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 유진 B. 슬레지 지음, 이경식 옮김/열린책들 |
저자 유진 B. 슬레지가 직접 참전해서 싸웠던 2차 대전 태평양 전쟁에서의 경험을 서술한 회고록이자 전쟁사 서적.
책은 저자가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슬레지 (별명은 이름에서 따온 "슬레지해머")는 샌디에이고 훈련소에서 여러 주에 걸친 가혹한 훈련을 받습니다. 한 명의 해병대원으로 성장한 뒤, 제 1 해병사단 제 5연대 3대대 소속 박격포병으로 1944년 펠렐리우 섬에서의 격전, 1945년에 오키나와 전선에 투입되었지요. 그리고 운 좋게 부상없이 생환하였고요.
저자가 겪은 2차 대전은 고작 1년도 안되는 기간입니다. 실제 전선에서 싸운건 그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고요. 하지만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없이, 섬에 방어망을 철저하게 구축하여 저항했던 마지막 전선이기에, 그리고 한 곳은 땅을 팔 수도 없는 열사의 산호섬이고, 또 한 곳은 항상 비가 오는 진흙탕이었고. 일본군 병사들의 목적도 오로지 죽기 전 미군을 한 명이라도 죽이려는 생각이었다니 그 끔찍함과 고생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덕분에 560여 페이지에 달하는 꽤 긴 분량이지만 술술 읽힙니다.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생생함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요소였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건 시체가 널려있던 전선 상황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일본군의 시신은 산호섬이라 묻을 수도 없어서 사방에 방치되어 있었고, 더운 날씨 탓에 바로 썩어들어가서 그 악취가 어마어마했다고 하네요. 당연하게도 파리도 굉장히 많았는데, 시체에 붙어있던 거대한 파리떼가 식사로 먹던 레이션에 달려들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섬뜩했고요. 이렇게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상상하기도 힘들, 그런 생생한 묘사들이 곳곳에 가득합니다.
전쟁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일본군과 미군이 서로에 대해 갖는 증오심이야 뭐 서로 겪은게 있으니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각자 서로에게 집행하는 상상 이상의 폭력이 정말 충격적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일본군의 금니를 뽑으려고 입을 대검으로 찢었다던가, 기념품으로 일본군 포로의 손을 잘라 챙겼다던가, 일부러 일본군 시체에 대고 오줌을 쌌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숱하게 등장합니다. 저자가 미 해병대원이다보니 미군 시점의 이야기가 많은데, 일본군도 별반 차이가 없었겠지요.
이와는 정 반대로, 전투를 겪으며 미치거나 피폐해지는 병사들에 대한 서술도 적지 않아요. 죽은 일본군의 반쯤 날아간 머리를 계속 개머리판으로 쳐 댔다는 미군 병사 이야기처럼요. 그동안 일본군은 거의 전멸했던 반면, 미군은 실종 포함한 사망자는 7,631명, 부상자는 3만 1,807명이라 큰 피해는 받지 않았다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부상자들이 복귀만 한다면 전선 유지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부상자 중 2만 6,221명이 정신적인 부상자라는 이 책의 설명을 읽고나서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정신적인 부상자들은 군 복귀는 물론, 일상 생활로의 복귀도 힘들 사람들이 많았을테니까요. 저자는 전투는 참가한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사람들은 그 끔찍한 흔적을 안고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정말 살아도 산게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요. 저자 역시 운 좋게 무사히 살아남기는 했지만 마음에 많은 상처를 입은건 분명하다는게 이런저런 회고와 묘사에서 여실히 드러나고요. 고작 20살에 불과한 저자와 비슷한 또래의 전우들이 겪기에는 지나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옥이었겠지요. 정말이지 전쟁은 무섭네요.
그래도 다행히, 멋진 전우들도 많고 그들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지거나, 죽음을 넘나드는 와중에 웃을 수 있는 여유도 보여지곤 하더군요. 담배를 피지 않던 슬레지가 펠렐리우 상륙 작전 직후에 바로 담배를 찾았다던가, 두 박격포병들이 거의 목숨을 걸고 싸운건, 탄약 상자 속 포탄 용기 안에서 발견한, 은색 립스틱을 바른 여자의 입술로 키스를 한 자국이 있는 사거리표 카드를 서로 갖겠다는 이유였다는 이야기처럼요. 이런 일도 없다면 진작에 다 미쳤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20년도 더 지난 옛 군 생활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때 그 친구들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려나....
이렇게 가치있는 회고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기승전결의 구조가 없다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회고록인 탓입니다. 각 시기별 경험들을 모두 이어 붙여 놓았을 뿐이니까요. 때문에 뭔가 정리된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등장 인물들도 두서없이 등장해서 죽거나, 사라지곤 하는 편이고요. 또 잔혹한 쓰레기였던 분대장 맥의 후일담이 궁금했는데, 등장 인물들 중 살아 남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후일담을 적어주면 좋았을 것 같네요.
그래도 일반 병사 시점에서 본 전쟁이라는 특이함에 더해, 생생함이 놀라운 수준이라 별점은 3점입니다. 태평양 전쟁, 아니 일반 병사의 전쟁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셔야 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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