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 ![]() 존 엘리스 지음, 정병선 옮김/마티 |
1차대전의 참호를 중심 전선과 그곳에서의 병사들 생활을 디테일하게 설명하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입니다.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의 전투나 전황은 전혀 설명되지 않고, 오로지 생활상에 초점을 맞춘 독특함이 돋보이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난중일기"에서 역사의 흐름이나 전투의 향방, 결과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당시 조선 수군이 어떻게 살았는지만 소개되는 서적이랄까요?(이것도 나름 재미있겠네요)
목차는 1부 땅 속의 일상 / 2부 전투의 실상 / 3부 고향에서 온 편지 / 4부 금지된 우정 순서로,
1부 땅 속의 일상은 참호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어떤 참호들이 있었는지, 참호를 고통스럽게 만든 환경 요인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등을 통해 실제 참호에서의 생활을 설명해 줍니다. 개인적으로는 비가 왔을 때나 지하수가 솟아나는 최악의 상황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생지옥이 따로 없는데 어떻게 그런 곳에서 버틸 수 있었을지 정말 상상도 되지 않네요. 인간의 생명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2부 전투의 실상에서는 참호전이라는 전투의 참혹한 실상이 가감 없이 그대로 그려집니다. 특히나 현대전에 무지했던 지휘관들에 의해 자행된 '돌격'이라는 이름의 학살 행위가 핵심입니다. 오래전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 "갈리폴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왜 이러한 무모한 공격 명령에 저항하지 않고 병사들이 죽어갔는지에 대한 이유가 간략하게나마 설명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아울러 마지막 부분의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된 병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참 가슴 아픈 내용이었다고 생각되네요. 그러나 앞서 소개해드렸듯이 전황이나 전투의 결과를 전혀 설명해 주지 않는 점이 단점으로 다가왔습니다. 연합군이 이런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도(특히 여러 번 언급되는 "솜 전투" 등)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졌는데, 이 책만으로는 알 수가 없더라고요.
3부 고향에서 온 편지는 참혹한 전쟁 이야기에서 잠시 벗어나, 식사와 편지 배달에서 시작해 도박, 술, 성생활과 같은 일상과 유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쨌건 사람 사는 곳이었으니 뭔가 즐길 거리가 필요하고, 기본적인 욕구도 해소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죠. 이 중 성생활에 관련된 부분은 꽤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한 미국 병사의 편지에 쓰여 있었다는 "마룻바닥을 오래 봐둬야 할 거요. 내가 집에 돌아가면 천정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을 테니까."라는 말도 인상적이었지만, 우리의 "정신대"라는 아픈 과거사를 되새기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4부 금지된 우정은 양 세력이 나눈 인간적인 유대 관계와 이러한 관계가 일어난 배경이 된 참호전의 특성, 전선에서의 극심한 피로감, 전우애를 다루며 끝맺고 있습니다. 워낙에 참호가 가깝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생겼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 — 서로 아침 시간에는 공격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던가, 유명한 크리스마스 휴전 이야기 등 — 은 재미있기는 했지만, 앞부분과는 다르게 생활상이 크게 드러나는 내용은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1차대전에 관련된 다른 책을 함께 읽어야 가치가 배가되기에 약간 감점합니다만, 이러한 분야에 있어 독보적인 책임은 분명합니다. 특성상 광속 절판될 수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신경 써서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1차대전사를 읽은 뒤 이 책을 읽는다면, 거시적 관점에서 큰 흐름을 파악한 후 그 큰 흐름에 매몰된 개개의 병사들의 힘들었던 삶을 디테일하게 조망하는 흐름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 나온 김에 얼마 전 50%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한 "1차세계대전사"를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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