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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4

타임 리프 1, 2 - 타카하타 쿄이치로 / 키누타니 유 : 별점 3점

타임 리프 1 - 6점
타카하타 쿄이치로 지음, 키누타니 유 그림/대원씨아이(단행본)

평범한 여고생 카시마 쇼우카는 어느날 잠에서 깬 뒤 분명 "월요일" 이어야 하는데 그날이 "화요일" 이라는 사실을 알고 당혹해한다. 그런 그녀가 찾은 것은 자신의 일기장. 기억에 없는 "월요일"에 쓴 일기는 지시한다. 이 일에 대해 같은 반 동급생 와카마츠 카즈히코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
위 포스트에서 언급한 일본 미스테리 올타임 베스트 100에 무려 18위! 라는 순위로 올라와 있는 작품. 국내에서는 라이트노벨 대표 브랜드인 NT 노벨을 통해 2004년도에 발간되었습니다. 이 리스트를 통해 알지 못했더라면 절대 구입할 일이 없었겠지만, 이런 리스트에 워낙 잘 낚이는터라 혹해서 구입하게 되었네요. 
그런데 감상문에 앞서 구입 과정을 꼭 언급하고 싶습니다. 정말 드라마틱했거든요. 국내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아낸 뒤 인터넷을 여러날 뒤졌지만 구하는 사람은 많은데 책 자체는 도저히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과 5년밖에 안 지난 책을 이렇게 구하기 힘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가 절판본 구하는데는 상당히 유능한(?) 편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루트를 총 동원한 끝에 내린 결론은 "포기"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지난 주말 방문한 북오프 신촌점 판타지소설 서가에 이 책이 두질이나 떡하니 꽂혀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거 참 황당하기도 하고 좀 어처구니도 없고 기쁘기도 하고... 그야말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것이겠죠.
책도 어렵게 구한만큼 상당히 재미있게 읽어서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생각했던대로 본격 미스터리의 요소가 많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몸은 그대로 있고 정신만 시공을 넘나드는 "타임리프"라는 설정 자체도 독특했고, 이러한 공상과학같은 이야기가 지구와 우주가 걸려있는 거창한 세계관이 아닌 실제 있음직한 고등학교를 무대로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설득력있는 소품이라는 것, 그리고 "타임리프의 원인"과 "잊혀진 일요일에 벌어진 사건의 진상" 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굉장히 흥미진진했기 때문이죠.
특히 이 책을 광의의 미스터리의 영역에 위치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는 이 타임리프로 시공간을 오가는 이야기가 일요일에서 토요일까지의 딱 6일간으로 깔끔하게 정리되고 있으며 모든 이야기들이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도록, 퍼즐처럼 씨줄과 날줄같이 잘 짜여져 있는 등 치밀함이 돋보이는 것이 한층 재미를 더합니다. 전개과정에서도 복선과 여러 단서가 절묘하게 이어지는 것은 물론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수학시험이나 편지, 호신술 같은 장치도 이야기의 설득력을 더하며 재미를 한층 더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거창한 이름의 리스트 상위권에, 무려 18위에 위치하는 만큼의 재미는 보장하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그간 저 역시 라이트노벨이라는 쟝르를 무시해 온 경향이 없잖아 있는데 반성해야 겠더군요. 어렵고 무겁고 진지하게 쓴다고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죠. 쉽고 재미있게 쓰면서도 쟝르 자체의 재미만 제대로 보여준다면 충분히 가치있는 작품이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책입니다.

단, 어디서 본듯한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것 (시간을 달리는 소녀 부터 시작해서...) 과 너무 어린 취향의 책 디자인과 삽화는 마음에 들지 않은 탓에 약간 감점하여 별점은 3점. 그래도 재미는 있었던 만큼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있다는데 꼭 구해봐야겠습니다. 역시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겠죠.^^

2007/06/01

시간을 달리는 소녀 : 별점 2.5점

마코토, 치아키, 코스케 3인은 항상 붙어다니는 단짝 친구. 어느날 마코토는 정말 운수가 나쁜 하루를 보내고 그 날 끝무렵에 전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게 되지만.... 시간을 뛰어넘어 살아난 자신을 발견한다. 마코토는 우연찮게 발견한 자신의 능력 (타임-리프)을 이용해 이런 저런 소소한 일상의 재미를 즐기는데...

하아.. 최근 회사일도 바쁘고 결혼도 겹쳐서 정신이 없네요. 블로깅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걱정입니다.

어쨌건, 이번에 감상한 작품은 "시간을 달리는 (건너는) 소녀". 이런 저런 상도 타고 해서 요새 꽤 알려진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도 간만에 진득하게 본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인 것 같습니다. 원작은 파프리카의 츠츠이 야스타카.

결론만 말하자면 저는 중반까지는 꽤 재미있게 봤습니다. 타임-리프라는 일종의 시간 이동을 소박하게 쓰는 소박한 재미가 좋았거든요. 파프리카를 읽었을 때의 감성과는 전혀 다른, 말랑말랑하고 흐뭇한 이야기들의 전개라 의외였는데 영상으로 참 잘 구현해 놓았더군요.

그런데 치아키가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장면 부터는 완전히 삼천포로 빠져서 실망했습니다. 물론 일종의 타임-패러독스를 잘 이용하여 주요 사건들을 깔끔하게 끝내려는 작가의 의도는 알겠지만 그냥 소박하고 담담하게 끝까지 가는게 더 제 취향이었을텐데 말이죠. 반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외였고 황당했다고나 할까요? 이건 뭐 도라에몽도 아니고.... 제가 나이가 많은 탓인지 현재, 그리고 지금의 감정을 중요시 해야 한다는 메시지 역시 와 닿지 않더군요.

그래도 잔잔한 재미를 느끼고자 한다면 꽤 볼만하다 생각됩니다. 최소한 중반부까지는 무척 재미있고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또 전체적인 연출도 아주 좋았습니다. 중반부의 치아키의 고백을 수차례 반복하는 장면이나 치아키의 정체가 밝혀진 다음에 마지막 한번의 타임-리프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는 후반부 연출 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보다는 영화가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특수 효과도 별다른게 필요 없었을텐데....

2014/07/14

일곱 번 죽은 남자 - 니시자와 야스히코 / 이하윤 : 별점 3점

일곱 번 죽은 남자 - 6점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북로드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생 히사타로는 하루를 아홉 번 반복해서 겪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의도도 아니고 원리도 모르지만. 히사타로는 그것을 "반복 함정"이라고 불렀다.

그런 히사타로는 할아버지 댁에서 열리는 신년회에 모든 가족과 함께 참석했다. 히사타로의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재산을 노리고 막내 이모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신년회에서 후계자가 정해질 예정이었다. 신년회 중 히사타로는 모처럼 술을 많이 마셔서 집에 가는 차를 탔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아침 그는 다시 할아버지 집에서 눈을 떴다. "반복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어제와 다르게 할아버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히사타로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아홉 번의 반복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작전을 짜지만,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 할아버지를 살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히사타로는 과연 할아버지의 살해를 막을 수 있을까?

그간 격조했습니다. 장기간 출장을 다녀오는 바람에... 정말 오랜만에 리뷰를 올립니다. 이 작품은 "닷쿠 & 타카치 시리즈"로 접해보았던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으로,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타임 루프를 다룬 콘텐츠는 많습니다. "도라에몽"에서는 숱하게 반복된 소재이기도 하고, 작가 본인도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영감을 얻어 썼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은 명확하게 정해진 규칙 안에서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전개를 갖췄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해당 규칙은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1. 반복 함정은 아홉 번 반복되고 다음 날로 이어진다.
  2. 상황을 바꾸려는 노력도 "오리지널 주"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결국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규칙을 통해 히사타로가 할아버지의 살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작품 내에서 설정되어 있는 후계자 선정과 맞물려 재미있게 펼쳐집니다. 특히 하루 일상의 조그만 변화가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과율에 대한 정교한 묘사가 발군입니다. 예를 들면 루나 누나의 귀걸이의 존재 같은 것이요.

추리적으로도 즐길 거리가 많습니다. 할아버지가 집을 방문한 가족들에게 이상한 의상을 강요하는 이유, 아침에 빨간색 색종이를 찾은 이유, 범인들이 호접란 화분을 흉기로 쓴 이유, 할아버지의 일기 등의 디테일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합리적으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반복 함정"의 맹점이자 오류를 해결하는 마지막 부분이 압권입니다. 히사타로가 죽었을 가능성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요. 그 외에도 작품이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한 묘사가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아무래도 정통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탓입니다. 히사타로가 범인이 누군지를 알고 범행을 막기 위해 노력해도, 원래의 결과로 회귀하기 위하여 또 다른 인물이 범행을 저지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작중 히사타로가 결국 누군가 다른 인물이 범행을 저지를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너무 늦는게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무의미한 노력을 너무 반복했달까요.

