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18/03/31

고양이 발 살인사건 - 코니 윌리스 / 신해경 : 별점 3점

고양이 발 살인사건 - 6점
코니 윌리스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SF 쪽에서는 명성이 높은 코니 윌리스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쓴 작품들을 모아놓은 중단편집.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어보는데 아주 재미있더군요! 깜짝 놀랐고 다른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도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수록작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데다가, 밝고 따뜻하면서 유머러스해서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으로, 저도 크리스마스 관련된 이야기를 몇 번 써 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이거 참... 수준 차이가 엄청나네요.

정통 SF라기 보다는 약간의 SF 설정이 가미된 작품들로 구태여 장르를 구분하자면 일상 - 홈 드라마이자 사회 비판물인 <<말하라, 유령>>, 본격 추리물 <<고양이 발 살인사건>>, 로맨틱 코미디 첩보물 <<절찬 상영중>>, 로맨틱 코미디 SF <<소식지>>, 로드무비 <<동방박사들의 여정>>, 일상 드라마인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부분 기본 이상은 해 주는 작품들입니다.
대부분 친숙한 작품들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클리셰, 설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장르문학, 컨텐츠 애호가로서 반가왔던 점이에요. 그만큼 볼거리가 아주 풍성합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3점. 하지만 아래 상세 리뷰에서 처럼 별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장르문학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아울러 리뷰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말하라, 유령>>
이혼남으로 책이 유일한 취미인 서점 직원 그레이는 크리스마스에 딸 젬마와 보낼 시간이 유일한 낙이다. 구러나 서점의 사인회와 전처 때문에 딸을 만나지 못하게 되고, 그는 서점 직원으로 임시 채용된 크리스마스의 유령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딸 아이를 위해 열심히 해 보려고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꾸만 엇나가는 그레이와 사람을 개과천선 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

약간의 판타지 설정으로 흥미를 자아내며 묘사도 일품입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 바쁜 백화점 서점에 대한 무시무시한 묘사가 압권이에요. 이래서야 정말 빠져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으니까요. 크리스마스 캐럴 을 비롯해 딸 젬마가 좋아하는 소공녀, 그 외에도 디킨스와 월터 스콧의 작품이 많이 인용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완벽한 크리스마스 해피 엔딩은 아니라 의외였습니다. 마지막에 유령들이 뭔가의 슈퍼 파워로 딸 젬마를 그레이에게 데려다 줄 줄 알았는데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끝나버리거든요. 결국 돈이 최고이고 (작 중 표현대로라면 유일한 것) 유령들은 힘도 없고, 크리스마스에 기적 따위는 없다는 결말로 서늘하고 냉소적인 사회 비판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게 현실적이긴 합니다만 씁쓸하네요. 디즈니 작품과 비슷한 가족 판타지로 위장된 탓에 이런 갭이 더 크게 느껴지는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 않을까 싶군요. 저는 다소 불호입니다. 딸아이 아빠로서 젬마는 최소한 행복해졌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양이 발 살인사건>>
세계 최고의 탐정 투페는 크리스마스에 친구 브리들링스 대령과 함께 마웨이트 장원으로 향한다. 그곳은 사건을 의뢰한 샬롯 발라디 부인이 영장류를 연구하는 인공지능 연구소로 람의 말이 가능한 고릴라 달타냥, 추리소설도 좋아하는 똑똑한 침팬치 하이디가 하인으로 일하는 등 연구 실적이 빼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함께 사는 그녀의 동생 제임스는 영장류를 증오하여 자신이 유산 상속을 받으면 모두 쫓아낸다고 공언한 상태. 다행히 그들의 아버지인 억만장자 알리스테어 경은 치매로 난폭한 바보가 되었지만, 앞으로 수년은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투페 컴비는 다른 손님들, 기자인 루트거스와 폭스양, 지역 경찰 유스티스 경사, 알리스테어 경의 간화사 파치트리 양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이 와중에 의뢰하는 수수께끼가 단지 영장류의 존재에 대한 질문임을 알게 된 투페는 당장 떠날 준비를 하나, 알리스테어 경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모든 정황은 고릴라 달타냥의 범행임을 암시하는데....

포와로와 헤이스팅스 컴비를 빼닮은 탐정 컴비가 전형적인 영국 장원을 무대로 한 알종의 클로즈드 써클 미스테리에 도전하는 작품입니다.
일단, 고전 본격물에 대한 높은 이해가 돋보여요. 탐정 컴비의 묘사는 물론 장원에 머무는 사람들 모두가 모두가 동기가 있어 보이고, 수상쩍은 등 여사님 작품에서 보았었던 그런 느낌으로 묘사되거든요. 패러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전 캐릭터를 쏙 빼 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조금은 전형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 그대로고요. 무엇보다도 추리에 있어서 영장류의 지능이 높다는 설정으로 독특함과 재미를 안겨다 주는 부분이 탁월했습니다. 이 설정이 단지 재미요소가 아니라 진짜 반전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으로, 영장류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들이 알리스테어 경을 살해하고 제임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약간의 SF가 가미된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정통 본격물로 추리와 재미 모두 기본 이상은 해 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팬이시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으실 거에요. 별점은 5점!입니다.

<<절찬 상영중>>
<<크리스마스 소동>> 이라는 고전 영화를 보기 위해 애쓰는 사라와 그녀가 그 영화룰 왜 못 보는지를 설명해주는 전 애인 잭의 이야기.

사라가 방문한 영화관 시네드롬은 온갖 영화 관련 오락거리가 가득차 있는 일종의 테마 파크인데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손님들이 밀어닥친 탓에 난리도 아닌 상황이 펼쳐지는 복잡한 상황 묘사가 대단하더군요.
사라가 영화를 보지 못한 이유도 아주 그럴듯합니다. 영화를 만든다고 사기친 다음 시네드롬에 돈 좀 쥐어줘서 아무도 못보는 환상의 상영관을 확보한 후 제작비를 쓴 것 처럼 꾸미는 제작사의 음모이기도 하며, 이는 백 개도 넘는 상영관을 모두 채우는 건 무리라 시네드롬에게도 필요한 사기라는 진상인데 생각도 못했네요.

이러한 내용을 소비자 사기국에서 근무하는 잭의 화려한, 영화를 방불케하는 첩보 작전처럼 전개하는게 아주 매력적인데 사라에게 사 준 티셔츠가 카메라 부착형이라는 아이디어 등 디테일도 볼거리이며, <<백만 달러의 사랑>>, <<아이 러브 트러블>>, <<위기의 암호명>> 등 비슷한 영화들의 장면 장면과 엮이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실제로 로맨틱 코미디 첩보극이라는 장르 공식에 굉장히 충실하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죠.
그 외 다수 영화들의 인용, 묘사도 볼거리였어요. 심지어 <<디워>>까지 등장하는데 이게 원작에도 등장하는 건지는 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망한 영화도 매니아가 따라붙고, 온갖 매체에서 흥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설정인지는 좀 의문입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잭이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소설보다는 영상물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소식지>>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착해진다. 이를 처음 눈치챈 건 주인공 "나"의 직장 동료이자 그녀가 흠모하는 이혼남 게리. 둘은 곧 착해진 사람들이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만 다른 악영향없이 착해지기만 한 탓에 이를 밝히고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착해진 사람들의 몸 관절이 이상해지는 부작용을 알아낸 주인공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생수를 박멸하고자 직장과 집의 온도를 올린다 (모자를 벗게). 다행히 기온이 올라 이 소동은 자연스럽게 마무리된다.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따뜻한 로맨틱 코미디로 변주된 <<신체 강탈자의 습격 (바디 스내쳐)>> 입니다. 기생수의 부작용이 착해지는 거라니!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에요. 이변을 눈치채지만 착해지는 게 과연 무슨 문제인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딜레마도 웃음을 자아내고요.

하지만 디테일이 좀 지나쳤습니다. 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텐데, 과유불급이랄까요? 제목이기도 한 가족들 간의 '소식지' 가 대표적인 예에요. 사람들의 이변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품이기는 하지만 구태여 등장시킬 필요는 없었습니다. 지역별 편차가 있고 이유는 기온이다! 를 드러내려면 TV나 신문 등의 뉴스로 충분했을 테니까요.
등장인물들도 너무 많은데, 이 역시 주인공과 게리가 잘 되게 만드는 식으로 깔끔하고 단순하게 마무리하는게 더 좋았을 것 같네요.

그래도 아이디어가 너무 좋아서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별점은 3.5점. 크리스마스에 걸맞는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여정>>
동방박사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온 이야기. 눈보라가 휘몰아쳐 도로가 통제되는 와중에서 자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계시에 따라 예수를 찾아나선 목사 멜과 친구 BT, 그리고 여행 중 만난 여성 캐시 3인의 여정이 그려진 작품.

백인 목사, 흑인 과학자, 전직 영어교사인 여성 3인이라는 나름 완벽한 구성의 현대적 파티가 등장하는 일종의 로드 무비(?) 입니다.

