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역사 - 설혜심 지음/휴머니스트 |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의 미시사 서적. 제목 그대로 '소비' 라는 행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서부터 시작하여 소비를 통해 파생된 다양한 산업과 문화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한 편, 한 편씩만 읽으면 당대 특정 상품과 문화, 유행 등의 역사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는데, 대부분의 이야기가 남성보다 뒤떨어지며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성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와 유색인종과 제 3세계를 비하하면서 서구 중심의 사고 방식이 확립되는 과정이 여러가지 상품과 유행을 통해 비롯되었다는 걸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양복의 탄생 편에서는 '맞춤복'이 '기성복' 으로 전환한 산업 행태에서 비롯되었다는 내용이 중심입니다. 이를 통해 명품을 저렴하게 모방한 복제품이 대거 유통되어 평범한 사람들도 쇼핑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죠. 18~19세기 이후 영국 남성복이 수수하고 검소한 형태로 발전한 덕분이기도 한데 이에 대한 반동으로 여성복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여성을 성공한 남성의 트로피화 하는 '수수한 남성과 하려한 여성' 개념입니다. 트럼프와 멜라니아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 보면 당연한 흐름인데, 문제는 일과는 무관해 보이는 갖가지 화려함을 추구하게 된 여성성을 '사치' 개념과 결합하여 여성들을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 배제하는 일종의 사고가 굳혀졌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여자들이 '생리 증후군' 등 여성이기 때문에 일어난 범죄라고 주장했다는 것도 일종의 차별입니다. 단지 백화점의 탄생으로 도둑이 늘어난 것에 불과한데 말이죠. 그런데 이 개념도 극히 최근까지, 아무런 의심없이 언급 및 인용되어 왔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 역시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고 받아들여 왔었는데 반성해야 겠네요.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은 '백색성'을 강조하는 비누, 제 3세계를 희화화하고 왜곡하여 정보를 전달한 당대 유행했던 각종 트레이딩 카드들 등을 통해 소개되됩니다. 그러나 여성성을 폄하하는 흐름과는 다르게 이 쪽 영역은 책 후반부에서 노예제를 통해 생산된 설탕 불매 운동이라던가, '미시시피 버닝' 등으로 촉발된 흑인의 불매 운동이 함께 소개되고 있어서 답답함이 조금은 덜해서 다행이에요. 미시시피에 모든 소비자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월마트가 들어선게 긍정적인 변화의 증거로 받아들여진다는 결말은 너무 소박해서 조금 씁쓸하기도 하지만요.
지금도 통용되는 문제가 발생된 이유를 역사적으로 설명해 주는 부분들도 인상적입니다. '과시적 소비' 가 등장한 배경이 그러합니다. 산업화된 공동체에서 명성은 재력에서 나오기 때문으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건 '어디에 사는가' 라고 합니다. 18세기부터 영국에서는 어디에 사는지로 사람을 구별했다는데, 셜록 홈즈 이야기에도 슬럼가, 가난한 동네 이야기는 항상 등장하곤 했었죠. 우리나라에서 휴거 (휴먼시아 거지) 어쩌구하는 행태의 기원이 이렇게나 오래되었다니 여러모로 속상합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가는 행위를 통해 재력을 과시했기 때문에 좋은 옷 한 벌은 필요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번듯한 옷 한 벌과 부츠는 빚을 내서라도 사야 했다는데 이는 1938년 조사에서 노동계급이 가장 큰 돈을 쓰는 항목이 남성복 - 부츠 - 석탄 - 조합 가입비 순이었다는 사실로 증명됩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경쟁해야 하는 사회가 이미 18세기부터 이어져왔다니 이쯤되면 벗어날 수 없는게 아닌가 싶어 무섭기까지 하네요.
그 외에도 그냥 소재 자체가 흥미로와서 재미있게 읽히는 이야기들도 많아요. 돌팔이 매약에서 시작된 다양한 특허약들 이야기가 좋은 예겠죠. 당대 (18~19세기) 영국에서 이런저런 특허약 소비가 유행했다며 여러가지 특허약들과 관련 에피소드에 대해 소개해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유명한 특허약이었던 토머스 비첨의 '비첨스 필'은 어떤 약인지 무척 궁금해지네요. 아울러 영국인에서의 이런저런 약이 유행했다는 말에서는 각종 추리 소설 등에서 이런저런 약을 잔뜩 챙겨먹는 등장인물들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주로 괴퍅한 노처녀, 노파들이 많았는데 이 역시 여성성을 폄하하는 흐름의 하나였을까요?
재봉틀이 세계 최초로 대량판매되었던 표준화된 기계이자 복잡한 내구재라는 개념도 인상적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가전기기'의 효시라는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실로 그럴듯하네요. 지금도 가장 유명한 브랜드인 '싱어'가 가장 뛰어난 제품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할부제와 방문 판매제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는건 지금 시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커 보입니다. 인터넷 셀럽을 통한 PPL같은게 좋은 예겠죠? 재봉틀에 대한 반대가 고용 문제와 의학 담론 두가지 영역에 나타났는데 이는 지금과 같다는 말에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요.
그 외에도 튀르크 옷의 유행이라던가, 저도 궁금했었던 온천의 유행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현대 쇼핑몰의 역사에 대한 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우편 주문 카탈로그가 이미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대성공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이런 글들이 400페이지 넘는 분량에 빼곡하게 실려있는데 편집도 최고 수준이고 뒷받침하는 도판들도 최고 수준이라 만족도가 아주 높습니다. 저자인 설혜심 교수님의 글은 이전에 읽었던 <<그랜드 투어>> 처럼 읽고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 있기도 하고요.
백화점의 탄생으로 소비 행태가 변화했다는 이야기는 <<취미의 탄생>> 이라는 책에서 이미 접해본 바 있으며, 영국의 대박람회와 '수정궁'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이미 많이 소개된 등 다른 책, 컨텐츠와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는 단점이 있지만 책의 가치를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이런 류의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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