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 경첩 - 존 딕슨 카 지음, 이정임 옮김, 장경현 감수/고려원북스 |
몰링포드 마을의 대지주 판리 가문의 후계자 존 판리가 거처하는 판리 클로스에 어느날 낯선 손님이 변호사와 함께 찾아온다. 찾아온 이유는 자신이 진짜 존 판리라는 것. 그는 약 25년 전 타이타닉 호를 타고 미국에 있는 친척을 찾아가던 10대 소년 존 판리가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 시에 다른 소년과 신원이 뒤바뀐 채로 자라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두명 중 누가 진짜인지를 놓고 줄다리기를 한 지 1개월여만에 결정적 증거를 가진 25년전의 가정교사 케넷 머레이를 판리 클로스로 초빙하고, 2명의 존 판리는 각자의 변호사를 대동하고 케넷 머레이와 대면하여 결정적 증거를 통해 진위를 가리고자 하는데....
존 딕슨 카의 미번역된 최대 대표작인 "구부러진 경첩" 을 드디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최근 고전 명작들을 다시 읽고 있는데 이렇게 새롭게 소개되는 고전 명작들을 볼때마다 정말이지 기분이 좋네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타이타닉호 침몰이라는 대형 사건,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인물 바꿔치기에 대한 이야기는 흡사 "마틴 기어의 귀향"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전에 읽었던 "녹색은 위험" 처럼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읽기 전부터, 추리소설을 알고 접해온 20여년 동안 가져온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요?
일단 딕슨 카 특유의 오컬트 적인 요소가 별로 두드러지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이야기를 오컬트쪽인 방향으로 너무 끌고가기 위해서 쓸데없는 사건 - 마녀 숭배 의식과 관련된 살인 사건 - 을 가져다 붙인 느낌이 강했습니다. 실제 본편의 중심 사건과는 별로 연관되는 것이 없을 뿐더러 이 마녀 숭배 의식 살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전개는 그다지 무리가 없이 수정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작가의 욕심이 너무 지나친게 아니었나 싶어요.
또 본편에 등장하는 메인 사건의 불가능한 설정, 즉 주위에 아무도 없는,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한 인물이 눈깜짝할 사이에 살해당한다라는 불가능 범죄에 대한 설정은 딕슨 카 다운 아주 좋은 설정이기는 합니다. 문제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 그리고 핵심 트릭이 좀 애매한 편이라는 거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기디온 펠 박사가 밝혀내는 가설 (혹은 진상일지도?) 쪽이 훨씬 마음에 들더군요. 이 소설의 자칭 범인이 주장하는 트릭에 대한 설정은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범행에 대한 현실성은 물론 작품 내부에서 별 필요는 없지만 이상하게 자주 등장하는 "자동인형" 조작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했고 말이죠. 이러한 부분에서는 정통 추리물로 독자와 공정한 승부를 진행하는 작가의 배려가 조금 아쉽더군요. 아주 약간의 복선만 등장해 주었더라도 좀 더 수긍이 갔을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기디온 펠 박사도 마지막의 추리쇼 이외에는 별로 활약이 눈에 뜨이지 않았으며, 뭔가 있어보이는 제목 역시 "작품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라는 점, 빅토리아 데일리 사건의 진상은 대관절 뭐냐라는 문제, 사건의 동기가 너무 약한게 아닌가 하는 문제 (가짜라면 오히려 당당하게 이혼을 주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마녀 집회 문제가 그렇게 큰 이슈였을까요 ?), 그리고 너무 빡빡하게 자동인형 조작에 대한 설정을 적용한 것이 아닌가 (사실 C.M.B 에 등장한 설정이 더 합리적이겠죠)하는 등의 문제점들도 눈에 거슬리더군요.
그래도 그동안 추리 애호가로 지내오면서 너무나 읽고 싶었던 작품 중 하나임에는 분명했고, 고전 명작으로 이름이 높은 작품이라 구입해서 읽은 것에는 전혀 후회가 없습니다. 한 10년 전에만 읽었더라도 더 좋은 평을 할 수 있었을텐데, 너무 소개가 늦게 된 것이 아쉬울 뿐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원래 영국을 소란스럽게 했다는 이 작품의 원전격 사건인 "틱본 사건 (아서 오턴 준남작 사칭 사건)"과 보다 연관시켜 존 판리의 진위를 따지는 부분만 좀 더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더라면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으면서도 좀 더 짧게 정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타이타닉 침몰 사건까지 등장하는 등 인물 바꿔치기에 대한 내용이 충분히 드라마틱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작가 특유의 분위기를 고집한 탓에, 사족이 많은 탓에 쓸데없이 길어진게 아닌가 싶거든요. 어쨌건 이로써 딕슨 카 작품은 현재까지 국내 출간된 책은 전 작품 구입-완독이라는 재패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덧붙여, 고려원북스에서 이 책을 출간해 주신 것에는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만, 이 책은 제가 최근 몇년간 본 책 중 최악의 표지 디자인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꼭 지적해 드리고 싶습니다. 작품과는 별 상관없는 여성의 일러스트를 아동용 동화책에나 나올듯한 스타일로 전면 배치한 과감함도 경악 그 자체지만 그에 더하여 책날개를 뒤집은 듯한 앞표지는 보관과 독서, 양쪽 모두 불편할 뿐이었습니다. 제발 원서 표지를 참고라도 해 줬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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