그리고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 "반복 함정" 때문에 히사타로가 30세 정도의 정신연령을 갖췄다고 한들 사람들이 인식하기로는 고등학교 1학년이라서, 한참 연상인 도모리 씨가 사랑에 빠진다는게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도모리 씨의 감정과 고백이 반복의 와중에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하는 부분이기도 한 만큼, 무난하게 히사타로를 대학생 정도로 설정하는 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이색적인 타임 루프 SF로 읽히는 재미 하나만큼은 충분한 가작입니다. "타임리프"와 비스무레하지만 나름 차별화되는 점도 많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되네요.

2021/05/01

스텝 - 찬호께이, 미스터 펫 / 강초아 : 별점 2.5점

스텝 - 6점
찬호께이.미스터 펫 지음, 강초아 옮김/알마

'사보타주'라고 불리우는, 범죄자 형량을 인공지능 분석을 통해 결정하는 시스템을 주제로 한 4편의 중편이 모여 하나의 큰 이야기를 이루는 연작 소설집입니다. "13.76"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중국 추리작가 찬호께이가 타이완의 추리 작가인 미스터 펫과 함께 쓴 작품이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저' 방식은 아닙니다. 기둥 줄거리와 기본 설정은 함께 생각했을테지만, 미국을 무대로 한 첫 번째, 세 번째 이야기를 찬호께이가, 일본을 무대로 한 두 번째, 네 번째 이야기를 미스터 펫이 써서 합쳤거든요. 

그래서 각각의 이야기는 분위기와 전개가 사뭇 다른데, 찬호께이가 쓴 작품들은 정교한 구성, 반전 모두 어느 정도 기대에 값합니다. 하지만 미스터 펫의 작품은 별로였습니다. 작위적인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왜 일본을 무대로 했는지도 모르겠고요. 특히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는 그 수준이 가히 처참한 수준입니다. 미스터 펫이 맡았던 이야기들은 작 중에서 인공 지능의 시뮬레이션 시나리오라고 설명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처지는 완성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어요. 찬호께이가 맡았던 첫 번째 이야기 속 매슈 프레드 범죄극도 마찬가지로 시뮬레이션이지만 범죄물로는 차고 넘치는 좋은 작품이었으니까요. 추리물, 범죄물이 아닌 SF 측면으로도 사보타주 시스템 등 상세 설정도 찬호께이 이야기에서 더 잘 설명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찬호께이 부분은 별점 3.5점, 미스터펫 부분은 별점 1.5점인데 찬호께이가 이야기 전부를 썼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P.1 SA.BO.TA.GE. /찬호께이 : 

미국을 무대로 매슈 프레드라는 범죄자가 저지르는 여러가지 범죄를 그려낸 작품. 이 중 마지막 범죄는 꽤 완성도가 높아요. 술집에서 만난 E와 의기투합해 그의 전처를 응징한다는건데, 아내나 불륜남이 아니라 E를 죽이고 아내에게 살인 누명을 씌운다는 반전이 괜찮았거든요. 매슈 프레드가 저지른 모든 범죄는 사보타주가 시뮬레이션한 내용이라는 큰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E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정비공에게 시세보다 훨씬 큰 돈을 주고 자동차 정비를 맡기는 등 약간의 헛점은 있지만, 이 모든게 시뮬레이션이라면 어느정도 납득할 만 합니다.

EP.2 T&E /미스터 펫 : 

탐정 메이구가 정부 의뢰로 사보타주 시스템을 일본에 이식한 '선인장' 시스템을 해킹한 범인을 찾아낸다는, 일본을 무대로 한 독특한 SF 추리물입니다. 

수사는 미행, 도청, 해킹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메이구가 가진 특수 능력이 무엇인지가 수수께끼의 핵심입니다. 사건 수사를 여러가지로 시도하면서, 실패할 때 마다 사건을 의뢰받은 시점으로 기억과 함께 돌아오는 능력이지요. 실패하지 않아도, 5일이 지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요. 이 능력 덕분에 메이구는 의뢰받은 사건을 5일 안에 밝혀낼 수 있었던 겁니다. 

이야기는 중간에 의뢰인이 사망하는 등의 깜짝 전개를 거쳐, 특수 능력이 밝혀지고 범인이 타케우치라는게 드러나며 타케우치와 메이구의 격투로 끝맺습니다. 지금 전개되는 현실은 메이구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로, 이 가상 현실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일종의 열린 결말입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타임 리프물, 타임 슬립물과는 다른 설정에 더해, 메이구가 리셋할 때마다 료코의 1인칭, 3인칭으로 시점이 변하는 묘사도 독특했습니다. 처음 읽을 때에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생각과는 사뭇 달라서 신선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하려면 료코 뿐만이 아니라 메이구로의 시점 전환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료코만의 시점 변화는 진짜가 아닌 가상 현실이라는걸 보여주기위한 장치로는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거든요.

EP.3 E PLURIBUS UNUM /찬호께이 : 

석방된 범죄자가 살인을 저지르는, 최악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본 법무부의 사보타주 시스템 총 책임자인 앤드루 키팅이 범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범인이 누구인줄 알지만, 시스템 비밀을 밝히기 어려워 전전긍긍하는 담당자의 고뇌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마지막 범죄 현장에서 마주치는 클라이막스 까지의 전개도 긴장감이 넘치고요, 마지막에 키팅이 읽은건 단순한 시뮬레이션 결과일 뿐, 실제 예측이 아니었다는 반전도 설득력있게 묘사됩니다. 

문제는 전개와 결과가 예상가능했고, 운과 우연에 지나치게 의지한다는 점입니다. 시뮬레이션과 비슷하게 애덤스가 현장에 나타나서 희생된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보타주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내는데 너무 치중한 결과물이었어요. 키팅이 범인 애덤스를 죽이고 그냥 잡혀갈 생각을 했다는 것도 석연치 않았고요.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밝혀지는 두 번째 이야기 속 기묘한 설정만큼은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키팅은 범죄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인공지능이 시뮬레이션 도중 일정 조건이 만족되면 자동으로 특정 시점으로 되돌아가 변수를 변화시켜 시뮬레이션을 계속하는 '가젯'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점을 되돌리는 방식을 인공지능이 학습해 버려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버렸고 가젯이 유출되어 해커가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등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되지요. 이렇게 가상 세계 속에서 시간 회귀, 변수 수정, 데이터 기록의 능력을 갖게 되는 '머니퓰레이터' 를 잡기 위해 프로그래머 프랭크는 '에스코트'라는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에스코트는 머니퓰레이터를 확인하면, 소멸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지요. 즉, 두 번째 이야기에서 머니퓰레이터가 메이구, 에스코트는 다케우치였던 겁니다. 이런 점에서 다케우치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설정이 신선하게 다가오네요. 시스템만 놓고 보면 다케우치는 백혈구와 같은, 정의로운 존재인데 말이지요. 

그리고 머니퓰레이터로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는 방법은 인공지능 딥 러닝 학습법의 하나인 GAN 모델이 연상되어 더욱 그럴듯하게 여겨졌습니다. GAN 모델은 학습이 필요한 인공 지능을 Discriminator라고 부르며, 여기에 가짜 데이터를 만드는 Generator가 생성한 결과물을 입력하는 방식입니다. Generator의 위조가 정교해 질 수록, 이를 판별하는 Discriminator의 능력도 올라가는 방식이지요. 이 이야기로 따지면 메이구가 이런저런 가상 시나리오를 시도하는 Generator이고, 사보타주 시스템 속 인공 지능이 Discriminator인 셈입니다.

EP.4 PROCESS SYNCHRONIZATION /미스터 펫 : 

두 번째 이야기가 비롯된 원인인, 선인장 시스템에 침입하여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한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면서, 실제 현실의 메이구에 대한 비밀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 완성도가 절망스러운 수준입니다. 완벽한 보안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중앙 처리실에 두 시간 이상 머물려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한 방법에 대한 트릭부터 억지입니다. 뭔가 엄청난 시스템인 것 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그냥 데이터 조작과 별로 다르지 않거든요. 

과거 일본에서 실행되었던, 기억을 조작하는 수술인 HIMIKO 프로젝트도 뜬금없었습니다. 수술을 받았던 메이구가 수술에 대한 비밀 서류를 손에 넣고, 관계자들의 정체를 밝히는 전개는 유치하고 작위적이고요. 아무리 이야기가 모두 시뮬레이션 결과에 불과했다고는 해도, 앞서의 다른 시뮬레이션들보다 현격히 낮은 완성도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에필로그 : 

사보타주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인권을 무시하는 부분이 있어서, 결국 형법 제도가 옛날 방식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인데 솔직히 사족에 불과합니다. 개인적으로 범죄자가 수형 시설에서 교정, 교화가 될 수 있다는걸 믿지 않습니다. 때문에 제대로 반성하지 않으면, 절대로 풀어주지 않겠다!는 정서가 깔린 사보타주 시스템의 형량 결정 시스템이 지금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됩니다.

