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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6

위작 X 미술시장 - 켄 페레니 / 이동천 : 별점 3점

위작 X 미술시장 - 6점 켄 페레니 지음, 이동천 옮김/라의눈

위작 전문가 켄 페레니의 자서전. 1949년에 태어난 켄 페레니가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전성기 때 범죄자 토니 마사치오와 어울리며 예술가 톰 달리를 만나 예술에 눈을 뜨고, 판 메이헤른의 책을 읽고 위조를 시작한 뒤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위조 작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과정을 본인 스스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영리한 미술품 위조범의 고백' 이라는 부제답게 말이지요.

책은 기막히게 재미있습니다. 본인의 생생한 경험담들이 압권이기 때문입니다. '허구는 실화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정말이지 맞는 말이에요. 톰 달리와 앤디 워홀, 유명 변호사 로이 콘, 유명 컬렉터 지미 리코, 피카소의 딸 팔로마 피카소 등 실존 인물들이 등장해서 팩션같은 재미도 전해주고요.
게다가 켄 페레니가 저지른 수많은 범죄들은 하나, 하나가 한 편의 이야기로 충분할 정도로 기승전결이 완벽한데, 이런 범죄들이 400여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빼곡하게 실려있다는 볼륨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실존하는 위조범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년간 위조를 하면서 발전시키는 기술과 위조 분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어떤 젯소와 어떤 캔버스를 써서 어떻게 오래된 듯한 흔적을 남기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아낌없이 공개해주고 있습니다. 공개해 봤자 어차피 따라하기는 힘든 영역이긴 하지만요. 대표적인 노하우는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 때 이런저런 공통 요소들을 조합한 패턴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처음 알게 된 사실도 많아요. 그림에 흔히 보이는 작은 까만색 덩어리는 바니시의 당분에 끌린 집파리 싼 파리똥 축적물이라는게 좋은 예입니다.
초창기 켄이 영향을 받은 예술가인 톰 달리를 비롯하여 오드리 비어즐리, 제임스 엔서, 히로니뮈스 보스, 피터르 브뤼헐, 브라이스 마든, 벤자민 웨스트를 비롯하여 지미의 영향으로 현대 미국 회화를 방대하게 위조할 때 연구했던 현대 미국 화가인 캐틀린, 찰스 버드 킹, 인먼, 존 F 피토, 라파엘 필, 존 F 프랜시스, 레비 웰스 프랜시스, 제임스 E 버터스워스, 안토니오 제이콥슨, 제임스 바드, 마틴 존슨 히드, 윌리엄 아이콘 워커, 안토니오 제이콥슨, 세베린 로센, 레비 웰스 프렌티스, 그리고 FBI의 추적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영국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위조를 시작했을 때 손 대었던 영국 수렵파 화파 화가들인 조지 스터브스, 존 우턴, 존 프레드릭 헤링 주니어. 제임스 세이무어, 존 노스트 사토리우스, 토머스 스펜서, 존 프레드릭 헤링 시니어, 존 E 퍼넬리와 영국 해양화가인 토마스 휘트콤, 찰스 브루킹, 토마스 버터스워스, 니콜라스 캔디 등 실존 유명 화가들에 대한 언급도 상세합니다.

이런 오랜 연구와 위조 과정을 거치며 가면 갈 수록 실력이 늘어서 1993년 마틴 존슨 히드의 <<브라질의 보배>> 위작은 경매에서 판매되었다는 기사가 '런던 타임즈'에도 실리고, 1994년 그린 최고의 위작인 히드의 <<팻 보이>>는 모든 전문가의 감정까지 통과하여 무려 71만 달러에 경매에서 판매되기까지 합니다. 마침내는 그가 가공의 화가를 내세워 그린 작품들, 심지어 위작가 켄 페레니의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이 정도면 위작계의 미켈란젤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네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켄 페레니가 저지른 범죄 들은 위조 관련 범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절도, 사기 행각이며 별로 치밀하지도 않은 즉흥적인 범죄가 많습니다. 사회 통념과 정의를 깨트리는 파격이라는 재미로 보기에는 단순히 '돈'을 노리고 저지른 단순 범죄에 불과하고요. 켄 페레니가 '천재 예술가'와는 거리가 먼 거리의 잡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 역시 당연하지만 썩 개운하지 않았어요. 이런 인간이 잘난척 떠벌이는 무용담을 수백 페이지나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인생이 너무 잘 풀립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 의해 인생이 바뀌고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거든요. 실화라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소설이라면 이렇게 쓰면 욕을 먹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에요. 마지막으로 이렇게 위조, 위작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면 도판이 보다 충실한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번역도 오타가 많아서 불만스러웠고요.

그래도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 없는 자서전이자 논픽션임에는 분명합니다. 켄 페레니가 동네 잡범이라도 최소한 위작 계에서의 위치는 인정해 줄 수 밖에 없기도 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위조와 위작 사기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켄 페레니의 대표 위작인 히드의 '시계초' 위작 <<팻 보이>>와 히드의 작품을 보여드리며 리뷰를 마칩니다. 둘 중 어떤게 켄 페레니의 작품일까요?


위쪽 작품이 위작입니다. 이 정도면 속아 넘어간게 당연하다 싶네요.

2019/10/25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구라치 준 / 김윤수 : 별점 2점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4점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작가정신

잘 모르는 작가의 단편집. 제목이 꽤 흥미로와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표제작을 포함은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기발함, 기묘함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큽니다. 개개의 이야기들 모두 아이디어에 비하면 긴 편이라는 것도 단점이고요. 호시 신이치였다면 10페이지 안 쪽으로 끝냈을, 그런 내용들에 불과하거든요. <<사내 연애>>와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은 특히 쇼트쇼트 스타일로 쓰여지는게 어울렸을겁니다. 기발한 농담에 가까운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물론 쓰고 싶은 글을 느긋하게 썼구나 싶은 작품도 있습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는 고양이를 정말 사랑하는 애묘인이구나! 싶은 묘사가 가득하여 읽는 내내 아주 흐뭇했어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기발함이 추리적으로 잘 포장된 괜찮은 이야기였고요.

