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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31

서점의 명탐정 - 니타도리 게이 / 이희정 : 별점 2점

서점의 명탐정 - 6점
니타도리 게이 지음, 이희정 옮김/㈜소미미디어

니시후나바시에 있는 작은 서점에서 화자인 고참 아르바이트생 아오이가 탐정역인 점장과 함께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일상계 추리물.
제목과 표지만 보았을 때, 서점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는 일상계 단편 추리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명탐정 홈즈걸 시리즈 처럼요. 읽고보니 역시나, 생각대로더군요. 심지어 책 뒤 소갯글을 보니, 명탐정 홈즈걸 시리즈의 저자 오사키 고즈에가 '서점'으로 테마를 정했던 앤솔러지에 기고했던 것에서 시작된 이야기라고 하네요. 최근 무거운 작품들만 읽어서 기분전환차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서점이 주요 무대이며 점장이 탐정이라는 점에서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등장하는 일상계 추리물" 카테고리에 속합니다. 서점을 무대로 한 작품도 많지요. 그러나 이 작품만의 특징이 존재합니다. 바로 "책" 자체가 수수께끼가 되는 이야기는 없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의 경우는 책들이 중요 소재였던 반면, 이 작품에서는 서점이라는 공간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수록작 중 <<모든 것은 에어컨을 위해>>만 특정한 책의 도난 사건을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 허나 어떤 책인지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에요. 훔쳐낸 방법이 핵심 내용이니까요.
이런 방향도 꽤 괜찮더군요. 서점이라는 장소,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풀어내는데에는 아주 적합했거든요. <<일곱 권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서점과 책의 특성을 잘 살린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서점이여 영원히>>는 서점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고요.
그리고 손님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는 역할이 서점 직원의 중요 업무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이런 내용의 시리즈가 나와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 전 먹었던 요리에 대한 기억만 듣고 추억속 요리를 재현해 주는 <<추억을 파는 식당>> 처럼 말이죠.

하지만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탓입니다. 특히 과장된 캐릭터들은 영 적응이 안되더군요. 점장부터가 그러합니다. ‘니시후나바시 POP 광고의 여왕’ 과 같은 별명, 바쁜 현장에서 빠져나와 게으름을 피우는 모습 등 세세한 설정들은 만화 주인공같은 느낌만 전해 주거든요. 여기에 집사 역할을 수행하는 성실한 고참 아르바이트 아오이 설정은 진부하기 짝이 없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는 않지만, 미묘합니다. 등장하는 트릭들이 문제입니다. 대체로 억지스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오히려 별다른 추리가 등장하지 않고, 상황만으로 사건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곱 권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다>>가 가장 마음에 들더라고요. <<서점이여 영원히>>도 점장의 어설픈 추리를 뺐더라면 훨씬 좋았을테고요.

한마디로, 전형적인 가벼운 양산형 전문가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가볍게 읽기는 수록작 4편 중 수준 이하였던 2편이 점수를 너무 깎아 먹어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쓱 한 번 읽기에는 적당했습니다. 일본의 서점 관련된 작품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을 듯 싶네요.

덧붙여 실제 서점 근무 경험은 없다는 저자의 후기에는 조금 놀랐습니다. "서점 직원에게 책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러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책 제목을 잘못 기억하고 있다"던가, 서가로 문고본을 옮길 때 띠지는 손톱 밑으로 파고들어 다칠 수 있고, 찢어지기도 쉬워서 일부러 빼 놓는다는 등 디테일은 서점 근무 경험이 없다면 알 수 없었을 정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저자는 구제 반코의 <<망나니 서점원 (暴れん坊本屋さん)>>을 참고했다는데, 그 외에도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컨텐츠가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도 읽어 보았던 '해골 서점 직원 혼다씨' 처럼요. 이런 점은 조금 부럽네요. 하긴, 소설을 쓰기 위해서 모든걸 직접 경험할 필요야 없는게 맞기도 할 테고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일곱 권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서점 서가에 꽃혀있는 책을 습관적으로 정리하고 있던 손님은, 알고보니 다른 용무가 있었다. 그는 미국 유학으로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된 연인으로부터 책들을 받았는데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던 차에, 이 서점에서 주문을 받았다는걸 알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찾아왔던 것이었다. 연인은 급작스러운 유학 이야기를 들은 뒤 연락 두절 상태였다. 일곱 권의 책은 그림책, 소설, 인문학, SF 등 장르가 다양했고 받았을 당시 제일 위에 <<네가 없어도 괜찮아>>가 놓여 있었다...

주요 등장인물들과 무대가 되는 서점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시작되는 첫 이야기.
손님이 '정리꾼'이라는 설정을 활용해서 풀어내는 간단한 암호 트릭이 등장합니다. 책들은 크기별로 놓으면 "스카이프 가입해"라는 메시지가 표시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문고판이 나온 오래전 소설의 단행본을 구태여 주문하는 등의 단서도 등장하고요.
책을 주문하고 배달된 날짜, <<네가 없어도 괜찮아>>가 상자 맨 위에 놓여 있었던 이유 등을 근거로 정리꾼의 애인은 서점 아르바이트생 히라노라는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주문과 배달에 보통 1주일이 소요되는데, 몇 일 걸리지 않았던게 단서였습니다. 이는 서점에 재고가 있다는걸 완벽하게 파악했다는 건데, 이를 조사하기 위해 서가를 훝고 다니는 손님은 없었으니 그 연인이 서점 직원이라는건데, 꽤 그럴듯 했어요. 포장 역시 단서였습니다. 판형이 다른 특정 책이 맨 위에 올라가려면, 직원이 직접 포장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정리꾼이라는 손님이 책을 선물받고 정리도 하지 않은채 집에 두었을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책 제목 앞 글자만 따서 읽으면 되는 간단한 암호라서, 의지만 있었다면 책을 정리하지 않았어도 풀 수 있었을테고요. 경우의 수는 5천개 정도밖에 안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이런걸 물어보려고 서점에 올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도 서점이라는 특성을 잘 살린 일상계 추리물로 기본은 해 주는 에피소드였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든 것은 에어컨을 위해>>
서점을 찾은 손님 시마지리는 아르바이트 생 이케베의 친구였다. 그는 서점 직원들에게 이케베가 자신의 소중한 책을 훔쳐간 것 같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문제는 이케베는 도저히 책을 가져갈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방법에 대해 서점 직원들이 모여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 놓기 시작하는데...

도난품은 유명 라이트노블 작가 하스미 쿄의 사인본이었습니다. 시마지리의 가방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시마지리가 잠깐 쓰레기를 버리러 자리를 비운 사이, 방에 있었던 이케베가 훔쳐갔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케베의 몸 속 어디에도 책은 숨길 수 없었고, 그가 가져갔던 문고본이 가득했던 상자 안에는 책을 더 이상 넣을 방법이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케베가 책을 어떻게 훔쳐내었는지?에 대해 서점 직원들이 각자 추리를 이야기하는, 일종의 추리 배틀이 핵심인데, 나름대로 재미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정말로 훔쳐낼 방법이 없었다는 상황을 알려주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결국 책이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문고본이 가득찼던 상자 안에 넣는 방법 밖에 없었다는게 증명되거든요. 상자안의 책들 커버를 벗겨서 책 한 권이 더 들어갈 공간을 만들었다는게 진상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지식이 사용된 트릭이라고 할 수 있어요.
덧붙여, 시마지리가 방법을 알기 위해 서점에 찾아온 이유도, 보통 손님들은 서점 직원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다’고 곧잘 생각한다는 것의 연장선상이라는 것인데 꽤 그럴듯했어요. 이런저런 다른 서점 동료들 캐릭터들도 읽는 재미를 더하고요.

