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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1

벨벳의 악마 - 존 딕슨 카 / 유소영 : 별점 3점

 

벨벳의 악마 - 6점
존 딕슨 카 지음, 유소영 옮김, 장경현 감수/고려원북스
1925년, 58세의 역사학 교수 니콜라스 펜튼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240년 전으로 타임슬립한다. 그는 240년 전, 헨리 2세 통치하의 영국에서 자신의 이름과 같은 니콜라스 펜튼 경으로 잠에서 깨어난 뒤 한달 뒤로 예정되어 있는 아내 리디아의 독살을 막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자신과 관련된 정치적 암투를 해결하고 헨리 2세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화요추리클럽'의 운영자로 유명한 장경현님이 감수하셔서 이른바 "장경현의 MOM(Magnum Opus Mystery)"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고려원북스의 걸작 미스터리 시리즈 두번째 작품으로 -첫번째 작품은 역시 딕슨 카의 "구부러진 경첩" 이었죠-  이 레이블은 유명 추리애호가의 감수답게 국내 미출간된 거장의 작품을 선정하여 출간하는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 시리즈입니다. 이 작품 역시 딕슨 카의 대표작이긴 하지만 국내에 출간된 적이 없어 저같이 영어가 딸리는 추리 애호가들의 맘을 아프게 했는데 이번 출간으로 오랜 갈증을 해소한 것 같아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작품은 제 생각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 물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동안 역사 추리소설로 알고 있었는데, 정작 작품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과거로 타임슬립한다는 이야기였으니 정말이지 상상 밖의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이러한 판타지 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사실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유치하다는 느낌까지 받았으니까요.

일단은 그동안 유사한 시공 이동 판타지를 너무 많이 접한 탓에 이 작품이 발표당시에 발휘했을 만한 새롭고 신선한 맛을 느끼기 힘들었다는 이유가 크겠죠. 아울러 시공 이동 판타지에서 가장 중요한 "타임 패러독스의 딜레마" - 역사를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바꿀 경우 현재가 영향을 받아 결국 과거로 이동한 자신마저 영향을 받게 된다는 - 역시 편법 형식으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고 있어서 실망스러웠고 말이죠. 더군다나 내용이 부실하고 황당한 부분도 많아서, 원래는 58세인 주인공의 행동이 나이에 걸맞지 않는 초딩스러운 행태를 많이 보이는 점이라던가 팜므파탈로 설정한, 그야말로 악마의 하수인이라 할 수 있는 여인의 존재와 정체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도 감점 요소였습니다.

또한 역사 추리물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추리와 역사의 부분이 분리되어 있어서 난감하더군요. 역사 추리물이라면 실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진지한 후대의 추리적 고찰이 반영되는 작품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 작품은 단지 2세기 전을 무대로 한 독살 사건일 뿐이며, 사실 시대적 배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트릭이기도 해서 역사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위에 장황하게 쓴 것 처럼 단점만 가득한 작품은 아닙니다. 조금 유치하긴 했지만 명성에 값하는 재미도 충분한 작품이기도 하죠. 일단 헨리 2세 치하의, 이른바 토리당 - 휘그당의 대립을 소재로 쓴 역사 이야기 부분은 제대로 된 활극의 재미가 넘칩니다. 주인공 니콜라스 펜튼이 "벨벳의 악마"라 불릴 정도의 영국 제일의 검사이자 과격한 인물이라는 것 덕분에 "검의 대가" 나 "스카라무슈" 만큼이나 검술 액션이 가득하거든요. 검술의 기술, 칼의 고증 등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딕슨 카의 디테일도 제대로고요. 이러한 디테일은 실제 2세기전의 영어로 대사를 표현하는 등 이 작품에서 신경쓴 부분이 굉장히 많은 것 같은데 한글로 번역되면서 맛이 떨어지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깝긴 하네요.

그리고 추리적인 부분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비소 독살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제가 그동안 보아왔던 그 어떤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의표를 찌르는, 예상밖의 트릭을 구사하고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비워놓겠는데 "그야말로 악마가 영혼을 거래할 때 맺는 계약은 절대 손해보지 않는다" 가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 계약 내용을 복선으로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도 해서 나름 본격물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점이라 할 수 있겠죠. 딕슨 카는 역시나 딕슨 카 였달까요. 역사 추리물은 아니지만, 시공 이동 판타지 물에서도 공정함을 잃지 않는 대가의 노련함이 엿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구부러진 경첩" 보다는 확실히 의표를 찌르는 맛이 넘치는 의외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정통 추리 애호가라면 호불호가 엇갈릴 수는 있는데 재미와 아이디어, 독창성 측면에서 충분히 점수를 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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