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09/02/19

녹색은 위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크리스티나 브랜드) / 이진 : 별점 3점

녹색은 위험 - 6점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지음, 이진 옮김/시작

2차 대전 당시 런던 대공습의 와중에 마을 외곽의 한 야전병원의 수술대 위에서 우체부로 일하던 히긴스 노인이 사망한다. 이 사건으로 외과의사 문과 저베이스, 마취의 반스, 간호사 마리온과 간호 봉사대원 제인, 프레데리카, 에스더 7명의 작은 공동체에 파문이 일고 경시청에서 커크릴 경감이 파견되어 사건 수사를 시작한다. 이후 간호사 마리온이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고 커크릴 경감은 범인의 정체를 눈치채고 공습의 와중에서 범인을 잡아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대표작입니다. 국내 출간이 너무 늦은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죠. 뭐, 이 땅의 장르문학 홀대가 한두해 있었던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요. 어쨌건 동서 추리문고를 통해 "제제벨의 죽음" 밖에 소개되지 않았었지만 "제제벨의 죽음" 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녹색은 위험"이 더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있어서 기대가 무척 컸었기 때문에 이렇게 읽게 되니 정말 감개무량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작품 자체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기대가 너무 컸던게 아닌가 싶네요. 일단은 전개가 굉장히 고풍스러운 것이 약간 거슬리는 부분이었습니다. 반세기 이전 작품이긴 하지만 글쎄요... 크리스티 여사님 작품을 읽을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어요. 작풍인지는 모르겠지만 심리묘사와 개인적이고도 사변적인 대사가 지나칠정도로 장황하게 난무하는 점도 고풍스러운 느낌에 한몫 거들면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였고요. 이렇게 장황한 묘사와 대사는 그 사이사이에 중요 단서를 살짝 살짝 끼워넣기 위한 장치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좀 심했습니다. 번역의 문제가 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매끄럽지도 않고 말이죠.
게다가 커크릴 경감 (콕크릴 경감) 은 이 작품에서는 정말이지 하는게 너무 없어요! 되려 애꿎은 희생자만 늘려버리고 추리보다는 자백에 의존하는 등 명탐정으로서의 역할 수행을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제벨의 죽음" 에서 접했던 명탐정과는 전혀 다른사람 같았어요.

동기도 지나치게 오버스러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혐의를 두기 위해서 다양한 동기를 등장인물들에게 가져다 붙이는건 고전 추리물로는 당연한 전개겠지만, 문제는 이 동기들이 거의 다 평이한 수준이라 "살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좀 어려워 보였던 탓입니다. 심지어는 남동생과 누나의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어거지(?)까지 가져다 붙이는 건 영 아니다 싶더군요.

하지만 실망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제가 10년도 더 전에 이 작품의 영화버젼을 이미 감상했던 탓이 가장 큽니다. 화쪽이 더 깔끔하고 간결하게 각본을 구성해서 더 몰입해서,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었거든요. 사건도 잘 축약하고 내용을 많이 쳐 냈지만 추리적인 맛은 충분히 잘 살려냈던 덕분입니다. 물론 영화에 비해서 훨씬 중첩되어 쌓여있는 복선들, 다양한 단서들, 용의자와 범인을 특정하게 만드는 시간의 굴레에 대한 설정, 특히 "가운" 에 대한 추리적인 발상은 무척 좋았고 곳곳에 숨어있는 영국적인 묘사와 유머들 역시 마음에 들긴 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거장의 대표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죠. 영화와는 다른 책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심리묘사와 디테일은 확실히 잘 살아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구하기 힘들어도 영화쪽이 더 나은건 분명합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 역시 히치콕 감독의 영화버젼이 훨~씬 뛰어나듯이 가끔은 원작을 능가하는 영화도 존재하는 법이겠죠. 
아울러 이 작품의 가장 큰 트릭은 바로 "제목" 과 동일한데 역시나 영화를 통해 접했기에 신선함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주요 트릭과 범인을 이미 알고 있는 추리소설을 다시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다시금 느끼게 되었네요. 
영화는 "흑백영화"라서 색깔을 전혀 구분할 수 없었던 탓에 마지막 트릭 공개가 좀 황당했던 기억이 나기는 합니다만... 하여튼 별점은 3점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점수가 좀 더 높았을까요? 아직 크리스티아나 브랜드를 접하지 않으신 추리 애호가분들이 계시다면, "제제벨의 죽음" 을 먼저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한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이 고전 명작을 출간해 주신 출판사 관계자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리지만 책 표지 디자인과 본문의 구성은 별로였습니다. 표지 디자인은 "병원이 무대인 소설에 제목은 "녹색은 위험" 이니 이렇게 가야겠다!" 라고 떠오른 첫 생각을 그대로 비쥬얼로 옮겨놓은 듯한, 녹색 바탕에 의사로 보이는 인물이 전면에 배치된 디자인인데 너무 뻔하고 안이하잖아요... 90년대 로빈 쿡 소설이 생각날 정도로 올드하기도 하고요. 가격도 착하고 책도 괜찮았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신경써 주신다면 더욱 좋을 것 같네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