하지만 벗겨낸 책 커버의 처리 방법은 설득력이 떨어지더군요. 상자 골판지 앞, 뒤를 뜯어낸 사이에 집어넣었다는데, 시마지리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50권이나 되는 책 커버를 완벽하게 안에 집어넣고 재포장하는건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쓰레기 버리러 갔다 오는게 20분 이상 걸리지는 않았을테고, 설령 시간 내 집어 넣었더라도 티가 전혀 나지 않았을 것 같지도 않았고요.
이보다는 조금 더 큰 다른 상자를 미리 마련해서, 이미 포장해 두었던 박스와 책을 함께 넣었을 거라는 히라노의 추리가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습니다. 시마지리가 상자를 직접 들었기 때문에 그럴리 없다고 했지만, 미묘한 크기 차이를 알아내는건 힘들지 않았을까요?

작가로 성공한 친구 싸인본을 질투심에 버렸지만, 그 작가 친구가 집에 자러올지도 몰라서 싸인본을 훔쳤다는 동기도 이상했어요. 진상을 알고 난 시마지리가 흔쾌히 용서하면서, "또 사서 사인 받으면 된다"고 말하는 장면과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시마지리는 다시 싸인을 받아도 되고, 이케베는 안 될 이유가 있을까요? 또 이름 부분 필적이 다르면 눈치채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이렇게 흔쾌히 용서할거면 시마지리가 이런 소동아닌 소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게다가 애초에 책을 훔치는게 목적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훔칠리기 만무합니다. 어떤 트릭을 써도 용의자는 자기밖에 없으니까요. 시마지리 집에 놀러가서 몰래 가방에 넣고 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니, 상자 골판지를 뜯어내는 등의 불필요한 노력을 할 이유가 없어요. 문고본이 박스안에 정말로 "가득차 있었다"도 우연이었다고 생각되고요. 억지와 우연이 만들어낸 불가능 범죄인 셈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서점 업무에 대한 여러가지 디테일은 좋았지만 트릭, 동기, 상황 모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일상 업무 탐정단>>
하스미 쿄의 사인회가 있던 날 밤, 서점에 누군가가 침입하려 했었다. 다음날 출근 때, 정문 쪽에 테디베어가 목매달렸고, 가게 안 쪽에서 붙여놓은 하스미 쿄가 친필 사인한 포스터에는 핑크색 마커로 불경과 낙서가 가득 적혀져 있었다. CCTV 확인 결과 테디베어가 매달리던 새벽 3시 36분에는 포스터에는 낙서가 없었다. 이후 아침에 발견될 때 까지 모든 출입구는 잠겨 있었고, 뒷문 오토록도 열린 기록이 없었는데, 범인은 어디서 들어와 어디로 나갔을까?
아오이, 히라미, 코미야마 모두 서점 일을 하며 트릭을 파헤치고 범인을 잡자는 결의를 다지던 와중에, 서점의 단골 손님 타와타가 밤 중에 하스미 쿄의 편집자가 도망가는걸 목격했다고 말하는데....


직전 이야기에서 인기 작가로 소개된 하스미 쿄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이야기. 그의 스토커인 타와타가, 지문을 노리고 그가 서명한 포스터를 얻기 위해 이런저런 범죄를 저지른다는 내용입니다.

핵심인 포스터 낙서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이 핑크색을 띄게 만든 뒤 비치면 핑크색 낙서는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는 트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테디베어를 매달던 시점 전에 낙서를 했던 것입니다. 초등학생 과학 실험같은 느낌인데, 실제로 잘 되었을지도 의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작 중에서도 언급되듯, CCTV가 흑백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침 CCTV가 흑백이었던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이 트릭 보다는, 창 밖으로 멀쩡한 포스터를 붙여서 위장했다는 히라노의 아이디어가 더 괜찮았어요. 붙인 포스터를 뗀 건 CCTV에 찍히지 않아서 기각되긴 했지만요.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해서 낙서를 언제 했는지를 모르게 만든 이유가 불명확하다는 점입니다. 범인 타와타는 밤중에 낙서를 하고 달아나다가 점장과 아오이에게 목격되었었죠. 이 때 타와타는 자기 정체가 드러났다고 생각하고, 최소한 낙서에 대한 혐의는 벗어나기 위해 이런 트릭을 사용했다고 설명됩니다. 처음 발견한 사람이 낙서를 했다고 의심받았을 거라면서요. 그런데 점장과 아오이가 달아난 사람이 타와타라는걸 알았다면, 이런 공작을 했든 안했든 그녀가 범인이라고 생각했을게 뻔합니다. 현장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점장이었을 가능성도 있고요.
타와타가 편집자 유루즈메가 도망치는걸 목격했다고 한 증언도 억지스러워요. 유루즈메가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더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요? 어차피 자기가 범인으로 특정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 까닭도 없고요. 괜히 유루즈메가 수상하지 않다는걸 드러내는 빌미가 되었을 뿐입니다.

낙서로 포스터를 훼손한 동기도 납득이 가지 않아요. 서점이 포스터를 버리면 그걸 손에 넣기 위해서였으며, 하스미 쿄가 사인할 때 손바닥을 찰싹 붙이는 버릇에서 착안하여, 코트지로 만들어진 포스터에서 잔류 지문을 회수하여 집에 몰래 침입할 의도였다는데 그게 과연 가능했을까요? 또 이렇게 엄청난 공을 들여 포스터를 훔치느니, 사인할 때 버릇을 이용하여 직접 사인을 받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서점에 대한 디테일은 여전히 좋습니다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세금 관련되어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이 등장하는게 기억에 남을 뿐인 졸작이에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 <<초세금 대책 살인 사건>>은 추리 작가가 세금을 낼 수 없게 되자, 경비를 부풀리기 위해 개인적으로 산 물건, 여행지 등을 억지로 원고에 등장시킨다는 내용이라는데 재미있을 것 같네요.

<<서점이여 영원히>>
아오이가 일하는 사사쿠라 서점은 경영이 악화되고 있었다. 어떻게든 서점을 살리려고 문예서 담당인 이치노세와 아오이는 힘을 합쳤지만, 점장의 얼굴을 보기도 힘든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때 잡지에 "진열대에서 빼지 않으면 유해 서점으로 간주하겠다"는 협박장을 꽂아놓고 가는 사건이 일어났고. 거액의 사진집이 도난 당한 날에는 "유해 서점으로 지정되었다"며 밤 11시에 뒷문 앞으로 모이라는 협박장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누군가 서점에 불을 지르는데...


약간의 서술 트릭이 도입된 작품. 점장 이치노세와 고참 아르바이트 아오이가 처음 만났던 '사사쿠라 서점'에서 일어났던 과거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욕없고 자리를 자주 비우는 점장은 남자인 사사쿠라 점장인거지요. 이걸 마지막에 드러내고 있는건 꽤 그럴듯 했습니다.

실제 사건에 대한 추리 역시 괜찮은 편이에요. 서점 밖에서 서점 안 화재 경보기를 작동시킨 방법은 유치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는 합리적이면서, 서점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거든요. 예를 들어 협박장인 빨간 괴문서는 언제나 반품 직전 잡지에서 나왔는데, 인기 잡지들이라 손님이 먼저 가져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해서, 협박장을 보낸건 서점 내부 사람이라는걸 밝혀내는 식입니다. 협박장을 꽂은 잡지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는 뜻이니까요.
여기에 더해, 착화제가 남자 화장실에 버려졌다는걸 단서로 이치노세는 범인이 서점 내부의 남성이라고 확신합니다. 남자 화장실 휴지통에 착화제를 버리고 뚜껑을 닫은건 조작이 아니라 정말로 버린 것이며, 그렇다면 다른 성별로 위장할 필요가 없다는 추리였는데, 아주 그럴듯했어요.