그러나 여정에 대해 상세하게 그린다기 보다는 , 실제로 동방박사가 겪었음직한 고뇌 (이게 계시가 맞는지? 내가 미친건 아닌지? 와 같은) 가 더 비중있게 묘사됩니다. 그래서 드라마적 재미는 별로 없어요. 독백과 종교적 고뇌로 가득찬 작품이 애초에 재미있을 리가 없죠.
게다가 중간, 중간 계시와 유사한 카니발 조명과 예수일지도 모르는 카니발 운전사 등의 존재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그 정체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는 점도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알 수 없는 계시의 파편을 모아 그것을 토대로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는, 일종의 추리 과정이라도 동반되었더라면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데 비중이 너무 작아서 아쉬웠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결말이 모호하다는 점이에요. 결국 이 세 명이 카니발을 찾아가 예수(?)를 만나는지, 그들을 방해하는 헤롯왕의 수하들은 누구인지 등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마무리 되기 때문으로, 모험이 시작되자마자 이야기가 끝나는, <<반지의 제왕>> 1부와 같은 수준의 도입부일 뿐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이야기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완성된 이야기냐는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네요. 수록작 중 개인적으로는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
책 뒤에 작가가 꼽은 크리스마스를 다룬 최고의 영화, 책, TV 시리즈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영화 중 최고는 <<러브 액츄얼리>>를 꼽고 있더군요.
이 작품은 작가가 나름대로 변주한 <<러브 액츄얼리>> 입니다. 가족 모임을 위해 오리를 구우려는 루크, 이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미구엘의 양육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파일러, 남편과 사별하고 멕시코로 여행온 베브, 아내 마진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워런, 크리스마스 이브 결혼식을 주장하는 친구 스테이시의 들러리로 여행 온 폴라,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대폭설을 연구하는 네이선 박사와 조수 진성 등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다양한 등장인물이 한 꼭지 씩 이야기를 선보이다가 마지막에 연결되는 결말인데 전개 방식이 똑같아요. 대부분 해피엔딩이며 감동적인 이야기와 적절한 코미디가 섞여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차이점이라면 이야기들 속 대 소동이 일어나는 원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대 폭설" 이라는 SF적인 설정이라는 것이죠.

모두 재미있고 따뜻하며,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도저히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어요! 거짓말을 하다가 파멸한 불륜남 워런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아주 속 시원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폭설의 원인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이 모여서 일어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크리스마스다운 발상이 아주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던, 반짝반짝한 작은 소품들이 모인 선물상자같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도 영화로 꼭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2018/03/30

레이디 조커 1 - 다카무라 가오루 / 이규원 : 별점 3.5점

레이디 조커 1 - 8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이규원 옮김/문학동네

<<석양에 빛나는 감>><<마크스의 산>>이라는 묵직한 사회파 범죄 추리 소설을 발표했던 다카무라 가오루의 또다른 대표작. "주간문춘 선정 동서 미스터리 100"에 29위로 선정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인데 국내 소개가 상당히 늦었네요. 문학동네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1권만 우선 읽게 되었기에 리뷰 전 먼저 문학동네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오래전 절판된 고려원 출간본으로 두 작품 모두를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팬인데 이렇게 읽게 되니 더욱 감개무량합니다.
참고로 원래 저는 완결까지 다 읽지 않으면 리뷰를 쓰지 않습니다만 이번에 1권만 리뷰를 올리는 이유는 이벤트 조건 때문이에요. 그런데 쓰다보니, 이렇게 권별로 나눠서 쓰는게 리뷰로서 나름 괜찮은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싶기도 하네요. 1권에서의 감상이 후속권에서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등 개인적인 흥미거리가 많아 보이거든요. 앞으로도 이렇게 리뷰를 쓸까 싶은 생각도 살짝 드는군요.

리뷰로 돌아가서, 이번에 읽은 1권은 목차와 동일하게 4개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947년의 괴문서, 1990년, 1994년, 1995년으로요.
서두를 장식하는 1947년의 괴문서는 종전 직후 오카무라 세이지가 히노데 맥주로 보낸 장문의 투서입니다. 내용은 일부 동료 직원들이 '부락민' 출신이라 차별 받았고, 결국 퇴사에 이르렀다는 증언이고요. 이 투서와 관계된 인물들이 수십년이 지난 1990년 이후, 현실에 맞닥트리며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1990년,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치과의사 하타노가 바로 부락민의 후손이며, 그의 아들도 이 이유 때문에 히노데 입사가 좌절되었다는 내용이거든요. 입사가 좌절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이 죽은 후 하타노는 일종의 분노심에 사로잡혀 정체도 알 수 없는, 니시무라라는 인물과 엮인 후 이 수십년 전의 투서를 히노데 맥주로 보냅니다.
이후 하타노는 자살하지만 그의 장인이자 수십년전 투서를 보낸 오카무라의 동생인 약국 노인 모노이 세이조와 그의 경마장 친구들이 의기투합해서 '레이디 조커'라는 그룹을 만들고는 히노데 맥주에 거액을 요구할 계획을 꾸미죠. 그리고 이들에 의해 히노데 맥주 사장 시로야마가 납치되어 풀려나기까지가 1권의 주요 내용입니다.

대략의 줄거리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총 3권으로 이루어진 대장편의 1권인 탓에 큰 이야기로 보면 도입부에 불과하기는 합니다. 주요 등장인물, 주요 범행 동기가 상세하게 소개되었을 뿐이며, 정작 중요한 범행은 맛보기 수준으로만 보여지고 있거든요. 

하지만 재미가 없지는 않아요. 아니,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 특유의 디테일한 묘사때문입니다. 궁지에 몰리고 절망에 빠진, 벽에 부딪힌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작가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네요. 특히나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고 우직하게 살다가 남은건 하나도 없는 모노이 노인에 대한 묘사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묘사와 중요도의 비중 모두 1권의 주인공 격인 인물인데 그야말로 처절한 삶이라는게 뭔지 절절하게 느껴지도록 묘사되고 있거든요. 가난한 촌락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터 공장에서 돈을 벌기 시작하여 근근히 살아온 인생인데 사건 없이 이러한 모노이 노인의 삶만 가지고도 한 편의 이야기, 드라마는 충분하다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빠져나갈 수 없는 구멍 속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는 기리노 나쓰오를 연상케하는데 기리노 나쓰오보다는 처절하고 스멀거리는 느낌이 덜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는 것도 장점이죠. 기리노 나쓰오는 피 뚝뚝 떨어지는 듯 한 날 것 느낌을 전해 주지만, 그보다는 좀 더 정제되고 세련된 탓으로 회와 초밥의 차이 정도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물론 저는 두 작가, 두 음식 모두 좋아합니다. 단지 취향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정도 뿐입니다.
이러한 압도적인 묘사 덕분에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 범행 동기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아무리 오래 보아왔던 사이라지만 경마장에서 본 노인의 범행 제안에 모두들 선뜻 나선다는건 받아들이기 힘들잖아요? 그러나 이 작품을 읽다보면 당연하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사회의 패배자들, 아웃사이더들이 의기투합하는 과정이 그만큼 자연스럽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뜬구름 잡는 듯한 비현실적인 범행 동기도 마찬가지고요. 심지어는 모노이 노인과 레이디 조커를 응원하게 될 정도입니다!

