반적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일반 사람들과 개인의 삶을 집중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관계를 밝혀내는 것이지요. 앞으로 이런 부분을 좀 더 유념해서 책을 읽어봐야 겠습니다.

순수하게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의 팬으로서 즐길 요소도 많았습니다. 탐정 에르큘 푸아로 캐릭터 유래처럼요. 그가 벨기에인이었던건 여사님이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을 쓸 무렵, 근처에 살고 있었던 벨기에 난민을 떠올렸던게 계기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영국인들 도움에도 별로 고마와하지 않고 불평을 늘어 놓았는데, 거기서 푸아로의 까탈스러운 성격이 빚어진 것이고요. 푸아로는 벨기에라는 나라가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무시해도 좋을' 나라라서 쉽게 받아들여졌다고 하는데, 프랑스 인이었다면 지금의 푸아로와 같은 인기는 없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탈 것'을 통해 여사님 작품 속 자동차, 기차, 비행기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이 대표적이에요. 밀실처럼 폐쇄된 공간이고, 승객들은 모두 우연히 모엿으며, 갇혔지만 창 밖을 볼 수 있고 중간중간 정차해서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기차는 추리 소설 무대로 적합하다는 이론도 기억에 남고요. <<부산행>>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와 일치했던 덕분입니다. 그런데 탈 것에 '배'가 등장하지 않는건 좀 의외네요. <<나일강의 죽음>>의 주 무대가 유람선이었는데 말이지요. 외국 여행을 위해 유람선에 모인 영국인들은 미시사 적으로 해석하기 아주 적합한 소재인데 왜 빠졌을까요?

하지만 모든 주제가 여사님 작품으로 당시 영국 세계관, 상황을 돌아볼 수 있다는 목적에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독약"은 당시 영국 상황보다는 애거서 크리스티 개인에 관련된 주제였습니다. "교육"에 등장하는 여러가지 상황들도 마찬가지에요. 여사님이 사립학교 출신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건, 해로 출신이자 난봉꾼이었던 오빠 몬티 탓, 그리고 여사님이 제대로 된 학교 생활 경험이 없다는 탓이 컸으니까요.
"섹슈얼리티", "신분 도용"은 여사님 작품 속 해당 주제에 대해서는 잘 분석되어 있는 결과물로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사님 작품 속 동성애, 포와로와 헤이스팅스의 관계 분석은 팬으로서는 눈여겨 볼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고요. 그러나 이를 당시 시대상과 잘 엮어서 설명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호텔" 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보이 호텔과 리츠 호텔의 간략한 역사와 함께 <<버트램 호텔에서>>의 버트램 호텔 모델이 어디인지에 대한 해석이 거의 전부로, 일종의 미시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호텔에 국한된 내용이었을 뿐입니다.
반대로 "배급제"는 전쟁 때 시작되어 1950년대까지 이어진 배급제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만, 정작 여사님 작품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여사님 관련 이야기도 작품보다는 자서전 내용이 중심이고요.
또 앞서 말씀드렸던 미시사적인 부분들도 재미는 있지만, 뒷받침하는 사료와 근거가 많지 않고, 분량도 적어서 깊이있는 내용으로 보기 어려웠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유명 작품, 여사님이 직접 뽑은 베스트 10 과 같은 작품보다 <<파도를 타고>>와 같은, 특정 작품에 등장했던 상황과 대사 소개가 많은 것도 아쉬웠어요. 여사님의 전작을 둘러본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었거든요. 저자가 소개한 소재도 미시사적으로 좀 더 의미있게 선보였다면 좋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탈 것"에서 다양한 차들을 열거하는데 그치지 말고, 그 차들의 연대 순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식으로 말이지요.
아울러 저자의 책 치고는 도판도 딱히 볼만한게 없었습니다. 여사님 소싯적(?) 사진들 정도가 눈에 뜨이는 정도입니다. "탈 것"에서 열거된 차들 사진과 같은 도판은 수록해주는게 좋았을 거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역사적인 깊이 측면, 그리고 여사님 작품의 깊이 있는 분석 양쪽 모두에서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래도 여사님 팬이라면 흥미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주제인데다가, 여사님 작품을 미시사적으로 접근한다는 아이디어 만큼은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글도 쉽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고요. 추리 소설, 역사 관련 저서를 모두 좋아하는 저에게는 불만없는 독서였어요.