하지만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장점은 사사쿠라 점장이 불을 지른 동기입니다. 점장은 목적은 보험금 때문이었다면서 서점은 이제 사라질 것이라면서, 아무도 책을 읽지 않게 됐다고 합니다. 책 말고도 오락거리가 넘쳐난다면서요. 문고본과 만화 매출은 늘어나지 않았냐는 이치노세의 반론에, "다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아니면 중고 서점에서 산다, 요즘은 잘 나가는 책만 들여놓는 편의점 수익이 훨씬 높다. 어차피 인터넷 서점에는 상대가 안된다"며 자신의 좌절감을 강하게 토로하는데,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저 역시 도서관, 중고 서점을 애용하고, 인터넷 서점으로 책을 사니까요. 저 역시 동네 서점이 사라지는데 일조하고 있나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요.
하지만 "책과 서점은 다르다. 서점에서 보고 싶은 책을 발견하는 것이다"는 이치노세의 말과 그 외에도 즐기는 공간으로 바뀌어서, 카리스마 직원의 힘을 빌려서, 전문성을 특화시켜서, 지역 밀착형 등으로 살아남고 명맥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아오이의 생각, 그리고 뒤이어 서점은 없어지지 않을 거라는 희망섞인 기대와 함께 끝나는 결말 덕분에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암요, 책만 파는 공간은 비디오, DVD 대여점처럼 언젠가 없어질게 분명해요. 살아남으려면, 시대 흐름에 맞춰서 계속 변화해야지요. 어떻게 변화하는게 좋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작중 등장하는, 지금의 니시후나바시에 위치한 서점이 꽤 잘 되어가고 있는 것 처럼, 동네 서점들이 꾸준히 살아남아 주면 좋겠네요. 저도 동네에 이런 서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밖에도, 암에 걸릴 것 같던 만화책 절도 사건 등 여러가지 디테일도 좋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도나 조 나폴리가 썼다는 <<도망친 숲의 마녀>>라는 책이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헨젤과 그레텔 마녀를 주인공을 했다는 소개가 꽤 재미있었거든요.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출간되지 않았네요....

2021/07/30

영어 조선을 깨우다 1 - 김영철 : 별점 4점

영어 조선을 깨우다 1 - 8점 김영철 지음/일리

영어라는 외국어가 조선에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 누가 영어를 가장 먼저 접했는지, 누가 영어를 처음 배웠고, 누가 영어를 처음 가르쳤는지, 조선에서 영어의 위치는 어땠는지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미시사 서적. 관련된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고 있으며, 내용은 모두 확실한 사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책은 조선에 처음 들어온 영어 사용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양선의 출현과 관련 사건을 거쳐 조일통상조약 뒤 미국과의 연합을 추진하면서 영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과정, 개화파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영어 학습이 이루어지는 단계를 거쳐 본격적으로 영어 학교가 설립되고, 영어가 급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한 시점까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을 조금 상세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우선 조선에 처음으로 나타난 영어 사용자는 영국함선 프로비던스호 선원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정조 때 부산 동래 용당포 앞 바다에 나타났고, 배가 항구에 머무는 8일 동안 일반인들과 지방 관리들이 배에 올라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함장 브로튼이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겼고요.
그 뒤 통상 등을 목적으로 여러 외국 배가 계속 나타나게 되는데, 이들 중 중국어 통역이 함께 한 배들이 등장해서 서로의 대화가 어느정도 가능해지고, 관련 기록도 풍성해지게 됩니다. 이 중 암허스트호의 린제이가 남긴 보고서에는 조선 관리들에게 스위트 와인과 독주 (Spirits)를 대접했는데, 관리들이 모두 독주를 선호했고 상당한 양을 마셨는데 멀쩡했다는 기록이 재미있네요. 아, 자랑스러운 조선 남아들이여!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그리고, 당시에 '영어'가 핵심 용어가 된 이유도 인상적입니다. 외국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출간된 관련 서적 들 중 가장 유명했던 <<해국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미국이 부강하면서 공평한 나라임을 강조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지금 미국에 대한 이미지가 이미 이 때 형성된거나 다름이 없는 셈입니다. 덕분에 고종과 개화파 역시 미국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고요.
여기에 더해 조일통상조약 후 본격적으로 타 국가와의 외교가 시작되었을 때, 중국의 이홍장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할 수 있으니 서구 열강과 외교 관계를 맺으라고 권고했고, 청나라의 일본 공사 허루장도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과 연합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호의를 가졌던 고종은 미국과의 수교를 서둘렀고, 조미조약으로 미국 공사의 조선 주재, 보빙사 파견 등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 내에서 미국에 대한 호감도는 더욱 상승했습니다. 고종은 미군이 자기를 도와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을 정도라니 말 다했지요. 그래서 결국 영어가 개화기 당시 조선에서 지배적 위치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영어 교육은 본격적으로 조약 체결을 하기 전, 정부 지원으로 중국에 유학생들이 파견된 것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이 중 가장 괄목할 성장을 보였던건 역관 가문의 고영철이었고, 귀국 후 영어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고 하네요. 이맘때 쯤 언어천재 윤치호도 등장하고요.
조미조약 체결 이후에는 당연히 영어 구사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져서 조선 최초의 영어 학습기관 '동문학'이 만들어졌습니다. 교습법은 영어로 된 교재만 사용하여, 원어민이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직접교수법'이었다고 합니다. 원어민 선생들이 조선어를 할 수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죠. 그래도 덕분에 학생들의 영어 능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동문학 출신들은 조선 근대화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생도 남궁억이 남긴 기록에는 학생들이 가마를 타고 오고, 하인들이 요강과 학용품까지 들고 오는 우스꽝스러운 풍경이 그려지고 있는데, 재미있네요. YMCA 야구단생각도 나고요.
조선 내의 학습 기관을 통하지 않고도, 김옥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영어를 배웠다는데, 김옥균은 영어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는게 눈길을 끕니다. 확실히 난 사람은 난 사람이랄까.... 세계 정세를 보는 시각만큼은 뚜렸했었네요.
동문학에 이어 본격적인 조선의 왕립 영어학교 육영공원이 설립되었습니다. 육영공원은 초반에는 상당한 성과를 보였지만, 이미 벼슬이 있는 학생들이 태업해서 제대로 끝맺음을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고관대작의 자제들인 탓이 가장 컸지요.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을 누리면서 포기하지 않으려는, 적폐들이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건 역시나 변함이 없군요. 이 육영공원 출신 적폐 무리 중 가장 성공한 인물이 이완용이라는 점은 더욱 그런 생각을 굳히게 만들고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인물들이 앞다투어 설립한 사학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제중원 알렌의 영어 교실에서 시작하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신, 배화 등이 설립되고, 운영된 과정을 알려주는데, 이 중 조선의 영어 학습열에 대한 아펜젤러의 판단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는 조선인들의 영어 공부 목적이 "출세" 라는걸 명확하게 알고 있더라고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당시 영어만 할 줄 알면 어떻게든 출세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많은걸 느끼게 해 주네요.

이러한 영어 교육의 시작과 여러가지 교육 기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선 후기와 개화기 당시 있었던 주요 사건들과 영어를 배웠던 핵심 인물들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 중 개화기에 밀사로 활약했던 조선의 괴승 이동인 이야기는 인상적이었어요. 개화파로 일본에 자주 방문했고, 나중에 조선 정부의 밀사가 되었지만 돌연 실종되었다는데, 정말 혼돈의 시대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간 것 같거든요.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이 '보빙사'로 조선 사람 최초로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여러 시찰 행적들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었습니다. 민영익이 입었던 화려했던 관복에 대한 묘사 - 자색 비단의 길고 넓은 겉 옷, 백설처럼 하얀 바지, 황금으로 기이하게 아로새긴 넓적한 허리띠, 가슴과 배에는 자두 빛 바탕에 희게 수놓은 쌍학과 가장자리에는 여러가지 화려하게 빛나는 포목 - 가 기억에 남습니다. 조선이 이렇게나 화려했었나요? 새삼 놀랐네요. 하지만 보빙사였던 민영익이 나중에 망명 후 공금을 착복하여 상하이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다 천수를 다했다는 후일담은 씁쓸했습니다. 개인이 뭘 어쩔 수 없는 시대였다고는 해도, 일국을 대표했던 영관급 인물이 고작 이 정도 밖에 안되나 싶은 아쉬움이 큽니다. 앞서의 이완용과 마찬가지로, 적폐는 확실히 처단했었어야 했어요.

