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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0

64 - 요코야마 히데오 / 최고은 : 별점 3.5점

64 - 8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사부에서 홍보담당관으로 발령난 미카미는 교통사고 가해자 익명 보도건 때문에 기자단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허나 경찰총장의 방문이 예정되어 어느 때보다 기자단의 역할, 홍보담당관의 역할이 중요해져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 경찰총장의 방문이 사실은 형사부장을 캐리어로 교체하려는 의도라는 걸 알아챘다. 형사의 피가 흐르는 탓에 이러한 음모에 맞서지만, 딸의 가출 후 조사를 도와준 경무부장 아카마와 알력다툼이 벌어지던 와중에 14년 전에 벌어졌던 유괴사건, 속칭 64 사건을 쏙 빼닮은 사건이 발생하는데...

경찰이라는 조직과 그 조직에서 겉돌게 되는, 그러나 천상 경찰일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경찰 소설입니다.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는 이와 유사하게 조직과 개인의 갈등이 주요 소재인, 경찰이 등장하는 일련의 시리즈로 잘 알려진 유명 작가지요. 제가 리뷰를 쓴 작품도 제법 됩니다.

이 작품은 거의 700페이지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분량에 걸맞게 여러 가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데,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미카미의 딸 가출 사건
  • 14년 전에 벌어져 아직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채 시효가 코앞으로 다가온 유괴살인사건 64
  • "고다 메모"라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64사건 당시 일어났던 형사부의 치부
  • 주변 인물들에게 걸려온 장난전화
  • 형사부장을 캐리어로 교체하려는 본청 / 경무부의 음모와 이에 맞서는 형사부
  • 기자단과 홍보실의 다툼
  • 메사키 가스미 유괴사건

이러한 사건들이 64사건의 범인 체포라는 큰 주제로 묶이는데, 뭐 하나 허투루 진행되는 것이 없고 이야기 하나가 완결되면 또다시 위기가 닥치는 연재소설 같은 구성을 갖추고 있어서 흡입력이 대단합니다. 그야말로 지하철에서 읽다 보면 내릴 정거장을 깜빡해서 지나치게 만들정도로요(저는 한 정거장 지나쳤습니다).

경찰 출신이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현실감 넘치는 묘사도 여전합니다. 경찰 내 복잡한 조직 구성 및 조직 간 역할 관계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작품이 있을까 싶네요. 비교할만한 "제 3의 시효"역시 같은 작가 작품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경찰에 대한 깊은 내공이 다시금 느껴집니다.
또 법의관이나 형사가 주인공인 작품은 많이 있지만, 이 작품처럼 홍보담당관이 주인공인 작품은 처음이라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관련된 디테일도 대단하고요. 경찰 담당 기자가 나오는 오시마 야스이치의 "특종 사건현장"과 여러모로 비교되는데, 만화에서는 기자와 경찰이 서로 협력 관계로 공생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이 작품에서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모습으로 주로 그려진다는 차이가 크게 다가옵니다.

경찰이라는 무대 설정만이 특이한 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제법 괜찮습니다. 미카미가 "고다 메모"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수사 과정의 디테일도 볼거리이지만, 64사건에서 범인이 몸값 회수에 성공하는 트릭도 괜찮습니다. 유괴범이 범행에 성공한다는 전개의 작품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64사건의 피해자 아마미야가 유괴범의 목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현 내의 사람들에게 전화번호부 순서대로 전화를 한다는 진상이 백미입니다. 이 설정에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아이디어였어요. 아-이-우-에-오 순으로 이어진다는 트릭적인 요소도 충분히 설득력 있을 뿐더러, 딸을 잃고 남은 게 없는 아버지의 절절함이 전해지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사고 당시 실수의 충격으로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버린 히요시가 자신의 경력(NTT 직원)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수사를 벌인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의외의 진상이라 더욱 놀랐습니다.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미카미의 딸 아유미가 어떻게 되었는지, 메사키가 정말로 64의 진범인지(먹어버린 메모지에 쓰인 글귀는 무엇인지), 고다 메모를 둘러싼 형사부의 치부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결국 하나도 정리되지 않고 끝납니다. 이러한 것들을 미카미가 짊어지고 끝까지 책임지겠구나 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는데 무척 세련되면서도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가장 중요한 메사키 가스미 유괴사건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메사키가 경찰에 신고했으리라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메사키를 경찰에게 넘겨준다는 일련의 행동은 수사 지휘관 마쓰오카가 메사키가 64사건의 범인임을 눈치채고 모든 진상을 파악했으리라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솔직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이런 번잡하고 불편한, 그리고 범죄에 가까운 사건을 벌이느니 청장이 방문하기로 했을 때 청장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게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겁니다. 대형 범죄를 저지른 메사키가 같은 현에서 계속 살아왔다는 것도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고요.

그 외에도 경무부와 형사부의 갈등 관계를 만드는 후타와타리가 고다 메모를 들먹이며 형사부를 들쑤시는 행동의 저의가 조직을 지키기 위한 선의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냥 소문만 흘리는 게 훨씬 간단했을 테니까요. 이는 이야기를 번잡스럽게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여경 미쿠모도 왜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얼굴"의 미즈호를 객관적으로 그린 듯한, 여경이지만 일 욕심 있고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인물인데 이야기에서 별 영향을 주지도 않고, 작품 내에서 뚜렷이 성장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 탓입니다. 그냥 얼굴마담에 불과해서 아니 나오니만 못했습니다.

그래도 문학적 성취와 대중소설의 재미, 추리적 완성도도 두루 갖춘 좋은 작품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재미와 함께 유괴라는 범죄의 비정함,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 등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으니까요. 너무 길다 싶긴 하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호평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등장하는 경찰 수사,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아버지 얼굴과 똑같은 얼굴로 생겼다고 좌절하여 가출까지 하다니... 저 역시 딸아이 아버지일 뿐더러 딸아이가 저하고 똑같이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는지라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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