2021/09/12

간송미술 36 : 회화 - 백인산 : 별점 2.5점

간송미술 36 : 회화 - 6점
백인산 지음/컬처그라퍼


간송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나라 국보급 서화 중 36점을 엄선하여 소개하는 책. 저자 개인의 의견이고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저자가 간송 미술관장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공신력은 확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선정한 서화에 대한 상세한 도판과 서화에 대한 소개가 어우러지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그 서화를 왜 선정했는지와 그 서화를 창작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실려 있습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와 비슷한 구성입니다. 하긴 이런 책이 다 그렇지요. 그래도 간송이 작품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알려주는 몇몇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문화와 예술,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이야기하는데 적합한 작품을 선정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단순히 창작자의 이름값이나 서화 자체의 유명세에 기대고 있지는 않다는 점도 차이점이고요.
이런 선정 기준답게, 당시의 풍속화라던가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그림들이 꽤 많이 선정되어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는 특히요. 이름도 잘 몰랐지만 당대에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삼재'라고 불리었다는 관아재 조영석의 <<현이도>> 가 대표적입니다. 장기를 두는 선비들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 좋은 작품이에요. '현이도'는 공자가 마음 쓸 곳이 없으면 차라리 바둑이나 장기라도 두어라라는 말에서 유래한 제목이라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이 말을 선비들이 장기 두는 그림의 제목으로 삼다니, 완전 자기 멋대로의 해석인 셈입니다. 그 외에도 거하게 취한 선비를 그린 <<대쾌도>>, 윤용의 <<협롱채춘>>, 김홍도의 <<마상청앵>>, 김득신의 <<야묘도추>>, 신윤복의 <<미인도>>와 <<이부탐춘>>이 선정 기준에 부합하는 풍속화들입니다. 36점 중 7점이니 무려 20%의 비중이네요.
물론 풍속화는 일부일 뿐이며, 신사임당에서 시작해서, 진경 산수의 거장 겸재 정선, 진경 산수에 중국 남종화풍을 합쳐 조선만종화풍을 만들어낸 심사정, 풍속화의 거장 김홍도와 신윤복, 이념미를 추구하는 청대 문인화를 조선으로 끌어들였던 김정희의 작품들이 엄선되어 소개되어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은 물론, 조선 시대 화풍의 변화를 잘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런데 풍속화도 그렇고, 다른 작품들도 그렇고, 완성도보다는 시대를 대표하느냐가 더 중요한 선정 기준이었던 듯 합니다. 윤두서의 <<심산지록>>이 그러해요. 작품의 평가보다는 공재 윤두서의 현실과 시기적으로 조선 중기, 후기 화풍이 교차하던 당시 상황을 잘 반영했고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소개되고 있으니까요. 허나 문제는, 당대 화풍을 대표한다는 등의 설명 외에 미학적으로 "왜 이 작품이 뛰어난지?"가 잘 설명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추사 김정희의 <<고사소요>>를 설명하면서, 고도의 기교로 그려진 그림이다, 화의와 묘법 모두 추사의 지향과 이상이 잘 구현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게 뭔지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보기에는 그냥 잘 못 그린, 집에 걸어 두라면, 별로 걸어두고 싶지 않은 그림이었거든요. 이렇게 설명할 거라면, 고도의 기교는 물론 추사의 화의와 묘법이 무엇인지도 자세히 알려주었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이러저러해서 추사의 문인화를 대표한다고 자세히 알려주던가요. <<세한도>>처럼 명확하게 미학적 가치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해주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또 이정과 심사정, 김홍도의 작품은 각 세 점 씩, 겸재 정선의 작품은 무려 다섯 점이나 소개되는 등 중복이 심하며, 도판도 완벽한 수준이지만, 실물 사이즈로 보아야 잘 알 수 있는 느낌을 받기는 부족하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런 류의 책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대형 작품의 경우 실제 사이즈 크기 도판을 접어서 제공한다던가, 아예 부록으로 제공하는 책들도 있었는데,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지요. 설령 그렇게 제공했다 치더라도 <<촉산도권>>같은 7미터가 넘어가는 대작 느낌을 제대로 알려주기는 턱없이 부족했을 겁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쉽게 대중이 접하기 힘든 간송 미술관 서화의 정점을 집에 비스무레하게나마 소장하여 꺼내볼 수 있는, 도록으로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만, 관련된 정보의 전달 측면에서는 다소 미흡했다고 여겨집니다.

