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 이승원 지음/천년의상상 |
100년 전 주로 대한민보에 실렸던 시사 만평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전해주는 미시사 서적...으로 알고 읽었는데, 의외로 시사 만평의 비중은 크지 않았던 책입니다. 하지만 굉장히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이유는 이 책을 통해 소개되는 100년전 대한제국의 모습이 현재 시점의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당과 점쟁이 이야기로 시작되는 제 1장부터가 그러합니다. 피난가던 명성황후의 환궁일을 맞춘 무당 진령군과 이를 이용하여 사기를 쳐 먹은 점쟁이 이유인, 그리고 명성황후가 빙의되었다고 굿을 하고 나중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여 추도회를 거행한 무녀 수련이 차례로 등장하는 내용인데, 무당, 점쟁이가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린다는건 최근에 많이 들은 이야기니까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렀다와 같은 고관대작 매국노들의 스캔들을 다룬 두번째 장 '스캔들'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에요.
5장 '통변'에서는 유명한, 고종의 커피에 독을 탔던 사건이 소개됩니다.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통역관 김홍륙이 저지른 일입니다. 김홍륙이 아관파천 이후 권세를 농락하다가 그 정도가 지나쳐 고종 눈 밖에 나서 귀양을 가게 된게 동기고요.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기에 일개 통역이 감히 왕을 시해할 생각을 했는지, 참 할 말이 없습니다(참고로, 그런데 아편 한 냥쭝이 과연 치사량이었을지 궁금합니다. 감히 황제의 독살을 시도한 것 치고는 '아편'은 너무 안전하게 간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김홍륙 외의 다른 통역관, 특히 일본군의 조선인 통역의 악행 역시 화려하게 소개됩니다. 통역들의 행동거지는 개돼지의 활갯짓으로 비판받을 정도였다니 말 다했지요. 읽다보니 작금에 영어를 무기로 승승장구한 몇몇 인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6장 '만민공동회'에 등장하는 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의 거리 투쟁은 지금의 촛불 집회와 판박이입니다. 당시 서울 인구 17만명 중 1만여명이 종로 네거리로 나와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정말로 똑같아요. 민심을 받아들인 고종 황제의 일부 개혁, 이후 1898년 10월~11월 관과 민이 모여 국정개혁을 논의한 관민공동회까지의 흐름도 거의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친러 보수파의 흑색 선전과 정치 깡패의 등장이라는 이후 전개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결국 여러가지 중상모략으로 처절하게 짓밟히고 끝나버렸던 과거와는 다르게, 지금은 100년전 보다는 조금 낫다는게 위안일 뿐입니다. 다행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나름 정보 공유가 지속되고는 있으니까요. 부디 만민공동회의 전철을 뒤따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9장 '생계형 협력자'에서는 생계형 매국노 서창보의 일대기가 그려집니다. 한마디로 요새 언론에 오르내리는 '부역자'입니다. 저자가 표현한대로라면 식민지 조선에서의 '마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그렇다고 주인이 되지는 못하는. 오히려 주인이 되려는 과욕 때문에 명줄이 끊기는 그런 존재요. 작금 부역자들의 삶도 부디 비참하게 끝나면 좋겠습니다.
이렇듯 100년의 시공을 초월해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가득 실려 있습니다. 이외에도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많은데, 몇가지 더 소개해드리자면 우선 7장 '도박'에 소개된 '삼십육계'라는 도박이 있습니다. 판주가 쓴 숫자를 맞추면 30배의 돈을 받고, 숫자를 맞추지 못하면 판돈을 모두 판주가 갖는다는 심플한 도박인데 가난한 서민층, 빈민층에게 유행했다고 합니다. 돈을 거는 사람은 36/1의 확률로 돈을 걸어서 이기면 30배를 받으니 그냥 봐도 판주의 확률이 엄청 높은, 불공정한 도박인데, 이런 사기에 가까운 도박이 성행한 것 부터가 참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10장 '사진'에서 대원군과 추종자들이 만들어 내었다는, 외국인들이 아이를 훔쳐 삶아먹는다는 소문도 재미있었습니다. 일종의 여론 조작인데, 쇄국정책을 주장한 대원군 답습니다. 또 소문의 발단이 '사진기'였다는 것도 흥미로와요. 렌즈를 어린아이의 눈알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니, 지금 보면 어처구니 없지만 또 그런 허황된 상상이 난무하던 당시 현실도 이해가 갑니다.
이렇게 재미는 물론 나름의 가치가 확실한 괜찮은 책인 덕분에 별점은 3.5점입니다. 제가 근대 조선을 다룬 미시사 서적은 다수 접해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책이에요. 감점한 이유는 아주 약간이긴 합니다만 다른 근대를 다룬 서적들과 겹친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분량에 비하면 조금 비싼 가격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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