하지만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고 아이디어도 괜찮았지만 약간은 어정쩡한 느낌이 컸기 때문입니다. 호시 신이치 쪽인지, 아토다 다카시 쪽인지를 좀 더 명확히 하면 좋겠네요. 호시 신이치 쪽이라면 더 짧게, 아토다 다카시 쪽이라면 아이디어의 보강과 약간의 엽기성(?)이 추가되어야 할 겁니다.

각 단편별 상세 소개로 리뷰를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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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한 희생자를 살해하는 무차별 살인이 벌어지는데, 주인공은 우연히 2 건의 살인 사건이 ABC의 규칙을 따른다는걸 알아내고 C에 해당하는 희생자를 찾아내어 살해하려 한다. 이유는 유산을 노리고 동생을 죽일 계획인데 동생이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그 연속 살인과 ABC 살인 사건의 결합은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귀환>>에서도 써 먹은 아이디어입니다. 아마 다른 작품에도 쓰여진 경우가 있을 거에요. 그만큼 유명한 트릭이자 설정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핵심 아이디어는 범인이 C 사건을 일으킨 뒤, 곧바로 다수의 D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반전입니다. 여러 사람이 연쇄 살인에 편승하여 저마다 모방 범죄를 일으킨 것이죠. 그리고 주인공이 급작스럽게 자신도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는걸 깨달으며 마무리됩니다.

반전과 결말 모두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흔해 빠진 서두를 조금 더 줄여서 쇼트쇼트로 발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내 편애>>
인사 관리를 컴퓨터가 전담하게 된 이후, AI 시스템 '마더컴'로부터 편애를 받게 된 주인공이 회사 내에서 이런 저런 황당한 일을 겪는다는 이야기.

인공 지능이 인사 관리를 한다는 아이디어는 새롭지 않지만 '모더레이트 플리커 메소드식 (MFM)' 이라고 불리우는 설정이 아주 기발합니다. 인사 관리를 지나치게 합리적이지 않도록 하는, 인간적인 모호함을 넣은 서브 프로그램으로 덕분에 좀 느슨하고 인간적으로 관리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시스템을 도입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인 '공정성'이 훼손되는거라 일부러 이런 오류를 집어넣을 이유는 없지만 상황 자체는 꽤 그럴듯 했습니다.
이 모호함이 주인공 데라시마에게는 '편애'로 작동하여 일으키는 소동들도 재미있습니다. 전무가 직접 커피를 타다 주고, 상사가 허물을 덮어주는 정도에서 마음에 둔 여사원과 억지로 이어주는 민폐 수준의 도움까지 진화하게 됩니다. 심지어 마음을 고백한 것도 아닌데 주인공의 눈빛 등을 분석하여 이런 억지를 이끌어내니 어떻게 보면 무섭지요.

그러나 결국 지긋지긋해진 주인공이 회사를 그만 두고 다른 회사 면접을 보는데 그 회사 마더컴은 주인공을 그냥 싫어하더라는 결말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조금 더 재미있는 상황을 끌어낼 부분이 많았는데 너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를 끝낸 느낌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살해된 피해자 입에 파가 물려있고, 머리 맡에는 케이크가 놓여있는 기묘한 상황을 그린 단편.

살인 사건이 등장하지만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카모토 경부의 합리적인 수사를 통해 범인은 아주 쉽게 밝혀지거든요. 기묘한 범행 현장에 대한 아마치 형사의 추리가 전부인데 진상이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혼잣말과 비슷한 수준의 이야기라 공허하죠. 아마치 형사 본인 스스로도 마음껏 공상한, 상식 밖의 엉뚱한 생각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니까요.

물론 실제 진상이 드러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추리는 합리적이어야 하는데 솔직히 억지스러워요. 피해자를 스토킹하면서 피해자가 파를 싫어하고 케이크를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후, 성불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는게 추리 내용입니다.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고 싶어도 싫어하는 파가 입을 막고 있어서 먹지 못해 원통해서 마음 편히 성불하지 못한다는 이유지요. 피해자에게 집착해서 그녀가 죽어서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가면 안되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건데 누가봐도 정신병자의 행동입니다. 정신병자의 정신나간 행동을 합리적으로 추리한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에요.

때문에 추리 소설로의 가치는 별로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
할머니 혼자 사는 시골집에 내려간 주인공 유리에는 할머니의 고양이 미코가 며칠동안 밤에 어딘가를 바라보는걸 알아챈다. 미코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양이 미코에 대한 묘사가 꽉 채워져 있는데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시종일관 느껴져 좋았습니다. 고양이를 쓰다듬고, 만지고, 같이 노는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러워요.

하지만 고양이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이유가 '냄새' 때문이며, 이는 이웃집 할머니를 아들이 암매장하기 위해 땅을 판 탓이라는 결말은 좀 억지스럽습니다. 고양이의 후각이 예민한건 맞지만, 이웃집에서 땅을 판다고 밤에 자지 않고 그쪽을 쳐다본다는건 좀 이상하잖아요? 땅을 판다고 해서 그렇게 특별한 냄새가 날지도 잘 모르겠고요. 실제로 공사 현장 옆에 산다고 해서 고양이가 그곳을 바라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양이 묘사는 좋지만 그 외에는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습니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패전 직전인 1944년 겨울, 나가노 현에 위치한 제국 육군 특수 과학 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벌어진 기묘한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날카로운 흉기는 하나도 없는 밀실인 실험실에서 피해자는 후두부를 날카로운 흉기로 얻어 맞아 죽은 것. 언뜻 두부 모서리에 부딪혀 사망한 걸로 보이는데 과연 진상은 무엇일까?

밀실 살인물이자 불가능 범죄물. 매드 사이언티스트 마사키 박사가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인력 '공간 전위', 즉 일종의 텔레포트 현상을 인력으로 발생시켜 미국에 폭탄을 투하한다는 연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특무 첩보 기관에서 파견 나온 도네 소좌의 추리는 꽤 기발했습니다. 공간 전위의 첫번째는 공간 역전 현상으로 공간이 뒤집혀 피해자는 거꾸로 떨어졌고, 우연찮게 지금은 움푹 들어간 천장 모서리에 후두부가 찍히게 되었다는 추리입니다. 공간 역전이 일어나면 움푹 들어간 곳은 반대로 튀어나올 테니까요.