이렇게 '영어'라는 소재로 조선 후기, 개화기 당시 근대사를 돌아보는 독특한 시각도 좋았고, 여러가지 새롭게 알게된 사실도 많아서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어요. 언급된 내용들의 출처도 확실하여 자료적 가치도 높습니다. 비슷한 소재였던 <<외국어 전파담>>과는 다르게, 조선 근대사와 영어의 관계에만 집중하여 이해도를 높이는 구성도 마음에 들고요.
그러나 지나치게 '영어' 중심이라는건 약점이기도 합니다. 이 책만 읽으면 조선 후기와 개화기 당시 청나라, 일본, 러시아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외교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거든요. 우리나라에 미국보다 훨씬 큰 영향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요. 도판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도 개인적으로는 아쉬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장점이 훨씬 많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빨리 2권도 읽어봐야겠네요.

2021/07/24

살인과 창조의 시간 - 로렌스 블록 / 박산호 : 별점 2.5점

살인과 창조의 시간 - 6점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피너가 살해당했다. 매튜 스커더에게 비밀스러운 봉투를 맡긴 뒤였다. 소식을 들은 매튜는 봉투를 열었고, 봉투 안에는 스피너가 협박해 왔던 세 명에 대한 증거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셋 중 누군가가 스피너를 죽였다고 생각한 매튜는 그들에게 접근해서 협박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스피너처럼 자신에게도 범인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 결과 프레이저는 자살했고, 베벌리는 이혼당해 모든걸 잃었다. 진상을 알아챈 매튜 스커더는 세 번째 협박 대상인 휘샌들을 찾아가, 그가 스피너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걸 알리며 마지막 담판을 벌이게 된다.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시리즈. 매튜 스커더가 술을 끊고 알콜중독자 치료 모임에 다니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술을 엄청나게 많이 마시거든요. 찾아보니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네요.

얼마 전 읽었던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가 하드보일드의 탈을 쓴 헐리우드 스타일의 펄프 픽션 범죄물이었다면, 이 작품은 비교적 정통 하드보일드에 가깝습니다. 매튜 스커더는 진짜 남자이며, 그는 거의 범죄에 가까운 방법을 동원해가면서까지 정의 구현에 최선을 다합니다. 베벌리 에스리지라는, 유혹과 살인을 동시에 행하는 전형적인 팜므 파탈도 등장하고요.

하지만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서 설명해 주었던, 변해버린 시대상을 반영하는 하드보일드의 교과서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우선 탐정역인 매튜 스커더 부터 그러합니다. 그는 알콜중독자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고, 타인의 죽임에 대해 고민하는 나약하고 감성적인 인물로 묘사되지요.
그리고 정의 구현에 나섰지만 실제로 정의로운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프레이저는 스피너 죽음과는 무관했고, 그가 협박당했던 과실도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던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매튜 스커더가 스피너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며, 기존에 스피너가 했던 협박을 이어갔기 때문에 프레이저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매튜 스커더 스스로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게 살인이 아니라면 뭐가 살인일까요? 오래전 하드보일드에서 탐정 때문에 죽어나가던 등장인물들은 모두 죽어 마땅했었는데, 탐정 때문에 지극히 선량한 인물이 죽음을 택하는 경우는 처음 봤네요. 이런 정의와 악이 모호한 설정 역시 시대가 변한걸 강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팜므 파탈이 부자 남편을 잃었지만, 나름대로 개과천선하고 매튜 스커더와 친구?가 된다는 결말도 마찬가지에요. 여기에 더해 “나도 목석은 아니거든요.” 라던가 방을 찾는 베벌리에게 “내 호텔이 있지."라고 말하는 매튜 스커더의 마지막 대사는 화룡 정점이었어요. 몰락한 팜므 파탈과 불완전한 탐정이 '몸친구' 사이가 되는 결말이라니! 이 얼마나 현대적입니까!

고전 하드보일드에 흔하게 등장했던 복잡하고 꼬인 인간 관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겠죠. 이제는 과거와 같은 깊은 정을 나누는 관계가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세 명의 협박 피해자들 외에는 고작해야 프레이저의 딸 스테이시 정도가 살짝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하지만 현대적으로 구현해 낸 하드보일드 캐릭터와 설정들에 비하면 추리적으로는 딱히 특별한 건 없습니다. 세 명 중 한 명이 범인이다!라는 생각에, 세 명 모두에게 자기가 새로운 표적이라는걸 알리고 공격을 기다리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이 중 스피너를 죽였던 휘슬러의 하수인과 베벌리의 옛 남자 룬드그렌이 각각 공격 시도를 했으며, 매튜 스커더는 모든 공격을 룬드그렌이 했던 것으로 착각했을 뿐이지요. 결국 프레이저는 죽었고, 베벌리도 아니라면 남는건 휘슬러 뿐이라는 간단한 결론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명의 공격이 겹쳤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문제인데, 이 결론을 토대로 마지막에 휘슬러와 담판을 짓는 장면은 더 억지스럽더군요. 아무런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휘슬러가 스피너가 죽었다는걸 알고 놀랐다는걸 증거라고 제시하는데, 이건 증거도 뭐도 아니지요. 이런 점에서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범죄가 등장하는 드라마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읽기 적당한 분량에, 결말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재미는 확실했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현대적인 하드보일드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그리고 매튜 스커더 시리즈 팬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1/07/23

가려 뽑은 재담 - 김준형 : 별점 2.5점

가려 뽑은 재담 - 6점
김준형 지음/현암사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직후까지 시기에서 발표되었던 문헌에서 발췌한 재담들을 모아 수록한 책.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런 류의 재담들이 꽤 인기있었습니다. 악동 <<오성과 한음>> 이야기도 이와 다를게 없지요. 하지만 요새는 이런 책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정통 고전도 아니고, 단순 재미만을 위한 책이라 아이들 읽히기는 애매한데 어른들이 읽기에는 심심한 탓일 겁니다. 그래도 저는 어린 시절 추억도 떠오르고, 나름 유쾌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고급스러운 읽을거리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가끔 이런 글들도 좋지 않나 싶네요.

무엇보다도 마지막 단원이 아주 괜찮았어요. 구한말, 일제 강점기로 변화하던 시기, 일반인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느낄 수 있는 글들이 많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칼라가 무엇이냐. 육칠십년만 해도 서양 사람을 만나면 양이한다고 하며, 개장국에 넣을 개 잡듯 하다가 지금은 그러던 사람들의 자손이 유학이니 외국 유람이니 하며 외국에 갔다가 돌아오면 바로 '양첨지'가 되어 '조선은 아주 말할 것도 없다'고 한다" 며 영국 유학을 갔다와서 거들먹거리는 건방진 하이칼라가 등장하는 재담처럼요. 이런 부분은 자료적 가치도 높아 보였습니다. 그 외에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주는 글들도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제 기대와는 좀 다르기는 했습니다. 저는 좀 더 오래된 고전에서 재담을 뽑았을거라 기대했거든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고전"이라는 시리즈 중 한 권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출처가 근대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는건 아쉽더군요. 비슷한 이야기도 많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여, 기억에 남는 재담 몇가지를 아래에 소개해 드립니다. 읽어보시면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감이 오시리라 생각됩니다.

