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모형의 밤 -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북스피어 |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일본 작가 나카지마 라모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으로, 단편들은 제목처럼 인체모형에 관련된 기괴한 묘사에서 시작되어, 눈-피-코-귀-다리-무릎-배꼽-팔-뼈-위-유방-날개와 성기 라는 인체의 부분을 주제로 하여 쓴 작품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에 읽었던 판타스틱의 원사운드 만화를 보고 구입하게 되었네요.
각 단편별로 분위기가 굉징하 다른 것이 특징인데, 유령이 등장하는 정통(?) 심령 호러물에서 부터 시작해서, 일종의 괴물이 등장하는 스플래터 호러, 심리 스릴러에 더불어 진지한 드라마와 1인칭 시점의 블랙 코미디까지 실려 있어서 굉장히 풍성합니다. 그야말로 색다른 인생을 살아온 작가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방대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작품별 수준의 편차가 크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이 예상 가능한 내용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좀 아쉽네요. 뭔가 한번 정도 더 비틀 수 있는 이야기들인 것 같은데 너무 평범하게 마무리한게 아닌가 싶거든요. 또한 앞서 말했듯 쟝르가 다양해서 호러 소설이 취향이 아니더라도 즐길 작품이 많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외려 정통 호러로 보이는 작품이 별로 없다는 것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단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개인적인 베스트인 "사안"과 "코" 처럼 오싹하면서도 의외성이 있는 작품들이 더욱 많았더라면 좋았을텐데요...
그래도 충동구매에 가까운 구매였는데 다행히 평균 이상은 해 주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워낙 단편집을 좋아라해서 점수가 더 높을지도 모르지만...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프롤로그 : 인체모형의 밤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작품을 한데 묶는 이야기로 별 특기할 점은 없습니다.
사안(邪眼) : 싱가포르를 무대로 한 심리 스릴러물로 스멀스멀 계열의 작품입니다. 일본인 싱가포르 주재원의 아내가 임신하였는데, 현지 고용인인 가정부가 임신한 아이가 "사안"을 지녔다.. 라고 믿는다는 내용으로, 사안이라는 전설과 푸른눈이라는 설정을 잘 결합한 좋은 단편입니다. 진실이 괴담보다 무섭다는 마지막 반전도 톡 쏘는 맛이 아주 좋았고요. 이런 류의 단편으로는 모범답안이 아닐까 싶네요.
세르피네의 피 : 세르피네라는 섬을 그야말로 "낙원" 이라고 믿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사실 "낙원"의 실체는 달랐다.. 라는 반전이 있는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반전에 이르기까지 교묘하게 장치한 복선을 풀어나가는 맛은 괜찮지만 반전 자체가 그다지 와닿지는 않아서 약간은 심심했습니다. 또 "피"를 연관시키기에는 좀 억지스럽기도 했고요.
코 : 조향사인 주인공은 옛 남자친구의 소개로 싼 맨션을 얻어 이사한다. 그러나 이유를 알수없는 물소리와 냄새 때문에 곤란해 하던 차에, 전 세입자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유령이 등장하는 괴담입니다. 뻔하게 흘러가서 뻔하게 끝맺긴 하지만 유령 이야기의 무서운 점, 즉 보이지는 않지만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를 조향사라는 직업의 주인공을 통해 잘 드러냈으며 특히나 "돼지뼈 라면 국물 끓이는 냄새"의 정체가 모골이 송연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전 정말이지 일본 욕탕이 물을 그렇게 데우는 시스템이라는걸 몰라서 마지막에 깜짝 놀랐네요.
굶주린 귀 : 판타스틱의 원사운드 만화를 통해 접한 것이 이 단편의 소개였죠.
옆방을 엿듣는것이 취미인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새로 이사온 집 옆집을 엿듣던 중 분명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인데 여자만 이야기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옆집에 인사를 가는 척 하며 여러가지를 물어보던 중에 옆집 여자 남편이 "언어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조금은 허무한 마음에 술을 사러가던 주인공은 여자 집을 우연히 올려다 보는데.... "남자 빨래가 하나도 없어!"
이 줄거리만 놓고 보면 굉장히 흥미진진한데, 아쉽게도 결말이 너무 예상 가능한 범위내에 있었습니다. 좀 더 반전다운 반전이 등장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것 같아요. 예를 들면 레즈비언 부부였다던가, 남편이 게이바 사장이나 트랜스젠더였다던가....
건각(健脚)-국도 43호선의 수수께끼 : 전직 드라이버 지망생이었던 주인공과 주인공이 우연히 알게된 소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령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괴담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이 단편집 안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뭔가를 전해준다는 것 하나가 독특할 뿐 별로 남는건 없는 그냥 홈드라마같은 느낌의 소품이었습니다.
무릎 : "인면창" 이 실제로 그 주인을 먹어버린다! 는 내용의 이종괴물 스플래터 호러 단편입니다. 전개는 한마디로 일직선이라 별로 평할게 없는 평작인데, 주인공의 설정이 독특하고 전개가 어울리지 않게 유머스러워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그나저나, 인면창이라니 "블랙잭"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네요. 인면창이 있는 피해자(?) 가 "블랙잭"을 만났더라면 완치되고 생명을 건지지 않았을까요?^^
피라미드의 배꼽 : 대 부호의 데릴사위인 가난뱅이 학자가 도심 한복판에 피라미드를 건축한다! 는 SF 단편입니다. 피라밋과 피라밋 파워에 대해 그럴듯한 설명이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색작으로, 작가가 정말로 다양한 분야에 박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역시나 좀 뻔해서 별로 특기할건 없더군요.
EIGHT ARMS TO HOLD YOU : 비틀즈의 존 레논의 미발표 곡을 다룬 작품으로 작가의 방대한 지식세계를 다시한번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음악에 대해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묘사하고 있거든요. "비틀즈 4명이 안아준다는" 노래의 제목과, 마지막의 반전이 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좋았고요. 반전이 너무 끼워다 맞추는 것이 지나쳐서 작위적인 느낌이 강한 것은 아쉽지만 전체적인 수준은 평작 이상으로 생각됩니다.
뼈 먹는 가락 : 1인칭 시점의 공원묘지 판매원을 주인공으로 한 블랙코미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었는데, 이유는 주인공이 왜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너무 다양한 내용을 펼쳐만 놓았지 이야기의 맥락이 전무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마무리도 어설퍼서 도저히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든 수준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유사한 분위기의 작품인 레이 브래드버리의 "장의사" 정도로는 이야기를 끌고가 줬어야 하는데 말이죠....
다카코의 위주머니 : 거식증에 걸린 채식주의자 소녀가 최후의 순간에는 부모에게 살의를 품는다는 이야기로 "채식주의" 에 대한 이야기가 내용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문제는 별다른 공포도, 반전도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겠죠. 그냥저냥 홈드라마 소품입니다. 이게 호러가 되려면 다카코가 마지막 장면에서 배를 가르는 정도는 되어야겠죠. 어쨌건 저는 읽고나니 로스트비프가 먹고싶어질 뿐이었습니다.^^;
유방 : 영매사가 불러온 유령을 거짓이라 치부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품입니다. 짤막한 블랙코미디 꽁트로 약간의 반전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별로 특이하지는 않더군요.
날개와 성기 : 무슨 이야기인지? 성기를 없애고 스스로 "무성", 천사와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는 주인공이 명상을 통해 접한 실존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데 묘사는 현실적이고 와 닿지만 도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알 수가 없는 내용이라 평가 자체가 어렵네요....
에필로그 목저택 : 프롤로그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역시나 별로 특기할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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