하지만 당연히 이런 괴기한 추리는 진상도 뭐도 아닙니다. 뒤이어 주인공인 이즈카 가쓰오 이등병의 합리적인 추리가 등장합니다. 범인은 도네 소좌이며, 이유는 피해자가 스파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흉기는 벽돌 같은 걸로 범행 후 멀리 던져버맀고, 아침에 문을 열 때 문 앞의 눈이 치워져 있었다는게 증거이고요. 밀실은 특무대 소속이면 자물쇠 여는 것 쯤은 식은죽먹기였을거라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일 뿐입니다. 근거도 없고, 진상도 결국 밝혀지지 않지요. 그리고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이 진상이었다 하더라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에요. 사고를 위장하여 연구에 종사하는 병사들을 죽이는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이즈카 본인 스스로 이야기하는데, 도네 소좌가 이런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해 가면서까지 가게우라 이등병을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가 스파이라고 생각했다면 사람들 앞에서 총으로 쏴 죽여도 괜찮았을겁니다. 그만큼 미친 시대였지요.

그래도 일본의 전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무식한 특수 과학 실험,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걸 풍자하는 묘사와 내용은 인정할 만 합니다. 공간 전위라는 기묘한 실험에 대한 아이디어와 이를 추리에 응용한 발상도 좋았고요.
차라리 이 추리가 마지막에 진상처럼 드러나고, 결국 진상은 아무도 모르지만 미친 시대에 누가 그런걸 신경이나 쓸까? 라는 형태로 마무리했더라면 훨씬 마음에 들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하마오카는 회사 연구소에 방문한다. 연구소가 개발한 그비 신소재 관련 자료를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곳에서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학교 선배 네코마루를 만나고, 우연히 연구소 내 산책을 함께 하다가 연구 소장 살인 미수 사건까지 함께 접하게 된다.

일종의 불가능 범죄를 다룬 정통 본격 추리물. 그런데 도가 지나친 삼엄한 연구소 경비, 기묘한 연구원과 도저히 알 수 없는 센스의 연구소 마스코트 네코멜론군,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네코마루 선배 등 설정이 만화적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건 단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 정도만이었다면 괜찮았을텐데 말이죠. 이래서야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 - 극비 신소재에 대한 정보를 빼돌리는 것 - 와 거리감이 커서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시종일관 장난으로 일관하는 행동과는 다르게 추리 자체는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탐정역 네코마루 선배의 추리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아무도 범행을 저지를 수 없었으니 이 범행은 소장의 자작극이다! 그리고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던질 수 없으니 빈 양동이를 던져 부딪혔고 물은 그 전에 쏟아 놓았다는 건데 아주 현실적이었으니까요. 극비 신소재 자료를 빼돌리고 이를 하마오카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동기도 좋았고요. 농담같은 철저한 보안을 구급차를 타고 빠져나감으로써 뚫을 수 있다는 발상으로, 보안이 나름 강한 회사에 다니는 제 입장에서 보아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과연 시리즈 작품에 탐정으로 등장할 만 합니다.

만화적이고 과장된 묘사를 줄이고 좀 더 일상계스러운 작품으로 쓰는게 여러모로 더 나아 보이는데,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가우스 전자 마지막회

2011년, 우리 딸아이가 태어난 해에 연재를 시작한 곽백수 작가의 가우스 전자가 오늘을 마지막으로 완결되었네요.

샐러리맨들의 삶을 유쾌하게 투영한 에피소드들은 물론 조금 긴 호흡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 가족과 인생 이야기들 모두 즐거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득점과 남나리가 사랑의 결실을 맺는 에피소드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이렇게 햇수로 9년여를 즐겁게 해 준 작품이 완결된다니 섭섭한 마음 뿐입니다. 10년을 채워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이왕 완결된거, 곽백수 작가의 더 재미있는 신작을 기대해 봅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9/10/20

11문자 살인 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1.5점

11문자 살인사건 (개정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성 추리 소설가 '나'의 연인 가와즈가 살해당한다. 그의 죽음에 얽혀있는 여러가지 의문을 풀기 위해 '나'는 친구인 편집자 후유코의 도움을 얻어 조사에 나선다. 그리고 이 죽음에는 과거 요트 여행 사고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지만, 친구 후유코마저 사망하고 마는데....
 

일본 추리 문학계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7년에 발표한 초기작. 무려 30년 이상 된, 나름 고전입니다. 보통 초기작은 모든 아이디어와 역량을 쏟아부은 역작이거나, 아니면 습작 수준을 갓 벗어난 어설픈 작품이거나 둘 중 하나지요. 이 작품은 아쉽게도 후자에 가깝습니다. 한마디로 어설프거든요. 범인도 어설프고, 이를 막으려는 일족의 행동도 어설프고, 주인공도 어설프고, 전개도 어설프고 작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설프고 헛점이 많아서 궁금증이 끊이지가 않더라고요. '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걸 깨닫는 장면부터 그러해요. 왜 연인인 가와즈 마사유키는 '나'에게 진상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요?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로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데 말이지요. 가와즈의 유품 원고와 자료를 받은 뒤 이 자료가 뒤져진걸 알고 사건의 진상을 캐 나간다는 계기 역시 마찬가지, 자료를 훔쳐낸 일당은 왜 제대로 정리해서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않았던걸까요?
또 일당이 속속 살해당하는 와중에 야마모리 사장과 일당은 범인이 누군지 눈치챈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을까요? 일당이 당하는 복수의 계기가 밝혀지기를 원치 않아서? 그러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합니다. 증거라고는 후유코가 찾아낸 다케모토 술병 속 메모가 전부, 그나마도 다케모토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무인도에 도착했다는 말 뿐이지요. 이 정도로 경찰이 진상을 알아내고 야마모리 일당을 추궁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유일한 증거인 가와즈의 원고는 이미 일당이 처분해 버리기도 했고요.