2025/02/28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 다카노 가즈아키 / 김수영 : 별점 2점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 4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황금가지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단편집으로, 비일상적인 순간에 타인의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대학원생 야마하 케이시의 능력을 핵심 소재로 한 다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수록된 작품의 장르가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와 "3시간 후 나는 죽는다"는 시간 제한이 있는 서스펜스 스릴러물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날"은 일상계 추리 판타지 드라마고요. "시간의 마법사"와 "돌 하우스 댄서"는 케이시가 주변 인물로 등장하며, 미래와 현실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잔잔한 드라마입니다. 때문에 여러 취향의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 애호가 입장에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추리적인 요소는 부족하고, 서스펜스 스릴러로는 뻔했던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요시에는 케이시로부터 자기가 6시간 뒤 칼에 찔려 살해당한다는 예지를 들었다. 6시간 뒤는 요시에의 25번째 생일이었고, 마침 여성들이 생일에 칼에 찔려 살해당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던 참이었다. 요시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데이트 클럽에서 만났던 스토커가 범인일거라 생각하고 케이시와 함께 추적에 나섰다..

케이시의 첫 등장과 그의 능력에 대해 소개되는 시리즈 첫 작품입니다. 

살인이나 사고를 제한된 시간 안에 막아야 한다는 류의 '시간 제한 서스펜스 스릴러'는 매우 흔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 시리즈만의 특징은 나름 확실합니다. 케이시의 예지 능력에 여러 제약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비일상적인 순간'만 볼 수 있어 정확한 장소와 상황을 알기 어렵고, '시간'도 예지된 장면 속 시계를 봐야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한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려는 노력은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고, 이는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스릴러로서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스토커 누마타가 범인이 아니라면, 용의자가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탓입니다. 유력한 용의자는 예지를 핑계로 요시에와 함께 행동하는 케이시인데, 케이시의 예지 능력은 '진짜'라는 설정이 맨 앞에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인 데이트 클럽 여성들의 신상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범인인데, 데이트 클럽 사장은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니 이 정보를 아는 건 경찰 사와키밖에 없습니다. 즉, 그가 범인인 것이지요. 너무 뻔해서 의외성이나 재미를 주기는 힘들었습니다. 마지막에 '방탄, 방인조끼'를 입고 반격을 가한다는 반전도 마찬가지로 뻔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예지 능력이 등장하는 도입부는 신선했지만, 평범한 시간 제한 스릴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시간의 마법사"

"미쿠짱은 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분명 이겨낼 수 있어.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지만 마음으로부터 웃을 수 있는 날은 꼭 오니까, 그날을 믿고 힘내는 거야."

플롯 라이터 미쿠는 극작가로 성공을 꿈꾸지만, 기약없는 데뷰와 고된 생활에 지쳐갔다. 어린 시절의 행복을 떠올리고자 오랫만에 고향을 찾았다가, 20년 전 자신을 만나 하루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일종의 타임 리프, 타임 슬립물입니다. 본인은 아무 기억이 없지만, 20년 전의 잃어버렸던 하루를 20년 뒤 다시 보내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미쿠가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는 잔잔한 일상계 드라마로 케이시는 순전히 주변 인물로 등장하며, 예지 능력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작품도 잘 쓰는 작가라는 걸 처음 알았네요.

추리 애호가로서 특별히 점수를 줄 부분은 없지만, 희망찬 미래를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주제는 잘 전달해 주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날"

남자를 숱하게 사귀고 헤어짐을 반복하던 미아에게 케이시가 "수요일에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날 미아는 사고로 누군가 죽는 장면을 목격한 뒤, 지나가던 야마기시 신고에게 도움을 받고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신고는 점점 이중인격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퇴마 성수를 이용하여 이를 해결하려던 미아는 신고를 영원히 잃고 마는데..

미아는 당시 사고에서 죽은 남자가 신고에게 빙의했다고 생각해서 그를 물리치려고 퇴마 작업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신고에게 죽은 남자가 빙의했던 것이 아니라, 신고가 죽은 남자였다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신고의 혼이 '스즈키 히로시'라는 남자에게 빙의했던 것이지요. 신고는 미아가 벌인 퇴마 작업으로 영원히 떠나버리고 말고요

신고의 정체에 대해 밝혀지는 과정에서 추리물적인 성향이 살짝 보이기는 하지만, 일상계 판타지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대했던 장르물은 아니었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돌 하우스 댄서"

프로 댄서를 꿈꾸는 미호는 계속해서 오디션에 떨어져 좌절하던 중, 자신이 접하는 현재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기시감을 느끼게 되었다. 기시감은 어린 시절 찾았던 '돌 하우스'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현재를 담은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시간의 마법사"와 똑같은 잔잔한 일상계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는 내용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시간의 마법사"와는 전혀 다른게, 미쿠는 극작가로서의 미래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좋은 날이 올 거라면서요. 하지만 미호는 댄서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찾기로 결심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대사가 이 작품을 대표하는 메시지지요.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은 일에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인생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평범한 삶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게 더 중요하다는 "돌 하우스 댄서"가 주는 감동이 더 강렬했습니다. 꿈을 쫓는 삶을 살기에는 제가 나이가 많은 탓이겠지요.

케이시는 이름만 언급될 뿐 등장하지 않아서 연작물로서의 가치는 다소 낮지만,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3시간 후 나는 죽는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이하 "6시간 후...")" 사건 5년 후, 요시에가 일하던 예식장에 케이시가 하객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케이시는 자신이 3시간 후 죽는다는 예지를 보았고, 이야기를 들은 요시에는 케이시의 죽음에 이르는 사고를 막기 위해 분투하게 된다...

케이시와 요시에가 또다시 생존을 위해 시간 제한이 있는 사건 해결에 나선다는 내용으로 "6시간 후..."의 진짜 후속편에 해당합니다.

"6시간 후..."처럼 예지 능력의 제약을 잘 활용해 서스펜스를 제공한다는건 같은데, 후속편답게 조금 업그레이드된 서스펜스를 제공합니다. 이번에는 시간과 '불에 타 죽는다'는 상황만 알 수 있거든요. 왜 불에 타 죽는지 조차 알 수 없고요. 또 토도 교수의 은퇴식 피로연장에서 죽게 되는데, 그 자리에는 백 명이 넘는 사람이 있어서 더 큰 긴장감을 가져다 줍니다. 예지와 식장의 상세한 조사를 거쳐 폭발 사고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이를 밝히고 도움을 얻는건 불가능한 상황도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고요.

계속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좋았습니다. 케이시는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다며 3시간 후 반드시 죽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미오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미래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요. 요새 작품이라면 '멀티 버스'라고 부를, 평행 우주의 다른 루트로 옮겨 탄 결말인데, 뻔했지만 완벽한 해피엔딩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많이 부족합니다. 토도 교수의 자살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이 발포했고, 총알이 운 나쁘게 복도의 가스통을 맞춰서 폭발하게 된다는 상황부터 어처구니 없었어요. 게다가 이는 사전 조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고라, 시간 제한 서스펜스를 근본부터 흔드는 잘못된 설정이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14/05/16

육화의 용사 - 야마카타 이시오 / 김동욱 : 별점 2점

육화의 용사 1 - 4점
야마가타 이시오 지음, 김동욱 옮김, 미야기 그림/학산문화사(만화)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신을 쓰러뜨렸던 성자가 '마신은 돌아오지만 자신의 힘을 이어받은 여섯 용사가 나타나 마신을 다시 쓰러트릴 것'이라 예언했다. 여섯 용사의 증거인 몸 어딘가에 떠오르는 꽃잎 여섯 개의 문장때문에 그들은 '육화의 용사'라 불리게 되었다. 그 뒤 마신이 두 번 깨어나지만 예언대로 여섯 용사에 의해 다시 봉인되었다.

다시 마신의 깨어날 조짐이 있는 시기, 자칭 "지상 최강의 사나이" 아들렛은 육화의 용사로 선택받아 다른 용사들과 함께 마신의 근거지 마곡령으로 항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용사는 일곱 명이었다. 가짜는 누구인가?

한국 최고의 미스터리 동호회 하우 미스터리의 이벤트에서 어떤 분이 추천하였기에 읽게 된 작품.

마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용사들이 힘을 합친다는 전형적인 판타지 서사에서, 마신을 쓰러트리기 전 파티가 규합될 때 일어나는 일종의 해프닝에 집중한게 독특합니다. 정해진 숫자의 파티 인원을 초과한 상황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위기가 닥친다는 설정은 "11인이 있다!"와 동일한데, 진상을 밝히는 과정이 추리적으로 보다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는 차이가 있고요.

