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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9

매스커레이드 이브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매스커레이드 이브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한국 한정 추리 소설의 제왕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매스커레이드 호텔>> 시리즈 두 번째 작품. 몇 년 전 전편을 읽고 호텔을 무대로 한 일상계 추리 단편이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는 평을 남겼는데 작가도 같은 생각이었던 걸까요? 이번에는 전편 시점에서 수년 전을 무대로 하고 있는 중, 단편집입니다. 전부 4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상계와 강력 사건이 적당히 섞여 있는 구성인데 특징이라면 모든 이야기가 사람들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으로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낸다는 점은 좋지만, 추리적으로는 영 별로라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따라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루키 형사의 등장>> 편을 제외하면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주기 힘든,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시리즈보다는 못한 범작입니다. 작가의 대단한 팬이 아니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은데,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면도 제각각>>
전편의 히로인 야마가시 나오미가 신참 호텔리어로 등장하는 작품. 업무 때문에 투숙한 옛 연인 미야하라가 갑자기 도움을 요청하여 그의 불륜 상대인 니시무라 미에코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전편의 주역 중 한 명인 나오미가 신참 호텔리어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그녀의 과거사라던가, 신참으로서 호텔리어의 사명감을 이야기하는 부분 등 전반적으로 젊음이 한껏 느껴지는 싱그러움은 좋았어요. 주제 의식을 잘 드러내는 결말도 괜찮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미야하라의 보스인 전 프로야구 스타 "대장" *오야마가 실제로 불륜을 저지른 장본인이라는 걸 알아내는 장면은 그럴듯하지만, 미에코가 현재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는 부분은 나오미가 우연히 본 룸서비스 주문 내용을 통한 것인데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루키 형사의 등장>>
전편에 나오미가 등장하니 이번에는 당연히 닛타 형사가 등장할 차례죠? 닛타가 신참 형사일 때 맡았단 요식업자 거부 다도코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 사건만 놓고 보면 범인이 운이 좋아서 당장 체포되지 않은 것 뿐, 경찰 수사가 조금만 더 이루어졌더라면 금방 체포되었으리라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다도코로 미치요의 요리 학원 수강생들에 대해 수사만 진행했어도 요코모리 히토시를 유력 용의자로 끄집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죠.

하지만 범행 현장의 특수성에 따라 범인이 자전거를 탔다고 추리한다던가, 현장의 담배 꽁초는 위장이고 어딘가에서 입수한 것이라는 추리는 꽤 그럴듯 했으며, 무엇보다도 다도코로 미치요가 남편 살해를 사주한 진짜 악녀라는게 드러나는 마지막이 아주 괜찮았어요. "입술 틈새로 분홍빛 혀를 살짝 내밀었다. 그 표정은 사냥감을 노리는 뱀을 연상하게 했다" 는 일본식 팜므파탈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묘사와 함께 남자를 조종하여 완전 범죄를 성공시키는 모습은 한 편의 등장으로 그치는 게 아깝다 싶을 정도였거든요.
다도코로 미치요 캐릭터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한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가면과 복면>>
코르테시아 도쿄 호텔에 유명 신인 복면 작가 다치바나 사쿠라가 작업 때문에 투숙하고, 그녀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오타쿠들이 몰려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이야기.

그런데 핵심 수수께끼인 다치바나 사쿠라의 정체가 중년 아저씨가 아니라 그녀의 딸이라는 건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다는 건 문제에요. 때문에 2 명이 투숙한 상황이라는 진상을 쉽게 눈치챌 수 있고, 중년 아저씨의 외근과 편집자와의 통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의 소소한 수수께끼 역시 특별한 게 없거든요.

한마디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소품, 쉬어가는 이야기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호텔 퀸시>> 의 또 다른 에피소드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매스커레이드 이브>>
닛타는 공대 교수 오카지마 살인 사건 수사를 위해 교통과에서 지원나온 젊은 여경 호즈미 리사와 팀을 꾸린다.
유력한 용의자는 특허 사용에 따른 거대 이권이 얽힌 준교수 난바라인데, 그는 혐의를 전면 부정하지만 정작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는 제시하지 못한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핑계와 함께.
사건 당일 난바라가 투숙한 호텔에서 일하는 나오미는 수사를 나온 호즈미 리사에게 자신의 추리를 들려주는데...


표제작이자 작품집의 핵심인 150여 페이지에 이르는 중편. 

하지만 대미를 담당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던 작품입니다. 담고 있는 이야기에 비하면 분량도 너무 길고요.
일단 범인이 난바라라는게 너무 명확해서 왜 구속 수사를 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또 "교환 살인" 은 지금 시점에서는 그리 특별한 아이디어도 아닐 뿐더러, 난바라와 함께 투숙한 여성이 하타케야마 레이코라는 게 밝혀지면 구태여 교환 살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쉽게 해결될 사건이라는 점에서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이전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경찰 내부 DB에 남아 있지 않을리가 없잖아요? 경찰 내부에서 레이코가 유력한 용의자였던 이무라 유리 사건만 짚어내면 이 사건을 난바라와 엮어 생각하는 건 추리도 뭐도 아니죠.
레이코 일당이 왜 약속한 날이 아니라 그 전날 범행을 저질렀는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합니다. 알리바이가 너무 완벽하면 의심을 살 수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죠. 이럴거면 차를 옮겨 하루의 시간을 벌 필요도 없었어요. 그냥 두었더라면 호즈미 리사의 말대로 지갑을 가져간 강도의 소행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아울러 난바라가 투숙했던 오사카 호텔에서 근무하던 나오미가 난바라와 레이코를 엮어서 생각하게 되는 향수 이야기는 작위적이기 짝이 없어요. 짙은 향수 냄새로 두 명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는 설정이야 말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타월을 무심코 가지고 나가다가 돌려준다는 건 솔직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닛타 형사와 함께 짝을 이룬 명랑하고 단순하면서도 의욕 넘치는 호즈미 리사 캐릭터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긴 했습니다. 문제라면 <<춤추는 대수사선>> 의 아오시마 (오다 유지)와 별로 다를게 없는, 수사 본부에 지원 나온 교통 경찰 캐릭터라는 것이죠. 그동안 너무 많이 보아 온 탓에 읽다보니 식상해 지더라고요. 차라리 호즈미 리사의 단순한 추리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는 식으로 끌어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죠. 이래서야 '캐리어'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패배 의식만 심어줄 뿐입니다.

