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사전 - 김봉석.윤영천.장경현 지음/프로파간다 |
제가 어렸을 적, 국내 최고의 추리문학 출판사였던 해문에서 <세계의 명탐정 50인 (이후 일본 탐정을 뺀 44인으로 축약 재간)> 이라는 책이 출간된 적이 있었습니다. 명탐정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더불어 그들의 작품 중 한편을 축약하여 추리퀴즈 형태로 소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죠. 일러스트와 각종 추리관련 정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스포일러"라는 점에서는 비난받을 수 있지만 추리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나가던 추리키드에게는 정말로 좋은 선물같은 책이었죠. <세계의 위인은 명탐정>이라는 동일 구성의 시리즈가 출간되었을 정도이니 꽤 인기를 끌었던 것 같네요.
이 책 <탐정 사전>의 출간 정보를 들었을 때에는 바로 이 <세계의 명탐정 50인>의 현대적인 재구성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스포일러 문제 및 저작권 이슈도 있을 추리 퀴즈 부분은 빼더라도 충분히 가치있는, 그만큼 잘 만들어진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튼 옛 향수도 있고 제가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책일 것이라는 확신이 서서 출간과 거의 동시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아니, 솔직히 실망이 큽니다. 저는 이 책이 대체 누구를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지 알 수가 없네요. 추리문학 초보자들을 위해서라면 정말로 추리소설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엄선하여 그 중 등장한 탐정들을 중심으로 소개했어야만하고 애호가를 위해서라면 잘 알려지지 않은 탐정을 소개하거나 아니면 기존에 소개된 탐정이라도 뭔가 자료가 될만한 다양한 정보들을 실어주는게 맞았을텐데 이 책은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입니다. 부페에서 맛이나 코스구성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닥치는대로 음식을 얹어놓은 쟁반을 보는 느낌이에요.
일단 무슨 기준으로 탐정들이 선정되었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탐정을 담기는 당연히 역부족이겠죠. 하지만 선정된 탐정들에 대한 기준은 최소한 막연하게나마 있어야 하는데 그런게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출판물이라면 판매부수라던가 시리즈의 권수, 방송물이라면 시청률이나 방영횟수, 또는 역사적 의의 등의 기준이 있어야 했을텐데 말이죠. 솔직히 소개된 면면을 보면 저자들의 팬심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캐릭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IWGP>의 마시마 마코토나 <trick>의 야마다 나오코 우에다 지로, 니시오 이신의 이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이 다른 일본의 주요 탐정들 - 일본의 3대 탐정 중 하나인 가미즈 교스케나 다카기 아키미쓰의 다른 시리즈 캐릭터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우치다 야스오의 3대 명탐정 중 소개된 아사미 미쓰히코 외의 시나노의 콜롬보 다케무라 이와오나 경시청의 오카베 경부, 여정 미스터리의 대가 니시무라 교타로의 도쓰가와 (토츠가와) 경부 등등등... - 을 제끼고 선정될 정도로 추리문학이나 컨텐츠에서 비중있는 인물일까요?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절판본이나 국내 미출간작에 등장한 탐정을 소개하는 것도 불만이에요. 카렐 차페크의 메이즈리크 시리즈를 소개하며 국내에서는 절판되었다고 하는 식인데 어쩌라는 겁니까? 이런 작품도 읽어봤다는 저자들의 과시욕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느끼기 힘들었어요. 커트 캐넌 시리즈도 한권밖에 나온적이 없지만 현재는 국내 절판 상태고요. 뒤렌마트의 베르라하 (베를락) 경감 시리즈, 모돌이 탐정 역시 마찬가지죠.
그리고 캐릭터별로 글의 수준이 천차만별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말 그대로 사전이라면 내용만이라도 좀 공통된 포맷으로 일관되게 정리했어야 합니다. 최소한 구성 면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세계의 명탐정>과 같은 괜찮은 레퍼런스가 존재하는데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예를 들어 어떤 캐릭터는 단순히 캐릭터 정보 나열에만 그치는 반면 어떤 캐릭터는 캐릭터는 물론 작품에 대한 분석 및 작가소개까지 이어지는 등 책의 구성이 통일되지 못하고 난잡해요. 캐릭터 정보 나열에만 그치는 경우는 인터넷에서 간단히 찾을 수 있는 정보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고요. 반 두젠 (밴 듀슨) 교수 소개가 대표적인데 천재라는 것과 별명인 생각하는 기계의 유래. 대표작인 <13호 독방의 문제> 소개에 그치거든요. 추리 애호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으로 이런 글이라면 하루에 몇십개라도 쓰겠네요. 이럴거면 아예 소개를 하지 말던가.
내용에서도 대체로 주요 작품과 그 속에서의 활약상을 소개하지 않는데 이 정도는 맛보기로 보여주는게 훨씬 좋았을테고 실제 캐릭터가 존재하는 경우만 묘사된 일러스트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터치가 약간 독특하기는 하지만 새롭거나 색다름을 느끼기 힘들었으니까요. 탐정들의 목차도 시대순이나 활약한 장르순이 아니라 단순히 이름 순이라는 것도 솔직히 어이가 없는 부분이었어요.
물론 건질만한 부분이 없는건 아니에요. 결과물이야 어찌됐건 고전본격물에서 하드보일드, 현대물에다가 대체역사 판타지 (다아시경 시리즈)과 SF (강철도시)에다가 만화 및 드라마까지 아우르는 볼륨은 풍성하고 몇몇 캐릭터는 심층적인 분석 및 작가에 대한 소개, 대표작에서의 활약상과 간략한 내용이 어우러져 제대로 소개되고 있기는 합니다.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편애가 느껴질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으며 기리노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와 하라 료의 사와자키에 대한 소개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인 미야베 미유키의 스가무라 사부로 시리즈와 센도 타카시의 <폐허에 바라다>는 한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고요. 이런 생각을 들게 만드는 것이 이런 류의 책의 순기능이라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잘 알려지지 못했거나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비중이 없었던 캐릭터가 소개되는 것은 반가운 부분이었습니다. 전자는 <클로버의 악당>들의 빌 파믈리, 그리고 토니 힐러만의 인디언 탐정 조 리프혼과 짐 치가 대표적입니다. 후자는 토마 소로 대표되는데 소갯글이 <QED>의 매력을 소개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 것이 조금 아쉽긴 하네요.
그러나 장점은 드물고 단점이 훨씬 크게 느껴지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괜찮았던 몇몇 글에 비해 전체적인 만족도가 심하게 아니었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군요. 앞서 말했듯 이도저도 아닌 방향성이 부재한 기획물일 뿐더러 대부분의 내용이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으로 거의 30여년전에 읽었던 <세계의 명탐정 50인> 대비 나은 점도 잘 모르겠고요. 15,000원이라는 가격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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