2021/09/11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피터 스완슨 / 노진선 : 별점 1.5점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4점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푸른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조울증 환자인 판화가 헨은 남편 로이드와 함께 교외 전원 주택으로 이사했다. 이웃 부부와 친해져서 저녁 초대를 받은 날, 헨은 이웃집 서재에서 더스틴 밀러 살인 사건 현장에서 사라졌던 펜싱 트로피를 발견했다. 이를 통해 범인이 이웃집 남편 매슈라는걸 눈치채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헨이 정신병 때문에 저질렀던 과거 이력 탓에 경찰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매슈는 진범이 맞았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잔인하게 학대했던 아버지 때문에, 여성을 비참하게 만드는 남자들을 응징해 왔었다. 그는 헨이 경찰에 신고한 뒤에도 밴드 보컬 스콧을 살해했고, 그 현장을 헨에게 들키고 마는데...

이전에 읽었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저자 피터 스완슨의 신작 범죄 스릴러.
이 작품처럼 "나는 범인을 알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상황을 이용한 작품은 많습니다. 보통 이런 류의 작품 재미요소는, 주인공이 거짓말을 한다고 여겨져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과정, 그리고 이 상황에서 주인공이 벌이는, 자신을 죽여 입막음을 하려는 범인과의 고독한 싸움이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사뭇 다릅니다. 주인공이 범인을 알게 된 뒤, 범인과 주인공이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가 된다는 획기적인 전개로 나아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새로운 발상이 성공적인 건 아닙니다. 헨이 매슈에게 죽을리 없다는게 밝혀진 순간, 스릴이나 서스펜스를 잦을 수 없게 되거든요. 서로간의 비밀을 공유하는, 정신병자 남녀의 기묘한 우정 드라마로 변해 버립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작가가 매슈의 동생 리처드를 살인마로 등장시킨 건 최악이었습니다. 원래 A는 B와의 관계로 위협을 받는게 정상인데, A와 B가 사이가 좋아져버리니 C가 등장하는 꼴입니다. 긴 머리 소녀와 단발 머리 소녀 두 명을 동시에 사귀는 일로 괴로워하다가 (명백하게 <<오렌지로드>>의 카스가 쿄우스케!), 새로운 사랑인 안경 소녀를 찾는다는 오래전 <<호에로 펜!>> 이야기와 똑같지요. 문제는 이건 개그만화였다는거....
여자를 괴롭히는 악당 남자만 죽이는 매슈와는 다르게, 리처드는 남자들을 유혹하곤 하는 여자들을 죽이는 살인마라는 설정도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리처드는 사실 매슈의 이중인격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은 비슷한 작품을 워낙에 많이 접해보아서 진작에 눈치챌 수 있었어요. 이중인격은 이제 옛날 기억상실처럼 마구 가져다 쓰는 설정인 탓입니다.
그나마 반전이 설득력있게 제공되지도 못합니다 애초부터 이중인격이었다면, 왜 매슈가 이전에 범행을 저질렀을 때에는 남자를 죽이지 않았던 걸까요? 이전에는 남자를 죽인 뒤 매슈에게 꼬리쳤던 여자가 없었다? 말이 안됩니다. 매슈는 데이트 폭력을 휘두르던 미라의 전 남자친구를 죽인 뒤, 미라와 교제해서 결혼까지 했으니, 꼬리치는 여자를 죽인다면 이 때 미라를 죽였어야 했어요.