집을 마시다.
술을 몹시 좋아하는 한 사람이 마침내 집을 전당 잡히고 술을 마셨다.
그러고 나서 집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겼다!"
곁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네가 무엇을 이겼는데?"
"어제는 내가 집 속으로 들어갔지만, 오늘은 집이 내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절도백화 60화]

뜨거운 물은 상관이 없다
엄동설한에 어떤 상인이 문 앞에 쌓인 눈을 쓸고 난 뒤에 물을 뿌렸다.
그것을 본 순사가 말했다.
“여보! 물을 뿌리면 빙판이 되지 않겠소?"
“이것은 뜨거운 물이니 상관없습니다.”
[익살주머니 94화]

열은 사라졌다.
열병이 몹시 심한 환자가 있었다. 의원이 와서 치료를 하는데, 약을 잘못 쓰는 바람에 환자가 그만 죽고 말았다.
곁에 있던 사람이 원망하며 말했다.
"네가 어쩌자고 사람을 죽였단 말이냐?"
그러자 의원은 시신을 만지며 말했다.
“비록 죽기는 했지만, 열은 사라지지 않았느냐?"
[소천소지 104화]

무서운 말
어떤 청년이 한 여인을 몹시 좋아하여, 그 여인의 아버지를 찾아가 결혼을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정애씨를 아내로 맞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 버리겠습니다.”
“흥, 그런가? 자네가 내 딸과 사귀겠다는 것도 팔자니 어찌하겠나?그래서 나는 결심했네.”
"예? 그럼 저희들의 결혼을 승낙해 주시는 것입니까?"
“비용은 전부 내가 부담할 것이니 염려 말게!”
“혼인 비용까지요?"
“아니, 자네의 장례 비용 말이야!"
[걸작소화집 175화]

나와 친구가 되자
어떤 사람이 처음 본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친구에게 돈을 꿔 준 일은 있어도 돈을 꿔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아, 그럼 나하고 친구가 됩시다.”
[깔깔웃음주머니 57화]

2021/07/18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 - 마스카와 도시히데 / 김범수 : 별점 1.5점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 - 4점
마스카와 도시히데 지음, 김범수 옮김/동아시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석학이 쓴 책. 제목만 보고 비밀 병기를 만든 과학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평화가 가장 중요하며, 전쟁은 없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과학자가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더군요.
무기 개발과 관련된 과학자들의 행동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서, 아베가 주도하는 일본 개헌 노력에 대한 비판, 일본의 원자력 문제와 앞으로의 정치와 세계 평화에 대한 의견을 털어놓으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진보적인 석학답게 전쟁 때 핵무기 등 무기 개발에 힘쏟고, 전쟁 이후에 연구 자금이나 돈 때문에 노력하는 과학자들, 아베의 안보법 개헌 노력,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등을 싸잡아 비판하고 있으며, 그 외 노조 활동이나 비정규직 문제 등에 피력하고 있는 주장 등은 꽤 좋았습니다. 나름 새겨들을만한 부분도 있고요. 아베가 헌법 9조를 바꾸려는 노력을 폭주, 안하무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속 시원하기까지 했고요.

하지만 대부분의 의견들이 우리나라 시점으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더군요. 평화가 중요하다는건 물론 맞는 말입니다. 허나 세계 유일의 휴전 중 분단 국가로, 군사력을 강화할 수 밖에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젊은 청년들이 의무적으로 군 입대를 해야 하는 나라 상황에서는 사치스러운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군사력 확대는 외부 진출과 동의어인. 외적의 공격을 받기 어려운 섬나라 시각과는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어요.
또 과학자들의 무기 연구에 대한 반대도 억지스럽습니다. 결국 저자 역시 군수 산업과 민간 시장, 양쪽 모두에 유용하게 쓰이는 것을 '듀얼 유스'라고 부르며, 복잡한 문제라서 전면적으로 금지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게 맞는 말이지요. 특정 산업이 특정 분야에 해가 된다고 무조건 막는게 말이나 됩니까.

무엇보다도 "세계에 전쟁 반대 호소를 할 수 있는 나라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유일하게 피폭 경험을 한 나라인 일본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는 말은 가소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피폭은 과거 전쟁을 일으켜 주변 국가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항복하지 않고 버텼던 원인에 대한 결과입니다. 피폭 이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피해자 코즈프레하면서 평화를 논한다? 저자가 싫어하는 아베 등 자민당 정치인들과 다를게 없지요. 피폭 원인에 대한 반성이 없기에 저자의 진정성에도 의문이 들 수 밖에 없고요.

또 본인 주장에 대한 근거들도 빈약합니다. 대체로 본인 경험이라던가, 지엽적인 이슈 수준에 머무는 탓입니다. 탄탄한 평화를 위한 전쟁 불가론의 근거가 고작 해외 파병된 자위대원의 전사라니, 납득하기 어렵지요. 풍부한 자금이 뛰어난 과학자를 낳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 연구자는 가난해야한던가, 요새 젊은이들은 열정이 부족하다, 정치에 관심도 없다는 언급 등 꼰대스러운 의견들도 과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일본인 시점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합리적인 주장과 속 시원한 언급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너무 달랐고, 기본적인 시각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절대로 권해드릴만한 책은 아닙니다.

덧붙여, '듀얼 유스' 설명을 하며 수십 년 전 일본의 빌딩가에서 TV 전파가 건물에 반사돼 화면이 흔들리는 고스트 현상이 발생했는데, 이를 막고자 어떤 페인트회사에 일하던 과학자가 ‘페라이트ferrite’라는 산화철을 주성분으로 하는 세라믹이 들어간 도료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페라이트에는 강력한 자력이 있어서 페라이트가 포함된 도료를 빌딩 벽면에 바르면 전파를 흡수해서 고스트 현상을 막을 수 있었고요. 그러나 10년 뒤 그 도료가 미군 스텔스 전투기에 사용되었다는 예를 들어주는데, 신기했습니다. 듀얼 유스에 딱 들어맞는 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2021/07/17

THE 좀비스 - 중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THE 좀비스 - 중 - 4점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북로드

THE 좀비스 - 상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좀비가 핵심인 단편들을 모아놓은 앤설러지 두 번째 권. 전에 읽었던 상권보다도 별로였어요. 어디선가 보았던 이야기에 좀비를 끼워넣었거나, 좀비가 왜 등장하는지도 모를 이야기가 많았던 탓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게끔 노력했지만,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이고 알맹이 없는 이야기들도 많고요.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어요. 차라리 정통 좀비 아포칼립스물이라면 평작은 될 텐데 아쉽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한 권 남았는데, 이래서야 다음 권을 읽어볼 것 같지는 않군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톡홀름 증후군>>
좀비 떼로 둘러쌓인 집에 갖힌 나는 아들과 닮아서 '빌리'라고 이름지은 좀비 관찰에 재미를 붙였다. 빌리는 이웃집 침입을 위해 판자를 뜯어내는 일에 골몰하는데...

제목 그대로 가해자인 좀비와 동질화되어, 좀비가 사람을 죽이는걸 보아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감정을 잃어버린 주인공을 통해, '살아있는 것과 사는 건 다르다'는 걸 알려주는 작품. 그냥 버티기만 할 뿐, 이렇게 살아가는건 좀비와 다를게 없다는 거지요. 동질화된다는 측면에서는 전권의 <<나처럼 죽어봐>>와 조금 비슷한데, 이 작품에서는 절박함이나 처절함은 다소 부족한 반면, 조금 더 설득력이 높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웃집을 좀비떼가 습격하는 장면 묘사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주인공 사고 방식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더군요. 일반적으로는 총알이 딱 한 발 남을 때 까지 살아남아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거리로 뛰어들어 좀비가 되어 버리던가....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저런 상황들이 있는 법이기는 하지만, 이런 사고 방식과 행동은 별로 와 닿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난극>>
페스트로부터 구해진 오버라머가우 마을 전통의, 10년에 한 번 진행되는 예수 수난극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을 위해 좀비를 분장시켜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을 생각이었다. 마이어 신부는 이를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했고, 마지막에 신의 저주와 함께 파국이 찾아오고 만다.

마이어 신부는 좀비도 영혼이 있어서, 인간이 그들을 잔혹하게 이용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좀비에게 영혼은 있을리 없습니다. 이미 죽었으니까요. 종교적으로 논쟁거리가 될 여지도 없어요. 좀비를 연극 소품으로 잔혹하게 대하는 행동은 조금 거슬렸지만, 좀비들은 그동안 더 잔혹한 행동을 보여 왔으니 딱히 큰 문제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이게 문제라면 가축 도살이 더 큰 문제아닐까요? 이러한 점들 때문에, 마이어 신부의 행동은 도무지 공감할 수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좀비를 구해주려는 신부의 행동에 분노한 관객들이 신의 저주로 좀비가 된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습니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페스트 유행 당시를 배경으로 했던 영화가 떠오릅니다. 페스트에서 안전했던 성에서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잔혹한 행동을 보이지만, 결국 성주에게 페스트가 전염된다는 결말이었는데, 페스트가 좀비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맥락이지요. 아니, 그보다도 못해요. 페스트는 어쨌건 공기로도 전염될 수 있지만, 좀비 바이러스가 급작스럽게 사람들에게 퍼진다는건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까요.