묘사 외에도 앞서 말씀드린 투서에서부터 시작되는 전개도 훌륭합니다.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하타노 아들의 죽음을 통해 투서와 등장인물들이 엮이는 과정에서 한껏 위험천만한 분위기를 잡아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데 몰입도가 상당하거든요. 그만큼 이야기가 탄탄하게 묘사된 캐릭터들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없잖아 있습니다. 우선 사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히노데 맥주 관련된 설정은 일본의 전형적인 정관 유착, 그리고 각종 일본 내 스캔들을 참조한 듯한데 국내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설정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등장 인물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직 형사인 한다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모노이 노인은 태어날 때부터 가난이라는 굴레에 갖혔고, 운전사는 장애인 딸이라는 본인이 어쩔 수 없는 굴레가 있는 반면 한다는 공대를 나와 경찰에 투신한 것부터 시작해서,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 중 항상 최악의 선택을 하여 현재에 이르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좌절하고 벽에 부딛힌건 다 본인 탓이죠. 그래서 남 탓, 특히 고다 형사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는건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전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캐릭터 묘사도 사메지마와 똑같은, 흔히 보아왔던 전형적인 한마리 늑대 캐릭터로 천편일률적이라 식상하기도 했고요.
또 신용금고에서 일하는 고가 조직에 합류한 이유도 불분명해요. 단지 노모이, 한다가 "그 놈은 무조건 참여할거다" 라고 단정한게 전부인데 이래서야 좀 부족하죠. 평생 생활고에 시달린데다가 부락민 출신 사위 때문에 손자마저 죽은 노모이, 독단적인 수사로 한직으로 밀려나 경찰 조직과 수뇌부를 증오하게 된 한다, 평생 무료하고 지루하게 살아가며 사고로 손가락마저 잃은 기계공 요짱, 자위대 출신으로 장애인 딸 수발에 평생을 바친 누노카와처럼 일본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들과는 다르게 고는 아무리 봐도 아웃사이더로 보이지도 않고요. "재일 조선인" 이라는 잠깐 드러나는 그의 설정은 아웃사이더스럽지만, 그에 따른 묘사는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부족해서 확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레이디조커 조직과 히노데 맥주 양쪽 모두에게서 이익을 얻으려는 회색분자로 보였는데, 제 짐작이 맞을지는 후속권에서 밝혀지겠죠,
이들의 주도로 벌어진 시노하라 사장을 유괴한 범행도 이해는 되지 않아요. 대기업의 비자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 위한 목적 치고는 너무 큰 범죄를 벌인 셈이니까요. 자신들의 위력, 힘을 보여주기 위한 측면도 있기야 하겠지만 이 범행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수사 본부가 조직됨은 물론 고다 형사에게 '현직 경찰이 포함되어 있다' 는 단서를 전해 주는 등 득보다는 실이 훨씬 커 보입니다. 그냥 사장을 덮쳐서 데려가는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협박장만 주는걸로 충분했읉텐데 말이죠. 이 부분은 제가 눈치채지 못한 협박 외 다른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르니 후속권을 읽어보고 최종 판단토록 하겠습니다. 
특유의 묘사력도 일품이지만 지나치게 장황한 감도 없잖아 있어요. 이런 일본 여성 작가의 책을 읽다보면 내가 너무 생각이 없이 사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등장인물들의 생각이 많은데, 지나치니 없으니만 못하다는 옛 속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히노데 맥주가 움직이는 돈의 단위도 현실적이지가 않아서 이러한 거대한 돈의 움직임이 주인공들과 어떻게 엮일지가 잘 와 닿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등장인물과 범행 동기들의 묘사를 통해 보장된 설득력이 범행 대상의 비현실적인 측면 때문에 조금 빛을 잃는 느낌이었어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말단 형사가 소시민과 어울려 거대 사건에 휩쓸린다는 흔해빠진 헐리우드 액션물 수준의 설정이라 작품 분위기, 묘사와의 괴리감이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단점을 잔뜩 열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음 권에 대한 기대는 충분합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도입부로는 최고 수준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고다 형사는 어떻게 범인들을 추적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게 만드니까요. 몇몇 단점들은 후속권에서 잘 처리하면 해결될 문제이기도 하고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모노이 노인에게 감정이입해서 노인이 이기기를 바라고 있는데 결말이 어떻게 될 지 빨리 다음권을 읽고 싶네요. 1권의 별점은 3.5점입니다.
다카무라 카오루의 팬 뿐 아니라 일본 사회파 장편 추리소설, 그 중에서도 기리노 나쓰오나 미야베 미유키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가 이벤트라고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건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들은 잘 아시겠죠? 다른 작가들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감을 뽐내면서도 재미까지도 확실한 작품입니다. 확실히 대표작은 다르네요.

2018/03/24

마음의 지배자 - 김현중 : 별점 3점

마음의 지배자 - 6점
김현중 지음/온우주

언젠가 인터넷에서 원사운드가 그린 <<묘생만경>> 만화를 읽고 관심이 가던 차, 알라딘 헌책방에서 싸게 팔길래 구입한 작품입니다. 헌 책을 충동 구매하지 말자고 결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가격이 너무 착했단 말이죠. 다행히 결과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꽤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특징이라면 우선 독특하고 기발한 설정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입니다. 이는 듀나의 작품들과도 흡사하죠. 그러나 듀나의 작품들보다는 이야기의 완성도가 훨씬 높습니다. 설정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충실히 이야기에 담아내었기 때문이죠. 결말도 확실하고요.
또 남과 다른, 뛰어난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는 특징도 있는데 이는 작가의 영원한 화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야기 별로 결말도 다양해서 작가의 고민과 다양한 시도가 돋보입니다. 그냥 한 계단 위에서 바라만 본다는 <<묘생만경>>, 남들의 두려움을 통해 신으로 거듭난다는 <<마음의 지배자>>, 블랙 코미디인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남과 다르다고 가장하고 있을 뿐 다 똑같다는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 능력을 발휘 못하고 찌질하게 살다가 한걸음 더 내딛는다는 <<물구나무 서기>> 등 처럼 말이죠.

기존에 널리 알려진 아이디어의 변주가 많은 등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단순한 설정 바꿔치기는 아니고 나름의 아이디어가 바탕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재미도 수준급인 좋은 단편집이었습니다. 한국 SF 와 장르 문학이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장르 문학 팬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원사운드가 그린 리뷰 만화를 읽고 책을 산게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는 이거) 제게는 100% 확률입니다. 원사운드는 리뷰 만화만 그려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하여튼, 제가 언젠가 책을 낸다면 제 책 리뷰를 좀 부탁드리고 싶네요.

단편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묘생만경>>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 만화는 3~4페이지 남짓인데 원작을 굉장히 잘 압축한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사도 그대로인데 만화에 적절한 것만 잘 가져다 썼고, 꼭 필요한 설정 중심으로 이야기를 짤막하게 잘 풀어낸 것이죠

그런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원작에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많다는 말도 됩니다... 무엇보다도 화자인 고양이 '나'가 영물로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추었다는 설정은 불필요했어요. <<펠리데>>처럼 뛰어난 지능 자체가 설정과 이야기의 핵심으로 활용되면 모를까, 이야기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군더더기였을 뿐입니다.

그래도 세 가족과 닭 스무 마리, 개 세 마리라는 전원 주택을 무대로, 닭들 사이의 치정극을 통해 무시무시한 사건이 휘몰아친다는 범죄 스릴러라는 독특함은 누가 뭐래도 최고였습니다. 이런 작품을 또 볼 수나 있을까요?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니, 작가가 살짝 부러워질 정도였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마음의 지배자>>
표제작. 초능력자가 어떻게 주위의 두려움을 불러오고, 어떻게 박해 받으며, 또 어떻게 신이 되는지를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보통 이런 류의 이야기는 초능력자들이 능력을 각성한 뒤 무언가 사명을 짊어진다는 이야기, 혹은 자신이 세계 정복 같은 야심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를 고등학교를 무대로 하여 일상계처럼 담담하게 풀어내었다는 나름의 차별화 요소가 돋보입니다.
초능력자인 민국이 아니라 주변인물들 중심으로 묘사와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도 신선했고요.

두려움과 탄압만 있을 뿐 추종자는 없다는 점이 실제 현실과 괴리감을 느끼게 하며, 초능력자가 악인들과 손을 잡는 이유도 불분명한 등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아요. 그래도 신과 기적 등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됐나>>
김사장의 맘모스 마트와 우주행성 K9242의 정복 유닛이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블랙 코미디 SF.

사람이 많이 오가기를 원하는 김사장, 그리고 기억 유닛을 찾기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부분체를 부착하기를 원하는 정복 유닛이 같은 목적을 위해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김사장의 계획은 충분히 그럴듯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들이며, 정복 유닛의 씨앗 옮기기 계획 역시 전형적인 식물의 행태를 잘 응용하고 있어서 설득력도 아주 높아요.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입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지배인의 머릿 속에 기억 유닛이 들어가 있었다는 결말입니다. 앞 부분에서 약간의 설명이라도 있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죠. 이대로라면 급작스러운 감도 없잖아 있고요.
그래도 재미 만큼은 보장할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
아인 시술이라는, 머리가 좋아진다는 수술이 유행한 뒤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SF 단편. 아인 시술은 효과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비용, 그리고 흉터가 남기 때문에 부자들이 주로 시술 받고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룬다는 설정이 핵심입니다.
사실 이 시술을 통해 선민 의식을 갖는다는 설정은 특별한 건 없습니다. 부자만 기계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와 다를 건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시술이 효과가 없을 수 있다! 라는 반전이 기가 막힙니다. 시술이 사기인지 아닌지 결국 밝혀지지 않는 점도 좋으며, 시술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트릭도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재미를 더하고요. 또 수진을 통해 상류층도 결국 허상일 뿐이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도 마음에 들더군요.

앞서 말씀 드린대로 좀 뻔한 설정 탓에 이야기의 전체 분위기와 느낌에서 여러 다른 작품들이 떠올랐고 (개인적으로는 <<가타카>> 가 많이 연상 되었습니다),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묘사된 건 아쉽지만 매력적인 이야기 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우리나라에 장르 문학 원작을 주로 다루는, 미국으로 따지면 <<환상특급>> 같은 TV 쇼가 있다면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구나무서기>>
일종의 투시 능력을 갖춘 초능력자 김서권의 일대기. 종도라는 섬에서 물구나무 서기를 혼자서만 못했던 김서권이 어느새 모든 것이 거꾸로 투영되는 투시력을 갖추고, 이를 이용하여 여러가지 일을 경험하다가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서권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종도에서의 이야기와 현재의 대형 운석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가 교차 편집되다가 '물구나무 서기'로 현재의 초능력이 시작됨을 알려주고 끝나는 구성의 작품입니다. A와 B가 동시에 전개되는데 A는 B의 발단이라는 결말과 함께 B도 끝나게 되지요.