물론 일당이 경찰의 손을 빌리지 않고 그들 스스로 후유코를 없애고 진상을 영원히 숨기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만한 재력도 있고, 사람도 충분했지요. 하지만 이를 위해 '나'를 요트 여행에 초대하고, 그녀가 후유코와 동행하게 만든다는 계획은 말이 안됩니다. 후유코가 의심하지 않고 함정 한 가운데에 뛰어들게 만드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나' 역시도 사건 진상을 쫓는 중이니 당연히 위험 인물이잖아요? '나'를 끌어들이지 않고 후유코를 사고로 위장하여 죽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거에요. 아니면 후유코가 습격하게끔 만들고 오히려 역습하여 정당방위로 죽일 수도 있었을테고요. 이야기 중에서도 일당은 사카가미가 살해될 때 이미 일당 중 한 명이 숨어있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니 충분히 가능했을겁니다.

반전이랍시고 등장하는 범인의 정체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인이 후유코라는 단서는 전무하다시피 한데 이게 어떻게 반전이 되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뜬금없기 그지없습니다.
동기도 설득력이 부족해요. '현실의 사건은 흑백이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고, 선과 악의 경계가 애매하지만 소설은 완성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가와즈의 말로 복잡한 동기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지나치게 멋을 부렸을 뿐 실제로는 선과 악의 경계는 명확합니다. 목숨을 건 구조의 댓가로 여성의 몸을 요구한 다케모토는 소악당, 다케모토를 죽여서 이 사실을 덮으려던 일당들은 대악당입니다. 그냥 다 악당이에요. 특히나 일당이 죽어나갈 때 일족 이외의 인물부터 죽여서 입을 막으려던 야마모리 사장이야 말로 악당 두목급이고요. 여자의 몸을 구조 댓가로 요구하는 뻔뻔스러운 놈의 복수를 하겠다고 관계자들을 죽여나간 후유코도 악당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대관절 뭘 이야기하려고 한 건지 헛갈리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전개가 어설프다면, 최소한 히가시노 게이고다운 트릭이나 추리적인 전개라도 뒷받침되어야 했을텐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유일한 트릭은 후유코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시계를 조작했다는 정도거든요. 대단한 트릭도 아닐 뿐더러 작 중에서의 비중도 낮습니다. 주인공이 진상을 알게 된 건 시각장애 소녀 유미의 증언 탓이 컸거든요. 또 야마모리 사장 일당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건 결국 그 식솔과 고용인들이라는 점에서 알리바이 트릭이 필요한지도 의문이 듭니다. 야마모리 사장을 의심하면서 이 사람들 증언은 곧이 곧대로 믿는다는게 가능할까요?
'11 문자 살인 사건'이라는 제목도 기대를 완전히 저버립니다. 뭔가 그럴듯한 암호 트릭이라도 등장할 줄 알았더니만 그냥 후유코가 보낸 협박 편지의 글자 갯수에 불과하니까요. 이 정도면 거의 제목 사기가 아닌가 싶어요.

등장하는 경찰의 역할도 설득력을 저해시키는 요소입니다. 과거 어떤 요트 여행의 생존자들이 차례로 살해당한다면, 생존자들을 조사하여 동기와 범인을 밝혀내는게 당연하잖아요? 일개 추리 소설가가 발품을 팔아서 알아낸 사실을 경찰이 모른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가와즈 사건까지는 그렇다치더라도 카메라맨 미유키가 살해된 사건부터는 연관성을 알아내고 수사를 펼쳤어야 합니다. 아니면 사카가미 사건에서는 최소한 관련성을 알아낼 수 있었겠죠. 이런 점을 본다면 '나'가 입을 다물었다 치더라도 야마모리 사장 일당이 빠져나가기는 어려웠을거에요. 무려 3~4명이 죽어나간 살인극을 경찰이 진상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덮어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긴, 이 작품 속 경찰을 본다면 충분히 그럴만 하기도 싶긴 하지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히가시노 게이고도 초기에는 많이 어설펐다는걸 증명해 주는 수준 이하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작가의 광팬이 아니라면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작품마저 재출간되다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 값이 정말 대단하다 싶네요.

기억 파단자 - 고바야시 야스미 / 주자덕 : 별점 1.5점

기억 파단자 - 4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낯선 방에서 깨어난 니키치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한 권의 노트를 발견, 그 안에서 자신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타인의 기억을 개조하는 초능력을 가진 살인마와 대면하게 되는데……. 의지할 수 있는 건 노트와 잃어버린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발달한 뛰어난 추리력과 판단력을 가진 두뇌뿐이다. 니키치는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출판사 책 소개 인용)

<<앨리스 죽이기>> 등으로 접했었던 공학 박사 학위를 지닌 공대생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의 장편 스릴러. '기억 파탄'이 아니라 '기억 파단 (記憶破断)' 이라는 제목과 책 소갯글 그대로 기억의 단절이 주제입니다. 기억을 이어 나갈 수 없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환자 니키치와 타인과 접촉하여 연속된 기억 속에 기억을 추가하여 기억 그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초능력자 키라와 한 판 승부를 그리고 있는데 단기 기억 상실증은 기억파단 그 자체이고, 기억 속에 다른 기억을 집어 넣어 왜곡하는 것 역시 연속된 기억을 파괴하는 행위니까요.

니키치는 자신이 기록한 노트로만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대응하며, 이 노트를 통해 키라와 맞서 싸우는데 이를 위해 등장하는 설정들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노트의 사용법과 생활 방법 등에 대한 디테일은 이야기를 꽤나 그럴싸하게 보이게 만들어 주거든요.
그리고 기억을 온전하게 노트에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반전 요소로 써먹는건 아주 좋았어요. 기억을 잃어버린 후 키라의 범죄 행위가 담긴 USB 메모리를 '서랍에 넣어 놓았다'는 노트 메모를 통해 알게 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만 애초에 이 메모 자체가 거짓이었지요. 키라에게 헛수고를 하게 만들고 실제로 교코를 통해 USB를 안전하게 빼돌리려는 계획이었거든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기억' 그 자체가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는 병 때문에 쉽게 왜곡할 수 있다는게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또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에 기억을 조작하는 키라의 초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아이디어는 분명 신선했습니다. 본인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던 사고 이후의 기억이 전혀 없는데 새로운 기억이 생겨난건 분명 누군가의 조작이라는 논리인데 설득력있지요. 이걸 이렇게 써먹나 싶어 감탄스럽기도 했고요.