매슈가 이중인격 연쇄 살인마가 된 이유인 형제 아버지가 어머니를 가혹하게 학대했었던 탓이라는 설정도 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정 폭력이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정신병자 살인범이 된다는 시각을 강요하는 느낌이라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요.
헨에게 정신병이 있다는 설정도 식상하기 그지 없습니다. 왜 이런 류의 작품에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정신이 온전치 못한 걸까요? 헨이 친구를 의심했던 탓에 사고를 일으켜 전과가 생겼다는 과거 역시 그녀의 정신병을 드러내서 주위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걸 당연하게 만드려는 장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범죄 스릴러치고는 정교함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매슈가 스콧을 살해한 범행이 대표적이에요. 매슈는 헨이 경찰에 신고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심지어 경찰의 방문 조사를 받은 직후 스콧을 살해합니다. 당장 죽였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범행 역시도 이런저런 도구와 준비를 갖추기는 하나, 결국 우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딱히 정교한 완전범죄로 볼 여지가 없어요. 실제로 헨이 범행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요.
리처드의 범행은 더 엉망입니다. 미셸을 죽이고 헨을 죽이러 왔을 때 모두 범죄를 숨기려는 노력이 전무하거든요. 이중인격이 된다고 해서 바보가 되는건 아닐텐데 말이지요. 여러모로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그나마 재미있었던건, 헨의 남편 로이드가 바람을 피웠다는 매슈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는 부분 정도였습니다. 헨이 로이드 옷의 냄새를 확인한 뒤, 친구에게 교묘하게 정보를 빼내어 바람 피운걸 증명하는 과정은 괜찮은 일상계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매슈의 말은 그냥 넘겨짚었던 것에 불과했고, 그 이유도 '모든 남자는 다른 여자랑 자지 못해 안달난 짐승들이다'는 매슈의 개인적인 지론 하나 뿐이라는건, 결국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인 성범죄자나 바람둥이, 아니면 살인자로 바라보는 사고 방식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하긴, 이 작품이 마음에 안 드는건 이런 작가의 개인적인 사고 방식을 강요하는 탓도 큽니다. 남자는 대체로 악하고, 여자들은 대체로 마음이 병들어 있고, 가정 폭력이 있는 집 아이는 마음이 병든다는 그런 뻔한 논리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최근 유행하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이 주인공인 양산형 여성 시점 스릴러물로 재미도 없고, 새로운 맛도 없으며 범행도 전혀 중요하지 못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차별화할 만한 독특한 요소가 없지는 않으나, 그런 요소들은 모두 다 별로였고요. 두 번 다시 이 작가 작품을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2021/09/10

공기의 바닥 - 데즈카 오사무 : 별점 2점


데즈카 오사무가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 초반에 발표했던 성인풍 단편 극화 모음집. <<동경 표류 일기>>를 읽고, 동시대 감성을 데즈카 오사무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해서 찾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무려 14편이나 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인간 드라마범죄극멜로물기묘한 맛, SF,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장르 스펙트럼을 보여줍니다. 성인물답게 정사 장면도 많고, 근친 상간에 수간!까지 등장한다는게 이채로왔고요. <<블랙잭>>으로 재기에 성공하기까지, 침체기에 놓였던 데즈카의 다양한 시도 중 하나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딱히 재미있지는 않더군요. 지금 읽기에는 진부한 설정과 내용이 많았고, 결말도 대체로 예상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예상 못했던 결말의 경우는, 그 결말이 딱히 좋다고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완성도도 문제가 많습니다. 전개도 잘 정돈되지 못한 작품의 경우는 생각나는대로 그린게 아닌가 의심스러웠거든요. 
대표적인 예가 <<카멜레온>>입니다. 능력있는 직장인 카자마가 주인공인 기업 드라마로 시작해서, 카자마가 산업 스파이라는게 밝혀지면서부터 범죄물이 됩니다. 그러다가 카자마가 자신을 유혹했던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훔쳐낸 정보로 만들어낸 약의 실험 대상이 된 뒤에는 일종의 SF로 돌변합니다. 뇌 사용이 극대화되고 대신 끊임없는 식탐에 시달린다는 설정이니까요. 그리고 카자마를 유혹한 여자는 카자마가 학생 운동을 할 때 밀고로 죽고만 친구의 동생으로 모든건 복수를 위해서였다는 복수극으로 바뀝니다. 결말은 카자마가 말도 없이 화염병을 던져서 여자와 그 아버지가 타고 온 헬기를 파괴한다는, 다소 허무한 마무리였고요. 식탐으로 기형이 되어버렸지만, 분명 머리가 좋아졌을 카자마인데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게 이상했고, 솔직히 뭘 이야기하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수의 끝은 공멸이라는 걸까요? 설령 그렇다손 쳐도, 이 모든걸 설득력있게 풀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었습니다. 분량을 늘렸더라면 그래도 볼 만 했을텐데 말이지요.

엄청난 인종 차별 주의자 오하라가 베트남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부하였던 흑인 죠의 심장을 이식받은 딜레마를 그린 <<죠를 방문한 남자>>, 홈리스 거지로 분장하는 취미가 있는 사장이 한 눈에 반한 거리의 여자와 사장 신분으로 결혼하지만, 그녀는 홈리스 거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밤의 소리>>, 계곡에 갖혀 사는 가족의 비밀이 드러나는 <<우리 계곡은 사람들이 모른다>> 정도는 괜찮았지만,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오히려 <<밤의 소리>>는 결말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청년 사장 가보리가 취미인 거지로 변장했을 때 만나 사랑에 빠진 여인을 자기 회사에 입사시켜 결혼까지 하지만, 그녀가 사랑했던건 홈리스 거지였다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여자가 가보리를 총으로 쏜 시점에서, 그녀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는 약점은 치명적입니다.