이렇게 종교를 끌어들인 전개는 무리수였을 뿐더러 새로움도 없고, 잔혹함도 덜합니다. 무섭지도 않고요. 점수를 줄 여지가 별로 없어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아름다운 것>>
테러로 희생된 러스티는 시체 소생 기술로 되살아났다. 정치인이 그의 희생을 선거에 이용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연설 당일, 러스티는 정치인 요구와는 다르게 죽음은 아프니, 삶을 즐기라는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죽은 사람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인의 행태는 우리도 익히, 그리고 지금도 계속 보고 있습니다. 이를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좀비로 비판한다는건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되살아난 테러범과 희생자 모두가 정치인 생각과 전혀 다른 진심을 털어 놓는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그들의 진심이 "죽기 전에 즐겨라!" 라니? 황당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와 별로 다르지도 않지요. 좀비들이 이런저런 소품들에 환장한다는 설정도 기발했지만, 이 황당한 메시지 전달에 활용될 뿐이고요.
또 딱히 좀비가 등장할 필요도 없었어요. 유령이라던가, 빙의한 영혼이라던가, 뭐든 좋을 그런 이야기거든요.
진짜 아이디어가 아까왔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
좀비들이 연극을 한다는 이야기. 공포 문학의 거장 클라이브 바커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좀비물에서 기대할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는, 기묘한 이야기였어요. 좀비들이 나름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은 특이했지만, 그들은 연극 외에 다른 목적이 없거든요. 식인 따위는 원하지도 않고요. 죽은 여배우가 섹스를 요구하는 장면이라던가, 사악한 제작자를 죽이는 장면 정도가 조금 섬찟했습니다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좀비들이 벌이는 연극으로 현재의 연극계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로 보는게 맞을 것 같은데, 문제는 그렇다면 더 웃기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무섭지도 않고 의외성도 없으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시체의 길>>
신으로부터 이 땅에서 악을 몰아내라고 명 받은 총잡이 목사 제비디아는 보안관보가 체포한 악당 빌을 호송하기 위한 여정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중간에 괴물이 나온다는 '시체의 길'을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그 곳을 지나가던 일행은 괴물이 된 양봉업자 기멧의 습격을 받게 되는데...

기멧이 괴물이 된 이유는? 저주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납치했던 소녀가 죽은 뒤, 소녀 어머니가 저주한 것이지요. 그런데 저주로 죽기는 했지만, 기멧은 이내 벌통이 가슴 속에 위치한 괴물로 되살아났다는건 좀 이상하더군요. 이게 저주가 맞나요? 어차피 악당이었으니, 무적의 괴물이 되면 더 좋은거 아닌가 싶은데 말이지요.
또 괴물의 설정도 죽은 자가 돌아온 것이지만, 벌 떼와 함께 이동하며, 초인적인 힘과 빠르기를 갖추고 있어서 일반적인 좀비와는 전혀 다릅니다. 식인이 목적도 아니고요. 여러모로 볼 때, 좀비물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크리쳐물에 가깝습니다. 악을 없애기 위해 악을 접하면 불타는 성서, 악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은총알 등의 설정이 곁들여진 것도 크리처물 설정일테고요. 이야기 전개도 고생 끝에 괴물을 처치하는 크리처물 그대로라 특별한건 없습니다.

그래도 제비디아 목사의 활약은 화끈합니다. 괴물의 잔혹함도 잘 묘사되고 있고요. 덕분에 머리를 비우고 단순하게 읽는 킬링 타임 물로는 나름 적당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서부 개척 시대를 무대로 악을 멸하는 총잡이 신부가 등장하는 크리쳐물이라는 점에서는 <<프리스트>>가 연상되더군요. <<프리스트>>는 헐리우드에서 영화화도 되었던 만큼, 나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바비 콘로이, 살아 오다>>
바비 콘로이는 배우로서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에서 맡은건 조지 로메로라는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이라는 영화의 좀비역이었다. 톰 새비니가 해 준 좀비 분장을 한 바비는, 촬영장에서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해리엇과 재회했다. 그녀는 결혼해서 아들과 함께 분장하고 영화에 참여 중이었다...

좀비가 주제이기는 한데 방향이 굉장히 독특했던 작품. 좀비가 아니라, 기념비적인 좀비 영화 <<시체들의 새벽>>에서 좀비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이야기거든요. 아 이런 발상, 아주 마음에 들어요. 좀비를 주제로 단편을 써와! 라고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가이드에 맞춰서 첫사랑과 현재에 대한 달달하면서도 아련한 이야기를 써 온 셈이니까요.

하지만 행복한 해리엇 가족에게 바비가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 결말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바비는 해리엇 가족, 특히 그 아들에게는 좀비보다 더한 괴물이 되는, 좀비물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지금 이야기는 발상에 비해 평이하고, 조금 뻔한 그런 이야기라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자들>>
칼라는 메레디스를 찾아와 심장마비로 죽은 남편 아서의 소생을 부탁했다. 그녀가 바람피운걸 사과하고자 하기 위해서였다지만, 되살려보니 아서는 칼라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죽었던 것이었다. 살해된 좀비는 살인범을 죽이는게 본능으로, 칼라는 죄책감때문에 자살할 생각이었다...

작가의 인기 캐릭터라는 시체 소생 전문가 메레디스가 등장하는 작품. 살인자가 죄책감으로 피해자에게 죽기를 원한다는 설정, 시체 소생에 대한 이런저런 디테일은 좋았습니다.

아서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걸 알고 난 후, 칼라가 죽는 결말까지는 좀 시시했어요. 예상대로의 이야기였거든요. 뭔가 좀 의외성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별점은 2.5점은 충분합니다.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농학자 닥 프리먼은 좀비 떼를 피해 콜로니를 만들고 생존자들의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수립했다. 콜로니는 안전했지만, 생산과 성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출산은 금지되어 있었다. 아이가 생긴 톰 부부는 낙태를 지시받고, 콜로니 외부 클리닉으로 수술을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좀비 때문에 격리된 폐쇄 공간은 생산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출산까지 관리한다는 설정은 꽤 설득력있었습니다. 낙태를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외부 수술실로 향하는 아이러니도 기발했고요. 무엇보다도 낙태한 태아가 살아돌아오지 않는 걸로 보아, 그들은 생명이 아니라는 시각은 아주 독특하게 다가왔습니다. 여기에 좀비가 된 낙태 반대주의자를 날려버리는 결말을 더하니, 저자가 낙태를 찬성한다는건 잘 알겠더라고요.
내용도 신선했고, 여러가지 볼 거리가 많았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서두에 소개된 저자가 주제를 찾은 방법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동안의 좀비 주체 작품이 극단적 섹스 장면을 등장시키는 경향이 강하다며, 지금까지 한 번도 다루어진 적이 없는 터부를 고민해보다가 정치에서 그 답을 찾았다고 하네요. 가장 논쟁거리가 되는 정치 이슈가 '낙태' 였다면서요. 우리나라도 따지면 '부동산'을 주제로 좀비물을 쓴 격이겠지요? 아 이거 재미있겠네요.

<<죽은 아이>>
동네 깡패 루크 브래들리의 무리에 가입하고 싶었던 나에게 브래들리는 조건을 내걸었다. 살아있는 아이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인공 소년이 희생양인 좀비 아이를 악으로부터 구해주고 구원받는다는 내용의 작품.

주인공 설정과 분위기 등은 모두 스티븐 킹의 <<그것>>이나 <<스탠 바이 미>>를 연상케합니다. 특히나 시골 마을에서 또래 깡패와 맞서 싸우는 아이의 성장기이며, 아이 시체가 중요한 소재라는건 <<스탠 바이 미>>의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아류작이면서도 <<스탠 바이 미>> 보다 훨씬 못하다는 겁니다. 주인공과 동생 앨버트는 좀비 시체를 상자에서 꺼내준 정도 밖에 한 게 없고, 이들의 여정도 하룻밤 나들이에 불과했기 때문이에요. 뭔가 성장을 기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과정이지요. 이 과정도 환상 소설처럼 모호하게 처리해서 고생스러움도 전혀 느낄 수 없었고요. 단편 분량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건 변명에 불과합니다. 최소한 브래들리의 패악질만큼의 설명은 해 주었어야 해요. 루크 브래들리의 깡패짓 말고는 드라마라고 부를 내용도 없고요. 게다가 아이 시체가 좀비일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그냥 시체여도 무방한, 그런 이야기거든요.