그러나 사실 이 반전 외에 딱히 건질게 많은,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니키치 관련 주요 설정은 명백히 영화 <<메멘토>>에서 설정을 따 온 것이니까요. 노트의 메모가 중요하며, 또 자신의 '글씨체'로 기록한 메모만이 중요하는 점과 사진을 주요 기적 보조재로 사용하는 점이 그러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억은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판박이에요. 나쁜 기억 대신 자신이나 타인이 왜곡한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부분의 메시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나마 단기 기억 상실증은 <<메멘토>> 등을 통해 구축된 설정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나름 설득력이 높은데 반해 키라의 초능력은 너무 허황됩니다. 접촉을 통해 기억을 조작한다는 설정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구멍이 많아요. 누군가 모르는 사람의 접촉을 쉽게 허용한다는건 상식적이지 않으니까요. 왜곡된 기억이 많아지면 당연히 일어날 여러가지 모순을 정신 붕괴를 일으킨다며 대충 퉁치는 것 역시 마찬가지지요. 잘못된 기억이 주입된다면 그 이유를 따져 볼 사람이 없을리 없잖아요? 특정 기억에 대한 반대 기억이 명확한 경우, 예를 들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다' 가 '그 때 다른 누구와 무언가를 했다' 라는 분명한 기억과 겹칠 경우 더욱 그러할테고요. 기억 조작이라는건 전후관계와 디테일을 모두 고려해야 성공할 수 있을텐데 그런 부분은 이런 식으로 모두 대충입니다. 최소한 독자가 흥미를 가질만한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어요.
범행도 어이가 없습니다. 이 정도의 능력자가 편의점이나 털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을 폭행하고, 여자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는 수준 이하의 범죄만 저지른다는게 말이 될까요? 심지어 기억 조작도 어설퍼요. 지하철에서의 성추행같은 경우는 피해자와 정의감에 불타 나섰던 사람 2명의 증인의 기억만 조작해서 빠져나가는데, 실제로 니키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이 기묘한 상황을 눈치채죠. 이렇게 백주대낮에 대중 앞에서 벌이는 범죄 행각들이 많다면 아무리 CCTV의 사각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결국 꼬리를 잡혔을 겁니다.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립니다. 살인마를 쫓고 있는 상황에서, 또 살인마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니키치가 기억을 잃더라도 굉장히 필요한 정보만 잘 떠올리고 기억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침 딱 좋은 위치와 장소에서 노트 속 필요한 페이지를 읽게 되는 식이거든요. 기억을 잃는 시간도 정해져 있어 보이지도 않고요. 뒤로 가면 갈 수록 이 친구가 기억 상실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에요. 억지로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이런저런 설정들도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니키치를 비롯한 캐릭터들의 묘사가 밋밋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살인마 키라는 그냥 나쁜 놈, 니키치는 성격 묘사없이 그냥 키라와 싸우는 정의의 사도라는 이분법적인 구분만 있을 뿐 별다른 묘사는 없어서 평면적이고 만화적이기 때문입니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한데, 매력적인 세계관과 설정 창조는 잘 하지만 캐릭터를 묘사하는 능력은 없는게 아닌가 싶네요.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조력자 도쿠 할아버지나 화법 교실 강사 교코도 다 어디서 본 듯한, 평면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다를게 없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일부 매력적인 설정과 돋보이는 아이디어가 없지는 않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단기 기억 상실증 관련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이 그러합니다. 작가의 팬이시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관심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9/10/13

사물들의 미술사 1 : 액자 - 이지은 : 별점 3.5점

사물들의 미술사 1 : 액자 - 8점
이지은 지음/모요사

<<부르조아의 유쾌한 사생활>> 등의 빼어난 미술사미시사 저작물로 친숙한 이지은의 신작. 제목 그대로 그림 보호, 장식용 테두리가 아닌 '액자' 그 자체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책은 모두 여섯 개의 주제로 구분됩니다. 이 중 앞의 세가지 - 겐트 제단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브와트 아 포트레 - 는 특정 작품을 주제로 풀어내는 이야기이며 뒤의 세 가지 - 19세기 액자, 반 고흐의 액자, 드가와 카몽도 - 이야기는 각 시대별 액자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하나의 주제에 맞추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중 앞의 세 가지 이야기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액자' 에 대한 고찰이라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루벤스가 루이 13세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를 그린 작품은 발표 당시에는 지금과는 다르게 마르 드 메디시스가 사는 뤽상부르 궁전의 특별한 갤러리에 전시되던 작품들이었다는 내용은 조금 기억에 남기는 합니다.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이 작품들은 원래 의도대로 온전히 감상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죠. 앞으로 VR을 활용하여 원래 의도대로의 감상이 가능하도록 구현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구현되면 구태여 책으로 읽을 내용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다 심도깊은 연구와 미술사학적 의미가 뒷받침되고 있는 뒷 부분 두 편의 이야기가 더 좋았습니다. 첫 번째는 <<그 액자는 그림과 동시에 태어나지 않았다>>입니다. 19세기 박물관, 미술관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비로서 액자의 수요가 폭발하여 전형적인 액자가 생겨났다는 내용이지요. 우리가 보는 명화들의 액자는 모두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심지어 '모나리자'의 액자도 '모나리자' 제작 당시 통용되던 액자이기는 하나 다 빈치의 아틀리에를 떠났을 때 '모나리자'와 함께 했던 액자가 아닙니다. 미술사학적으로도 자료가 거의 없어서 연구가 어렵다고 하니 이런게 조연의 설움이겠지요.