우선 '물구나무 서기'라는 것을 키워드로 한 디테일이 볼거리입니다. 한번도 물구나무 서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런걸 이런 이야기로 만들어 낸 작가의 상상력이 참 대단하구나 싶었어요. 물구나무 서기와 초능력이 연결되다니!
그 외에도 김서권이 꿈에서 보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의 정체가 운석이라던가, 한발두발 내딛어 물구나무 서기를 함으로 투시를 하고, 물구나무 서기와 같은 원리라 투시는 뒤집혀서 보인다는 등 의 디테일들도 볼 만 합니다.

하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좀 애매했습니다. 죽음 직전에 신을 본다는 신학적 담론을 SF의 형태를 빌어 써내려간 작품인가? 싶은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부수적인 이야기가 많아 혼란스럽거든요. 어린 시절 종도에서의 할아버지 환갑 잔치에 대한 장황한 묘사, 현재의 김서권이 무당과 손 잡았다던가 결혼에 실패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그러합니다. 재미는 있는데 주제와 관련이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더라고요.

책 뒤의 편집자 글이나 인터넷 상에서의 리뷰를 보면 이 작품을 최고로 치는 분위기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랬어요. 너무 멋을 부리려고 하지 말고 핵심에 집중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피노키오>>
로봇들을 활용한 전쟁이 끝나고, 이야기를 꾸며내는 재주가 있는 로봇이 발견된다. 그 로봇은 자신의 사명을 잃은 채 극장에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데...

역시나 재미있는 설정을 갖춘 작품.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작위적인 요소가 강하고 설정도 별로 디테일하지 않으며 결말도 예상에 가까운, 일종의 우화에 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거짓말만 하는 로봇 둘이 일종의 논리 게임을 펼치는 식으로 전개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서로 진짜 사명이 무엇인지, 폭발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거짓말만 하면서 내용을 파헤치는 두뇌 게임 스타일로 말이죠. 이러려면 지금보다 거짓말 조건이 더 상세하게 설정되어야 겠지만요.

하여튼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평범한 소품에 가깝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부안 왕손이>>
거대 포크레인이 약간의 고장으로 무의미한 작업만 반복하는 현장으로 팔려간 후,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소녀의 하트 수신호를 받은 후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거대한 하트를 그린다는 일상계 판타지.

실제로 전라도 사투리 가득한 왕손이의 의인화 묘사가 돋보이며, 아파트 단지 소녀의 하트 수 신호의 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도 흥미로왔던 작품.
무엇보다도 롯데 월드 공사 시 작가가 목격했던, 단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진행된 무의미한 단순 반복 작업을 통해 이러한 이야기를 그려낸 작가의 상상력에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트 수 신호의 진상은 조금 생뚱맞은 데가 있고, 결말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해피 엔딩이라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분위기 상으로는 사회 고발적인 내용으로 흘러가는데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매력적인 도입부, 설정, 전개에도 불구하고 이 결말 때문에 맥이 풀리는 느낌까지 들거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판타지 버젼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으로 그려내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뱀과 소녀>>
뱀 신을 모시는 섬에서 뱀을 죽인 아이들에게 닥치는 일을 그린 단편.
초자연적 존재(?)에 의한 일종의 호러물로 섬을 벗어날 수도 없고, 재앙이 다가오는 막막한 상황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어떤 마을이 있고, 이방인이 그 마을의 금기를 어겨 끔찍하게 살해 당한다는 흔해빠진 이야기를 이방인이 아니라 그 마을 주민, 그것도 반항심 많은 꼬마 아이가 금기를 어긴다는 약간의 변주만 준 셈이라 애초에 새롭거나 신선한 느낌을 받기는 힘들었어요.

또 내용도 잘 모르겠더군요. 민박집 손님은 누구고, 뱀을 어떻게, 왜 모시는 지와 뱀의 영향력도 설명되지 않아서 공포심을 자아내기는 무리입니다. 뭐가 어떻게 될지 대충은 알아야 무서운데, 지금은 그냥 수희 혼자 어둠 속에 남은게 전부니까요. 이래서야 한 편의 이야기로 성립하기도 힘들죠. 주인공 소녀 수희가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뱀 신상 뒤에 피로 글자를 쓴다던가), 그것이 이후 섬을 찾아와 금기를 어기고 쫓기는 신세가 된 이방인에게 발견되는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쓰임직한, 긴 이야기의 도입부 정도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이 단편집을 위해 새롭게 쓴 작품이라는데 이래서야 차라리 수록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거에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8/03/23

요괴 헌터 1 : 지편 - 모로호시 다이지로 / 서현아 : 별점 2.5점

요괴 헌터 1 : 지(地)편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서현아 옮김/시공사

모로호시 다이지로 작가 생활 초기인 1974년부터 꾸준히 발표해 온 고고학자 히에다 레이지로를 주인공으로 한 판타지 호러 단편 연작입니다. 요새 좀 복잡한 스토리, 설정을 갖춘 고전 만화에 꽂혀서 호시노 유키노부를 비롯한 몇몇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쭉 찾아보고 있는데, 이러한 저만의 유행에 편승하여 이번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명성이야 전부터 익히 들어왔지만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지만 나이가 드니 이런게 취향이 되는게 신기하네요.

읽어보니 과연, 명성이 허언은 아니더군요. 무려 40년 전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독특하다 느껴질 정도거든요. 발표 당시에는 독자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싶네요.

러브크래프트 느낌의 코즈믹 호러 분위기를 한껏 풍겨주는 묘사들은 왜 이 작가가 우메즈 카즈오와 호러 만화계에서 같은 급으로 인정받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며, 이런 저런 설정들의 적절한 이종 교배를 통해 참신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대체로 앞서 말씀드린 코즈믹 호러, 크리처를 일본 전통 문화와 교배시키는 식인데 예를 들자면, 코스믹 호러와 크리처 세계관에 일본 고전 설화를 끼얹은 <<검은 탐구자>>, 가쿠레 키리시탄 설정을 이용하여 역시나 코즈믹 호러 느낌의 새로운 성경, 기적을 그려낸 <<생명의 나무>>, 코즈믹 호러 크리처와 일본 고사기에 기반한 역사를 섞어 '해룡을 맞이하는 해룡제' 라는 행사로 그려낸 <<해룡제의 밤>> 이 대표적입니다.
이 중에서도 <<생명의 나무>> 는 이렇게 짧게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였어요. 성서에 지극히 일본적인 설정을 잘 짜깁기한 대단한 작품이었거든요. 가쿠레 키리시탄이 성경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자신들만의 성경을 만들어 전승시켰다는 역사 속 실화를 토대로 하고 있는데 아담 외에 쥬스헤루라는 인류의 선조가 있으며, 쥬스헤루는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어 낙원에서 추방당했다는 작품 속 창세기 설정부터 참신합니다. 죽지도 못하고 고통받는 쥬스헤루의 후손들 중에서 그들만의 "예수"가 태어나 모두를 구원한다는 결말도 무척 대담했고요. 이런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다는건 정말이지 놀라운 재능이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하지만 단점과 한계 역시 명확합니다. 우선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설명의 부족은 여전한 편입니다. 설정은 좋지만 펼쳐놓은 설정을 수습하는데 급급한 이야기들이 제법 되거든요. 
게다가 괜찮은 설정을 갖춘 작품들도 전체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붉은 입술>은 단순한 크리처 호러물에 불과하고, 지극히 평범한 좀비물 클리셰 투성이인 <<죽은 자가 돌아왔다>> 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면 남편을 아이보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점인데, 오히려 이 설정을 강조하는게 더 독특하고 공포심을 자아내지 않았을까 싶네요.
<<사인초>> 는 아내를 살해하고 묻은 자리에서 아내와 똑같은 풀이 돋아났다는 이야기로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은 내용이었고요. <<우주해적 코브라>> 에서 다이아몬드 이빨을 가진 인면초가 시체에서 피어난다는 <<만드라고라>> 에피소드가 떠오르더군요.
<<개미지옥>>은 여러개의 구멍이 있는 공간이 있고, 특정 구멍은 죽음과 영원한 고통을, 특정 구멍은 바라는 걸 이루어 준다는 설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원숭이 손>> 이라는 유명 단편과 흡사한 결말이 뻔해서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가장 실망한건 주인공 히에다 레이지로의 무존재감입니다. 이 작자는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에 휩쓸려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만 볼 뿐입니다. 그리고 복잡한 설정을 독자에게 설명, 전달해 주는게 전부에요. 한마디로 나레이터에 불과합니다. <<죠죠>> 시리즈의 스피드 웨곤보다도 활약이 못하니 당쵀 존재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스트레이트 롱 헤어에 어딜가나 정장을 갖춰입는 독특한 비쥬얼만 기억에 남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앞으로 계속 구입해야 할 지는 조금 망설여지는데, 혹 후속권을 읽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계속 읽어봐도 좋을지 고견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2018/03/18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 브리짓 허스 / 조윤경 : 별점 4.5점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 8점
브리짓 허스 지음, 조윤경 옮김/동아엠앤비

법의학의 역사를 쉽게 설명해주는 일종의 미시사과학사 서적. 일종의 통사와 같이 '법의학'의 흐름을 일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작부터 별다른 과학적인 수사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로 비소가 특별한 검사법이 없어서 널리 쓰이던 1751년, 영국 여성이 아버지 독살 혐의로 기소되면서 과학 수사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사건이 소개됩니다. 비소는 가열하면 마늘 향을 내뿜는데, 용의자 메리의 약갑 속 물질을 가열하니 마늘 냄새가 난 것이죠. 지금 보면 어처구니 없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그야말로 과학 수사의 한 걸음을 내딛은 방법이에요. 이 증거로 메리는 교수형을 당하게 되고요. 그리고 1806년 로제 교수가 '로제 검사법' 이라는 비소 검출법을 고안합니다.

