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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6

히틀러의 비밀 서재 - 티머시 W.라이백 / 박우정 : 별점 3.5점

히틀러의 비밀 서재 - 8점
티머시 W. 라이백 지음, 박우정 옮김/글항아리

저자가 히틀러가 남긴 장서들이 보관되어 있는 의회 도서관, 공공 기록 보관소, 민간 보관소 등을 찾아다니며 직접 책들을 뒤져본 후 그가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그에게 영향을 끼쳤을 책들을 골라 소개하는 책. 
발터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책이 수집가를 보존하며 수집가가 소멸된 뒤에는 그 삶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데 이 말대로 히틀러의 장서를 통해 히틀러라는 인물의 실체를 알려주려는 시도 만큼은 무척 독특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게 이 리뷰를 쓰면서 제 책장을 쭉 훝어 보니, 정말 저라는 인물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는 책장이구나 싶거든요. 요리 관련 서적 20%, 역사서 20%, 과학 관련 서적 10%, 장르문학 30%, 만화책 20% 정도의 구성인데 이 블로그 리뷰 비율과도 비슷하고 실제 제 관심사와도 같으니까요. 장서가 수집한 사람의 취향과 관심사를 개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목차는 10개 항으로 나뉘며, 중요한 책도 10권이지만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책들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그런데 영향을 끼쳤거나 관심을 가졌던 책들이라고 하더라도 분류하자면 크게 네가지로 나뉩니다.
우선 히틀러의 사상과 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거나, 최소한 그러한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책들이 첫 번째입니다. 오스보른의 <<베를린>>, 직접 쓴 <<나의 투쟁>>, 그랜트의 <<위대한 인종의 쇠망>>, 권터의 <<독일 민족의 인종적 유형론>>, 그리고 그 스스로 자기 최면에 걸릴 수 있도록 한 스벤 헤딘의 <<대륙 전쟁 속 미국>> 등이 그러하죠.
두 번째는 히틀러라는 인물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혹은 히틀러에 대해 증언한 인물들이 관련된 책입니다. 히틀러의 정치 인생 초반에 그를 후원하고 이끌었던 유명 작가 에카르트의 <<페르 귄트>>, 유명 영화인 레니 리펜슈탈이 선물한 <<피히테 전집>> 이 대표적입니다. <<피히테 전집>> 은 리펜슈탈과 히틀러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목적 외에도 피히테라는 철학자가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도 약간이나마 설명된다는 점에서 첫번째 분류와도 조금 겹치네요.
세 번째는 책 자체가 목적이나 수단이 되어 히틀러 주변에서 움직인 경우입니다. 히틀러가 싫어했다는 로젠베르크의 <<20>>와 이에 맞서 나치와 카톨릭을 결합시키려 했던 후달의 <<민족사회주의의 기초>> 는 각각의 책 소개와 함께 실제 히틀러 주변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일화가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총통이 실무, 그리고 공부를 위해 읽은 책입니다. <<슐리펜>>,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전기와 각종 전쟁사나 전술 및 각종 무기 관련 서적 들입니다.

이러한 책들을 히틀러의 성장 과정 순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그가 점차 어떤 사상, 철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대상도 대략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역사서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죠.
항상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후대 역사가의 사료를 통해서만 접했던 히틀러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반가왔습니다. 접근 방식이 신선한 덕이죠. 용감하고 전우애 넘치는, 독일 제국에 충심을 다 한 군인, 생사의 기로에서 짧은 쾌락에 탐닉하지 않고 독서를 통해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은 노력가, 제대로 된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방대한 독서로 자신만의 이론과 세계를 완성하고 이를 토대로 누구와도 토론이 가능했던 천재의 모습이 정말 잘 드러납니다. 무기 관련 연감을 통독하여 후일 할더에게까지 한 방 먹였다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독재자이고 살인자라고 해도 16,000권이 넘는 장서를 읽고, 중요한 내용은 기억하고 담아두었다가 써먹었다니 흉내도 내기 힘든 일이잖아요?
세계와 맞 상대할 수 있었던 제국을 십 년 이상 철권통치한 인물이 보통 인물일리야 없겠지만 제 생각보다도 훨씬 뛰어날 뿐 아니라 엄청난 노력가라는 점에서 탄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성기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반신반인이더라고요.
* 참고로, 말도 안되는 민족주의에 우생학을 결합시켜 유대인을 학살한 잔혹한 독재자의 모습, 스스로를 유럽 대륙의 구원자로 생각한 과대망상 독재자의 모습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개되는 히틀러의 독서법도 아주 인상적이더군요. 책을 제대로 독파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특정 관념을 형성한 뒤, 책의 목차와 색인을 살펴 쓸만한 정보를 조금씩 모으는 방식으로, 때로는 결론부터 읽기도 하고요. 책의 내용을 깊숙히 이해하기보다는 필요한 정보만 집중적으로 습득하는 방식인데 논문을 쓸 때의 방식과 비슷하죠? 스스로의 목표나 관념이 명확하다면 나름 효율적일 수는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실제로 책의 목적, 그리고 광고 문구 - 1만 6000권 장서 중 단 열 권이 역사를 바꿨다 - 에 부합하는 내용인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소개되는 절반 가까이의 책들이 최상의 혈통인 아리아인의 혈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우생학적 관점, 이 때문에 유대인을 말살해야 한다는 반유대인주의가 형성된 것에 관련되어 있는 탓이 큽니다. 게다가 몇몇 책들은 히틀러가 소장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읽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에요. 이래서야 저자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책을 선정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죠. 그렇지 않더라도 특정 인물에 대해 구체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단편적인 정보일 뿐이고요.
물론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허나 이렇게까지 억지스럽게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었어요. 더 다양한 책들로 다양한 분석을 해 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임스 쿠퍼의 <<가죽 장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카를 마이의 <<사막 횡단>>, 스벤 헤딘의 모험담 등 평소 즐겼다는 모험 소설들도 여러 권 언급되는데, 이런 책들을 좀 더 분석하는 게 더 취지에 맞는 방향이 아니었을까요?
아울러 서재에 각종 추리 소설도 꽂혀 있었다는 증언이 있는데 과연 어떤 책이었을지 너무 궁금합니다. 최소한 제목 정도는 알려주는데 이것도 추리 소설 홀대의 하나인지 궁금하네요.

이렇게 취지에 딱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좀 어렵고 신뢰성 측면에서 부족한 점은 없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인물을 다른 각도로 들여다 보게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는 추천작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니 히틀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3.5점 입니다.

덧붙이자면, 책장이 소유자에 대해 대략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요새는 사람들이 정말 책을 안 사고, 안 읽는 시대죠. 모든 컨텐츠 소비가 스마트 폰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탓이 크겠죠. 앞으로 수십년 뒤에는 "스마트 폰 로그로 분석한 누구누구" 와 같은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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