그 다음 <<반 고흐의 상상의 액자>>는 반 고흐 생전 편지 기록을 토대로 반 고흐가 자신의 작품에 모두 특정한 액자를 고려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내용도 아주 흥미롭지만 반 고흐가 언급한대로 해당 작품을 가상의 액자 속에 넣어 보여주는 도판도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또 이를 통해 반 고흐가 얼마나 색채에 깊이 탐닉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액자와 그림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보색의 개념이 반 고흐가 작품에서 추구했던 색채의 효과들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왜 반 고흐가 '색채의 화가'라고 불리우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고흐의 작품 뿐 아니라 고흐가 이렇게 액자와의 관계를 연구하게 된 계기인 인상파 화가들의 액자들도 함께 소개되어 더욱 만족스럽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19세기의 전형이었던 장대한 액자가 아니라 흰색의, 그림과 비슷한 높낮이의 평평한 액자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기존 액자는 그림이 가상임을 알려주도록 도와주었다면, 인상파의 액자는 그림을 현실과 융화시키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침실>> 등 다량의 제라늄 빨간색을 사용한 고흐의 작품들은 모두 빨간색이 다 날아가서 당대의 색채를 구현하지 못한다는데 이 부분에서도 앞서 말씀드린 현대 기술을 좀 빌려보는게 어떨까 싶었어요.

그러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모더니즘을 향한 한 걸음, 드가>>는 재미있기는 한데 주제와는 조금 동떨어진 내용이었습니다. 직접 액자를 디자인하며 액자에 집착했던 드가의 노력이 소개되기는 하는데, 핵심은 드가 작품을 주로 수집했던 거부 카몽도 백작 가문이 유대인이었기에 당했던 비극과 아이러니거든요. 드가가 심각한 성차별주의자에 유대인을 미워했던, 인성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인물이라는걸 알게된 건 수확이지만 좋은 책의 마무리를 담당하기에 적합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카몽도 백작이 온갖 차별과 서러움을 이겨내고 정신 승리를 위해 루브르에 자신의 컬렉션을 기부한 것도 별로 와 닿지 않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5점.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야기는 5점을 주어도 충분하지만 다른 이야기들은 그 만큼은 아니라 조금씩 감점합니다. 그래도 작가 특유의 깊이있는, 발로 뛴 연구와 노력이 어우러진 수작입니다. '액자'에 대해 무언가 고민이라도 해 보았던 컨텐츠는 그동안 <<갤러리 페이크>>의 한 에피소드 밖에는 접해보지 못했는데 특정 작품이나마 이렇게 분석하고 고민한 결과를 접하니 너무나도 반갑네요. 액자 외 다른 인류 문명, 문화사의 조연들도 하루 빨리 조명받아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받게 되기를, 그리고 이지은 작가의 다음 작품도 지적 흥분과 재미 모두를 가져다 주는 책이기를 희망합니다.

2019/10/12

사치와 문명 - 장 카스타레드 / 이소영 : 별점 2.5점

사치와 문명 - 6점
장 카스타레드 지음, 이소영 옮김/뜨인돌

소비의 역사 - 설혜심 : 별점 4점
문명, 문화 발전에 사치가 큰 동력이 되었음을 설명하는 미시사문화사 서적. 이전 설혜심 교수의 <<소비의 역사>>를 읽고 쓴 리뷰 댓글에 존경하는 이웃 블로거이신 홍차도둑님께서 함께 읽으면 좋을거라고 추천해 주셨던 책입니다. 절판되었지만 근성으로 찾아내어 구입하여 읽어보게 되었네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지요.

<<소비의 역사>>가 당대 특정 상품과 문화, 유행별로 항목을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다면 이 책은 역사적으로 특정 '시기'의 거대 국가, 집단에서 어떠한 사치 행위가 있었으며, 해당 행위가 어떻게 문명 발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메르부터 시작하여 아시리아, 고대 이집트, 히브리, 그리스, 크레타와 로마 등의 기원 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시작하여 기원 후의 인도와 이슬람 문명, 마야, 아스텍, 잉카 문명, 아프리카, 중국, 일본 및 현대 BRICs 국가까지 망라하는 방대한 분량이죠. 사치 행위도 단순 기호품은 물론이고 문자, 건축, 종교 및 식사에 이를 정도로 폭 넓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읽다보면 책 소개글에 나온 것 처럼 사치가 단지 '소모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활동의 표식 그 자체이면서도 문명 형성과 발전의 주요 원동력임을 알게 됩니다. 특정 품목, 혹은 행위에 대한 기호 자체가 어느 정도 발전된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치는 타인에게 선망과 질투, 욕구를 불러 일으켜 사회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목적 의식'을 일으킨 이유가 되기도 했고요. 지금 우리가 성공하려고 발버둥치는 것 역시 이러한 고대로부터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아이를 위한 좋은 학교 등 모두가 사치 행위니까요. 명품에 대한 열망 역시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쓴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듭니다. 욕망이 목적 의식을 불러 일으키고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는 주제가 반복될 뿐이거든요. 물론 시기별, 문명별, 지역별 각종 사치에 대한 소개는 재미있지만 이를 모두 담기에는 분량이 부족하고 도판이 부실해서 아쉽습니다. 서양 문명에만 집중하지 않은 점은 높이 평가하나 타 지역 사치가 심도깊게 소개되었는지도 살짝 의문이 드네요. 예를 들자면 중국의 경우 등장하는 비단과 옥, 건축물 등은 이국적인 소재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 역시 4~5페이지 분량의 짤막한 역사 소개가 끝나면 바로 메이지 유신 이후 해외 사치 문화가 유입되어 현재에 이르렀다는 결론이 전부거든요. 이럴 바에야 이야기를 서양 중심으로 맞추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또 마지막 BRICs 역시 책이 출간되고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 된 것 처럼, '현대' 기준의 시각과 소개는 되도록 줄이는게 바람직했을 겁니다. 어치피 현대의 사치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책의 주제를 설명하는데 구태여 현재 시점의 사치 소개가 필요한건 아니니까요.
아울러 설혜심 교수의 책에 비하면 읽는 재미는 많이 부족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특별한 이야기나 드라마없이 소개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좋은 내용이기는 한데 단점도 명확합니다. 그래도 문명 발전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19/10/07

오래된 책들 (7) - 와타세 세이죠의 하트 칵테일!