이렇게 단점이 더 도드라지는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나오미 - 닛타 컴비 시리즈로 만들기 위한 억지만 없었더라도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2018/04/28

클래식 음반세계의 끝 - 노먼 레브레히트 / 장호연 : 별점 4점

클래식 음반세계의 끝 - 8점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장호연 옮김/마티

클래식 음반 ("음악" 이 아니라!) 의 역사의 상세한 기록과 클래식 음반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명반 100선과 똥반 20선을 소개하는 클래식 음반 관련 미시사 - 가이드 북. 책 소개를 보고 관심이 가던 차에 알라딘 중고 서점을 통해 구입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전부 40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음반 역사와 명반, 똥반 소개가 정확하게 반, 반입니다.

이 중 클래식 음반의 역사 부분은 요약하자면, '녹음' 이 실황 연주와 구별되는 독자적 음악 행위로 거듭난 1920년 빌헬름 켐프의 연주에서부터 시작하여 레코딩 산업이 기업 체제가 되어 EMI, RCA, CBS, 도이치그라모폰, 데카, 필립스라는 6대 메이저가 카라얀으로 대표되는 여러 천재들과 시장을 주도했던 1950~60년대 전성기와 팝 음악의 득세 및 후계자들의 부재로 서서히 몰락해가는 70~80 년대, 디지털 음원 발매와 '크로스오버'로 짧게 찾아온 80년대의 마지막 돈잔치, 그리고 90년대 몰락 이후 현재에 이르는 역사인데 이 과정이 정말로 손에 잡힐 듯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역사서, 미시사 서적으로 보아도 무방한 수준이에요.
그리고 새로운 시장이 시작되어 이게 확대되고, 메이저 회사와 그에 속했던 천재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승부를 벌이다가 몰락해 버린다는 내용은, 신대륙을 발견한 여러 나라들이 정복을 위해 나라를 대표하는 영웅들과 다양한 신무기로 정면 승부를 벌이고, 서로 연합하기도 하며 싸우다가 같이 멸망한다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군웅극' 못지 않은 재미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울러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했던, 클래식 음악 몰락 이유도 많은 교훈을 전해 줍니다. 생각해보니 현대에 클래식 음악이 몰락한 건 당연해요. 이미 대단한 해석이 존재하는 고전을 다시 반복하는 건 무의미하니까요. 이 책에 따르면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는 베토벤 5번 음반은 276 종이나 된다고 하니... 여러 천재 예술가들이 새로운 시각을 찾으려 노력하고는 있겠지만 이를 구태여 새롭게 비용을 들여 제작할 만한 시장은 이미 아닌 것이죠. 클래식 음반 산업을 궤도에 오르게 만든 토스카니니가 새로 작곡된 작품을 연주하고, 하이페츠나 메뉴인, 호로비츠, 루빈슈타인이 전성기 때 프로코피예프, 라흐마니노프, 시벨리우스, 버르토크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했던 것처럼 현대에도 음악이 계속 작곡되어 흥행하지 않는 한 시장은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은 끝없는 '새로움' 의 추구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하게 만듭니다.
물론 '영화 음악' 이라는 비슷한 시장이 아직은 존재하기는 합니다만 영화 음악도 노래 없는 스코어 만으로는 시장이 굉장히 제한적일 뿐 아니라 '죤 윌리엄스', '엔니오 모리꼬네', '한스 짐머' 등 영화 음악 최전성기에 등장한 작곡가들 이후 등장한 유명 신진 작곡가가 딱히 없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상당한 위기가 아닐까 싶군요.

이러한 음반 역사 뒤에 이어지는 명반 소개도 재미있습니다. '최고의' 음반이 아니라 음반 산업이 발전하는 데 영향을 끼친 음반 대상이라는 선정 기준이 명확하고 엄격한 덕에 익히 알고 있는 고전 음악가가 아니라 <<바버의 녹스빌>>, <<수크의 아스라엘 교항곡>>, <<바일의 베를린과 미국의 극장 음악>>,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알캉의 피아노 음악>>, <<코릴리아노의 교향곡 1번>> 같은 비교적 현대에 발표된 곡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게 특징이죠. 심지어 초기 영화 음악의 거장 <<코른골트의 바다매>> 까지 포함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정말 최고 중의 최고인 완벽한 음반의 소개가 좀 부족하지 않나 싶은 생각은 듭니다만.... (대표적인 예로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카라얀의 앨범이 한 개도 없습니다!)
소개도 맛깔스럽게 잘 되어 있어 모든 음반들이 관심이 가지만 그 중에서도 유시 비욜링과 로버트 메릴이 RCA 빅터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오페라 이중창>>,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차이콥스키 : 교항곡 4~6번>>, 뒤 프레가 런던 심포니와 함께 한 <<엘가 : 첼로 협주곡>>, <<루소 : 거리 음악 ; 블루스 밴드와 교향악단을 위한 세 개의 작품>> 등은 꼭 한 번 찾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똥반 소개도 재미있기는 마찬가지인데, 우리에게도 친숙한 안드레아 보첼리의 <<베르디 : 레퀴엠>> 처럼 연주나 노래가 잘못된 음반도 있지만 '기획' 자체가 실패한 음반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게 눈길을 끕니다. 스콜피언즈와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협연한 <> 대표적인 예인데, 저도 디자인 쪽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잘못된 기획이 모든걸 망친다' 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가치있는 내용이 가득하나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우선 클래식 음반의 역사 부분이 통사적으로 쓰여지기 보다는 주요 이벤트, 사건과 주요 인물별로 구성되어 조금 혼란스럽다는 점, 그리고 도판 및 국내 출시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현지화 측면이 부족하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그래도 클래식 '음반' 에 대해서 A 부터 Z 까지 알려줄 뿐 아니라, 이 책에 나온 말대로 클래식 '음반' 은 이제 거의 죽은 시장이라면 이 책의 내용이 새롭게 업데이트 될 일도 많이 없을테니 그야말로 바이블이라고 해도 무방하기에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클래식 '음반' 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한 거대 산업이 몰락하는 과정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8/04/26

중쇄 미정 - 가와사키 쇼헤이 / 김연한 : 별점 1.5점

중쇄 미정 - 4점
가와사키 쇼헤이 지음, 김연한 옮김/그리조아(GRIJOA)

'그리조아' 라는 1인 출판사가 있습니다. 대표 편집자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최근 업데이트는 거의 없지만 좋은 식견으로 바라본 출판 시장 관련 글들과 번역들이 마음에 들어 팬이 된 지 오래입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대표가 축구 관련 서적을 출간하기 위해 직접 세운 출판사라고 알고 있는데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직접 출간 열의를 보이는 열정에도 감동했고, 저 역시 독립 출판인의 꿈을 나름대로 꾸고 있어서 항상 응원해 왔습니다. 