좀비 소재 단편을 의뢰받고 <<스탠 바이 미>>에 좀비를 우겨넣은 만들어낸, 졸속 창작물에 지나지 않는 졸작. 별점은 1점입니다.

<<좀비들과 함께라면>>
중 2병에 걸린 소녀의 성장기랄까요. 서정적인 1인칭 묘사는 괜찮았고, 좀비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 현실은 가혹하다는 메시지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40대 후반의, 직장 생활도 20년차가 넘은 아저씨에게는 별로 와 닿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가혹하더라도 받아들여야만 하는게 현실이니까요. 그리고 현실은 최소한 좀비보다는 낫습니다.
또 아무리 봐도 좀비물로 보기는 힘드네요. 작품에서 좀비가 진짜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만도 못한>>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방탕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어느날 마약과 술에 취한 채로 이상한 클럽을 찾았다. 좀비를 학대하고 죽이는 스너프 필름을 상영하는 곳이었다. 클럽에서 시간을 보낸 뒤, 그들은 일행이었던 제인을 죽이고 마는데...

변호사인 저자가 쓴, 브렛 이스턴 앨리스 소설의 패러디라는 작품. 원작을 모르니 뭘 어떻게 패러디했는지 모르겠는데, 내용도 잘 모르겠어요. 젊은이들의 타락과 방황을 묘사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게 좀비물인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주인공과 친구들이 좀비인건가요? 설령 그들이 좀비라 해도 그게 작품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괜히 뭔가 있어보이게끔 한 묘사들도, 결국은 별다른 알맹이는 없고요.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내용이 뭔지 이해할 수 없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미트하우스 맨>>
시체 취급자들이 시체를 조종해서 온갖 일을 하는 시대. 유능한 시체 취급자 트래거는 사랑을 찾아 이런 저런 곳을 전전하게 되는데...

<<왕좌의 게임>>의 작가 조지 R.R 마틴의 작품. 사랑없는, 자극만이 넘쳐나는 미래 세계에서 사랑을 찾아 떠도는 트래거의 모습은 <<쿄시로 2030>>의 쿄시로가 살짝 연상되더군요. 순정으로 접근하던 트래거가 여자에게 배신당한 뒤, 뒷골목 깡패나 하는 시체 검투 경기에 참여하게 되는건 곽철용의 명대사 "니가 이런 식으로 내 순정을 짓밟으면은, 마 그때는 깡패가 되는 거야!"가 떠올라서 좀 웃겼고요.
하지만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며, 별다른 드라마도 없는 탓입니다. 요약하면 "사랑을 믿었던 트래거가 배신당한 뒤, 돈과 향락을 택했다"는 지극히 뻔하고 뻔한 이야기가 전부에요. 작가가 쓸 때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고 하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왠만한 단편보다는 긴 분량을 갖춘만큼, 소개되는 방대한 설정만큼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특히 제목의 '미트하우스' 관련 설정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체를 살아있는 것 처럼 조종해서 성욕을 채워주는 곳인데, 시체 취급자가 아니라 피드백 회로를 통해 조종되고 있다는 등 이런저런 디테일이 빼어나거든요. 시체 취급자 (스트레커)와 관련된 설정들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이야기가 별로라면, 좋은 설정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7/16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 별점 2.5점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 6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켄지와 제나로는 정신과 의사 디안드라 워렌의 의뢰를 받았다. 모이라 켄지라는 소녀로부터 그녀 애인 케빈 헐리히가 사람을 죽여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협박 전화를 받았고, 3주가 흐른 뒤에는 디안드라의 아들 제이슨을 찍은 사진이 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케빈과 그의 보스 잭 루스를 만난 자리에서 그들이 협박범이 아니라는걸 깨달았고, 제이슨의 미행에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던 와중에 켄지도 협박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켄지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려던 동네 소녀 카라 라이더가 잔혹하게 살해당한채로 발견되었고, 그녀가 모이라 켄지였다는걸 알게 되는데....


데니스 루헤인이 쓴 켄지 앤 제나로 시리즈. 이 시리즈는 전에 <<전쟁 전 한잔>>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생각과 사뭇 다른 작품이었습니다. 이전에 조금이나마 갖추고 있던 하드보일드스러운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잔혹하고 폭력적인 범죄에 더해 냉혹한 범죄자가 등장하고, 주인공들과 범죄자들이 과거의 인연으로 깊숙이 엮여 있다는 점은 하드보일드스럽지만, 자극만을 극도로 추구한,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 펄프 픽션에 불과해요. 범인의 범행이 아무런 이유가 없는 탓이 가장 큽니다. 악의 근원, 동기를 아무리 헤집고 찾아봤자 그냥 정신병자였다는게 전부거든요.

그렇다면 재미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 역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범죄자와 탐정의 대결에서 흥미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야기는 그냥 흘러갈 뿐입니다. "나 잡아 봐라~"로 시작해서, "자, 이제 너 죽었어!", 그 다음에 "어이쿠, 내가 잡혔네, 이제 죽었네!" 식으로요.
이 과정에서 정교한 맛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나 잡아 봐라~"에서 범인이 던져주는 단서는 수사에 도움이 되지 못하거든요, 에반드로의 경우 그의 얼굴을 떠올린 켄지의 기억력 덕분에 신원이 드러났고, 진범 게리 글린도 경찰 수사 결과 증거품에 지문이 남겨졌다는게 밝혀지는 만큼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잭 루스를 잡아다가 고문해서 얻은 정보 등 다른 단서들도 사실상 쓸모가 없었던건 마찬가지고요.

70년대 중반, 마을 자경단 EEPA 모임 멤버들의 가족과 친지들이라는 피해자들의 공통점이 드러나는 과정은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과거 EEPA가 알렉 하디만과 찰스 러글스톤을 덮친 뒤 고문해서 러글스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과거가 지금 사건의 동기라는건 설득력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당시 사건 수사를 맡았던 게리 글린이 EEPA 멤버들을 풀어주고 알렉 하디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 EEPA 멤버들과의 뒷거래로 부자가 되었는데, 20년이 지나서 그 가족을 죽인다? 왜죠?
인간의 고통이야말로 순수의 본질이다는 등의 범인들이 한 말들로 그들이 잔혹한 폭력을 저지른 이유를 설명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무고한 사람들을 수십 명씩 잘 죽여왔는데, 구태여 EEPA 멤버 가족과 친지들을 사진을 보내 범행을 예고하면서까지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알렉 하디만과 게리 글린이 손을 잡은 경위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알렉 하디만이 체포되기 전부터 관계가 있었고, 존이 알렉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고 치죠. 그렇다면 알렉 하디만에게 게리 글린은 현재 시점에서는 철천지 원수입니다. 자기와 친구를 고문하고, 심지어 친구는 잔혹하게 죽인 범인들과 손을 잡고 자기를 감옥으로 보낸 악덕 경찰이니까요.
그들의 공범 에반드로 아루조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 역시 설명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알렉 하디만에 의해 세뇌되었다는 암시 뿐인데, 이 정도로 이런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죠. 설령 세뇌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게리 글린이 아니라 알렉 하디만에게 세뇌되었으니 게리 글린을 도와 살인 행각을 벌일 까닭도 없습니다. 켄지의 집에 완벽하게 침입해서 메시지를 남긴 방법 역시, 페인트 공으로 변장했다는 정도로 넘어가기에는 허술하고 부실했습니다. 그리 대단한 트릭도 아니고요.
하긴, 범인이 전직 경찰이었던 게리 글린이라는 진상이 가장 뜬금없어서 더 할 말이 없네요. 앞서 등장한 인물들 중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범인이라는 이유 외에 다른 근거는 없어 보였습니다. 알렉과 게리 글린, 둘이 알렉 하디만 구속 이후에도 관계가 있었다면, 이후 FBI 조사에서 게리 글린의 존재가 떠오르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힘들네요.

