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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7

화형법정 - 존 딕슨 카 / 오정환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별점 4점

화형법정 - 8점
존 딕슨 카 지음, 오정환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출판계에서 꽤 잘나가는 위치에 있는 편집인 에드워드 스티븐스는 자신의 주말 별장 이웃인 마크 데스파드의 급작스러운 방문 및 부탁을 받는다. 부탁 내용은 얼마전 사망한 마크의 백부 마일즈의 독살 의심에 따른 시체 발굴 작업. 마크와 그의 친구인 전직 의사 파팅턴, 마크의 고용인 헨더슨 노인과 스티븐스 4인은 한밤중에 납골당 입구를 뜯어내는 대 공사를 진행하지만 마일즈 백부의 시체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된다. 그 외에도 스티븐스는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여러가지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되는데....


구판 동서 추리문고로 읽었습니다. 이 책은 10여년전 다른 구판 동서 추리문고 몇권과 함께 제 첫 직장의 여사장님께서 하사하여 주신 선물이죠. 지금이야 복간되긴 했지만 당시에는 정말 구판 동서 추리문고로 밖에는 구할 수 없는 책이라 너무나 감사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 고전 추리물에 대한 애정이 다시금 샘솟던 차에 손에 잡히는데로 읽게 되었네요.

어쨌건 줄거리 요약부터 하자면, 위에 대충 써 놓기도 했지만 미모의 정체불명 아내와 못난 이웃사촌때문에 벌어지는 삼일동안의 대소동... 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써버리면 흡사 "어니스트 캠프 대소동"같은 코미디 영화가 연상되는데 딕슨 카 선생님 작품이 당연히 코미디일리는 없죠.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 그것도 흑마술 관련된 고딕 호러같은 이야기를 근대에 벌어진 사건과 절묘하게 결합시킨 딕슨 카 류 모던 고딕 호러 오컬트 추리물의 결정판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일단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달랑 삼일에 걸친 이야기 -그것도 대부분은 이틀동안 벌어지는- 를 장대한 장편으로 풀어낸 딕슨 카의 솜씨는 역시나 탁월합니다. 또한 이틀동안 몇 안되는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스케일을 커버하기 위해 앞서 말했듯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던 역사적인 사실, 즉 17세기 사형당했던 유명한 독살범 브랑빌리에 후작 부인 (마리 도브리)과 생 클르와, 데프레와 같은 인물들을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는 현재와 쌍으로 엮어놓듯 전개하며 작품에 색다른 맛과 다채로움을 더해주는 것도 좋고요. 덕분에 최근 유행하는 팩션같은 형태를 띄게 되었는데, 이 역시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이 느껴졌어요.

무엇보다도 탁월한 퍼즐러, 고전 미스터리 황금기의 거장답게 불가능 범죄 2건을 전면에 배치하여 대담하게 독자와 승부하는 맛이 잘 살아있어서 추리 애호가로서 너무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이런게 진정한 고전 추리물의 맛이겠죠. 2개의 범죄 -꽉 막힌 납골당에서 어떻게 시체가 사라졌는지와 마일즈 백부의 방에서 문을 뚫고 나가듯이 사라진 백부에게 독약을 먹인 여인의 정체- 모두 신선하면서도 예측을 뛰어넘는 전개와 더불어 고딕 호러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사건과 어우러진 작품과 너무 잘 어울리는지라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별것 아닌 듯 했던 여러가지 복선들이 나중에 사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고전적 전개의 효과적인 사용 역시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요. 그 외에도 알리바이에 대한 참신하면서도 거장다운 대담한 발상과 전개(응?) 등 추리적으로는 즐길 거리가 정말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딕슨 카 선생 최 전성기에 발표된 작품답지 않게 좀 지나칠 정도로 오컬트 쪽에 치우친 나머지 전개의 설득력이 많이 부족한 편이거든요. 갑작스럽게 사건에 뛰어들어 탐정 역할을 하는 고던 클로스의 생뚱맞은 등장은 뭐 그렇다 치더라도 마크의 도주, 오그덴의 돌출행동 같은 것들은 사실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에필로그가 지나칠 정도로 사족의 느낌이 강해서 무척 불만스러운데요. 왜 이런 에필로그를 구태여 집어넣어서 잘 마무리 된 정통 고전 추리물을 오컬트로 덧칠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에필로그 때문에 사건의 진범과 범행의 방법 등 모든 요소가 헝크러져 버리거든요. 아무래도 작가의 욕심이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벌어진 역사와 맞물리는 현대에 벌어지는 괴사건, 그리고 놀라운 진상! 덧붙여 반전까지 있는 저도 이런 작품을 한번 써보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죠. 제가 읽은 딕슨 카 작품 중에서는 충분히 상위권을 점할 작품으로 (해골성,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연속 살인사건 등이 상위권입니다),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멋진 요소가 많고 재미 역시 확실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도 이 작품을 읽지 않는 추리 애호가가 있다면 꼭 읽어보시라 추천하고 싶네요.

덧붙이자면, 김내성 선생님의 "진주탑" 처럼 이 작품도 번안하면 무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 말기에 벌어진 살인사건과 얽힌, 경성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참극! 조선 총독부 주재원인 옆집 일본인 후루따(가칭^^) 의 부탁으로 우연찮게 사건에 뛰어든 조선인 변호사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고도일, 그리고 그의 미모의 부인에 얽힌 놀라운 진상! 어쩌구 저쩌구...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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