그리고 의사가 검시관이 되는 과정,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라까사뉴가 1881년 리옹에 '법의학 연구소'에 합류하여 부검에 참여하고 여러 제자를 양성하여 많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자세히 그려집니다. 특히 유명한 '크리펜 사건' 은 대중에게 라까사뉴와 같은 법의 병리학자의 존재 및 그 유용함을 널리 알리게 되죠. 병리학자 스필스베리가 크리펜 자택 지하실에서 발견한 사체가 크리펜의 실종된 아내라고 판단한 것이 사형 선고의 결정적 요인이 되거든요. 참고로, 최근 조사 결과로는 이 사체는 '남자의 사체' 였다고 합니다. 스필스베리의 추리대로 독살이 실패한다고 해도 총으로 쏘고 사체를 절단하여 유기하는 건 일반적인 독살범 행태와는 다르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인거죠. 하지만 코라 크리펜은 결국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크리펜의 범행은 성공했지만 우연에 의해 정의의 철퇴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여튼 이러한 최근 조사로 스필스베리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또 다른 유명 연쇄 살인 사건인 '욕조 속의 신부들' 사건 당시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 조사하여 증언한 내용도 인상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만삭 의사 부인 사망사건' 이라는 유사 사건이 있어서인지 더 기억에 남네요. 의사인 주제에 100년전 사기꾼보다도 유치하게 현장을 조작하다니,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을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1925년 노먼 쏜 재판에서의 논란으로 스필스베리의 완벽함에 균열이 가고, 대중도 병리학자의 결점과 오류 가능성에 대해 알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유럽보다 늦은 1918년 법의관 제도가 시작되는데 법의관들의 활약으로 여러 건의 사건이 해결됩니다. 부검이 아니라 정말 탐정 뺨치는 추리로 범인을 밝혀낸 사건도 있습니다. 하숙집에서 노부인이 시체로 발견되어 자연사라 생각되었지만, 현장에 도착한 법의관은 '가정부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면 문은 안에서 잠겨있었다는 뜻인데, 그럼 열쇠는 어디 있는걸까?' 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뒤 이은 수사로 열쇠를 소지한 범인을 잡는다는 결말인데, 당장 추리 소설에 응용해도 좋은 멋진 추리에요.

이러한 법의관 제도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과학적인 수사 방법도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일반 상식이 된 범죄 현장의 증거를 토대로 한 수사는 1세대 법과학자 에드몽 로카르가 셜록 홈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을 정도로 홈즈의 영향이 컸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에드몽 로카르를 비롯, 오스트리아의 한스 그로스, 프랑스의 빅토르 발타자르, 미국의 벤자민 모건 밴스 등 여러 선구자들의 활약으로 해결된 사건이 연대별로 흥미롭게 소개됩니다. 이러한 과거의 사례는 물론이고, 과거에는 분석하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정보로 현대에는 어떻게 사건이 해결되었는지를 병렬로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를 돕습니다.

뒤이어 각종 분석 방법들을 한 챕터씩 할애하여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챕터별 구성은 대동소이합니다. 해당 분석법의 역사와 주요 인물, 그리고 해당 분석법이 활용된 주요 사건이 소개되는 식이죠.
'지문'의 경우 뎁퍼드가 살인 사건을 비롯한 거의 모든 내용은 이전에 읽었던 <<지문>> 에서 더욱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어서 딱히 언급할 부분은 없습니다. 그래도 샤를리즈 테론의 <<몬스터>> 로 잘 알려진 에일린 워노스 사건 소개가 기억에 남네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문' 을 숨겨야 했던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시체를 자신이 죽은걸로 위장하려고 기도한 사건인데 황당한건 시신의 신원만 위장했지 정작 범인 자신의 신원은 위장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후 다른 사건 사례를 통해 지문의 결함이 있다는 점도 알려주며 마무리됩니다.
이와 함께 베르틸롱 (베르티용) 측정법도 함께 실려 있는데, <<지문>> 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베르틸롱 측정법의 심각한 문제인 "쌍둥이는 구분할 수 없다" 는 실제 사례는 흥미로왔습니다.

총기 분석에서는 유명한 '사코와 반체티 사건' 에서 최근 분석 결과 사코는 진범이었을 수 있다는 결론. 그리고 알 카포네의 '발렌타인 데이의 학살' 관련 수사가 재미있었고요.

혈흔 분석 챕터에서는 <<도망자>> 의 모델 샘 셰퍼드 의사 부인 살인 사건이 가장 흥미로왔습니다. 혈흔 분석을 통해 재판 결과가 뒤바뀌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도 최근의 조사 결과와 결론을 내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 그리고 결론이 아주 새로왔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피해자학 (희생자가 살해될 요소가 무엇인지? 를 분석하여 동기, 용의자를 알아내는 기법)' 을 토대로 메릴린이 희생자가 될 확률은 오로지 불안정한 결혼 생활 뿐이었다고 단언합니다. 그 외 현장이 조작된 증거도 상세하게 실려 있고요.

시신 분석 사건에서는 '아이스맨' 이라는 별명이 붙은 살인 청부업자가 피해자의 시신을 수년간 냉동한 후 유기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실제 범행은 수년 전이지만 3~4 주 전에 살해된 것으로 오인하게 만든거죠. 하지만 여러가지 증거를 토대로 진상을 밝혀내고 범인을 체포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은 흡사 미드 <>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그러나 이어지는 유골 분석은 다른 챕터에 비하면 사례의 재미가 조금 덜한 편입니다. '아나스타샤 사건' 으로 법의인류학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정도가 괜찮은 정도였어요.

마지막은 프로파일링과 DNA 분석이라는 최신 수사 기법으로 마무리됩니다. 프로파일링은 익히 수많은 책을 통해 접했던 내용의 요약이지만, FBI 행동 과학부의 수사관들이 활약한 사건들은 흥미진진합니다. 사건에서 프로파일링 기법의 활용도 잘 설명되고 있고요.
DNA 분석은 이를 통해 해결한 사건보다도 증거가 왜곡된 사건들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DNA가 악수 등으로 쉽게 옮겨질 수 있기 때문으로 이를 통해 잘못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는 물론, '바이트 마크' 와 같이 오류가 있는 증거가 채택되어 발생한 문제 등이 함께 소개되는데 참 무섭더군요. 요새도 증거 조작이나 오인식, 각종 오류로 피해를 보는 사례가 가끔 보도되는데, 항상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법의학, 법과학에 대한 통사적인 이해는 물론, 실제 사건과 연계하여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보는 듯한 재미도 전해주는 좋은 책입니다. 내용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 있으며 도판들도 본문 이해를 돕는데 적절한 수준으로 삽입되어 있는 등 전체적인 책의 완성도도 빼어납니다. 한마디로 재미와 가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보기드문 좋은 책이에요.
분량 상 개략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많으며, 이미 각 분야별로 상세하게 설명한 다른 책들을 통해 제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 제법 된다는 점은 아쉽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5점.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2018/03/17

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 1 - 반시연 : 별점 3점

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 1 - 6점
반시연 지음, 김경환 그림/영상출판미디어(주)

국내 장르 영화, 장르 문학 관련 리뷰의 거목이신 mrkwang님이 극찬하신 글을 어디선가 읽고 관심이 가던 차에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습니다. 어차피 절판 상태라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알라딘 매물로 뜨길래 주저없이 구입했죠. 바로 얼마 전 절판, 품절이라는 상황에 낚여 충동구매 하지 말자고 언급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못 사는 것도 있으니까요.

일종의 단편 연작물로 주인공 호우가 과거 '셔터' 라 불리우는 일종의 해결사 일을 하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폐인이 된 후, 지인들의 도움으로 기묘한 중고 물품 가게 '헤브닝' 에서 일하기까지 각 시기별로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구성인데 다행히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기대치가 그다지 높지 않기도 했지만 추리적으로 꽤 괜찮은 탓도 큽니다. 큰 사건이 벌어진다기 보다는 일상계 추리에 가까운 소소한 추론이 대부분인데 전부 이치에 맞고, 설득력이 높거든요. 모든 정보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기도 하고요.