그 외에도, 지나치게 잔혹한 범행 묘사들도 별로였고, 폭력이 넘쳐나는 거리에 대한 묘사도 과해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솔직히 케빈이라는 살인마 똘아이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돌아다닌다는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거리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는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워요.
폭력과 사랑을 대비시키며, 사랑 쪽에 패트릭 켄지와 앤지 제나로 커플을 위치시킨 설정도 진부했습니다.

그래도 아주 싸구려 헐리우드 스타일 펄프 픽션이라고 평가 절하하기는 좀 힘들기는 해요. 작가의 글솜씨가 대단한 덕분이지요. 뻔한 소재와 설정들인데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흡입력만큼은 대단했어요. 특히 에반드로가 켄지와 제나로를 습격할 때, 그리고 켄지가 게리 글린과 대치할 때의 긴장감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에반드로가 섬 폐가에 컴퓨터 모뎀을 설치하고 전화를 연결해서, 공중전화를 세워 위치를 속인 트릭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거리의 공중전화로 걸면 컴퓨터 전화로 추적되도록 한 건데, 90년대 당시라면 충분히 먹혔으리라 생각되네요. 켄지와 제나로의 관계가 완벽하게 정리되는 결말은 팬들에게는 좋은 선물이고요.

하지만 펄프 픽션을 뛰어넘는 무언가냐 하면, 그렇다고 보기는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좋은 작가가 쓴 양산형 범죄물일 뿐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 시리즈도 더 이상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021/07/15

열네 살 1,2 - 다니구치 지로 : 별점 2점

열네 살 1 - 4점
다니구치 지로 지음/샘터사

열네 살 2 - 4점
다니구치 지로 지음/샘터사

타임 슬립은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최근에 본 작품들은 대부분 단순한 타임슬립이 아니라, 타임슬립으로 과거의 특정 사건을 바꾸어 그에 따라 미래를 바꾸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도라에몽>>에 흔히 나오는 '타임 패러독스'에 관련된 이야기도 마찬가지일테고요. 또 대부분 타임머신이나 기타 장치, 혹은 능력으로 현재의 모습 그대로 과거 시대로 돌아간다는 설정입니다.
그러나 다니구치 지로의 이 작품은 조금 결을 달리 합니다. 48세의 주인공 히로시는 48세 때의 지식과 경험, 능력을 지닌 채로 14세의 중학생 당시의 몸으로 들어가게 되거든요. <<나만이 없는 거리>>와 동일하지요. 타임슬립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유체 이탈로 보이기도 하네요.

하지만 정작 이야기는 타임슬립과는 크게 관련은 없습니다. 히로시가 급작스레 상승한 능력치로 학교의 인기남이 되고, 학교 최고의 미녀와 사귀는 등 청춘을 만끽하지만,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실종은 막지 못합니다. 여자친구와도 결국 헤어지고요. 즉, 주인공이 아무리 애를 써도 미래는 바뀌지 않아요. 정해진 운명의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스티네이션>> 스러운 전개인데 타임 패러독스를 교묘하게 피해간다는 점에서는 괜찮습니다. 딱 한 가지, 소설가가 된 친구 시미다가 과거 그가 했던 예언(?)을 기억하고, 그에게 책을 선물하는 정도만 바뀐 미래인데, 대세에 지장은 없더군요.

때문에 타임슬립보다는 48세 중년의 심정에 촛점을 맞추고 봐야 합니다. 중년 성인 남자의 삶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요. 그런데 이 중년의 이야기는 영 이해도 안되고, 와 닿지도 않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열심히 살아가던 중년 남자가 급작스럽게 자신의 인생을 찾겠다고 떠난다? 저도 히로시, 그리고 히로시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인 48세인데, 이런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새로운 삶도, 도전도 아니고 그냥 무책임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내가 다 이해하고 포용했다 한 들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들이 직접 와서 설득하는데도 떠난다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옛 친구의 죽음이라는 계기도 설득력있게 이야기에 녹아있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시골 마을의 풍광과 함께 하는 잔잔한 전개는 인상적이고, 가족애에 대한 묘사는 좋습니다만 아버지의 저 결심 때문에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가족을 버린 놈은 천벌 받아 마땅합니다. 타임슬립이 아니라 그냥 저자, 아니면 히로시의 중학교 시절 청춘을 그린 일상 드라마였다면 더 나았을 겁니다.

2021/07/11

몽인 - 우라사와 나오키 / 서현아 : 별점 2점

몽인 (일반판) - 4점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서현아 옮김/학산문화사(만화)

온갖 사기를 당한 뒤 자살을 생각하던 아빠와 카스미는, 우연히 까마귀 '마리아'의 인도를 받아 '불연' 이라는 곳을 찾게 되었다. 그곳의 정체는 프랑스를 찬양하는 괴인이 소장인 '프랑스 연구소'였다.
소장은 아빠에게 루브르 미술관에서 페르메이르의 '레이스를 짜는 소녀'를 숨기는 작전을 실행해주면, 위작을 팔아 거액을 나누어주겠다고 유혹했고, 소장의 말에 넘어간 부녀는 마지막 비상금을 털어 프랑스로 향했다. 그리고 소장이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데....


오랫만에 본 우라사와 나오키 작품. 1권짜리 단편입니다. 어딘가에서 추천 글을 읽고 구입해 보았습니다.
굉장히 이해하기 쉬운 내용으로, 대소동이 일어나고, 본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폭주해서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결말은 유쾌했습니다. 좀 오래 전 헐리우드 소동극을 보는 느낌으로, 조금 낡은 듯한 그림하고도 잘 어울렸고요. 옛 사랑이 아련하게 그려지는 결말도 나쁘지 않아요.

아카츠카 후지오의 오마쥬 만화로 볼 수도 있다는 독특함도 인상적이에요. 소장은 아카츠카 후지오의 <<오소마츠 군>> 속 주력 캐릭터인 이야미 (아래)의 오마쥬로 보이니까요.

이 캐릭터를 아는 팬분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되었으리라 생각되네요. 소장과 카스미가 대화를 나누며 보여주는 티키타카는 이 만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범죄물로는 함량 미달이었던 탓입니다. 페르메이르의 <<레이스를 짜는 소녀>>를 살짝 숨겨 놓은 뒤, 위작을 고가에 팔아 넘긴다는 계획은 언뜻 보면 그럴듯해요. 하지만 관광객들에게 마스크를 나누어 준 뒤, 부부젤라 소리로 그걸 쓰게 해서 소동을 일으킨 사이 그림을 숨긴다는 실제 작전이 너무 어설픕니다. 루브르가 그렇게 보안이 허술할리가 없지요. 설령 숨기는게 가능했더라도, 모든 장소는 CCTV로 감시되고 있었을테니 바로 들통났을테고요. 게다가 프랑스어도 못하며 일본에서도 사기만 당하다가 미래가 없어진 찌질남과 어린 딸이 실행범이라면, 훨씬 치밀한 준비와 실행을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결말도 급작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운과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으니까요. 비버리 대통령 마스크가 대박이 났다 한들, 아빠가 재기하는건 불가능했을거에요. 물론 이런 결말이 옛 헐리우드 영화스럽기는 했습니다만....

그리고 아카츠카 후지오에 대한 오마쥬도 범죄물에는 전혀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이야미는 이상한 말투로 프랑스를 찬양하는 과장된 모습만 보여주거든요. 개그만화 캐릭터이니 당연하겠지만, 덕분에 이야기의 비현실성만 커졌을 뿐입니다. 그나마 정체가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도 밝혀지지도 않고요. 본인이 직접 프랑스어로 가서이 계획을 실행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없어요. 여권이 없는 듯한 암시 정도에 그칩니다. 이럴거라면 소장은 등장하지 아니함만 못했습니다. 트럼프를 풍자하는게 분명했던 비버리 대통령도 많이 억지스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허술한 이야기 구조는 조금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적합해 보입니다. 범죄물 말고, 이야미의 사랑 이야기에 주력하는게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구태여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