하지만... 출간한 책 대부분은 제가 별 관심없는 축구 관련 서적이고, 일반 서적은 너무 많이 알려져 다 우려낸 사골 국물같은 미라이 공업 이야기 뿐이거든요. 제가 구입할 만한 책은 이 책 밖에는 없더군요. 출판에 대한 에피소드를 다룬 현직 출판인이 직접 그린 만화라고 하니 출판사에 대한 애정을 떠나 책 소개만으로도 호기심이 당겼고요. 그래서 비록 출간된지는 제법 되었지만 마침 생각이 나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럽습니다. 기본적인 작화라는게 존재하지 않는, '낙서' 에 불과한 그림에다가 단순한 이야기를 아무런 드라마도 없이 나열만 하고 있어서 아무런 재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줄거리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라는게 없어요.
그림도 별로고 재미도 없다면 현직 출판인이 전해주는 정보 전달 측면이라도 우수해야 하는데 그다지 건질게 없습니다. 인터넷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 단편적으로 토막토막 소개되는게 전부로 일본 역대 최고봉의 오자로 "견제 (犬帝) (메이지 대제의 오자)" 가 소개된 것 정도만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물론 책을 만들기 위한 기획과 편집, 만들어진 책의 유통 등 도서라는 상품 전체를 아우르는 실무에 대한 디테일은 꼼꼼한 편이며 "오자 없는 책은 없다, 마음에 담지 마라", "독자로부터 돈을 받는 시대는 끝나간다, 책을 위한 책을 편집해라", "내가 독자다, 팔리든 말든 알 바 아니다, 내가 읽고 싶다" 등등 편집자들이 자기 위안을 삼을 만한 대사는 가득하긴 합니다. 알라딘에서 별점 4점을 받은 이유는 이런 대사들로 동종업계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덕이겠죠.

허나 아쉽게도 저와 같은 일반인이 공감, 혹은 재미를 느끼기는 턱없이 부족한 결과물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리조아 출판사와 대표 편집자 분은 항상 응원하겠지만 이 책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도저히 추천하기 어렵고요, 비슷하게 출판 업계를 다루면서도 만화적인 재미, 꼼꼼한 작화 등으로 반향을 일으킨 <<중쇄를 찍자>> 를 읽으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팔리든 말든 알 바 아니더라도 상품으로서 최소한의 완성도라는건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2018/04/22

가문의 영광입니다.

원년 때부터 이글루 유저이지만 워낙 마이너해서 이런 투표와는 영 인연이 없었는데 2017 대표 이글루에 제 블로그가 올라가 있더군요!
추천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열심히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배트맨 : 가스등 아래의 고담 - 브라이언 어거스틴 외 / 이한 : 별점 3점

배트맨 : 가스등 아래의 고담 - 6점
브라이언 어거스틴 외 지음, 이한 옮김/세미콜론

스팀 펑크 세계관에 배트맨을 등장시켰다는 전설적인 작품으로 다양하게 미디어 믹스된 바 있고 얼마전 애니메이션도 출시된 표제작 <<가스등 아래의 고담>>, 그리고 동일 세계관 시리즈인 <<미래의 주인>> 두 편이 수록된 단편집.

읽으면서 스팀 펑크 세계관이 아니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왜 스팀 펑크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특히나 <<가스등 아래의 고담>> 은 그냥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하여 배트맨을 등장시킨, '팩션'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에요. 실존 인물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브루스 웨인의 스승으로 등장하고, 잭 더 리퍼 사건이 이야기의 핵심으로 전개되는 등 현실과 허구의 혼합이 절묘하거든요. 고담도 미국이기는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배트맨 역시 과학 기술과는 무관한, 순전히 단련된 육체에 의지하는 인물로 그려져서 현실감을 더해 줍니다.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자경단원" 이자 "탐정" 으로서의 배트맨이 그려지는 것 역시 현실적이면서 마음에 든 점이고요.

하여튼, 아이디어는 굉장히 탁월하고 작화도 독특하고 다 좋습니다만... 아쉽게도 작품의 완성도는 기대 이하입니다. 브루스 웨인이 잭 더 리퍼로 오인받아 체포되고, 감옥에서 정보를 끌어모아 진범을 알아내는 과정의 긴장감과 이야기의 설득력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브루스 웨인에게는 삼촌같았던 변호사 제이콥 패커가 진범임이 드러나는 과정이 특히 그러해요. 단순히 같은 연대 소속이었다는게 범인이라는 증거가 될까요? 또 제이콥 패커는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와 같은 연배인 노인으로 애초에 배트맨과 일기토를 벌인다는 것도 불가능하여 최후의 대결에서의 긴장감도 제로에 가깝습니다. 

결론적으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걸작이라는 명성에 비하면 실망이 더 컸던 작품.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보다는 함께 실려있는 <<미래의 주인>> 이 재미면에서는 한결 나아요. 우선 빌런 알렉상드르 르루아의 존재감이 출중합니다. 배트맨의 맞수로 부족함이 없어요. 적당히 미치기도 했고, 적당한 능력도 갖추고 있으니까요. 또 르루아가 비행선에 달린 장치를 이용하여 '태양의 불길'을 내리쳐 고담시에서 열리는 박람회를 비롯하여 고담시 일부를 불에 태워 백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음모의 스케일도 크고, 이를 막기 위한 배트맨과의 일기토도 적절하여 재미를 더합니다. 르루아의 파괴는 그와 손잡은 악덕 기업인이 있었다는 진상을 밝혀내는 '탐정' 배트맨의 활약과 그의 정체를 간파한 약혼녀 줄리 캐릭터도 볼거리였고요.
그리고 르루아의 비밀 무기도 "스팀 펑크 세계관의 배트맨" 이라는 말에 더 어울리는 소재였어요. 아주 초월적인 무언가는 아니고, 상식선의 무기로 보이긴하나 적당히 SF적이고 적당히 레트로한게 꽤나 잘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딱 한가지, 전형적인 미국 극화체 작화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작화만 <<가스등 아래의 고담>> 스타일이었다면 별점 5점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그래서 평균 별점은 3점. 유명세에 비하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예상치 못한 다른 작품 덕분에 평균 이상의 재미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세계관의 다른 시리즈도 보고 싶어집니다. 

