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지배자 - 김현중 지음/온우주 |
언젠가 인터넷에서 원사운드가 그린 <<묘생만경>> 만화를 읽고 관심이 가던 차, 알라딘 헌책방에서 싸게 팔길래 구입한 작품입니다. 헌 책을 충동 구매하지 말자고 결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가격이 너무 착했단 말이죠. 다행히 결과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꽤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특징이라면 우선 독특하고 기발한 설정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입니다. 듀나의 작품들처럼요. 그러나 듀나 작품들보다는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설정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충실히 이야기에 담아내었기 때문입니다. 결말도 확실하고요.
남과 다른, 뛰어난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는 특징도 있는데, 작가의 영원한 화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의 고민과 다양한 시도도 돋보입니다. 이야기 별로 결말도 다양한 것 -그냥 한 계단 위에서 바라만 본다는 <<묘생만경>>, 남들의 두려움을 통해 신으로 거듭난다는 <<마음의 지배자>>, 블랙 코미디인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남과 다르다고 가장하고 있을 뿐 다 똑같다는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 능력을 발휘 못하고 찌질하게 살다가 한걸음 더 내딛는다는 <<물구나무 서기>> 등 - 도 마음에 듭니다.
기존에 널리 알려진 아이디어의 변주가 많은 등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단순한 설정 바꿔치기는 아니고 나름의 아이디어가 바탕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재미도 수준급인 좋은 단편집이었습니다. 한국 SF 와 장르 문학이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장르 문학 팬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원사운드가 그린 리뷰 만화를 읽고 책을 산게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는 이거) 제게는 100% 확률입니다. 원사운드는 리뷰 만화만 그려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하여튼, 제가 언젠가 책을 낸다면 제 책 리뷰를 좀 부탁드리고 싶네요.
단편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묘생만경>>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 만화는 3~4페이지 남짓인데 원작을 굉장히 잘 압축한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사도 그대로인데 만화에 적절한 것만 잘 가져다 썼고, 꼭 필요한 설정 중심으로 이야기를 짤막하게 잘 풀어낸 것이죠
그런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원작에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많다는 말도 됩니다... 무엇보다도 화자인 고양이 '나'가 영물로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추었다는 설정은 불필요했어요. <<펠리데>>처럼 뛰어난 지능 자체가 설정과 이야기의 핵심으로 활용되면 모를까, 이야기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군더더기였을 뿐입니다.
그래도 세 가족과 닭 스무 마리, 개 세 마리라는 전원 주택을 무대로, 닭들 사이의 치정극을 통해 무시무시한 사건이 휘몰아친다는 범죄 스릴러라는 독특함은 누가 뭐래도 최고였습니다. 이런 작품을 또 볼 수나 있을까요?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니, 작가가 살짝 부러워질 정도였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마음의 지배자>>
표제작. 초능력자가 어떻게 주위의 두려움을 불러오고, 어떻게 박해 받으며, 또 어떻게 신이 되는지를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보통 이런 류의 이야기는 초능력자들이 능력을 각성한 뒤 무언가 사명을 짊어진다는 이야기, 혹은 자신이 세계 정복 같은 야심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를 고등학교를 무대로 하여 일상계처럼 담담하게 풀어내었다는 나름의 차별화 요소가 돋보입니다.
초능력자인 민국이 아니라 주변인물들 중심으로 묘사와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도 신선했고요.
두려움과 탄압만 있을 뿐 추종자는 없다는 점이 실제 현실과 괴리감을 느끼게 하며, 초능력자가 악인들과 손을 잡는 이유도 불분명한 등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아요. 그래도 신과 기적 등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됐나>>
김사장의 맘모스 마트와 우주행성 K9242의 정복 유닛이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블랙 코미디 SF.
사람이 많이 오가기를 원하는 김사장, 그리고 기억 유닛을 찾기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부분체를 부착하기를 원하는 정복 유닛이 같은 목적을 위해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김사장의 계획은 충분히 그럴듯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들이며, 정복 유닛의 씨앗 옮기기 계획 역시 전형적인 식물의 행태를 잘 응용하고 있어서 설득력도 아주 높아요.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입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지배인의 머릿 속에 기억 유닛이 들어가 있었다는 결말입니다. 앞 부분에서 약간의 설명이라도 있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죠. 이대로라면 급작스러운 감도 없잖아 있고요.
그래도 재미 만큼은 보장할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
아인 시술이라는, 머리가 좋아진다는 수술이 유행한 뒤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SF 단편. 아인 시술은 효과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비용, 그리고 흉터가 남기 때문에 부자들이 주로 시술 받고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룬다는 설정이 핵심입니다.
사실 이 시술을 통해 선민 의식을 갖는다는 설정은 특별한 건 없습니다. 부자만 기계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와 다를 건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시술이 효과가 없을 수 있다! 라는 반전이 기가 막힙니다. 시술이 사기인지 아닌지 결국 밝혀지지 않는 점도 좋으며, 시술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트릭도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재미를 더하고요. 또 수진을 통해 상류층도 결국 허상일 뿐이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도 마음에 들더군요.
