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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0

기억 파단자 - 고바야시 야스미 / 주자덕 : 별점 1.5점

기억 파단자 - 4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낯선 방에서 깨어난 니키치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한 권의 노트를 발견, 그 안에서 자신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타인의 기억을 개조하는 초능력을 가진 살인마와 대면하게 되는데……. 의지할 수 있는 건 노트와 잃어버린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발달한 뛰어난 추리력과 판단력을 가진 두뇌뿐이다. 니키치는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출판사 책 소개 인용)

<<앨리스 죽이기>> 등으로 접했었던 공학 박사 학위를 지닌 공대생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의 장편 스릴러. '기억 파탄'이 아니라 '기억 파단 (記憶破断)' 이라는 제목과 책 소갯글 그대로 기억의 단절이 주제입니다. 기억을 이어 나갈 수 없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환자 니키치와 타인과 접촉하여 연속된 기억 속에 기억을 추가하여 기억 그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초능력자 키라와 한 판 승부를 그리고 있는데 단기 기억 상실증은 기억파단 그 자체이고, 기억 속에 다른 기억을 집어 넣어 왜곡하는 것 역시 연속된 기억을 파괴하는 행위니까요.

니키치는 자신이 기록한 노트로만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대응하며, 이 노트를 통해 키라와 맞서 싸우는데 이를 위해 등장하는 설정들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노트의 사용법과 생활 방법 등에 대한 디테일은 이야기를 꽤나 그럴싸하게 보이게 만들어 주거든요.
그리고 기억을 온전하게 노트에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반전 요소로 써먹는건 아주 좋았어요. 기억을 잃어버린 후 키라의 범죄 행위가 담긴 USB 메모리를 '서랍에 넣어 놓았다'는 노트 메모를 통해 알게 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만 애초에 이 메모 자체가 거짓이었지요. 키라에게 헛수고를 하게 만들고 실제로 교코를 통해 USB를 안전하게 빼돌리려는 계획이었거든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기억' 그 자체가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는 병 때문에 쉽게 왜곡할 수 있다는게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또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에 기억을 조작하는 키라의 초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아이디어는 분명 신선했습니다. 본인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던 사고 이후의 기억이 전혀 없는데 새로운 기억이 생겨난건 분명 누군가의 조작이라는 논리인데 설득력있지요. 이걸 이렇게 써먹나 싶어 감탄스럽기도 했고요.

그러나 사실 이 반전 외에 딱히 건질게 많은,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니키치 관련 주요 설정은 명백히 영화 <<메멘토>>에서 설정을 따 온 것이니까요. 노트의 메모가 중요하며, 또 자신의 '글씨체'로 기록한 메모만이 중요하는 점과 사진을 주요 기적 보조재로 사용하는 점이 그러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억은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판박이에요. 나쁜 기억 대신 자신이나 타인이 왜곡한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부분의 메시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나마 단기 기억 상실증은 <<메멘토>> 등을 통해 구축된 설정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나름 설득력이 높은데 반해 키라의 초능력은 너무 허황됩니다. 접촉을 통해 기억을 조작한다는 설정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구멍이 많아요. 누군가 모르는 사람의 접촉을 쉽게 허용한다는건 상식적이지 않으니까요. 왜곡된 기억이 많아지면 당연히 일어날 여러가지 모순을 정신 붕괴를 일으킨다며 대충 퉁치는 것 역시 마찬가지지요. 잘못된 기억이 주입된다면 그 이유를 따져 볼 사람이 없을리 없잖아요? 특정 기억에 대한 반대 기억이 명확한 경우, 예를 들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다' 가 '그 때 다른 누구와 무언가를 했다' 라는 분명한 기억과 겹칠 경우 더욱 그러할테고요. 기억 조작이라는건 전후관계와 디테일을 모두 고려해야 성공할 수 있을텐데 그런 부분은 이런 식으로 모두 대충입니다. 최소한 독자가 흥미를 가질만한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어요.
범행도 어이가 없습니다. 이 정도의 능력자가 편의점이나 털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을 폭행하고, 여자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는 수준 이하의 범죄만 저지른다는게 말이 될까요? 심지어 기억 조작도 어설퍼요. 지하철에서의 성추행같은 경우는 피해자와 정의감에 불타 나섰던 사람 2명의 증인의 기억만 조작해서 빠져나가는데, 실제로 니키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이 기묘한 상황을 눈치채죠. 이렇게 백주대낮에 대중 앞에서 벌이는 범죄 행각들이 많다면 아무리 CCTV의 사각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결국 꼬리를 잡혔을 겁니다.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립니다. 살인마를 쫓고 있는 상황에서, 또 살인마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니키치가 기억을 잃더라도 굉장히 필요한 정보만 잘 떠올리고 기억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침 딱 좋은 위치와 장소에서 노트 속 필요한 페이지를 읽게 되는 식이거든요. 기억을 잃는 시간도 정해져 있어 보이지도 않고요. 뒤로 가면 갈 수록 이 친구가 기억 상실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에요. 억지로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이런저런 설정들도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니키치를 비롯한 캐릭터들의 묘사가 밋밋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살인마 키라는 그냥 나쁜 놈, 니키치는 성격 묘사없이 그냥 키라와 싸우는 정의의 사도라는 이분법적인 구분만 있을 뿐 별다른 묘사는 없어서 평면적이고 만화적이기 때문입니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한데, 매력적인 세계관과 설정 창조는 잘 하지만 캐릭터를 묘사하는 능력은 없는게 아닌가 싶네요.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조력자 도쿠 할아버지나 화법 교실 강사 교코도 다 어디서 본 듯한, 평면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다를게 없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일부 매력적인 설정과 돋보이는 아이디어가 없지는 않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단기 기억 상실증 관련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이 그러합니다. 작가의 팬이시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관심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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