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침과 기도 - 시자키 유 지음, 김은모 옮김/북홀릭(bookholic) |
7개 국어에 능통한 사이키가 해외 동향을 분석하는 잡지사에서 일하며 겪는 여러가지 사건들로 구성된 연작 단편집. 시자키 유의 데뷰작으로 근래 찾아보았던 추리소설 랭킹에서 추천하길래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몰랐었는데, 작품이 발표되었던 2010년에 이런저런 상 - '주간 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 2010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 등 - 을 휩쓸었군요.
읽어보니 과연!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독특함도 잘 살아있고 완성도도 높습니다. 특히 이국에 대한 서정적인 묘사들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굉장히 고급진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추리적으로는 편차가 있는 편이라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만, 몇몇 작품 (개인적으로는 <<얼어붙은 루시>>)의 수준은 높으니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각 단편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라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막을 달리는 뱃길>>
사이키는 사하라 사막 한 복판에서 소금을 채굴하는 대상 일행에 합류했다가 일행이 하나씩 살해당하는 사건에 휘말렸다. 사막에서 소금길을 나아갈 뿐인, 몇 안되는 일행을 살해할 이유는 무엇일까?
사이키의 모험과 여행, 그리고 삶에 대해서모험 소설과 추리 소설을 결합한 형태로 풀어주는 작품.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특히 동기 측면에서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대장이 급작스럽게 사고로 죽은 뒤, 달랑 세 명 - 사이키까지는 네 명 - 밖에 없는 일행을 죽일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금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면 차례로 죽인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첫 범행인 켄부를 죽일 때 다 죽이면 됐으니까요. 만약 대장의 죽음이 사고사가 아니라서 복수를 위해서였다면? 범인을 지목하고 일행의 동의를 얻어 처단하는게 깔끔했습니다. 모두가 공범이었을 수는 있지만, 그랬다면 마찬가지로 한 번에 다 죽이는게 합당했고요. 그렇다고 완전 범죄를 노리기에는 마지막 남은 사람이 범인인게 뻔하니 그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기서 '사막의 대상' 이라는 환경에 꼭 들어맞는 타당한 이유가 등장합니다. 죽은 대장만이 사막에 난 길의 경로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범인 바르보예는 자기가 모르는 소금 채굴 마을로 향하는 길의 이정표를 만들기 위해서 일행들을 죽였고요. 시차를 두고 차례대로 죽였던건, 시체를 죽은 자리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바르보예는 전체 길의 일부만 모른다는게 앞서 소개되는 등, 추리를 위한 단서 제공도 공정합니다.
대장이 아꼈던 어린 낙타 메챠보가 모든 길을 알고 있었다는 반전도 깔끔했어요.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막과 대상 일행에 대한 묘사도 빼어나고요.
사이키가 왜 대상 일행에 합류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애매했고, 사이키가 메챠보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조금 작위적이었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2008년,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제5회 미스터리즈! 신인상'을 수상했던 이력이 이해가 되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덧붙이자면, GPS를 누구나 쉽게 이용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조금 낡은 소재일 수는 있겠습니다.
<<하얀 거인>>
사쿠라는 대학 친구 사이키, 요스케와 함께 1년 전 연인과 이별했던 마드리드 근처 레엔쿠엔트로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게되었다. 1년 전, 연인 아야코는 마을의 하얀 풍차 안에 들어간 뒤 사라져 버렸었다....
사쿠라는 풍차 주인이 아야코를 살해하고, 풍차의 돌절구를 이용하여 그녀를 분해(!)했다고 추리하지만 진상은 그냥 아야코가 사쿠라 눈 앞에서 떠났던게 전부입니다. 온통 하얀 옷, 그리고 모자까지 하얀 색이었던 탓에 사쿠라는 눈치채지 못했던 거지요. 풍차가 하얀색이었기 때문이랍니다.... 솔직히 트릭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다.
'사쿠라'는 별명으로, 화자의 정체는 스페인인 세레소였다는 서술 트릭 역시 그렇게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습니다. 일단 정보가 부족하며, 사쿠라의 정체가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탓입니다. 딱히 반전이라고 볼 수도 없었고요.
이야기도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아야코의 귀국은 레엔쿠엔트로 마을에서 급작스럽게 결정된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그녀가 세레소에게 호감이 있었다면, 당연히 사유와 연락처를 진작에 알려줬을거에요. 눈 앞에서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의도였다는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이 작품에서처럼 세월이 지난 뒤 다른 유학생들을 통해 찾는다는건, 다른 목적이 있다고 밖에는 생각이 안 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추리적으로도 그닥일 뿐더러 이야기의 설득력이 낮고 공감하기 어려워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얼어붙은 루시>>
사이키는 러시아 정교회의 우라디미르 사제와 함께 우크라이나에 인접한 수도원에 방문했다. 죽은지 250년이 지났지만, 썩지 않고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리자베타 수녀의 성인 인정 절차를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확인한 유해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우라디미르 사제가 사흘 동안 유해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한 부탁을 수도원장에게 허락받은 뒤, 사이키는 '성인'이라는게 무엇인지 수도원장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일반적인 3인칭 시점과 리자베타 수녀를 신성시하는 스코냐 수녀 시점을 오가는 전개는 복잡하기만 할 뿐이라 생각했는데, 이는 스코냐가 수도원장을 살해했다는걸 추리할 수 있도록 잘 짜여진 구성이더군요. 읽으면서 실로 감탄했습니다. 스코냐가 수도원장, 우라디미르 사제와 사이키간 대화를 어딘가에 숨어서 듣는 묘사는, 이후 스코냐가 사이키에게 실수로 그 사실을 드러낸 뒤 스코냐가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인 척 했다는 사이키의 추리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는 숨을데가 없었거든요.