그런데 라이트 노벨이라는 장르가 모두 이런가요? 저하고는 전혀 맞지 않더군요. 제가 읽기에는 너무 유치한 설정과 묘사가 많았습니다. "타임 리프"는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는데 말이지요.
우선, 등장인물 설정부터 익숙해지기 어려웠습니다. 육화의 용사 모두가 만화 등에서 수없이 접해왔던 전형적인 인물들의 향연인 탓입니다. 여러 가지 도구를 이용하고 두뇌로 싸워나가는 허세남, 타고날 때부터 천재, 그 외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들, 공주, 기사, 마족과의 혼혈아, 로리로리…… 죄다 어디선가 보아왔던 설정들입니다. 그나마 생동감있게 표현했더라면 조금 나았겠지만, 모두 평면적인데다가 묘사도 지루했습니다. 개중 별다른 능력 없이 근성과 노력, 장비와 잔재주로 버티는 아들렛만 약간 인상적이지만, 아들렛 역시 결국은 모든 면에서(심지어 트라우마까지도) 배트맨과 다를 바 없어 식상함을 이겨내지 못하더군요.
대사도 유치합니다. 예를 들어 믿음에 대해 프레미와 아들렛이 나누는 대화는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었어요.

게다가 등장인물들 이름은 모두 서양식인데, 지명이라던가 별호는 대부분 한자식인 것도 거슬렸습니다. 비유하자면 "무당파 장문인 톰 크루즈와 마교 교주 매튜 매커너히가 마신을 상대하기 위해 미들랜드 왕국의 고모령으로 향한다"와 같은 식이에요. 만화로 보았다면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소설로만 읽으니 그냥 웃기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육화의 용사들이 갇히게 된 결계의 비밀을 다루는 트릭 하나만큼은 괜찮기는 합니다. 아들렛이 결계를 동작시키는 밀실에 처음 들어가게 되어 가짜로 몰리게 된 사건 해결을 위한 밀실 트릭이지요. "결계를 동작시키는 방법으로 알려진 초반의 증언이 사실은 가짜였고, 진짜 결계 동작은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결계가 동작된 것으로 오인하게 만든 안개를 대량으로 갑자기 발생시킨 것이다"라는, 과학과 마법을 잘 조화시켰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판타지라는 장르에 잘 어울리는 트릭이라 생각되네요. 독자에게 마곡령 근처의 기온이라던가 "태양의 성자"에 대해 알려주는 등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점도 좋았고요. 추리 동호인의 추천을 받을 만 했어요.

허나 트릭 외의 추리적인 부분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먼저, 이렇게 복잡하게 작전을 꾸미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결계에 가두지 않았더라도 문제가 발생했을테고 최소한 프레미를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용사가 죽으면 육화 문장의 꽃잎이 떨어진다는 설정으로 가짜로 몰아 죽이는 것도 결국 한계가 있으리라는 점 등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셰타니아가 아들렛이 무죄라고 믿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에요. 가짜, 즉 일곱 번째가 나셰타니아였다면 처음부터 가짜로 몰아 죽이면 되지 이런 불필요한 과정이 왜 필요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추리적인 모든 요소는 결계에 대한 것, 즉 밀실 트릭을 푸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지도 못하고, 범인의 정체가 너무나 뜬금없어 설득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다는 단점 역시 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판타지 추리 소설로는 다아시경 시리즈, 그리고 "부러진 용골"과 같은 작품과 차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작품입니다. 감히 비교한다면 "장미빛 인생"조차도 '소설'로는 더 낫지 싶군요. 괜찮았던 트릭을 잘 살린 추리물로 접근하였더라면 훨씬 좋은 점수를 주었을 텐데, 아쉽게도 제 취향은 전혀 아니었어요. 다음 권을 더 읽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2022/10/29

리피트 - 이누이 구루미 / 서수지 : 별점 2.5점

리피트 - 6점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생 모리는 지진을 예언하는 기묘한 전화를 받았다. 예언이 실현된 뒤, 전화를 건 주인공 가자마는 모리를 비롯한 9명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10개월의 시간을 점프할 수 있는 '리피트'에 대해 알려주며 리피트에 동참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경마 등으로 부자가 되거나, 이미 알고 있는 입시를 다시 치루어 도쿄대에 입학하는 등의 소망을 품고 그들은 과거로 향했다. 여행은 성공했고 모리는 함께 리피트한 미녀 시노자키와 커플이 되지만, 전 연인 유코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 다시 리피트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리피트한 동료들이 차례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가자마도 두 번째 리피트를 허락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노자키의 임신으로 모리는 고뇌에 빠지는데....


<<이니시에이션 러브>>로 유명한 이누이 구루미의 장편. <<이니시에이션 러브>>는 서술 트릭의 수작이지만 이상하게도 작가 이누이 구루미의 작품은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지요. 이 작품과 <<이니시에이션 러브>>가 유이합니다. 이 작품의 존재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모처의 랭킹에서 소개해주어서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까지 있을 정도로 인기작이더군요.

10개월을 뛰어넘어 과거로 돌아가는 '리피트'가 핵심 설정인데, 이렇게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은 정말 많습니다. 작중에서도 켄 그림우드의 <<리플레이>>라는 작품이 비슷한 내용이라고 소개될 정도죠. 시간 여행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추리적으로 잘 풀어낸 작품도 <<타임 리프>>라던가, <<나만이 없는 거리>> 등이 있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과거로의 이동은 주인공의 능력이 아니라는 점이 독특했습니다. 수수께끼의 인물 '가자마'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리피터' 들 9명을 모아서 과거로 이동하게 도와주었던 것이니까요. 순수한 선의의 발로이며 그들이 선택된건 단순한 우연이었다는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서 받은 사람들) 가자마의 말에 주인공 모리를 비롯한 9명은 얼떨결에 과거로 향하게 되지요. 가자마만 과거로 리피트 할 수 있는 검은 오로라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으며, 오로라로 이동할 수 있는 헬기 조종사였다는 설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요.

과거에서 특이점이 발생할 경우 미래가 바뀔 수는 있지만, 아무리 미래가 바뀌어도 결국 정해진 미래는 바꿀 수 없다는 결말은 정해진 미래, 특히 죽음은 바꿀 수 없다는 영화 <<데스티네이션>> 설정과 동일하지만, 이 작품에서 리피터들은 자기들이 죽는다는걸 몰랐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덕분에 다카하시, 요코사와, 쓰보이가 차례로 죽자 생존한 리피터들은 이 범행은 리피터를 노린 누군가의 짓이라 여기고 범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다양한 추리를 펼치게 되고요.
  • 범인은 리피트에 관련된 비밀이 드러나면 안되는 가자마일까? 하지만 가자마는 위험해져도 10월 30일까지만 버티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되는데?
  • 리피터들을 죽이기 위해 과거로 초대했던 걸까? 그랬다면 원래 세계에서 서로 모를 때 죽였을거야. 서로 모르면 남은 사람들은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았었을텐데, 리피터라는 연결 고리가 생겨서 경계 의식을 품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가자마는 계속 리피트할 생각이었는데, 그러면 리피트한 과거에는 다시 9명은 생생하게 살아 있어, 살인을 반복할 이유는 없다고.
  • 한 번 리피트 한 사람들은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한 가자마에게, '생명이 위험하니 다시 리피트하게 해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덴도가 저지른 범행일까? 덴도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니까.
  • 가자마가 다른 누군가에게 예언을 알려준 뒤, 너가 리피트하려면 다른 리피터를 먼저 죽여라고 시켰던걸까?
  • 이전 리피터 중 누군가 헬기로 뒤를 쫓아 리피트한게 아닐까?

이러한 여러가지 추리들은 상당한 재미를 선사해줍니다.

리피터 연쇄 살인 사건 외에도 리피터 시노자키가 모리의 아이를 임신한 것도 흥미를 끕니다. 모리는 옛 연인 유코를 살해한 탓에 리피트가 절실했는데, 시노자키는 임신때문에 다시 리피트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렸거든요. 다시 리피트한다면, 아이가 없는 임신 이전 상태로 되돌아 가 버리고 마니까요. 그래서 극적 긴장감이 발생하게 됩니다. 시노자키의 예정된 죽음 - 헬기 추락에 의한 사고사 - 을 가자마로부터 전해들은 모리가 그녀를 죽게 내버려두고 혼자 리피트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에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고요. 그녀를 살게 해 주면, 모리의 리피트를 막을게 뻔하잖아요? 아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임신 이야기를 들은 덴도가 이야기한, 갓 태어난 아이를 리피트시키면 폐 호흡을 하다가 양수로 돌아가버리는데 어떻게 될까? 라는 것도 사소하지만 꽤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어요.

진상도 꽤 기발했습니다. 우선 리피터인줄 알았던 이케다도 가자마와 같이 리피트를 반복했었던 오리지널 리피터였습니다. 둘은 사고로 생명을 잃었을 사람들을 구해준 뒤, 그들과 함께 과거로 돌아거서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즐기려고 했던 겁니다. 리피트를 반복하다 심심해졌던 탓이죠. 그리고 가자마와 이케다가 손을 써서 원래 세계에서 죽지 않았던 리피터들은 리피트한 세계에서는 운명대로 죽고 만 것입니다. 유코에게 살해당할 운명이었던 모리만 먼저 유코를 살해해서 죽음에서 벗어났고, 덴도는 이러한 진상을 추리해내서 가자마와 이케다가 구해준 덕분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요.

