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켄지와 제나로는 정신과 의사 디안드라 워렌의 의뢰를 받았다. 모이라 켄지라는 소녀로부터 그녀 애인 케빈 헐리히가 사람을 죽여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협박 전화를 받았고, 3주가 흐른 뒤에는 디안드라의 아들 제이슨을 찍은 사진이 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케빈과 그의 보스 잭 루스를 만난 자리에서 그들이 협박범이 아니라는걸 깨달았고, 제이슨의 미행에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던 와중에 켄지도 협박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켄지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려던 동네 소녀 카라 라이더가 잔혹하게 살해당한채로 발견되었고, 그녀가 모이라 켄지였다는걸 알게 되는데....
데니스 루헤인이 쓴 켄지 앤 제나로 시리즈. 이 시리즈는 전에 <<전쟁 전 한잔>>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생각과 사뭇 다른 작품이었습니다. 이전에 조금이나마 갖추고 있던 하드보일드스러운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잔혹하고 폭력적인 범죄에 더해 냉혹한 범죄자가 등장하고, 주인공들과 범죄자들이 과거의 인연으로 깊숙이 엮여 있다는 점은 하드보일드스럽지만, 자극만을 극도로 추구한,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 펄프 픽션에 불과해요. 범인의 범행이 아무런 이유가 없는 탓이 가장 큽니다. 악의 근원, 동기를 아무리 헤집고 찾아봤자 그냥 정신병자였다는게 전부거든요.
그렇다면 재미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 역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범죄자와 탐정의 대결에서 흥미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야기는 그냥 흘러갈 뿐입니다. "나 잡아 봐라~"로 시작해서, "자, 이제 너 죽었어!", 그 다음에 "어이쿠, 내가 잡혔네, 이제 죽었네!" 식으로요.
이 과정에서 정교한 맛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나 잡아 봐라~"에서 범인이 던져주는 단서는 수사에 도움이 되지 못하거든요, 에반드로의 경우 그의 얼굴을 떠올린 켄지의 기억력 덕분에 신원이 드러났고, 진범 게리 글린도 경찰 수사 결과 증거품에 지문이 남겨졌다는게 밝혀지는 만큼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잭 루스를 잡아다가 고문해서 얻은 정보 등 다른 단서들도 사실상 쓸모가 없었던건 마찬가지고요.
70년대 중반, 마을 자경단 EEPA 모임 멤버들의 가족과 친지들이라는 피해자들의 공통점이 드러나는 과정은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과거 EEPA가 알렉 하디만과 찰스 러글스톤을 덮친 뒤 고문해서 러글스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과거가 지금 사건의 동기라는건 설득력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당시 사건 수사를 맡았던 게리 글린이 EEPA 멤버들을 풀어주고 알렉 하디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 EEPA 멤버들과의 뒷거래로 부자가 되었는데, 20년이 지나서 그 가족을 죽인다? 왜죠?
인간의 고통이야말로 순수의 본질이다는 등의 범인들이 한 말들로 그들이 잔혹한 폭력을 저지른 이유를 설명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무고한 사람들을 수십 명씩 잘 죽여왔는데, 구태여 EEPA 멤버 가족과 친지들을 사진을 보내 범행을 예고하면서까지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알렉 하디만과 게리 글린이 손을 잡은 경위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알렉 하디만이 체포되기 전부터 관계가 있었고, 존이 알렉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고 치죠. 그렇다면 알렉 하디만에게 게리 글린은 현재 시점에서는 철천지 원수입니다. 자기와 친구를 고문하고, 심지어 친구는 잔혹하게 죽인 범인들과 손을 잡고 자기를 감옥으로 보낸 악덕 경찰이니까요.
그들의 공범 에반드로 아루조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 역시 설명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알렉 하디만에 의해 세뇌되었다는 암시 뿐인데, 이 정도로 이런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죠. 설령 세뇌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게리 글린이 아니라 알렉 하디만에게 세뇌되었으니 게리 글린을 도와 살인 행각을 벌일 까닭도 없습니다. 켄지의 집에 완벽하게 침입해서 메시지를 남긴 방법 역시, 페인트 공으로 변장했다는 정도로 넘어가기에는 허술하고 부실했습니다. 그리 대단한 트릭도 아니고요.
하긴, 범인이 전직 경찰이었던 게리 글린이라는 진상이 가장 뜬금없어서 더 할 말이 없네요. 앞서 등장한 인물들 중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범인이라는 이유 외에 다른 근거는 없어 보였습니다. 알렉과 게리 글린, 둘이 알렉 하디만 구속 이후에도 관계가 있었다면, 이후 FBI 조사에서 게리 글린의 존재가 떠오르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힘들네요.
그 외에도, 지나치게 잔혹한 범행 묘사들도 별로였고, 폭력이 넘쳐나는 거리에 대한 묘사도 과해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솔직히 케빈이라는 살인마 똘아이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돌아다닌다는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거리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는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워요.
폭력과 사랑을 대비시키며, 사랑 쪽에 패트릭 켄지와 앤지 제나로 커플을 위치시킨 설정도 진부했습니다.
그래도 아주 싸구려 헐리우드 스타일 펄프 픽션이라고 평가 절하하기는 좀 힘들기는 해요. 작가의 글솜씨가 대단한 덕분이지요. 뻔한 소재와 설정들인데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흡입력만큼은 대단했어요. 특히 에반드로가 켄지와 제나로를 습격할 때, 그리고 켄지가 게리 글린과 대치할 때의 긴장감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에반드로가 섬 폐가에 컴퓨터 모뎀을 설치하고 전화를 연결해서, 공중전화를 세워 위치를 속인 트릭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거리의 공중전화로 걸면 컴퓨터 전화로 추적되도록 한 건데, 90년대 당시라면 충분히 먹혔으리라 생각되네요. 켄지와 제나로의 관계가 완벽하게 정리되는 결말은 팬들에게는 좋은 선물이고요.
하지만 펄프 픽션을 뛰어넘는 무언가냐 하면, 그렇다고 보기는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좋은 작가가 쓴 양산형 범죄물일 뿐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 시리즈도 더 이상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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