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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0

11문자 살인 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1.5점

11문자 살인사건 (개정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성 추리 소설가 '나'의 연인 가와즈가 살해당한다. 그의 죽음에 얽혀있는 여러가지 의문을 풀기 위해 '나'는 친구인 편집자 후유코의 도움을 얻어 조사에 나선다. 그리고 이 죽음에는 과거 요트 여행 사고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지만, 친구 후유코마저 사망하고 마는데....
 

일본 추리 문학계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7년에 발표한 초기작. 무려 30년 이상 된, 나름 고전입니다. 보통 초기작은 모든 아이디어와 역량을 쏟아부은 역작이거나, 아니면 습작 수준을 갓 벗어난 어설픈 작품이거나 둘 중 하나지요. 이 작품은 아쉽게도 후자에 가깝습니다. 한마디로 어설프거든요. 범인도 어설프고, 이를 막으려는 일족의 행동도 어설프고, 주인공도 어설프고, 전개도 어설프고 작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설프고 헛점이 많아서 궁금증이 끊이지가 않더라고요. '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걸 깨닫는 장면부터 그러해요. 왜 연인인 가와즈 마사유키는 '나'에게 진상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요?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로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데 말이지요. 가와즈의 유품 원고와 자료를 받은 뒤 이 자료가 뒤져진걸 알고 사건의 진상을 캐 나간다는 계기 역시 마찬가지, 자료를 훔쳐낸 일당은 왜 제대로 정리해서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않았던걸까요?
또 일당이 속속 살해당하는 와중에 야마모리 사장과 일당은 범인이 누군지 눈치챈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을까요? 일당이 당하는 복수의 계기가 밝혀지기를 원치 않아서? 그러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합니다. 증거라고는 후유코가 찾아낸 다케모토 술병 속 메모가 전부, 그나마도 다케모토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무인도에 도착했다는 말 뿐이지요. 이 정도로 경찰이 진상을 알아내고 야마모리 일당을 추궁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유일한 증거인 가와즈의 원고는 이미 일당이 처분해 버리기도 했고요.

물론 일당이 경찰의 손을 빌리지 않고 그들 스스로 후유코를 없애고 진상을 영원히 숨기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만한 재력도 있고, 사람도 충분했지요. 하지만 이를 위해 '나'를 요트 여행에 초대하고, 그녀가 후유코와 동행하게 만든다는 계획은 말이 안됩니다. 후유코가 의심하지 않고 함정 한 가운데에 뛰어들게 만드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나' 역시도 사건 진상을 쫓는 중이니 당연히 위험 인물이잖아요? '나'를 끌어들이지 않고 후유코를 사고로 위장하여 죽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거에요. 아니면 후유코가 습격하게끔 만들고 오히려 역습하여 정당방위로 죽일 수도 있었을테고요. 이야기 중에서도 일당은 사카가미가 살해될 때 이미 일당 중 한 명이 숨어있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니 충분히 가능했을겁니다.

반전이랍시고 등장하는 범인의 정체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인이 후유코라는 단서는 전무하다시피 한데 이게 어떻게 반전이 되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뜬금없기 그지없습니다.
동기도 설득력이 부족해요. '현실의 사건은 흑백이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고, 선과 악의 경계가 애매하지만 소설은 완성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가와즈의 말로 복잡한 동기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지나치게 멋을 부렸을 뿐 실제로는 선과 악의 경계는 명확합니다. 목숨을 건 구조의 댓가로 여성의 몸을 요구한 다케모토는 소악당, 다케모토를 죽여서 이 사실을 덮으려던 일당들은 대악당입니다. 그냥 다 악당이에요. 특히나 일당이 죽어나갈 때 일족 이외의 인물부터 죽여서 입을 막으려던 야마모리 사장이야 말로 악당 두목급이고요. 여자의 몸을 구조 댓가로 요구하는 뻔뻔스러운 놈의 복수를 하겠다고 관계자들을 죽여나간 후유코도 악당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대관절 뭘 이야기하려고 한 건지 헛갈리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전개가 어설프다면, 최소한 히가시노 게이고다운 트릭이나 추리적인 전개라도 뒷받침되어야 했을텐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유일한 트릭은 후유코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시계를 조작했다는 정도거든요. 대단한 트릭도 아닐 뿐더러 작 중에서의 비중도 낮습니다. 주인공이 진상을 알게 된 건 시각장애 소녀 유미의 증언 탓이 컸거든요. 또 야마모리 사장 일당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건 결국 그 식솔과 고용인들이라는 점에서 알리바이 트릭이 필요한지도 의문이 듭니다. 야마모리 사장을 의심하면서 이 사람들 증언은 곧이 곧대로 믿는다는게 가능할까요?
'11 문자 살인 사건'이라는 제목도 기대를 완전히 저버립니다. 뭔가 그럴듯한 암호 트릭이라도 등장할 줄 알았더니만 그냥 후유코가 보낸 협박 편지의 글자 갯수에 불과하니까요. 이 정도면 거의 제목 사기가 아닌가 싶어요.

등장하는 경찰의 역할도 설득력을 저해시키는 요소입니다. 과거 어떤 요트 여행의 생존자들이 차례로 살해당한다면, 생존자들을 조사하여 동기와 범인을 밝혀내는게 당연하잖아요? 일개 추리 소설가가 발품을 팔아서 알아낸 사실을 경찰이 모른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가와즈 사건까지는 그렇다치더라도 카메라맨 미유키가 살해된 사건부터는 연관성을 알아내고 수사를 펼쳤어야 합니다. 아니면 사카가미 사건에서는 최소한 관련성을 알아낼 수 있었겠죠. 이런 점을 본다면 '나'가 입을 다물었다 치더라도 야마모리 사장 일당이 빠져나가기는 어려웠을거에요. 무려 3~4명이 죽어나간 살인극을 경찰이 진상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덮어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긴, 이 작품 속 경찰을 본다면 충분히 그럴만 하기도 싶긴 하지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히가시노 게이고도 초기에는 많이 어설펐다는걸 증명해 주는 수준 이하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작가의 광팬이 아니라면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작품마저 재출간되다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 값이 정말 대단하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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