<<하트 칵테일>>은 아시는 분은 아마 아시겠지만 80년대 일본 버블 전성기를 상징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모든게 번쩍번쩍하고 현란하며, 등장인물들은 다들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 모두 사랑 이야기만 하는 그런 세계관이지요. 미래와 꿈도 중요하지만 눈 앞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다시는 올 수 없는 화려한 청춘 찬가랄까요? 이를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현란한 색채로 구현했으며 등장인물이 모두 성인이라는 점에서 어른들을 위한 그림 동화같은 작품입니다.
발표 당시 일본에서는 높은 인기를 얻었고 덕분에 작가도 유명 일러스트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뮤직비디오 같은 애니메이션도 발표되었는데 작품과 아주 잘 어울렸어요. City-pop과 일맥상통하기도 하고요.

다만 현지에서의 인기에 비하면 국내에서의 성과는 보잘 것 없습니다.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아는 작품이지요. 그래도 2권 분량으로 국내에 정식 소개된 적이 있다는게 고마울 뿐입니다. 이를 구입해서 현재까지 소장하고 있는건 거의 제가 유일하지 않나 싶지만요.
그러나 출간 자체가 의의가 있었을 뿐 책의 완성도는 그닥입니다. <<하우 투 러브>>라는 기묘한 제목 변경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와타세 세이죠의 색감을 살리지 못한 탓이 큽니다. 채도가 낮은 색감때문에 칙칙한 느낌이 강하거든요. 아마 국내 인쇄 기술이 턱없이 부족했거나, 제작비 문제가 컸었겠죠. 다시 나온다면 인쇄용 CMYK보다는 모니터의 RGB가 화려함을 살리기는 더욱 좋은 만큼 풀 컬러 e-book으로 나오는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80년대를 회고하며 가끔 뒤적거리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화려함은 빛이 바랬지만 청춘과 사랑의 추억은 영원한 법이지요. 그런 점에서는 칙칙한 색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2019/10/06

소라는 까먹어도 한 바구니 안 까먹어도 한 바구니 - 권오길 : 별점 3점


이전에 읽었던 <<달팽이 더듬이 위에서 티격태격 와우각상쟁>>의 저자이신 권오길 님이 쓴 후속작.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생물과 그와 관련된 우리말, 속담을 재미나게 설명해주고 있는 구성입니다.

한 꼭지당 4~5페이지 정도 밖에 안되는 분량 안에서 생물학과 교수로 근무했던 경력답게 요점을 잘 짚어줍니다. 처음 알게 된 사실도 굉장히 많고요. 개구리, 올챙이가 친족을 안다는 이야기처럼요. 한 수조에 서로 다른 두 어미에서 태어난 올챙이를 뒤섞으면 두 패거리로 나뉜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이야기는 과연 허튼 이야기가 아닌 셈이지요. 참고로 이는 근친교배를 막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구리 편에서 더 인상적인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냄비 속 개구리 신드롬', 즉 찬 물에 개구리를 넣고 물을 천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그대로 있다가 죽고 만다는 이 설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개구리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네요.
문신의 원리, 왜 레이저로 문신을 지지면 지워지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몸 속에서 이물질을 거대 세포가 라이소자임 효소로 녹여버리는데 문신 먹물의 탄소 알갱이는 그대로는 너무 커서 처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레이저로 태우면 탄소 입자가 작은 가루로 부서져서 거대 세포가 처리하는 방식이지요. 저는 레이저로 태워서 없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송편을 찔 때 솔잎을 까는 이유는 단지 향 때문이 아니더군요. 솔잎에 든 파이토알렉신이라는 항생 물질이 송편이 상하는걸 막아주기 때문이랍니다.
금슬의 대명사인 원앙도 번식과 생존에 유리한 다종 재배라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다양한 수컷과 관계를 맺는다는 이야기도 신선했어요. 원앙 새끼들의 유전자 검사 결과 무려 40%가 아비의 유전자와 달랐답니다.

우리말 관련 내용도 배울만한 게 많습니다. 흔하게 쓰는 "쑥맥" 이라는 표현은 "숙맥불변", 즉 콩(숙)인지 보리(맥)인지도 구별하지 못하는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을 이르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쑥맥"은 뜻이 조금 바뀌어서 약간 어리버리하고 숫기없는 그런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많이 쓰이는데 앞으로는 말 조심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당장은 좋지만 장래에는 해가 된다는 뜻의 속담입니다. 곶감은 맛있지만 대장의 수분 흡수를 돕는 타닌이 많아서 과다섭취하면 변비로 고생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원들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많이 남네요. 미꾸리라는 이름의 어원부터 그러합니다. 미꾸리나 미꾸라지 모두 아가미로 호흡하지만 물 속에 산소가 적어지면 물 위로 올라가 입으로 공기를 마시고 내려갑니다. 공기가 창자로 흡수되고 발생한 이산화탄소는 항문으로 방울방울 내보내는 창자 호흡을 하고요. 이를 본 사람들이 밑이 구리다고 하여 '밑구리'라고 부른게 어원이라고 합니다.
'곤드레만드레 취했다'는 표현을 곤드레 나물에서 따 왔다는 추측도 그럴듯합니다. 엉겅퀴의 어린 잎줄기가 곤드레인데 이를 한소끔 데치고 나면 숨 죽어 푹 우그러든 모습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지요. 두루미라는 이름도 순 우리말로 '뚜루루루 뚜루루루' 우는 소리에서 따왔다고 하고요.
'갈등'은 당연하게 써 왔지만 그 어원에 대해 궁금해 했던 적이 없었는데 칡과 등나무라는 뜻이라네요. 칡넝쿨과 등나무 덩굴이 서로 얽힌 것에 따온 말로 복잡하게 뒤엉켜 적대시하거나 불화를 일으키는걸 비유하는 말이랍니다.
순대국밥집에서 흔히 보는 '오소리감투'라는 말의 유래도 재미납니다. 돼지 위장이 워낙 맛이 좋아서 손질하다보면 누군가가 슬쩍하여 사라지기 때문에 '오소리'라고 비유했다는군요. 한번 없어지면 도무지 행적을 알 수 없다는 뜻으로요. '감투'는 말 그대로 맛 좋은 '감투'를 의미하고요. 이외에는 돼지 위장의 두툼한 빵덕모자같은 겉모습에서 '오소리 털가죽으로 만든 벙거지'인 '오소리감투'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답니다.
참나뭇속 참나무 육형제 명칭 모두 어원이 기발합니다. 나무껍질에 깊은 골이 파여 있어 '골 참나무'라고 부르던 굴참나무, 잎이 가장 작아 '졸병 참나무'라 부르던 졸참나무, 가을이 되어도 잎이 오래 달려 있어 '가을 참나무'라고 부르던 갈참나무, 나무꾼이 짚신 바닥이 헤지면 잎을 짚신 바닥에 깔아 신었다는 신갈나무, 잎사귀로 떡을 싸 놓으면 떡이 상하지 않고 오래 간다고 하는 떡갈나무, 임진왜란 때 피난간 선조가 수라상에 오른 도토리묵에 반해 자주 찾게 되어 밥상에 자주 오른다는 '상술'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상수리나무 모두 재미있어요. 아, 대단합니다.