하지만 이야기 전개가 아주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우선 모리가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미래의 이야기를 적어두었던 노트를, 문단속을 잊은 탓에 방에 들어온 유코가 발견해서 리피트를 눈치채자 살해했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비교적 주인공다운 모습을 보여주던 모리라는 인물상과도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모리가 유코에게 죽는게 운명이었다면, 미리 흉기까지 준비했다면 유코가 맥없이 살해당하는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요. 목이 졸릴 때 당연히 칼을 꺼내 찔렀어야죠. 왜 이 부분에서만 정해진 운명이 다르게 흘러갔는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과거를 바꾸는 특이점이 생기면 미래가 바뀌어서 이런저런게 바뀔 수 있다는 전제도 사실 해석하기에 따라 애매한 말입니다. 경마로 큰 돈을 버는 것도 특이점이잖아요? 리피터들을 죽인건 정의 구현에 한계를 느낀 미친 경찰관이었다는 것도 작위적이었고요.

결말도 많이 아쉽습니다. 덴도가 미국에서 헬기 면허를 따 왔다는거야 그럴싸했는데, 그 뒤부터는 정말 막 나가더라고요. 이케다와 덴도가 서로에게 총을 쏴서 죽는다는게 특히 그러했어요. 총이라는 비현실적인 소재도 이상하지만, 이케다만 리피트 지점을 알테니 그 지점만 알아내고 강제로 헬기에서 쫓아내겠다!는 덴도의 계획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총이건 뭐건 이케다가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리가 없잖아요?
둘 다 죽은 뒤 모리 혼자서 헬기를 조종해 오로라로 들어갔다는 것도 별다른 고민없는 작위적인 전개였습니다. 리피트에 성공한 모리가 곧바로 차에 치어 죽는다는 결말도 뻔했을 뿐 아니라 <<데스티네이션>>과 다를게 없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흔한 소재에 약간의 변주를 가해 흥미를 유발하게끔 만든건 좋은데, 아주 독특하고 새롭지는 않았기에 감점합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만큼의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2023/11/25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 스튜어트 터튼 / 최필원 : 별점 2점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 4점
스튜어트 터튼 지음, 최필원 옮김/책세상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년 전, 장남 토마스가 관리인 카버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하드캐슬가의 저택 블랙히스 하우스에서 그날의 손님들을 고스란히 다시 불러모은 파티가 열렸다.
손님 중 한 명인 의사 서배스천 밸은 팔에 큰 부상을 입고 숲에서 깨어나 애나가 괴한에게 살해당하는걸 목격했다. 기억을 잃은 그의 앞에 흑사병 의사 옷차림을 한 남자가 나타나 여러가지 경고를 날렸다. 이런 저런 경고와 조언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서배스천은 누군가 자기에게 죽은 토끼를 선물한걸 발견하고 실신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고난 뒤, '나'는 집사 콜린스로 깨어났다는걸 알게 되었다. 흑사병 의사는 '나' 에이든 비숍에게 그는 모두 여덟 명의 다른 사람으로 하루를 반복하게 되며, 무도회에서 살해당하는 하드캐슬의 장녀 에블린을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면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이 루프 속에 다른 두 명의 경쟁자가 있다는 말과 함께.
에이든 비숍은 하룻동안 8명 - 마약 판매상이기도 한 의사 서배스천 벨, 집사 스탠윈, 늙고 뚱뚱한 레이븐코트, 강간범 더비, 에드워드 댄스, 순경 짐 래시턴, 도널드 데이비스, 화가 그레고리 골드 - 의 몸을 오가며, 에블린 하드캐슬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본인과 애나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미래는 경고가 아니야, 미래는 약속이라고. 그리고 그 약속은 우리가 결코 깨버릴 수 없어. 바로 그게 우리가 갇힌 이 덫의 본성이라고."

어딘가에서 추천하는 글을 읽고 알게 된 영국 대장편 판타지 미스터리. 무슨 리스트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하루를 반복하는 루프물이라는 아이디어는 특별한건 아닙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일곱 번 죽은 남자"는 제목처럼 계속 반복해 살해당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막으려고 노력한다는 내용마저도 비슷하지요. 루프보다는 시간 여행에 가깝지만, 과거를 반복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사라진 세계", "리피트", "나만이 없는 거리", "타임 리프"등 수도 없이 많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설정에 딱 한 가지 차이를 두어 차별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바로 "한 명이 하루를 반복하는게 아니라, 8명을 통해 하루를 반복한다"는 설정입니다. 

루프에 갖힌걸 모른 채 에블린 사건의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설정이 드러나는 도입부는 신선하고 흥미로왔습니다. 사건 자체는 심플합니다. 에블린 하드캐슬이 자살한건 부모가 돈 때문에 레이븐코트 경과 억지로 결혼시키려는걸 막으려고 동생 마이클 등의 도움을 받아 벌인 연극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에블린으로 알고있던건 사기꾼 펄리시티 매덕스였습니다. 오랫만에 유럽에서 돌아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겁니다. 에블린은 하녀 마들렌으로 변장하고 있었고요. 그리고 마이클은 연극이라 믿고 있었던 펄리시티 매덕스를 살해해서 자살로 보이는 살인을 완성했습니다.
동기는 19년 전 토마스 살인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토마스를 죽였던건 에블린이었습니다. 토마스가 에블린과 마굿간지기 파커 사이의 부도덕한 관계를 눈치챘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디 하드캐슬과 불륜 관계로 에블린의 진짜 부친이었던 카버는 딸 에블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누명을 쓰고 교수대로 향했죠. 그러나 레이디 하드캐슬이 에블린이 진범이라는걸 알아채서 입막음 댓가로 가문을 위해 에블린에게 레이븐코트와 억지 결혼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에블린은 부모도 죽이고, 자기 자신도 자살한걸로 위장하려 했던 겁니다.

에블린의 자살이 연극으로 위장한 살인이었다는걸 증명하는 단서도 제대로 제공됩니다. 대표적인게 "왜 권총 두 정을 모두 가져갔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마이클이 나머지 한 정으로 죽은 척하던 에블린 - 으로 변장한 펄리시티 매덕스 - 를 살해하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그 외 발견된 신호용 피스톨 (총 소리만 내기 위함), 피를 담아둔 병도 자살 연극에 사용되었다는 추리로 잘 이어집니다.
루프를 오가는 중간중간마다 '체스말'같은 연결고리도 충실히 제공되고 있어서 잘 짜여졌다는 느낌을 전해주고요.

하지만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8명을 통해 하루를 반복한다는 설정은 참신하기는 한데, 이야기를 괜히 복잡하게 만드는 측면이 더 강해요.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각 인물별로 시간대와 처한 상황이 다르고, 에이든 비숍이 얻는 정보도 전부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인 굉장히 복잡한 구성과 전개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요한 정보와 단서는 전개 후반인 순경 짐 래시턴 시점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앞서 다른 사람들 - "호스트"라고 불리우는 - 의 정보들은 추리적으로 크게 의미를 두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8명의 '호스트' 들의 설정들도 불필요하게 장황합니다. 서배스천이 마약을 몰래 공급해왔다던가, 레이븐코트가 식탐이 엄청난 고도비만이었다던가, 더비가 성범죄자라던가하는건 에블린 살인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협박범 스탠윈, 하드캐슬 가문의 사생아 커닝햄, 또다른 루프 참여인물 대니얼 콜리지 등의 주변 인물들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장황하더라도 설명이 명확하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정작 중요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대니얼 콜리지가 에이든을 방해하는건 당연하지만 - 루프에서는 한 명만 탈출할 수 있어서 -, 애나가 에이든에게 협조하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 이 루프의 정체 - 일종의 감옥 - 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재소자들을 살인 사건 안에 가두고 그들에게 타인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속죄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저만 이해를 못하는걸까요? 그리고 에이든 비숍은 애나를 찾아 제발로 루프에 들어왔기 때문에 배석 판사 흑사병가면이 호스트 통제권 및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반 감옥이라고 치면, 감옥 재소자를 제 발로 찾아온 선량한 시민에게 감옥에서 지낼 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다는 말과 같은데 이건 말도 안되죠. 그냥 일종의 "두뇌 게임"을 펼치기 위한 장을 억지로 만든 것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사악했던 괴물 애나벨 코커는 비숍의 여동생을 고문해 죽였지만, 그녀는 죽고 지금의 애나는 갱생했다! 비숍을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 증명했다! 며 두 명 모두 풀어주는 마지막의 해피 엔딩도 허무했습니다.

복잡하고 일견 치밀해 보이는 구성이지만 핵심 전개와 수수께끼를 풀어내기 위한 전개는 부족하고, 기본 설정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잡하지만 알고보니 알멩이 없는 미국 드라마같은 작품입니다. 정통 추리물을 기대하신다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2016/05/05

나만이 없는 거리 1~7 - 산베 케이 / 강동욱 : 별점 3점

나만이 없는 거리 1 - 6점 산베 케이 지음, 강동욱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특한 펜선의 육덕진 캐릭터와 긴장감을 자아내는 전개로 독자를 사로잡는 산베 케이의 신작입니다. 다만 전작 "귀등의 섬"의 경우, 어처구니없던 결말 탓에 작품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처음에는 쉽게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시작은 좋아도 또 허무하게 끝날까 걱정되었거든요. 때문에 완결까지 기다렸고, 다행히 평이 좋아서 읽게 되었습니다.

