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여로 -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엘릭시르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에서 일하는 여대생 리카코는 삶의 의미나 재미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유부남 애인 도모나가의 부탁으로 함께 자살 여행을 떠난 후, 아타미의 아가미 깊은 산 속에서 수면제를 다량 복용한다.
하지만 구토 증상으로 수면 상태에서 깨어난 리카코는 옆에 누운 도모나가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걸 알고 놀라 도쿄로 돌아와 도모나가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밝혀내려 하는데...
오랫만에 추리 소설을 집어 들게 되었네요. 이 작품은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다소 과한 별명의 소유자인 일본의 여성 추리작가 나쓰키 시즈코가 1975년에 발표한 장편입니다. 이전에 읽었었던 저자의 장편은 두 편인데 나름 복잡한 트릭이 등장하는 W의 비극이 평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짝퉁인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는 완벽한 졸작이었다면 이 작품은 그 중간 정도 수준입니다.
특징이라면 전형적인 일본 사회파 스릴러, 추리물의 얼개를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청춘 남녀가 등장해서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일본 전역의 여행을 통해 전개되며, 이 와중에 제법 기발한 트릭과 진상이 선보이는 내용은 사회파 작가 중에서도 당시 일본을 평정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초기작 영향이 아주 짙게 느껴졌습니다.
사회적인 문제, 이슈가 전면에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누구나 쉽게 위조할 수 있는 호적, 호모섹슈얼과 바이섹슈얼, 트렌스젠더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사회파 추리물이라고 해도 무방할겠죠. 하여튼, 예상 외의 장르라 놀랐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점, 단점도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들과 비슷해요. 장점부터 설명드리면, 첫번째는 쉽게 읽힌다는 점입니다. 도모나가 죽음의 진상을 쫓는 리카코와 실종된 매형 이와타의 행방을 쫓는 다키이가 우연히 만나 함께 사건을 파헤쳐나가는 과정 속에서 잇달아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등 독자의 흥미를 잡아끄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거든요. 펄프 픽션이기는 하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두번째 장점은 나름의 트릭과 더불어 이어지는 반전과 진상이 괜찮다는 점입니다. 도모나가는 자살할 생각이 없었고, 성전환을 한 아내 유키코의 비밀을 알고 협박하던 이와타를 아내가 살해하자 그 시체를 은닉하기 위해 동반 자살을 가장했다는게 진상인데, 1975년이라는 시대를 놓고 보면 꽤나 앞서간 "성전환 수술"을 활용한 반전이 돋보여요. 이를 앞 부분에서부터 계속해서 복선을 던져주며 중간중간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흘려서 설득력도 높은 편이고요. 리카코가 남장을 한다던가, 남장을 하면서 기묘한 매력을 느낀다는 묘사는 지나치고, 복선이 좀 과한 탓에 어느 정도 되면 진상은 눈치챌 수 있기는 하지만요.
참고로 덧붙이자면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 중 <<흑마술의 여자>>가 살짝 떠오르는 반전이기도 합니다. 1974년 발표된 작품인데 성전환까지는 아니지만 질 형성술에 대한 내용이 유사하기 때문인데 아무래도 조금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기도 하네요.
세번째 장점은 이러한 내용 중에서 정사를 떠난 아타미로의 여정, 아오야마에서 오모테산도 등 도쿄 시내와 가사이, 이와타의 뒤를 쫓아 헤메는 후쿠오카, 리카코와 도모나가의 고향인 시즈오카 방문 등 다양한 지방을 방문한 묘사들입니다. 디테일도 좋고 생동감이 넘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직접 방문한 느낌이 팍팍 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행이 막 시작되었을 여정 미스터리 느낌인데 이런저런 흥행 요소를 모두 가져다가 인기작을 만드려는 작가의 의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장점으로는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독특한 시각이 빛나는 묘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죽은 도모나가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는 은빛 예거 르쿨루트, 집으로 돌아온 리카코가 찾은건 담배로 오래된 하이라이트, 다키이의 차는 회색 코로나, 다키이다 주문한 술은 미즈와리라는 식의 디테일들이 발군인데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묘사는 숨어 살게 된 리카코의 이사 선물이자 집들이 기념으로 다키이가 사온 선물입니다. 인스턴트 커피, 각설탕, 하얀 머그잔 두 개인데 정말 센스가 대단하지 않나요?