에피소드별로 간략하게 소개해드리자면, <<로또 사모님>> 사건이 등장하는 첫번째 에피소드 <<우계>>가 좋은 예입니다. 단순히 캐릭터를 소개하기 위한 소품으로만 보였던 망사 스타킹이라던가, 비가 오는 날이라 당연해 보였던 엘리베이터 물기에 대한 묘사 등이 진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로 사용되거든요. 그리고 의뢰받았던 아이의 행방 외에 남편이 어디에서 도박을 하는지까지 추론해낸다는 점도 좋았어요. 명확하게 캐릭터를 독자에게 알리는, 첫 작품으로 손색없는 이야기였습니다.

호우가 폐인이 된 이후 편의점에 나타난 성범죄자를 응징하는 <<건기>> 도 나쁘지 않아요. 주어진 정보들로 편의점의 안경남이 성범죄자였다는걸 알아내는 추리의 과정이 설득력이 높기 때문입니다. 전직 복서이기도 한 호우의 강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첫번째 이야기라는 점도 주목할 만 하고요. 물론 전자발찌를 찬 성범죄자가 편의점에서 여성을 희롱한다는게 과연 현실적이고 가능한 설정인지는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만.

<<주마등>>은 호우가 넘버원 셔터로 잘 나갈 때, 사야를 만나고 그 뒤 고지를 만나 사야의 스토커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이야기인데, 사야와 고지라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설명을 위한 소품으로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일상계로는 괜찮은 수준이기는 해요. 그러나 고지 정도 되는 능력자가 스토커 한 명 붙잡지 못한다는게 말이 안되서 그렇지... 여튼, 평범한 수준이었습니다.

<<헤브닝>> 은 폐인이던 호우가 현재를 극복하고 비이와 '노예 계약'을 맺는 과정이 그려지는 이야기로 가장 많은 추론이 등장합니다. 물에 젖어 읽을 수 없는 주소 쪽지를 보고 어떻게 '헤브닝'을 찾아 갔는지, 작가 이름도 없고 출판사도 없는 책의 정체는 무엇인지, 비이가 핸드 크림을 계속 바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전거 변속기가 고장났다고 전화한 손님의 문제는 무엇인지, 책을 반품하며 다른 책과 다르다고 우기던 일의 진상은 무엇인지, 나무 바닥이 미끄러운 이유는 무엇인지, 동네를 배회하는 대학생들이 찾는 장소는 어디인지, 피아노 모양 오르골은 왜 고장이 났는지 등 수많은 추리를 순식간에 토해내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몇몇 이야기는 비약이 있고, 지나치게 끼워 맞춘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대체로 괜찮았습니다. 골고루 맛있는 종합선물세트같은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이 연작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그러나 마지막 이야기 <<셔터>> 는 완전히 기대 이하입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암호트릭 같지도 않은 암호 트릭이 핵심인 탓으로 차라리 등장하지 아니함만 못했습니다. 그냥 호우와 다른 등장인물들이 어울리는 만화같은 상황을 그리는 묘사만이 볼거리였달까요. 자기 개발서를 혐오하는 호우의 성격은 저와 비슷해서 무척이나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뿐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제가 읽어왔던 국내 추리물 중에서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만화적인 설정은 문제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두뇌와 프랑켄슈타인의 육체를 지녔다는 주인공 호우, 대부호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남이자 호우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고지, 대식가 츤데레 미녀이자 호우의 전 애인이자 고지의 현 애인 사야, 고지의 약혼자이자 대부호로 호우에게 빠진 비야 등 모든 캐릭터 설정이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입니다. 이름들도 하나같이 만화 속 인물들 같잖아요? <<건기>>에서 <<헤브닝>> 으로 이어지는 동안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폐인이 된 호우에 대한 묘사 역시 만화적이라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대사와 상황들도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힘을 쓰지 못하고 (케로로인가?) 비이를 '주인님' 이라고 부르는 잘 차려입은 호우에 대한 묘사는 바로 그 정점이죠.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비현실적이라 아무리 현실적인 추리를 한다 하더라도 썩 와닿지는 않는데, 좀 더 현실적인 캐릭터를 기반으로 쓰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예를 들자면 학교 짱으로 공부는 못하지만 추리에 능한 호우, 소꼽친구 사야, 학생회장 고지, 부회장 비이 캐릭터였다면 딱이었을텐데 말이죠. 만화적인건 마찬가지지만 스케일을 줄임으로써 현실감을 조금이나마 더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고등학교를 무대로 해도 충분히 펼쳐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니까요. 아니면 아예 현실적이지 않은 판타지 공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던가요. 지금은 이래저래 어중간할 뿐이라 여러모로 아쉽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추리물로서의 성과는 뚜렷하나 묘사와 전개는 아쉽습니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2권을 읽게 될 지는 잘 모르겠어요. 작가의 만화적 설정 없는 정통 본격 일상계 추리물을 기대해 봅니다.

2018/03/11

아주 오래된 서점 - 가쿠다 미츠요, 오카자키 다케시 / 이지수 : 별점 4점

아주 오래된 서점 - 8점
가쿠타 미츠요.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이지수 옮김/문학동네

원제는 <<古本道場>>으로 제목에 걸맞게 작가 가쿠다 미쓰요가 헌책 전문가 오카자키 다케시로부터 헌책에 대한 수련을 받는다는 내용의 에세이. 수련은 오카자키 다케시가 지정한 특정 지역 헌책방에서 '미션' 에 따른 헌 책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모두 8번의 미션이 수록되어 있으며, 미션에 따른 가쿠다 미쓰요의 헌책방 투어와 그 결과를 평하는 오카자키 다케시의 글이 한 세트입니다.
가쿠다 미쓰요와 오카자키 다케시의 에세이들은 모두 재미있게 읽어서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었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하기사,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하필이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 글을 써 버렸으니 이거 참,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죠.

두 명의 저자 중 오카자키 다케시는 아무래도 헌책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론과 의견을 전해주는 '선생님' 역할이고, 가쿠다 미쓰요는 가르침을 받아 따르는 '학생' 역할입니다. 그래서인지 헌책 관련한 이야기는 오카자키 다케시 쪽 글이 더 기억에 남는 게 많네요. 몇 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일단 헌책방에 있는 헌책은 '장서'라는 것이 그러합니다. 일반 서점의 책은 반품이 되지만 헌책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주인이 한 권 한 권 산, 그야말로 '남의 책'이라는 거죠. 여태껏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고 딱히 신경 써 책을 다루지도 않았었는데 많이 반성 되네요.
또 헌책을 가격으로 보지 말라는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정꾼이 되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최우선으로 고르라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인데 정말 새겨들어야 할 말이에요. 헌책방 투어를 실제 다녀본 경험으로는 절판된 책이나 비싸게 팔 수 있는 희귀본에 더 눈길이 가기 마련이고, 그래서 결국 필요없는 책을 사곤 하니까요. 저도 집에 왠지 귀할 것 같아서 사놓고 안 읽은 책이 많은데 이 역시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고 싶을 때 안 사면 다음은 없다!' 라고도 하니 결국 사는 사람이 신중하게 생각하여 판단할 수 밖에 없겠죠.

그리고 헌책 관련된 이야기는 아닌데, 사진집을 읽고 소장하는 이유를 설명한 글도 근사합니다. '다양한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더욱 올바르고 깊게 세계를 이해하려는 무한에 가까운 시도다'라는 소설가 겸 사진작가 가타오카 요시오의 글과 함께, 좁은 시야를 넓히기 위한 용도로 산다고 하는데 그럴듯했어요. 물론 이 정도 의도라면 요새는 인터넷으로 보아도 충분할 것 같긴 합니다만.

이러한 정보 중심의 오카자키 다케시의 글과는 다르게 가쿠다 미쓰요의 글은 헌책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라 정보보다는 개인 감상 위주입니다. 그런데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묘하게 정확해서 놀랐습니다. 특히 사물의 본질을 짚어내는 데 능숙해서 확실히 작가는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설명해 드리기는 어렵지만 저 역시 작가를 꿈꾸는 입장에서 참 많은 공부가 되었네요.

개인적으로는 가쿠다 미쓰요가 산 책들도 관심거리였습니다. 일본에서도 오래전에 절판된 책들도 많은 등 국내에서 구하기는 어려운 책들이 대부분이긴 합니다. 국내 출간된 책들도 절판 상태가 많고요. 하지만 소개가 멋진 몇몇 책들은 구해보고 싶어지더군요. 헌책방을 소개한 글에 소개된 헌 책을 구하기 위해 헌책방을 뒤져야 한다니! 뭔가 낭만적이에요. 가쿠다 미쓰요가 구입한 대충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표시가 제가 찾아본 국내 출간작인데, 8권이 전부입니다.