덧 1 : 배트맨이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물이지만 분위기는 잭 더 리퍼 사건을 해결하는 범죄 액션 스릴러에 가까우므로 분류는 "추리 - 호러" 로 하겠습니다.
덧 2 : 아무리 풀 컬러지만 120페이지도 안되지만 14,000원은 좀 비싸네요. 한 페이지에 100원이 넘는 셈이잖아요? 이렇게 비싼 이유가 있는걸까요?

2018/04/20

지금은 더 이상 없다 - 모리 히로시 / 이연승 : 별점 1점

지금은 더 이상 없다 - 2점
모리 히로시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하시즈메의 별장에 약혼녀 마리코와 함께 방문하여 휴가를 보내던 공무원 사사키는 우연히 만난 니시노소노 양에게 푹 빠진다. 마침 니시노소노 양은 가출 상태로 사에키에게 가까운 역까지 이동을 부탁한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폭풍우 탓에 니시노소노 양도 별장에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는데, 그날 밤 밀실인 오락실-영사실에서 아사미 자매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모리 히로시의 대표작인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8편.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이야기의 대부분이 사사키라는 인물의 1인칭 수기 형태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완벽한 졸작입니다! 이유는 추리적으로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기 때문이에요. 거의 500여 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쌓아 올린 이야기와 설정을 모두 뭉개고 설득력이 전혀 없는 이야기를 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탓이죠. 동생을 살해한 언니가 자살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는 뭐 그렇다 칩시다. 그렇지만 구태여 좁은 창을 빠져나가면서까지 현장을 밀실로 만든 이유, 그리고 아사미 유키코가 동생 아스코에게 가발을 씌우고 옷도 바꿔 입힌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른 가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들이 정작 진상에서는 유키코가 흥분 상태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흘러가니 어이가 없어요. 이에 비교하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등장하는, 방을 밀실인 척 할 수 있는 사사키가 범인이다! 라는 추리 퀴즈 수준의 가설들이 진상보다 더 흥미로울 정도입니다. 

또 사사키의 수기 속에 등장하는 니시노소노가 모에가 아니라 모에의 고모 무쓰코였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과 반전도 사기에 가깝습니다. 보통의 서술 트릭물은 앞부분에서 진상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를 던져주는데, 이 작품 속에는 그런 단서는 휴대폰이 없고 HAM을 취미로 한다는 설정 외에는 없고, 오히려 이름이 "모에" 라는 잘못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리는 등 독자를 속이려는 노골적인 의도만 강해서 괘씸하기 짝이 없네요. 

사실 중간까지는 제법 읽을 만 했기에 더욱 아쉬움이 큽니다. 사에키 1인칭 시점의 모에 홀릭 서술 트릭은 도대체 사이카와는 어떻게 된거지? 라는 독자의 흥미를 불러 일으키며, 폭풍우가 밀어닥쳐 고립된 산 속 별장의 밀실 살인이라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써클 설정도 나쁘지는 않거든요.
또 "둥글둥글해졌다" 는 말은 약한 부분이 없어지고 강한 부분만 남은 강한 형태다라던가, 트럼프나 타로는 자신의 미래를 트집잡으며 기뻐하는 자학적 게임이라던가 하는 식의 모리 히로시다운 조금 삐뚤어진 사고 방식이 엿보이는 묘사들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딱히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거나 재미를 주지는 못하며, 약혼녀와 여행 온 주제에 18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어떻게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밖에 없는 사사키라는 인간 쓰레기 시점에서 이런 묘사가 많은 탓에 사사키의 비호감도만 상승할 뿐이라는 것도 문제죠.

한마디로 본격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에다가 서술 트릭물로 보기에는 트릭이라는 게 없는 사기극이라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작가 스스로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건 추리 소설이 아니라 연애 소설이다, 사사키는 글재주가 없어서 이야기가 완전 별로다, 운운하는 마지막 대단원의 작가 변명은 이 길고 긴 이야기를 읽은 독자를 더욱 허탈하게 만듭니다. 연애 소설이지만 추리 소설로도 완벽한 작품들을 쏟아낸 여사님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죠.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몇몇 설정은 시리즈 독자라면 그런대로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이 작품만 놓고 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기에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단연코 제가 읽은 이 시리즈 중에서는 최악이었습니다.

2018/04/15

기린의 날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기린의 날개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니혼바시 다리에서 건축 부품 제조 회사 간부인 아오야기가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된다. 유력 용의자 야시마 후유키는 도주 중 교통 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고, 경찰은 수사를 통해 아오야기가 근무하던 공장의 산재 은폐가 동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가가는 사건의 진짜 동기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수사를 계속하는데...

"살인 사건이란 게 암세포와 같아서 일단 생겼다 하면 그 고통이 주위로 번진단 말이지. 범인이 잡히든 수사가 종결되든, 그 고통에 의한 침식을 막기가 어려워" - 가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장편으로 니혼바시 다리 중간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 중년 남성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읽기 편하다는 장점이 돋보입니다. 5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임에도 읽는 게 굉장히 쉽기 때문으로 스토리텔러,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할 수 있죠. 독자의 흥미를 계속 잡아 끄는 전개가 이러한 흡입력의 비결입니다. 피해자 아오야기가 왜 사건 현장을 방문했는지? 아오야기가 칠복신 신사 순례를 한 이유는? 아오야기가 신사 순례 때 종이학을 접어 바친 이유는? 종이학은 왜 노란색부터 접어서 바쳤는지? 식으로 수수께끼 하나를 풀면 뒤이어 다른 수수께끼가 등장하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밖에 없어요. 이런 전개는 오래 전 일간지 연재물을 연상케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잘 짜여진 이야기로 작가의 치밀한 구상과 계산이 돋보입니다. 아울러 이런 아오야기에 대한 수수께끼에 더해 유력 용의자 야시마와 아오야기의 관계는? 야시마는 어떻게 아오야기를 만났는지? 흉기인 버터플라이 나이프의 입수 경로는? 같은 야시마 관련 수수께끼 역시 마찬가지로 단계별 구성을 취하고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산재 은폐, 오래전 발생한 안전 사고의 은폐, 의도하지는 않은 아오야기 살인 사건 은폐라는 세 종류의 은폐가 핵심이 되는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결론적으로 비밀은 없고, 진실은 밝혀진다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히가시노 게이고스러운 결말도 마음에 들었어요. 역시나 흥행을 아는 작가다왔습니다. 이 사건과 함께 나름대로 성장해 나가는 가가의 모습도 볼 만 합니다. 아버지의 평소 이야기와는 다르게 죽을 때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여야 하는게 살아있는 사람의 의무라는 말은 아주 묵직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와는 다른, 전통적인 일본 미스터리 스타일이 엿보인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우선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물씬 난다는 점을 들고 싶네요. 도쿄를 무대로 한 작품임에도 <<신참자>> 의 무대와 같은 니혼바시 주변, 이른바 칠복신 신사 순례길을 바탕으로 한 탐문 수사가 길게 펼쳐지는 덕이죠. 도쿄 사는 사람들에게야 별 거 아니겠지만 다른 지방, 타국의 독자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이 충만한 묘사들이라 절로 눈이 가더군요. 가가의 추천 요리집과 요리도 몇 개 등장하는데 그 중 메밀 국수는 저도 꼭 한 번 먹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70년대를 주름잡았던 사회파 미스터리 느낌도 강합니다. 산재 은폐와 이를 피해자 아오야기에게 뒤집어 씌우는 회사의 행태, 그리고 이 때문에 살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가족에게 억울한 비난이 쏟아지게 만드는 잘못된 매스컴의 행태 묘사 때문입니다. 산재 은폐건은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겉핥기 식으로 짚고 넘어가는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만... 이를 깊숙히 파고들면 가볍고 경쾌하게 읽을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의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죠. 

