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2 (완전판) -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
포와로를 찾아온 미모의 여성 칼라. 그녀는 16년 전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독살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의뢰하는데...
오랫만에 읽은 여사님 장편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10"에 선정된 작품이죠. 에디터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디언지 선정 베스트에도 포함되어 있고 판매량에서도 10위 안에 드는 작품이더군요. 여태 읽어보지 않은 미숙함을 탓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다섯 마리 아기 돼지라는 마더 구즈 동요를 작품에 깊이 개입시켜 전개한다는 점으로, 주요 증인 다섯명을 동요 속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캐릭터를 일체화시키고 있죠. 시장에 간 돼지는 돈을 밝히는 속물 필립 블레이크, 집에 머무른 돼지는 소심하고 영향력없는 메러디스 블레이크, 로스트비프를 먹은 돼지는 천박하고 화려한 레이디 디티셤 (엘사 그리어), 아무것도 먹지 못한 돼지는 검소하지만 날카로운 세실리아 윌리엄스, '꿀꿀꿀' 운 돼지는 말괄량이 안젤라 워런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는 덕분에 작품이 적절한 분량으로 마무리 된 것 같아요. 지금은 500페이지를 넘어가는 장편이 흔하디 흔한데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작품을 단 350페이지 내로 마무리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죠. 긴 분량을 자랑하는 작품들 대부분 디테일한 묘사에 치중하는 분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트릭이 중심인 고전 황금기 걸작은 아무래도 트릭을 제외하고는 조금 얄팍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마더 구즈 동요를 활용하여 짤막하지만 효과적으로 캐릭터를 구체화시킨 것은 역시나 거장다웠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고전 황금기 작품답습니다. 16년 전 벌어졌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는 설정 탓에 포와로가 변호사와 경찰 등 사건 관계자는 물론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다섯명을 찾아다니면서 증언을 듣는 등 발로 뛰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안락의자 탐정물 형태와 유사합니다. 그래서 독자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받고, 공정한 두뇌 싸움을 벌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저는 신경쓰지 못한 정말 사소한 증언, 단서를 가지고 진상을 깨우치는 포와로에게 또 패배했습니다만 고전 황금기 작품의 최대 매력인 두뇌 싸움은 항상 즐거운 법이죠. 진상과 동기 모두 합리적인 것은 물론이고요.
이 작품처럼 각자의 증언이 미묘하게 다르고, 여기서 진상을 찾아낸다는 설정과 전개를 가진 작품은 제법 되지만 - 대표적으로 <라쇼몽> - 이 작품은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일관된 방향으로 증인들이 증언하고 있고 딱 한명만 거짓을 말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도 분명 있습니다. 일단 열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으로 진상을 모두 설명하고 마무리 짓는 결말은 좀 당황스럽더군요. 너무 급작스러웠어요. 진상은 알겠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느낌이었달까요.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분명한 모순이 있습니다. 캐롤라인이 안젤라가 범인이라고 오해했다 하더라도, 엘사 그리어가 그림만 완성되면 내쫓길 것이라는 것을 왜 변호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까요? 증인이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먹힐 수 잇는 전략일 뿐더러 짐을 싸서 내쫓을 것이라는 말은 블레이크 형제가 듣기도 했고, 어차피 손해볼 건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경찰 수사를 통해서도 엘사 그리어가 진범임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아끼는 동생은 물론 다섯살밖에 안되는 어린 아이가 고아가 될 수도 있는데 쓸 수 있는 카드는 모두 써 봤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납득이 잘 되지 않네요.
또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마더 구즈 동요를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은 좋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래도 친숙하지가 않다보니 잘 와닿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사실 이 책이 700번째 추리소설 리뷰 글입니다. 그래도 나름 기념할만한 리뷰 도서인데 여사님 작품 정도는 읽어 줘야 할 것 같아 의도적으로 고르기도 했습니다. 별 네개 이상의 걸작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고요. 허나 제가 납득되지 않는 모순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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