진보초 - 이구치 분슈의 그림책 2권, 에토 준 <<개와 나>>, *<<싫어싫어 유치원>>, *<<꼬마 모모>>, 다나카 고미마사 <<야시의 여행>>, 노사카 아키유키 <<서서 읽으면 안 되는 책>>, <<비록 가와시마 요시코>>
다이칸야마, 시부야 - 노미야마 고지 <<사백 자의 데셍>>, <<셀피시>>, *<<그레이엄 그린 선집 9 (제 3의 사나이, 떨어진 우상, 패자가 모두 가진다>>, *콜린 윌슨 <<현대 살인 백과>>, 이토 히로미 & 우에노 지즈코 <<노로와 사니와>>, 다네무라 스에히로 <<사기꾼 칼리오스트로의 대모험>>
도쿄 역, 긴자 - 팀 오브라이언 <<실종>>, 홋타 요시에 <<다리 위의 환상>>, 무라마쓰 쇼후 <<여경>>, 기시다 리오 <<롱 굿바이>>, 구사카베 엔타 <<정말로 사랑했다면>>, 스다 사카에 <<전후 풍속 천일 야화>>, 쿠사마 야요이 <<신주 사쿠라가쓰카>>
와세다 - 가이코 다케시 <<베트남 전기>>, 요시다 겐이치 <<기묘한 이야기>>, *하야시 후미코 <<삼등 여행기>>, 단 가즈오 <<풍랑의 여행>>, 고보리 진지 <<요괴를 보았다>>, 다나카 고미마사 <<간음문답>>, 한스 헤니 얀 <<열세 가지 으스스한 이야기>>, *<<엘리엇 시집>>, 가이코 다케시 <<시부이>>, <<대화록, 현대 만화 비가>>
아오야마, 덴엔초후 - <<인민 사원>>, 도요시마 요시오 <<에밀리안의 여행>>, *앙드레 지드 <<여인들의 학교>>, 기무라 모토노리 <<영혼이 고요한 때에>>, *<<타고르 시집>>, 오야 소이치 <<세계의 뒷길을 가다 - 남북 아메리카편>>
니시오기쿠보 - 세토우치 하루미 <<다무라 도시코>>, *마르케스 <<사랑과 다른 악마들>>, 다케다 유리코 <<말의 식탁>>, <<도시에 널리 퍼진 기묘한 소문>>, 아유카와 노부오 <<시대를 읽다>>, <<하쿠슈 가요집>>, 나카가미 겐지 <<이야기 서울>>, 다나카 고미마사 <<아아, 수면 부족이다>>
가마쿠라 - 가이코 다케시 <<최후의 만찬>>, 후카자와 시치로 <<고슈 자장가>>, <<브로마이드 쇼와사>>, 오카베 이쓰코 <<부처님과의 대화>>, 다쓰미 하마코 <<손수 기른 나의 요리>>, 다무라 류이치 <<저스트 예스터데이>>, 나가이 다쓰오 <<홍차의 시간>>, 오사라기 지로 <<시인>>
다시 한번 진보초 - 미시마 유키오 <<무예를 숭상하는 마음>>, 쇼와 전쟁문학 전집 11 <<전시하의 하이틴>>, 가미사카 후유코 <<스가모 프리즌 13호 철문>>, 요시카와 에이지 <<남방기행>>

그 외에 확실히 '일반인' 으로서 헌책방을 대하는 시선도 남 같지 않아서 좋았는데, <<노라쿠로>> 전 권을 사는 노년의 신사를 보며, 늙어서 <<유리 가면>> 이나 <<더 파이팅>> 전 권을 한 번에 살 것을 꿈꾸는 장면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일반인 취향이 짙게 느껴져서 더욱 반갑더라고요.

이렇게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고, 무엇보다 헌책방과 헌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재미있을 수 밖에 없는 책입니다.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4점! 일본 도쿄 소재 헌책방을 주로 소개하고 있으며, 소개된 책방들도 지금은 문을 닫은 곳이 많다는 지역적, 시기적 한계와 소개된 책들 대부분이 미 출간작이라는 이유로 약간 감점합니다. 그래도 저와 같은 취향의 분들 모두에게 추천해 드리는 바입니다.

저 역시 한때 결혼 전에는 홍대 입구의 '숨어있는 책'을 비롯한 헌책방 투어를 정기적으로 떠났을 때가 있습니다. 당시 이런저런 보물과도 같은 책을 많이 샀었죠. 지금은 결혼 후 이사도 했고, 근처에 헌책방도 없으며, 그나마 가는 곳도 시스템으로 관리되는 알라딘 헌책방이 전부라 예전과 같은 보물찾기 느낌이 들기는 힘든데 옛날이 그립네요.

2018/03/10

유령탑 - 에도가와 란포 / 민경욱 : 별점 1점

유령탑 - 2점
에도가와 란포 지음, 미야자키 하야오 그림, 민경욱 옮김/북홀릭(bookholic)

에도가와 란포 장편소설. '아케치 코고로'나 '괴인 20면상', '소년 탐정단'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얼론 장편으로 쇼와 12년, 즉 1937년 첫 연재가 시작된 초기작입니다. 쿠로이와 루이코의 번역서를 에도가와 란포가 다시 재가공한 작품으로 원작은 앨리스 M 윌리엄슨의 <<회색빛 여인>> 이라고 하네요.

사실 큰 관심은 없었습니다. 발표 시기나 발표된 형태 (번역서의 재가공) 를 볼 때 구릴 것이다! 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집어든 이유는 딱 한가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그리고 해설한 서두 몇 페이지의 일러스트와 콘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브리 미술관에서 "유령탑에 어서 오세요 전시 - 통속 문화의 왕도" 라는 기획전을 개최할 때 전시되었던 자료라 생각되네요.

그러나 본 편은 생각만큼 구립니다. 별로에요. 설정은 작위적이기 짝이 없으며 모든 내용은 우연에 의지하고 있거든요. 키타가와 미츠오가 노즈에 아키코가 폐허가 된 유령탑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작위적이며, 뒤로 가면 갈 수록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가관입니다. 저택에서 열린 파티에 곡마단에서 탈출한 호랑이가 난입한다던가, 협박범을 미행하면서 탄 열차가 탈선 사고를 일으켜 협박범의 집에 잠입하게 된다던가 하는 식이거든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설정과 전개는 슬랩스틱 개그물을 방불케하는데, 이를 공포스럽게 묘사하는 에도가와 란포 특유의 과장된 문체 덕분에 더 웃기게 느껴집니다. "아아!" 라는 감탄사가 대표적이에요. 뭔 일만 일어나면 "아아...!" 거리니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작위적으로 쌓아올린 이야기지만 그래도 이야기 전개가 탄탄하고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설득력있고 합리적이라면 참아줄만 했을겁니다. 그러나 역시나, 그럴리가 없죠. 짜임새가 헐거워서 극적인 재미를 느끼기 힘들어요.
이야기는 초반부의 "유령탑에 얽힌 비밀"을 풀어내어 보물을 찾는 이야기에서, 중반부터의 노즈에 아키코의 정체가 무엇인지? 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유령탑에 얽힌 비밀은 고딕 호러에 모험물이 섞인 느낌이고, 노즈에 아키코의 정체는 전형적인 추리 서사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두 이야기 모두 앞서 말씀드렸듯 짜앰새가 헐거워 완성도가 낮습니다 .

보물을 찾는 과정은 고딕 호러같은 유래에 아주 약간의 암호 트릭이 결합된 전형적인 모험물인데 결론적으로 보면 너무 쉬워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초록색 문(?)이 열린다는건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냥 시계탑에서 쳐다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미로로 들어간 뒤에는 아키코의 발자욱을 따라 걸어갈 뿐이라 극적 긴장감을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아키코가 어떻게 미로의 비밀을 풀어냈는지 설명도 되지 않고요. 단지 연구로 미로의 비밀을 풀어냈다는건 너무 유치한 발상이잖아요? 최소한의 암호 트릭이나 비슷한 무언가는 독자에게 전해주었어야 하지 않나 싶네요.

노즈에 아키코의 정체 관련 이야기도 마찬가지, 그녀가 과거 양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던 죄수 와다 긴코였다! 까지는 뭐 그럴듯 합니다. 하지만 노즈에 아키코, 즉 와다 긴코가 유령탑의 보물을 찾고 진범을 찾으려고 하는 사명이 있다는 설정은 당쵀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복수를 위해 진범을 찾고자 하는건 알겠지만 보물을 찾는게 왜 사명이 될까요? 애초에 유령탑에 살 때에는 왜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요? 또 변호사 쿠로카와를 제외한 잔챙이 악당들의 협박에 휘둘리는 것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번역작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라니르' 라는 독약을 이용하여 와다 긴코를 탈옥시킨 작전은 <<몽테크리스토 백작>> 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지금 시점으로 본다면 표절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에요.
아울러 처음에 아키코의 정체는 살해된 노파의 하녀 아카이 도키코가 아닐까? 라고 의문을 던지지만 아키코가 항상 손목을 감추고 있다는 묘사로 그녀가 와다 긴코라는건 처음부터 명백하죠. 이는 분량 낭비일 뿐이었습니다.

이를 밝혀내기 위한 주인공의 모험도 앞서 말씀드렸듯 우연이 이어지는 전개이며 차례로 수수께끼에 대해 증언이 이어지는 식이라 추리가 개입될 여지는 전무합니다. 무엇보다도 진범이 나카다 초조로 밝혀지는 장면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열 두시 종소리에 공포를 느낀게 증거라니? 그리고 공포를 느껴 죽은게 천벌이라니? 20세기 초기의 사고 방식으로 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잖아요. 당시 나카다 초조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혐의를 벗었다는데, 그 알리바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말이죠.