수도원장이 기도실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살해당했고, 스코냐가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인 척 수도원장의 유해를 관에 넣어 두었다는 추리도 기가 막혔습니다.
이 사건이 스코냐 수녀의 그릇된 신앙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주목해 볼 만 합니다. 스코냐 수녀가 수도원장을 살해한건, 시성 (성인인증)을 받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수도원장은 앞서 시성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단지 성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고 싶다는 취지에서 시성을 요청했을 뿐인데 말이지요. 수도원장은 '살아있는 성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앙심이 깊어서,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거라 여겼다는 추리는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마지막에 사이키가 스코냐에게 물었던, '그렇다면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는 그럼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답도 인상적이었어요. 리자베타 수녀는 부활했기 때문에 유해가 사라졌다는데.... 와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가지 이해가 안되었던건, 수도원장은 시성을 위해 스코냐가 리자베타의 유해 대역을 소화하는걸 묵인했던게 분명합니다. 이는 시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수도원장의 말과는 배치됩니다. 스코냐가 우리디미르 사제와 사이키가 조사를 나왔을 때 급작스럽게 대역을 소화했다는 묘사도 없고요. 다른 수녀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입을 다문건지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이야기였다는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했고요.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싶네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외침>>
사이키는 의료 봉사를 하는 영국인 의사 애슐리 카슨과 함께 아마존 오지의 데뮤니 촌락으로 향했다. 잡지 취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을은 에볼라 바이러스와 비슷한 전염병으로 거의 절멸의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살아있는 사람 중 감염되지 않은건 장로, 전사 아리밀리, 통역 역할을 하는 다니 정도였다. 그러나 외부로 도움을 청하려다 실패하고 돌아온 사이키는 그나마의 생존자들도 누군가 살해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누가 곧 죽을 사람들을 일부러 살해했을까?
아마존 오지에서의 에볼라 바이러스 유행에 대한 묘사는 빼어나며, 사이키와 애슐리가 서로가 범인이라며 펼치는 추리 대결이 특히 볼만했던 작품입니다. 에볼라는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니 편하게 죽게 도와주었을거다, 그들은 보균자가 될 수 있으니 화를 없애기 위해 먼저 제거했을거라는 동기에 대한 각자의 주장이 설득력이 높은 덕분입니다. 사이키가 챙겼던 비옷 등 앞서 소개되었던 정보를 토대로 펼치는 추리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정작 진상은 황당했습니다. 범인은 전사 아리밀리였어요. 동기는 데무니 마을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다는건 굉장히 중요했고, 데무니 마을만이 유일한 세계였기에 마지막 생존자는 세계의 마지막 역사에 남는, 최고의 영예라는 원주민의 세계관 때문이었고요. 이는 다니 등 다른 원주민들의 언행을 통해 살짝 드러나기는 하나, 추리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이렇게 일반 상식으로는 떠올릴 수 없는, 다른 세계관으로 동기를 해석해야 한다면, 반칙인 셈이라 추리 소설로는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기도>>
찾아가기도 힘든 밀림 속, 높이 10m되는 바위산에 천연 동굴을 파 낸 '고아.도아', 우리말로 '기도의 동굴' 이라는 곳이 있다. 동굴 안 쪽 벽에는 모두 이런저런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뒷 쪽 출구는 바다로 인접한 낭떠러지에 위치했다. 이런 동굴이 '기도의 동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나'는 친구 모리노가 낸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이런 저런 조사에 나서는데...
동굴은 감옥이었다는게 '나'의 답이었습니다. 고위층을 유배했고, 그들을 출구를 통해 자살하게끔 유도했다, 동굴 안 조각들은 그들이 새긴 절망과 저주였다는겁니다.
그러나 '나'가 동티모르에서 폭동에 휩싸인 뒤, 측두엽성 기억상실에 빠진 사이키라는게 밝혀지고, 이 답은 사이키 자신의 처지를 빗댄거라는게 드러납니다. 사이키가 멀쩡했을 때, 그는 동굴은 말 그대로 기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었거든요. 물고기를 잡으러 나간 배의 무사 귀환을 바라기 위한 장소로 바다가 보이는 출구를 만들었고, 동굴 안에 이런저런 기도 목적의 그림을 새겼다고 추리했었으니까요.
정답은 없지만 이러한 '기도의 동굴' 명칭에 대한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현재 사이키 상태와 연결되어 다른 답이 나온다는 구성도 좋았고요.
그런데 기억상실 설정은 다소 뜬금없는 편입니다. 전체 단편집 맥락과 잘 맞지도 않았고요. 다른 단편들은 여행, 그리고 그곳에서의 사건으로 삶과 생존, 인생과 사랑 등에 대해 생각할거리를 던져주지만, 이 이야기는 여행과는 무관하며, 내용도 자아성찰에 가까운 탓입니다. 차라리 여행지에서 물리적인 감금 상태에 놓였다고 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 설정에서 빚어지는 다소 모호한 1인칭 시점 묘사도 그닥이었고요.
책 소개를 보니 '세계 속에 넘치는 이야기들, 그 신비하면서도 미스터리한 경험들을 전달하고자 하는 '여행자'의 바람은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전체 에피소드를 하나로 아우르는 강력한 구심점 역할을 한다.'는데 무슨 말인지 당쵀 모르겠네요.
하여튼, 별점은 2.5점입니다.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치고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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