초반부에서는 작가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특히 주인공 사토루의 능력 ‘리바이벌’ 설정이 흥미롭습니다. "타임 리프"와 다를 바 없는 설정이기는 하지만, 위화감을 느낄 때만 발동된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무엇보다 어머니 살인 누명을 벗고 진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능력이 극대화되어 초등학생 시절로 워프한다는 전개가 신의 한 수였어요. 이로 인해 어머니의 죽음이 과거 동급생 카요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이를 막기 위한 활약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지거든요. 이후 범인과의 지략 대결이 긴장감 넘치게 전개되어 눈을 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야시로 선생이라는 진범이라는게 쉽게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카요의 어머니가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진 뒤에는 용의자가 거의 남지 않는 탓입니다. 긴장감있는 전개로 어느 정도 커버하지만, 범죄 스릴러의 핵심인 ‘후더닛’ 매력은 부족해 질 수 밖에 없어요. 두 번째는 사토루 캐릭터의 애매함입니다. 성인의 지혜를 가진 초등학생이라는 설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그냥 초등학생처럼 묘사됩니다. 이 때문에 "소년 탐정단"식 모험물같은 느낌을 주는데, 서스펜스 스릴러에는 좋게 작용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세 번째는 허무한 마지막 결말입니다. 야시로가 너무 쉽게 패배를 인정한다던가, 과거 범죄의 공소시효 문제 등은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해피엔딩과 장황한 에필로그 역시 평범했습니다.

무엇보다 기대만큼의 추리물은 아니라는 점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앞서 말했듯 범인이 일찍 드러나고, 범행 증명 과정도 자백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시라토리 준이 진범이 아님을 밝혀내는 몇 가지 단서, 스기타 히로미 사건의 추리 정도는 흥미로웠지만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산베 케이의 장점을 잘 살렸고,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이어갔다는 점에서는 높게 평가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애니메이션의 평도 좋던데, 꼭 감상해 보고 싶습니다.

2021/07/03

뫼비우스의 띠 - 프랑크 틸리에 / 박명숙 : 별점 2점

뫼비우스의 띠 - 4점
프랑크 틸리에 지음, 박명숙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분장사이자 조형예술가, 인체모형 전문가 스테판은 악몽에 시달리다가, 악몽이 6일 뒤 벌어질 일을 예고한다는걸 알게 되었다. 미래의 죽음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스테판은 여성 살인 사건 수사를 맡은 신참 형사 빅 마르샬에게 자신이 예지한 정보를 전해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일어날 죽음은 일어난다는걸 깨닫고 좌절하는데....

프랑스 작가스릴러로 600페이지가 넘는 대작입니다. 스테판, 빅 시점으로 병행 서술되는게 특징입니다. 이 중 스테판 시점은 현재와 미래의 꿈이 뒤섞여 있는데, 많이 쓰였던 친숙한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예지 능력이 있거나, "타임 리프"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 "나만이 없는 거리" 등 과거로 회귀할 수 있는 주인공이 사건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많으니까요.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원칙에 따라 정해진 죽음의 궤도에서 벗어나기 위한 주인공들의 노력도 "데스티네이션" 설정과 똑같고요.

뻔하기는 해도 재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스테판이 꾼 꿈들은 정보가 토막나 있는데, 실제로 사건이 진행되면서 구멍들이 메꿔지고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은 괜찮았거든요. 정해진 운명을 비틀기 위한 스테판의 노력과, 이 덕분에 중요한 궤도가 어긋나서 범인을 잡게 된다는 전개도 좋습니다. 꿈에서 실패했던 메시지 전달을 결국 성공해서 관련된 단서와 증인이 남게 되기 때문인데, 이 시점에 대한 설정이 아주 잘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또 이 시점 전까지 아무리 발버둥쳐도, 정해진 궤도를 바꿀 수 없어서 무간지옥으로 빠지는 스테판의 좌절감에 대한 묘사도 일품입니다. 특히 사서함에 남겨놓은 스테판의 메시지 뒷 면에, 몇 번 읽었는지 알 수 있는 X자가 빼곡히 뒤덥혀 있었다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어요. 사실 영화 "트라이앵글"에서 시체가 널려있던 클라이막스와 별로 다르지 않기는 합니다만, 소설로는 이런 맛을 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잘 구현했더라고요.

범행도 일견 굉장히 뻔한, 잔혹한 연쇄 살인극의 반복으로 보이지만 나름 차별화되는 설정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본인이 장애가 있어서, 장애를 우습게 보았던 사람들을 응징했다는 동기는 꽤 신선했거든요. 또 범인이 일종의 통각 장애가 있어서, 피해자들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며, 본인도 고통을 느끼기 위해 범행 현장을 굉장히 덥게 꾸몄다는 설정도 나쁘지 않았고요. 휴대용 난로 등으로 뜨겁게 만든 범행 현장은,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사용된걸로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거지요.

하지만 좋은 작품이냐? 하면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선 스테판이 하는 행동이 내용의 거의 전부인데,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가 하는 짓이라고는 사망할거라는 소녀 멜린다에게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써서 접근하는 행동과 같은 바보짓이 거의 전부에요. 누가 보아도 수상하고, 범인으로 몰려도 싼 행동만 반복할 뿐입니다. 인터넷을 활용하는 방법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예지한 내용을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털어놓는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럼 그가 예지를 했다는건 분명한 사실로 남았을테니까요. 무엇보다도 '로또번호' 예지 때문에, 그의 예지가 진실이라는건 의문의 여지가 없었을겁니다. 사건이 일어날만한 시간에는 인터넷 스트리밍 라이브 방송으로 알리바이를 공개적으로 마련할 수도 있고요. 게다가 예지몽을 꾸는게 이렇게까지 신경증적 발작을 일으킬 일이었는지도 의문이에요. 그것도 시작은 고작 포도주 병 위치가 바뀐 것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바보짓에 더해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묘사가 많아서 전혀 주인공같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주인공인 빅 역시 아내 셀린과의 싸움이라던가, 휴대폰이 고장나서 수시로 방전된다는 설정은 작위적이고 억지스러워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빅을 낙하산이라고 부르면서 홀대하는 반장과 동료들의 모습도 굉장히 불쾌했고요. 낙하산도 아니었을 뿐더러, 실제로 낙하산이었다 하더라도 팀원으로는 대접했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일도 시키지 말던가요.

추리적으로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범인이 썩은 고기 등으로 현장에서 썩는 냄새를 피웠으며, 유명한 그림과 사진에서 모티브를 따 와서 범행을 저질렀고 현장에 숫자와 단서 등을 남겼다는건 이런 류의 연쇄 살인물의 기존 설정들을 답습하는데 그칩니다. 부자연스럽고 설명도 부족해요. 범행 동기, 현장에 남은 단서 등을 알아내어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리해내는 과정도 없고요. 범인을 알아내는건 마지막에 중요 단서인 DVD를 확보했기 때문이거든요. 

범인의 정체 역시 뜬금없었습니다. 앞서 스테판과 뒤퓌트랑 병리해부학 박물관에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니까요. 군인이나 경찰이 아니라 일개 박물관 직원인 그가 어떻게 3명이나 되는 피해자들 집에 손쉽게 잠입해서 잔혹한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사족도 많습니다. 스테판 아내 실비의 불륜이 대표적입니다. 사건 해결 후, 죽음의 궤도는 벗어날 수 없었다는 "데스티네이션" 마무리도 마찬가지에요. 참신함도 없고, 구태여 등장시킬 필요없는 찜찜한 결말이었어요. 오히려 아류작이라는 느낌만 강하게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그 외에도 빅과 담배 관련 이야기들처럼 불필요한 디테일 묘사로 분량을 늘린 것도 별로였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대중적인 장르 문학으로는 평균은 됩니다. 하지만 뻔한 설정, 부담스러운 분량, 찜찜한 묘사 탓에 쉽게 권해드리기는 어렵네요.

2021/10/22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카토우 모토히로 / 학산문화사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43권입니다. 이번 권에는 네 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으며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투명어"와 "치과"는 평균 이상은 되는 괜찮은 작품이지만 그닥이었던 두 편이 점수를 깎아먹은 탓입니다. 다음 권은 C.M.B 반지와 관련된 긴 호흡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은데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앙숙"

신라는 다힐 교수의 부탁으로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의 아시리아 유적 발굴 현장을 찾았다. 그 곳에서 만난건 예전부터 신라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우던 앙숙 무라트였다. 그런데 발굴 현장 텐트에 숨어든 사람이 있었다. 원치 않은 결혼을 피하고자 노력 중인 사루마였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체면이 손상될거라 생각했던 친척들이 그녀를 살해할 수도 있었다. 사루마는 프랑스 국적이 있었고, 신라 일행은 그녀의 프랑스로의 탈출을 도와주는데...