이렇게 읽는 재미도 있고, 잘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볼거리도 풍성한 작품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는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보다 약하다는 단점은 존재합니다.
우선 수사만으로 거의 모든게 해결되어서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어요.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경찰 소설, 수사 소설이라고 부르는게 어울릴 정도로 말이죠. 용의자 야시마가 도주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이유부터 경찰 포위망에 걸렸기 때문이고, 이후의 이야기도 추리보다는 수사 결과에 따라 진행될 뿐입니다. 피해자와 하야마의 접점이 공장이라는걸 알아낸 경찰이 탐문 수사를 갔을 때 동료가 몰래 고발해서 산재 은폐건이 부각되고, 아오야기와 하야마의 범행 당일 행적을 뒤쫓다가 결국 그 날 아오야기가 만난건 하야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는걸 알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가가와 마츠야마가 칠복신 신사 순례라는 피해자 행적 파악에 성공하지만 이 역시 추리라기 보다는 우직하게 발로 걸어서 얻어낸 결과물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사 과정도 재미가 없는건 아닙니다. 가가와 동행하는 마쓰미야가 "헛걸음을 얼마냐 하느냐에 따라 수사 결과가 달라진다" 고 이야기하는 만큼 발로 뛰는 꼼꼼한 수사의 디테일도 대단하고요.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하아먀가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으리라 추리하여 결국 하야마가 피해자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밝혀내는 과정은 독자에게도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짜릿하고 멋졌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은 진상입니다. 일단 범행 당일 피해자와 함께 있던 범인이 들통나지 않은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해요. 카페에서 무려 2시간 정도나 함께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등 노출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상황이니까요. 여기에 지나가던 하야마가 '우연히' 피해자가 죽어가는걸 보고 가방과 지갑을 들고 도주했다? 그러다가 교통 사고가 나서 의식 불명이 되어 죽었다? 이건 우주의 운이 다 모이기 전에는 불가능할 거에요.
피해자의 유품인 디카에 종이학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단 것도 의문이며, 핸드폰 기록만 확인하고 접속했던 블로그 URL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종이학 사진과 '기린의 날개' 블로그를 피해자의 행적과 함께 이으면 알 수 없던 피해자 행동의 의미가 드러나 사건 수사의 또다른 핵심 축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이를 짚어내지 못한 건 단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작가의 편의적 전개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는 칠복신 순례의 핵심이 '순산 기원' 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의 임신과 연계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고요.
피해자가 니혼바시 다리 기린 상까지 구태여 찾아가 죽은 것도 굉장히 작위적이에요. 이럴 힘이 남아 있었다면 도움을 요청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기린상" 을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억지가 너무 지나쳤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한 단계 성장하는 가가 형사의 모습은 마음에 들고 이런저런 볼거리는 많지만 추리 소설로서는 평범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재미는 확실한 만큼 시리즈 팬이시라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8/04/11

2017년 내 이글루 결산


이글루스와 함께 한 2017년, 무슨 일이 있었나요?

  • 2017년 hansang님은 이글루스에서 589번째로 글을 많이 쓰셨네요!
  • 포스팅을 가장 많이 한 달은 3월 이예요!
  • 내 이글루 댓글 상위 랭커는 홍차도둑 님이였어요!
더 자세한 이글루결산이 궁금하다면? GO

2018/04/08

술상 위의 중국 - 고광석 : 별점 2.5점

술상 위의 중국 - 6점
고광석 지음/섬앤섬

<<중화요리에 담긴 중국>> 이라는 책으로 음식과 관련된 중국 문화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보여준 고광석 작가가 "" 을 주제로 삼아 쓴 후속작. 전작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구입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책은 현재 판매되는 중국 현대 술을 망라하여 소개하는 '제 1부 중국의 술', 그리고 술과 관련된 다양한 고사와 일화를 소개해주는 '제 2부 술이 빚어낸 역사', 마지막으로 다양한 안주와 주법, 조리법 등을 소개하는 '제 3부 안주와 주법' 이라는 세 부분으로 크게 나뉩니다. 그 중 1, 3 부는 각각 100 페이지, 60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며 총 340여 페이지의 절반 이상이 제 2부에 속해 있습니다. 

우선 풀 컬러로 도판과 함께 현대 중국 술을 잘 요약하여 소개하는 1부는 아주 근사합니다. 황주와 백주, 노주와 같은 종류별 구분 및 술 별로 각각 상세한 유래 설명도 재미있고, 맛과 향기 등은 저자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기록하고 있어서 설득력이 높기 때문입니다. 
수십 종의 술들이 소개되고, 다 맛보고 싶지만 이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건 '마오타이주'의 유래입니다. 저는 그냥 모택동을 위해 만든 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원래부터 귀주 지역에 있던 향토주로 대장정 직전, 홍군이 귀주에 머물며 향토주를 마시며 혁명 의지를 불태운게 이후 국가 연회용 술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름도 모택동에서 따온게 아니라 '모태진' 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고요. 반대로 '수정방'은 유명세와는 다르게 1998년 수정가 양조시설 발굴 후 개발된 현대 술이며, '공부가주' 역시 공자 집안과 관계가 없는 현대 술이라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아, 이래서 공부가 필요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현대 술 말고 이 책에서 소개된 전통주를 더 찾아 마셔봐야겠네요.