또 월경곤란증 치료약으로 경구피임약으로도 알려져 있는 필이 주요 단서로 쓰인 점은 확실히 여성 작가라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었고, 중간에 지하철에 우연히 본 여성을 보고 스스로 남장을 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여성이기에 할 수 있는, 그런 묘사였다 생각되네요. 남과 여, 누명을 쓴 리카코와 진범 등 정 반대 상황을 은유하여 붙인 제목도 멋지고요. 아마도 모리무라 세이이치였다면 굉장히 직접적인 제목이었을 거에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해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흥행을 노리고 이런저런 요소를 모두 모아놓기는 했지만 이 모든게 구태의연하다는 점입니다. 질퍽한 정사 장면에서 시작되는 첫번째 문단부터 흥행을 노린 티가 물씬 나지만 무척 식상했어요. 또 아무리 이인증이라는 병을 조금 앓고 있더라도 꽃다운 스물한살 여대생이 불장난 같은 불륜 상대, 그것도 열 일곱섯 살이나 많은 연상의 남자와 동반 자살을 쉽게 결심 한다는 설정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이럴거면 보다 깊은 관계였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불거지는 '정사'라는 소재는 구태의연의 극치고요.
그리고 정사 이후의 과정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뻔하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리카코와 다키이가 서로 만나게 되는 상황부터가 그러해요. 리카코가 도모나가의 집을 찾아가는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다키이가 도모나가의 집을 찾아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 불과하거든요. 게다가 매형 이와타가 실종되고 사흘만에 범인의 집을 찾아내고, 나흘째 잠복하다가 리카코를 만나게 되는 식인데 이 정도면 경찰이 도대체 왜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훨씬 유능하잖아요?
이어지는 전개도 작위적이고 우연에 기반한건 모두 마찬가지로 특히 가사이가 죽기 전 마키노 의사의 이름을 남긴게 가장 억지에요. 그냥 "유키노는 남자였다" 라고 이야기하는게 당연하죠. 의사의 입을 통해 성전환의 과정을 설득력있게 표현하려 한 작가의 의도는 알겠지만 도가 지나쳐 이야기가 산으로 간 느낌입니다.
그 외에도 호적 위조를 통한 신분 세탁이 반복되고, 유키노의 무모한 범행이 성공리에 거듭되는 전개도 별다른 고민이 느껴지지 않아 별로였어요.
이렇게 장점, 단점이 명확한 작품으로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인 해피 엔딩이라는 결말은 나쁘지 않으며 쉽게 읽히기는 하는 만큼, 이 작품으로 사회파에 입문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다키이가 요 몇 주 동안 쓴 돈이 도대체 얼마나 될지 궁금해서 대충 큰 비용만 따져 보았는데 후쿠오카 비행기 2명 왕복, 리카코가 묵는 싱글룸 2박에 다키이가 묵는 스테이션 1박 호텔비, 꽤나 장거리 (합쳐서 시외 편도 한시간?) 왕복 택시비, 기차로 한시간 반 정도 걸리는 시즈오카행 신칸센 왕복 비용, 시즈오카에서 편도 삼십분 정도 택시 비용, 마지막 추격에서 삿포로행 비행기 편도 두 장, 지토세 공항에서 오카다마 공항까지 택시비, 메반베쓰행 비행기 편도 두 장을 한국 기준으로 후쿠오카는 부산, 시즈오카는 광주, 삿포로는 제주로 대체해보면 전부 백오십만원 정도 쓴 듯 합니다. 여기에 리카코의 임시 거처까지 마련해 주다니... 1급 건축사 면허 소유자로 설계부서 내 1팀 주임이라고 하는데 돈벌이가 꽤 괜찮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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