그닥이었던 첫 번째 이야기. 전개가 너무 뻔했습니다. 신라의 앙숙 무라트가 사루마 가족에게 그녀의 도주 계획을 털어 놓지만, 알고보니 거짓말로 사실은 사루마의 무사 탈출을 도왔다는건 누가 봐도 쉽게 눈치챌 수 있거든요. 눈에 잘 띄는 캐리어를 택시에 잘 보이게 싣고, 그 택시를 뒤쫓는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명예 살인이라고 해 봤자 동네 아저씨 한 명이 단도를 들고 설치는 정도라서 위기감이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실제로 타츠키 혼자 간단히 제압하지요. 

앙숙이라는 무라트도 일방적으로 신라에 대한 질투심을 품는 동네 꼬마일 뿐입니다. 신라가 지닌 지식과는 상대도 될 수 없기에 대단한 대결을 펼치지도 못하지요. 앙숙이라는 설정은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어요. 

CMB 특유의 현학적인 정보를 얻을 내용도 거의 없었습니다. 쿠르드 자치구, 아시리아 유적 발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예 살인'이 핵심 소재였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추리적으로나, 재미면으로나, 얻을 수 있는 지식 측면으로나 뭐 하나 건질게 없는 졸작입니다.

"투명어" 

뉴욕 미술관에서 지구 온난화 경고 미술전이 열렸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를 거짓이라 생각한 사람의 협박이 이어지다가, 결국 미술관 학예원 토마스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말았다. 범인이 어떻게 침입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미술관 오너 에리는 친구 토마에게 소개받은 신라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데...

범인이 외부에서 정문까지 딱 하나 있는 길을 환한 조명과 감시 카메라에 들키지 않고 통과한 뒤, 2개의 전시실을 3명의 경비원들에게 들키지 않고 돌파하여 사무실까지 침입했던 방법은 '거울을 이용'했던 겁니다. 조명 아래 길에서는 거울 뒤에 숨어 이동했고, 전시실에 들어가서는 거울 뒷면의 검은 판을 이용하여 일종의 사각을 만들었던 거지요. 마술에 쓰임직한 트릭인데, 1회성으로는 쓸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미술관과도 잘 어울렸고요. 실제로 이런 거울을 옮기는 사람이 목격되더라도, 작품을 옮기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을거라고 설명되고 있으니까요. 

전시되고 있는 '투명어'를 이용한 작품을 통해, 물고기의 특징으로 트릭을 설명하는 장면도 좋았습니다. 투명어보다는 일반 물고기가 더 잘 숨는 셈이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짙은 바다색과 비슷한 짙푸른 빛의 등을, 바다 밑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눈부신 태양과 같은 은빛 배를 가지고 있는 덕분이다는건데, 트릭에 정말 딱 맞아 떨어지는 설명이었습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도깊은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며, 왜 중요하고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쉽게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표현의 자유에는 적절한 프로토콜이 필요하며, 이런 역할을 미술관, 박물관 등이 수행한다는 이야기가 와 닿더군요.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고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널리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Q.E.D의 토마의 친구 '재난의 사나이' 알렌의 아내 에리가 등장하는건 오랜 팬으로서 반가웠던 부분이고요.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하여, 그의 족적을 확보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면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거울을 현장에서 깼다'는 걸로 피해자 몸에 묻었을 거울 조각과 현장의 거울 조각, 그리고 용의자 신발에서 그 거울 조각을 채취하면 그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날 거라고 신라는 말하는데, 이건 트릭을 파헤치지 않아도 경찰 수사로 밝혀낼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수사를 통해 현장에 있었던 거울 조각을 알아낸 뒤, 여기서 트릭을 유추하는게 더 말이 되지요. 또 사람이 한 명 숨을 큰 거울을 현장에서 쉽게,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을까요? 작품 하나를 태운 정도로? 어림도 없어요.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스럽네요.

이렇게 문제가 없지는 않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얻을 수 있었던 지식의 가치가 높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치과" 

코즈에는 치과 진료를 받은 후, 병원을 나서다가 안개에 휩싸인 뒤, 진료받기 전 치과에 앉아있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타임 리프에 빠진걸 알아챈 그는 루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른 대기 손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안개에 휩싸이는걸 반복한 끝에 마지막 손님 신라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 주변 환경에 단서가 있다는 신라의 말을 들은 뒤 코즈에는 차분히 주위를 관찰하여, 손님 중 한명인 여고생의 전화 착신음, 또 다른 손님인 꼬마 여자 아이 얼굴의 점, 치과 접수원의 이름, 치과에 놓인 곰 인형 등 모든게 전 여자친구와 관련이 있다는걸 깨닫는다.

전 여자 친구와 가슴 아프게 헤어졌던걸 뉘우치고, 다시 만나는게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열쇠였고, 방법은 예약 날짜를 바꾸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예약 날짜는 그녀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이런 저런 사소한 단서를 전 여자 친구와 관련이 있다며 드러내는 장면은 일상계 추리물 느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 수도 있다는데 감탄했어요. '일상계 SF 로맨스'인 셈입니다. 점이 있던 꼬마 아이가 미래에서 온 코즈에와 여자 친구의 딸이었다는 에필로그도 사족 느낌이 들지 않게 잘 처리했고요.

그런데 이게 C.M.B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신라가 힌트를 주기는 하지만, 결국 코즈에가 혼자서 깊이 생각해도 알아낼 수 있는 단서들이었으니까요. 신라가 곰팡이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주는 건 재미는 있었습니다만, 딱히 이야기와는 관계가 있어보이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C.M.B 시리즈에 억지로 집어 넣은 부분이 감점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독특함과 재미, 신선함 모두 기대 이상이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번 권의 베스트 에피소드로 꼽겠습니다.

"카메오 글라스" 

마우가 고대 로마 유물인 카메오 글라스를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는데, 이를 도와주는 이야기로 카메오 글라스 케이스를 이용한 바꿔치기 트릭이 등장하는데, 현실성 높은 나쁘지 않은 트릭이에요. 뒤집힌 카메오 글라스 형태에서 착안했다는 이야기도 설득력 높고요.

하지만 마우 등장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그 외의 설정에서는 현실성을 찾기 어려서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C.M.B 반지를 회수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신라에게 전해 주기 위한 목적이 더 컸던 에피소드였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1/11/25

사라진 세계 - 톰 스웨터리치 / 장호연 : 별점 3점

사라진 세계 - 6점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허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래의 지구, QTN입자가 날아와 환각에 빠져 죽게 만드는 터미너스 현상을 일으켜서 인류는 멸망해버렸다. 1980년대의 미국 해군 우주 사령부는 ‘인정되지 않는 미래 궤적(Inadmissible Future Trajectories)’, 즉 IFT라는 다중차원의 미래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기 때문에 이 미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터미너스 현상을 막기 위해 사령부는 여러 요원들을 IFT 미래로 보내어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터미너스 현상이 일어날 시점만 2666년에서 2456년, 2121년... 등으로 계속 앞당겨졌을 뿐이었다. 과거에서 미래로 터미너스 현상을 일으키는 QTN 입자가 향하는 길을 열어준 탓이었다.

그리고 1997년 현재, IFT로의 탐험을 떠났다 돌아왔던 패트릭 머설트의 가족이 살해되고 큰 딸 매리언은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수사에 IFT 귀환병 출신 섀넌 모스 특별 수사관이 투입되었다. 귀환병 관련 사건에는 해군 범죄 수사국이 참여되는게 규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패트릭 머설트가 탑승했던 '리브라 호'는 공식적으로 귀환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건 해결을 위해 20여년 후의 IFT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섀넌의 수사 결과, 리브라 호가 QTN 입자가 있는 에스페란스 별에 착륙했던게 터미너스 현상을 지구로 불러온 원인이었으며 패트릭 머설트 사건은 역시 리브라 호 귀환병이었던 하이델크루거가 이끄는 테러 조직이 일으켰다는게 밝혀졌다. 하이델크루거는 추락한 리브라 호의 B-L 엔진이 가동될 때, 바르게도르 나무 주변에 생겨나는 시간의 틈을 이용하여 다른 IFT의 '메아리' 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넓히고, 터미너스 현상을 초래할 해군 사령부의 IFT 탐험과 관련된 모든 것에 거대한 테러를 가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누설하려던 머설트를 가족과 함께 살해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섀넌이 이를 알아낸 직후, 터미너스가 1997년의 지구를 덥쳤다. 섀넌이 패트릭 머설트의 증언을 확보하여 해군 사령부와 거래 하려던 변호사를 하이데크루거의 습격에서 구해준게 원인이었다. 해군 사령부는 이 증언을 통해 에스페란스의 위치를 알아내어 전함을 보냈고, 전함이 지구로 귀환하자 QTN 입자가 전함을 따라와 곧바로 지구를 덥쳤던 것이었다. 섀넌은 바르게도르 나무 근처 시간의 틈을 이용해, 과거 리브라 호에서 반란이 일어나던 시점으로 이동하여 리브라 호의 자폭이 성공하도록 도울 결심을 하였다. 성공하면 단 하나 뿐인 시공간 '굳건한 대지'는 안전하게 될 터였다...

