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찾는 서체가 없네요 - 사이먼 가필드 지음, 송성재 외 옮김/안그라픽스 |
여러가지 서체를 통해 서체의 역사와 디자인 속성들, 그리고 쓰임새 등에 대해 안내해 주는 책. 정말 오랫만에 디자인 전공 관련 책을 읽어보았네요.
제가 이십년도 더 전,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할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내용이 많았습니다. 헬베티카가 왜 그렇게 많이 사용되는지?에 대한 저자의 해설처럼요. 헬베티카는 불편부당, 중립성, 신선함 등 스위스적 특성을 잘 드러내는 기하학적 인상과 함께 근면하고 정직하다는 느낌을 전해주어 기업의 CI에서조차 친근하고 검소한 인상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애초 헬베티카는 간결하고 범용적인 알파벳, 그리고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중요한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지요.
제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 유니버스는 프루티거가 디자인한 서체로 스위스의 완벽함과 프랑스의 우아함, 영국의 고귀함을 종합했지만 조금 엄격하고 융통성이 없는 반면, 프루티거는 좀 더 인간적인 느낌이 담겼다라는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프루티거를 더 많이 쓸걸 그랬네요. 여튼, 프루티거가 했다는 말, "점심식사 때 사용한 스푼의 모양을 기억한다면, 분명 그 모양은 잘못된 것입니다. 스푼과 글자는 도구입니다. 하나는 그릇에서 음식을 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페이지에서 정보를 꺼내는 것입니다.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글자여서 독자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 그것이 좋은 디자인입니다".는 모든 디자이너들이 새겨들어야 하는 말이라 생각되고요. 평범하지만 아름답고 편안한 것, 그게 궁극의 디자인이라는 건데 정말 공감이 많이 됩니다. 메타 폰트 등을 디자인한 전설적인 독일 폰트 디자이너 슈피커만이 한 말도 마찬가지에요. <<이코노미스트>>의 리디자인 작업을 할 때 한 말이라는데, "나는 결코 누군가가 그 서체를 꼭 집어서 '멋진 서체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정말 멋진 기사네요.'라고 말해주기를 바라죠. 나는 소리를 디자인해요. 그 소리는 읽기 쉬워야 하죠". 거장은 역시, 달리 거장이 아닙니다.
이외에도 푸투라, 고담, 타임스뉴로만, 배스커빌, 길산스, 리버풀, 벵돔 등 다양한 폰트의 탄생기와 사용기 등과 서체를 만들 때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나가는지, 어떤 서체가 가독성이 좋은지, 어떤 문구가 서체를 표시하기에 적당한지, 어떤 서체가 어떤 상황에 적합한지와 같은 디자인 방법론, 그리고 헬베티카를 표절한 에이리얼과 같은 표절 및 폰트 저작권이 무시되고 사용되는 행태 등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여러가지 디테일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과연 '헬베티카' 폰트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 와 같은 재미난 이슈들도 포함하고 있고요.
이 중 기억에 남는건 특정 상황에서 어떤 서체가 어울리는지?에 대한 연구 결과입니다. 감사편지는 자신 있는 분위기와 분명하고 진실한 태도를 보여줘야 하니 제네바가 제격일 것이며, 사직서의 경우는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즐거웠다면 뉴욕이나 버다나 같이 인간적인 면이 묻어나는 서체를, 일하던 시간이 지옥같았다면 냉정해 보이는 에이리얼이 적절하다고 합니다. 연애편지에 잘 어울리는 폰트는 이상적으로는 O가 큰 폰트가 사랑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조금 고풍스러운 글씨 느낌이 나거나 글을 읽는 사람에게 말을 걸려는 듯 부드럽고 서정적인 이미지를 남기려면 이탤릭체인 휴머나 세리프라이트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하고요. 절교 편지에는 불쾌함을 주지 않으면서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하려면 평범하고 오래된 타임스레귤러, 혹은 살짝 내려놓는 느낌의 이탤릭 폰트도 나쁘지 않다네요.
그리고 항상 궁금해했던, '왜 아직도 새로운 서체가 디자인되는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알려준다는게 참 좋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세상이 바뀌고 그 세상의 콘텐츠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것을 표현하고 싶어하니까요. 음악 앨범, 책 디자인을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몇 개의 마스터 페이지로 돌려막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이렇게 재미와 가치,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좋은 책인데, 내용에 약간 두서는 없으며 편집 자체가 좋지 않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언급되는 폰트를 따로 찾아서 확인해보기가 어렵게 만들어져 있거든요. 좋은 서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좋은 디자인을 보여주지 못하니 조금 당황스러웠어요. 당연하겠지만 영문 서체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도 한국의 디자이너들에게는 조금 괴리감을 전해주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폰트 디자인을 막 배우기 시작했던 학생 시절이나 아니면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할 때 읽지 못했던게 아쉽기만 하네요. 왜 이 서체가 이렇게 디자인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디자인을 했어야 했는데, 단순히 글자 몇 개의 디자인 형태에 매몰되어 대충 아웃라인만 따서 변형하여 작업했던 그 시절이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 지금이라도 심기일전하여, 좀 더 좋은 디자인을 해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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