딱 한가지 건질만 했던 부분은 죽은 와다 긴코가 어떻게 다르게 생긴 노즈에 아키코로 돌아왔는지? 에 대한 수수께끼입니다. 현재로서는 별거 아닌 미용 성형을 무슨 대단한 과학 기술인양 포장하여 묘사한건 우습게 느껴지지만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참아줄 만 합니다.

하지만 괜찮은 부분은 전체 분량의 1/10도 안되는 느낌이에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근대 직전의 신소설 느낌이 날 정도로 낡은 작품으로 그 어떤 가치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에 낚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차라리 미야자키 하야오의 해설 부분만 떼어내어 1/10 가격으로 파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2018/03/03

오무라이스 잼잼 8 - 조경규 : 별점 1.5점

오무라이스 잼잼 8 - 4점
조경규 글.그림/송송책방

한때 (지금은 이어지는 이유들 때문에 아닙니다) 우리나라 요리, 음식 만화의 최고봉이라 생각했던 <<오무라이스 잼잼>> 의 신간. 모두 22편의 '다음 웹툰' 연재작에 후기, 그리고 약간의 부가 정보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500 페이지가 넘는 볼륨은 풍성합니다. 덕분에 볼만한 내용도 제법 되고요.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새롭다는건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발상이 등장한 <<내 생애 첫 즉석 떡볶이>> 편입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로 여태까지 수백권의 추리 소설을 읽고 리뷰를 올렸지만 그런 저에게도 아직 크리스티 여사님의 "신작" 이 존재하죠. 그러한 작품들이 큰 기쁨을 준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음식, 요리 정보도 미국의 봉지빵 트윙키, 다양한 군만두들과 카야잼의 소개 등은 괜찮았어요. 그 중에서도 최고는 버블티의 역사가 상세하게 등장하는 <<버블티야 반갑다!>> 편이었습니다. 요리는 아니지만 <<카쥬랑 막국사랑>> 에서 알게된 독특한 악기 '카쥬' 도 마음에 들더군요. 유튜브를 찾아보니 아주 매력적이던데 저도 제 딸을 위해서 하나 사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좋았던 부분은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전체적으로 기대에 미치지는 못해요. 음식 만화라고 하기에는 주제가 되는 음식 비중은 대체로 절반 정도 분량에 그치고, 그나마의 내용도 디테일하게 파고든 이야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음식 만화는 아니에요. 음식이 주요 소재 중 하나인 일상툰이라고 해야죠. 그런데 문제는 일상툰으로서의 재미가 그닥이라는 점입니다. 조금 독특하지만 평범한, 작가 가족들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될 뿐이거든요. <<생활의 참견>> 처럼 웃기기라도 하면 괜찮았을텐데 전혀 그렇지도 ㅇ낳고요.

전개도 예전같지 않아요. 음식과 일상툰이 나름 조화롭게 전개되었던 과거에 비하면 이번 권에는 억지가 많아서입니다. 과거 아내와 같이 수업을 들었던 사진 수업 과정 중 필름통을 흔드는 장면에서 버블티 이야기로 넘어간다던가, 알까기에서 바둑알을 떠올리고 다시 오레오로 넘어가고, 토종개 이야기에서 떡갈비로 이어지는 등의 전개가 대표적이죠. 냉동 식품을 만화와 연결시킨 발상도 뜬금없기 그지없고요. 음식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재미도 없는 억지스러운 설정일 뿐입니다.
그나마 이게 좀 나은 편이고... 결명자차, 월병, 조식 뷔페, 북엇국 등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이러한 변주도 없고 음식에 대해 깊이있는 소개도 없는 단순한 추억담이 전부에요. 결명자차 이야기를 예로 들자면, 뜬금없이 등장한 음정희 이야기 정도 외에는 음식 이야기도, 일상 이야기도, 재미도 뭐 하나 건질게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웹툰 연재분에 더하여진, 책을 구입한 독자를 위한 서비스도 별로입니다. 별도의 아이디어가 들어간 새로운 내용은 전무하다시피하고, 사진 중심의 정보 제공 페이지가 대부분이거든요. 흔해빠진 맛집 탐방 기사는 짜증날 정도였고, 음식과는 별 상관없는 인터뷰는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네요. 지금은 널리널리 알려진 홍대 명물 막걸리 아저씨 이야기는 완전히 뒷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고요.

물론 작화는 여전히 마음에 들고 몇몇 에피소드도 괜찮습니다. 요리와 음식을 중심으로 잔잔한 가족 이야기를 다룬 일상툰을 원하신다면 취향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대했던 정통 '음식 / 요리 만화' 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서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다음 웹툰으로 이미 접해 보았던 상황에서 책을 따로 15,000원 씩이나 내고 구입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저는 더 이상은 구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2018/03/02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 송경아 : 별점 2.5점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 마플은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라피엘 소령과 어울리게 된다. 라피엘 소령은 여러 과거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살인자의 사진을 보여주겠다고 하다가 무언가를 보고 갑자기 사진을 치워버린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소령은 시체로 발견되고, 지병인 고혈압 탓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미스 마플은 소령의 죽음에 의문을 품게 되는데...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을 무대로 한 여사님의 미스 마플 시리즈 장편.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이하 <<공략>>) 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소개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영상물로는 굉장히 실망했었지만 연출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지금은 내용이 기억도 나지 않기도 해서요.

읽으면서 가장 놀라왔던 것은 이야기의 속도감입니다. 무려 3명이 살해당하고, 1명은 미수에 그치는 연쇄 살인극이 펼쳐지지만 중편 분량에 가깝거든요. 이전 <<다섯 마리 아기 돼지>> 와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덕이죠. 최근 읽었던 몇몇 대장편들에서 보았던 짜증나고 지루한 심리 묘사, 장황하기만 할 뿐 쓰잘데 없는 배경 묘사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어요. 미스 마플의 심리는 비교작 자주 묘사되는 편이지만 모두 전개에 필요한 요소들이라 납득할만한 수준이었고 말이죠. 이런 점은 현대 작가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네요. 물론 이런 묘사의 부족으로 '카리브 해' 라는 배경이 잘 드러나지 않기는 합니다만 - 원주민 종업원 이야기만 없다면 우리나라 온양 온천이라고 해도 딱히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배경 묘사는 별 게 없습니다 - 장점에 비교하면 지극히 사소한 문제죠.

또 미스 마플이 드러내놓고 탐정 활동을 벌이는게 아니라는 점도 상당한 볼거리였습니다. 평범한 할머니가 손님들과 나누는 수다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추리를 진행하는 전개인데, 이게 정식 수사가 아닌 탓에 여러가지 제약이 생겨버리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죠. 심지어 3인칭 시점으로 오간 대사마저도 정말로 그렇게 말했는지? 를 고민하게 만드는건 정말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라 생각합니다. 조금만 잘 가공하면 꽤 괜찮은 서술 트릭으로 써 먹어도 무방할 정도에요.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수사와 추리는 현실감 넘치는 분위기를 선사해주고 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공략>> 에서 언급한대로 <<킥 애스>> 의 힛걸과 같은 현대적 여성 영웅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독특한 히어로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결핍', 즉 뭔가 부족한 영웅이 활약하는 현실적인 모험담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읽어보니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힛걸은 뛰어난 격투 실력을 갖추었지만 부모도 없는 어린아이이고, 미스 마플은 천재 탐정이지만 늙은 독신 할머니라 '결핍' 측면에서 보면 거의 동일하니까요. 아, 정말이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감탄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아요. 트릭은 별볼일 없지만 <<공략>> 에서 말한대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드라마' 를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끌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몇 안되는 등장 인물들이 각자 비밀이 있고, 나름의 동기가 있으며, 한 명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식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이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정교한 구성도 볼만하고, 누가 범인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알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라피엘 소령은 살인범이 누군지 알아챈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걸 그 자리에서 밝히지 않았는지가 잘 설명되지 않는건 이상해요. 구태여 감출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이는 빅토리아가 고혈압 약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동일합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를 안다면 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동거남이 있는 이상 그녀를 살해한다고 입막음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간과된 부분입니다.
또 몰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살해한다고 하더라도... 빅토리아와 럭키는 그렇다쳐도 라피엘 소령 살인죄까지 묻기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비록 대사들을 통해 사진 속 독살범이 '여자일 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독자는 3인칭 시점으로 된 대사를 통해 이미 그 독살범이 남자라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1960년대 시점으로 보아도 단지 가계에 정신병자가 있었다는 정도로 연쇄 살인을 일으킨다는 발상의 설득력은 낮아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무려 3명이나 살해당한 상황에서 몰리를 마지막으로 독살하려고 시도하는 행동도 설득력있다고 보기는 어렵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공략>> 에서 별점 5점을 주면서 걸작이라고 극찬한 탓에, 기대가 너무 컸습니다만...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공략>> 에서 말한대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지다는' 미스 마플의 도움 요청 장면도 독특하기는 한데 그렇게 멋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리뷰가 원작을 초월한게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