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철리가의 여인 - 로스 맥도날드 지음, 이원경 옮김/시작 |
석유개발회사의 사장 호머 위철리는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뒤, 자신의 딸 피비가 실종된걸 알고 사립탐정 루 아처에게 딸을 찾아줄 것을 의뢰했다. 루 아처는 실종이 호머의 전처 캐서린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호머는 캐서린이 수사에 개입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이에 아처는 피비의 남자친구 보비, 캐서린 등을 차례로 만나 사건의 전모를 서서히 알아가는데...
대실 해밋, 레이몬드 챈들러와 함께 하드보일드의 삼두마차 중 한 명인 하드보일드의 서정시인 로스 맥도날드(왜 맥도널드가 아닐까요?)의 루 아처 시리즈 장편입니다. 이전에 다른 버전으로 여러 번 읽어보았던 작품입니다. 새로운 번역이 어떨까 궁금하여 읽어보게 되었네요. 마침 리뷰도 그동안은 남기지 않았었으니까요.
그런데 읽고 나니 좀 의외였습니다. 상당한 걸작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사건이 쉽게 연결되고, 지나치게 작위적인 부분이 눈에 많이 뜨이는 탓입니다. 사건 수사도 일사천리로 진행되고요. 예를 들면 캐서린, 피비를 협박하던 협박범 메리먼을 알게 된 건 캐서린이 집을 내놓은 부동산 업자이기 때문이며, 그와 컴비를 이룬 악당 스탠리는 벤의 처남이자 캐서린-피비가 잠시 머문 아파트 옆집에 거주했다는 식입니다. 덕분에 빠르고 쉽게 전개되긴 하지만 정교한 느낌은 받기 힘듭니다. 등장인물들은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게임의 NPC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메리먼과 스탠리가 처음에 캐서린을 협박하게 된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단점도 크게 다가옵니다. 캐서린의 놀이 상대였을 수도 있다는 정도의 정보로는 부족했습니다.
또 제목의 "여인"의 원제가 복수인 women이 아니라 단수 woman이라는 점에서 강하게 시사하는, 위철리 가의 여인은 딱 한 명밖에 없다는 비교적 괜찮은 서술 트릭도 루 아처가 직접 그녀를 만나보았음에도 어색하거나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묘사 때문에 설득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스무 살 이상 차이나는 엄마와 딸인데 아무리 화장을 떡칠하고 피곤과 스트레스로 엉망이 되었다 하더라도 못 알아보았다? 루 아처의 직업적인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점 때문에 루 아처가 그렇게 뛰어난 탐정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동기 역시도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트레버의 마음가짐이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못한 탓이 큽니다. 무려 이십여 년을 참고 지냈을 뿐더러 나이도 먹고 병도 있다면 어떤 협박이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초월할 것 같은데 말이지요. 이 정도면 아예 자포자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랬다면 애초에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죠?
또 "소름"과 유사하다고 느껴진 점도 아쉽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소름"보다 먼저 발표된 작품이기는 하지만 '가족의 현재 위치를 뒤집는 설정'이 핵심이라는게 똑같으니까요. 그런데 "소름"만큼의 충격을 가져다주지 못해서 "소름" 대비 여러모로 2%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피비가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칼 트레버였다던가 정도의 충격은 전해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평가절하하기는 어려운 고전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순문학에 가까운 미려한 문체는 여전한 볼거리예요. 일어 중역본에서 느끼지 못했던 명문들도 가득하고 루 아처의 캐릭터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편이니까요. 특히 "연민"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루 아처의 심리 묘사를 통해 당대 다른 하드보일드 탐정과 차별화되는 독특한 개성도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순수한 욕망의 몸부림으로 시작해 살인으로 끝난다는 칼 트레버의 고백이 내용의 전부라는 심플한 구성도 마음에 듭니다. 대부분의 하드보일드가 그러하지만 "돈"보다는 "욕망"이라는 포인트가 괜찮았어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과 가진 것을 지켜야 하는 욕망이 교차하는 동기는 언제나 설득력 있기 마련이죠.
피비가 호머 위철리가 아니라 칼 트레버의 딸이었다는 반전도 캐서린이 죽으면서 남긴 다잉 메시지를 잘 설명해주면서도 칼 트레버가 왜 이렇게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여 고뇌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고요. 주변 남성들을 모두 파멸로 몰고 가는 독특한 팜므파탈 캐서린 위철리의 존재감도 대단하며, 작품 내에서 단 한 번도 살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과거형으로 묘사하는 방식도 신기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시대를 초월한 걸작은 아니지만 하드보일드 거장의 솜씨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가작입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처럼 좋은 추억만을 간직할 것을 괜시레 다시 읽었다가 평점만 깎은 것 같아 내심 미안하기도 하군요. 제 올타임 베스트 중 한 편인 "소름"도 지금 다시 읽으면 별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데, 시간 나면 한번 뒤적여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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