그러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2부의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옛 고사에서 술이 등장한걸 무작위로 가져다 쓴 느낌이거든요. 그 술이 무엇인지, 안주로는 무엇을 먹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술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이야기까지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자객 예양이 주군의 복수를 위해 조양자를 죽이려하다 잡힌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술과 관련된 부분은 조양자가 예양의 주군 지백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썼다는 언급이 전부에요. 이게 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그 외의 이야기들도 춘추, 전국 시대와 삼국 시대, 한나라까지는 대부분 잘 알려진 일화들이며, 역시 술이 중요한 이야기들은 거의 없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다행히 워낙 분량이 많은 탓에 아예 건질게 없지는 않아요. 예를 들자면 "술 배는 따로 있다" 라는 말은 오대십국 시절 대주가였던 주유약이 유래라고 하네요. 작은 몸집의 그가 어떻게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는지 왕이 묻자 "술을 위해서 몸 안에 장이 따로 있다" 고 답한 게 그것이죠. 그리고 근대로 넘어온 이후의 이야기들은 비교적 새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열국지>>, <<삼국지>>, <<초한지>> 등 유명 고전을 벗어난 시점은 잘 모르는 저에게는 중국 근, 현대는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이니까요. 마오타이주를 국빈용 술로 정한 주은래를 소개하면서 그는 굉장히 꼼꼼하고 확실한 성격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화들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아마도' 라는 모호한 표현을 싫어했다는 것인데 저 역시 많은 반성이 되었습니다. 군 사령관 허세우를 술로 제압하고 주도에 대해 훈계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고요. 참고로 이 허세우는 소림사 출신으로 실제 무술 고수였다는데 좀 찾아봐야겠다 싶을 정도로 독특했습니다.
또 두보와 이백 등 술을 좋아했던 유명 인사들의 소개와 그들이 술을 마시고 술에 대해 쓴 시들도 좋습니다. 워낙 멋드러진 시들이니 당연하겠죠? 개인적인 베스트는 왕안석과 그의 친구 정협 사이에 오간 글로 "술이 임자를 만나면 천 잔도 적고, 뜻이 맞지 않으면 반 마디도 많다"는 것인데, 지금 읽어도 확실한 울림을 주는 멋진 글이에요.
아울러 제가 원했던, 술과 관련된 시시콜콜한 역사 속 잡학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두보가 이백을 기려 지은 시 중 '이백은 한 말의 술이면 시 백수를 짓는다' 고 읆었는데 이 한 말이 바로 두주 (斗酒)입니다. 우리도 흔히 쓰는 '두주불사' 의 두주도 같은 말이고요. 한 말, 두주는 열 되와 같은데, 시대에 따라 변화된 단위입니다. 주나라 때는 2리터였지만 당나라 때는 6리터, 청나라 때는 10리터죠. 이백의 주량은 당나라 기준으로 술 6리터, 돗수가 약한 소흥주를 마셨다 쳐도 어마어마합니다. 일찍 죽은게 이해가 될 정도에요.

마지막 3부는 그냥 유명한 안주거리, 음식 소개와 여러 요리에 쓰이는 한자어 소개로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부록같은 느낌입니다. 그래도 한자어 부분은 잘 기억해 두면 중국 여행갔을 때 유용하겠다 싶긴 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술상 위의 중국' 운운하며 술과 관련된 중국 역사와 문화를 논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분명 기대 이하고요. 술이나 안주의 정체가 명확하고, 정말로 술이 큰 역할을 한 이야기에 집중해서 더 자세하게 풀어내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가 아주 없지는 않고 나름 건질만한 부분도 있기에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중국 술과 요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번 쯤 읽어보셔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18,000원이라는 가격은 과한 감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8/04/07

명탐정 설홍주, 어둠 속 목소리를 찾아라 - 정은숙 : 별점 2점

명탐정 설홍주, 어둠 속 목소리를 찾아라 - 4점
정은숙 지음/푸른책들

다행동 지구대 설 경사의 딸인 홍주는 자칭 ‘봉봉 탐정단’의 수석 탐정으로 셜록 홈즈와 같은 명탐정이 되는 것이 소원인 씩씩한 소녀다. 여기에 홍주를 짝사랑하는 단짝 최완식과 그런 완식을 짝사랑하는 은정까지, 셋은 시험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엉터리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소량산을 찾았다가 유리 가게 할아버지의 집까지 들르게 된다. 그리고 방 안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한다. 하지만 병원으로 옮겨진 할아버지는 이내 숨을 거두고 만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자 다행동의 모든 주민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하고 홍주와 완식은 할아버지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남긴 별 그림, 방 안을 찍은 사진들, 홍주가 발견한 조그만 신문 조각을 단서로 범인을 잡기 위한 본격적인 수사에 나선다. 그리고 곧 유리 가게 할아버지와 다툰 적이 있는 중국집 배달원 수만을 용의자로 주목한다.
하지만 외상값을 받기 위해 할아버지의 집을 방문했던 완식의 엄마가 새로운 용의자로 떠오르면서 홍주와 완식의 우정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완식의 형, 완규의 도움으로 할아버지의 집을 방문했던 또 다른 인물, AS 기사 조영범의 존재가 밝혀지고 둘은 화해하게 된다.
조영범 기사가 범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 ‘목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과감히 그의 집으로 잠입하는 홍주와 완식. 하지만 조영범 기사에게 발각되어 살인 용의자의 인질이 되고 마는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10여 년 전에 있었던 살인 사건과 누명, 그리고 안타까운 복수의 사연이 밝혀진다. (웹사이트 줄거리 인용)


도서관에서 제목만 보고 관심이 동해서 읽게 된 책. 제가 잘 아는 다른 명탐정이 떠올라 도저히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11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2008년에 나왔던 전작의 후속작이네요.