한마디로 극화 전환기에 표류하던 데즈카 오사무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들이라 생각됩니다. 좋아하던 모험물, SF에 인간 드라마, 사회 고발 등을 자극적인 성관계와 폭력으로 녹여내고 있지만, 잘하고 좋아하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완성도는 떨어진다는 점에서 말이죠.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9/05

동경 표류일기 - 다쓰미 요시히로 / 하성호 : 별점 3점

동경 표류일기 - 6점
다쓰미 요시히로 지음, 하성호 옮김/북스토리

일본 극화의 창시자 다쓰미 요시히로의 대표작을 모은 단편집. 후기와 연보, 해설 외 모두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소년지에 발표되었다는게 믿기지 않는 어둡고 잔혹한 이야기들이라는게 특징입니다. 잘 그렸다고 하기는 좀 어렵지만, 이런 이야기를 끌고가는데 부족함 없는 작화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데포르메 심한 기존 데즈카 만화 스타일에서 벗어나서,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어두운 이야기를 했다는게 극화의 본질이 아닌가 싶네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들이기는 합니다. 전쟁 직후, 가혹하고 냉정한 현실에서 발버둥치다가 결국 좌절을 맞는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거든요.
냉혹한 가족간 범죄가 기묘하게 드러나는, 약간 하드보일드 스타일 범죄극인 <<지옥>>, 연애물이라 할 수 있는 <<사육>>, 잔혹한 인간 드라마인 <<도쿄 고려장>>, 터프한 복서가 승승장구하다가 마지막에 패배하고 만다는 스포츠 드라마 <<조종>> 등 작품의 장르도 다양하지만, 이야기 패턴이 대체로 동일하다는 약점도 큽니다. 주인공이 좌절을 극심하게 느끼는 순간에 대한 포착과 묘사가 발군이라 이야기 설득력이 높다는 분명한 장점이 있지만, 이 역시 반복되니 조금 식상해요.

그나마 조금 특이했던건 <<사람 있어요>>와 <<조종>> 이었습니다. <<사람 있어요>>는 그냥 실패하고, 좌절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창작 욕구를 잃었던 주인공 만화가는 진짜 그리고 싶었던건 성인 만화였다는걸 깨닫는다는 전개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결국 좌절을 맞는 - 화장실을 엿보는 변태로 전락한다 - 결말 때문에 이야기가 이상해져 버렸어요. 만화가가 '여자 화장실'에 숨어들었다는 뜬금없는 상황 설정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더라고요. 화장실 벽 낙서에서 따 온 이야기를 성인 만화로 그렸다가 인기를 끌지만, 원작자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런 점에서 다쓰미 요시히로라는 작가의 한계가 여실히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좋아하고, 잘 하는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그리는건 능숙하지만 변주를 만드는 능력은 없는게 아닌가 싶었으니까요.
<<조종>>은 내용 구성은 다른 작품과 별다를건 없지만, 비교적 현대적인 작화와 80년대 이현세의 <<지옥의 링>>이 떠오르는게 조금 신기했고요.

그래도 재미있게 읽기는 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실 역사적인 가치를 생각해서 구입했는데, 이 정도면 재미 측면에서도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덧붙이자면, 뒤의 연표를 보니 수록작들 모두가 1970년 이후 발표되었더군요. 극화의 대부로 잘 알려져 있는 사이토 다카오의 <<고르고 13>>이 발표된건 1968년입니다. 데즈카 오사무만 해도 이미 이 때에는 이런저런 성인 극화를 그렸을 때이고요. 우리나라도 독재 시절이라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은 없었지만, '성인 만화'라고 부르는 고우영의 만화가 발표된 게 1970년대 초반이지요. 작풍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를 다룬게 극화라 친다면, 츠게 요시하루의 <<치코>>만 해도 발표된 게 1966년입니다. 다쓰미 요시히로의 작품들이 시대를 앞서갔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쓰미 요시히로가 설령 "극화"라는 말을 창시했다 하더라도, 이미 존재했던 장르에 이름을 붙였을 뿐인데 '극화의 창시자' 로 추앙받는건 조금 어렵지 않을까요? 하드보일드 장르의 거장은 해밋이나 챈들러이지, 그런 류의 작품을 하드보일드라고 명명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조금 재평가가 과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2021/09/04

기묘한 러브레터 - 야도노 카호루 / 김소연 : 별점 2점

기묘한 러브레터 - 4점
야도노 카호루 지음, 김소연 옮김/다산책방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즈타니 가즈마는 유키 미호코에게 30년만에 편지를 보낸다. 페이스북에서 그녀의 사진을 찾아서, 페이스북 메신저로 보내는 편지였다.
미호코와 가즈마의 편지 왕래를 통해, 오래전 있었던 그들의 과거가 하나 둘 씩 밝혀지는데....