시간 여행 (타임 리프)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570여 페이지에 달하는 대장편 SF 범죄 수사물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1986년 리브라호 사고, 1997년 현재, 그리고 약 20년 후의 IFT라는 세 개의 시간대를 축으로 전개됩니다.

너무 평범한 제목 탓에 손길이 가지 않았었는데, 읽다보니 굉장히 재미있어서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SF지만 범죄 수사물 측면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던 덕이 큽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사건을 수사한다는 설정이 잘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시공간('굳건한 대지')의 사람들이 IFT 미래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아내어 그들과 사건의 관계가 드러나는 과정을 꼼꼼한 복선 배치를 통해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대표적인게 FBI 수사관 네스터입니다. 섀넌은 미래의 그와 사랑에 빠지지만, 과거로 돌아온 뒤 그가 미래에서 살던 집이 하이텔크루거 일당의 은거지였다는걸 알게 됩니다. 네스터가 자기 것이라고 말했던 무기들 역시 원래 테러범들 것이었고요. 즉 하이델크루거 일당과 네스터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으로 엮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다른 미래라도, 시간의 흐름 상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거지요. 다른 인물들도 모두 마찬가지에요.
또 비교적 초반부에 니콜과 절친한 친구가 된 덕분에, 과거의 그녀의 도움을 받아 임무를 완수하게 되는 식으로 연결된 '인간 관계'가 사건 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식으로 관계를 잘 구축해 놓고 있고요. 무고한 사람을 살리려던 섀넌의 노력이 터미너스 현상을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불러오게 되었다는, 일종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SF적인 측면으로도 볼 만 합니다. 저같은 과학 둔재도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 기술과 이론들을 이야기와 잘 결합하여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 이동이 핵심이지만 그 원리나 기술을 이론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아요. 그냥 소설에 잘 어울릴 설정들을 적절하게, 작품과 잘 어울리게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새년이 '굳건한 시간'에서 A라는 IFT 미래로 이동한 뒤, 임무를 마치고 원래의 '굳건한 시간'으로 돌아가게 되면 A라는 IFT 미래 시공간 자체가 소멸하여 무로 돌아간다는 설정처럼요. 하지만 독자가 충분히 설정에 대해 이해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게끔은 잘 그려내고 있기에, 이 설정이 타임 패러독스를 없애는 완벽한 설정이라는 것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이 비밀을 아는 해당 IFT 시공간 사람들이 시간 여행자를 감금한다던가 (그가 돌아가면 시공간이 소멸해버리니), '굳건한 시간' 외의 시공간에서 온 사람들을 '메아리'라고 부른다던가 하는 부가적인 설정들도 흥미롭게 묘사됩니다.
시간 점프 기술을 이용하여, 미래에서 터미넌스를 막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지 않았을까 싶어 미래로의 이동을 반복하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해서 모든 미래 시점에도 터미넌스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역시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는 거지요.

하지만 IFT 미래로의 탐험을 빼면, 수사물이나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범인이 '리브라 호' 선원이었던 하이델베르그라는건 비교적 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머설트가 리브라호 귀환병이라는걸 알고 난 뒤에도 리브라 호 선원 명단을 전체 조사하지 않았던 해군 수사 본부의 무능함만 눈에 뜨일 뿐이지요. 이런 기본적인 수사도 하지 않고, 모든 수사를 IFT로의 시간 여행을 통해 미래에서 언제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 알아낸 후,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잠복 등으로 사건을 막는게 전부라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사건 수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위기와 액션 묘사가 출중한 덕에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이래서야 수사물이라고 하기도 어렵겠지요.

또 불필요했던 설정과 묘사도 너무 과했습니다. 하이델베르그가 해군 우주 본부 테러로 아득한 시간과 공간 탐험을 막고자 하는 동기부터 그러합니다. 납득할 수는 있지만 오버스러웠달까요. 몇몇 주요 인물만 암살하면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패트릭 머설트 가족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손톱을 뜯어낸 이유가 '손톱으로 만든 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건 쓰잘데없는 설정의 최고봉이고요.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 뿐더러, 말 그대로 '손톱으로 만든 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진상은 허탈하기만 했거든요. 사건 현장마다 뭔가 흔적을 남긴다는 전형적이고 흔해빠진 싸이코 범죄물 설정에 집착한 듯 한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앨릭 플리스가 패트릭 머설트의 딸 매리언을 납치해서 바르게도르 나무에 묶은 이유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녀가 집에 없었을 때 하이델베르그 일당이 다른 남은 가족을 죽인건 말이 됩니다. 도망간 패트릭 머설트를 처형한 것도 말이 되고요. 그렇지만 일당이 메리언을 찾아내서 죽일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앨릭이 하이델베르그 일당인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며, 설령 그가 일당이었다 쳐도, 구태여 바르게도르 나무까지 끌고가 묶어 놓는건 설명이 되지 않아요. 죽이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가족과 구분하여 처단할 이유는 없으니가요. 사건 수사에 집착하는 섀넌 모스의 사명감을 불러 일으키는,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일당과 접점을 만들고 마지막에 리브라 호 자폭으로 전개하기 위해 필요했던 소재인데, 조금 더 상식적으로 말이 되게끔 전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하이델베르그가 섀넌 모스를 생포한 뒤, 반란이 일어난 직후의 리브라 호로 데려간 이유도 이해할 수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리브라 호에 감금되었던 섀넌 모스가 추락 직후 니콜에 의해 구조되었던건 무려 11년이 지난 뒤였다는 이상한 시간의 뒤틀림도 설명은 전무한, 작위적이고 편의적인 전개였고요.
이런 내용은 몽땅 들어내 버리고, 생포된 섀넌 모스가 하이델베르그를 어떻해든 설득해서 함께 리브라 호를 파괴하러 간다는게 더 명쾌했을 겁니다. 하이델베르그는 분명 과거 리브라호로 이동한다는걸 알고 있었고, 그의 행적을 보면 당연히 현재 시점의 '굳건한 대지'로의 탈출 방법도 알고 있었을테니까요. 반란만 제압하고 함장이 자폭하게 도와주고 탈출하면 그만이지요.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든다면 이렇게 각색할거라고 확신합니다! 

아울러 시간 여행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리브라호를 자폭시켜 블랙홀로 빨아들이면 터미너스가 없는 '굳건한 대지'가 유지될 수는 있습니다. 리브라호가 터미너스를 유발한건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미래는 다양한 우주로 점프하면서, 과거는 '굳건한 시간'의 과거로 갈 뿐이라는 것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IFT 미래로 이동 후 복귀할 때 그 IFT 미래 시공간은 소멸하는데, 과거로 이동 후 죽거나 복귀하면 왜 그 과거에 관련된 시공간은 소멸하지 않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IFT 미래 시공간 이동 기술은 600년 후의 미래 기술을 1980년대 현재 기술로 양산 가능하도록 만든거라는 설정이 잠깐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과거로도 충분히 이동할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나마 이런 설정들은 그래도 전개에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코트니 김이 살아있고, 섀넌 모스가 임신했다는걸 알아채는 1986년의 한 장면으로 끝나는 마무리는 영 이상했습니다. 코트니 김의 죽음은 리브라 호와는 무관했기에, 과거의 리브라호 자폭이 코트니 김이 살아있는 미래로 이어질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섀넌 모스가 코트니의 오빠와의 관계로 임신했다는걸 알아챈다는건 더 문제에요. 원래 코트니가 살해되기 전에 가졌던 관계이니, 현실의 섀넌도 임신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이렇게 임신한 섀넌 모스는 원래 작중의 섀넌과 그녀 어머니 관계와 유사해서, 시공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납득할 수 없는 과한 사족에 불과했다 생각되네요. 앞서 이야기했듯 '현재'의 섀넌 모스가 '과거'로 돌아가 죽었다면, '과거'의 미래가 바뀐다는건 이 작품의 시공간에 대한 기본 전제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읽는 동안은 단점을 떠올리기 힘든 재미를 갖춘 작품입니다. 추락한 미래에서 온 우주선의 엔진 점화로 시공간이 뒤틀려 연결된다는 설정은 예전에 읽었던 다카미 요시히사의 "화석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필연적으로 멸망할 미래에서 과거로 탈주했다는 점, 탈주용 우주선 엔진이 현재에 폭주하여 타임 패러독스를 일으키는 등 유사한 점이 많이 느껴졌고요.
그러나 결말까지 이어지는 깔끔한 전개는 이 작품 쪽이 훨씬 낫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영상물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와 내용인데, 약간의 설정 구멍을 보완하여 만들어주면 참 좋겠다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