초등학생 정도를 대상으로 한 아동 소설로 아동 소설답게 캐릭터들이 확실합니다. 시리즈로 소설이 나옴직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탐정, 개그 캐릭터, 조용한 정보 수집 담당자라는 탐정단 구성부터 괜찮습니다. 개그 캐릭터로만 보였던 완식이 절대 음감의 소유자이며, 저시력자 은정은 대신 청각과 후각이 발달했다는 부가 설정은 이야기를 보다 탄탄하게 만들어 주고 있고요. 또 머리 좋은 수재 형과 기동력과 행동력을 갖춘 중국집 배달원이라는 조력자들도 핵심 역할을 잘 해 주고 있습니다. 탐정 역인 설홍주가 가장 매력이 떨어질 정도이니 말 다했죠. 그래도 "소녀" 라는 의외성을 가져다주니 역시 기본 이상은 해 준달까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추리적인 재미도 상당합니다. 홍주 일행이 유리 가게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간 직후 무언가 이상하다는걸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에 연기력으로 문제가 많다는 아이돌 멤버가 주연인 드라마가 크게 틀어져 있다! 같은 시간대에 사극이 방영하는데! 라는 사소한 상황으로 홍주가 이변을 눈치채는 장면으로 설득력이 넘칠 뿐 아니라 지극히 한국적이고 '다행동' 이라는 동네에도 잘 어울리는 소박한 추리라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이야기가 흘러가면서는 재미가 많이 떨어집니다. 흔해빠진 복수극을 아동용으로 무리하게 끌고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이야기의 분위기, 그리고 배경 설정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서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본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추리라는게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할아버지가 죽어가면서 그린 4개 이상의 파란 별이라는 다잉 메시지는 작위적이기 짝이 없어서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사건의 동기가 된 "오성호" 라는 배를 알려주기 위해서라는데 별을 4개나 그릴 정도라면 이름을 쓰는게 더 빨랐겠죠. 어차피 사건 해결에는 우연히 홍주가 주워온 신문 쪼가리가 큰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구태여 등장할 필요도 없었던, 수수께끼를 위한 억지일 뿐이었습니다.

또 아이들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범인으로 의심되는 AS 기사 목소리를 녹음한다는 작전도 클라이막스를 담당하는 것 치고는 그다지 극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범행 후 길을 가던 은정을 도와주는 등 여러모로 괜찮은 사람으로 묘사된 AS 기사 조영범이 급작스럽게 아이들까지 죽이려는 살인마로 돌변하는 과정의 설득력도 너무 부족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좋은 캐릭터들을 활용하여 다행동에서 일어난 소박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일상계 물로 이야기를 꾸몄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봉봉 탐정단이 다음에는 좀 더 가볍고 친근한 사건들로 찾아와 주면 좋겠네요.

2018/04/06

히틀러의 비밀 서재 - 티머시 W.라이백 / 박우정 : 별점 3.5점

히틀러의 비밀 서재 - 8점
티머시 W. 라이백 지음, 박우정 옮김/글항아리

저자가 히틀러가 남긴 장서들이 보관되어 있는 의회 도서관, 공공 기록 보관소, 민간 보관소 등을 찾아다니며 직접 책들을 뒤져본 후 그가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그에게 영향을 끼쳤을 책들을 골라 소개하는 책. 
발터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책이 수집가를 보존하며 수집가가 소멸된 뒤에는 그 삶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데 이 말대로 히틀러의 장서를 통해 히틀러라는 인물의 실체를 알려주려는 시도 만큼은 무척 독특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게 이 리뷰를 쓰면서 제 책장을 쭉 훝어 보니, 정말 저라는 인물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는 책장이구나 싶거든요. 요리 관련 서적 20%, 역사서 20%, 과학 관련 서적 10%, 장르문학 30%, 만화책 20% 정도의 구성인데 이 블로그 리뷰 비율과도 비슷하고 실제 제 관심사와도 같으니까요. 장서가 수집한 사람의 취향과 관심사를 개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목차는 10개 항으로 나뉘며, 중요한 책도 10권이지만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책들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그런데 영향을 끼쳤거나 관심을 가졌던 책들이라고 하더라도 분류하자면 크게 네가지로 나뉩니다.
우선 히틀러의 사상과 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거나, 최소한 그러한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책들이 첫 번째입니다. 오스보른의 <<베를린>>, 직접 쓴 <<나의 투쟁>>, 그랜트의 <<위대한 인종의 쇠망>>, 권터의 <<독일 민족의 인종적 유형론>>, 그리고 그 스스로 자기 최면에 걸릴 수 있도록 한 스벤 헤딘의 <<대륙 전쟁 속 미국>> 등이 그러하죠.
두 번째는 히틀러라는 인물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혹은 히틀러에 대해 증언한 인물들이 관련된 책입니다. 히틀러의 정치 인생 초반에 그를 후원하고 이끌었던 유명 작가 에카르트의 <<페르 귄트>>, 유명 영화인 레니 리펜슈탈이 선물한 <<피히테 전집>> 이 대표적입니다. <<피히테 전집>> 은 리펜슈탈과 히틀러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목적 외에도 피히테라는 철학자가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도 약간이나마 설명된다는 점에서 첫번째 분류와도 조금 겹치네요.
세 번째는 책 자체가 목적이나 수단이 되어 히틀러 주변에서 움직인 경우입니다. 히틀러가 싫어했다는 로젠베르크의 <<20>>와 이에 맞서 나치와 카톨릭을 결합시키려 했던 후달의 <<민족사회주의의 기초>> 는 각각의 책 소개와 함께 실제 히틀러 주변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일화가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총통이 실무, 그리고 공부를 위해 읽은 책입니다. <<슐리펜>>,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전기와 각종 전쟁사나 전술 및 각종 무기 관련 서적 들입니다.