이렇게 재미와 지식, 두마리 토끼를 잡고 있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분량에 비하면 도판은 부실하고, 심지어 몇몇 이야기는 설명도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떡두꺼비 같은 아들"에서 왜 탐스럽고 암팡지게 생긴 갓난 남자아이를 떡두꺼비에 비유했는지 설명해주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좋은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청소년들에게 특히 권해주고 싶네요.
덧붙이자면, 저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이를 좀 각색하여 아이들 대상으로 한 만화나 웹툰으로 만들면 훨씬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1950~60년대를 배경으로 가난하지만 정이 넘쳤던 우리네 시골과 장난꾸러기 아이들, 그리고 경성제대에서 공부했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을 얻은 '인테리'가 시골 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하여 이런저런 지식을 전해준다는 식으로요. <<검정고무신>>의 학습만화 버젼처럼 그리면 좋을 것 같은데, 유능한 작가들의 도전을 기대해봅니다.

2019/10/04

칼과 책 - 둥핑 / 이준식 : 별점 3점

칼과 책 - 6점
둥핑 지음, 이준식 옮김/글항아리

부제는 '전쟁의 신 왕양명의 기이한 생애'. 중국 명나라의 철학가이자 정치가, 무관이었던 왕양명에 대한 전기입니다. 양명학에 대해서 이름은 들어보긴 했지만 왕양명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가진 지식이 전무하였는데 형이 강력하게 추천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책에 소개된 왕양명의 간략한 생애는 다음과 같습니다. 왕양명은 유력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어렸을 때 부터 '성인'이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주희의 '격물치지'를 실현하기 위해 대나무를 관찰하다가 지병을 얻었을 정도로요. 그러다 벼슬길로 나서 말단 관리로 일하던 중, 정의를 위해 나서다가 곤장을 맞고 죽기 직전에 살아난 뒤 오지로 발령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암살자의 추격을 겨우 뿌리치고 도착한 임지 용장에서 '도'를 깨우칩니다. 이를 통해 사물 속에 하늘의 이치가 담겨있다는 격물치지가 아니라 모든 사물의 이치는 애초부터 내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있다는 가지고 있다는 '심학'이 수립되게 된 것이지요. 뒤이어 주희가 이야기한 '지선행후', 즉 '먼저 안 다음 실천해야 한다'가 아니라 '알기보다는 실천하는게 훨씬 중요하다'는 '지행합일설'이 태어나게 되고요.
왕양명은 사상적 기반을 수립한 귀양 생활 뒤 조정의 명을 받아 이런저런 곳에서 반란군을 토벌합니다. 그것도 어려운 상황에서 한 번도 지지 않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요. 이는 모두 '지행합일'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으로 익혔던 군사적 이론과 지식을 곧바로 실전에 적용한 셈이니까요. 또 실전에서 익힌 지식을 얻어 더 발전하게 된건 '행'이 '지'로 전이된 것으로 '지'와 '행'이 상호 보완적으로 부단히 통일되어 간 것입니다. 과연 '지행합일설'의 창시자다운 모습이에요.
그리고 말년에 이렇게 얻은 경험과 지식을 통틀어 제시한 결과가 바로 '양지설'입니다. 양지는 개개인 마음 속에 원래부터 존재해서 후천적 학습이 필요없는, 우리 본심이며 영혼의 본래 모습이자 본래 상태입니다. 그러나 살면서 종종 은폐되곤 하니 이를 발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게 골자이지요. 양지는 거울과 같아서 오래 사용하거나 닦지 않으면 더러워지기 마련이니까요. 이 양지가 '지행합일'의 '지'를 대체함으로서 영혼과 마음, 사물과 이치에 대한 관계가 완성됩니다.
하지만 양지설 제시 이후 얼마 못가 대규모의 반란과 도적떼 소탕 이후 사망하고 맙니다. 살아 생전에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사후에라도 큰 명성을 얻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겠네요. 중국에서는 무장, 관료, 철학 세가지 분야에서 불후의 업적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삼불후'라고 불리운다니 대단합니다.

이러한 왕양명의 삶과 철학을 소설처럼 구성하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아요. 일단 찬양이 너무 지나칩니다. 그리고 책의 절반 가까운 분량이 왕양명의 화려한 군사적 업적을 다루고 있는데 관련된 도판이 전무하다는 점도 문제고요. 최소한 간단하게나마 지도 정도는 수록하는게 좋았을텐데 말이죠. 아무리 못해도 가장 큰 전과인 영왕의 반란을 진압했던 이야기 정도는 좀 더 잘 알려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잘 몰랐던 인물, 역사에 대해 알게된 건 분명한 수확입니다. 양지설은 지금 시점에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은, 좋은 이야기라는 것도 분명하고요. 제가 비록 성인을 꿈꾸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 부끄럽게 살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