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 1 - 반시연 지음, 김경환 그림/영상출판미디어(주) |
국내 장르 영화, 장르 문학 관련 리뷰의 거목이신 mrkwang님이 극찬하신 글을 어디선가 읽고 관심이 가던 차에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습니다. 어차피 절판 상태라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알라딘 매물로 뜨길래 주저없이 구입했죠. 바로 얼마 전 절판, 품절이라는 상황에 낚여 충동구매 하지 말자고 언급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못 사는 것도 있으니까요.
일종의 단편 연작물로 주인공 호우가 과거 '셔터' 라 불리우는 일종의 해결사 일을 하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폐인이 된 후, 지인들의 도움으로 기묘한 중고 물품 가게 '헤브닝' 에서 일하기까지 각 시기별로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구성인데 다행히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기대치가 그다지 높지 않기도 했지만 추리적으로 꽤 괜찮은 탓도 큽니다. 큰 사건이 벌어진다기 보다는 일상계 추리에 가까운 소소한 추론이 대부분인데 전부 이치에 맞고, 설득력이 높거든요. 모든 정보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기도 하고요.
에피소드별로 간략하게 소개해드리자면, <<로또 사모님>> 사건이 등장하는 첫번째 에피소드 <<우계>>가 좋은 예입니다. 단순히 캐릭터를 소개하기 위한 소품으로만 보였던 망사 스타킹이라던가, 비가 오는 날이라 당연해 보였던 엘리베이터 물기에 대한 묘사 등이 진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로 사용되거든요. 그리고 의뢰받았던 아이의 행방 외에 남편이 어디에서 도박을 하는지까지 추론해낸다는 점도 좋았어요. 명확하게 캐릭터를 독자에게 알리는, 첫 작품으로 손색없는 이야기였습니다.
호우가 폐인이 된 이후 편의점에 나타난 성범죄자를 응징하는 <<건기>> 도 나쁘지 않아요. 주어진 정보들로 편의점의 안경남이 성범죄자였다는걸 알아내는 추리의 과정이 설득력이 높기 때문입니다. 전직 복서이기도 한 호우의 강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첫번째 이야기라는 점도 주목할 만 하고요. 물론 전자발찌를 찬 성범죄자가 편의점에서 여성을 희롱한다는게 과연 현실적이고 가능한 설정인지는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만.
<<주마등>>은 호우가 넘버원 셔터로 잘 나갈 때, 사야를 만나고 그 뒤 고지를 만나 사야의 스토커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이야기인데, 사야와 고지라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설명을 위한 소품으로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일상계로는 괜찮은 수준이기는 해요. 그러나 고지 정도 되는 능력자가 스토커 한 명 붙잡지 못한다는게 말이 안되서 그렇지... 여튼, 평범한 수준이었습니다.
<<헤브닝>> 은 폐인이던 호우가 현재를 극복하고 비이와 '노예 계약'을 맺는 과정이 그려지는 이야기로 가장 많은 추론이 등장합니다. 물에 젖어 읽을 수 없는 주소 쪽지를 보고 어떻게 '헤브닝'을 찾아 갔는지, 작가 이름도 없고 출판사도 없는 책의 정체는 무엇인지, 비이가 핸드 크림을 계속 바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전거 변속기가 고장났다고 전화한 손님의 문제는 무엇인지, 책을 반품하며 다른 책과 다르다고 우기던 일의 진상은 무엇인지, 나무 바닥이 미끄러운 이유는 무엇인지, 동네를 배회하는 대학생들이 찾는 장소는 어디인지, 피아노 모양 오르골은 왜 고장이 났는지 등 수많은 추리를 순식간에 토해내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몇몇 이야기는 비약이 있고, 지나치게 끼워 맞춘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대체로 괜찮았습니다. 골고루 맛있는 종합선물세트같은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이 연작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그러나 마지막 이야기 <<셔터>> 는 완전히 기대 이하입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암호트릭 같지도 않은 암호 트릭이 핵심인 탓으로 차라리 등장하지 아니함만 못했습니다. 그냥 호우와 다른 등장인물들이 어울리는 만화같은 상황을 그리는 묘사만이 볼거리였달까요. 자기 개발서를 혐오하는 호우의 성격은 저와 비슷해서 무척이나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뿐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제가 읽어왔던 국내 추리물 중에서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만화적인 설정은 문제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두뇌와 프랑켄슈타인의 육체를 지녔다는 주인공 호우, 대부호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남이자 호우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고지, 대식가 츤데레 미녀이자 호우의 전 애인이자 고지의 현 애인 사야, 고지의 약혼자이자 대부호로 호우에게 빠진 비야 등 모든 캐릭터 설정이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입니다. 이름들도 하나같이 만화 속 인물들 같잖아요? <<건기>>에서 <<헤브닝>> 으로 이어지는 동안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폐인이 된 호우에 대한 묘사 역시 만화적이라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대사와 상황들도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힘을 쓰지 못하고 (케로로인가?) 비이를 '주인님' 이라고 부르는 잘 차려입은 호우에 대한 묘사는 바로 그 정점이죠.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비현실적이라 아무리 현실적인 추리를 한다 하더라도 썩 와닿지는 않는데, 좀 더 현실적인 캐릭터를 기반으로 쓰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예를 들자면 학교 짱으로 공부는 못하지만 추리에 능한 호우, 소꼽친구 사야, 학생회장 고지, 부회장 비이 캐릭터였다면 딱이었을텐데 말이죠. 만화적인건 마찬가지지만 스케일을 줄임으로써 현실감을 조금이나마 더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고등학교를 무대로 해도 충분히 펼쳐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니까요. 아니면 아예 현실적이지 않은 판타지 공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던가요. 지금은 이래저래 어중간할 뿐이라 여러모로 아쉽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추리물로서의 성과는 뚜렷하나 묘사와 전개는 아쉽습니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2권을 읽게 될 지는 잘 모르겠어요. 작가의 만화적 설정 없는 정통 본격 일상계 추리물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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