이러한 책들을 히틀러의 성장 과정 순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그가 점차 어떤 사상, 철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대상도 대략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역사서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죠.
항상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후대 역사가의 사료를 통해서만 접했던 히틀러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반가왔습니다. 접근 방식이 신선한 덕이죠. 용감하고 전우애 넘치는, 독일 제국에 충심을 다 한 군인, 생사의 기로에서 짧은 쾌락에 탐닉하지 않고 독서를 통해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은 노력가, 제대로 된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방대한 독서로 자신만의 이론과 세계를 완성하고 이를 토대로 누구와도 토론이 가능했던 천재의 모습이 정말 잘 드러납니다. 무기 관련 연감을 통독하여 후일 할더에게까지 한 방 먹였다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독재자이고 살인자라고 해도 16,000권이 넘는 장서를 읽고, 중요한 내용은 기억하고 담아두었다가 써먹었다니 흉내도 내기 힘든 일이잖아요?
세계와 맞 상대할 수 있었던 제국을 십 년 이상 철권통치한 인물이 보통 인물일리야 없겠지만 제 생각보다도 훨씬 뛰어날 뿐 아니라 엄청난 노력가라는 점에서 탄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성기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반신반인이더라고요.
* 참고로, 말도 안되는 민족주의에 우생학을 결합시켜 유대인을 학살한 잔혹한 독재자의 모습, 스스로를 유럽 대륙의 구원자로 생각한 과대망상 독재자의 모습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개되는 히틀러의 독서법도 아주 인상적이더군요. 책을 제대로 독파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특정 관념을 형성한 뒤, 책의 목차와 색인을 살펴 쓸만한 정보를 조금씩 모으는 방식으로, 때로는 결론부터 읽기도 하고요. 책의 내용을 깊숙히 이해하기보다는 필요한 정보만 집중적으로 습득하는 방식인데 논문을 쓸 때의 방식과 비슷하죠? 스스로의 목표나 관념이 명확하다면 나름 효율적일 수는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실제로 책의 목적, 그리고 광고 문구 - 1만 6000권 장서 중 단 열 권이 역사를 바꿨다 - 에 부합하는 내용인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소개되는 절반 가까이의 책들이 최상의 혈통인 아리아인의 혈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우생학적 관점, 이 때문에 유대인을 말살해야 한다는 반유대인주의가 형성된 것에 관련되어 있는 탓이 큽니다. 게다가 몇몇 책들은 히틀러가 소장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읽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에요. 이래서야 저자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책을 선정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죠. 그렇지 않더라도 특정 인물에 대해 구체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단편적인 정보일 뿐이고요.
물론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허나 이렇게까지 억지스럽게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었어요. 더 다양한 책들로 다양한 분석을 해 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임스 쿠퍼의 <<가죽 장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카를 마이의 <<사막 횡단>>, 스벤 헤딘의 모험담 등 평소 즐겼다는 모험 소설들도 여러 권 언급되는데, 이런 책들을 좀 더 분석하는 게 더 취지에 맞는 방향이 아니었을까요?
아울러 서재에 각종 추리 소설도 꽂혀 있었다는 증언이 있는데 과연 어떤 책이었을지 너무 궁금합니다. 최소한 제목 정도는 알려주는데 이것도 추리 소설 홀대의 하나인지 궁금하네요.

이렇게 취지에 딱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좀 어렵고 신뢰성 측면에서 부족한 점은 없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인물을 다른 각도로 들여다 보게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는 추천작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니 히틀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3.5점 입니다.

덧붙이자면, 책장이 소유자에 대해 대략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요새는 사람들이 정말 책을 안 사고, 안 읽는 시대죠. 모든 컨텐츠 소비가 스마트 폰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탓이 크겠죠. 앞으로 수십년 뒤에는 "스마트 폰 로그로 분석한 누구누구" 와 같은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8/04/01

넘버스 - 케이스 데블린, 게리 로든 / 정경훈 : 별점 2.5점

넘버스 - 6점
케이스 데블린 & 게리 로든 지음, 정경훈 옮김/바다출판사

<<넘버스>> 라는 미드가 있습니다. FBI 요원인 형 돈을 돕는 수학 천재 동생 찰리가 나오는 이야기죠. 이 책은 드라마 <<넘버스>> 속에서 활용된 다양한 수학 이론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범죄와 수학 이론의 결합은 제 영원한 관심사 중 하나이기에 큰 기대를 갖고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13개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모두 <<넘버스>> 속 이야기와 그 속에서 찰리가 설명해 주었던 수학 이론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해주는 구성입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핫존'을 찾는 이야기로 저도 방영 당시 시청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연쇄 살인범이 다음에 어디서 범행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는 없다, 스프링클러의 물방울이 다음에 어디에 떨어질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물방울이 튄 자리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면 스프링클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다!"는 이론으로 아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제가 <<넘버스>> 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이 에피소드가 아주 괜찮았던 탓이죠.
드라마에서는 이 수학 공식이 찰리의 창작으로 그려지지만 이 책을 통해 '지리적 프로파일링' 이라고 불리우는 이 기법에 대해 공식 원리에서부터 실제 범인 체포 사례까지 상세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넘버스 속 스프링클러 비유 역시 이 공식의 창안자 로스모가 즐겨 애용하는 비유라고 하네요. 

통계 분석을 범인 기소 및 각종 증명에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특히 이른바 '통계의 함정' 설명이 재미있었어요. 예를 들어 오클랜드에서 실행된 연구인데, 오클랜드 거주 인구의 35퍼센트만 차지하는 흑인이 교통 단속 건 비중에서 56퍼센트를 차지하는게 인종적 문제를 암시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고... 경찰은 우범 지역을 보다 높은 비율로 순찰하는데, 우범 지역에 소수 인종 집단이 더 많이 밀집하기 때문에 당연히 더 높은 비율로 단속에 걸리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도 집 근처에서 사고가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역시 집 근처라 마음을 놓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연히 집 근처에서 운전을 할 일이 가장 많은 탓입니다! 이런 조작 아닌 조작을 많이 접하는 게 현실인데, 앞으로는 어떤 통계인지를 좀 더 면밀히 따져보는 자세가 필요해 보입니다.

또 '연결 고리 분석' 은 최근 블록 체인 열풍과 맞물려 있는 부분이 있더군요. 데이터 마이닝, 신경망과 같은 친숙한 용어도 다수 등장하고 있고요.
변화의 조짐을 알아내는 '변화 시점 탐지' 이야기도 소개해 드릴만 합니다. 수학 이론보다는 <<넘버스>> 의 에피소드가 더 기억에 남기 때문입니다. 수학자인 세이버 매트리션이 선수 자료를 분석하다가 금지 약물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을 알 수 있는 수학적 감시 시스템을 고안했다는 이야기라는데 야구 팬으로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어요. 이 수학적 감시 시스템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현재 '증후군 감시' 등에 이용된다고 하는군요. 이 이야기는 '미래 예측'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수학은 테러리스트들의 위험 평가를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일종의 통계 - 확률론입니다. 새로운 자료를 얻을 때 마다 확률이 변한다는 내용인데 실제 범죄와 밀접하게 사용될 수 있어 보여서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수학적 시스템이 실제로 적용되어 운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러가 끊이지 않는걸 보면 과히 성공적인 시스템은 아닌 듯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발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지만, 완독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유는 어렵기 때문이에요! 이론과 설명 모두 어느 수준 이상을 넘어가면 (정확하게는 <<넘버스>> 속 에피소드와 관련된 소개 정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어요. 어떤 이야기는 설명하고 있는 수학 이론이 어떻게 드라마 속 사건 해결에 이용되는지 그 연결 고리마저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이 책의 문제라기 보다는 제 공부가 부족한 탓이지만... 일반인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또 내용의 많은 부분이 통계, 확률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도 조금은 아쉬웠던 부분이에요.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넘버스>> 에 활용될 정도로 괜찮은 수학 이론이 그만큼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려운 수학 이론을 되도록 쉽게 설명하려는 저자들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그래도 어려웠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저같은 일반인보다 수학에 대해 이해도가 높으신 분들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