가즈마와 미호코 사이의 페이스북 메시지로 전개되는 작품. 처음 몇 번의 메시지는 비교적 차분하고 담담하게 과거에 있었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메시지가 오가며 드러나는 과거 이야기들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둘은 결혼을 약속했었지만 미호코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아서 결혼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고아가 된 가즈마를 키워 주었던 고모부가 가즈마와 약혼했던 의붓 사촌동생 유코와 옛날부터 육체 관계를 가졌다는 것, 미호코는 학비를 벌기 위해 소프랜드에서 몸을 팔았었다는 것 등이 하나씩 드러나거든요.
특히 마지막 반전은 놀랍습니다. 미호코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던건 가즈마의 책상 서랍에서 실종된 소녀의 머리핀을 발견했던 탓이었습니다. 미호코는 이를 통해 가즈마가 소녀 유괴 살인범이라는걸 알게 되었지요. 가즈마가 30년 동안 연락하지 못했던건 미호코의 신고로 체포된 가즈마가 소녀 살인죄로 복역했기 때문이었고요.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었지만, 모범수였는지 30년만에 출소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 반전을 드러내는 전개는 지나치게, 너무나 심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메시지만으로 이야기를 빌드 업 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애초에 말이 안되요. 처음 메시지를 받았을 때 이미 미호코는 가즈마가 소녀 살인범이라는걸 알고 있는데, 과거 아름다왔던 추억 이야기를 하면서 메시지를 이어나간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메시지를 삭제하고 페이스북을 탈퇴했을 겁니다. 설령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해도, 이 작품과 같이 억지로 비밀과 반전을 숨겨가며 진행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즈마가 소녀 유괴 살인범이라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반전도 뜬금없었습니다. 앞서 별다른 복선이나 단서도 없었으니까요. 컴퓨터 쓰는데 능숙하지 않다 정도가 단서가 될리 만무합니다. 그냥 충격적이고 놀라운 반전을 위해 만들어낸 설정에 불과해 보였어요. 이 사실이 드러나는 과정도 미호코가 '우연히' 결혼식 며칠 전, 가즈마 책상 속에서 발견한 머리핀을 발견했기 때문이니 작위적이라는 점에서 똑같고요.
전통적인 편지라면 모를까, 페이스북 메신저로 보낸 글로는 보이지 않다는 것도 단점이에요. 훨씬 단문으로 작성되었어야 했습니다. 신기술(?)을 사용하려면 제대로 했어야지요.

가즈마의 파란만장했던 과거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중학교 때 겪었던 부모님의 교통사고 사망, 자신만 바라보는 줄 알았던 약혼자 사촌 여동생은 아버지같은 고모부와 육체 관계를 진작부터 맺고 있었고, 미래를 걸었던 프로 연극인의 꿈은 부단장격인 미야와키의 자금 횡령으로 무너지고, 결혼을 약속한 연인 미호코는 몸파는 여자였다는 등인데, 이 모든게 한 사람에게 닥친다니, 현실적이지가 않아요. 다른 곁가지 이야기는 다 치우고, 미호코 이야기만을 가지고 풀어나갔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아울러 미호코가 몸을 판 행위에 대해서 당당한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몸을 팔기는 했지만 사랑이 없었으니 단순한 육체 노동에 불과했다는데, 이게 말이나 되나요? 그녀가 이 사실을 숨기고 가즈마와 결혼하려고 했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본인이 그렇게 당당했다면 결혼할 사람에게 숨기면 안되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같은 연극부 단원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제가 봤을 때는 가즈마 급은 아니더라도, 미호코도 인성이 쓰레기인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뒈져버려라 변태 새끼!"라는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는, 시원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단점들이 명확해서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한 번에 볼 만한 재미와 짧은 분량을 갖춘, 킬링 타임용으로 적합하지만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0페이지 초반 분량에 12,000원이 넘어가는 가격도 과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
2021년에 읽기에는 뻔하고, 많이 친숙한 이야기였어요.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그런데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다고 느껴집니다.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사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 하지만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이라 생각됩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거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왔던 작품.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 단편입니다.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이야기.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으로,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힘이 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으니까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