앞서 말씀 드린대로 좀 뻔한 설정 탓에 이야기의 전체 분위기와 느낌에서 여러 다른 작품들이 떠올랐고 (개인적으로는 <<가타카>> 가 많이 연상 되었습니다),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묘사된 건 아쉽지만 매력적인 이야기 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우리나라에 장르 문학 원작을 주로 다루는, 미국으로 따지면 <<환상특급>> 같은 TV 쇼가 있다면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구나무서기>>
일종의 투시 능력을 갖춘 초능력자 김서권의 일대기. 종도라는 섬에서 물구나무 서기를 혼자서만 못했던 김서권이 어느새 모든 것이 거꾸로 투영되는 투시력을 갖추고, 이를 이용하여 여러가지 일을 경험하다가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서권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종도에서의 이야기와 현재의 대형 운석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가 교차 편집되다가 '물구나무 서기'로 현재의 초능력이 시작됨을 알려주고 끝나는 구성의 작품입니다. A와 B가 동시에 전개되는데 A는 B의 발단이라는 결말과 함께 B도 끝나게 되지요.
우선 '물구나무 서기'라는 것을 키워드로 한 디테일이 볼거리입니다. 한번도 물구나무 서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런걸 이런 이야기로 만들어 낸 작가의 상상력이 참 대단하구나 싶었어요. 물구나무 서기와 초능력이 연결되다니!
그 외에도 김서권이 꿈에서 보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의 정체가 운석이라던가, 한발두발 내딛어 물구나무 서기를 함으로 투시를 하고, 물구나무 서기와 같은 원리라 투시는 뒤집혀서 보인다는 등 의 디테일들도 볼 만 합니다.
하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좀 애매했습니다. 죽음 직전에 신을 본다는 신학적 담론을 SF의 형태를 빌어 써내려간 작품인가? 싶은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부수적인 이야기가 많아 혼란스럽거든요. 어린 시절 종도에서의 할아버지 환갑 잔치에 대한 장황한 묘사, 현재의 김서권이 무당과 손 잡았다던가 결혼에 실패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그러합니다. 재미는 있는데 주제와 관련이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더라고요.
책 뒤의 편집자 글이나 인터넷 상에서의 리뷰를 보면 이 작품을 최고로 치는 분위기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랬어요. 너무 멋을 부리려고 하지 말고 핵심에 집중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피노키오>>
로봇들을 활용한 전쟁이 끝나고, 이야기를 꾸며내는 재주가 있는 로봇이 발견된다. 그 로봇은 자신의 사명을 잃은 채 극장에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데...
역시나 재미있는 설정을 갖춘 작품.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작위적인 요소가 강하고 설정도 별로 디테일하지 않으며 결말도 예상에 가까운, 일종의 우화에 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거짓말만 하는 로봇 둘이 일종의 논리 게임을 펼치는 식으로 전개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서로 진짜 사명이 무엇인지, 폭발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거짓말만 하면서 내용을 파헤치는 두뇌 게임 스타일로 말이죠. 이러려면 지금보다 거짓말 조건이 더 상세하게 설정되어야 겠지만요.
하여튼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평범한 소품에 가깝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부안 왕손이>>
거대 포크레인이 약간의 고장으로 무의미한 작업만 반복하는 현장으로 팔려간 후,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소녀의 하트 수신호를 받은 후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거대한 하트를 그린다는 일상계 판타지.
실제로 전라도 사투리 가득한 왕손이의 의인화 묘사가 돋보이며, 아파트 단지 소녀의 하트 수 신호의 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도 흥미로왔던 작품.
무엇보다도 롯데 월드 공사 시 작가가 목격했던, 단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진행된 무의미한 단순 반복 작업을 통해 이러한 이야기를 그려낸 작가의 상상력에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트 수 신호의 진상은 조금 생뚱맞은 데가 있고, 결말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해피 엔딩이라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분위기 상으로는 사회 고발적인 내용으로 흘러가는데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매력적인 도입부, 설정, 전개에도 불구하고 이 결말 때문에 맥이 풀리는 느낌까지 들거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판타지 버젼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으로 그려내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뱀과 소녀>>
뱀 신을 모시는 섬에서 뱀을 죽인 아이들에게 닥치는 일을 그린 단편.
초자연적 존재(?)에 의한 일종의 호러물로 섬을 벗어날 수도 없고, 재앙이 다가오는 막막한 상황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어떤 마을이 있고, 이방인이 그 마을의 금기를 어겨 끔찍하게 살해 당한다는 흔해빠진 이야기를 이방인이 아니라 그 마을 주민, 그것도 반항심 많은 꼬마 아이가 금기를 어긴다는 약간의 변주만 준 셈이라 애초에 새롭거나 신선한 느낌을 받기는 힘들었어요.
또 내용도 잘 모르겠더군요. 민박집 손님은 누구고, 뱀을 어떻게, 왜 모시는 지와 뱀의 영향력도 설명되지 않아서 공포심을 자아내기는 무리입니다. 뭐가 어떻게 될지 대충은 알아야 무서운데, 지금은 그냥 수희 혼자 어둠 속에 남은게 전부니까요. 이래서야 한 편의 이야기로 성립하기도 힘들죠. 주인공 소녀 수희가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뱀 신상 뒤에 피로 글자를 쓴다던가), 그것이 이후 섬을 찾아와 금기를 어기고 쫓기는 신세가 된 이방인에게 발견되는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쓰임직한, 긴 이야기의 도입부 정도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이 단편집을 위해 새롭게 쓴 작품이라는데 이래서야 차라리 수록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거에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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