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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5

동경 표류일기 - 다쓰미 요시히로 / 하성호 : 별점 3점

동경 표류일기 - 6점
다쓰미 요시히로 지음, 하성호 옮김/북스토리

일본 극화의 창시자 다쓰미 요시히로의 대표작을 모은 단편집. 후기와 연보, 해설 외 모두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소년지에 발표되었다는게 믿기지 않는 어둡고 잔혹한 이야기들이라는게 특징입니다. 잘 그렸다고 하기는 좀 어렵지만, 이런 이야기를 끌고가는데 부족함 없는 작화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데포르메 심한 기존 데즈카 만화 스타일에서 벗어나서,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어두운 이야기를 했다는게 극화의 본질이 아닌가 싶네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들이기는 합니다. 전쟁 직후, 가혹하고 냉정한 현실에서 발버둥치다가 결국 좌절을 맞는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거든요.
냉혹한 가족간 범죄가 기묘하게 드러나는, 약간 하드보일드 스타일 범죄극인 <<지옥>>, 연애물이라 할 수 있는 <<사육>>, 잔혹한 인간 드라마인 <<도쿄 고려장>>, 터프한 복서가 승승장구하다가 마지막에 패배하고 만다는 스포츠 드라마 <<조종>> 등 작품의 장르도 다양하지만, 이야기 패턴이 대체로 동일하다는 약점도 큽니다. 주인공이 좌절을 극심하게 느끼는 순간에 대한 포착과 묘사가 발군이라 이야기 설득력이 높다는 분명한 장점이 있지만, 이 역시 반복되니 조금 식상해요.

그나마 조금 특이했던건 <<사람 있어요>>와 <<조종>> 이었습니다. <<사람 있어요>>는 그냥 실패하고, 좌절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창작 욕구를 잃었던 주인공 만화가는 진짜 그리고 싶었던건 성인 만화였다는걸 깨닫는다는 전개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결국 좌절을 맞는 - 화장실을 엿보는 변태로 전락한다 - 결말 때문에 이야기가 이상해져 버렸어요. 만화가가 '여자 화장실'에 숨어들었다는 뜬금없는 상황 설정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더라고요. 화장실 벽 낙서에서 따 온 이야기를 성인 만화로 그렸다가 인기를 끌지만, 원작자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런 점에서 다쓰미 요시히로라는 작가의 한계가 여실히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좋아하고, 잘 하는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그리는건 능숙하지만 변주를 만드는 능력은 없는게 아닌가 싶었으니까요.
<<조종>>은 내용 구성은 다른 작품과 별다를건 없지만, 비교적 현대적인 작화와 80년대 이현세의 <<지옥의 링>>이 떠오르는게 조금 신기했고요.

그래도 재미있게 읽기는 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실 역사적인 가치를 생각해서 구입했는데, 이 정도면 재미 측면에서도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덧붙이자면, 뒤의 연표를 보니 수록작들 모두가 1970년 이후 발표되었더군요. 극화의 대부로 잘 알려져 있는 사이토 다카오의 <<고르고 13>>이 발표된건 1968년입니다. 데즈카 오사무만 해도 이미 이 때에는 이런저런 성인 극화를 그렸을 때이고요. 우리나라도 독재 시절이라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은 없었지만, '성인 만화'라고 부르는 고우영의 만화가 발표된 게 1970년대 초반이지요. 작풍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를 다룬게 극화라 친다면, 츠게 요시하루의 <<치코>>만 해도 발표된 게 1966년입니다. 다쓰미 요시히로의 작품들이 시대를 앞서갔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쓰미 요시히로가 설령 "극화"라는 말을 창시했다 하더라도, 이미 존재했던 장르에 이름을 붙였을 뿐인데 '극화의 창시자' 로 추앙받는건 조금 어렵지 않을까요? 하드보일드 장르의 거장은 해밋이나 챈들러이지, 그런 류의 작품을 하드보일드라고 명명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조금 재평가가 과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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